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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카아시는 눈만 깜박거리며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불타 흩어지는 금빛 눈, 순식간에 10년의 세월을 되감는 그것. 


“보…….”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가 겨우 그렇게 입을 떼려고 할 때에 보쿠토의 눈동자 위로 천천히 빛이 깃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보쿠토가 꿈벅 하고 눈을 깜박였다. 


“아……아, 아, 우와아악!”


팟 하고 빛이 들더니 보쿠토가 벌떡 일어나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주위에 무언가가 있었으면 필히 엎고 쏟았을 게 분명했다. 사색이 된 얼굴로 서서히 피가 몰리더니 곧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손을 휘저으며 어쩔 줄을 모른다. 아카아시는 눈을 꿈벅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아카아시, 미, 미안! 미안! 진짜 미안! 내가 잠, 결에, 어, 아, 미안!”

“아뇨, 괜찮으니까요……. 카즈마 깨겠으니 진정하세요.” 


아카아시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고 팔을 뻗었다. 하지만 허둥거리는 보쿠토가 다가오는 아카아시의 팔을 보고는 그걸 냅다 쳐내고 후다닥 뒷걸음질치는 것이었다. 


“……제가 뭐 닿으면 옮습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놀라서, 미안……! 아, 아카아시도 놀랐지, 진짜 미안해!”


얼굴이 빨개졌다가 파래졌다가 하기 바쁘다. 아카아시도 이쯤 되니 조금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보쿠토가 넙죽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아, 아카아시, 진짜 미안해, 진짜 놀랐지, 미안, 미안해!”

“아니……. 아뇨, 어디 다친 것도 아니니까요.”


그야 갑자기  패대기쳐지다시피 하여 바닥에 드러눕게 된 통에 욱신거리는 뒤통수라거나 아릿한 등판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좀 놀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렇게까지 어쩔 줄을 모르면서 사과하는 걸 보고 있자니 되레 기분이 점점 더 가라앉는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보쿠토를 일으켜 세웠다. 보쿠토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려고 힘을 주어 버티고 서 있었다. 진짜 미안해, 미안해, 이런 말만 반복하며. 


‘이게 이렇게까지 사과할 일인가?’


잠결에 사람을 쓰러뜨리고 올라타다니 그건 좀 굉장하다 싶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릎까지 꿇고 앉아서 사과할 일인가? 사과할 일이라면 어째서? 다친 곳도 없다고 분명하게 얘기를 했는데, 도대체 왜? 그게 그렇게까지 기분 나쁠 일이기라도 한 건가. 


“아, 아카아시, 미안, 정말 미안!”

“정말 괜찮다니까요.”


아카아시는 자신의 목소리가 가라앉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며 다시 보쿠토를 붙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보쿠토가 고개를 든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보지 않고서 깔린 요 쪽으로 보쿠토를 떠밀었다. 


“얼른 주무세요.”

“아, 내가 아카아시 꿀물…….”

“지금 저도 마시고 잘테니까요.”

“으, 으응. ……미안…….”

“정말 괜찮다니까 자꾸 왜 그러세요. 뭐 무슨 일 있었다고. 주무세요.”


아카아시는 머그잔을 손에 들고 일어섰다. 보쿠토가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그 시선을 남겨두고 먼저 몸을 돌렸다. 


*


거실에 혼자 남겨진 보쿠토는 눈을 꿈벅거리며 아카아시가 들어간 침실쪽 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몇 분이나 지났을 때 보쿠토의 목에서부터 얼굴 끝까지 새빨간 기운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마침내 보쿠토가 풀썩 요 위로 엎어졌다.


‘으아아아! 내가 미쳤어, 미쳤어! 미쳤지!’ 


잠기운이 섞여 멍할 찰나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는데 아카아시가 있었다. 가지마, 가면 안 돼, 여기 있어, 이런 생각이 먼저였다. 손을 붙잡고 어디로도 갈 수 없게 그의 위에 올라탔다. 코끝과 코끝이 스쳤다. 푸른 색이 섞여든 청록색 눈동자, 바다같아서 사랑했고 사랑하는 색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아카아시다, 내 아카아시, 보쿠토는 그대로 입을 맞출 뻔했다. 아마도 ‘보쿠토 선배’라며 그를 부르려 했던 아카아시의 입가에서 민트향이 흘러나와 그의 정신을 깨우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저질러 버렸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후다닥 일어서서, 어떻게든 사과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는데 아카아시가 이대로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함께 휘몰아쳤다. 보쿠토의 입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사과만 쏟아진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 무슨 일 있었다고. 


아카아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다고 했지만 보쿠토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 큰일이 날 뻔 했단 말야, 하지만 미수에 그쳤던 것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미안하다는 사과만 거듭할 뿐이었다. 


요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보쿠토는 코 끝을 스쳐지나가는 향기에 샴푸냄새,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시야가 바뀌어 눈앞이 아찔해졌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자신이 얼굴을 묻고 있던 부분에 손을 뻗어본다. 가볍게 물기가 스쳐지나간다. 아카아시가 누워 있었던 자리인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붉었던 보쿠토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다. 보쿠토는 괜히 죄를 짓는 것처럼 아카아시가 문을 닫고 들어간 쪽을 한 번 살펴보고는 조심스레 요의 가장자리에 몸을 뉘었다. 


나란히 누워 잠을 잤던 적이 있었다. 딱 한 번이었지만. 고등학생이었을 적, 부모님이 여행을 가셨다며 밤새워 같이 놀자고 아카아시를 졸랐던 날이 있었다. 아카아시는 그런 그를 보고 웃음을 섞어 한숨을 짓곤 고개를 끄덕였었다. 


금요일 밤부터 달이 저물 때까지 무어 그리 할 이야기가 많았는지 모를 일이다. 쉴새없이 재잘거렸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침대 위에 올라와서 자라고 했지만 아카아시는 단호하게 그럴 수는 없다며 보쿠토를 침대에서 재우고 자신은 바닥에 누웠더랬다. 아카아시가 그렇게 고집을 피우니 도리가 없다. 혹시 바닥이 딱딱할까 싶어 온 집안의 이불장을 뒤져서 도톰한 요를 두 장이나 깔았다. 하나는 회색 줄무늬가 사선으로 들어간 것이었고 하나는 분홍색 잔 꽃무늬가 들어간 것이었다. 덮었던 이불은 남색과 연두색 줄무늬가 들어간 푹신한 것으로, 베개도 같은 커버로 된 것을 내어주었다. 어린애 다루듯 이불을 여며주었더니 아카아시가 답지 않게 조금은 부끄러워 했었다. 그런 아카아시를 보면서 자신 역시 고작 한 살 차이면서 어른인 척을 했다. 부끄러워하는 후배의 머리를 부벼주고는 잠을 청했다. 심장이 쿵쿵 뛰어서 밤새 못 자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저도 모르는 새에 깜빡 잠이 들었더랬다. 깬 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둔한 통증이 뒤통수에서부터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어둠을 칠한 벨벳같은 밤이 짙게 깔린 새벽에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떴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나보다 하는 현실을 천천히 인식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코 끝에 무언가가 스쳤다. 


아카아시의 이마였다. 아카아시도 소리를 들었는지 눈을 뜬다. 잠에 취한 청록색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구분할 수 있었다. 보쿠토 선배, 나직하게 잠긴 목소리가 그를 부른다. 보쿠토는 코앞에 있는 아카아시의 얼굴을 보고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작게 속삭이고는 겨우 겨우 다시 이불을 끌어와 아카아시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아카아시는 괜찮느냐는 말을 웅얼거리다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자신도 다시 침대로 올라가서 자면 되는데, 그러면 되는데. 올라가기 싫다며 중얼거렸고 아카아시가 곁의 따뜻한 체온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 날 보쿠토는 그냥 바닥에 누워 계속 자버리고 말았다. 아침에는 아카아시가 그를 깨웠다. 웃는 목소리였다. 선배, 왜 바닥에서 주무시고 계셔요. 눈을 부비며 떴다. 아카아시가 나란히 누워서 그를 보고 있었다. 자다가 떨어졌는데 그냥 계속 잤다며 변명을 했고 아카아시는 다시 웃었었다. 


단 둘이, 나란히 잤던 처음이마 마지막이었던 날이었다. 아마도 10년쯤 전의 어느날이었을. 하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잠시나마 누웠던 자리를 손 끝으로 살짝 쓸어보았다. 그저 잠깐 누웠던 흔적이 있는 것뿐인데, 그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마치 바로 곁에 누워있는 것만 같았다. 되새기고 되새기기만 하던 과거의 그 날이 지금 이 곳에서 재현된 것만 같다. 보쿠토는 존재하지 않는 아카아시의 윤곽을 손으로 따라그렸다. 


“헤…….”


이런 날은 꿈도 꾸지 못했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이 작은 기적 같았다. 이럴 수도 있구나. 이럴 수도 있었겠구나, 보쿠토는 그것을 지금에서야 생각했다. 우리가 계속 함께 있었으면, 지금 이 밤이 네 그림자만 좇는 밤이 아니라 보고 만질 수 있는 너를 옆에 두는 그런 밤일 수도 있었겠구나…….


보쿠토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돌연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가렸다. 그의 목까지 온통 붉은 빛이었다. 잠결에 본 것만으로도 입맞출 뻔했는데 옆에 누워있었으면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 아직은 무리였다. 얕은 흔적만으로도 온 몸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아, 오늘 잠자긴 다 틀렸네…….” 


겨우 호흡을 돌린 보쿠토가 탈진한 듯이 쭉 뻗었다. 처음부터 요의 가장자리에 닿을 듯 말듯 누워있었던 터라 등에 닿은 맨바닥에서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보쿠토는 요 위를 곁눈질했다. 그를 바라보는 것이라고는 창밖의 달빛 뿐인데도 보쿠토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으아아……. 너무 좋아…….” 


흐릿한 그림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어쩔 줄 모르게 될만큼 너무나. 보쿠토는 바닥의 찬기운에 의지해 열이 오른 뺨을 식히려고 했지만 그다지 소용이 있지는 않았다. 발코니 창의 달빛이 그런 그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