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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 선배. 

—아카아시!


벚꽃이 떨어졌다. 꽃잎이 흐드러지며 시야를 가렸다가 다시 바람이 불어 눈앞이 선명해진다. 보쿠토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지만 아카아시는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아카아시?

—선배, 졸업이시네요.


졸업? 보쿠토는 자신을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교복이었다. 회색 교복에 푸른 넥타이. 정갈하게 매여 있는 것이 보나마나 아카아시가 매어준 게 분명했다. 


—이제 다시는 못 보겠네요.


어째서 그런 말을 해? 보쿠토는 무어라 얘기를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졸업을 하면 다시는 못 봐? 왜? 


—그야, 

—보쿠토 선배가. 


내가? 나는 아카아시 없으면  안 되는데 내가 왜, 내가, 왜, 내가. 보쿠토가 눈을 끔벅이는데 그 사이에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옷이 교복이 아니라 검은 정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장 위에 꽃잎이 올라가 있다. 아카아시, 어깨에, 꽃이…….


—보쿠토 선배가 싫으니까요.


무슨 소리야. 내가 싫어? 정말이야? 나는 안 되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어? 왜 내가 싫어진 거야? 아카아시, 아카아시, 아카아시…….


“—헉!”


보쿠토는 눈을 번쩍 떴다. 등이 축축했다. 보쿠토는 눈을 찌르는 햇빛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려보니 거실 한가운데였다.


“으, 몇 시야.”


눈을 가늘게 뜨고 시계를 보자 아침 여덟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보쿠토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꽉 눌렀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숙취가 오는 것만 같았다.


‘무슨 꿈을 꿔도 그런.’


보쿠토는 뒤숭숭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다 일어난 것인데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세수라도 하는 편이 정신이 들 것 같다. 보쿠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한 번 돌리며 욕실 쪽으로 향하다 멈칫했다. 욕실 곁의 아카아시 침실 방문 앞에 아이가 서 있었다.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카즈마? 아직 학교 안 갔……카, 카즈마? 울어?”


터벅터벅 욕실로 향하던 보쿠토가 깜짝 놀라 아이에게 달려왔다. 보쿠토를 돌아보는 아이 얼굴에 눈물이 꽉 들어차 있었다. 


“카즈마? 무슨 일인데? 왜, 왜 그래. 왜 울어.”

“아, 아빠……. 아빠가 또…….”

“아빠? 아카아시? 아카아시가 왜?”


보쿠토가 놀라서 침실 문고리에 손을 쥐는데 아이가 그런 보쿠토의 팔을 붙잡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도 고개를 내젓는다.


“아, 안 돼요.”

“안 돼? 아카아시가 왜? 무슨 일인데?”

“아빠 아픈데……. 아플 땐 자꾸 들어오면 안 된다고……. 아빠가……그랬어서.”


보쿠토는 힘주지 않고 아이의 손을 떼어내곤 거침없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에서 바깥과는 다른 열기가 느껴진다. 보쿠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가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다.


아카아시는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이마 위에는 어설프게 적신 수건이 올라가있고 협탁 위에는 물이 가득 찬 컵이 놓여있다. 아이가 해 놓은 것인 듯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카즈마, 아카아시 언제부터 이랬어?”

“아침에……. 아침 인사 하러 들어갔는데…….”


보쿠토는 수건을 치우고 아카아시의 이마와 뺨을 쓸었다. 불덩이 같았다. 보쿠토가 그를 불러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입가는 하얗게 부르텄고 뺨은 헬쓱하다. 보쿠토는 밤새 이 방 문 한 번 열어볼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카즈마, 넌 일단 학교 가고. 아카아시는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아이가 고개를 젓는다.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보쿠토는 아이의 머리를 한 번 꾹 눌러주고는 다시 아카아시에게로 눈을 돌렸다. 앓는 소리도 없이 아카아시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보쿠토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다시 방 밖으로 나왔다. 외투를 챙겨 입고 휴대전화를 손에 쥔다. 보쿠토는 망설이지 않고 전화번호부를 뒤져 아직 눈에 익은 이름을 눌렀다. 벨은 몇 번 울리지 않았다. 보쿠토는 곧장 용건부터 말했다. 


“미우라. 사람이 아파. 병실 하나만.”


—여보세……. 네? 지, 지금요? 누가 아픈데요? 보쿠토 씨?


“지금 간다.”


보쿠토는 곧장 전화를 끊고는 자동차 열쇠를 챙겨들고 침실로 다시 향했다. 아이가 붙어서 훌쩍거리고 있다. 아카아시는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한 채였다. 보쿠토는 얇은 시트를 끌어내 아카아시의 몸 위에 덮고는 그대로 어깨와 다리 아래에 손을 넣고 안아들었다.


‘아.’


근육에 힘을 준 것이 무색하게 번쩍 들린다. 보쿠토는 방문을 나서면서도 아카아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매일 보는 얼굴이라도 말라붙어가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아카아시를 넘어뜨렸던 그날 밤에도 가볍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을 텐데, 눈앞에 스쳐간 호흡 한 줌에 혼이 팔려서. 


아카아시를 안아들고 주차장까지는 한달음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카아시를 뒷좌석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채운다. 아이가 옆에 자리 잡고 앉는다. 보쿠토는 그대로 운전석에 올라 핸들을 잡고 병원까지 차를 몰았다. 백미러로 뒷좌석을 계속 살폈지만 아카아시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 채였고 아이는 애써 울음만 넘기고 있었다. 


병원 앞에 도착하자 키리에나의 매니저 미우라가 나와 있다. 그 역시 어지간히도 놀란 눈치였지만 사람이 아픈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지체하는 것 없이 응급실 쪽으로 먼저 안내해주었다. 


응급실에서 아카아시를 돌보아주는 의사는 보쿠토가 아직 키리에나와 이혼하기 전, 그리고 선수로서 은퇴를 하기 전에 곧잘 신세를 지곤 했던 주치의였다. 


“뭐 자세한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보아하니 과로에 피로 누적으로 이렇게 된 것 같으니까 우선 수액부터 맞히고……. 혈액검사 한 번 해 보겠습니다. 다른 거는 환자분 정신이 들면 해 보고, 병실은 준비됐으니까 그쪽으로 지금 옮기고. 그런데…….”


의사의 눈길이 아카아시 곁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아이에게로 향한다. 그리고는 다시 보쿠토를 본다. 하지만 보쿠토는 의사의 눈길을 의식하지 못했다. 간호사가 링거를 맞히는 아카아시의 팔만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는 아이에 대해 더는 말하는 것 없이 헛기침했다. 


“그,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고 지금 너무 눈에 띄니까 일단 병실로 좀 옮기지요.”


키리에나의 매니저도 고개를 끄덕인다. 보쿠토는 움직이기 시작한 침상과 서둘러 걸음을 맞추려다가 아이를 발견하고는 한 걸음 늦추어 아이의 손을 잡았다. 평소였으면 한 번은 뿌리쳤을 아이가 이번만은 눈물에 잠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괜찮을 거래.”

“…….”


흐느끼는 소리도 없이 눈물이 아이의 뺨을 타고 흐른다. 그 뺨을 거칠게 문질러주었다. 눈물이 닦이며 붉은 자국이 남았다. 


“오늘은 아카아시 옆에 있을까, 우리 둘 다.”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인다. 바닥으로 투둑투둑 물방울이 생겼다. 보쿠토는 아이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아이를 다독이며 병실로 들어가기 직전에 누군가가 보쿠토를 덥석 붙잡았다. 바로 보쿠토의 전화 한 통에 달려와 병실과 의사를 수배하고 모든 것을 준비해놓았던 키리에나의 매니저 미우라였다. 


“자, 잠깐 얘기 좀. 보쿠토 씨.”

“어? 어……. 카즈마, 먼저 들어가 있어.”


아이는 보쿠토를 돌아보지도 않고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보쿠토는 병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매니저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 누굽니까? 둘 다.”

“둘?”

“그 지금 병실에 들어간 둘이요. 어른이랑 애랑…….”


보쿠토는 그제야 미우라를 돌아보았다. 매니저 미우라는 헬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카아시. 내…….”

“‘내’……?”

“내……내 고등학교 후배.”

“후배요? 그럼 그 애는요? 설마 보쿠…….”

“그 후배 애.”

“그……진짜요?”


매니저가 핏기 가신 얼굴로도 눈 끝에 주름을 만든 채 보쿠토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보쿠토는 매니저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그으러니까 저 애랑 보쿠토 씨하고는 뭐랄까 그 아무런 관련이……없는……? 진짜로 없는……?”

“무슨 관련?”


보쿠토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매니저를 바라본다. 매니저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꾸물거렸지만 결국 입 밖으로는 내놓지 못했다. 말을 꺼낸 건 보쿠토였다.


“어쨌든 오늘 고맙다.”


보쿠토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담백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에 매니저가 팟 하고 정신을 차렸다. 매니저는 이런 보쿠토의 모습이 훨씬 더 익숙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 아. 좀 놀라긴 했거든요. 사람이 아프다셔가지고. 큰일은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진짜로.”

“나도 정신이 없어서……. 달리 생각이 안 나더라.”

“보쿠토 씨 그렇게 당황하는 건 또 처음 봤네요. 나도 그래서 더 놀랬잖아요. 근데 그, 되게 많이 친한 후밴가 봐요. 그렇게 놀라시고.”

“어? 아……어, 그렇지…….”

“어떻게 그 동안에 얼굴 한 번도 못 본 사람이던데.”

“아, 그 좀 멀리 있고……그랬어. 영국, 아, 어. 영국 가 있었어.”

“아아,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시차적응 그런 거 겹쳤나보네.”


매니저가 혼자 알아서 문장을 끼워 맞춰 준다. 보쿠토는 속으로 진땀을 흘리면서도 그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러다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러운 침묵이 찾아들었을 때 보쿠토가 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 안즈한테는 오늘 일…….”

“아아, 안 그래도 안즈 씨한테서 방금 메세지 왔어요.”

“아.”

“저 갈 때도 무슨 큰일이냐고 걱정하셔가지고. 그냥 지인 분 과로이신 거 같다고 알려드렸더니 언제 한번 주먹밥이라도 싸들고 병문안 오겠다고…….”

“……아니야, 오지 마. 오지 말라고 해.”

“뭐 두분 헤어지기는 했어도,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어도 자꾸 만나봤자 이상한 소문만 생기고 그렇잖아. 괜찮으니까 안 와도 돼.”


보쿠토는 진땀을 흘리는 표정으로 겨우 무마하고는 다시 한 번 매니저게 감사 인사와 사과를 전했다. 매니저는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에요! 하하, 살면서 보쿠토 씨 당황하는 얼굴을 다 보고. 그거면 됐죠.”


매니저는 멀리까지 나올 필요 없다며 후배 분 쾌유를 빈다는 말을 남겨두고 병원을 떠났다. 보쿠토는 매니저가 병동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것까지만 확인하고 아카아시가 잠들어있는 병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아카아시에게 큰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만으로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질 것 같다. 보쿠토는 마른 손에 얼굴을 묻고는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는 아카아시의 침실 문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아카아시가 저 아플 땐 들어오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고 했다. 이랬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열이 오르고 아파서, 행여나 아이에게 옮을까 싶어 나가 있으라 말하고서는 방에서 홀로 앓았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보쿠토는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에 잠깐 습기가 차고 숨이 떨렸다 가라앉는다. 보쿠토는 천천히 아카아시가 잠든 병실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