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Logout Link+ Admin Write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아카아시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회사 건물 복도의 유리창에는 빗방울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쏟아지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서류철을 허리에 끼고서 손목을 걷었다. 손목시계가 오후 세시에 가까워져간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깨물고 미간을 모았다.


‘카즈마가 아침에 우산 챙겨 갔을까.’


평소에는 꼬박꼬박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바쁘고 피곤한 통에 깜빡 잊고 말았다. 


‘보쿠토 선배한테 카즈마 학교에 가달라고 하면…….’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인지, 그게 보쿠토라는 게 불행인지, 아카아시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뒷주머니의 휴대전화를 꺼내다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빛이 들어온 휴대전화 액정에는 삭막한 아이콘 몇 개가 떠있는 것이 전부였다. 다이얼로 전환되어 숫자 패드가 떴지만 누를 수 있는 것은 없다. 아카아시는 이런 생각도 하지 못한 스스로를 자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연락이 끊긴지는 10년, 그의 연락처를 지운지는 6년, 그의 연락처를 잊은 지는……. 


아카아시는 의식적으로 액정의 빛을 꺼뜨렸다. 잊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장 무서운 건 여기서 기억을 되짚으면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렇게까지 그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상흔을 남겨놓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마른 세수를 한 번 하고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반수는 아직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반수는 돌아오는 그를 한 번 흘끗 바라볼 뿐이다. 아카아시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곤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아이만 학교에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올 참이었다. 


주차장으로 나가는 잠깐 사이에 흠뻑 젖었다. 아카아시는 운전석에 앉아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고는 뒷좌석에 놓인 우산을 확인했다. 와이퍼가 기계음을 내며 빗물을 닦아내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핸들을 손에 쥐었다. 출퇴근 시간에 비하자면 한적한 편이었지만 비가 와서 그런지 움직임이 원활하지는 않았다. 


따각 따각, 핸들을 쥔 손 끝이 규칙적으로 소리를 낸다. 아카아시는 멍하니 와이퍼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비가 왔던 날이 있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은 그 기억 또한 내던져버렸기 때문이다. 우산이 있었다. 그의 사물함엔 항상 여분의 우산이 들어있었다. 체육관에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비가 오네요, 그런 말을 읊조렸는데 보쿠토가 불쑥 그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 우산 안 가져왔어?


가져왔다고 대답할 겨를도 없이 보쿠토가 부실까지 뛰어가서는 자신의 우산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증거를 내보여야 그가 믿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자기가 우산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혼자 앞서 달린다. 이따금 선배 행세를 할 기회가 오면 보쿠토는 저렇게 한껏 들떠서는 눈을 반짝거리곤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만 우산을 깜빡했다며 잘 부탁한다고 말해버리고 말았더랬다. 


빠아아앙 


아카아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에서 경적 소리가 울렸다. 불이 어느새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때 일이 다 기억이 나고.”


아카아시는 한숨처럼 중얼거리곤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까지는 썩 멀지 않았다. 근처를 보자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형들로 교문이 번잡했다. 아카아시가 근처에 차를 대어두고 우산을 찾을 때였다.


똑똑!


빗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경쾌하게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뒷좌석으로 손을 뻗고 있던 아카아시가 놀라 자세를 바로했다. 보조석 쪽 유리창 바로 앞에 누군가가 우산을 기울이며 서 있었다. 아카아시가 알아본 기색을 비추기가 무섭게 뒷좌석 문이 벌컥 열린다. 곧장 빗소리가 차 안으로 쏟아지고 어린 아이가 뒷좌석에 올랐다. 그 문을 닫아준 남자, 보쿠토가 당연하다는 듯이 보조석에 올라탔다. 


“카즈마? 보쿠토 선배까지……. 어떻게…….”

“후아, 비 너무 와서 우산으론 안 될 것 같았는데 아카아시 와서 다행이야! 어떻게 딱 만났네!” 

“선배가 어떻게 여기에 있습니까?”


보쿠토가 우산을 말아 발 밑으로 밀어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비 너무 오길래, 카즈마 우산 안 가져갔나 싶어서 나왔지. 그런데 무슨 비가 이렇게 내리냐? 우산 써도 다 젖겠……. 히익, 아카아시도 다 젖은 거 아냐? 너는 차를 타고 왔는데 왜 젖었어!”

“회사에서……. 주차장까지 가는 사이에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오늘도 일 늦어?”

“네.”


아카아시는 담백하게 대답하며 백미러로 뒤를 살폈다. 아이는 살짝 부끄러운 듯이 눈을 내리깔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안전벨트 매야지, 카즈마.”

“네.”

“보쿠토 선배도 매세요.”

“귀……매겠습니다.”


귀찮은데, 하고 투덜거리려던 보쿠토가 입을 꼭 닫고 후다닥 안전벨트를 맨다. 아카아시는 핸들을 유연하게 움직여 차의 방향을 틀었다. 


“선배가 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카즈마, 감사하다고 인사드렸니?”

“……네.”

“아, 아니. 뭐 대단한 것도 아닌걸. 아! 대단한 건 이게 아니라 진짜 있어! 내가 빨래도 다 걷어놨다고~!”

“그건……. 그건 정말 감사하네요.”


보쿠토가 금방 우쭐한 표정을 짓는다. 아카아시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에 보쿠토는 뒤에 앉은 아이에게 실없는 대화를 걸고 있었다. 아이는 아직 낯을 조금 가리는 듯이 눈을 피하며 대꾸했지만 보쿠토는 개의치 않았다. 


아이의 학교에서 집 앞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건물 바로 앞에 차를 세웠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씻고. 오늘은 저녁 두 사람이 알아서 해먹어야 겠어요. 반찬 만들어 놓은 건 냉장고에 있으니까 밥만 해서…….”

“아카아시는?”

“저는 회사에서.”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곤 몸을 돌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눈을 크게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본다. 


“카즈마, 저녁 잘 먹고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 알았지?”

“……네.”

“선배, 부탁할게요.”

“나만 믿어!”


차 안에만 볕이 든 것 같았다. 보쿠토는 와하하 웃고는 요란하게 차문을 열고 나섰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가 비에 맞지 않게 감싸고서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다. 아카아시는 빗물로 흐려진 차창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때 아파트 건물 안에서 한 사람이 다시 나왔다. 


“보쿠토 선배?”


우산을 기울여 차창으로 바짝 다가온 사람은 보쿠토였다. 아카아시는 살짝 창문을 내렸다. 아이와 장난치며 말을 걸 때와는 다른, 조금 진지한 얼굴의 금빛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그, 뭐냐. 이런 일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면 되니까!”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고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내가 해줄게, 보쿠토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충동적으로 불쑥 말했다. 


“선배 번호가 없어서요.”

“……아?”

“다음에 필요하면 여쭤볼게요.” 


달리 보쿠토의 번호를 입수할 수 있는 경로는 많았다. 보쿠토가 잠든 사이에 그의 휴대전화로 자신의 번호를 누르기만 해도 된다. 그런데 굳이 없다고 말해버린 건 심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카아시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보쿠토를 흘끗 곁눈질하고는 천천히 차창을 다시 올렸다. 


“비 더 맞지 말고 들어가세요.”


운전을 해 단지를 빠져나가는 동안 백미러로 보쿠토의 모습이 비쳤다. 우산을 들고서 넋빠진 얼굴로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이었다. 아카아시는 아파트 단지에서 아주 벗어날 때까지 그 모습을 흘끗거리다가 회사 건물의 주차장 앞에 도착해서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짓을…….’


아카아시는 핸들에 이마를 갖다 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빗방울이 차창 때리는 소리만 웅웅 울려퍼졌다. 


전화번호 같은 거 진작 지웠다는 이야길 하면 보쿠토가 어떤 표정을 할지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다. 일부러 심술궂은 소리를 하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서운해했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을 보는 건 저열한 희열을 안겨주었다. 그에게 나만이 특별해, 그런 생각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그에게는 자신뿐이라고. 자신만이 그토록 특별하다고. 


단어로, 말로, 목소리로, 문장으로 정의된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실감한 건 보쿠토가 졸업하고 난 뒤였다. 그에게 정말로 내가 특별한 사람이었나? 확신은 덧없이 스러졌고 이내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특별했다면, 정말로 소중했다면 이럴 수는 없었다. 


그랬으면서 보쿠토는 왜 갑자기 나타나서, 고작 번호가 없다는 한 마디에 세상이 다 무너지는 것처럼 굴고 있을까. 왜 자신은 그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 왜 자신이 아직도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고 싶은 걸까. 그래서 그가 정말로 자신의 말 한마디에 저러는 얼굴을 보고서 무얼 어쩌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