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제 2막, 준비 되셨습니까? (6)
“…….”
“…….”
보쿠토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 잠이 들었다 깨려니 눈이 뻑뻑해 뜨기 어려웠다. 여기가 어디지, 거기까지 생각했던 보쿠토는 오후의 역광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분간해냈다.
“카즈마……?”
“여기서 뭐……하세요?”
“아!”
보쿠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 바닥에 오래 앉아있었더니 몸이 뻐근했다. 기대어 있던 봉투가 쓰러지며 안에 품고 있던 것을 우수수 뱉어냈다. 아이의 발치에 과자 하나가 툭 닿았다.
“아, 그, 그게. 간식 사러 잠깐 나왔는데 열쇠 없는걸……깜빡해서.”
“…….”
“하, 학교 갔다 왔어?”
차마 기다렸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보쿠토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재채기가 나올듯이 코가 간지럽다. 아이가 말없이 목에 건 끈 끝에 달린 열쇠를 손에 쥔다. 보쿠토는 애써 울상을 삼키면서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 쓰러진 간식들을 주워 담았다. 그 사이에 아이가 문을 열고 그를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오자 훈기가 몸을 감싸안는다. 보쿠토는 서러운 표정을 숨기며 코를 훌쩍거렸다. 다 녹은 아이스크림은 아이 몰래 버리고 간식 일체를 전부 찬장에 밀어넣으려고 했지만 또 우르르 쏟아지고 만다. 그 소리를 듣고 책가방을 내려놓으려 자기 방까지 갔던 아이가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흘끗 눈치를 주었기에 보쿠토는 입술을 꽉 깨물면서도 옆으로 물러섰고 아이는 차곡차곡 과자상자 따위를 정리해 집어 넣었다. 정성껏 분류하고 집어넣어 정돈하는 것이 아이답지 않게 정갈하고 단정하다. 보쿠토는 그 손끝에서도 아카아시의 그림자를 보았다.
아이는 간식 정리를 끝내고는 전기 포트에 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보쿠토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서 아이가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기만 했다. 물이 끓어오르는 사이에 머그에 유자청을 덜어 담고서는 끓는 물을 조르르 붓는다. 아이는 티스푼으로 잔을 휘휘 저은 뒤에 보쿠토에게 내밀었다. 보쿠토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가 조심스레 아이 손의 머그를 가리켰다.
“나, 나 마셔?”
“네. 입술…….”
“입술?”
“파래서.”
“아.”
보쿠토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코를 훌쩍이고는 아이가 내민 머그컵을 감싸쥐었다. 아이의 용건은 그게 다였는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방에서 과제를 챙겨 거실의 탁상 앞에 앉는다. 보쿠토는 한참이 지나서야, 아이가 아직도 멀거니 서있기만 하는 그를 한 번 흘끗 쳐다보았을 때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 준거야!?’
지금까지 자신을 거의 없는 사람 취급하던 아이가?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핑 도는 기분이었다. 보쿠토는 소맷단을 끌어당겨 눈매를 세게 부비고는 꿀꺽꿀꺽 유자차를 마셨다. 뜨거운 차라 입 안을 다 데었지만 보쿠토는 신경쓰지 않았다. 순식간에 한 잔을 다 비운 보쿠토는 머그가 바닥을 보이자 그제야 아깝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언제 또 줄지도 모르는데…….’
조금만 아껴마실걸, 하지만 후회는 늦고 아이는 자신의 공부에 열중할 뿐이다. 부엌에서 어쩔 줄 모르고 계속 맴돌기만 하던 보쿠토는 비어버린 머그를 양 손으로 쥐고서 은근슬쩍 아이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아이가 기척을 느끼곤 그를 흘끗 바라본다. 하지만 그 시선은 금방 숙제 쪽으로 돌아갔다.
“저어기, 카즈마.”
“……네?”
부지런히 오가던 연필이 멈춘다. 아이가 그를 바라보았다. 깜빡거리는 눈동자에는 깊이가 있다. 그것이 꼭 아카아시를 닮아 있었다. 보쿠토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새하얗게 잊고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아이는 차분하게 그의 말을 기다려주고 있었다.
“아, 이, 이거……. 이거 고마워.”
“아니에요. 감기 조심하세요.”
“어, 아……. 응…….”
“선수시잖아요.”
아이는 연필을 꽉 쥐고서 다시 공책에 한 글자 한 글자 적어나가기 시작한다. 보쿠토는 눈을 번쩍 떴다.
“나 알아!? 아! 아카아시가 말해줬어!?”
“TV에서 몇 번 봤어요.”
“아카아시랑 같이 봤어!?”
“……아뇨. 아빠……아버지는 싫……. 그러니까 TV 보는 거 싫어하셔서.”
아이가 서둘러 말을 고친다.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보는 것 같았다. 보쿠토는 순식간에 가라앉아 숨을 멈췄다.
아카아시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나지 않았고 떨어져 있었고 그런 채로 몇 해나 지나서 두 자리수를 채울 때까지 와버렸지만 그래도 다 알고 있다고. 고교 시절 아카아시와는 주말밤을 함께 보낸 적도 있었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날이면 거실을 차지하고 앉아 밤새도록 영화며 오락 프로그램을 청취했다. 아카아시는 큰 소리를 내며 웃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쿠션을 끌어안은 채 소파에 기대어 간간히 웃음을 터뜨리곤 했고 그러면 보쿠토 자신은 그런 아카아시가 웃는 것을 보고서 크게 웃었다.
즐거웠다.
행복했고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하는 시간이었다.
혼자 사랑했던 시간이었다…….
“……그랬구나.”
보쿠토는 표정이 없는 얼굴로 머그잔을 내려다보았다. 아카아시는 고등학교 시절이 지옥같았다고 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아카아시가 내 얘기 한 번도 안 했어?”
“아버진 집에서 친구 얘기 안 하세요.”
“아.”
“데려오지도 않으시고요.”
아이가 그렇게 말하며 보쿠토를 흘끗 곁눈질하듯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 온 손님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보쿠토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아이가 다시 공책에 고개를 박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른들이 저에 대해서 궁금해 하니까요. 안 데려오세요. 아무도.”
“……아.”
“옛날에 아버지 회사 친구 자러 왔었는데 그 때도 아버지가 바로 다시 내보냈어요. 엄마는 누구냐고 저한테 물어보셔서.”
“…….”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연필을 집어넣고 색연필을 꺼냈다. 그림 일기의 그림 부분을 그려가기 시작한다. 보쿠토는 입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아이가 말을 이었다.
“저 엄마도 아빠도 누군지 몰라요. 지금 아버지가 병원에서 저 데려와줘서 같이 있게 됐고. 그러니까 여기에 계속 있으시려면 아버지한테 그런 거 묻지 마시구요.”
아이는 색연필을 세 개 정도 바꾸어 칠했고 그 동안 보쿠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림을 마무리 지은 아이는 공책을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특별히 대화나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같은 태도였다. 보쿠토가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붙잡았다. 아이의 손에서 공책이 툭 하고 떨어졌지만 보쿠토는 주워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 왜 둘이 병원에서 만난거야?”
“아…….”
아이는 그 질문이 많이 놀라웠는지 눈을 크게 뜨고 깜박거렸다. 보쿠토는 당황하고 절박한 얼굴로 아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예기치 못했던 질문에 대한 답은 천천히 흘러나왔다.
“저는 고아원에서 다쳐서……. 응급실 갔다가. 아버지는 그 때 일 하다가, 어딘가 아팠다고 했어요. 잘은 몰라요…….”
아이는 보쿠토의 손에서 자신의 팔을 비틀어 빼고는 떨어뜨린 공책을 주워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보쿠토는 소리를 내며 닫히는 방문을 바라보았다.
*
“카즈마랑 좀 친해지셨나봐요.”
아이를 재우고 돌아온 아카아시가 탁상 앞에 앉아 스케쥴러 정리를 시작하며 말문을 텄다. 소파에 앉아있던 보쿠토가 조금 당황해서 눈을 깜박거렸다.
“어, 어어?”
“찬장에 과자를 잔뜩 사놓으셨던데. 뭐냐고 애한테 물어봤더니 간식 사러 같이 갔다오셨다면서요.”
“아…….”
아이가 그렇게 말을 한 모양이었다. 보쿠토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야 낮에 혼자 나갔다가 몇시간이나 문 밖에서 쪼그리고 앉아 사람을 기다렸다는 얘기보다야 그 편이 훨씬 더 모양새가 낫기는 할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말을 해 주었구나. 보쿠토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아카아시가 가차없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애가 사달란다고 다 사주시면 어떡합니까.”
“아, 아니. 그게.”
보쿠토가 당황해서 허둥거리는데 그제서야 아카아시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뭐 어쨌든. 감사합니다. 애가 너무 어른스러워서 걱정이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아카아시의 목소리에는 금방 웃음기가 서렸다. 애가 과자도 저렇게 조르기도 한다는 걸 알았으니 한시름 놓았네요, 아카아시의 그 말에 보쿠토는 입술만 모았다. 차마 저것들이 전부 자신 혼자서 사온 것이라고 말할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보쿠토는 뺨까지 빨갛게 붉히고는 결국 더는 견디지 못하고 쿠션에 얼굴을 박았다. 아카아시가 뒤를 한 번 흘끗 돌아보곤 다시 일정 정리에 집중한다. 보쿠토는 소파에 뻗어 뒹굴거리다가 푸하,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카아시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보쿠토는 빛이 들지 않는 새카만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카아시가 눈을 내리뜨고서 한 자 한 자 적어가기도 하고 선을 긋기도 한다. 단정하게 펜을 쥐고 있는 모습을 언뜻 보고 있자면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얼굴 뚫어지겠습니다.”
“아, 안 쳐다봤어!”
“안 쳐다보기는…….”
아카아시는 여전히 뒤에 앉은 보쿠토를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보쿠토는 열심히 도리질을 했지만 아카아시가 그 말을 믿어주지는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보쿠토는 겨우 붉어진 얼굴을 가다듬고서 말했다.
“아카아시, 일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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