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제 2막, 준비 되셨습니까? (18)
아카아시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다수가 눈 밑에는 그늘이 있고 볼이 퀭했다. 몇주 가까이 철야를 하며 달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젯밤엔 모두들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컨펌…받았습니다.”
환호성은 없었다. 겨우 안심한 듯한, 혹은 기운이 쭉 빠진 것 같은 한숨만 있을 뿐이었다. 이제야 겨우 쉴 수 있게 되었지만 환호성을 지를 기력도 남은 게 없었다. 아카아시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팀원들이 서로의 등과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빠르게 수고했다는 말 따위를 웅얼거렸다. 제대로 된 문장이 완성되지는 않았다. 다만 ‘배터리는 빼놓을 거예요.’, ‘일주일 간은 찾지 마세요.’ 이런 말만은 명확하게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아카아시는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사무실을 한 번 둘러보고는 자신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피곤하니 오히려 졸음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집까지 운전해서 들어가는 건 무리다. 식사를 준비할 여력도 없었다. 아카아시는 관자놀이를 살살 문지르며 휴대전화를 열었다.
“…….”
하지만 누구한테 무어라 하지? 아카아시는 마른 입술을 다셨다. 아이는 일찍이 철이 들어 무어라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맘때면 항상 이러는 걸 이미 잘 알고 있기도 했다. 자신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나?
‘선배한테 저녁…….’
저녁 준비를 부탁하는 건에 대해 생각했던 아카아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탁할 염치라거나 그런 걸 떠나서 부탁해도 남는 게 없을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 탓이었다. 남는 게 있다면 아마도 초토화된 부엌 정도일 것이다. 아카아시는 의미 없이 전화번호부를 한 번 훑어내리고는 액정의 빛을 꺼트렸다.
엊그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그대로 하루를 보내고 밤을 지새고 난 것이 지금이었다. 그 때 잠을 잘 잤어야 했는데. 아카아시는 이젠 몽롱하기까지 한 시야를 멍하니 내버려두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어떻게 잠을 청할 수 있단 말야? 아카아시는 미약한 억울함을 담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학창시절 전부를 차지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 온통 그림자를 드리운 사람이 바로 눈 앞에, 맞닿은 코끝이 스치고 숨이 섞이는 지척에 있었다. 그의 손을 붙잡고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밀쳐내고서는 아무 일도 아닌데 무슨 유난이냐 쏘아붙이고 방으로 돌아갔지만 사실 그게 그렇지 못했다. 방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면 아마 자신은 그 때 집을 나가버렸을 것이다. 침실에 욕실이 딸려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 날 밤 세수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었을 리도, 당연히 없다. 억울했지만 탓할 사람도 없었다. 누구에게 뭐라 한단 말인가. 보쿠토 선배, 못보던 사이에 잠버릇 참 굉장해지셨네요. 다른 사람에게도 이렇게 했나요.
그러니까 그 일이 있고서 아직도 보쿠토의 얼굴을 못 봤다는 이야기다. 아카아시는 계속 관자놀이를 눌렀다. 막상 마주하게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옛날부터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사과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기는 했다. 그런 면은 참 대단해, 그와 동기인 선배들도 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엊그제 새벽에도 그랬을 것이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니까 저보다 후배였던 아카아시에게도 망설이지 않고 사과를 한다. 잘한 일이야 아니지, 아카아시는 뚱하니 중얼거렸다. 잠자는 걸 좀 건드렸기로서니 그대로 사람을 넘어뜨려 그 위에 올라타는 게 어디 경우가 있는 일이야?
하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사과할 일입니까,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에…….’
거기까지 생각한 아카아시는 천천히 깊은 한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0년이나 얼굴도 보지 못했고 연락도 하지 못했다.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야, 손끝이 스쳐도 사과할 사이겠지. 아카아시는 재킷을 챙겨들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자신도 한동안은 쉴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일단 잠을 좀 청할 생각이었다. 자고 나서, 일어나서, 씻고, 그러고 나서 이제 보쿠토에게 나가라는 말을 해야지. 이제는 그만하라는 말을, 해야지.
*
운전을 했다간 사고를 내겠다 싶어 택시를 타고 아파트 앞까지 왔던 아카아시는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려섰다가 그만 눈앞에서 보쿠토와 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눈 눈을 크게 떴다. 보쿠토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덕분에 아카아시를 먼저 발견한 쪽은 아이였다. 아이가 멈춰서자 아이의 손을 잡고 가던 보쿠토도 멈춰섰다가 그때서야 아카아시를 발견했다.
“아, 아카아시? 어떻게?”
“오늘……. 일이 오늘 다 끝나서요. 이제 쉴 수 있겠네요. 어디 나갔다 왔습니까? 어디 갔다 왔니?”
아카아시가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묻기가 무섭게 아이가 탁, 보쿠토의 손을 뿌리치고 아카아시에게로 달려왔다. 작은 손이 아카아시의 정장 끄트머리를 꽉 쥔다. 아카아시는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제 계속 일찍 오세요?”
“그럼. 이제 바쁜 거 다 끝났으니까. 장이라도 봐 오는 겁니까?”
아카아시가 한 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쥐며 묻는 말에 보쿠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에게 채인 손은 아이의 머리를 짓궂게 헤집고 있었다. 아이가 그 손을 피해 반대편으로 도망친다. 아카아시는 야트막하게 웃고는 집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뭐 사왔어요?”
“그냥 두부랑, 연근이랑. 고기랑 그런 거! 근데 아카아시,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네? 뭐, 아주 쌩쌩할 수는……. 조금 피곤이야 하죠. 어젠 집에도 못 들어왔잖아요. 카즈마, 어젯밤엔 잘 잤니? 미안해, 못 들어와서.”
“아니에요! 숙제도 다 하고 잠도 잘 잤고……. 아버지는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었다. 아이가 꿋꿋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또 착실히 들으려 애쓰는 얼굴이었다. 조금쯤은 제멋대로여도 될텐데. 아카아시는 속내를 삼키고는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선배는……. 잘 주무셨습니까?”
“어? 아, 나야 뭐! 잘 잤지!”
“저는 한숨도 못자고 일하는 동안 잘 주무셨다고요?”
“아, 아니, 어, 아니, 어……. 아니야, 못 잤어!”
“아깐 잘 주무셨다면서요.”
“아, 아냐. 내가 잘못……잘못 말했어!”
보쿠토가 고개를 휘휘 내젓는다. 덕분에 모자가 벗겨질 뻔했다. 아카아시는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보쿠토의 모자를 바로잡아 주었다. “눈에 띈다니까요.” 보쿠토가 귀끝까지 발갛게 물들이고는 식재료를 들지 않은 쪽 손으로 모자의 챙을 꼭 움켜쥐었다.
엘레베이터에 오를 때까지도 아이는 아카아시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아이를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는 사이에 보쿠토가 층수를 눌렀다.
“아카아시, 밥은 먹었어?”
“아침은……. 점심은 좀 때가 애매해서 못 먹었네요.”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그러다 진짜 쓰러지는 거 아냐?”
“오늘 하루인데요, 뭘. 그보다 어제 식사도 못 챙겨놓고 갔는데…….”
“나는 카즈마랑 같이 밥 잘 해먹었거든!”
“카즈마, 이 사람이 좀 도움은 됐어?”
“……네.”
‘카즈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방해만 한 것 같잖아!’ 하며 보쿠토가 소리쳤다. 그 덕에 아카아시는 한 번 더 웃고는 손가락을 입에 올렸다. 이제 엘리베이터 열리잖아요, 조용히. 보쿠토가 울상이 되어 아카아시와 아이의 뒤를 따랐다.
집으로 돌아와 장 본 물건을 정리하고 아이가 씻으러 들어가자 언제 난리 법석이었냐는 듯이 실내가 고요해졌다. 멀찍이서 물소리만 들릴 뿐이다. 아카아시가 냉장고 정리를 마치고 일어설 때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팔을 붙잡았다.
“카즈마 씻고 나오면 저녁……선배?”
“아카아시, 요 며칠 살 좀 빠진 것 같은데.”
“네?”
“너 지금, 계속 현기증 나지. 잠부터 자야 겠다.”
“아뇨, 괜찮은데요.”
“안 괜찮아.”
아카아시는 조금 당황해서 주춤했다. 보쿠토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강경했다. 바로 방금 전까지 모자 벗겨지겠다며 얼굴을 붉히던 사람은 온데간데 없다. 아카아시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아, 아니. 정말 철야야 했지만 그렇게…….”
“아까부터 균형잡으려고 미간에 힘 주고 있잖아.”
보쿠토의 손이 난데없이 아카아시의 이마 위에 감싸듯 올라왔다. 아카아시가 다시금 당황해 뒷걸음질치려 했지만 이마에 닿지 않은 다른쪽 손이 아카아시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살 빠졌다니까.”
“제 몸무게도 아십니까?”
“보면 알아! 잠부터 좀 자.”
“그러니까 정말 괜찮…….”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언제부터 저를 이렇게 걱정하셨다고 이러십니까. 이렇게 무리해가며 일했던 게 이번만인줄 아십니까. 지난 10년동안 이런 날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 때에는 곁에 없었으면서 이제와서…….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눈 앞이 휘청이며 번지는 것이었다. 몸이 넘어가려는 걸 받쳐주는 것이 있다. 그게 보쿠토의 품이라는 건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뭐가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잖아. 나 나중에 혼날 테니까.”
“예? 아니, 무슨,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가 무슨 말을 할 틈도 없었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번쩍 안아들고는 침실로 향한다.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집에 쳐들어오듯 방문한 뒤로도 절대 다가오지 않았던 영역이었다. 보쿠토는 반쯤 닫혀있던 문을 어깨로 밀어 열고는 침대 위의 이불을 걷어내고 아카아시를 앉혔다. 아카아시가 무슨 말을 할 틈도 없었다.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겨내고 넥타이는 잡아당긴다. 목까지 채웠던 단추도 두어개 풀고, 그대로 아카아시를 쓰러뜨려 눕혔다.
“아카아시, 잠 좀 자. 카즈마 저녁은 나랑 카즈마가 알아서 할게.”
“정말 괜찮…….”
“그럼 잠깐만 기다려봐. 이대로.”
아카아시가 억지로 일어나려는 것도 힘으로 누른 보쿠토가 손을 들어 아카아시의 눈을 덮었다. 이대로 잠시만 있어봐,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가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그 한숨은 열을 채 세기도 전에, 오래지 않아 낮고 고른 숨으로 바뀌었다.
보쿠토는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베개에 파뭍힌 아카아시의 얼굴이 얄팍했다. 학창시절에도 몸에 살이 많이 붙은 편은 아니었던 아카아시다. 하지만 지금은 더했다. 보쿠토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알고 있었다. 알았어야 했다. 고작 잠깐 눈을 감긴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듯이 잠에 빠져버리는 것을 보기 전에 알았어야 했다. 그건 조금 더 일찍, 억지를 써서라도 쉬게 했어야 했다는 후회였다.
“……아카아시 멍청이.”
그가 떼를 쓰면 아카아시는 언제나 들어주었다. 과거의 어느날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이번에도 들어주리라 믿고서 억지를 부려 그를 붙들고 쉬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억지와 고집에 져주지 않을 아카아시를 보는 것이 두려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지난 10년간 그가 돌보지 않았던 숲은 사막이 되었고 그 사막에 씨앗 하나를 심고서 싹이 나기만을 기원하고 있었다.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간절했다. 스스로의 손으로 바람을 불러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고집을 부렸어야 했다. 쉬어야 한다고, 더는 무리라고 말을 하고 붙잡았어야 했다.
10년 전에도 자신의 마음이 무서워 도망쳤는데, 이젠 더 이상 그럴 수 없다고 10년이 지나서야 찾아왔는데, 아직도 자신은 변한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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