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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즈마, 저기 봐. 기린이야.”


아카아시가 손끝으로 높은 곳에 매달린 풀을 뜯어먹고 있는 기린을 가리켰다. 너른 울타리 너머에서 노란색과 갈색으로 무늬를 만든 기린은 아무 관심 없는 얼굴로 무심히 풀만 뜯어 먹을 뿐이었다. 기린을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아카아시는 작게 웃고는 아이를 가뿐하게 안아들었다. 카즈마의 입에서 즐거운 경악성이 낮게 터져 나왔다. 


평일 오후였기에 동물원은 한산했다. 아카아시는 아이의 손을 잡고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햇살은 따사롭고 공기는 쾌청했다. 아주 오랜만의 여유인 것 같았다. 물리적으로도 그러했지만 마음이 더욱 그랬다. 


“카즈마, 아이스크림 먹을래?”


아카아시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가게를 가리켰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는 가게였다. 아이는 괜찮다고 어물거렸지만 아카아시가 거침없이 아이를 끌고 갔다. 몸을 숙여 눈을 마주한다. 무슨 맛 먹고 싶으냐는 질문에 아이는 작게 입을 오물오물하다가 초코 맛이요, 하고 대답했다. 


“소프트콘 초콜릿으로 두 개요.”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씩 손에 쥐고 걸음을 옮긴다. 눈앞으로 비눗방울이 사르르 흩어졌다. 


저녁 무렵에는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연신 들뜬 표정이었다. 유원지나 동물원을 다녀왔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아카아시와 시간을 보낸다는 것으로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 바쁘긴 했지.’


아카아시는 아이를 앞에 앉혀두고 머리를 말려주며 생각했다. 쉼 없이 달려온 시간이었다. 아이를 두고 그러면 안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직장을 옮긴다는 건 생각만큼 선뜻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고, 그건 아이가 있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게 그런 것들이 아카아시의 현실이 되었다. 그 속에서 아카아시는 그 나름대로 그것 모두를 소화시키고 있었다. 


보쿠토의 현실도 이렇게 바빴을 것이라고. 그는 닿지 못했던 보쿠토의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이번 한 해 바쁘던 것에 겨우 익숙해지면 다음 해는 더 바빠지는 것이 아카아시의 현실이었듯이, 그래서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을 내는 것이 매번 어려운 게 아카아시의 현실이었듯이, 보쿠토도 그랬을 것이라고. 졸업하고 곧장 바빠졌고 그 다음해엔 더 바빠져서 연락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게 아니라면, 약속도 맹세도 남은 것 없는 사이에 흐릿해져가는 인연에 집착하는 것은 그만 두는 게 옳다고. 


그렇게 차근히 하나하나 천천히 느리게나마 찢어 삼키고 있었다.


‘거의 다 됐다 했더니 불쑥 본인이 나타났지만.’


이제 정말로 마주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그런 그의 마음을 시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떡하니 본인이 나타났다. 폭풍처럼 몰아붙여서는 10년 전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되감기는 시간 축에 적응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건 아카아시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 났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아이의 머리를 마저 말려주었다. 다 되었다고 드라이어의 전원을 내리자 아이가 목욕의 기미가 남아 상기된 얼굴로 그를 돌아본다. 근래에 본 얼굴 중에 눈에 띄게 밝은 모습이었다.


“카즈마.”

“네?”

“이제 계속 일찍 올 거야. 이번 주처럼 일찍은 아니겠지만. 앞으론 매일 매일 같이 저녁 먹자.”

“아……?”


아이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본다. 그 눈동자가 누군가와 쏙 닮아 있어서 아카아시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그 때 아이가 실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뱉어냈다.


“그……그럼 이제 같이 살아요?”

“응? 같이 살다니?”

“그……사람이랑…….”


아이가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아이의 얼굴은 언제 상기되어 있었냐는 듯이 희게 질린 채였다. 눈동자가 흔들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 사람이라니 누구……설마 보쿠토 선배 말하는 거야?”


아이는 말도 잇지 못하고 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카아시는 도대체 어쩌다가 아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유추해보려다가 그만두고는 서둘러 고개를 저어주었다.


“아냐, 그런 거.”

“……아니……에요?”

“응, 아니야. 그 사람은 잠깐……. 잠깐 일이 있어서, 아는 사이라 며칠 있다 가라고 했던 거지. 우리가 왜 그 사람이랑 같이 살아.”

“……정말요?”

“그럼.”


아이는 겨우 안도한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아이를 번쩍 끌어안고는 그 머리를 쓰다듬고 조금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카즈마, 손님 있어서 사실 싫었구나.”

“아, 아니에요. 그냥……그냥 여쭤봤어요!”


아이가 당황해서는 귀까지 빨개져 어쩔 줄을 모른다. 아이는 정말 그런 게 아니었다고 연거푸 말하다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정말 같이 사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아카아시는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이의 눈매가 풀리는가 싶더니 나오는 작은 한숨은 분명 안도의 한숨이다. 그게 그렇게 걱정이 됐을까, 아카아시는 언뜻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더는 내색하지 않고 아이를 놓아주었다. 


방으로 들어가던 아이가 다시 아카아시가 있는 거실로 조르르 돌아와, 아카아시를 한 번 꼭 끌어안고 돌아갔다. 아카아시는 놀란 듯이 눈을 깜박이다가 그만 미소 짓고 말았다. 




*




“아, 하나는 코코아로. 마시멜로는 띄워서. 하나는 드라이마티니에 레몬 올린 걸로.”

“전 드라이 마티니 안 마시는데요.”

“내 거야.”

“그럼 코코아는요?”

“네 거지.”


쿠로오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아카아시를 바라본다. 아카아시는 기가 막혀서 다시 바텐더를 부르려고 했지만 쿠로오가 그 손을 잡아 내렸다.


“며칠 전에야 병석에서 일어난 사람이 어딜 감히 술을 마셔.”

“술집으로 불러낸 사람이 누군데요.”

“네가 이 시간이 아니면 카즈마랑 있어야 한다고 안 된다고 하니까 그렇지!”


쿠로오는 되레 자신이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아카아시는 방금 전 그가 바텐더에게 읊었던 주문을 떠올리곤 탄식을 삼켰다. 핫초콜렛도 아니고 코코아, 그 단어가 주는 어감에서 쿠로오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눈에 훤했다. 심지어 마시멜로까지.


‘정말 완벽하군.’

“보쿠토, 돌아갔다며.”


바텐더가 작고 하얀 도기그릇에 작은 프렛첼을 담아 내주었다. 쿠로오는 그것을 아카아시 쪽에 가깝게 조금 더 밀어주며 입을 열었다. 아카아시는 과자를 손에 쥔 채, 다만 입에는 넣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미디어도 조용해 졌잖아요. 가실 때 됐죠.” 

“무슨 저승길 보내듯 말하냐.”


애먼 누명에 아카아시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쿠로오는 말을 바꿔주지 않았다. 


“허전하겠네~!”

“허전은 무슨……. 손님과 생선은 3일도 길다고 했습니다.”

“냉정하긴. 든 사람 자리는 몰라도 난 사람 자리는 안다던데.”

“그런가요.”


아카아시가 무덤덤하게 대꾸하는 사이에 음료가 나왔다. 아카아시는 자신 앞에 놓인 고양이 모양 마시멜로우가 둥둥 떠 있는 코코아를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지만 쿠로오는 킬킬거리기만 할 뿐, 음료를 바꿔주지는 않았다. 


“그거 맛있다. 여기 인기 메뉴야.”


아카아시는 쿠로오를 흘겨보았다. 바텐더는 묵묵히 잔을 닦고 있었다. 골목 깊은 곳에 있어서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쳤던 고즈넉한 바였다. 손님도 많지 않았다. 조명은 깊은 오렌지 빛이어서 어둠과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아카아시는 바의 테이블에 팔을 괴고서 머들러 끝으로 고양이 모양 마시멜로우의 귀 부분을 쿡쿡 찔렀다.


“이직하기로 했어요. 들으셨는지도 모르겠지만.”

“못 들었어. 내가 누구한테 듣냐. 어쨌든 잘 됐네. 좀 더 시간여유 있는 데로 가는 거지?”

“네. 카즈마하고 더 함께 있을 수 있겠죠.”

“애 키우는 게 혼자서는 아무래도, 쉬운 일은 아니지…….”

“…….”


아카아시는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와 함께 살겠다고 처음으로 말했던 날도 쿠로오는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혼자서 키우게?


“뭐, 결혼이라도 할까요?”

“컥, 크헙, 쿨럭, 쿨럭쿨럭……!”


처음엔 눈만 둥그렇게 떴던 쿠로오가 히끅하고 술을 넘기다 격렬한 기침을 시작한다. 펍의 모두가 한 번씩 뒤를 돌아본다. 바텐더가 지나가며 티슈를 내놓을 뿐이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며 쿠로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겨우 진정한 쿠로오가 황천 갔다 왔다며 크게 숨을 몰아쉬고 나서 눈물을 닦아내며 아카아시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결혼을 해? 누구랑?”

“뭘 누구랑입니까……. 당연히 농담이지.”


이 사람도 어딘가 이상해졌다, 아카아시는 그런 생각을 숨김없이 눈동자에 담아 쿠로오를 바라보았고 쿠로오는 또 머쓱하고 당황한 얼굴이 되어 헛기침을 하다가 격하게 기침한 기관지가 아프다며 목을 움켜쥐었다. 


“아, 아니. 나는 네가 그러니까……놀라서 그러지. 생전 그런 말 안 하던 애가 갑자기 결혼 얘기를 하니까. 혹시 뭐 진짜 누구 할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해서…….”

“제가 사람 만날 시간이나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더 놀랐다고…….”


정말 크게 놀라기는 했는지 쿠로오의 안색이 살짝 희게 떠 있다. 아카아시는 기꺼운 마음으로 코코아를 입에 댔다.


“진짜 아니지?”

“아니라니까요.”

“나랑 대화하고 결혼할 마음먹은 것도 아니지?”

“아니에요. 사람도 없다니까…….”

“사람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결혼해야겠다고 그런 각오한 것도 아니지?”

“아니래도, 진짜……. 그리고 사람이 생겨도 한 동안은 아니에요.”

“에?”


쿠로오가 눈을 깜박거리며 아카아시를 쳐다보았다. 아카아시는 이 고양이 모양 마시멜로우를 어디서 구입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카즈마가 생각보다……. 좀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요. 집에 누구 들어오고 이러는 거. 아빠 뺏겼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고.”

“아……아.”

“이제 회사도 옮겨서 좀 일찍 퇴근하고 그럴 것 같다고 하니까 아이가 표정이 변해서는 혹시 보쿠토 선배랑 같이 사는 거냐고 하더라고요. 아직 애는 애인가 봐요.”

“에…….”


아카아시는 오늘 밤에 보았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곤 미소 지었다. 괜히 놀라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런 면을 보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먼저였다. 일찍부터 철이 들어 조르는 게 없기만 하다 보니 더욱 그랬다. 


쿠로오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마티니 잔을 기울였다 바로 했다 하기를 반복했다. “쿠로오 선배?” 아카아시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불렀을 때였다. 


그들의 등 뒤, 펍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문에 달려있는 종에서 낮고 은은한 소리가 한 번 울린다. 낯선 손님이 들어올 때 조건반사적으로 돌아보는 이들 몇몇이 전부, 종소리가 가라앉고 가게는 다시 평상시의 상태로 돌아간다. 


낯선 손님은 아카아시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드카 마티니 한 잔.”


헐겁고 기장이 긴 니트 카디건으로 몸을 휘감은 여자였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마티니를 주문하는 목소리는 또렷하고 선명하게 들렸다. 선글라스로 눈매를 가렸지만 턱선만으로도 미모를 짐작케 할 만한 여자였다. 바텐더가 마티니를 만들러 들어갔을 때 여자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는 아카아시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진짜 살아있는 인간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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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막의 웹공개분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동안 봐주신 분들, 예쁜 말씀 남겨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이후로 완결까지는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앞으로 있을 5월의 서울코믹월드와 보쿠아카온리전에서 찾아뵙겠습니다. 


자세한 인포는 이번주 중으로 업데이트됩니다^-^! 






보조석의 문을 열고 안에 털썩 앉는다. 코노하는 홀더에 놓여있던 병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한 모금 넘긴 다음 입을 열었다.


“이젠 다 나았고, 저녁도 배달 될 거라고 말 해줬고, 애는 자고 있고, 죽도 먹였고, 이직도 곧 한다고 하고.”

“…….”

“이직은 두 달 뒤라더라. 출근은 이번 달까지만 한다고 하고.”

“…….”

“이게 뭐 별거라고, 직접 물어보면 되지.”


코노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핸들에 몸을 기대고 있는 장신의 남자가 있다. 보쿠토였다. 보쿠토가 어색한 표정으로 입술을 꽉 말았다. 


“그……. 너무 참견하는 것 같을까봐.”

“참견……. 그걸 전부 다 사다놓고 이제 와서 참견이라는 건 좀.”

“아 코노하!”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베개까지 사놔? 남들이 들으면 유난이라고 욕한다고, 인마.”

“좋은 베개라라니까 샀지…….”

“어디서 얼마주고 샀는데?”

“요기 앞에 백화점에서……. 6만 엔인가?”


보쿠토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웅얼거렸고 코노하는 심한 욕을 입 안으로 중얼거리곤 짜증과 건성이 섞인 목소리로 회사 건물이 있는 길목을 읊조렸다. 


“거기 뭐 어쩌라고?”

“아 빨리 출발하라고! 너 대신해서 내가 다 둘러대 줬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할 거 아냐!”

“아, 알았다! 간다, 가!”


보쿠토가 빽 소리치고는 안전벨트를 매고서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린다. 코노하는 차창에 기대어 끊임없이 험한 말을 중얼거렸다. 한참이나 그러다가 목이 타는지 홀더에 내려놓았던 음료를 다시 들이킨 코노하가 불쑥 보쿠토에게 물었다.


“의사가 욕은 안 하디?”

“몰라.”

“그래, 들리기나 했겠냐. ……그래서 이젠 뭐 어떡할 건데?”

“뭘 어떡해.”

“아카아시랑 말야. 갑자기 연락할 마음먹었던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코노하는 보쿠토의 옆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명한 선을 그리는 얼굴, 또렷한 눈매, 이제는 세월이 흘러 굳어진 턱선. 학창시절에는 지금보단 앳되었겠지, 코노하는 이젠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었다. 


“일단 나도 짐 정리 집 정리 다 하고.”

“너 이사하게?”

“응, 다른 데로.”

“……다른 데 어디?”

“크흠, 일단 다른 데로 이사할거야. 아파, 아파트 같은 데로.” 

“아파트…….” 


코노하는 흰 눈을 뜨고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의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결단력도 행동력도 재력도 체력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지금까지 참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기는 하였다. 


“진작 좀 하지. 10년이나 걸려서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내, 내가 안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 아니야!”


보쿠토가 빽 소리친다. 코노하는 창틀에 팔을 괴고서 아주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모습을 관람했다. 어느 순간부터 놀려도 당황하지 않고 당황해도 꺾이지 않게 되었던 친구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은 고등학교 시절로 끝이라는 듯이 더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며 사람이 변하고 성장하듯이 보쿠토 그도 그런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주인을 만날 날까지 봉인해 두었던 것뿐이었다. 그것들이 이제 다시 풀리고 있었다.


“안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면 하고 싶은 걸 참았냐?”

“못 했어.”

“…….”

“하고 싶었는데 못 했어. 하면 큰일 날까봐…….”


보쿠토는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쥐고 있는 핸들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주보면 가슴이 떨리고 멀어지면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아픈 감각, 그게 무엇일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심장에서부터 허튼 소리가 튀어나갈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 떨림이 가라앉으면 만나자. 실수하지 않게, 멀어지지 않게. 이 떨림이 가라앉고 나면, 가라앉고 나면……. 


그 떨림이 가라앉을 날은 영원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10년이 걸렸다.

 

코노하는 보쿠토를 바라보던 시선을 바깥쪽으로 돌렸다. 보쿠토가 운전하는 차는 부드럽게 미끄러져 코노하의 회사 앞에 도달했다. 마침내 코노하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서 차에서 내리려 안전벨트의 걸쇠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카즈마가 나를 너무 싫어해! 어떡해?”

“카즈마……? 아카아시 애가?”

“완전 무지하게 싫어해! 뭐가 어디부터 잘못됐지?”

“뭐, 뭐가 어디부터라니, 야! 상식적으로 생각을 좀 해! 좋아할 리가 있겠냐!?”

“왜!?”

“아카아시는 집에 친구고 직장 동료고 들인 적이 없어! 애 때문에! 그런데 네놈이 대뜸 쳐들어갔는데 그럼 그걸 보고 카즈마가 처음 보는 삼촌이라고 배시시 좋아하겠어!?”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어떡해야 좋아해주지?”

“……카즈마하고 친해져서 뭐 어쩌게?”


차 안의 공기가 달아오르다 도로 식어간다. 코노하는 한 손으로는 보쿠토가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안전벨트를 꽉 쥐고서 보쿠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카아시하고 사이좋게 지낼 거면 그냥 아카아시랑 사이좋게 지내면 되잖아. 카즈마하고까지 사이좋아질 필요가 있냐?”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긴장이 내려앉았다. 코노하는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의 금빛 눈동자가 서리처럼 흔들린다. 마침내 코노하가 다시 쏘아붙이려던 순간이었다. 


“이, 있어!”

“!”


코노하는 목소리를 다시 죽였다. 보쿠토의 금빛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있어!”

“뭔데.”


코노하는 보쿠토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면 그걸 기회삼아 그대로 몰아세울 참이었다. 


아카아시와 보쿠토, 두 사람은 함께 한 시간보다 서로 떨어져있었던 시간이 더 길었고 그 떨어져있었던 시간동안 제각기 이룬 것이 있었다. 이제 와서 함께 한다는 건 그간에 이룬 모든 것들을 담보로 한다. 어중간한 마음이라면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나을 거였다. 10년을 서로 없이 지낸 사이 아니던가. 앞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계속 만나야 해.”

“그러니까 아카아시만 만나면 되는…….”

“카즈마는 아카아시 아이잖아.”


보쿠토의 금빛 눈이 마음을 되새김질 하듯이 단단해지며 그를 바라본다. 코노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보쿠토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나 이제 아카아시랑 계속 같이 있을 거란 말이야!”

“…….”

“그러니까 카즈마랑 나, 사이 좋아져야해. 카즈마가 싫어하면 아카아시도 싫어할 거니까.”

“이…….”

“이?”


코노하가 무언가 묘수를 알려줄 것이라 생각했는지 보쿠토의 얼굴에 반짝 화색이 돈다. 코노하의 얼굴이 점점 비틀어진다. 그러다 코노하가 보쿠토의 어깨를 퍽 소리 나게 후려쳤다. 


“이 개자식아!”

“아, 아파! 코노하!”

“애를 다른 사람 환심 사는 데에 쓰려고 드는데 그걸 애가 잘도 좋아라 하겠다! 카즈마가 어리다고 그걸 모를 거 같아?”


코노하는 열불이 치솟아 넥타이를 죽 잡아 당겼다. 


“시설에서도 눈칫밥만 먹다가 겨우 아카아시 만나서 지금도 아카아시 눈 밖에 날까봐 전전긍긍하는 애한테 무…….”

“흥, 그렇단 말이지?”

“보쿠토 코타로! 너 진짜!”

“그럼 나랑 똑같잖아!”

“……뭐?”


보쿠토가 핸들을 세게 쥔 채 정면을 노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코노하는 넥타이를 잡아끌던 손을 내렸다. 눈만 깜박이며 보쿠토를 바라본다. 보쿠토가 겨우 코노하를 돌아보는데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보쿠토는 눈을 꾹 감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카아시 눈 밖에 날까봐 전전긍긍 하는 거……. 나랑 똑같잖아.”

“…….”

“그러니까 괜찮아. 카즈마하고 친해질 수 있어!”

“보쿠토, 너…….”

“요즘 유행하는 장난감 뭐야?”

“……제기랄, 이따 조카한테 물어보고 알려줄게.”


그렇게 겨우 대답한 코노하는 몸에서 힘을 쭉 배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탈력한 느낌에 눈앞이 아찔했다. 코노하는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털어내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넌 그런 것보단 공놀이라도 같이 해 주는 게 낫지 않겠냐.”

“그럴까?” 


보쿠토가 또 금방 웃는다. 코노하는 알아서 하라는 말만 남겨두고 차에서 내려섰다. 보쿠토의 차는 코노하가 내리자마자 다시 출발해 곧 코노하의 눈에서 사라졌다.


코노하는 구겨진 넥타이를 천천히 다시 정돈했다. 곧 탁 터지듯 한숨이 쏟아진다. 코노하는 허리에 손을 얹고서 자신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와서 함께 한다는 건 그간에 이룬 것들을 담보로 한다. 보쿠토는 그럴 마음인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의 하나가 보쿠토의 이혼이라는 것을 코노하는 이제야 인식했다. 이혼을 했기 때문에 아카아시에게 찾아간 것이 아니라 아카아시에게 찾아가기 위해서 이혼을 한 것이다. 


‘왜 이제야…….’


학창시절, 보쿠토와 아카아시는 서로의 소유였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었다. 코노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이따금 후배들을 돌보아주었는데, 그럴 때면 보쿠토는 그 모습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보쿠토 코타로가 고요 속에 머물러 있는 몇 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서서, 아카아시가 웃으며 때로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후배와 함께 있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 때의 보쿠토는 또렷하다 못해 매서운 인상을 주는 눈매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고 그 끝에서 달콤한 어떤 것이 묻어났다. 다른 무엇을 볼 때에도 그런 표정은 한 일이 없었다. 코노하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별이 쏟아지던 여름밤 보쿠토가 그렇게 아카아시를 바라보던 날이 있었다. 왠지 곁에 선 코노하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어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렸고 문득 보쿠토가 코노하를 돌아보며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코노하, 코노하.

—왜.


이쪽이 되레 어쩔 줄 모를 만큼 달콤하게 흐트러진 얼굴로 그를 부른다. 코노하는 괜히 자신이 부끄러워서 퉁명스레 대꾸했다. 보쿠토가 자신의 심장을 꾹 눌렀다.


—가슴이 너무 떨려, 어떡해……?


아, 그건 사랑이었다. 무슨 말도 해줄 필요가 없었다. 동백은 빨간 색이고 하늘은 파란 색인 것처럼 그건 사랑이었다. 그 무엇도 증명할 필요 없이 분명한. 그건 사랑이었다. 


그랬는데 왜.









링거에서 수액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보쿠토는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침대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는 이미 곁의 작은 보조 침대에 뉘어 재운 차였다. 몸을 숙여 손에 입을 묻고도 시선은 침대로 향해 있다. 


아카아시는 줄곧 잠든 채였다. 중간에 한 번 살짝 정신이 들었는데 괜찮다며 도로 재웠더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 뒤로는 쭉 눈을 감고 있었다. 


혼자서, 계속. 


아이는 아카아시가 아플 때마다 언제나 그랬다고 했다. 아카아시가 아픈 저의 곁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여 그의 이마에 젖은 수건을 올려주고 오는 것이 전부였다고. 그저 닫힌 방문 밖에서 아카아시가 다 나아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다고. 


아이는 최선을 다하여 좋은 아들이 되고 싶었고 아카아시는 최선을 다하여 아이를 지키고 싶어 했다. 아카아시의 이런 시간들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진작 돌아왔을 것이다. 망설이고 고민할 여유도 없이 돌아왔을 것이다. 아픈 아카아시를 혼자 둔다는 건 그가 다음 생에도 선택하지 않을 여지였다. 


그런데 왜 돌아오지 못했더라. 


왜 그랬지. 


보쿠토가 천천히 몸을 숙여 손등에 이마를 묻을 때 차르르, 링거의 줄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으음…….”


천이 스치는 부드러운 소리 끝에 몸을 일으키는 것 같은 기척. 카즈마, 하고 작게 속삭이듯 불러보는 목소리. 그리고.


“……보쿠토 선배?”


고개를 들면 하룻밤 새에 수척한 얼굴의 아카아시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보쿠토는 입술을 떼지 못했다. 아카아시가 낮게 웃었다.


“도와주셨나 봐요. 고맙습니다.”


어린 아이가 대견한 일이라도 해낸 듯이 어여삐 여기는 것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보쿠토는 버럭 소리치고 싶었다. 이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할 일이야? 넌 아파서 내가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어떻게 병원까지 왔는지도 모르잖아. 아이는 널 걱정하느라 방 밖에서 울고 있었고 너는 그런 걸 알면 혼자 또 마음 아파서…….


“……너 몸 관리 똑바로 안 할래.”

“요즘 무리해서 그런가 봐요. 감기몸살 같은…….”

“감기 몸살이 기절해서 깨워도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러냐?”


듣는 사람이 움찔할 만큼 매섭게 목소리를 내어본다. 아카아시는 말을 멈추었지만 부드러운 표정은 여전했다. 떼를 쓰는 어린애를 마냥 귀여워하는 듯이 한정 없이 다정한 표정이었다. 결국 보쿠토도 더 언성을 높이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때서야 아카아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비도 왔었잖아요, 그 때 비도 맞고……. 그래서 그런가 봐요. 철야도 계속 했었고. 그러다가 일 끝나서 긴장이 풀리니까.”


어르고 달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가 일의 전후 관계를 몰라서 이러는 것이라는 양. 보쿠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또, 아카아시가 투정부리는 아이 보듯이 한다. 무어라 벌컥 언성을 높이고 싶어서 입을 열었다가도 그마저 어린애처럼 대할까 싶어 입을 다물게 된다. 무슨 말을 해야 알아줄지 알 수가 없어 입만 열었다 닫았다 하기 바빴다. 그리고 마침내 보쿠토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 사람들이 나 당황하는 거 처음 봤대.”

“……선배.”

“내가 이렇게 놀라고 그러는 거 처음 봤대. 나 그동안 안 그랬나봐. 그런 적이 없었나봐.”


사실은 알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 새로운 팀, 새로운 세터, 새로운 선배와 동기들을 만났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그 날부터 알게 되었다. 졸업 하고 첫 연습 경기 중에 몇 번 블로킹을 당했을 때, 무릎에 손을 대고서 어깨로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데 선배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웃는 얼굴이었다. 괜찮다는,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그 등에 닿는 손짓 한 번이 벼락을 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지난 2년 동안 해온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그 때 알았다. 보쿠토는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카아시 뿐이라고, 줄곧 정해두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싫다. 자신의 기분을 달래고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카아시가 아니면 싫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정말로 어찌할 수가 없어서 제멋대로 굴었던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굴 수 있어서 제멋대로 굴었던 것이다. 안온한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그 울타리의 이름은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정해두었다. 다른 이름은 싫다. 다른 누구도 싫다. 누군가가 울타리라며 팔을 벌리는 것도 싫다. 아카아시가 아니면 안 돼. 아카아시만이.


흔들리지 않으면, 무너지지 않으면, 그러면 그런 울타리는 필요하지 않다. 지난 10년 동안 보쿠토는 그런 식으로 견고해져갔다. 스파이크가 막혀도 동요하지 않게 되었다. 실수를 거듭할 때에도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 놀랄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았고 당황하지 않았다. 금방 기분이 처졌다 좋아졌다 하기 바쁜 어린애 같은 보쿠토 코타로, 그런 놀림은 고등학교 시절 동창들과 만날 때에나 듣는 먼 이야기가 되었고 이후에 만난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도리어 놀랐다. 


“선배가요? 그랬습니까.”

“……응.”


그리고 10년간 쌓아올린 담과 벽이 무너지는 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떨리는 손을 들고, 심호흡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하고, 몇 분이나 문 앞에 서서 손을 내렸다 들어 올렸다 하기를 거듭하다 마침내 초인종을 누른 그 순간. 문이 열린 그 때. 청록빛 눈동자와 마주한, 그 때. 같은 공간에 서 있다고 인지한 바로 그 때. 


함께 하지 못했던 10년의 세월은 사라지고 그 10년 동안 보쿠토가 바깥을 향해 쌓아 올려왔던 벽도 무너졌다. 없던 것이 되었다. 


“그야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


그래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놀랄 만큼 감정이 물결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그런 거라면 지금도 그래야 하잖아. 지금도 침착해야 하잖아. 아카아시 얼굴만 보면 어쩔 줄을 모르겠는 건 어째서야. 


“우리도 시간이 흘렀네요, 보쿠토 선배.”


보쿠토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카아시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난 뒤에 처음으로 보여주는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그가 졸업을 하던 날로 돌아간 것처럼 다정한 얼굴이었다. 


“이제 매스컴도 진정이 됐겠지요. 선배도 집 정리하셔야 할 게 있으실 테고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카즈마도 돌봐주셔서.”

“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선배도 돌아가요.”



*



보쿠토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높은 천장에 샹들리에가 아찔한 빛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후의 햇빛이 구름에 가려 채광이 좋은 실내도 어둑했다.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었다. 한동안 아무도 살지 않아 먼지 냄새가 났고 왠지 모르게 선뜩했다. 보쿠토는 한참이나 숨을 멈추고 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보쿠토가 무슨 말을 더 할 여지도 없이 아카아시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가셔야죠. 너 퇴원하는 것만 보고 가겠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꿀 먹은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보쿠토는 한참이나 뒤에야 겨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 동안 신세 많았다, 그 말에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이다가 별 말씀을요, 그렇게 대꾸했다. 그 뒤로 보쿠토는 곧장 자택으로 돌아왔다. 평일 낮이었던 데다가 인구 밀도가 낮은 곳이라 주택가는 한적했다. 


보쿠토는 멍하니 샹들리에만 한참을 바라보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바지 뒷주머니에 휴대전화가 깔려있다. 전화기를 꺼내들고 연락처를 뒤적거린다. 오래지 않아 전화번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어, 코노하.”

—보쿠토 너 이제 아카아…….

“아 나왔어! 나왔어, 지금 나왔어!”


보쿠토는 빽 소리치고는 소파에 몸을 파묻어 둥글게 말았다. 


—나왔다고? 너 그럼 지금은 어딘데?

“어디긴 어디야, 집이지.”

—너희 집?

“어.”


보쿠토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반대쪽으로 살짝 굴렸다. 다시 샹들리에가 보인다. 구름이 걷혔는지 볕이 들어 샹들리에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눈이 아프다. 보쿠토는 다시 몸을 굴렸다. 


“나는 나왔는데 아카아시 아프더라.”

—아이고, 또……. 가봐야겠네.

“또?”

—…….


단말기 너머는 잠깐 침묵이었다. 보쿠토는 고요한 호흡으로 재촉했고 잠깐의 시간이 지나 코노하가 대답했다.


—혼자 몸으로 애까지 키우는데 그럼 그게 멀쩡하겠냐. 고등학교 때 체력 긁어다 쓰는 것도 한계가 있지……. 큰 프로젝트 같은 거 하면 다 끝나고 꼭 앓아눕고 그랬어.

“……난 몰랐는데.”

—말을 안 하는데 누가 어떻게 아냐. 

“코노하 너는 알고 있었잖아!”

—나하고 네가 같냐?


보쿠토는 입을 다물었다. 고등학교 때엔 오히려 반대였다. 보쿠토 그가 아카아시에 대해 모르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아카아시에 대해서라면 보쿠토에게 물었고 보쿠토에 대해서라면 아카아시에게 물었다. 


—그거 알려주려고 전화 했어?

“……응.”

—그게 마음에 걸렸으면 그냥 네가 있어 주지 그랬냐.

“아카아시가 이제 그만 나가래.”

—언제부터 말 잘 들었다고, 나가란다고 또 나왔네.


원래 말 잘 들었거든, 보쿠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코노하가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고 보쿠토는 착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코노하가 너무 걱정 하지 말라는 얘기만 남겨놓고 전화를 끊는다. 보쿠토는 멍하니 소파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기만 했다. 


고등학교 때에도 아카아시가 열감기로 아팠던 적이 있었다. 부활동을 하겠다고 고집부리는 아카아시를 꺾은 건 보쿠토 그였지만, 아카아시를 세심히 보살펴 주었던 건 코노하와 다른 부원들이었다. 


‘달라진 게 없나.’


억지는 부려보았다. 그때처럼, 아카아시의 울타리 안에서. 고등학교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한 번 아니라는 말에 두 번 손을 내밀 수 없다는 것 정도다. 


그 때는 그럴 수 있었다. 아카아시의 바다색 눈동자는 다정한 빛으로 둥글게 뭉그러져서 그가 고집을 피우고 억지를 부리면 결국에는 져주었다. 그걸 보쿠토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마주하는 바다색 눈동자 위로는 얇은 빙하의 얼음이 덧씌워져, 감히 녹아줄 것이라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얼음을 깨뜨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얼음을 깨뜨려도 용서해 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물러선다. 아카아시가 아니라고 말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망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보쿠토는 한숨을 삼키고 다시 전화를 돌렸다. 


“어, 응. 나야. 이번에 지인이 입원했는데……. 응, 과로인 거 같고. 근데 혹시 모르니까 좀…….”


두 사람이 지낼 때에도 지나치게 넓었던 집이었다. 한 사람 몫의 짐이 모두 빠지고 혼자 남은 집은 너무 크고 높았다. 그 가운데에 보쿠토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만이 막힘없이 나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


벚꽃이 떨어졌다. 꽃잎이 흐드러지며 시야를 가렸다가 다시 바람이 불어 눈앞이 선명해진다. 보쿠토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지만 아카아시는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아카아시?

—선배, 졸업이시네요.


졸업? 보쿠토는 자신을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교복이었다. 회색 교복에 푸른 넥타이. 정갈하게 매여 있는 것이 보나마나 아카아시가 매어준 게 분명했다. 


—이제 다시는 못 보겠네요.


어째서 그런 말을 해? 보쿠토는 무어라 얘기를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졸업을 하면 다시는 못 봐? 왜? 


—그야, 

—보쿠토 선배가. 


내가? 나는 아카아시 없으면  안 되는데 내가 왜, 내가, 왜, 내가. 보쿠토가 눈을 끔벅이는데 그 사이에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옷이 교복이 아니라 검은 정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장 위에 꽃잎이 올라가 있다. 아카아시, 어깨에, 꽃이…….


—보쿠토 선배가 싫으니까요.


무슨 소리야. 내가 싫어? 정말이야? 나는 안 되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어? 왜 내가 싫어진 거야? 아카아시, 아카아시, 아카아시…….


“—헉!”


보쿠토는 눈을 번쩍 떴다. 등이 축축했다. 보쿠토는 눈을 찌르는 햇빛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려보니 거실 한가운데였다.


“으, 몇 시야.”


눈을 가늘게 뜨고 시계를 보자 아침 여덟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보쿠토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꽉 눌렀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숙취가 오는 것만 같았다.


‘무슨 꿈을 꿔도 그런.’


보쿠토는 뒤숭숭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다 일어난 것인데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세수라도 하는 편이 정신이 들 것 같다. 보쿠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한 번 돌리며 욕실 쪽으로 향하다 멈칫했다. 욕실 곁의 아카아시 침실 방문 앞에 아이가 서 있었다.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카즈마? 아직 학교 안 갔……카, 카즈마? 울어?”


터벅터벅 욕실로 향하던 보쿠토가 깜짝 놀라 아이에게 달려왔다. 보쿠토를 돌아보는 아이 얼굴에 눈물이 꽉 들어차 있었다. 


“카즈마? 무슨 일인데? 왜, 왜 그래. 왜 울어.”

“아, 아빠……. 아빠가 또…….”

“아빠? 아카아시? 아카아시가 왜?”


보쿠토가 놀라서 침실 문고리에 손을 쥐는데 아이가 그런 보쿠토의 팔을 붙잡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도 고개를 내젓는다.


“아, 안 돼요.”

“안 돼? 아카아시가 왜? 무슨 일인데?”

“아빠 아픈데……. 아플 땐 자꾸 들어오면 안 된다고……. 아빠가……그랬어서.”


보쿠토는 힘주지 않고 아이의 손을 떼어내곤 거침없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에서 바깥과는 다른 열기가 느껴진다. 보쿠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가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다.


아카아시는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이마 위에는 어설프게 적신 수건이 올라가있고 협탁 위에는 물이 가득 찬 컵이 놓여있다. 아이가 해 놓은 것인 듯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카즈마, 아카아시 언제부터 이랬어?”

“아침에……. 아침 인사 하러 들어갔는데…….”


보쿠토는 수건을 치우고 아카아시의 이마와 뺨을 쓸었다. 불덩이 같았다. 보쿠토가 그를 불러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입가는 하얗게 부르텄고 뺨은 헬쓱하다. 보쿠토는 밤새 이 방 문 한 번 열어볼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카즈마, 넌 일단 학교 가고. 아카아시는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아이가 고개를 젓는다.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보쿠토는 아이의 머리를 한 번 꾹 눌러주고는 다시 아카아시에게로 눈을 돌렸다. 앓는 소리도 없이 아카아시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보쿠토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다시 방 밖으로 나왔다. 외투를 챙겨 입고 휴대전화를 손에 쥔다. 보쿠토는 망설이지 않고 전화번호부를 뒤져 아직 눈에 익은 이름을 눌렀다. 벨은 몇 번 울리지 않았다. 보쿠토는 곧장 용건부터 말했다. 


“미우라. 사람이 아파. 병실 하나만.”


—여보세……. 네? 지, 지금요? 누가 아픈데요? 보쿠토 씨?


“지금 간다.”


보쿠토는 곧장 전화를 끊고는 자동차 열쇠를 챙겨들고 침실로 다시 향했다. 아이가 붙어서 훌쩍거리고 있다. 아카아시는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한 채였다. 보쿠토는 얇은 시트를 끌어내 아카아시의 몸 위에 덮고는 그대로 어깨와 다리 아래에 손을 넣고 안아들었다.


‘아.’


근육에 힘을 준 것이 무색하게 번쩍 들린다. 보쿠토는 방문을 나서면서도 아카아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매일 보는 얼굴이라도 말라붙어가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아카아시를 넘어뜨렸던 그날 밤에도 가볍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을 텐데, 눈앞에 스쳐간 호흡 한 줌에 혼이 팔려서. 


아카아시를 안아들고 주차장까지는 한달음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카아시를 뒷좌석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채운다. 아이가 옆에 자리 잡고 앉는다. 보쿠토는 그대로 운전석에 올라 핸들을 잡고 병원까지 차를 몰았다. 백미러로 뒷좌석을 계속 살폈지만 아카아시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 채였고 아이는 애써 울음만 넘기고 있었다. 


병원 앞에 도착하자 키리에나의 매니저 미우라가 나와 있다. 그 역시 어지간히도 놀란 눈치였지만 사람이 아픈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지체하는 것 없이 응급실 쪽으로 먼저 안내해주었다. 


응급실에서 아카아시를 돌보아주는 의사는 보쿠토가 아직 키리에나와 이혼하기 전, 그리고 선수로서 은퇴를 하기 전에 곧잘 신세를 지곤 했던 주치의였다. 


“뭐 자세한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보아하니 과로에 피로 누적으로 이렇게 된 것 같으니까 우선 수액부터 맞히고……. 혈액검사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다른 거는 환자분 정신이 들면 해 보고, 병실은 준비됐으니까 그쪽으로 지금 옮기고. 그런데…….”


의사의 눈길이 아카아시 곁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아이에게로 향한다. 그리고는 다시 보쿠토를 본다. 하지만 보쿠토는 의사의 눈길을 의식하지 못했다. 간호사가 링거를 맞히는 아카아시의 팔만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는 아이에 대해 더는 말하는 것 없이 헛기침했다. 


“그,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고 지금 너무 눈에 띄니까 일단 병실로 좀 옮기지요.”


키리에나의 매니저도 고개를 끄덕인다. 보쿠토는 움직이기 시작한 침상과 서둘러 걸음을 맞추려다가 아이를 발견하고는 한 걸음 늦추어 아이의 손을 잡았다. 평소였으면 한 번은 뿌리쳤을 아이가 이번만은 눈물에 잠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괜찮을 거래.”

“…….”


흐느끼는 소리도 없이 눈물이 아이의 뺨을 타고 흐른다. 그 뺨을 거칠게 문질러주었다. 눈물이 닦이며 붉은 자국이 남았다. 


“오늘은 아카아시 옆에 있을까, 우리 둘 다.”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인다. 바닥으로 투둑투둑 물방울이 생겼다. 보쿠토는 아이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아이를 다독이며 병실로 들어가기 직전에 누군가가 보쿠토를 덥석 붙잡았다. 바로 보쿠토의 전화 한 통에 달려와 병실과 의사를 수배하고 모든 것을 준비해놓았던 키리에나의 매니저 미우라였다. 


“자, 잠깐 얘기 좀. 보쿠토 씨.”

“어? 어……. 카즈마, 먼저 들어가 있어.”


아이는 보쿠토를 돌아보지도 않고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보쿠토는 병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매니저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 누굽니까? 둘 다.”

“둘?”

“그 지금 병실에 들어간 둘이요. 어른이랑 애랑…….”


보쿠토는 그제야 미우라를 돌아보았다. 매니저 미우라는 헬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카아시. 내…….”

“‘내’……?”

“내……내 고등학교 후배.”

“후배요? 그럼 그 애는요? 설마 보쿠…….”

“그 후배 애.”

“그……진짜요?”


매니저가 핏기 가신 얼굴로도 눈 끝에 주름을 만든 채 보쿠토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보쿠토는 매니저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그으러니까 저 애랑 보쿠토 씨하고는 뭐랄까 그 아무런 관련이……없는……? 진짜로 없는……?”

“무슨 관련?”


보쿠토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매니저를 바라본다. 매니저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꾸물거렸지만 결국 입 밖으로는 내놓지 못했다. 말을 꺼낸 건 보쿠토였다.


“어쨌든 오늘 고맙다.”


보쿠토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담백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에 매니저가 팟 하고 정신을 차렸다. 매니저는 이런 보쿠토의 모습이 훨씬 더 익숙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 아. 좀 놀라긴 했거든요. 사람이 아프다셔가지고. 큰일은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진짜로.”

“나도 정신이 없어서……. 달리 생각이 안 나더라.”

“보쿠토 씨 그렇게 당황하는 건 또 처음 봤네요. 나도 그래서 더 놀랬잖아요. 근데 그, 되게 많이 친한 후밴가 봐요. 그렇게 놀라시고.”

“어? 아……어, 그렇지…….”

“어떻게 그 동안에 얼굴 한 번도 못 본 사람이던데.”

“아, 그 좀 멀리 있고……그랬어. 영국, 아, 어. 영국 가 있었어.”

“아아,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시차적응 그런 거 겹쳤나보네.”


매니저가 혼자 알아서 문장을 끼워 맞춰 준다. 보쿠토는 속으로 진땀을 흘리면서도 그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러다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러운 침묵이 찾아들었을 때 보쿠토가 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 안즈한테는 오늘 일…….”

“아아, 안 그래도 안즈 씨한테서 방금 메세지 왔어요.”

“아.”

“저 갈 때도 무슨 큰일이냐고 걱정하셔가지고. 그냥 지인 분 과로이신 거 같다고 알려드렸더니 언제 한번 주먹밥이라도 싸들고 병문안 오겠다고…….”

“……아니야,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해.”

“뭐 두분 헤어지기는 했어도,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어도 자꾸 만나봤자 이상한 소문만 생기고 그렇잖아. 괜찮으니까 안 와도 돼.”


보쿠토는 진땀을 흘리는 표정으로 겨우 무마하고는 다시 한 번 매니저게 감사 인사와 사과를 전했다. 매니저는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에요! 하하, 살면서 보쿠토 씨 당황하는 얼굴을 다 보고. 그거면 됐죠.”


매니저는 멀리까지 나올 필요 없다며 후배 분 쾌유를 빈다는 말을 남겨두고 병원을 떠났다. 보쿠토는 매니저가 병동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것까지만 확인하고 아카아시가 잠들어있는 병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아카아시에게 큰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만으로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질 것 같다. 보쿠토는 마른 손에 얼굴을 묻고는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는 아카아시의 침실 문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아카아시가 저 아플 땐 들어오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고 했다. 이랬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열이 오르고 아파서, 행여나 아이에게 옮을까 싶어 나가 있으라 말하고서는 방에서 홀로 앓았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보쿠토는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에 잠깐 습기가 차고 숨이 떨렸다 가라앉는다. 보쿠토는 천천히 아카아시가 잠든 병실 문을 열었다. 













아이와 보쿠토는 서로 무릎을 꿇고서 마주보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아직 조금 젖은 채였지만 보쿠토도 아이도 신경쓰지 않았다. 보쿠토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카아시는 자. 1초만에 자더라.”

“…….”

“아카아시 내일 회사 안 나가도 되는 거 맞아?”


아이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내일도 아카아시 재우고……. 내일까지만 휴전 동맹이야. 어때.”


아이의 금빛 눈동자와 보쿠토의 금빛 눈동자가 서로 마주친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끝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쿠토가 절하듯 허리를 숙였고 그건 아이도 똑같았다. 


“그럼 밥부터 먹어야 돼.”

“저 숙제부터요. 밥은 아직.”

“아, 그렇지.”


보쿠토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때서야 아이의 젖은 머리를 인식한 눈치였다. 보쿠토가 불쑥 손을 내민다. 아이가 영문을 알 수 없단 얼굴로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아이가 옆에 내려놓은 수건을 손에 쥐고는 무릎걸음으로 아이에게 바짝 다가갔다. 


“머리 안 말리면 감기걸린다.”

“제가 말릴 수 있어요.”

“나도 할 수 있어.” 


아이가 완강하게 말했지만 보쿠토의 고집과 힘이 한 수 위였다. 아이는 금방 포기하고 팔을 축 늘어뜨렸고 보쿠토는 수건으로 신나게 아이의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어때! 아카아시랑 똑같지.”

“……우리 아빠는 드라이어 써줘요.”

“지금 아카아시 자니까 어쩔 수 없잖아.”

“어쨌든요.”


아이가 새침하게 대답한다. 보쿠토는 수건 아래로 언뜻 보이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시선에 잠깐 숨을 들이켰다. 어쩌면 저런 것까지 아카아시를 빼어닮았는지 모를 일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아이는 정말 아카아시의 아이였다. 


보쿠토가 다 되었다고 손을 떼어주자마자 아이가 벌떡 일어나버렸다. 숙제 할 거라며 방으로 들어가 책과 공책을 챙겨오는 모습에서 어른의 손을 탈 여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보쿠토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아이가 썼던 수건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부엌으로 향했다. 아이가 공부하는 사이에 저녁 준비를 할 참이었다. 


냉장고에 정리해 넣어두었던 식재료들을 꺼내고 냄비와 도마를 챙기는 그의 손길이 자못 능숙했다. 보쿠토는 양파 껍질을 벗겨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에는 식칼을 잡았다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테마는 추억 속의 그대에게~! 입니다! 


몇 년 전에 한 TV 쇼에 출연했던 적이 있었다. 그의 전부인인 키리에나 안즈가 막 영화 촬영을 마친 직후였는데 그녀가 거의 처음으로 영화관 스크린이 아니라 TV 화면에 모습을 비추었을 때였다. 배우들과 그 반려자들이 출연하여 반려들이 배우를 위한 요리같은 것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보쿠토도 키리에나도 관심이 없었던 것을 키리에나의 매니저가 반쯤 애걸복걸하다시피 하여 승낙했더랬다. 


진행자가 말하는 ‘추억 속의 그대’라는 것은 부부가 처음 만났을 무렵을 뜻하는 것이었다. 서로 낯설고 풋풋하던 시절에 먹었던 요리를 재현하거나 그 때를 형상화하여 지금의 배우자에게, 그런 말이 진행자의 입에서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도우미로 도쿄에 유명한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라는 쉐프까지 영입해왔다. 


보쿠토는 그 날 TV 쇼에서 불고기를 넣은 주먹밥과 맑은 된장국을 만들었다.  사회자는 깜짝 놀랄만큼 소박한 음식이라며 유난을 떨었고 키리에나는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맛있게 먹어주었다. 


‘그 때부터 알아챘나?’


보쿠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했다. 한 쪽을 보기 시작하면 그것밖에는 할줄 모르는 성격은 그 때도 지금도 여전했고 사회자가 ‘추억 속의 그대’라고 말한 순간 떠오른 것들을 그 시점에 적절한 것으로 되돌려줄 사람도 추억 속에 있었다. 넋을 놓고 만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주먹밥이 떡하니 만들어진 뒤였다. 키리에나는 쟁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투박한 주먹밥 두 개를 잠깐 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 때 쇼에서 도움을 주었던 쉐프는 보쿠토를 보며 미각이 뛰어난 것 같다며 그 뒤 이어진 두어번의 방송 촬영에서도 이것저것 알려주고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 TV쇼 출연은 세 번인가 네 번으로 막을 내렸다. 키리에나가 더 이상은 나가고 싶지 않다고 강경하게 말한 탓이었다. 곧 개봉할 영화의 홍보는 이미 충분했기에 키리에나의 매니저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보쿠토도 더 하자고 매달릴 이유가 없어 선뜻 그만두었더랬다. 


그 뒤로 요리는 보쿠토의 다른 취미 중에 하나가 되었고 키리에나는 매번 그가 한 요리를 잘 먹어 주었다. 제작년까지는 그랬다.


—이젠 정말 못 먹겠어. 


간단하게 만든 샌드위치였다. 키리에나는 식탁 앞에 앉아서 그 샌드위치를 내려다보다가 손도 대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다. 보쿠토는 맛이 없냐고 물었지만 키리에나는 모든 요리가 전부 아주 맛있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가 보쿠토의 요리를 다시 먹는 일은 없었고 보쿠토도 요리 하기를 관두었다. 


어쩌면 키리에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이혼할 때 한 대 맞았어야 했는데…….’


보쿠토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양파를 도마위에 올리고 식칼을 대었다. 식칼이 부드럽게 들어가며 양파가 반으로 잘린다. 보쿠토는 능숙한 손길로 양파를 잘게 썰기 시작했다. 


*


아이가 고집을 부려서 설거지는 아이가 했다. 식기를 건조대에 가지런히 늘어놓고 거실로 돌아왔다. 아이가 소파에 앉아서 책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보쿠토는 아이가 앉은 쪽과는 반대쪽 팔걸이가 있는 곳에 바짝 붙어서 발코니 쪽 야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적뿐인 시간이 한참이나 지속되었을 때 보쿠토가 몸을 한 번 뒤틀었다가 TV의 전원이 들어갔다. 갑자기 소리가 나고 화들짝 놀란 보쿠토가 리모컨을 찾아 온갖 버튼을 누른다. 전원보다 음소거 버튼이 먼저 눌려 실내는 조용해졌지만 화면에서는 소리없는 영상이 요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가 책을 덮었다.


“TV 보셔도 돼요.”

“아, 아니……. 켜려고 한 거 아니야!”


보쿠토가 부정했지만 아이는 그 부정에는 관심이 있는 눈치가 아니었다. 보쿠토의 손에서 직접 리모컨을 가져와 음소거 해두었던 것을 끄고 음량은 적절히 낮춘 뒤 다시 리모컨을 보쿠토에게 돌려준다. 그리고는 책을 펼지는 것이다. 보쿠토는 리모컨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카즈마.”

“……네.”

“내가 싫으면 아카아시한테 싫다고 말하지 그래.”

“…….”

“그럼 아카아시도 나보고 이제 그만 나가라고 할 텐데.”


아이가 단숨에 그를 돌아보았다. 새파랗게 타오르는 황금색 눈동자는 아이답지 않을 만큼 매섭게 보쿠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쿠토는 표정없는 얼굴로 아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한참 뒤에 아이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싫어하지 않아요.”

“에, 거짓말.”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나한테까지 거짓말 할 필요는 없잖아?”


보쿠토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TV에서는 가짜 웃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가 거실 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보쿠토는 살짝 턱을 세우고서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서로 마냥 서먹하여 낯설기만 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윽고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무얼 도와주려고 하기라도 하면 눈을 새파랗게 치켜뜨고서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한다. 밀어내고 멀어지고 노려보는 눈길은 싫어한다는 표현보다는 증오라는 단어에 더 가까웠다. 자신이 그렇게나 잘못한 게 있나 생각해 본다면 이 집에 무턱대고 쳐들어온 것 정도일텐데, 그게 아무리 잘한 것이 아니라곤 해도 그 정도로는 이해하기 어려눈 눈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카아시 앞에서는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낯을 가리는, 익숙하지 않은 서먹함, 딱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다.


“그럼 그 쪽이 알아서 나가면 되잖아요.”


보쿠토는 아이가 자신을 한 번도 제대로 부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쪽이라니, 저 또래 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 더욱 첨예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아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그러기 싫으니까.”

“그럼 계속 계세요. 그러는 걸…….”


아이가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세게 깨문다. 그리고는 또 보쿠토를 노려보았다. 금빛 눈동자에 새파란 빛이 깃들어 그를 찌를 것만 같다. 보쿠토는 입술을 한 번 삐죽했다. 


“알았어. 며칠만 있다가 나갈게.”

“……!”

 

아이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본다. 마치 기적을 마주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보쿠토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린아이의 눈빛이라곤 해도 아카아시와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데 노려보는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마음 편하지만은 않았다. 


“오래 신세지긴 했고.”


코노하에겐 마치 영원히 여기에 있을 것처럼 말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걸 보쿠토는 그 때에도 인지하고 있었다. 


“……진짜……진짜 갈 거예요?”

“너 그렇게 내가 싫냐?”


이쯤 되면 이쪽도 서운할 지경인데, 아이는 그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그저 환히 웃는 것이었다. 안심하고 마음이 놓여 힘이 풀린 듯이 그러면서도 활짝. 보쿠토는 아이가 웃는 얼굴을 처음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아카아시 만나러 올 거야.”

“…….”


언제 웃었냐는 듯이 또 표정이 굳어서 그를 바라본다. 곧 그 시선은 아이가 품에 안고 있던 책으로 떨어졌다.


“그 정도는 알았어요.”

“야, 너무 싫어하지 말라니까. 나 그래도 아카아시랑은 옛날부터…….”


옛날부터……. 거기까지 말했던 보쿠토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팩 돌렸다. 옛날부터. 아주 옛날부터 소중하게 생각했다. 잃을 수 없었고 그래서 만날 수 없었다. 달리 생각했다면 지금 이 순간 다른 결과가 있었을까.


보쿠토는 소파의 팔걸이에 턱을 괴고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10년만에 만났는데 아카아시는 자신을 본체만체하고 아카아시의 아이는 그만 보면 눈을 못 세워 안달이다. ‘이 집 사람들은 다 나만 싫어해.’ 보쿠토가 투덜거리는 말에 아이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번만은 적의가 보이지 않는 시선이었다.


“정말 그랬으면 나는 좋아했을텐데.”


말간 금빛 눈동자가 처음으로 아이답게 보드라운 빛이었다. 보쿠토는 놀라서 눈만 꿈벅거렸다. 아이가 책을 덮고는 안녕히 주무세요, 그 말만 남겨두고 방으로 돌아갔다. 









“…….”

“…….”


아카아시는 눈만 깜박거리며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불타 흩어지는 금빛 눈, 순식간에 10년의 세월을 되감는 그것. 


“보…….”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가 겨우 그렇게 입을 떼려고 할 때에 보쿠토의 눈동자 위로 천천히 빛이 깃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보쿠토가 꿈벅 하고 눈을 깜박였다. 


“아……아, 아, 우와아악!”


팟 하고 빛이 들더니 보쿠토가 벌떡 일어나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주위에 무언가가 있었으면 필히 엎고 쏟았을 게 분명했다. 사색이 된 얼굴로 서서히 피가 몰리더니 곧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손을 휘저으며 어쩔 줄을 모른다. 아카아시는 눈을 꿈벅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아카아시, 미, 미안! 미안! 진짜 미안! 내가 잠, 결에, 어, 아, 미안!”

“아뇨, 괜찮으니까요……. 카즈마 깨겠으니 진정하세요.” 


아카아시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고 팔을 뻗었다. 하지만 허둥거리는 보쿠토가 다가오는 아카아시의 팔을 보고는 그걸 냅다 쳐내고 후다닥 뒷걸음질치는 것이었다. 


“……제가 뭐 닿으면 옮습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놀라서, 미안……! 아, 아카아시도 놀랐지, 진짜 미안해!”


얼굴이 빨개졌다가 파래졌다가 하기 바쁘다. 아카아시도 이쯤 되니 조금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보쿠토가 넙죽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아, 아카아시, 진짜 미안해, 진짜 놀랐지, 미안, 미안해!”

“아니……. 아뇨, 어디 다친 것도 아니니까요.”


그야 갑자기  패대기쳐지다시피 하여 바닥에 드러눕게 된 통에 욱신거리는 뒤통수라거나 아릿한 등판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좀 놀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렇게까지 어쩔 줄을 모르면서 사과하는 걸 보고 있자니 되레 기분이 점점 더 가라앉는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보쿠토를 일으켜 세웠다. 보쿠토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려고 힘을 주어 버티고 서 있었다. 진짜 미안해, 미안해, 이런 말만 반복하며. 


‘이게 이렇게까지 사과할 일인가?’


잠결에 사람을 쓰러뜨리고 올라타다니 그건 좀 굉장하다 싶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릎까지 꿇고 앉아서 사과할 일인가? 사과할 일이라면 어째서? 다친 곳도 없다고 분명하게 얘기를 했는데, 도대체 왜? 그게 그렇게까지 기분 나쁠 일이기라도 한 건가. 


“아, 아카아시, 미안, 정말 미안!”

“정말 괜찮다니까요.”


아카아시는 자신의 목소리가 가라앉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며 다시 보쿠토를 붙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보쿠토가 고개를 든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보지 않고서 깔린 요 쪽으로 보쿠토를 떠밀었다. 


“얼른 주무세요.”

“아, 내가 아카아시 꿀물…….”

“지금 저도 마시고 잘테니까요.”

“으, 으응. ……미안…….”

“정말 괜찮다니까 자꾸 왜 그러세요. 뭐 무슨 일 있었다고. 주무세요.”


아카아시는 머그잔을 손에 들고 일어섰다. 보쿠토가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그 시선을 남겨두고 먼저 몸을 돌렸다. 


*


거실에 혼자 남겨진 보쿠토는 눈을 꿈벅거리며 아카아시가 들어간 침실쪽 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몇 분이나 지났을 때 보쿠토의 목에서부터 얼굴 끝까지 새빨간 기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마침내 보쿠토가 풀썩 요 위로 엎어졌다.


‘으아아아! 내가 미쳤어, 미쳤어! 미쳤지!’ 


잠기운이 섞여 멍할 찰나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는데 아카아시가 있었다. 가지마, 가면 안 돼, 여기 있어, 이런 생각이 먼저였다. 손을 붙잡고 어디로도 갈 수 없게 그의 위에 올라탔다. 코끝과 코끝이 스쳤다. 푸른 색이 섞여든 청록색 눈동자, 바다같아서 사랑했고 사랑하는 색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아카아시다, 내 아카아시, 보쿠토는 그대로 입을 맞출 뻔했다. 아마도 ‘보쿠토 선배’라며 그를 부르려 했던 아카아시의 입가에서 민트향이 흘러나와 그의 정신을 깨우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저질러 버렸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후다닥 일어서서, 어떻게든 사과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는데 아카아시가 이대로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함께 휘몰아쳤다. 보쿠토의 입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사과만 쏟아진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 무슨 일 있었다고. 


아카아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다고 했지만 보쿠토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 큰일이 날 뻔 했단 말야, 하지만 미수에 그쳤던 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미안하다는 사과만 거듭할 뿐이었다. 


요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보쿠토는 코 끝을 스쳐지나가는 향기에 샴푸냄새,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시야가 바뀌어 눈앞이 아찔해졌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자신이 얼굴을 묻고 있던 부분에 손을 뻗어본다. 가볍게 물기가 스쳐지나간다. 아카아시가 누워 있었던 자리인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붉었던 보쿠토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다. 보쿠토는 괜히 죄를 짓는 것처럼 아카아시가 문을 닫고 들어간 쪽을 한 번 살펴보고는 조심스레 요의 가장자리에 몸을 뉘었다. 


나란히 누워 잠을 잤던 적이 있었다. 딱 한 번이었지만. 고등학생이었을 적, 부모님이 여행을 가셨다며 밤새워 같이 놀자고 아카아시를 졸랐던 날이 있었다. 아카아시는 그런 그를 보고 웃음을 섞어 한숨을 짓곤 고개를 끄덕였었다. 


금요일 밤부터 달이 저물 때까지 무어 그리 할 이야기가 많았는지 모를 일이다. 쉴새없이 재잘거렸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침대 위에 올라와서 자라고 했지만 아카아시는 단호하게 그럴 수는 없다며 보쿠토를 침대에서 재우고 자신은 바닥에 누웠더랬다. 아카아시가 그렇게 고집을 피우니 도리가 없다. 혹시 바닥이 딱딱할까 싶어 온 집안의 이불장을 뒤져서 도톰한 요를 두 장이나 깔았다. 하나는 회색 줄무늬가 사선으로 들어간 것이었고 하나는 분홍색 잔 꽃무늬가 들어간 것이었다. 덮었던 이불은 남색과 연두색 줄무늬가 들어간 푹신한 것으로, 베개도 같은 커버로 된 것을 내어주었다. 어린애 다루듯 이불을 여며주었더니 아카아시가 답지 않게 조금은 부끄러워 했었다. 그런 아카아시를 보면서 자신 역시 고작 한 살 차이면서 어른인 척을 했다. 부끄러워하는 후배의 머리를 부벼주고는 잠을 청했다. 심장이 쿵쿵 뛰어서 밤새 못 자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저도 모르는 새에 깜빡 잠이 들었더랬다. 깬 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둔한 통증이 뒤통수에서부터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어둠을 칠한 벨벳같은 밤이 짙게 깔린 새벽에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떴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나보다 하는 현실을 천천히 인식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코 끝에 무언가가 스쳤다. 


아카아시의 이마였다. 아카아시도 소리를 들었는지 눈을 뜬다. 잠에 취한 청록색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구분할 수 있었다. 보쿠토 선배, 나직하게 잠긴 목소리가 그를 부른다. 보쿠토는 코앞에 있는 아카아시의 얼굴을 보고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작게 속삭이고는 겨우 겨우 다시 이불을 끌어와 아카아시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아카아시는 괜찮느냐는 말을 웅얼거리다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자신도 다시 침대로 올라가서 자면 되는데, 그러면 되는데. 올라가기 싫다며 중얼거렸고 아카아시가 곁의 따뜻한 체온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 날 보쿠토는 그냥 바닥에 누워 계속 자버리고 말았다. 아침에는 아카아시가 그를 깨웠다. 웃는 목소리였다. 선배, 왜 바닥에서 주무시고 계셔요. 눈을 부비며 떴다. 아카아시가 나란히 누워서 그를 보고 있었다. 자다가 떨어졌는데 그냥 계속 잤다며 변명을 했고 아카아시는 다시 웃었었다. 


단 둘이, 나란히 잤던 처음이마 마지막이었던 날이었다. 아마도 10년쯤 전의 어느날이었을. 하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잠시나마 누웠던 자리를 손 끝으로 살짝 쓸어보았다. 그저 잠깐 누웠던 흔적이 있는 것뿐인데, 그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마치 바로 곁에 누워있는 것만 같았다. 되새기고 되새기기만 하던 과거의 그 날이 지금 이 곳에서 재현된 것만 같다. 보쿠토는 존재하지 않는 아카아시의 윤곽을 손으로 따라그렸다. 


“헤…….”


이런 날은 꿈도 꾸지 못했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이 작은 기적 같았다. 이럴 수도 있구나. 이럴 수도 있었겠구나, 보쿠토는 그것을 지금에서야 생각했다. 우리가 계속 함께 있었으면, 지금 이 밤이 네 그림자만 좇는 밤이 아니라 보고 만질 수 있는 너를 옆에 두는 그런 밤일 수도 있었겠구나…….


보쿠토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돌연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가렸다. 그의 목까지 온통 붉은 빛이었다. 잠결에 본 것만으로도 입맞출 뻔했는데 옆에 누워있었으면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 아직은 무리였다. 얕은 흔적만으로도 온 몸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아, 오늘 잠자긴 다 틀렸네…….” 


겨우 호흡을 돌린 보쿠토가 탈진한 듯이 쭉 뻗었다. 처음부터 요의 가장자리에 닿을 듯 말듯 누워있었던 터라 등에 닿은 맨바닥에서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보쿠토는 요 위를 곁눈질했다. 그를 바라보는 것이라고는 창밖의 달빛 뿐인데도 보쿠토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으아아……. 너무 좋아…….” 


흐릿한 그림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어쩔 줄 모르게 될만큼 너무나. 보쿠토는 바닥의 찬기운에 의지해 열이 오른 뺨을 식히려고 했지만 그다지 소용이 있지는 않았다. 발코니 창의 달빛이 그런 그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죽을까?’


아카아시는 회사 건물의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멍하니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콱 죽어버릴까.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을까! 


홧김에 해버린 말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다. 외롭게 했다는 말에 자기를 가리키는 보쿠토를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말이 안 되잖아.’


아카아시는 엘리베이터의 벽에 쿵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박았다. 외롭게 했어? 언제? 자신이 혼자 두어서 그가 외로웠던 적이 있기나 하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외로웠으면 한 번은 찾아왔을 것 아닌가. 한 번은 전화라도 했겠지. 믿을 수 없는 건 그의 고교 시절, 보쿠토가 스스로의 외로움을 한 번도 견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와 함께 있고 싶은 순간이 되면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전화, 메세지, 그게 아니면 당장 집 앞으로 와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말 한마디 연락 한 줄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다가 결혼을 했다. 아카아시도 TV 화면과 스크린을 통해 몇 번이나 얼굴을 본 유명한 배우였다. 아카아시는 정말로, 외롭게 했다는 말에 자신을 가리키는 그 보쿠토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외로웠으면 외로워서라도 한 번은 올 수 있잖습니까.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도, 내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도, 그냥 외로워서라도. 누구라도 아무라도 보고 싶어서, 그런 이유로라도 올 수 있었잖습니까. 자신은 보쿠토에게 그 아무나 그 누구나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자신이 외롭게 했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그렇게 잘도…….


‘아, 그럼 그냥 그 이야기를 하면 했지. 나는 도대체 어쩌자고…….’


아카아시는 한 번 더 쿵 소리나게 이마를 박고는 호흡을 떨어뜨렸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내보았지만 보쿠토로부터의 연락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어도 할 말은 없었겠지만. 


아카아시는 조금 답답한 것 같은 속을 쓸어 내렸다. 며칠만 지나면 급한 프로젝트도 다 끝이 난다. 최근 부쩍 차라리 바빠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잦았다. 지금도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나면 서로 잊게 될 것이다. 그렇게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일주일은 휴가를 낼 참이었다. 보쿠토에게도 돌아가달라고 말할 작정이다. 그러면 된다.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카아시는 호흡을 가다듬고, 옷깃에 묻은 흙먼지도 한 번 털어낸 뒤에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발을 내딛었다. 


*


아카아시는 현관문의 고리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했다. 연일 이어지는 야근에 누적된 피로가 눈앞을 핑 돌게 하는 와중에도 섣불리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직 깨어 있을까?’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오늘은 야근이 계속되었던 날보다도 퇴근이 훨씬 더 늦었다. 아이는 피곤해서 진작 잠에 빠졌을 게 분명한데 보쿠토도 자고 있을거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경주도 참가하고 한 모양이니 피곤하시겠지.’


아카아시는 낮에 잠깐 보았던 모습을 상기했다. 전력으로 달리기를 하기도 했으니 깨어있더라도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제대로 된 대화도 할 수 없을 것이고. 아니, 그보다도 보쿠토가 자신의 말을 신경이나 썼을지도 의문이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어깨 한 번 으쓱하고 흘려보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의 이 걱정도 다 괜한 짓일 거였다. 


아카아시는 짧게 숨을 들이키고는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삐빅 하는 전자음이 나고 곧 부드럽게 현관문이 열린다. 거실의 무드등만 빛을 밝히고 있는 실내는 어둡다기보다는 아늑한 편이었다. 아카아시는 현관에 서서 구두를 벗으며  안쪽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거실 한쪽에 보쿠토의 침구는 보이는데 보쿠토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그 때 부엌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선배, 뭐하세요?”


부엌으로 향한 아카아시가 식탁의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다가갔다. 보쿠토는 발을 동동 구르며 가스렌지 앞에 서 있다. 약한 불이 들어온 렌지 위에는 조그만 편수 냄비가 놓여있었다.


“아, 아카아시. 아, 이게 왜…….”


보쿠토는 반쯤 울상을 지으며 냄비 앞에 서서 안에 든 것을 휘저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아카아시의 눈짓에 보쿠토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아카아시는 냄비 안에 든 것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법랑 냄비 안에는 짙고 밀도높은, 투명한 금빛의 무언가가 눌어붙어 있었다. 


“이게 뭡니까?”


아카아시는 가스 불부터 내리고 물었다. 휘저으려던 수저 끝으로 진득한 것이 묻어났다. 보쿠토는 물을 더 부으면 될 것 같다고 웅얼거리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꾸…….”

“?”

“꿀물…….”

“이게요?”


꿀 뒤쪽의 단어는 양심상 붙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아카아시의 눈초리에 보쿠토의 표정이 한층 더 습기에 찬다. 


“그게 계속 식어서……. 계속 데웠더니 어느 순간 이렇게 됐어…….”

“뭘하고 계셨길래 이걸 식을 때까지 몇 번이나 놔두기만 한 거예요.” 

“아카아—.”


아카아시가 한숨과 함께 냄비를 싱크대에 집어넣고 물을 틀었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이 눌어붙은 냄비로 쏟아졌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보쿠토가 눈물까지 글썽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제가 다시 해줄 테니까……. 왜, 왜요. 선배?”

“…….”

“선배?”

“……아카아시 주려고…….”

“네? 뭘……헉.”


쏴아아아


두 사람 사이에 물 쏟아지는 소리만 고요히 울려퍼진다. 아카아시는 마른침을 삼키고 물이 넘치고 있는 작은 냄비를 바라보았다. 꿀물. 계속 식어서, 계속 데우다가, 어느샌가 바닥에 눌어붙을 때까지 이렇게 되고 만.


아카아시는 수도를 내렸다. 


“그……. 제가 타먹겠습니다.”

“응…….”


어깨가 축 처져서는 싱크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보쿠토다. 아카아시는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갑자기 웬 꿀물이에요.”

“아카아시 피곤한 것 같아서…….”


아카아시는 다시 한 번 냄비를 흘끗 돌아보았다. 오늘은 평소보다도 몇 시간이나 더 늦었다. 자신이 올 때 맞춰서 따뜻한 걸 주려고 계속 데운 거라면 몇 번이나 불 위에 냄비를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가 했을까. 아마도 냄비가 저렇게 될 때까지. 


“……미안해요. 저 주려고 하신 거라곤 생각을 못 해서…….”


결국 사과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카아시가 미간을 누르며 사과하는 말에 보쿠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카아시는 세상이 무너졌다고 생각했지만 이걸 복구할 방법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땐 어떻게 했더라?’


고등학교 때는 이보다 훨씬 심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수습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말로는 자신이 어떻게 했던 것 같긴 한데. 확실히 그랬던 것 같은데.


“…….”

“…….”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감돈다. 아카아시는 묵묵히 서 있기만 했고 보쿠토는 이제 그런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무언가 기대같은 것이 어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 어색한 공기가 질식사하고 보쿠토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가 다시 해줄 거야.”

“네?”

“내가 꿀물 다시 해줄 거야. 그리고 내일 아침 먹을 거 준비도 다 해놨으니까 아카아시는 씻고 와.”

“네……에?”


화제의 전환을 따라가지 못한 아카아시가 얼떨떨한 얼굴 위로 미간을 모았지만 보쿠토는 굳건한 얼굴로 아카아시의 등을 떠밀었다. 욕실 앞에 그를 세워두고 오늘 새로 세탁하고 건조한 수건도 손에 쥐어주고 샤워기의 온수 온도까지 체크하고 나서야 뒤로 물러선다. 아카아시는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술을 뗐지만 보쿠토는 더 굳은 얼굴로 엄중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카아시를 욕실 안으로 밀어넣고는 문을 닫아버리기까지 했다. 아카아시는 눈 앞에서 닫힌 욕실 문을 바라보다가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


아카아시가 샤워를 말끔히 끝마치고 가운 한 장을 걸치고 나왔을 땐 실내가 온통 고요한 정적이었다. 아카아시는 턱 끝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을 닦아내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부엌에는 가스레인지 위 후드등만 혼자 빛을 내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자 과연, 어설프게나마 이것저것 찬거리 같은 게 준비되어 있다. 아카아시는 준비된 것을 몇 가지 열어보고는 다시 정리해 밀어넣었다. 


부엌의 후드등을 끄고 거실로 나가자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카아시는 벽에 살짝 기대어 섰다. 보쿠토는 거실의 탁상에 엎드려 잠에 빠져 있었다. 옆에는 그에게 내어준 침구가 아무렇게나 흩어져있고 그 모든 걸 무드등 하나가 감싸듯 비춘다. 보쿠토가 잠든 탁상 위에는 머그컵 하나가 김을 올리며 놓여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카아시는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여 보쿠토에게 다가갔다. 


“……선배.”

“으응…….”

“보쿠토 선배, 누워서 주무세요.”


오늘 아이의 운동회에 참가해주느라 그도 적잖이 피곤했을 터였다. 거기다 자신이 올 때까지 계속 기다렸으니 졸음이 쏟아질 법도 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가볍게 흔들었다. 보쿠토가 가늘게 눈을 뜬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깨는 것을 보고선 침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요를 바로잡고 다시 일어나보니 보쿠토가 또 탁상에 엎드려있다. 아카아시는 픽 웃으며 다시 보쿠토를 흔들었다.


“보쿠토 선배. 엎드려 자지 말고 누워서 주무세요. 선배.”

“……아카, 아시……?”

“네, 저예요. 그러—!”


말을 이으려던 아카아시는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어져, 등에 닿는 아릿한 통증은 한 박자 늦게 인지했다. 자신이 바닥에 누워있다는 것도.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건 두 개의 태양이었다. 지금 이 시간을 잊게 하는 형형한 빛.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위에 올라탄 사람은 보쿠토였다.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이며 보쿠토를 올려다보았다. 보쿠토의 손이 아카아시의 두 손을 붙잡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이 한 호흡이면 닿을만큼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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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예쁜말씀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아카아시는 그만 당황해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순간 흙먼지가 기관지로 들어와 기침이 올라온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돌리고서 작게 기침했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지만 그 사이에 멀쩡한 사람이 사라지는 기적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보쿠토 선배!?’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 게다가 엄청나게 눈에 띄고 있어! 


아카아시는 기가 막혀 눈을 크게 뜨고 운동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야 전력으로 질주하는, 185 센티미터 이상인 장신의 남자, 그것도 근육이 제대로 자리잡고 있는 남자라는 것은 주위의 학부모들 사이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아카아시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입을 가리고 섰지만 결승 지점을 향한 보쿠토의 달리기를 멈춰 세울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맙소사.’


아카아시는 입을 가리고 섰다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가, 팔짱을 끼고서 발끝을 타닥타닥거리다가, 마침내 눈을 꾹 감고 미간을 눌렀다. 눈을 뜨자 마스크를 내리고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보쿠토가 아이에게로 뛰어가는 게 보인다. 두 사람이 상기된 얼굴로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카아시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만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정말로 오면 어쩌자고…….”


눈에 띄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더니 또 그 말만은 들어주어, 보쿠토는 모자도 눌러 쓰고 선글라스도 끼고 마스크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숨이 찬지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려놓았지만. 저 모자를 하고서도 전력질주를 한 게 대단히 용하다면 용할 일이다. 아카아시는 아이를 번쩍 안아드는 보쿠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너무 눈이 부신 걸 봐서 그런 걸까, 눈가가 시렸다. 


왜 왔어요? 마음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따져묻고 싶었다. 오지 말라고도 했잖습니까. 그 애가 당신 아이도 아니잖아요. 10년만에 겨우 만난, 고등학교 때 같은 부 활동을 했을 뿐인 후배의 아이인데. 그 어린애 운동회 혼자 두는 게 그렇게 맘에 걸렸습니까? 왜요. 


처음부터, 왜 절 찾아왔어요. 


하지만 묻고싶지 않기도 했다. 굳이 딱지 않은 상처를 벗겨 내어 거기에 칼을 댈 필요가 있을까. 모르는 척 하는 게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지 않나. 다른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 이 순간을 그대로 내버려두겠다는 것 뿐인데. 


아카아시는 두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았다. 보쿠토가 아이의 머리를 꾹 누르며 장난치느라 바빴다. 그가 슬쩍 선글라스를 들어올려 아이와 눈을 마주한다. 둘을 저리 나란히 두니 무서울만치 닮은 꼴이다. 아카아시는 가슴께를 꾹 눌렀다. 늑골 사이로 빗물이 흐르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바쁜 아비를 둔 탓에 학교 행사같은 것에는 언제나 혼자인 아이가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오늘도 잠깐이라도 보고 오려고 회사를 빠져나온 차였다.  곧 돌아가야 했다. 시간이 빠듯하면 아이를 찾아볼 여유도 없을지 몰라 돌아가는 길이 마음 아프리라 생각했다. 


아카아시는 팔에 정장 겉옷을 걸치고는 스탠드 아래로 내려섰다. 구두에 금방 흙먼지가 앉아 뽀얗게 번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보쿠토는 학부모 달리기에서 1등하고 얻어온 메달을 아이 목에 걸어주느라 바빠서 아카아시를 먼저 알아본 건 아이 쪽이었다. 


“아빠!”


꼬박 꼬박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르더니 당황해서인지 금방 아빠라고 단어가 바뀐다. 아카아시는 낮게 웃었다. 아이가 곧장 아카아시를 향해 달려왔다. 아카아시가 팔을 벌리고 아이가 안겨든다. 아카아시는 아이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뒤에 눈치를 보고 서 있는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선배.”

“아, 아카아시. 그게. 이게 말야. 그러니까…….”


모자를 꾹 눌러 쓰고 내렸던 마스크도 다시 올리며 보쿠토가 웅얼거렸다. 아카아시가 짧게 한숨을 내쉰다. 보쿠토의 어깨도 움찔했다. 아카아시는 결국 웃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저 사람이 지난 10년을 울게 했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그 전의 2년, 고등학교 시절을 웃으며 보냈던 대가가 아닌가 한다. 그것을 이제야 인정할 수 있었다. 그 2년이 뒤의 10년을 감내할만큼 찬란했음을.


“됐습니다. 그렇게 오지 말라고 말을 했는데 들은 척도 안 하시고.”

“그래서 나 이렇게 막 다 가리고 왔는데…….”

“고생하셨네요, 정말. 어떻게 그러고서 달리기를 그렇게 빨리 합니까?”

“그치그치, 굉장하지!”


떠들다가 금방 또 숨이 차는지 눈치를 보며 살며시 마스크를 내린다. 아카아시는 포기했다는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보쿠토가 금방 신나는 표정이 되어 아카아시 곁으로 바싹 다가와 붙었다. 답답했는지 선글라스도 벗어버린다. 아카아시는 주위를 살짝 둘러보긴 했지만 다른 말 없이 아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카즈마, 운동회 재밌었어?”

“네, 네!”


항상 또래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침착하고 차분하던 아이의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금 높았다. 아카아시는 아이의 머리를 쓸어넘겨주었다. 은빛이 섞여든 머리카락이 아카아시의 손끝에서 흩어졌다. 아카아시는 곁에서 조잘거리는 보쿠토의 이야기를 한참 들어주다가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잠깐 얼굴만 보고 가려고 들렀습니다. 시간이 빠듯해서 먼저 가봐야겠네요. 카즈마 잘 부탁드립니다.”

“나만 믿어, 나만!”


보쿠토가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아카아시는 그 모습을 가만 보다가 고개를 돌려 무릎을 굽히고서 아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도 땀방울이 맺힌 이마도 아직 여려 사랑스러웠다. 언제나 바빠서 제대로 봐주지 못한 모습들이었다. 


“카즈마, 끝까지 재밌게 하고 다치지 말고. 집에가서 씻고 밥 먹어, 알았지.”

“네. 아버지도…….”

“응, 나도 저녁 챙겨 먹을게.”


아카아시는 아이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아이가 뺨까지 붉히며 부끄러워한다. 때마침 본부석에서 학생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아카아시가 몸을 펴고 일어서서 아이의 등을 밀어주었다. 아이는 몇 번 뒤를 돌아보다가 달려간다. 아카아시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아이를 바라보는 아카아시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눈을 내리깔았다.


“……매번 외롭게 하네요. 제가.”

“누구를? 나를?”

“……하여튼 꼭.”

“카즈마는 아닌걸?”


이런 타이밍에도 농담을 하느냐고 타박을 하려고 했던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보쿠토는 장난도 농담도 아니라는 얼굴로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즈마는 외로워할 틈도 없던데. 아빠한테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

“그리고 외로워하지도 않았어. 네가 어떤 마음인지 다 아니까.”


아, 이런 사람이었다. 


아카아시는 차마 보쿠토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멀어진 아이의 뒷모습만 눈으로 좇았다. 그래, 보쿠토는 이런 사람이었다. 언제나 마냥 어린애처럼 떼를 쓰고 제멋대로 구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이쪽이 흔들리면 놀랄만큼 단단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지탱해주었다.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 때는 그랬다. 그런데 왜 지금도…….


“…그런 거라면 정말 다행이죠. 계속 둘이서 지내서……. 아,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정말로 가봐야겠습니다.”


아카아시는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어 서둘러 문장을 끊었다. 보쿠토가 입술을 삐죽거린다. 아이 앞에서는 어른 행세를 해놓고서 아이가 자리를 비우자 금방 아이보다 더 어린애처럼 투정부리는 얼굴을 한다.


“아카아시 일 진짜 너무 바쁜 거 같아.”

“조금만 더 안정 되면 좀 여유가 있는 쪽으로 이직할까 하고 있어요. 카즈마와 더 있어주고 싶고. 많이 늦었겠지만…….”


이런 이야기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는데,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을 늘어놓았다. 보쿠토가 발끝으로 운동장의 흙바닥을 한 번 긁었다. 아카아시는 다시 착용하라는 뜻에서 보쿠토의 선글라스를 한 번 건드려주고는 팔에 걸치고 있던 정장 겉옷에 팔을 꿰어 넣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등으로 돌아가 잘못 접힌 목깃을 제대로 펼쳐주었다. 


“아카아시는 블레이저 항상 아무렇게나 입더라.”

“……입고 나서 정리할 거였어요.”


그 항상은 10년 전의 일이고 이런 건 이제 블레이저라고 하지도 않는다며 타박을 하면 되었는데 그런 말은 나오지 않고 보쿠토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저 시간에 아주 잠시만 마음을 의탁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보쿠토가 선글라스의 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럼 선배는.”

“아, 응?”

“제 마음을 몰라서 외로웠던 건가요.”

“……어?”


보쿠토가 눈을 꿈벅거리며 아카아시를 바라본다. 아카아시는 얼른 다시 선글라스를 착용하라는 말만 서둘러 뱉고는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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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예쁜말씀 감사합니다^-^!! 공기가 많이 안좋은데 건강 조심하세요~! 






“내가 가면 되지!”

“안 됩니다.”


아카아시는 계란을 깨뜨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부엌에만 불이 켜져 있는 실내는 어둠이 더 깊었다. 아카아시는 식초를 반 스푼 넣고 휘저었다. 보쿠토는 눈썹이 축 처져서 아카아시 곁에 바싹 다가갔다.


“안 돼? 왜? 아카아시 바빠서 못 가잖아. 카즈마 혼자 해?”

“어쩔 수 없죠.”

“그러니까 내가 가면 되잖아!”

“안 됩니다.”

“아 왜애!”


아카아시가 달걀물 휘젓던 나무젓가락을 탁 소리내며 내려놓았다. 보쿠토가 입을 다물고 눈동자를 굴린다.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선배.”

“으, 응.”

“여기 왜 오셨어요?”

“에?”

“우리집에 왜 오셨냐고요.”

“에엥…….”


이 사람 또 아무 생각 안 하고 있을 줄 알았어, 아카아시는 한숨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선배 지금 이혼하고 매스컴 들썩거리니까 그거 피해서 여기로 오신 거 아니에요?”

“아 맞다.”

“아 맞다?”

“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데 어린 애 학교 운동회에 학부형으로 나가신다고요. 거기서 사진이라도 찍히면 어쩌시려고요.”

“에……. 어떻게 돼?”


아카아시는 손등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 사람은 애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건가?


“애가 있었다, 그래서 이혼했다, 이런 기사라도 뜨면 어떡하려고요. 키리에나 씨에게도 폐고…….”

“애? 누구 애?”

“선배 애요.”

“나한테 애가 있다고!?”

“카즈마요.”

“카즈마가 내 애였어!?”

“…….”


아카아시는 마른 입술을 다셨다. 어떻게 대화가 이렇게까지 튀어나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어딘가에 스스로도 모르는 자기 애가 있을 수도 있는 인생이었습니까?”

“어? 아……. 아, 아니야! 아니야! 진짜 아냐! 아니야, 아카아시 아냐!” 


처음에는 눈만 깜박거리고 있던 보쿠토가 뒤늦게 문장의 진의를 파악하고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부정했다. 얼굴이 납빛이 되어서는 어쩔 줄을 모른다. 아카아시는 아이가 깨갰다며 겨우 보쿠토를 진정시켰다. 


“사람들이 카즈마랑 선배를 보고 카즈마가 선배 아이인줄 알면 어쩌시겠냐는 말입니다. 선배는 그게 아니라고 해도 신문에 뜨고 나면 그게 그렇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카즈마도 놀랄 거고.”

“아……. 그치만 카즈마는 아카아시 완전 쏙 빼닮았고.”


내 아이라곤 아무도 생각 안 할텐데, 보쿠토가 웅얼거렸다.


“……진심입니까?”


보쿠토가 눈을 꿈벅이며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어느 부분에서 거짓을 의심받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카아시는 마른 입술만 몇 번 다시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안 돼요.”

“그치만 카즈마 혼자 운동회 하는 건…….”

“카즈마도 이해해줄 거예요.”


줄곧 둘이 살았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거죠.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며 내일 아침 달걀말이에 쓸 달걀물을 완성해 냉장고에 집어 넣었다. 냉장고 내부의 창백한 빛이 아카아시의 뺨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고개를 든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흘끗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의 얼굴 위로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한가득이었다. 사고를 치고야 말 것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아카아시는 한 번 더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안 돼요. 알겠습니까?”

“그래도…….”

“선배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카즈마를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엑.”

“선배 아이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카즈마가 학교에서 얼마나 놀림받겠습니까.”


보쿠토의 얼굴에 억울함이 물씬 깃든다. 아카아시는 설명하는 것 없이 한 번 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보쿠토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한참이 지나서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


아이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쪽을 돌아보았다가 그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초등학교 운동회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운동장은 아침부터 모래먼지로 북적거렸고 학부모들이 스탠드석을 모두 차지한 채였다. 커다란 스피커에서 경쾌한 음악이 연신 흘러나오고, 학생들은 모두 들떠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 와중에도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틀림없이 장신의 남자였다. 


소재가 좋아보이는 천으로 만든 트레이닝복으로 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머리에는 캡모자, 눈에는 새카만 선글라스에 입은 흰 마스크로 피부가 드러난 부분이라고는 귀와 손이 전부다. 이렇게나 행색이 수상쩍으니 사람들이  흘끔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아이는 저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눈동자라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선글라스 너머로 시선이 마주쳤다, 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남자가 팔을 붕붕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아마 아이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며 다가오려는 순간에 누군가가 남자의 팔을 홱 붙잡았다. 남자가 놀라서 돌아본다. 어디로 보나 연행하는 듯이 저를 붙잡은 것은 정장 차림의 다른 남자 교직원이었다. 


아이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소년답지 않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타박타박,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스탠드까지 걸어갔다. 


“아, 아니, 저 수상쩍은 사람이 아니라……. 카, 카즈마! 카즈마! 여기 와서 말 좀 해줘!”

“…….”

“카, 카즈마 군? 아는 사람이니?”


남자를 붙잡고 있던 교직원도 다가온 아이를 알아보고는 말을 붙인다. 마스크가 반쯤 내려간 남자가 간절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아버지 아는 분이세요. 오늘 아버지 대신에 운동회 대신 보러 와주셔서…….”

“아, 그랬니?”


교직원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남자에게 사과하고는 자리를 떴다. 학생의 학부모 대신 온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주위의 시선도 잦아든다. 겨우 제대로 된 대화를 할 만큼 조용해졌을 때, 남자가 머쓱하니 뒷통수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모자가 툭 하고 벗겨진다. 은빛이 섞여든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바람에 휘날렸다. 남자가 허둥거리며 겨우 다시 모자를 쓴다. 아이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진짜 아버지 대신 오신 거예요?”

“아, 아니……. 어떻게 알았어? 몰래 와서 놀래켜주려고 했는데.”


남자, 보쿠토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이는 눈을 내리떴다. 어젯밤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대화나누던 것이 다 들렸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안 오셔도 되는데.”

“그치만~! 모처럼 운동회고. 아카아시도 없으면 카즈마 서운할까봐!”


저 남자에게는 선글라스나 모자, 마스크 같은 것으로는 가릴 수 없는 광채가 있었다. 아이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삭 돌려 보쿠토의 눈을 피했다. 


“—거짓말.”

“에, 거짓말 아닌데? 진짠데! 아카아시도 걱정하니까…….”

“저 때문에 오신 거 아니잖아요.”


아이가 툭 내뱉듯이 말하며 발끝으로 바닥을 긁듯이 문지른다. 보쿠토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인데?”

“아빠때문에 오신 거면서.”

“그야 아카아시가 걱정을 하니까 나도 카즈마가…….”

“그래서 아빠한테 잘보이려고 그런 거잖아요.”


아이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딱딱하게 말한다. 보쿠토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이 없다. 보쿠토는 얼굴을 가리려고 쓰고 온 모자의 캡을 만지작거렸다. 방금 전 떨어뜨렸을 때 묻은 흙먼지가 그의 손끝에 얼룩을 만들었다.


“음……. 들켰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 안 좋아했던 거야?”

“…….”

“뭐, 그건 어쩔 수 없네. 하지만 카즈마도 아카아시가 걱정 안 했으면 좋겠지?”


아이는 억울해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걱정끼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잘 할수 있으니까 마음 놓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좋은,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아이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른이 되기에는 아직도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매일 오후의 설거지와 숙제, 공부가 전부였다. 오늘 운동회에 오지 못한다고 말했던 자신의 부친이 그에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걸로 그의 걱정과 마음을 덜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말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런데 이 남자는 너무 쉽게 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나타나서 자신과 함께 있어주기만 하면 이것으로 자신의 부친은 한결 안심한 표정을 지을 것이었다. 자신은 어떻게 말을 해도, 달리기 경주에서 1등을 하고 와도,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을 맞아도 해낼 수가 없는데. 언제나 걱정을 끼치는 것밖에 할 수가 없는데. 


“오늘 하루만 같은 편 동맹 하기로 하는 건 어때?” 


아이는 고개를 들고 보쿠토를 쏘아보듯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드러낸 적 없는 눈빛이었다. 보쿠토만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눈빛이었다. 보쿠토가 슥, 선글라스를 살짝 위로 들어올려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날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도 아니라. 아카아시를 위해서. 별로 나쁘진 않은 거 같은데?”

“…….”

“자, 그러면!”


방송으로 3학년 달리기 주자들을 부르기 시작한다. 보쿠토는 선글라스에서 손을 떼고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운동장 앞쪽을 가리켰다.


“아카아시 카즈마 선수! 달리기 화이팅!” 


아이는 그런 보쿠토를 말없이 쏘아보다가 휙 몸을 돌렸다. 


보쿠토는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뒷목을 쓸었다. 


“질투나는 게 누군데…….”


아카아시 카즈마. 


아카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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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주시는 말씀 언제나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항상 큰 힘이 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ㅅ♥




“저기…….”

“…….”


아이는 눈을 깜박이며 보쿠토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 아카아시와 무슨 대화를 한 것인지, 집으로 돌아온 보쿠토는 혼이 반쯤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발코니의 유리창 앞에 주저앉아서는 멍하니, 창밖도 아니고 바닥만 보고 있다. 아이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보쿠토의 곁으로 몇 걸음 더 다가왔지만 보쿠토는 아이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는 보쿠토를 좀 더 살펴보다가 그의 곁에 담요를 놔주고는 거실의 탁상에 자리잡고 앉았다. 공책을 펼치고 연필을 손에 쥐고서 작은 글씨를 꾹꾹 눌러 적어가던 아이는 한 줄을 끝낼 때마다 보쿠토를 흘끗거렸지만 보쿠토는 여전히 무너진 자세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아이가 숙제를 모두 끝마쳤을 때 보쿠토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반쯤 울것 같은 얼굴이어서 아이가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어디 아파요?”

“응…….”

“어디가요. 약 먹을래요?”


아이가 일어나서 약장으로 가려고 했지만 보쿠토는 고개를 젓고는 아이의 손을 붙들었다. 아이는 이제 걱정이 완연한 얼굴을 하고 보쿠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우리 아버지한테 혼났어요?”

“응? 아니, 그건 아니고……. 아니, 맞을지도……. 아, 아니, 아닌데, 그러니까…….” 


아이가 눈을 깜박거리면서 올려다본다. 보쿠토는 멍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겠지만 아카아시의 아이를 상상했던 적이 있었다. 아카아시를 닮았겠지. 아카아시가 좋아하는 걸 좋아할 거야. 아카아시처럼 똑똑할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마도 나와도 닮은,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정말로 꿈같은 상상일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했던 날은 목끝까지 열이 차올라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바로 눈앞에 그 상상이 고스란히 현실이 되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10년의 시간을 증거하면서.


그가 지난 10년간 아카아시 곁에 있지 못했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면서.


“……카즈마, 있잖아.”


보쿠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소년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이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본다. 작은 행동거지 하나까지도, 아이는 자신의 부친을 쏙 빼닮아있었다. 


“카즈마는 아카아시 많이 좋아?”


보쿠토가 달리 특별한 대답을 바라고서 아이에게 질문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표정을 보리라고도 생각하지는 못했다. 


“네.”


지금껏 언제나 아이답지 않을만큼 동요 없이 차분하던 아이의 얼굴 위로 광채가 돌았다. 그건 빛이었다. 그렇게밖엔 설명할 수 없었다.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들이치는 것처럼 아이의 금빛 눈동자가 눈부셨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그렇구나.”


아이가 보쿠토를 빤히 바라본다. 마치 당신은 어떠하느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보쿠토는 더는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무릎을 세워 고개를 묻었다. 목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즈마는 아카아시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아이는 대답이 없다. 보쿠토는 흘낏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버진 아버지니까요, 어디가 좋으냐고 해도…….”

“아…….”


보쿠토는 불현듯 다른 누군가와 이와 같은 대화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키리에나가 그에게 이런 것을 물은 적이 있었다. 자신의 어디가 좋으냐고. 보쿠토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여러가지 부분에 대하여. 키리에나는 그 이야기를 다 듣고서 알듯 모를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그렇게 대답하며.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전에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아카아시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부실에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있을 때였다. 노을이 창으로 쏟아져 눈을 찔렀고 그가 이맛살을 모으는 사이에 코노하가 물었다. 보쿠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디가라니?

—아니 뭐, 맘에 드는 점이 있으니까 그렇게 좋아 죽고 못사는 거 아냐.

—아니거든? 그리고 아카아시는 그냥 아카아시니까 그렇지. 맘에 드는 점이라고 해봐야, 맘에 안 드는 점이 더 많다고!

—헤에, 맘에 안 드는 점?

—그래! 맨날 일지 쓰면서 나 노려본다거나! 귀찮게 굴면 짜증낸다거나!

—그 뭐냐, 너 네가 말하면서도 그 전후 관계가 명확하다는……. 한 문장 안에 원인과 결과가 다 있다는 생각은 안 드냐?

—뭐가! 몰라, 몰라!


보쿠토는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다가 푹 고개를 파묻었다. 몸 안으로 열이 휘몰아치는 기분이었다. 


“……나도야…….”

“네?”


아이가 반문했지만 보쿠토는 더 이상 소리내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야. 나도 아카아시는 아카아시라서 좋아. 줄곧 좋아했어.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보고 있자면 마음이 너무 떨려서 볼 수가 없었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면서도 잊지 못했다. 매일 밤마다 아카아시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하지도 메세지를 보내지도 못했지만, 매일 밤마다. 


아카아시가 아카아시라서 좋았다.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얼굴을 보지 못해도 목소리를 듣지 못해도 마음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마주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걸, 키리에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아카아시가 퇴근하고 돌아와 내일 아침 식사준비까지 끝마쳤을 때는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는 때였다. 아이가 잠들어있는 방문을 살짝 열어본 아카아시는 소리나지 않게 조용히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가 흠칫했다. 바로 코앞에 보쿠토가 입을 꾹 닫고 서 있었다. 


“보…보쿠토 선배?”


입술을 꽉 맞물린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셔츠 끝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잡아끌고 거실로 향한다. 잡아 끈다고 해도 방향을 일러주는 정도의 미약한 몸짓에 불과했다. 아카아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잠자코 보쿠토의 뒤를 따랐다. 


이젠 거실이 보쿠토의 침실처럼 되어서, 탁상을 한쪽으로 밀어넣은 공간엔 이미 요와 이불이 깔려있었다. 먼저 보쿠토가 이불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없이 진지한 그 모습에 아카아시는 미간을 모으면서도 보쿠토의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일 있어요? 어디 보증 선 건 아니죠?”

“……그거 아니야…….”

“그럼 무슨 일인데요.” 

“이, 이거!”


보쿠토가 고개는 푹 숙이고서 두 손을 번쩍 내밀었다. 아카아시는 깜짝 놀라 몸을 살짝 뒤로 뺐다. 보쿠토의 손에는 종이 쪽지가 접혀있었다. 


“이게……뭔데요?”


아카아시가 주춤거리며 물었지만 보쿠토는 대답 없이 재차 손을 내밀기만 했다. 아카아시는 이맛살을 모은 채 보쿠토가 내미는 쪽지를 조심스레 손가락 끝으로 붙잡았다. 


“도대체 무슨……. ……아.”

“저, 저장 부탁드립니다!” 


반으로 접은 종이를 펼치자 거기엔 또박또박 눌러쓴 이름과 숫자가 있었다. 보쿠토 코타로, 뒤의 것은 그의 휴대전화 번호인 게 틀림 없었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 숫자를 하나 하나 되짚어나간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우스운 자기위안이었다. 


“…….”

“안될……까요오…….”

“…짜증나.”

“엑!? 내 번호 짜증나!?”


보쿠토가 번쩍 고개를 든다. 울상이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10년이 지났는데 번호 하나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사람은 그런 자신은 알지도 못하고서 저렇게 번호를 저장해 달라고 한다. 세상에 숫자같은 건 다 불타 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쿠토가 그를 올려다본다. 아카아시가 툭 내뱉듯 말했다.


“……찾아보니 번호 있었어요.”

“아?”

“그럼 선배도 주무세요. 저도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들어가 볼게요.”

“진짜 번호 있어!?” 

“네.”

“안 지웠어? 정말?”

“…….”


저 얼굴이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바라보는 눈동자가 저렇게 빛이 났고 그러면 이따금씩 자신의 한 호흡까지 모두 그를 향하는 것만 같았다. 저 빛에 이끌려서. 


왜 또 다시 저런 얼굴,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가 없다. 과거의 저 얼굴이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지금도 아닐 것이다. 저 사람이 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어떤 표정을 하게 될까. 키리에나 안즈를 바라볼 땐 어떤 얼굴이었을까, 지금도 저렇게 눈이 멀 것처럼 반짝거리는데. 


‘그러니까 짜증난다고…….’


그렇게 짜증이 치솟고 싫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어야 하는데. 


아카아시는 종이쪽지를 쥐고 있던 손을 자연스레 등 뒤로 돌렸다. 조심스레 감싸쥔다. 손 안의 종이가 어린 새의 깃털처럼 보드랍게 느껴졌다. 


“네. 있었어요.”


잊지 못했으니까. 아카아시는 속으로 말을 삼키고 등을 돌렸다. 뒤에서 보쿠토가 더듬더듬 잘 자, 하고 인사해왔다. 곧장 침실 문을 닫으려 했던 아카아시는 조금 멈칫하고는 다시 문을 조금 열었다. 보쿠토는 계속 아카아시의 침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보쿠토의 얼굴은 잔뜩 상기된 채였다. 저래서 정말 잘 수나 있을까,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그맣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보쿠토가 눈을 크게 뜬다. 그 눈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깊이 접혀서 활짝 웃는 얼굴이 되기까지는 한순간이었다. 유리구슬이 와르르 쏟아지며 빛을 산란하는 것처럼 눈이 아파서 아카아시는 얼른 문을 닫았다.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아카아시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회사 건물 복도의 유리창에는 빗방울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쏟아지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서류철을 허리에 끼고서 손목을 걷었다. 손목시계가 오후 세시에 가까워져간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깨물고 미간을 모았다.


‘카즈마가 아침에 우산 챙겨 갔을까.’


평소에는 꼬박꼬박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바쁘고 피곤한 통에 깜빡 잊고 말았다. 


‘보쿠토 선배한테 카즈마 학교에 가달라고 하면…….’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인지, 그게 보쿠토라는 게 불행인지, 아카아시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뒷주머니의 휴대전화를 꺼내다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빛이 들어온 휴대전화 액정에는 삭막한 아이콘 몇 개가 떠있는 것이 전부였다. 다이얼로 전환되어 숫자 패드가 떴지만 누를 수 있는 것은 없다. 아카아시는 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스스로를 자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연락이 끊긴지는 10년, 그의 연락처를 지운지는 6년, 그의 연락처를 잊은 지는……. 


아카아시는 의식적으로 액정의 빛을 꺼뜨렸다. 잊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장 무서운 건 여기서 기억을 되짚으면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렇게까지 그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상흔을 남겨놓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마른 세수를 한 번 하고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반수는 아직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반수는 돌아오는 그를 한 번 흘끗 바라볼 뿐이다. 아카아시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곤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아이만 학교에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올 참이었다. 


주차장으로 나가는 잠깐 사이에 흠뻑 젖었다. 아카아시는 운전석에 앉아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고는 뒷좌석에 놓인 우산을 확인했다. 와이퍼가 기계음을 내며 빗물을 닦아내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핸들을 손에 쥐었다. 출퇴근 시간에 비하자면 한적한 편이었지만 비가 와서 그런지 움직임이 원활하지는 않았다. 


따각 따각, 핸들을 쥔 손 끝이 규칙적으로 소리를 낸다. 아카아시는 멍하니 와이퍼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비가 왔던 날이 있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은 그 기억 또한 내던져버렸기 때문이다. 우산이 있었다. 그의 사물함엔 항상 여분의 우산이 들어있었다. 체육관에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비가 오네요, 그런 말을 읊조렸는데 보쿠토가 불쑥 그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 우산 안 가져왔어?


가져왔다고 대답할 겨를도 없이 보쿠토가 부실까지 뛰어가서는 자신의 우산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증거를 내보여야 그가 믿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자기가 우산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혼자 앞서 달린다. 이따금 선배 행세를 할 기회가 오면 보쿠토는 저렇게 한껏 들떠서는 눈을 반짝거리곤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만 우산을 깜빡했다며 잘 부탁한다고 말해버리고 말았더랬다. 


빠아아앙 


아카아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에서 경적 소리가 울렸다. 불이 어느새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때 일이 다 기억이 나고.”


아카아시는 한숨처럼 중얼거리곤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까지는 썩 멀지 않았다. 근처를 보자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형들로 교문이 번잡했다. 아카아시가 근처에 차를 대어두고 우산을 찾을 때였다.


똑똑!


빗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경쾌하게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뒷좌석으로 손을 뻗고 있던 아카아시가 놀라 자세를 바로했다. 보조석 쪽 유리창 바로 앞에 누군가가 우산을 기울이며 서 있었다. 아카아시가 알아본 기색을 비추기가 무섭게 뒷좌석 문이 벌컥 열린다. 곧장 빗소리가 차 안으로 쏟아지고 어린 아이가 뒷좌석에 올랐다. 그 문을 닫아준 남자, 보쿠토가 당연하다는 듯이 보조석에 올라탔다. 


“카즈마? 보쿠토 선배까지……. 어떻게…….”

“후아, 비 너무 와서 우산으론 안 될 것 같았는데 아카아시 와서 다행이야! 어떻게 딱 만났네!” 

“선배가 어떻게 여기에 있습니까?”


보쿠토가 우산을 말아 발 밑으로 밀어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비 너무 오길래, 카즈마 우산 안 가져갔나 싶어서 나왔지. 그런데 무슨 비가 이렇게 내리냐? 우산 써도 다 젖겠……. 히익, 아카아시도 다 젖은 거 아냐? 너는 차를 타고 왔는데 왜 젖었어!”

“회사에서……. 주차장까지 가는 사이에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오늘도 일 늦어?”

“네.”


아카아시는 담백하게 대답하며 백미러로 뒤를 살폈다. 아이는 살짝 부끄러운 듯이 눈을 내리깔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안전벨트 매야지, 카즈마.”

“네.”

“보쿠토 선배도 매세요.”

“귀……매겠습니다.”


귀찮은데, 하고 투덜거리려던 보쿠토가 입을 꼭 닫고 후다닥 안전벨트를 맨다. 아카아시는 핸들을 유연하게 움직여 차의 방향을 틀었다. 


“선배가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카즈마, 감사하다고 인사드렸니?”

“……네.”

“아, 아니. 뭐 대단한 것도 아닌걸. 아! 대단한 건 이게 아니라 진짜 있어! 내가 빨래도 다 걷어놨다고~!”

“그건……. 그건 정말 감사하네요.”


보쿠토가 금방 우쭐한 표정을 짓는다. 아카아시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에 보쿠토는 뒤에 앉은 아이에게 실없는 대화를 걸고 있었다. 아이는 아직 낯을 조금 가리는 듯이 눈을 피하며 대꾸했지만 보쿠토는 개의치 않았다. 


아이의 학교에서 집 앞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건물 바로 앞에 차를 세웠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씻고. 오늘은 저녁 두 사람이 알아서 해먹어야 겠어요. 반찬 만들어 놓은 건 냉장고에 있으니까 밥만 해서…….”

“아카아시는?”

“저는 회사에서.”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곤 몸을 돌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눈을 크게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본다. 


“카즈마, 저녁 잘 먹고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 알았지?”

“……네.”

“선배, 부탁할게요.”

“나만 믿어!”


차 안에만 볕이 든 것 같았다. 보쿠토는 와하하 웃고는 요란하게 차문을 열고 나섰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가 비에 맞지 않게 감싸고서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다. 아카아시는 빗물로 흐려진 차창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때 아파트 건물 안에서 한 사람이 다시 나왔다. 


“보쿠토 선배?”


우산을 기울여 차창으로 바짝 다가온 사람은 보쿠토였다. 아카아시는 살짝 창문을 내렸다. 아이와 장난치며 말을 걸 때와는 다른, 조금 진지한 얼굴의 금빛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그, 뭐냐. 이런 일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면 되니까!”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고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내가 해줄게, 보쿠토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충동적으로 불쑥 말했다. 


“선배 번호가 없어서요.”

“……아?”

“다음에 필요하면 여쭤볼게요.” 


달리 보쿠토의 번호를 입수할 수 있는 경로는 많았다. 보쿠토가 잠든 사이에 그의 휴대전화로 자신의 번호를 누르기만 해도 된다. 그런데 굳이 없다고 말해버린 건 심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보쿠토를 흘끗 곁눈질하고는 천천히 차창을 다시 올렸다. 


“비 더 맞지 말고 들어가세요.”


운전을 해 단지를 빠져나가는 동안 백미러로 보쿠토의 모습이 비쳤다. 우산을 들고서 넋빠진 얼굴로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이었다. 아카아시는 아파트 단지에서 아주 벗어날 때까지 그 모습을 흘끗거리다가 회사 건물의 주차장 앞에 도착해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짓을…….’


아카아시는 핸들에 이마를 갖다 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빗방울이 차창 때리는 소리만 웅웅 울려퍼졌다. 


전화번호 같은 거 진작 지웠다는 이야길 하면 보쿠토가 어떤 표정을 할지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다. 일부러 심술궂은 소리를 하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서운해했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을 보는 건 저열한 희열을 안겨주었다. 그에게 나만이 특별해, 그런 생각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그에게는 자신뿐이라고. 자신만이 그토록 특별하다고. 


단어로, 말로, 목소리로, 문장으로 정의된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실감한 건 보쿠토가 졸업하고 난 뒤였다. 그에게 정말로 내가 특별한 사람이었나? 확신은 덧없이 스러졌고 이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특별했다면, 정말로 소중했다면 이럴 수는 없었다. 


그랬으면서 보쿠토는 왜 갑자기 나타나서, 고작 번호가 없다는 한 마디에 세상이 다 무너지는 것처럼 굴고 있을까. 왜 자신은 그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 왜 자신이 아직도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고 싶은 걸까. 그래서 그가 정말로 자신의 말 한마디에 저러는 얼굴을 보고서 무얼 어쩌려고. 









“아카아시 씨? 요즘 일 많은가봐.”


아카아시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파티션에 살짝 기대어 말을 거는 사람은 직장 동료였다.


“좀 지친 것 같은데, 괜찮겠어?벌써부터.”


동료의 걱정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제 곧 있으면 신품 개발에 들어가야 한다. 지금은 그런 때에 비하면 한가로운 편으로, 그 때가 되면 출근을 하지 않는 날도 다반사였다. 퇴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곤해 보입니까?”

“음, 피곤보다는 그냥 좀 뭐 신경쓰이는 게 많은 것 같아. 괜찮은 거 맞아?”


괜찮습니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동료는 영양제라도 챙겨먹으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떠나갔다. 아카아시는 슬쩍 미간을 눌렀다. 


보쿠토가 있어도, 같은 공간을 공유해도 자신은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그 문제를 처음부터 확신한 건 아니었지만 쿠로오도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 너 괜찮구나, 그렇게. 분명 괜찮았던 지점이 있었다. 


‘그러다가…….’


—이거, 아카아시가 좋아하는 거라서…….


아카아시는 동작을 멈추었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는다. 마른 눈이 뻐근하다 못해 시렸다. 보쿠토의 목소리는 녹음을 했다가 다시 재생하는 것처럼 선명하고 끊임없이 그의 귓가에 감겨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거라서 사려고 했다고?’


그걸 내가 언제 좋아했는데. 그게 언젯적 일인데. 10년도 전에, 고등학교에나 다닐 때에. 자신조차 잊었던 것을 가지고 와서는 그런 말을 한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자신은 변했다. 그 시절의 것들 가운데에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없는 건, 가장 남아있지 않는 건 바로 보쿠토 그였다.


‘도대체 왜.’


왜냐하면 보쿠토가 떠났으니까. 


당신이 먼저 떠났으니까. 친밀했던 선후배 사이마저 내팽개친 건 보쿠토였다. 무엇도 남겨주지 않았고 닿을 수도 없었다. 그의 결혼식마저 자신이 영국에 있을 때였지 않았나. 차라리 보쿠토의 결혼식을 눈으로 보았다면 이 끈질기고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단칼에 쳐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한 밤이 얼마나 많고 또 깊었는지 모른다. 


그 밤과 낮의 끝에, 재회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아카아시에게 가시관이나 다를 바가 없었고 아카아시는 제대로 호흡하기 위해 그 가시관의 가시들을 모두 쳐냈다. 웃었던 기억, 즐거웠던 추억, 함께 했던 시간들, 마주쳤던 시선, 그 모든 것들을. 


없어야 살 수 있었고 없앴기에 살아올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에겐 보쿠토와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흐릿했다. 썼다 지워 자국만 남아있는 오래된 일기장처럼.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보쿠토와 자신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는 고등학교에서의 2년이 전부다. 그 뒤로 연이 끊긴 채 10년, 그런데 어째서 보쿠토는 마치 어제 일처럼 그 시절의 자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요즘은 보쿠토와 눈을 마주치면 자꾸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한 집에 살고 있으니 일일이 피하는 것도 여의치가 않아 자꾸 신경이 곤두섰던 차였다. 그게 누적이 되니 겉으로도 비칠 수밖에. 


‘슬슬 돌아가라고 해야 하나.’


유명인사의 이혼 소식이라곤 해도 들어가는 장작이 없으시 시들해진다. 들썩거렸던 매스컴도 잠잠해진지 오래였다. 아카아시는 벽에 몸을 기대고 손가락 관절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나가라는 이야기는 진작 할 수도 있었는데 지금까지 머뭇거린 것은 아이때문이다.  


‘카즈마 돌봐줄 사람을 먼저 구하고…….’


지금까지는 아이가 하교하고 난 오후 시간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보모를 구하려면 구할 수도 있지만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 탓에 오후 시간 내내 아이를 혼자 두었다. 그게 얼마나 마음에 걸렸는지 모른다. 무얼 특별히 신경써서 돌봐주는 것이 아니더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이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생각보다 의지가 되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라고.’


10년동안 연락한줄 닿지 않았던 사람을 이제야 만나서 아직까지도 한다는 생각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자신이 10년만에 이렇게나 변했듯이 보쿠토 역시 달라진 면이 있을텐데, 어쩌자고 이렇게 쉽게.


‘그래……. 일단은 사람을.’ 


신작 개발에 들어가면 퇴근 시간이 지금보다 더 늦어지게 된다. 이젠 정말로 사람을 구해야 할 때이기는 했다. 그러고 나면, 이제 돌아가라고 말을 하자. 


돌아가라고 하자, 아카아시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



—야이 미친 새끼야!


보쿠토는 귓전에서 휴대전화 단말기를 떼어냈다. 친구들에게 언제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모처럼 마음을 다잡고 코노하에게 연락을 한 것인데 신호음은 한 번도 채 울리지 못했고 보쿠토는 코노하의 이름 첫 글자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코노하가 전화를 받자마자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었다. 


“코, 코노하. 귀 아파!”

—너 진짜 아카아시한테 갔냐?

“아 왜.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야! 너 당장 나와!

“못 나가, 나가면 자동으로 문 잠긴단 말야.”


보쿠토는 소파에 드러누워 볼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단말기 너머의 코노하는 어지간히도 열이 오르는 기색이었다. 곧 격렬한 바람소리가 들린다. 부채질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미쳤지, 이 새끼가 진짜 미쳤지…….

“도대체 왜 그러는데? 아카아시는 괜찮다는데.”

—아카아시가 네 문제에서 안 괜찮다고 했던 적이 있긴 했냐?

“많았거든? 내가 아이스크림 두 개 먹겠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해, 연습 좀 더 하겠다고 해도 안 된다고 해, 맨날 안 된다고 했었거든.”

—그래, 10년 전에.

“…….”

—10년 전에는 그랬지. 네가 온갖 핑계 대면서 애 피하기 전까지, 같이 있었을 때는 그랬지.


보쿠토의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감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노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아시 아이도 있어. 봤냐?

“아—, 아. 카즈마, 봤어.”

—아무 생각이 안 드냐? 그 애 보고도?

“…….”


보쿠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생각하면 눈앞이 핑 돌았다. 


“…정말 아카아시 애더라고.”

—…….


아카아시는 아카아시로 여전했지만, 아카아시의 아이는. 


그가 아카아시를 보지 못하는 동안 무수히 생각하고 곱씹어보던 생각과 그리움의 응집체같았다. 아이가 그를 바라보는 고갯짓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곁에 있지 못했던 시간을 그 아이가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카아시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쏟아 키웠다는 것을. 아이에게는 아카아시가 그토록이나 전부인 것이다. 그 고갯짓 하나마저 쏙 빼어닮을 만큼. 


“놀라기는……놀라기는 했어.”

—놀랐다 한 마디로 끝이야? 그래서 어린애까지 있는데 그 집에 눌러 앉아있냐, 아직까지?

“눌러앉아 있는 거 아니거든?”


보쿠토는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매스컴이 진정된지도 사실은 며칠이나 되었다. 키리에나도 집을 떠났다고 했다. 돌아가려고 마음먹었다면 진작 이 곳을 떠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밥값은 하고 있어!”

—무슨 밥값?

“설거지도 하고……. 또 장 볼 때 짐꾼도 하고…….”

—당장 안 나오냐.

“나가면 문 자동으로 잠긴다니까.”

—모르는 척 할래, 보쿠토? 너 이제와서 이러는 거 애한테 어떨지 생각은 안 하냐.

“내가 이제와서 뭘 그러는데.”


이제와서라니, 지금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아무것도 하지를 못했는데. 보쿠토는 볼멘 소리를 속으로 삼켰다. 


—너 진짜 거기 계속 있을 거야?

“아카아시가 나가라고 하면 나갈거야.”

—네가 알아서 나와야지!

“그 짓 했어, 해 봤어. 10년 전에.”


내가 알아서 나왔었어. 


그리고 10년이었다. 보쿠토는 소파의 팔걸이에 목을 대고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거꾸로 보이는 발코니의 창, 그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그대로 눈이 닿아 아픈 듯이 시렸다. 눈을 꾹 감아 본다. 감은 시야가 새하얗게 번져가는 기분이었다. 마음도 시리고 희게 번져간다. 지난 10년 내내 아카아시가 곁에 없다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이렇게 시렸다. 


이게 무엇인지, 어떤 감정인지 이제야 겨우 알았다. 


그러니까 아카아시가 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안 가. 


—보쿠토.

“어쨌든 이혼은 잘 정리됐어. 걱정할 거 없어. 아카아시는……. 아카아시는, 내가 잘 할거니까.”

—애 너무 괴롭히지 말고!


코노하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보쿠토는 휴대전화를 자신의 가슴팍 위에 얹어놓고는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아시가 없는 자리에서, 코노하는 항상 아카아시를 일러 ‘애’, 그렇게 부르곤 했다. 애한테 너무 그러지 마라, 애 너무 괴롭히지 마라, 애 하고 있는 거 봤냐. 


보쿠토에게 아카아시는 한 번도 아이인 적이 없었는데 코노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걸까, 보쿠토는 툭 소파 바깥으로 팔을 떨어뜨리며 생각했다. 자신에겐 아카아시가 너무나 커서 어떻게 해도 단 한 순간도 아이 보듯이 할 수가 없었는데. 























아카아시는 팔짱을 끼고서 현관 옆의 신발장 앞에 서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어깨는 처지고 눈썹도 같은 방향, 온몸으로 시무룩함을 피력하고 있다. 저마저도 나름대로는 마음을 감추려고 하는 것임을 아카아시는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가 어른스러운 척을 하려고 들 때마다 저런 눈길이었으므로. 


“하아, 보쿠토 선배.”

“…….”

“선배 얼굴 아직도 신문 1면에 실리고 있는 거 모르십니까. 작은 편의점도 아니고 대형 마트 같은 데를 가면 다 알아봐요.”

“알아…….”

“그러니까 선배도 지금까지 어디 멀리 안 나가셨던 거잖아요. 거기다…….”


아카아시는 말을 삼키다 말고 미간을 모았다. 아이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아카아시의 손을 잡을 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다, 아이하고 선배가 너무 닮아서 같이 있으면 틀림없이 들키는.’


이혼을 하고 나왔는데 그와 쏙 빼닮은 어린 애와 함께 있으면 누구라도 친아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심지어 저렇게나 눈이 번쩍 뜨이는 외모다. 혼자라면 어떻게 무마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아이까지 함께라면 반드시 들키게…….


아카아시는 눈매를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여전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는 기다리고 있을게, 잘 갔다 와, 그런 말을 웅얼거리는 중이었다. 잠깐 팔짱을 끼고 섰던 아카아시는 아이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모자.”

“응?”

“모자 쓰시면요. 모자 눌러 쓰시고 선글라스를 끼시든 마스크를 하시든 둘 중에 하나 하시고……. 그러고 같이 가요.”


그게 더 눈에 띄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리는 정도의 성의는 보이는 것이 인간된 도리 아니겠는가. 아카아시의 말에 처음에는 눈을 크게 떴던 보쿠토가 반색을 하고는 거실로 뛰어간다. 그리곤 가지고 왔던 짐을 다 뒤집어 엎는다. 하지만 캡모자를 찾아낸 것이 고작이었다. 모자만 쥐고 선 보쿠토가 반쯤은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기에 아카아시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내쉬고 보쿠토의 머리에 모자를 올린 뒤 후드까지 그 위에 뒤집어씌운다. 보쿠토의 시선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만하면…….”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잠깐 바라보다가 결국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 옷장을 열고 아이가 쓰는 조그만 캡모자를 챙겨든 아카아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의 머리 위에도 모자를 씌워주었다. 아이는 모자의 챙을 만지작거렸지만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함박웃음이 걸린 보쿠토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빠르게 고개를 돌리곤 현관문을 잡아 열었다. 


“그럼 얼른 장 보고 돌아오죠.”


오늘은 며칠 전에 먹으려다가 먹지 못했던 햄버그 스테이크를 해먹기 위해 장을 보러 가려는 차였다. 식재료 사들고 올 테니 집을 봐달라는 말에 보쿠토는 버림받은 강아지마냥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두고서 나올 수가 없었다. 


*


“아이스크림은 햄버그 스테이크 재료가 아닌데요.”

“그, 그렇지만.”


커다란 카트에 살짝 통으로 된 아이스크림을 집어넣던 보쿠토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눈동자만 돌리며 얌전히 아카아시의 곁에서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지난 번에 못 먹었단 말야.”

“지난 번에요?”

“…….”


아뿔싸, 보쿠토는 입술을 안으로 꽉 말아깨물었다. 아카아시가 눈을 가늘게 뜨곤 아이스크림을 다시 보쿠토의 손에 쥐어주었다.


“있던 데에 두고 오세요.”

“내, 내가 따로…계산…하면…….”

“그거 한 통 혼자서 다 드시게요? 냉동실 안 빌려줄겁니다.”

“피, 필요 없거든!”

“두고 오세요.”

“씨잉…….”


보쿠토가 왈칵 울상을 짓더니 아이스크림을 제자리에 두러 돌아간다. 아카아시는 그 뒷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보쿠토가 며칠 전에 사놓은 간식이 한아름 남아있었다. 곧 보쿠토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터덜터덜 다가온다. 아카아시는 쇼핑 카트를 끌며 보쿠토를 한 번 흘겨보았다. 


“돼지고기랑 소고기 사고. 양파가 떨어졌으니 양파도 사야겠네요. 카즈마, 다른 먹고싶은 거 있어? 해줄게.”

“저는 다 좋아요.”

“다 말고. 특별히 더 먹고 싶은 건 없어?”


대답은 아이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그럼 나 불고기!”

“…햄버그 스테이크도 고기잖아요. 그리고 보쿠토 선배는 양파나 가져오세요.”

“쳇.”


보쿠토가 또 투덜거리며 야채 코너로 터덜터덜 가는 사이에 아카아시는 몸을 굽히고 아이와 얼굴을 마주했다. 금빛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가며 그를 바라본다. 아카아시가 아이의 모자를 한 번 쓰다듬었다가 챙을 지나 뺨을 감싸쥐었다. 


“카즈마는 간식이나 반찬 정말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진짜 아무거나 좋은데…….”

“정말?”

“……그러면 연근…….”

“연근? 튀김? 조림?”


아이가 금방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이 된다. 아카아시는 그런 카즈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번쩍 안아들었다. 아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뜬다. 아카아시는 아이의 뺨에 얼굴을 가볍게 부볐다. 


“튀김도 조림도 다 해버리자.”

“아, 아니에요. 그러니까…….”

“금방 해줄 수 있어.”


아이가 귀까지 빨개져서는 괜찮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카아시는 고개를 흔들고 들어주지 않았다. 한참이나 실랑이를 하다가 내려줄 즈음에 보쿠토가 양팔 가득 양파를 안고 돌아왔다.


“이, 이거면 돼?”

“……너무 되니까 이것만 주시고 나머지는 이따가 갖다 놓죠.” 

“내가 많이 가져왔어?”

“아주 많이요. 아, 이참에 양파 장아찌도 만들까…….”


아카아시는 우선 카트 안에 양파를 쌓아두고서 고심하며 천천히 카트를 밀었다. 보쿠토가 양파 장아찌는 좋아한다며 환호성을 지르다가 아카아시의 매서운 눈빛을 받고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세 사람의 장보기는 대개가 보쿠토가 어디에 쓰이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것들을 가져오면 아카아시가 돌려보내고, 그 사이사이에 ‘그거 두고 올 때 간장 가져오세요.’ 같은 문장이 오가는 식이었다. 


“카즈마, 너하고 나왔을 때도 저 사람 저랬니?”

“…….”


보쿠토가 퓨전 요리용이라고 쓰인 파인애플이 들어간 소스병을 제자리에 두러 간 사이에 계산대 앞에 선 아카아시가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가 움찔하고는 눈을 피한다. 그걸 본 아카아시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때 같이 간식 사왔다는 거 사실 저 사람 혼자 갔다 온거지.”

“아, 아버지. 그게…….”

“보나마나 혼자 나갔다가 돌아오니 문이 잠겨 있었겠지. 그거 열어 줬었니?”

“……네.”


아이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다. 아카아시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간식같은 것을 욕심내기도 한다고 안심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아이는 여전히 바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보쿠토와 나갔다고 거짓말을 한 것도 보쿠토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카즈마는 저 사람이 싫지는 않아?”


아이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말간 금빛 눈동자가 정말로 똑같은 색이었다. 보쿠토와. 아이를 처음 본 코노하가 그렇게 걱정을 할 법도, 그럴 법도 하였다.


“그럼 다행이다.”


하기사 아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아카아시는 옅게 미소를 그리고는 살며시 아이의 등을 떠밀었다. 아이 근처에는 계산대 바로 앞 조그만 냉동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저 아이스크림 사 가자. 카즈마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그것도.”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샐쭉한 얼굴이 되어 돌려놓았던 아이스크림과 같은 종류의 미니컵을 가리켰다. 아이는 조금 멈칫하다가 고개를 젓고는 같은 것으로 골라 꺼내왔다. 


보쿠토가 퓨전 요리용 파인애플 소스병을 제자리에 두고 돌아왔을 때, 아이스크림은 카트 안의 여러가지 식자재 사이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



“앗 차가워! ……어?”


주말을 맞이해 나가서 장을 보고 번거롭기까지한 과정을 거쳐 요리를 해 먹고, 먹은 것을 다 치우고 난 뒤에 보쿠토가 설거지까지 마치고서 거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보쿠토가 노곤한 주말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몸을 쭉 뻗을 때 그런 그의 뒤에 그림자가 졌다. 


뺨에 닿는 차가운 기척에 보쿠토가 놀라 몸을 움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아카아시는 놀라게 하는 장난을 쳤다고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담백한 얼굴로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오늘 낮에 장을 보며 보쿠토 몰래 사왔던 아이스크림이었다.


“어, 이거 사지 말라고, 아카아시가…….” 

“그랬죠.”

“그런데 어떻게…….”

“몰래 샀습니다. 드세요. 후식이에요.”

“어? 어어?”


당황한 보쿠토의 손에  억지로 아이스크림을 쥐어준 아카아시는 다른 한 손에 있는 아이스크림은 아이를 불러 쥐어주었다. 아카아시가 아이 몫의 아이스크림 뚜껑을 열어주고 있는 사이에 여전히 어딘가 당황한 보쿠토가 다가왔다. 어린애가 걷는 것처럼 어색한 걸음이었다. 


“이, 이거 몰래 샀어?”

“네. 선배가 그렇게 아이스크림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지만요.”


그렇게 말하는 아카아시의 목소리에는 웃음과 놀림이 아주 얕게 섞여 있었다. 보쿠토는 홀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거…….”

“네?”


아카아시는 아이의 손에 스푼을 쥐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갸웃했다. 보쿠토는 아이스크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 눈가가 붉은 듯도 한 것이 이상하다고, 아카아시가 생각했을 때 보쿠토가 말했다.


“이거, 아카아시가 좋아하는 거라서…….”

“……네?”


아이가 멈칫하며 고개를 든다. 보쿠토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그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언제나 고민없이 선택하곤 했던 것이었다. 줄곧 그랬다. 내내 먹었던 것이다. 학창시절을 내다버리며 함께 지웠던 것들 중에 하나였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저 아이스크림 잘 안 먹어요. 선배 드세요.”


아카아시는 잠깐의 침묵 끝에 담담한 말로 밀어내고는 차 마실 물을 끓이겠다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아이가 그런 아카아시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가서 그에게 자신 몫의 아이스크림을 권했지만, 아카아시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할 뿐이었다. 














“여, 아카아시.”

“…….”


퇴근하고 연구실을 나서는 길, 아카아시는 오랜만에 보는 지인의 얼굴을 보고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주차해놓은 자동차의 본네트에 기대어 있던 남자가 몸을 바로세우며 친근한 표정을 짓는다. 한 때는 하루 걸러 한 번씩 보았던 얼굴이었다. 


“쿠로오 선배.”

“아직도 선배라고 하네.”

“선배는 선배죠……. 오랜만입니다.”


그와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한 것도 몇 년만이다. 그 전에도 만나는 것은 우연이나 억지에 가까웠던 것이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끊어졌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상대 쪽에서 아카아시의 마음을 배려해 주었다는 것이 옳겠으나. 


“카즈마는 잘 지내고?”

“네. 많이 컸어요.”


이젠 초등학생이에요,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며 다가왔고 쿠로오는 자연스레 앞의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저 차 끌고 왔어요.”

“내일 아침에도 데려다줄게. 타.”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것이 분명했다. 유하고 부드러운 것 같은 사람인데도 단호한 구석이 있었다. 아카아시는 짤게 한숨을 내쉬고 차에 올라탔다. 쿠로오는 문까지 닫아 주고 나서야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좌석 사이의 홀더에는 아직까지 김이 오르고 있는 커피 두 잔이 있다. 사들고 온 모양이었다. 아카아시의 눈길을 알아챈 쿠로오가 마시라고 사온 것이라며 권했다. 그의 손 안에서 핸들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보쿠토 이혼했는데, 들었어?”

“…….”

“와, 표정 봐. 역시 너한테 갔나보네.”

“역시는 무슨…….”


아카아시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10년이나 연락이 없던 사이에 역시라는 단어가 붙는 것이 우스웠다. 


“보쿠토가 연락이 뚝 끊겨서 친구들도 난리 났거든. 매스컴에서는 떠들어 대는데 애하고는 연락 된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것때문에 찾아오신 겁니까? 수거해 가시던가요.”


아카아시가 ‘집 주소 불러드릴까요?’라며 무신경하게 뱉는 말에 쿠로오가 뭐 대단한 농담이라도 들은 양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격해져 아카아시가 돌아볼 즈음 해서 때를 맞추어 신호 대기에 걸린다. 아카아시는 이러다 사고 나는거 아니냐며 쿠로오를 노려보았다. 쿠로오가 겨우 숨을 정리했다. 


“아, 아니. 그건 보쿠토가 알아서 하겠지. 사안이 사안이었으니까 찾으러 다닐 일도 아니고.”

“그럼 무슨 일이신데요.”


보쿠토와도 아주 오랜만이었지만 쿠로오와도 몇 년의 세월을 틈 아래에 두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줄은 몰랐을 만큼. 아카아시가 차창에 기대어 있던 고개를 쿠로오 쪽으로 돌렸다. 쿠로오는 핸들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아카아시를 흘끗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에 대해 질문을 받을 줄 몰랐다는 듯이 의아한 표정과 함께.


“너한테 왔는데 그럼 너 때문에 온 거지. 보쿠토가 혹시 너 찾아갔나 해서.”

“…….”

“괜찮나, 싶어서……. 건물에서 나오는 거 보자마자 괜찮구나 했는데 오랜만이고 하니까 집까지 가는 길이라도 얘기 좀 하자고.”

“……무슨 그런.”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아카아시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차마 말로 하지는 못한 채 다시 고개를 돌렸다. 쿠로오는 그런가, 하며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쓸데없이 다정하고 배려심 넘치는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그 성격에 도움을 받은 처지에 할 말은 아니겠으나. 


—괜찮나, 싶어서…….


아카아시는 쿠로오가 했던 말을 되짚어보았다. 연락이 끊어졌던 선배를 오랜만에 만난 것에 대해 할만한 걱정은 아니다.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걱정을 이해했다. 쿠로오는 아이를 본 적이 있다. 아카아시가 주위 사람들과 굳이 연락을 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카아시는 아이와 함께 살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서 아이를 단 둘에게만 보여주었다. 한 사람은 쿠로오였고 다른 한 사람은 코노하였다. 쿠로오는 아이를 보고서 ‘혼자서 키우게?’라는 말을 했고 코노하는 그를 붙잡고 날밤을 지새웠다. 이 극명한 반응의 이유는 단 하나, 아이가 보쿠토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다.


—아니에요, 정말로 우연이에요.


코노하는 아카아시의 부정에도 한참이나 못믿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도 마지막엔 아이가 보쿠토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관계가 없다는 것이 닮았다는 현실을 부정해주지는 않는다. 코노하는 아카아시가 보쿠토와 닮은꼴인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자신의 심려를 굽히지 않았다. 닮았기에 키우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보쿠토 자식이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너 얼굴도 안 보는데 똑 닮은 애를 잡고 키우고 있으면 그게 걱정이 되냐, 안 되냐. 


아, 정말 그랬구나. 아카아시는 지금껏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울타리 안에 두었던 사실을, 그 때 인정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정말로 저를 보지 않으려고 했던 거로군요,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또 코노하의 얼굴을 백짓장처럼 만들게 될테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더 이상은 코노하를 만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만나서 하는 것이 걱정 뿐이라면 만나지 않는 편이 좋다. 아카아시의 고교 시절은 그런 식으로 희미해졌고 그렇기에 더욱 실감했었다, 자신의 학창시절은 정말로 온통 그 사람뿐이었다는 것을. 단 한 사람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전부를 내던져야 했다. 


“보쿠토는 뭐래? 카즈마 보고.”

“제 애냐고 하죠.”

“푸헉.”


쿠로오의, 헛웃음이 터진 소리다. 아카아시는 피식 웃고는 다시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빼어닮은 아이를 보고서 놀라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야 놀라기는 했으나 곧장 네 아이냐고 물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넌.”

“제 애라고 했죠. 카즈마가 제 애지 누구 앱니까.”


아카아시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고 쿠로오는 그에 대해 추궁하지 않은 채 정면만 바라보았다. 


“보쿠토가 뭐라 하면서 쳐들어왔어?”

“살려달라고요. 이혼했더니 매스컴이 깔려서 갈 데가 없다고.”

“헤에, 사실대로 다 얘기 했네.”

“솔직히 말해서 보쿠토 선배도 다 크셨구나 싶었습니다. 10년 전이었다면 제가 자기 결혼 사실 같은 건 모른다고 생각하고 거짓말 하려고 들었을텐데.”


쿠로오가 킬킬거리며 웃는다. 아카아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흐른 것이다. 보쿠토에게도, 자신에게도. 자신은 이제 보쿠토를 보아도 괜찮다. 마음은 흔들리지만 쿠로오가 보고도 ‘괜찮다’라고 할만큼은 괜찮다. 그 정도면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너희 집 주소를 알았네, 보쿠토가.”

“아.”

“생각해보니까 지금 나도 너희 집 주소 모르는데. 너 어디 사냐, 아카아시?”


사거리에서 신호에 걸려 서 있던 쿠로오가 어색하게 웃으며 아카아시를 돌아본다. 아카아시는 한숨과 함께 지금 머물고 있는 아파트의 주소를 불러주었다. 



*



‘정말 그 사람이 어떻게 주소를 알았을까.’


아카아시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자신의 거주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코노하 뿐이다. 쿠로오도 회사를 알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보고서 기함을 하며 놀라던 보쿠토의 모습을 보아서는 코노하가 알려주었을 것 같지는 않은 데다가 지금 사는 곳은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코노하도 모르는 곳이었다.


‘사람이라도 썼나?’


그 정도로 주변머리가 되던 사람이던가. 하지만 그 외에는 알 방법이 없기는 했다. 


‘혼을 내던지 해야지…….’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10년간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으면서 왜 갑자기 뒷조사를 하면서까지 찾아온 것인가? 


연락을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를 피한 것에 가까웠는데 이제와서 마음이 달라져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로 배우와의 결혼과 이혼 탓에 매스컴을 피하려는 이유만으로? 그런 거였다면 코노하도 쿠로오도, 다른 사람들도 있었을텐데. 어쩌면 지속적으로 연락한 상대들에겐 이미 파파라치들이 가 있었던 걸까. 달리 찾아온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자신이 그 어떤 이유를 바라기 때문인가. 바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보쿠토, 언제까지 있는대?”

“글쎄요. 기자들도 인터넷도 좀 잠잠해지면 알아서 가겠죠. 남의 집에서 눈칫밥 먹는 것도 불편할텐데.”

“걔가 그런 눈치가 있었으면…….”

“…그도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아주 둔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둔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 예민함을 코트 위에 몽땅 두고 와서 그렇지. 


쿠로오는 아카아시가 삼킨 말을 알아챈 것처럼 킥킥 웃음을 흘리며 부드럽게 운전했다. 아카아시는 여전히 차창에 이마를 살짝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학창시절을 떠올려본다. 공 하나를 바라보고 뛰어오르던 보쿠토가, 아직도 빛 얼룩 하나 없이 선연했다. 


“너 잘 있는거 봤으니까 됐다.”


쿠로오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진입해 바로 앞 주차장 근처에 차를 세우며 천천히 운을 떼었다. 아카아시는 내릴 짐을 챙기려다 말고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쿠로오는 아카아시를 흘끗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네.”


그 말은 아카아시가 아이와 함께 살겠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처음 했을 때에도 들었다. 아카아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기다린다.”

“저한테 무슨 일 생기기를요?”

“아, 진짜. 아카아시. 말 그렇게 할래.”


쿠로오가 흘겨본다. 아카아시는 픽 웃고는 태워주어 고맙다는 말만 남겨놓고 차에서 내려섰다. 쿠로오는 차 안에서 손짓했다. 들어가는 걸 보고서 가겠다는 뜻이었다. 아카아시는 한 번 꾸벅 인사하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아, 장 보는 거 깜박했네…….’


오늘 햄버그 스테이크 해먹기로 했는데. 하지만 돌아가기엔 늦었다. 아카아시는 오늘 저녁 메뉴가 바뀐다는 이야기에 어느 쪽이 더 실망을 주체하지 못할 것인지 재어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 









“다녀오셨습니까.”

“다녀오셨습니까~!”


아카아시는 살짝 헛웃음을 삼키고서 아이의 뒤에 선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보쿠토가 팔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앞에 선 아이는 조금 어색한 눈치이기는 했으나 이젠 익숙해진 듯하다. 나흘이나 함께 있었으니 익숙해질 때도 되기는 했다. 


저녁을 먹고 나자 보쿠토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달려든다. 요령이 부족해서 항상 곁에서 아이가 거들어야 했지만 그게 미울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가 숙제까지 하고 나자 졸음이 몰려오는지 거실의 소파 앞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아이를 안아 들어 침실에 눕혀 재우고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그렇게 방문에서 등을 돌리고 나서야,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단 둘이 남은 시간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많이 졸립대?”

“오늘 체육수업 있는 날이라 피곤했나 봐요.”


보쿠토는 아이가 갑자기 이른 시간에 잠든 것이 조금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아카아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안쪽 깊은 곳에 상비해둔 맥주가 있다. 아이가 잠든 틈을 타 간만에 맥주 캔을 따는데 그 소리를 듣고 보쿠토가 기웃거린다. 아카아시는 말 없이 캔 하나를 더 꺼내 보쿠토에게 건넸다. 


“수, 술이야?”

“네? 그럼 술이죠.”

“아……. 아, 그렇네. 그렇지.”


치즈 몇 조각도 함께 꺼내 접시에 덜던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유난한 반응에 미간을 모았다. 보쿠토는 한 손에는 캔을 쥔 채 그것을 바라보며 뺨을 긁적였다. 재밌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처럼 웃음기 어린 얼굴이었다. 


“아카아시가 술 마시는 거 처음봐서.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술 마실 수 있지…….”

“술 마실 수 있게 된지는 10년이나 됐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어?”

“……뭐 영원히 10대로 살고 싶으신가보네요.”


아카아시는 가볍게 쏘아붙이고는 안주 접시를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소파에 기대어 앉는다. 보쿠토도 소파 앞에 자리잡고 앉았다. 같이 반주라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보쿠토가 의욕적으로 치즈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맞아 맞아!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치!”

“저는 아니에요.”

“어?”


보쿠토가 맥주를 넘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카아시는 아무것도 없어 새카만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화면 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보쿠토의 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도.


“저는 죽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 그, 그래?”

“저한텐 지옥같았어요.”

“……아…….”


마음이 불타는데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신중하자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서, 단어를 고르고 말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어 그에게 다가가자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연은 흐릿해졌고 보쿠토는 다른 반려와 인생을 함께하겠다는 서약을 하고야 말았다. 둘 사이에 유형화된 약속은 그 무엇도 없었으니 그게 누구의 탓도 아니다. 하지만 그 기다리고 참고 또 기다리고 되새겨온 시간이, 그리하여 아무것도 맺지 못한 않은 그 시간이 그에게 기쁨을 남겨놓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화면에서 천천히 눈을 떼고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고개를 숙이고서 자신의 맥주캔만 바라보고 있었다. 침울해진 것을 알 것 같았다. 여전히 숨기는 것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까지 떠올렸던 아카아시는 그만 손에 힘이 들어가 캔을 찌그러뜨리고 말았다. 다행이 맥주는 반 이상이 비어 흘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아카아시는 말 없이 남은 맥주를 모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한 보쿠토가 뒤늦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 아카아시는 모르는 척하고선 짧게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유달리 이른 시간이지만 잠들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그러기 위한 술이었을 뿐이었다.  



*



함께해온 시간이, 자신이 기쁘거나 즐거워했던 시간이 다른 한 사람에겐 전부 지옥이었다고 한다면.


보쿠토는 욕실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 속에는 왠지 모르게 퀭한 얼굴의 남자가 이죽이는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동안 이 작은 아파트는 온통 보쿠토의 차지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보쿠토가 별다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닷새 가까이 지내는 동안 휴대전화는 켜 본 적도 없고 그건 TV도 마찬가지다. 보쿠토는 소파에 푹 늘어져 아카아시가 읽던 책을 보거나, 아니면 아이가 하교하기 전에 아침 식사 설거지를 해놓거나 했다. 


‘오늘은 바닥 청소도 해놓자~! ……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기력이 없다. 보쿠토는 억지로 세수를 하고 욕실을 나섰다. 세 사람이 있을 때엔 북적거리는 것 같은 아파트가 혼자에겐 지나치게 넓었다. 보쿠토는 거실의 발코니 창 앞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아파트단지 바깥쪽 인도로 오가는 사람과 차들이 작게 보인다. 보쿠토는 유리창에 쿵하고 이마를 박았다. 


‘힘들었……나?’


즐거웠던 고교시절, 이라고는 해도 10년도 전의 일이다. 사실 모든 일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흐릿하다 못해 백지 상태였고 기억나는 것들은 즐거웠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한 추억들이었다. 그 추억의 대부분을,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모든 것에 아카아시가 있다. 보쿠토가 고교 시절을 즐거웠다고 단언하는 건 그래서였다. 


그 시간들이 아카아시에겐 힘들었던 걸까. 지옥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그럴지도…….’


보쿠토는 다시 한 번 유리창에 이마를 쿵, 박았다. 자신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행동으로 보이는 것도 스스로가 제멋대로라는 자각은 있었다. 고교 시절의 친구들은 곁에 있는 아카아시를 보며 저런 것까지 다 받아주느냐고 놀리곤 했다. 그 때 아카아시도 그 얘기를 같이 들었었는데. 뭐라고 했더라. 그러게요, 그랬었나.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단 한 번도, 연락을.


보쿠토는 다시 쾅 하고 유리창에 이마를 박았다가 소리가 크게 울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유리창 다 깨지는 줄 알았네, 그렇게 말하며 일부러 수선을 떨어본다. 하지만 가라앉은 기분은 나아질 줄을 모른다. 보쿠토는 찬장을 요란하게 열어보다가 간식이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간식이라도 사다 놓으면 되겠다! 신세지고 있으니까!” 


보쿠토는 혼잣말을 큰 소리로 하고는 지갑만 챙겨 집 밖으로 나섰다. 열쇠 생각이 언뜻 났지만 자동으로 잠긴다고 했던 아카아시의 목소리도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양손 가득 간식거리를 한아름이나 사들고 돌아왔을 때, 보쿠토는 깨달았다. 자동으로 잠긴다고 하는 말이 자동으로 열린다는 말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카아시가 열쇠 문제로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었는지도. 


보쿠토는 아연한 얼굴로 현관문을 바라보았지만 방법은 없었다. 휴대전화는 집 안에, 자신은 집 밖에. 열쇠는 아카아시와 그의 아이에게, 그리고 자신에겐 산더미같은 간식 뿐. 


“아! 아이스크림!”


보쿠토는 그 와중에 사온 것들 중에서 아이스크림을 떠올리곤 황급히 비닐 봉투를 뒤져 아이스크림을 찾아냈다. 종류별로 다 사왔던지라 아이스바가 세 개, 종이통에 담긴 게 두 개나 있다. 보쿠토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우선 아이스바 하나를 먼저 뜯어 입에 물었다. 하지만 다른 봉투까지 아무리 뒤져도 스푼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보쿠토는 세 입만에 아이스바 하나를 끝장내고 다음 아이스바를 손에 들며 쿵, 이번에는 현관 문에 이마를 박았다. 하지만 기적처럼 문이 열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카즈마 몇 시에 오더라…….”


하지만 몇 시에 온다고 해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보쿠토는 울적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만 내려다보다가 주르르 주저앉아 문을 등에 대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스크림을 급히 두개나 먹어치웠더니 머리가 욱씬거렸다. 하나가 더 남아있지만 차마 먹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몸이 추운 것도 같았다. 


무턱대고 아카아시의 집까지 쳐들어왔지만 그 뒤로 무언가가 제대로 잘 풀렸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자신을 보던 아카아시의 얼굴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새하얗게 핏기가 가시던 표정, 커다랗게 뜬 눈. 10년만에 보는 얼굴인데 거기에 반가움은 없었다. 


그 뒤로 함께 지낸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아카아시에게선 그리움 조각조차 찾을 수가 없다. 함께 지내는 아이는 자신에게 도통 관심이 없는 눈치였고 아카아시는, 아카아시에겐…….


보쿠토는 무릎을 세워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지만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보다 다른 곳이 더 추웠다. 마음같은 것이. 


그러면 이제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민폐 끼치는 것따위 그만두고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걸.’


보쿠토는 속으로 1초, 2초, 3초, 카즈마가 하교하고 돌아올 시간을 재며 웅얼거렸다. 그에게도 이건 마지막 기회이고 또, 마지막 빛이었다. 돌아오는데에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더는 둘러갈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아카아시에게서 완전히 아니라는 거절을 듣기 전까지는. 


‘열쇠 깜빡하고 나왔다고 하면 카즈마가 어떻게 볼까.’


그 아이에겐 도통 어떻게 해도 호감을 사지 못하고 있다. 친척 어린아이들과는 금방 친해지곤 했던 보쿠토에게 아카아시의 아이는 처음 겪는 크나큰 벽이었다. 


보쿠토는 아이스크림이 녹아가는 것을 흘끗 바라보았다. 바스락, 비닐 봉투 속의 과자 하나가 굴러 떨어졌지만 보쿠토는 내버려두었다. 아이가 돌아오기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