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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찬 조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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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서 푹 쉬세요, 주군.”

“응. 조운도.”


백자(白瓷)같이 하얀 얼굴의 여자는 살짝 뺨을 붉히더니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조운은 닫힌 문을 한참이나 보고 있기만 했다. 그와 관련된 기억을 모두 잃은 여자 앞에서 조운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터뜨렸을 때, 여자는 곤혹스러운 것 같았지만 내치지 않고 위로해주었다. 주군이라는 터무니없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도 받아주었다. 그 혼자 애틋이 여기는 것도, 받아주었다. 


그의 옛 군주는 단지 기억을 잃었을 뿐 여전히 그를 보듬어주고 이따금 손을 잡아주고 우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조운은 그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다. 기억하지 못해도 좋았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보아도 괜찮았다. 자신이 그녀의 앞에 마주 서있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하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조운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밤이 내려앉은 도원관은 고요에 잠겨있었다. 어둠이 깔린 실내에 유리창으로 달빛이 어슴푸레 들었다. 조운은 소리 없이 기둥에 가려진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창가에는 한 사람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서리가 낀 창밖을 향하고 있다. 조운은 언제나 그가 서 있는 저 자리, 저 창가에서 무엇이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제갈량.”

“밤 인사는 끝났나?”


조용히 서 있던 남자, 제갈량이 느린 동작으로 그를 돌아본다. 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량의 흰 얼굴 위로 창백한 달빛이 들어있다. 그의 눈매는 담담했다. 저 눈꼬리가 지옥의 벼락 끝자락처럼 보이던 때도 있었다는 게 거짓말 같을 정도다.


“아주 들어가서 재워주지 그래. 손을 못 떼던데. 차라리 신혼방을 차리는 게 어떤가?”

“…….”


조운은 속으로 스스로의 생각을 정정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쏘아붙이는 말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조용한 이 시간에 소란이라도 벌여서 공손찬을 깨울까 저어하는 마음에서였다. 제갈량은 그것을 잘 아는지 희끗이 웃는 얼굴로 가열차게 조운을 놀려댔다. 조운은 한껏 심호흡을 하며 붉어진 얼굴을 정리하며 제갈량의 곁에 서서 그가 보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날이 추워지며 이파리가 모두 저문 화단에는 하얀 서리가 앉아있었다. 조운의 숨을 타고 창가의 차가운 공기가 불투명하게 얼어붙었다가 산산이 깨어지기를 반복했다. 


제갈량의 그녀는 이곳에 없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앞에서 자신이 공손찬과 웃는 것에 대하여, 조운이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미안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자신의 행복이 제갈량에게 죄가 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의 홀로됨이 조운과 공손찬의 잘못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따금 그를 돌아보게 되었다. 


제갈량은 종종 도원관에 들러 그의 군주와 이젠 사람이 된 옛 장군들에게 안부를 전하곤 했다. 그리고 도원관에 머무는 나머지 시간동안 항상 같은 곳에 있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언제나 아름드리 나무 아래의 조그만 화단 앞에. 


지금 그가 이렇게나마 실내에 있는 것은 겨울 서리를 맞고 서 있는 제갈량을 유비가 못견뎌했기 때문이다. 


“……자넨, 군주가 서서였다면 차라리 더 행복했을…….”

“조운. 몸이 사람이 되더니 뇌는 어째 영웅패 시절보다 둔해졌나?”

“…….”


‘장비, 저놈은 얼굴은 꽃봉오리인데 입에서 나오는 건 다 똥이라던 그 말! 이 조운, 동의해 마지않습니다…….’


“내가 다른 군주의 신선이었으면 우리 주군이 드림배틀에서 이길 수 있었겠나? 자네들이 처음에 내 말 안 듣겠다고 주군을 앞세워 나와 한 판 했다 ‘모조리’ 박살난 건 새까맣게 잊었나보군? 내가 없었으면 자네는 지금쯤 저 공손찬님과 손 잡아보는 건 꿈도 못 꾸는 신세였으리라 본다만.”

“…….”

“그리고 서서가 군주였으면.”


신나게 이죽거리던 제갈량이 문득 입을 다물고 다시 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푸른 달빛이 제갈량의 콧등에 내려앉아 새하얀 경계선을 그렸다.


“그랬다면……. 드림배틀 같은 것에 참가하게 두지 않아.”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싸움에 참가하게 뒀을까보냐. 절대 안 될 일. 누가 영웅패를 주려고 하는 것도 쳐내도록 곁에 딱 붙어서 감시했을 것이다.”


그저 사람일 뿐인 서서. 영웅패를 보고서 이게 무엇이냐고 묻는 서서. 자신의 신선이 되어달라고, 제갈량 그에게 말하는 서서…….


“…하지만 서서라면 그 성격에 반드시 드림배틀에 참가했을걸? 자네가 어떻게 방해하더라도.”

“……그랬겠지.”


그랬겠지…….


제갈량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묘한 곳에서 고집이 있었던 서서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마음 먹은 것은 해내고야 만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선택했지 않았던가, 마침내 이 드림배틀에서 우승해 그가 줄곧 의미없다 여겨온 배틀 그 자체를 없애버릴 군주를. 비록 그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했으나. 


“그럼 자넨 서서의 신선이 되었을 테고.”

“아니.”


제갈량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만은 차가울 만큼 단호했다. 조운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제갈량의 손끝이 유리창에 닿았다. 서리가 하얗게 번져갔다.


“배틀에 이긴 주군에게 무엇이 남았지.”

“그야…….”

“인간이 된 너희 다섯과 나 하나를 제외하면 무엇이 남지? 그간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 친구였던 손책 님, 조조 님, 연이 닿았던 그 모든 사람들은 기억을 잃었다. 너의 공손찬 님께서도 너를 기억하지 못하지.”

“…….”

“그 기억들은 모두 주군에게만은 남아있고 소중히 여겨주시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게 상처가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너에게도 그렇듯이.”


그녀가 기억하지 못해도 좋았지만. 그를 처음 보는 사람 보듯 해도 괜찮았지만. 그게 상처가 아닐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서에게……서서에게 그런 것을 감당하게 하라고.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서서의 신선이 되면 서서는 내 소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배틀에서 이기려 하겠지. 그리고 그 애는…….”


모두들 그녀를 보고 그저 웃기만 할 줄 아는 백치 같은 신선이라 여겼지만, 사실 그 애는. 서서는.


“서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무엇이든. 그리고 마침내 손에 쥐고 말지.”


제갈량은 천천히 유리창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서서는 원하는 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 제갈량은 서늘한 표정으로 화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모르고 있다고, 모두가 속았노라 이따금 외치고 싶은 나날이 있었다. 서서가 당신들 생각만치 들에 핀 꽃 마냥 여리기만 한줄 아느냐고. 그 애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원하여 손에 넣고 싶은 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지금 이것을 보라고. 자신이 소멸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기어코 인간계로 내려갔고 끝내는 소멸되는 것까지 불사하여, 마침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가족을 안겨주었다. 


“……자네는 행복한가?”

“머리는 둔해졌어도 낯부끄러운 소리를 잘도 하는 것은 영웅패 시절부터 변한 게 없나 보군.”


조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행복한 것이라면 이제 이렇게 서서의 화단을 바라보는 것은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서서가 없는 지금도 진실로 행복하다면 굳이 이럴 것이야 없는 일 아닌가. 그녀를 그리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제갈량은 조운이 하지 못한 말까지 모두 들은 얼굴로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그건 서서와 내 마음이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조운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제갈량은 어린아이를 토닥이듯 답지 않을 만큼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가 있어도, 없어도. 내 마음은 한결같으니까.”


서서가 있었다면 잠든 그녀를 바라볼 시간에, 단지 그녀가 심은 꽃이 묻혀있는 화단을 바라볼 뿐인 것이다. 다를 것은 없었고 따라서 그의 마음이 변할 것도 없어, 그는 서서가 자신에게 안겨준 것들을 깨달은 날부터 줄곧 행복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서서를 사랑하는 마음을 견고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서서가 곁에 없어도 그의 마음에는 삭풍이 불지 않는다.


“그러니 조운. 자네는 마음 편할 대로 했으면 좋겠군. 내가 서서를 보고 있다고 눈치 주는 일은 그만 하고.”

“누, 눈치를 언제 줬다고!”

“지금도 눈치 주러 온 거잖나.”


제갈량의 말에 조운이 소리를 치려다 겨우 입을 닫았다. 제갈량이 부채를 들어 입을 가리고서 웃는다. 놀리는 투가 역력했다. 조운은 자신이 괜한 짓을 했다며 몸을 돌리고 가버렸다. 


도원관은 다시 고요 속에 가라앉고, 어둔 밤 제갈량은 서리 낀 유리창을 통하여 서서를 바라본다. 눈을 감으면 서서가 웃었고 눈을 뜨면 곧 봄이 올 것이 보였다. 봄이 오면 꽃이 필 테고 꽃 속에는 또다시 서서가 있다. 여름이 오면 파도가 치고 파도 속에도 서서가 있다. 가을이 오면 낙엽이 저물고 낙엽의 끝에 서서가 있고 다시 서리가 희게 이는 겨울이 오면. 


아주 조금은 쓸쓸하지만…….


제갈량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겨울 서리 속에 서 있는 그를 걱정하는 유비가 있다. 이렇게 잠들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오는 조운이 있다. 오늘밤은 조운이었으니 내일 밤은 황충일 것이다. 서서가 안겨준 모든 것들이었고 때문에 그 모든 것들로 서서는 그의 곁에 있었다. 


유리창에 서리가 인다. 이제 겨울이었다. 그리고 다시 곧 봄이었다. 




(40화 스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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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자욱한 공간이었다. 제갈량은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아마도 자신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신선은 잠이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그의 군주가 계속 마음을 쓰기에 담요만 덮고 누웠다 생각했는데 정말로 잠이 든 것 같았다. 


’일어날까?’


인간인 그의 군주는 무척 다채로운 꿈을 꾸는 것 같지만 신선인 그의 꿈이란 이 어둠이 전부인 것이다. 그나마 아늑한 어둠인 것은 그가 인간계의 생활에 많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필요 없는 것을 알면서도 담요를 덮고 누울 만큼. 


그 때였다.


“흑……. 흐윽…….”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제갈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선에게 오류는 있을지언정 ’무의식’의 세계란 없다. 모든 것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고 프로그램대로 실행되었다. 그의 꿈이 아늑한 어둠인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그가 모르는 울음소리가 있다. 까닭을 모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갈량은 서둘러 이 어둠 속을 헤맸다. 


한참이나 어둠 속을 헤매던 제갈량은 마침내 울음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희미한 빛이 흐릿하게 감도는 곳이 있다. 거기에 누군가가 웅크리고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자욱한 어둠 속에서 구분하지 못할 만큼 새카만 옷을 입고 있는 여자였다. 제갈량은 그 웅크린 등만 보고서도 우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서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던 작은 덩어리 같은 것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돌아본다. 보랏빛이 감도는 시선은 푹 젖어있었다.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린다. 검은 레이스로 감싸인 여자는 우는 소녀 같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제갈량……흐윽.”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데, 제갈량의 마음에서도 어떤 것들이 속절없이 부서졌다. 제갈량은 어쩔 수가 없어서 그녀의 맞은편으로 다가가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를 보고서 서서가 앉은 채 조금 뒷걸음 질쳤다.


“서서.”

“흐, 흐윽, 나, 옷, 안 어울리지…….”

“……조금?”


어울린단 말은 해주고 싶지 않았다. 서서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또 후두둑 흐른다. 제갈량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괜찮아. 안 어울려도.”

“그치만……그치만…….”

“…왜 여기서 울고 있었어.”


찬찬히 눈물을 닦아주었다. 많이 울었던 것인지 눈매가 붉다. 그녀의 오른쪽 눈매 아래로 보랏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제갈량은 한숨을 삼켰다. 왜 내 꿈에서 울고 있었어. 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으면서.


“모르겠어, 자꾸만 눈물이 나서…….”

“나를 부르지 그랬어.”


나를 부르지 그랬어……. 네가 부른다면 그게 어디여도 나는 너를 위해 갔을 텐데. 그게 설령 나의 꿈속이어도. 왜 혼자서 울고 있었어. 하지 못한 말은 서서의 눈물에 녹아내렸다. 서서가 그를 올려다보며 눈물에 젖은 얼굴로 빙긋이 웃었다.


“그건 안 돼.”

“…왜.”

“소멸되고 난 이후엔 절대 제갈량 부르지 않게 잠금 걸어 놨으니까.”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제갈량은 눈을 깜박이며 서서를 바라보았다. 서서는 금세 눈물을 그친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제갈량이 그랬잖아! 난 도구로 이용당할 거라고! 나는 바보니까.”

“…바보라곤 안 했어.”


서서는 제갈량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럴 거 같았거든. 서서는 선계 꼴찌니까……. 신선마법도 제일 못했고 약하니까 어쩌면…….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서서가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았을 때 제갈량은 문자 그대로 폐부가 으깨어진다고 생각했다. 서서는 인간계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소멸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 각오가 물렀던 것은 도리어 그였다. 자신에게 남긴 편지는 인간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의 유서나 다름없었고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제갈량은 상처받고 말았더랬다. 


그녀는 줄곧 자신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거든. 누가 나를 도구로 이용할거라면 내 어디를 쓰려고 할까? 나는 선계 꼴찌인데……. 쓸 데도 없을 텐데.”


선계의 모든 신선들 가운데에 말석, 수련에는 흥미가 없고 관심을 둔 것은 인간계뿐인 천진난만한 소녀 같은 신선. 그녀에게 무슨 이용가치가 있겠는가. 할 수 있는 신선마법도 없고 남을 회유할만한 대단한 언변도 없는 그녀가. 


—하지만 단 한 사람.


“그래서 막~! 열심히 생각을 해보니까 제갈량! 제갈량이 딱 생각이 났어.”


그녀가 손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마음 돌려줄 단 한 사람이 있다.


“서서는 제갈량하고 친하고, 제갈량은 착하니까……. 누가 나를 이용해서 제갈량을 괴롭힐지도 모른다고! 어때! 내 생각!”

“……그래서.”

“그래서~! 서서가 소멸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부활해도! 절~대 제갈량에겐 말 걸지 않게! 딱! 잠금을 걸어 놨다구. 내가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프로그래밍 한 거 처음이었다?”


서서가 방긋이 웃었다. 언제 울었느냐는 듯이.


“그래서 성공했지?”

“……주군에게만 말을 건 게 그래서였어?”

“응! 유비님은 상냥하니까 내가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고민하실 것 같아서……. 그 때 제갈량이 짠! 하고 도와줘야지, 유비 님을!”

“……주군이 그렇게 좋아?”


서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제갈량도 좋아하잖아, 유비 님!”

“……서서.”

“응?”

“나는……나는, 너만 좋아하고 싶었어.”


한 번도 인간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선계를 탐구하지도 않았다. 제갈량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인간계와 선계에 다른 어떠한 빛도 없으리라 단언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선계의 신선들 중 그 누구보다도 우수한 제갈량이었기에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빛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무엇도 둘러보지 않았다. 그에게 빛은 이미 있었다.


“나는 너만 있어줬으면 했어. 너만 좋아하고 싶었다. 너만 소중히 하고 싶었어.”


내게는 너만이 유일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마음은 모두 너에게 가 있다고, 다른 것들에게는 조금도 낭비하지 않았다고, 너만을 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완전무결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고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바뀌고 변한다. 그가 환멸을 느끼는 선계의 시스템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일수도 있다는 것 역시 알았지만 제갈량은 시도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순간 그 모든 것으로 단 한가지만을 소중히 하고 싶었다. 파도 앞의 모래성 같은 세계 속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방파제를 쌓자고도 할 수 있을 테고 성을 옮기자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제갈량은 그럴 시간과 마음과 힘 그 모든 것을 단 하나에만 쏟아 붓고 싶었다. 모든 것은 가능성의 파편에 불과했다.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주보고 싶었다. 차라리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사랑으로 만든 모래성 속에서 천천히 매몰되어 가고 싶었다.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그러니까 제갈량, 결국 유비 님도 좋아졌다는 거지?”

“……너는 그런 바보 같은 남자 그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들었던 거야.”


바보 같고, 순진하고, 터무니없는 소원을 가진 남자. 그 어디가 마음에 들었던 거야. 유비를 보며 울고 싶은 날이 있었다. 왜 저 남자를 지키기 위해서 서서 너는 소멸까지 각오했던 거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소중하지 않았어? 너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나?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나는, 남은 나는 왜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고…….


“왜냐니.”


서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보다 활짝 웃었다.


“그야 유비님은 제갈량을 행복하게 해주실 테니까!”


아, 또다시 가슴의 어떤 것들이 뜯겨나간다. 제갈량은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서서, 내가 말했잖아. 나는 너와…….”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이 그의 행복이었는데. 서서는 그런 제갈량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붙잡혔던 자신의 손을 빼내어 이번엔 그녀가 제갈량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제갈량. 그건 행복이 아니야.”

“넌 나와 있는 게 행복하지 않았어?”

“난 내가 제갈량과 있는 것보다, 그런 것보다 더, 제갈량이 더 좋아. 더 많이 제갈량을 좋아해.”

“…….”

“너무 좋아해. 너무 너무, 너무 많이 좋아해서 계속 생각했어. 어떻게 해야 제갈량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너만 있으면 됐다고 말했잖아!”


그녀의 생전에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가 고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서서는 무척 쉽게 말하곤 했다. 좋아해, 제갈량! 웃는 그 얼굴을 보며 무수히 많은 밤을 생각했다. 저 마음의 깊이가 얼마나 될지. 


이제야 생각한다. 깊이 같은 것이야 없어도 괜찮으니까, 좋아해주지 않아도 좋으니 있어만 주었으면 한다고. 그의 곁이 아니어도 좋다고. 어딘가에 있어주기만 해도. 


하지만 서서는 검은 레이스로 몸을 휘감은 채 빨갛게 부은 눈으로 웃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뚜껑이 닫힌 세계에서.”

“……뭐?”

“우리가 있는 곳은 그랬잖아, 제갈량. 이렇게 유리병이 있으면……. 뚜껑이 꼭 닫혀있는 거야. 제갈량은 알고 있었지? 뚜껑을 열면 나갈 수 있다는 거.”


모를 리가 없었다. 선계에서 그 누구보다도 월등한 제갈량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뚜껑이 닫힌 유리병 안에 갇혀있었고 그걸 열기 위해선 어쩌면 가진 전부를 퍼부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고서 무엇이 남는가? 가진 전부를 퍼부었는데도 열리지 않으면 그 땐? 


“나는 뚜껑을 열어주고 싶었어. 유비님이 열어주실 거라고 믿었어.”

“…….”


아아, 그리고 너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지.


“그래서 유리병 바깥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걸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네가.”


내겐 네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제갈량은 서서가 자신의 눈을 쓸어가기에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갈량은 고집쟁이야.”

“……서서보단 아니야.”

“이것봐, 또 고집부리잖아!”


사실은 유비님이 좋지? 이제 좋아졌지? 서서가 장난치듯, 어린 아이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제갈량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단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선을 위해서 그리고 영웅패들을 위해서 가진 모든 걸 쏟아 붓는 그를 보며 동시에 그의 안에서 서서를 본다. 처음부터 싫어할 수는 없었다.


어느덧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제갈량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서를 바라보았다. 서서의 몸 주위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서서가 웃는다. 제갈량은 그런 서서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서서의 옷깃 위에 물자국이 뚝뚝 떨어졌다.


“나에게 말 걸지 못하게 해뒀다면서……거짓말쟁이.”

“아하하, 마지막에 쬐~끔 실패했나봐. 선계 꼴찌인 게 이렇게 티 나네.”

“…….”

“제갈량, 가족끼린 미안하다고 하는 거 아니래.”

“그런 게 어디 있어. 잘못했으면 사과해야지.”

“아이참, 제갈량!”


소녀 같은 목소리가 흐려지는 걸 알면서도 제갈량은 그녀를 놓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해. 나를 두고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해. 나만 두고 가는 걸 사과 해. 마음속에 넘쳐나는 그의 말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서서가 고개를 기울여 제갈량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선계에 있었을 때 제갈량은 서서의 하나뿐인 가족이었으니까, 미안하다고 안 할게.”

“그럼 이젠 나만인 게 아니란 거네.”

“응! 유비님도, 관우도, 장비도, 조운도 모두 가족인걸? 제갈량에게도 그렇잖아?”


모르겠다고, 아직 모른다고 말을 하고 싶은데 서서는 자꾸만 흐려져 가기만 한다. 서서가 제갈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두와 가족이 되어서 잘 알게 됐어. 내가 제갈량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너무 좋아해서 제갈량이 행복하기만 바랐어.”


설령 내가 없더라도.


서서의 마지막 말이 흩어졌다. 


그의 세계가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


제갈량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슴팍에 올려놓았던 손을 들어 뺨을 쓸어본다. 눈물은 그의 손에 닿았다가 천천히 증발했다. 몸을 일으키자 앞치마를 입고 있는 유비가 한 손에는 국자를 든 채 부엌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잘 잤냐며 조금 있다 간식을 해오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간다. 제갈량은 아무 대답 하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나 뒤뜰의 화단으로 향했다. 


서서가 씨앗을 심었다는 화단에는 꽃이 환히 피어있었다. 제갈량은 그 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빙긋이 웃었다. 


거센 파도는 모래성도 유리병도 모두 부수어버렸다. 모래성의 모래도 유리병의 조각들도 그 속에 있던 것들도 모두 파도에 뒤섞여, 이젠 그 파도가 그의 모래성이자 유리병이 되었다. 


“서서, 다음엔 내 씨앗도 곁에 심을게.”


그녀가 곁에 없어도 파도는 밀려온다. 






















늦은 오후 무렵부터 부슬부슬 비가 왔다. 안개가 흩뿌리는 것 같은 비였다.


*


“우왓, 칠석이라고 비 오나봐! 제갈량, 빨리 걷어서 들어가자!”


도원관의 앞마당에서 유비가 빨래 걷는 것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던 제갈량은 고개를 갸웃했다. 


“날짜가 비가 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응? 견우 직녀 몰라? 우왓, 빨래, 빨래!”


유비는 바쁜 와중에도 제갈량이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을 탓하지 않고 서둘러 빨래를 걷었다. 마당을 꽉 채우고 있던 빨랫감이 모두 걷히는 건 눈 깜빡할 새였다. 


드림 배틀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유비의 영웅패들은 모두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당연한 것처럼 다시 유비를 찾아 도원관으로 왔고, 덕분에 도원관의 가사도 부쩍 늘었다. 유비는 답게도 싫은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지만 장수도 주군 혼자 일하게 두지 않았던 터라 도원관 살림은 그럭저럭 굴러갈 수 있었다. 제갈량은 이따금 도원관으로 내려와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 돌아가곤 했다. 오늘도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제갈량은 도원관 도장 바닥에 집채만 한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빨래 개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불쑥 물었다. 유비는 간식을 준비하겠다며 부엌에 들어가 자리를 비웠다.


“견우 직녀가 무어냐?”

“응? 제갈량, 그런 것도 몰라? 아주 basic한 동화인데!”


말을 받아준 것은 조운이었다. 옛 주군인 공손찬에게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건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입이 가볍고 매섭다. 제갈량은 손에 쥔 부채를 한 바퀴 돌렸다.


“자네는 사람이 됐지만 난 여전히 신선이지. 다스리기를…….”

“아, 알았어! 말 해줄게! 말 해주면 될 거 아냐!”


조운은 빨래를 개면서 그 ’견우와 직녀’에 대한 것을 늘어놓았다. 인간계에서는 평범한 동화인 것 같았다. 제갈량은 젠체하는 조운의 말투를 지적하지도 않고 잠자코 그 얘기를 듣기만 했다. 


조운이 그렇게 한참이나 얘기를 늘어놓다가 돌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갈량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누군가가 귀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운이 개던 빨래가 흩날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장수들이 소년처럼 구는 그를 보고서 낮게 웃음을 흘린다. 조운은 제갈량에게 으스대듯 말하던 것은 온데간데없이, 다른 장수들이 웃는 것에도 신경 쓰지 못하고서 수줍은 꽃이 핀 것 같은 표정으로 현관으로 달려갔다. 귀가한 이는 목덜미를 겨우 덮는 단발머리에 얼굴이 새하얀 소녀 같은 여자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책 두어 권뿐이었는데 조운은 그것도 견디기 힘들다는 듯이 굴었다. 제갈량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바깥으로 향했다. 공손찬이 스쳐지나가는 제갈량을 보고서 아는 척했지만 제갈량은 고개만 한 번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


삼백년은 어쩌면 짧은 영원과도 같다. 백 년도 되지 못하는 찰나의 시간을 사는 인간에게 대자면 그러할 것이다. 본래 제갈량은 그 길지 않은 영원을 천천히 소요할 작정이었다. 


줄곧 드림배틀에는 참가할 뜻이 없었다. 군주를 찾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를 제외한 신선들 가운데에 누군가가 드림 배틀에서 우승할 것이고, 자신은 300년의 시간을 마치고 소멸하리라. 아무 의미 없는 생이었으나 싫지만은 않았을 뿐이었다. 서서와 함께 사라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서가 홀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지만—서서는 종종 터무니없는 일을 잘도 하곤 했으므로—, 설마하니 자신이 홀로 남을 거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 번이라도 이런 생각을 했더라면. 


제갈량은 서서가 심었다는 꽃밭 앞에 서서 가만히 안뜰을 내다보았다. 이슬비가 사르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저무는 해의 따뜻한 색이 방울방울 굴절되어 서서의 소맷자락을 떠올리게 한다. 


한 번이라도,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자신은 무슨 말을 했을까. 여기 있자. 여기에 있어줘. 여기에서, 나와 함께. 이런 말이 아니라 조금 더 다른 말을…….


“저기요.”


멍하니 생각을 거듭하던 제갈량은 낮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목덜미까지 겨우 오는 짧은 단발머리, 동그란 눈동자에 눈처럼 하얀 얼굴의 소녀 같은 여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슬비의 따뜻한 색이 비쳐 그 위로 다른 이의 얼굴이 잠시 겹쳐 보였다 다시 흐려졌다.


“공손찬 님.”

“곧 있으면 저녁때니까 들어오라고, 유비가요.”


배틀은 끝났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억을 잃었다. 그의 앞에 있는 그녀 역시 자신을 비롯하여 드림 배틀 때 만났던 모든 인연을 잊었다.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천하의 멍청이들뿐이다. 저기서 자신의 옛 주군만 보면 뺨을 붉히느라 바빠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는 조운이라던가. 


조운은 빗속에 서 있는 공손찬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달려와서 그녀의 머리 위로 손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비 한방울이라도 닿을까 싶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 공손찬은 그것이 어색하기는 해도 싫지는 않은 듯이 그 그늘에 의지해 도원관 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조운은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공손찬을 보면서도 조금도 서운하지 않은 듯했다. 


유비는 그런 조운이 굉장하다고 했고 제갈량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서서가 돌아온다면, 돌아오기만 한다면. 자신을 잊은들 그게 무어 대수랴. 그에게 마음 한 톨 돌려주지 않는다 하여도 그게 무어 대수랴, 돌아와주기만 한다면.


주지 못한 마음은 넘쳐흘러 그의 발밑을 질척하게 만들고 있었다. 언젠가 그의 목까지 차올라 그를 익사시킬지도 몰랐다. 


*


“—량! 제갈량!”


제갈량은 눈을 번쩍 떴다. 잠깐 잠이 들었나? 신선은 잠들지 않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 앞서는 것이 있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그런 것보다 앞서는 것이 있다. 


제갈량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슬비는 물안개처럼 주위를 흐리게 만들었다. 그 속에 또렷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서…서.”

“아잇참, 제갈량! 아까부터 계속 불렀잖아!”


소녀 같은 얼굴의 여자가 허리에 팔을 올리고서는 그를 본다. 단발머리, 새하얀 얼굴, 커다란 눈동자. 뚱한 듯이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다. 서서였다. 제갈량은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단어가 머리속에서 회오리쳤고 모두 엉망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없었다. 


서서가 결국 방긋이 웃고는 그에게 다가와 덜컥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제갈량! 이리 와!”


서서가 그의 손을 붙잡고 어디론가 향한다. 홀린 듯이 따라가던 제갈량은 잠깐 멈춰 섰다.


“제갈량, 빨리이!”

“잠깐만. 서서.”


신선은 잠을 자지 않는다. 꿈을 꾸지도 않는다. 소멸된 서서가 돌아올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제갈량은 충돌하는 정보와 사실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았다. 


걸치고 있던 흰색 코트의 단추를 하나 하나 풀고 벗은 제갈량은 그 코트를 한 번 정리해 서서의 어깨 위에 씌워주었다.


“제갈량?”

“비 오잖아.”

“그치만 그럼 제갈량도 비 맞잖아~!”

“나는 괜찮아. 어디 갈 거였어?”


말을 돌리자 서서는 금방 또 눈을 반짝이곤 다시 앞장섰다. 점점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돌아가는 길도 물빛 안개 속에 흐릿해져갔다. 제갈량은 돌아갈 길을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끝이라 해도 좋았다. 


“제갈량은~! 선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지!”

“그런 것 같아.”

“아휴, 정말이지 도술만 할 줄 알고!”

“서서가 있으면서 알려주면 되잖아?”


아, 이런 대화를 했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가지 말라는 말을 왜 하지 못했을까. 정이 많은 서서는 그가 눈물로 호소하면 있어주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마음이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여도. 


하지만 정정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목이 틀어 막힌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입술을 버끔거리는 것이 고작이다. 서서가 그런 제갈량을 돌아보며 웃었다. 꽃이 피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금 그러고 있잖아?”


지금? 이곳이 선계인가? 제갈량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위치를 특정 지을 수 없었다. 이슬비와 물안개가 자욱했고 선계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선계에 비가 왔던 것은 백여 년 전 딱 한번, 제갈량이 신선마법을 응용하여 빗방울이 흩날리게 만들었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서서가 인간계의 무지개를 궁금해 했기 때문이었다. 


“앗, 다 왔다!”


돌연 서서가 멈춰 섰다. 숲의 한쪽 구석, 버드나무 가지가 꽂혀있었다. 갓 파묻은 듯이 짙은 색을 드러낸 흙이 소복이 덮여있다. 그 앞에 무릎을 대고 선 서서가 제갈량을 향해 손짓했다. 얼른 다가오란 뜻이었다. 제갈량은 서서의 곁에 서서 그녀의 머리 위로 손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빗방울이 그의 손등에 닿았다. 서서가 조금 웃더니 파묻은 흙을 살살 훑어냈다.


“서서, 내가 할게.”

“안! 돼! 요! 서서가 해야 해.”


서서가 고집을 부릴 때의 목소리였다. 제갈량은 서서가 하는 것을 그녀의 뜻대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흙이 묻은 손은 씻어주면 되고 상처가 나면 치유해주면 된다. 그다지 깊이 파묻지 않았는지 서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조그만 나무로 만든 상자였다. 


“유비 님한테 재미있는 걸 배워서! 거기에도 묻어뒀지만, 제갈량에게도 따로 해주고 싶었거든.”

“아…….”


어떤, 정체 모를 것이 묵직하게 제갈량의 가슴 안에 내려앉았다. 서서는 흙이 묻은 상자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애틋하게 쓸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제갈량은~! 도술만 잘하지 선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까 말야.”


그러니까, 가지 말고. 


계속, 내 곁에서. 


하지만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서서가 제갈량에게 작은 나무함을 불쑥 내밀었다. 조금 쑥스러운 듯이 배시시 웃는 얼굴이었다. 제갈량은 떨리는 손으로 나무함을 받아들었다. 상자에서 흙의 싱그러운 비린내, 튿어진 풀잎에서 새어나오는 향취, 그리고 과일의 단내가 함께 흘러왔다. 


조심스레 상자를 연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투박한 상자 안에는 작은 것이 화선지에 싸여있었다. 제갈량이 그 화선지를 펼쳤다.


“헤헤, 요건 유비 님한테 받은 씨앗이야. 내 화단, 알고 있지? 거기에 제갈량도 같이 심자! 그리고 이건 공손찬 님께 배운 건데, 이렇게 실로 장식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제갈량 부채 엄청 엄청 멋있잖아? 거기에 달면 예쁠 것 같았어!”


천으로 감싼 조그만 주머니와 청록색 수실로 만든 술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제갈량은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일렁거렸다. 자신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는 것을 알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이렇게 혼자 남겨질 것을 알았더라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서서. 다른 데 가지 말고 나와 함께 있어주면 안 될까. 가지 않으면 안 될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내가 빗방울을 가려줄 수 있게, 허락해주면 안 될까. 


그 모든 게 안 된다면, 그러면 나를 데리고 가주면…….


“제갈량은 선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니까 말야, 평~생 못 열어보나! 했다고.”

“서서, 나는…….”


유비와 조운에게서 견우와 직녀에 대해 들었다. 칠월 칠석에 대해 들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요동쳤다. 별보다 먼 곳에 있는 그대를 만날 수 있는 날이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일렁거렸다.


너는 소멸했고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내가 흔들렸어.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까닭도 모르고서 너의 화단 앞에 서 있었다. 네가 올 거라고 기대했던 걸까. 그게 아니면 나는.


하지만 모든 아무리 애를 써도 말을 할 수가 없다. 말을 할 수가 없어 말 대신 눈물이 흘렀다. 물안개가 그의 뺨을 스치며 상처를 낸다. 서서가 그를 보며 웃었다. 서서의 손끝이 그의 뺨을 스쳤다. 


“돌아와서, 전부 알려줄게.”


하지 못했던 말은 할 수 없다. 시간은 거스를 수 없다. 서서는 돌아올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도 바꿀 수 없고 바뀌지 않았다. 


물안개같은 비가 계속 내렸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었다.


*


제갈량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날은 완연히 개어, 남빛 하늘에는 선명한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별빛이 쏟아질 것처럼 빛이 난다.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제갈량은 서서의 화단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저녁 내내 내린 이슬비에 젖은 화단에서는 생생한 꽃무리가 환히 피어있었다. 살짝 건드리자 꽃잎을 타고 그의 손끝으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 역시 빗방울을 가려주고 싶었다. 손에 든 작은 꽃송이 하나도 대신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할 수 없고 잡지 못했던 손을 잡을 수 없으며, 가려주지 못한 빗방울은 영원히 그의 뺨에 대신 흐를 것이었다.


전하지 못한 마음이 여전히 그의 안에 켜켜이 쌓이다 넘쳐흐른 것들이 맑은 웅덩이를 만들어 그의 발을 적셨다. 그것들은 시간과 함께 차오르며 흩날리는 꽃잎이 닿기만 해도 출렁거릴 것이다. 별보다 먼 곳에 있는 연인과 만나는 날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사랑하는 이에게 달콤한 것을 전해주는 날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빗방울에 노을이 비쳐 그녀와 같은 색으로 빛이 나는 것을 보기만 해도. 


제갈량이 선계로 다시 돌아간 것은 다음날의 아침 해가 붉은 빛으로 떠오를 때였다. 제갈량은 자신이 내년 이맘때면 또다시 빗속을 헤매리란 것을 알았다.

 

그의 부채 끝에 청록색 술이 가지런히 흔들렸다. 

제갈량과 서서 첫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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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바보 신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가 소위 말하는 ‘연습’이니 ‘수련’이니 하는 것에 얼굴을 비추지 않은지도 한참이나 되고 난 뒤였다. 다른 신선들과 어울리지 않은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더 늦게 알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바보 신선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온 것은 언제나 그를 못 이겨 안달인 주유였다. 

 

“아~! 진짜! 진도도 못 나가는데 요샌 출석도 안 한다고. 사마의 님이 보통 고생이 아니셔.”

 

제갈량은 대략적인 상황이 눈에 그려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사람 때문에 진도가 자꾸 늦어진다고 저렇게 눈총을 주면 대개는 당연히 수업에 나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알 바는 아니었다. 

 

“하아, 오늘은 그래서 나도 찾으러 나왔단 말야. 너도 좀 찾아!”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가 왜.”

“야! 제갈량!”

 

주유가 빽 하고 소리 질렀지만 제갈량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가 생성된 이후로 새로이 만들어진 신선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는데, 주유가 말한 그 ‘바보 신선’이 누구인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옆에서 주유가 계속해서 언성을 높이는 것이 시끄러워 제갈량은 주유를 흘끗 쳐다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야! 제갈량! 사람 얼굴을 보고 한숨 쉬냐!”

 

그 누군지도 모를 바보 신선을 찾으러 나온 것은 주유 자신이면서 하는 말이라곤 ‘사마의 님이 보통 고생이 아니셔’라니, 자기가 하고 있는 짓은 그럼 고생이 아닌가. 예전부터 쓸데없이 정이 많은 여자였다. 제갈량은 그런 주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팔랑거리고 있던 부채만 한 번 더 흔들었다. 곧 그의 주위 풍경이 바뀌고 주유가 꽥꽥 그를 부르는 목소리도 사라졌다. 

 

제갈량은 부드러운 풀잎이 깔린 들판을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며 지겹다는 표정으로 하품했다. 같은 신선을 걱정해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 네가 날 못 이기는 거겠지, 제갈량은 그걸 그녀에게 말로 해줄 마음도 느끼지 못하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빈틈없이 짜 맞추어진 세계는 흐린 날도 해가 지는 날도 없이 하염없이 아름다웠다. 제갈량은 자신의 세계 역시 영원히, 이 안에서 흐트러짐 없이 굴러갈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정해진 시효가 다 되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끝나리라고.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가 굴러오는 걸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와 구름을 디디는 것 같은 걸음걸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선이었다. 제갈량은 시큰둥한 얼굴로 멀찍이서 걸어오고 있는 신선을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보았든 아니든 그의 일은 아니었다. 그를 보고 조용히 지나가주지 않는다면 자리를 옮기면 될 일이다. 

 

제갈량은 그 신선이 언덕의 돌부리에서 그대로 발이 걸려 넘어지더니 그의 코앞까지 굴러오는 걸 보면서도 한가롭게 팔랑팔랑 부채를 부쳤다.

 

“우, 으아아아앗!”

‘오, 잘 구르는데…….’

 

바로 그의 코앞에서 겨우 멈춰 선 신선은 바닥에 엎어진 채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제갈량은 부채의 방향을 슬쩍 그쪽으로 움직였다. 바람이 엎어진 신선의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주긴 했지만 둥글게 드러난 귓바퀴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그 신선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긴 어디지! 엇, 누구?”

 

주먹만한 얼굴에 큼직한 눈이 그를 올려다보고 반짝 빛났다. 제갈량은 시큰둥하게 부채를 움직이며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신선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에 그를 알지도 못하고 걷는 것도 어설퍼서 돌부리에 한 번 걸렸다고 언덕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굴러오는 신선.

 

‘주유가 말한 그 바보 신선인가보군.’

 

제갈량은 그 신선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한 쪽을 가리켰다. 신선이 그의 속도 모르고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유가 찾더군.”

“아.”

 

그러니 얼른 그 쪽으로 가보란 뜻이었는데 신선의 얼굴이 알듯 모를듯 어색하게 변했다. 마치 온 세상에 빛의 편린만 가득한 것인 양 웃기만 하던 얼굴이었는데 스스르 입술을 다물더니 눈을 도르르 굴리는 것이었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다 머리카락에 묻은 풀잎을 자연스레 털어낸 신선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완전히 서도 제갈량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것 같았다.

 

신선은 알려줘서 고마워, 라고 말하며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그가 알려준 것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버렸다. 제갈량은 미간을 한 번 찌푸리기만 했을 뿐 주유에게 다시 알려주지도, 저 신선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

 

“앗! 또 만났네?”

 

요 며칠, 제갈량은 이 선계에서 다른 신선들의 시선을 피할 만한 공간이 생각보다 협소하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 

 

노을빛 머리카락이 섞여든 신선이 그를 보더니 활짝 웃곤 큰 동작으로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물론 제갈량은 그녀를 보자마자 곧장 몸을 돌렸다. 

 

“앗! 제갈량! 어디 가~!”

 

뒤에서부터 빠르게 따라붙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제갈량은 바삐 걸어가다 불현듯 좋지 않은 예감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바삐 걸어오던 신선이 그대로 어딘가에 채이는가 싶더니 고꾸라졌다. 바닥에 엎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 제갈량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신선들 눈에 띈다 해도 실력을 겨뤄 보자거나 아니면 견제하는 눈빛밖에 받을 일이 없으니 그들을 피해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으로 향하면 세 번에 한 번 꼴로 거기엔 예의 그 ‘바보 신선’이 먼저 와 있었다. 그게 아니면 그 바보 신선이 그가 있는 곳에 나타나선 그를 보고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거나. 

 

처음 한 두 번은 그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기만 하더니 나중에는 어디서 이름을 알아왔는지 반갑다며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제갈량이 거기에 응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어나.”

“흐윽, 으응…….”

 

하지만 자신을 향해 오다가 이렇게까지 대차게 엎어진 걸 내버려둘 수는, 차마 그럴 마음은 생기지 않아서 제갈량은 결국 손을 내밀고 말았다. 엎어져있던 신선이 눈물을 꾹 참는 얼굴로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제갈량은 자신의 손 안에 그녀의 손이 생각보다 몹시 작아서 조금 놀랐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연습은 이미 시작했을 텐데.”

“아……. 그렇지, 그, 조금 있다가 가려고…….”

 

시선을 피하는 눈동자가 어쩔 줄 모르고 도르르 굴러간다. 그 거짓말을 간파하기 위하여 대단한 예리함은 필요하지 않았다. 

 

“제, 제갈량은? 안 가?”

‘정말로 나를 모르는군.’

 

이쯤 되면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제갈량은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가볍게 흩뿌리듯 움직였다. 곧 소리 없이 그들의 주위로 빙벽이 올라왔다.

 

“어, 어어? 어어어!”

“난 갈 필요 없어.”

 

다시 한 번 부채를 움직이자 빙벽은 있었던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뺨을 스치는 조금 서늘한 공기가 빙벽이 존재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증명할 뿐이었다. 

 

그리고 아마 이 바보 신선과 만나는 것도 이것으로 끝이리라, 제갈량은 막연히 생각했다. 

 

선계의 신선들이란 결국 각자의 생명을 걸고 우열을 다투는 사이다. 서로를 존중하는 시늉을 하고 있으나 보다 우월한 자는 승리하고 열등한 자는 패배하여, 그 대가로 우월한 자는 살아남고 패배한 자는 소멸하고 마는 간결하고 잔혹한 관계였다. 자신이 다른 신선들과 어울리려 들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었고 다른 신선들이 그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존재라는 건 그로 인해 다른 모든 신선들의 소멸이 비롯된다는 뜻이었다. 드림배틀의 승자는 단 한 사람뿐이므로.

 

그들이 도술을 갈고 닦고 연마하는 것은 장차 모시게 될 주군의 꿈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소멸되지 않기 위해서인가? 제갈량은 두 가지 모두 아무 의미 없는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 신선의 결말은 둘 뿐이다. 소멸되거나 아니면 옥새에 300년간 갇히게 되는 것. 옥새에 갇히는 것과 소멸하는 건 또 무엇이 다르기나 한 것인가…….

 

“우와아아! 제갈량 대단해! 신선 마법 해낸 거야?”

“……해낸 게 아니라 한 거지.”

“대단해! 나는 아직 한 번도 못했는데……. 진짜 대단해, 제갈량!”

 

소녀의 눈은 천진하여 빛무리가 흩어지는 것 같다.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아서 제갈량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상대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이나 경탄을 거듭하던 그녀가 퍼뜩 생각났다며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조그만 열매가 알알이 맺힌 과일 한 송이였다. 신선은 그런 걸 먹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 했지만 꼭 한 번만 먹어보라고 막무가내여서 결국 제갈량은 열매를 입에 넣고 말았다. 달콤하고 청량한 감각이 입안에 맴돌다 목으로 넘어간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그녀가 꽃처럼 웃으며 어떠하느냐고 물었다. 

 

그가 영창도 없이 빙벽을 선보이고 난 직후였다.

 

그녀의 이름이 서서라는 것은 며칠 뒤에 알게 되었다. 

 

*

 

“서서. 여기 있었어?”

“제갈량!”

 

‘밖’을 바라보는 서서의 얼굴은 어딘가 몽롱한 구석이 있다. 꿈을 꾸는 것도 같았다. 신선은 꿈꾸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갈량은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얼굴도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금방 꽃처럼 태양처럼 웃는 얼굴이 되었다. 

 

“연습은.”

“에에…….”

 

재미없는걸, 서서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또 활짝 웃었다. 처음에는 조금 있다 갈 거라고 거짓말이라도 하더니 이제는 아주 솔직하다. 제갈량은 그 솔직함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가르쳐줄게.”

“우와, 정말?”

 

서서가 또 눈을 접고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제갈량은 처음부터 하나 하나 일러주며 이따금 열중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신선마법이, 도술이 재미있고 즐거워서 하고 있는 신선은 아무도 없다. 그 신선들이 왜 모두 제갈량을 싫어하겠는가. 단지 그의 혀끝이 야멸차고 매서워서? 제갈량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가장 우수하다는 건 앞으로 있을 드림배틀에서 이길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뜻, 존재만으로 자신의 소멸을 예고하는 이에게 살갑게 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말 그대로 바보 천치일 것이다. 제갈량은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모든 신선들을 이해했다. 

 

그러면 그녀는?

 

“다스리기를, 대지와……같이! 신선마법! 연환! ……됐나?”

 

서서가 내뻗었던 손을 어설프게 거둬들였다. 허공에 시험해보기에는 의미가 없는 술법이었지만 제갈량은 풀잎과 바람이 잘 묶여있었다고 대답해주었다. 서서가 정말이냐며 활짝 웃었다. 

 

그녀가 신선 마법에 열중하는 건 그가 가르쳐줄 때뿐이다. 신선마법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의 시간에 열중해주는 것이었다. 그 외에 그녀가 몰두하는 것은 그녀의 뺨을 스치는 바람, 탐스럽게 영근 열매와 갖가지 향을 두른 꽃잎들이었다. 그 작은 것들은 그녀의 친구였다. 아마도 자신 역시, 그녀의…….

 

“다음에는……화공을.”

“응응!”

 

지금껏 그가 서서와 함께 연습한 신선마법은 여러 가지 였다. 풍변, 축성, 퇴각, 연환…….

 

풍변은 상대의 시야를 가려 회피할 시간을 벌 수 있는 것. 축성은 상대의 근접한 공격을 막을 수 있게. 빙벽은 상대의 원거리 공격을 막을 수 있도록. 퇴각은 원활하게 전장에서 도망칠 수 있게. 연환은 상대의 발을 묶는 것. 

 

“……그건 다음에 하자.”

“응? 그래!”

 

서서는 크게 의아해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배운 걸 다시 해보겠다며 장난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향해 연환을 쓴다. 제갈량은 자신의 손목을 묶는 실오라기 같은 그 힘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서, 졌다며 웃고 말았다.

 

“역시 제갈량이 최고야!”

“연환을 쓴 건 서서인데.”

“제갈량이 알려줬으니까~!”

 

다가와서는 배시시 웃는 소녀 같은 얼굴에는 경계심도 경쟁심도 향상심도 보이지 않았다. 제갈량은 그것이 깨진 진에 차오른 물을 보는 것처럼 위태로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신선마법에 실패하면 침울해하지만 남들보다 잘하고자 하는 마음인 것은 아니다. 다른 신선들보다 우수하지 않으면 남는 것은 소멸뿐인데도 애쓰려는 그 마음이 없다. 경쟁하지 않으면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데. 약점을 들켜서도 안 되는데, 그녀에게는 그 마음이 없다. 

 

오로지 죽기 위해 태어난 것과 무엇이 다른가. 왜 그녀에게만은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인가. 남을 이기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그다지도 어려운 일인가. 남보다 우월하겠다는 생각이 그다지도 힘든 일인가……. 

 

그렇기에, 그런 그녀이기에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일 텐데도 마음은 오갈 데를 모르고 헤매었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데도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고 혼자 꽃피어있는 것을 보는 게 가슴 아픈데도 그 손에 칼을 쥐어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 칼로 자신을 찌른다 해도 기꺼웁게 심장을 내놓을 텐데, 그 마음만은 진실한데 그런데도 칼을 쥐어줄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찌르고 나면 그녀는 울겠지. 자신을 찌르고서 눈물을 터뜨리면, 그녀 혼자 남으면, 그 땐 누가 그 눈물을 달래줄 수 있을까.

 

“조금 있으면 드림배틀 시작하게 된대!”

“아아.”

“제갈량은 관심 없어?”

“없어.”

 

드림배틀에서 마침내 이긴다 해도 남는 것은 홀로 된 300년의 시간뿐이다. 여지껏 제갈량은 홀로 300년을 지내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만은 몸서리가 처졌다. 

 

누구도 없는, 서서가 없는 300년. 

 

“좋아, 그럼 내가! 알! 려! 줄게!”

“……뭐?”

“인간계는 분명 아름다운 곳일 거야, 그치?”

 

왜 아름답다고 생각해? 

 

제갈량은 그렇게 묻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서가 활짝 웃으며 자신이 제갈량을 대신해 인간계를 보고 와서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제갈량은 서서의 말에 동감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건 그의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 말도 할 수가 없어서, 웃는 서서의 얼굴을 보다 그녀의 이마를 튕겨주고야 말았다. 드림배틀에 나가려면 신선마법을 더 열심히 해야지. 그의 말에 서서가 웃으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제갈량이 알려줄 거지? 

 

*

 

눈은 녹기 때문에 아름답고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자신이 서서를 아름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는 허물어져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녹은 눈은 수증기가 되어 사라지고 저문 꽃은 꽃잎의 흔적도 남기지 않아서, 제갈량은 이 세상이 하염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40화 스포일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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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내가 먼저 도와달라고 하기 전엔 안 돼, 알았지?》


*


“모르겠어?”

“히잉…….”

“알려줄까?”


슬쩍 몸을 기울이자 물기가 들어찬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간다. 마치 달콤한 사탕을 앞에 두고서 꾹 참는 어린애같은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재미있어 마냥 감상하던 제갈량은 그래서 설마 서서가 ‘아니!’라고 말할 줄은 몰랐던 탓에, 그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서서는 뺨까지 붉히고서 자신의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이건 숙제니까. 내 힘으로 할 거야!”


그러면서 다시 붓을 손에 쥐고는 두루마리를 내려보는 것이다. 제갈량은 눈만 깜박이며 그런 서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괜히 손이 어색해서 부채를 한번 말아쥐어 보지만 서서는 벌써 두루마리에 고개를 박고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제갈량은 슬쩍 고개를 기울여 서서가 두루마리에 쓰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건 바람의 움직임을 해석해서…….”

“내, 내가 할 거야! 제갈량은 천재라서 눈 깜박할 새에 다 풀어버리잖아!”


서서가 팔로 두루마리를 감싸 가리며 소리친다. 제갈량은 괜히 입술을 한 번 삐죽하곤 두 손을 들어보였다. 


“알았어. 안 할게.”

“가만히 있어야 돼. 알았지.”

“가만히 있을게.”

“약! 속! 하기야.”

“약속해.”


정말이지, 서서가 재차 물었고 제갈량은 그 말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량은 턱을 괴고서 서서가 열중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흠…….’


해준다고 하는데 저렇게 격렬하게 거절당한 건 처음이다, 제갈량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자신이 뭔가 선뜻 나서서 해준다는 얘기를 했던 것도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그다지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그나저나 서서가 신선 마법을 수련하는 데에는 그다지 열의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제갈량은 손에 쥔 부채를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며 생각했다. 


먼 곳에서부터 청명한 공기가 미풍에 실려 왔다. 제갈량은 부채 끝을 움직여 그 바람을 서서에게로 보냈다. 서서는 바람이 자신의 뺨을 간지럽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입술을 꽉 깨물고 숙제에 여념이 없었다. 잘 풀리지 않는 것이 답답할 법도 한데 그에겐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자신을 보지 않는 서서와 함께 있는 건 즐겁지 않았지만, 자신을 보지 않는 서서라고 해도 함께 있고 싶었다. 즐겁지 않아도 함께 있고 싶었다.


*


“흐아암……헉, 자버렸다!”


제갈량은 하품을 하다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서서를 보곤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가 미리 붓을 정리해 두지 않았으면 지금쯤 여기저기 먹이 튀어 엉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앗! 제갈량, 아직 있었어? 내가 자버렸지, 미안……앗! 어떡해, 숙제 다 못했……는데.”


제갈량은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부채를 움직이며 서서의 표정을 가만히 관찰했다.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이 어쩔 줄 모르던 얼굴이 금방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루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어……? 다 돼 있잖아.”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크게 뜨여서는 도록도록 굴러간다. 제갈량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서 서서를 바라보기만 했다. 두루마리를 앞뒤로 살펴보던 서서가 제갈량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거 다 돼있네……?”

“다 하고 잤잖아.”

“아닌데…….”

“숙제 다 했으니 혼나진 않겠네.”

“그건…….”


서서는 생각만큼 기쁜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때 서서가 두루마리를 집어 들고는 코를 박을 만치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살펴보던 서서가 번쩍 고개를 들고 제갈량에게 눈을 돌렸다.


“제갈량!”

“으응?”

“이거 제갈량이 해줬지!”

“아닌데.”


평범하게 생각해 보아도 잠든 사이에 올만한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고 곁에는 계속 제갈량이 있었으니 자신이 하지 않은 거라면 당연히 그의 소행일 것인데, 서서가 그를 추궁하는 건 달리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서가 제갈량에게 두루마리를 들이밀었다.


“이거! 제갈량 이 글자 쓸 때 꼭 이렇게 삐침 넣잖아!”

“……아.”

“제갈량~! 안 하기로 약속 했잖아!”


입술은 꽉 깨물고서, 볼은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외치는 모양새가 흡사 화가 나기라도 한 것 같아서 이번엔 제갈량이 더욱 놀랐다. 


“……서서, 화났어?”


저래서야 백치 아니느냐고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핀잔 던지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서서는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언제나와 똑같이 웃었지만 제갈량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들었다는 것을. “신선마법 꼴찌인 건 사실이잖아, 헤헤…….” 하지만 그네들이 그녀를 보고 그런 말까지 한 것은 단지 신선마법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저런 말을 들어도 화낼 줄을 모른다. 사실이니까, 하며 조금 부끄러운 듯이 웃음을 짓는 게 전부. 자길 향해 모욕을 해도 화를 낼 줄 모르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대신하여 화를 낸 건 제갈량이었다. 그녀를 향해 그런 말을 했던 신선은 며칠 내내 물벼락을 맞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연이어 걸려 넘어지고 쓰는 화선지는 먹이 닿자마자 번져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러길 아흐레쯤 했을 때야 서서가 눈치 채곤 그를 보고 웃었다. 난 정말 괜찮아, 제갈량. 괜찮지 않은 건 제갈량이었지만 서서가 그렇게 말했으므로 괴롭히던 것은 관두었다. 


“화 났어! 제갈량이 약속 어겼잖아!”

“……미안.”

“모처럼 열심히 해보려고 했는데…….”


서서는 뚱한 것처럼 뺨을 부풀리고서는 제갈량이 술식을 적어 넣은 두루마리를 쓸어보느라 제갈량을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제갈량은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향해 화를 낸 그녀를 보고서 기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들킬 수야 없는 노릇이다. 네가 화를 내는 건 내게만이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제갈량은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가린 채 말했다. 


“다음부턴 정말 안 그럴게.”

“약속이야, 알았지?”


약속할게. 그 말에 서서는 또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배시시 웃고는 제갈량의 옷깃을 붙들었다. 내가 먼저 도와달라고 하기 전에는 안 돼, 알았지. 제갈량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꼭 불러. 


서서가 활짝 웃었다. 당연하지, 제갈량!


*


그러니까 자신을 향해 도와달란 말을 하지 않는 저 서서는 그의 서서가 아니었다.


*


서서가 한 번도 즐거워하지 않았던 신선마법에 열중한 건 인간계로 내려가 군주를 찾기 위해서였다. 제갈량은 그녀가 왜 인간계로 그토록 내려가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다감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볼 때에도 꼭 그 자신처럼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인간계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아름답고 찬란하게.


그 인간계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제갈량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이루어주고 싶었다. 모든 것에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제갈량이었지만 이상하게 서서의 일에 있어서는 자꾸만 그 이성이 고장 나고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뇌리를 잠식했다. 


어쩌면 그녀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에게 다가와준 그녀라면 드림 배틀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선계에서 모두에게 등 돌리고 있던 자신을 찾아냈듯이 인간계에서도 좋은 군주를 찾아내어…….


이성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고 분명히 알려주는데도,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단지 그녀를 막아서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라고는 없는 천하의 그 제갈량이, 단지 그녀에게 조금의 미움이라도 살까 두려워 말리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얄팍하고 비겁한 판단도 숨어있었다. 영웅패를 여럿 부릴 수 있는 대단한 군주들이 나타나고 레인보우 이벤트가 열린다 해도 선계의 수많은 신선들 중 말석인 그녀를 선뜻 선택할 군주는 없을 것이라고. 그의 울타리는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 맞추어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침내 정말로 그녀를 선택한 군주가 나타났을 때엔 네가 위하는 그 군주를 생각해 양보하라고까지 말하고야 말았더랬다. 서서는 제갈량의 말에 화내지 않았다. 저래서야 백치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자신을 대신해 그의 신선이 되어주면 안되겠냐는 그녀의 말을 거절했다. 제갈량은 인간계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서서는 인간계가 아름답다고 말했지만 제갈량의 생각은 달랐다. 아름다운 건 이미 그의 앞에 있었고 그 아름다운 것만 혼자 선계에 두고 자신이 내려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끝에 서서가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녀가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기꺼이 도와주었다. 흰 신선의 옷을 벗고 검은 양장을 걸친 채 그녀의 주군이 된 척 연극했다. 자신이 바라는 바였기에 그건 더욱 기꺼웠다. 


결국 그 모든 울타리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그녀가 인간계로 내려가게 되었을 때 제갈량은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도 영문도 모를 낙관주의가 또다시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강력한 다른 신선들을 모두 놔두고서 굳이 그녀를 선택한 남자였다. 보는 눈이 있는 남자니, 잘 해낼 수 있을지 않을까. 그녀도 좋은 군주를 고른 것일 테다. 선계에서 자신을 찾아냈듯이.


하지만 마침내 그녀의 군주 앞에 그가 무릎 꿇게 되었던 날 제갈량은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이 그녀를 대신해 그의 신선이 되었다면 다른 결과가 있었을까. 아직 그녀는 선계에 남아 있었을까. 살아 있었을까.


그 어처구니없고 얄팍한 낙관주의는 그녀의 설탕과자처럼 산산히 부서졌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녀는 왜 자신이 소멸할 위기에서도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불렀다면 분명 그 목소리는 선계에서도 그의 귀에 들렸을 텐데. 인간계에 몰래 내려갔을 때에도 혼자서 어찌할 바 모르게 되면 언제나 그를 불렀던 서서였다. 그 목소리가 들렸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상으로 내려갔을 텐데.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에도 그를 불렀으면서 왜 그 때는.


그녀가 왜 부르지 않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배틀의 규칙을 어긴 신선은 다른 군주의 신선이 될 수 없다. 그렇게 서서는 다른 식으로 제갈량에게 부탁을 남겨놓았고 결국 그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소멸했다 해도, 죽었다고 해도. 그녀가 부탁한다면, 와달라고 한다면 제갈량은 정말……. 


*


그러니까 제갈량은 저 서서가 서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서서에게만 향했던 어린애같은 낙관주의는 산산조각 났다. 소멸한 신선을 되살릴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만일의 가능성도 하찮기 그지없다는 것도, 때문에 저것은 진짜 되살아난 서서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저 서서가 그의 서서가 아니라고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와달라는 말도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부탁하지 않는다. 적에게 붙들린 상황에서 그를 보고도 도와 달라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저 서서는 그의 서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미 소멸한 신선을 되살릴 방법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 서서가 서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데도 군주를 구하기 위한 공격이 그녀가 아니라 군주와 그녀 사이에 떨어지고 만 건 그녀가 정말 서서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서서와 같은 얼굴, 같은 눈매, 같은 입술을 하고 같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달라진 건 검게 물든 옷뿐이었다. 그 모든 게 껍데기일 뿐이라는 건 잘 알고 있는데도 그리운 마음이 먼저 일었다. 왜 그림 한 장 남겨두지 않았는지 후회했었다. 그녀는 언제나 스스로의 소멸도 각오하고 있었는데 마음가짐이 얕았던 건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렇게 볼 수 없었던 얼굴이, 그녀가 인간계로 내려가고 난 뒤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그 서서가, 그녀의 모습이 저기에 있었다. 


그래도 나는 너를 벨 것이다, 제갈량은 생각했다. 그것이 단지 서서의 껍데기를 빌어 썼을 뿐인 가짜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네가 도와달라고 하지 않으니까. 네가 도와달라고 말하기 전엔 해주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네가 와달라고 내게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도와 달라 부탁하지 않잖아. 나는 네가 부탁했던 것만 들어줄 거야. 넌 네 군주가 이길 수 있게 해 달라 했고 너는 지금 적이니 너를 이기겠다. 그러기 위해 너를 베어야 하니 너를 베겠다. 


그렇지만 그런 약속 따위, 하지 말걸 그랬구나…….


제갈량은 군주의 검에 스러지는 그녀의 허상을 보며 생각했다.


*


아아, 오랜만에 보는 너는 여전히 어찌나 아름다운지.


너를 마지막으로 다시 보여준 이 인간계는 어찌나 아름다운 곳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