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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거에서 수액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보쿠토는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침대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는 이미 곁의 작은 보조 침대에 뉘어 재운 차였다. 몸을 숙여 손에 입을 묻고도 시선은 침대로 향해 있다. 


아카아시는 줄곧 잠든 채였다. 중간에 한 번 살짝 정신이 들었는데 괜찮다며 도로 재웠더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 뒤로는 쭉 눈을 감고 있었다. 


혼자서, 계속. 


아이는 아카아시가 아플 때마다 언제나 그랬다고 했다. 아카아시가 아픈 저의 곁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여 그의 이마에 젖은 수건을 올려주고 오는 것이 전부였다고. 그저 닫힌 방문 밖에서 아카아시가 다 나아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다고. 


아이는 최선을 다하여 좋은 아들이 되고 싶었고 아카아시는 최선을 다하여 아이를 지키고 싶어 했다. 아카아시의 이런 시간들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진작 돌아왔을 것이다. 망설이고 고민할 여유도 없이 돌아왔을 것이다. 아픈 아카아시를 혼자 둔다는 건 그가 다음 생에도 선택하지 않을 여지였다. 


그런데 왜 돌아오지 못했더라. 


왜 그랬지. 


보쿠토가 천천히 몸을 숙여 손등에 이마를 묻을 때 차르르, 링거의 줄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으음…….”


천이 스치는 부드러운 소리 끝에 몸을 일으키는 것 같은 기척. 카즈마, 하고 작게 속삭이듯 불러보는 목소리. 그리고.


“……보쿠토 선배?”


고개를 들면 하룻밤 새에 수척한 얼굴의 아카아시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보쿠토는 입술을 떼지 못했다. 아카아시가 낮게 웃었다.


“도와주셨나 봐요. 고맙습니다.”


어린 아이가 대견한 일이라도 해낸 듯이 어여삐 여기는 것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보쿠토는 버럭 소리치고 싶었다. 이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할 일이야? 넌 아파서 내가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어떻게 병원까지 왔는지도 모르잖아. 아이는 널 걱정하느라 방 밖에서 울고 있었고 너는 그런 걸 알면 혼자 또 마음 아파서…….


“……너 몸 관리 똑바로 안 할래.”

“요즘 무리해서 그런가 봐요. 감기몸살 같은…….”

“감기 몸살이 기절해서 깨워도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러냐?”


듣는 사람이 움찔할 만큼 매섭게 목소리를 내어본다. 아카아시는 말을 멈추었지만 부드러운 표정은 여전했다. 떼를 쓰는 어린애를 마냥 귀여워하는 듯이 한정 없이 다정한 표정이었다. 결국 보쿠토도 더 언성을 높이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때서야 아카아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비도 왔었잖아요, 그 때 비도 맞고……. 그래서 그런가 봐요. 철야도 계속 했었고. 그러다가 일 끝나서 긴장이 풀리니까.”


어르고 달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가 일의 전후 관계를 몰라서 이러는 것이라는 양. 보쿠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또, 아카아시가 투정부리는 아이 보듯이 한다. 무어라 벌컥 언성을 높이고 싶어서 입을 열었다가도 그마저 어린애처럼 대할까 싶어 입을 다물게 된다. 무슨 말을 해야 알아줄지 알 수가 없어 입만 열었다 닫았다 하기 바빴다. 그리고 마침내 보쿠토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 사람들이 나 당황하는 거 처음 봤대.”

“……선배.”

“내가 이렇게 놀라고 그러는 거 처음 봤대. 나 그동안 안 그랬나봐. 그런 적이 없었나봐.”


사실은 알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 새로운 팀, 새로운 세터, 새로운 선배와 동기들을 만났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그 날부터 알게 되었다. 졸업 하고 첫 연습 경기 중에 몇 번 블로킹을 당했을 때, 무릎에 손을 대고서 어깨로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데 선배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웃는 얼굴이었다. 괜찮다는,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그 등에 닿는 손짓 한 번이 벼락을 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지난 2년 동안 해온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그 때 알았다. 보쿠토는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사람은 아카아시 뿐이라고, 줄곧 정해두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싫다. 자신의 기분을 달래고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카아시가 아니면 싫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정말로 어찌할 수가 없어서 제멋대로 굴었던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굴 수 있어서 제멋대로 굴었던 것이다. 안온한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그 울타리의 이름은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정해두었다. 다른 이름은 싫다. 다른 누구도 싫다. 누군가가 울타리라며 팔을 벌리는 것도 싫다. 아카아시가 아니면 안 돼. 아카아시만이.


흔들리지 않으면, 무너지지 않으면, 그러면 그런 울타리는 필요하지 않다. 지난 10년 동안 보쿠토는 그런 식으로 견고해져갔다. 스파이크가 막혀도 동요하지 않게 되었다. 실수를 거듭할 때에도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 놀랄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았고 당황하지 않았다. 금방 기분이 처졌다 좋아졌다 하기 바쁜 어린애 같은 보쿠토 코타로, 그런 놀림은 고등학교 시절 동창들과 만날 때에나 듣는 먼 이야기가 되었고 이후에 만난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도리어 놀랐다. 


“선배가요? 그랬습니까.”

“……응.”


그리고 10년간 쌓아올린 담과 벽이 무너지는 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떨리는 손을 들고, 심호흡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하고, 몇 분이나 문 앞에 서서 손을 내렸다 들어 올렸다 하기를 거듭하다 마침내 초인종을 누른 그 순간. 문이 열린 그 때. 청록빛 눈동자와 마주한, 그 때. 같은 공간에 서 있다고 인지한 바로 그 때. 


함께 하지 못했던 10년의 세월은 사라지고 그 10년 동안 보쿠토가 바깥을 향해 쌓아 올려왔던 벽도 무너졌다. 없던 것이 되었다. 


“그야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


그래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놀랄 만큼 감정이 물결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그런 거라면 지금도 그래야 하잖아. 지금도 침착해야 하잖아. 아카아시 얼굴만 보면 어쩔 줄을 모르겠는 건 어째서야. 


“우리도 시간이 흘렀네요, 보쿠토 선배.”


보쿠토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카아시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난 뒤에 처음으로 보여주는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그가 졸업을 하던 날로 돌아간 것처럼 다정한 얼굴이었다. 


“이제 매스컴도 진정이 됐겠지요. 선배도 집 정리하셔야 할 게 있으실 테고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카즈마도 돌봐주셔서.”

“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선배도 돌아가요.”



*



보쿠토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높은 천장에 샹들리에가 아찔한 빛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후의 햇빛이 구름에 가려 채광이 좋은 실내도 어둑했다.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었다. 한동안 아무도 살지 않아 먼지 냄새가 났고 왠지 모르게 선뜩했다. 보쿠토는 한참이나 숨을 멈추고 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보쿠토가 무슨 말을 더 할 여지도 없이 아카아시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가셔야죠. 너 퇴원하는 것만 보고 가겠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꿀 먹은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보쿠토는 한참이나 뒤에야 겨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 동안 신세 많았다, 그 말에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이다가 별 말씀을요, 그렇게 대꾸했다. 그 뒤로 보쿠토는 곧장 자택으로 돌아왔다. 평일 낮이었던 데다가 인구 밀도가 낮은 곳이라 주택가는 한적했다. 


보쿠토는 멍하니 샹들리에만 한참을 바라보다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바지 뒷주머니에 휴대전화가 깔려있다. 전화기를 꺼내들고 연락처를 뒤적거린다. 오래지 않아 전화번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어, 코노하.”

—보쿠토 너 이제 아카아…….

“아 나왔어! 나왔어, 지금 나왔어!”


보쿠토는 빽 소리치고는 소파에 몸을 파묻어 둥글게 말았다. 


—나왔다고? 너 그럼 지금은 어딘데?

“어디긴 어디야, 집이지.”

—너희 집?

“어.”


보쿠토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반대쪽으로 살짝 굴렸다. 다시 샹들리에가 보인다. 구름이 걷혔는지 볕이 들어 샹들리에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눈이 아프다. 보쿠토는 다시 몸을 굴렸다. 


“나는 나왔는데 아카아시 아프더라.”

—아이고, 또……. 가봐야겠네.

“또?”

—…….


단말기 너머는 잠깐 침묵이었다. 보쿠토는 고요한 호흡으로 재촉했고 잠깐의 시간이 지나 코노하가 대답했다.


—혼자 몸으로 애까지 키우는데 그럼 그게 멀쩡하겠냐. 고등학교 때 체력 긁어다 쓰는 것도 한계가 있지……. 큰 프로젝트 같은 거 하면 다 끝나고 꼭 앓아눕고 그랬어.

“……난 몰랐는데.”

—말을 안 하는데 누가 어떻게 아냐. 

“코노하 너는 알고 있었잖아!”

—나하고 네가 같냐?


보쿠토는 입을 다물었다. 고등학교 때엔 오히려 반대였다. 보쿠토 그가 아카아시에 대해 모르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아카아시에 대해서라면 보쿠토에게 물었고 보쿠토에 대해서라면 아카아시에게 물었다. 


—그거 알려주려고 전화 했어?

“……응.”

—그게 마음에 걸렸으면 그냥 네가 있어 주지 그랬냐.

“아카아시가 이제 그만 나가래.”

—언제부터 말 잘 들었다고, 나가란다고 또 나왔네.


원래 말 잘 들었거든, 보쿠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코노하가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고 보쿠토는 착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코노하가 너무 걱정 하지 말라는 얘기만 남겨놓고 전화를 끊는다. 보쿠토는 멍하니 소파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기만 했다. 


고등학교 때에도 아카아시가 열감기로 아팠던 적이 있었다. 부활동을 하겠다고 고집부리는 아카아시를 꺾은 건 보쿠토 그였지만, 아카아시를 세심히 보살펴 주었던 건 코노하와 다른 부원들이었다. 


‘달라진 게 없나.’


억지는 부려보았다. 그때처럼, 아카아시의 울타리 안에서. 고등학교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한 번 아니라는 말에 두 번 손을 내밀 수 없다는 것 정도다. 


그 때는 그럴 수 있었다. 아카아시의 바다색 눈동자는 다정한 빛으로 둥글게 뭉그러져서 그가 고집을 피우고 억지를 부리면 결국에는 져주었다. 그걸 보쿠토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마주하는 바다색 눈동자 위로는 얇은 빙하의 얼음이 덧씌워져, 감히 녹아줄 것이라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얼음을 깨뜨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얼음을 깨뜨려도 용서해 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물러선다. 아카아시가 아니라고 말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망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보쿠토는 한숨을 삼키고 다시 전화를 돌렸다. 


“어, 응. 나야. 이번에 지인이 입원했는데……. 응, 과로인 거 같고. 근데 혹시 모르니까 좀…….”


두 사람이 지낼 때에도 지나치게 넓었던 집이었다. 한 사람 몫의 짐이 모두 빠지고 혼자 남은 집은 너무 크고 높았다. 그 가운데에 보쿠토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만이 막힘없이 나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