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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즈마, 저기 봐. 기린이야.”


아카아시가 손끝으로 높은 곳에 매달린 풀을 뜯어먹고 있는 기린을 가리켰다. 너른 울타리 너머에서 노란색과 갈색으로 무늬를 만든 기린은 아무 관심 없는 얼굴로 무심히 풀만 뜯어 먹을 뿐이었다. 기린을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아카아시는 작게 웃고는 아이를 가뿐하게 안아들었다. 카즈마의 입에서 즐거운 경악성이 낮게 터져 나왔다. 


평일 오후였기에 동물원은 한산했다. 아카아시는 아이의 손을 잡고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햇살은 따사롭고 공기는 쾌청했다. 아주 오랜만의 여유인 것 같았다. 물리적으로도 그러했지만 마음이 더욱 그랬다. 


“카즈마, 아이스크림 먹을래?”


아카아시는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가게를 가리켰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는 가게였다. 아이는 괜찮다고 어물거렸지만 아카아시가 거침없이 아이를 끌고 갔다. 몸을 숙여 눈을 마주한다. 무슨 맛 먹고 싶으냐는 질문에 아이는 작게 입을 오물오물하다가 초코 맛이요, 하고 대답했다. 


“소프트콘 초콜릿으로 두 개요.”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씩 손에 쥐고 걸음을 옮긴다. 눈앞으로 비눗방울이 사르르 흩어졌다. 


저녁 무렵에는 외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연신 들뜬 표정이었다. 유원지나 동물원을 다녀왔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아카아시와 시간을 보낸다는 것으로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 바쁘긴 했지.’


아카아시는 아이를 앞에 앉혀두고 머리를 말려주며 생각했다. 쉼 없이 달려온 시간이었다. 아이를 두고 그러면 안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직장을 옮긴다는 건 생각만큼 선뜻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고, 그건 아이가 있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게 그런 것들이 아카아시의 현실이 되었다. 그 속에서 아카아시는 그 나름대로 그것 모두를 소화시키고 있었다. 


보쿠토의 현실도 이렇게 바빴을 것이라고. 그는 닿지 못했던 보쿠토의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이번 한 해 바쁘던 것에 겨우 익숙해지면 다음 해는 더 바빠지는 것이 아카아시의 현실이었듯이, 그래서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을 내는 것이 매번 어려운 게 아카아시의 현실이었듯이, 보쿠토도 그랬을 것이라고. 졸업하고 곧장 바빠졌고 그 다음해엔 더 바빠져서 연락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게 아니라면, 약속도 맹세도 남은 것 없는 사이에 흐릿해져가는 인연에 집착하는 것은 그만 두는 게 옳다고. 


그렇게 차근히 하나하나 천천히 느리게나마 찢어 삼키고 있었다.


‘거의 다 됐다 했더니 불쑥 본인이 나타났지만.’


이제 정말로 마주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그런 그의 마음을 시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떡하니 본인이 나타났다. 폭풍처럼 몰아붙여서는 10년 전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되감기는 시간 축에 적응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건 아카아시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 났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아이의 머리를 마저 말려주었다. 다 되었다고 드라이어의 전원을 내리자 아이가 목욕의 기미가 남아 상기된 얼굴로 그를 돌아본다. 근래에 본 얼굴 중에 눈에 띄게 밝은 모습이었다.


“카즈마.”

“네?”

“이제 계속 일찍 올 거야. 이번 주처럼 일찍은 아니겠지만. 앞으론 매일 매일 같이 저녁 먹자.”

“아……?”


아이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본다. 그 눈동자가 누군가와 쏙 닮아 있어서 아카아시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그 때 아이가 실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뱉어냈다.


“그……그럼 이제 같이 살아요?”

“응? 같이 살다니?”

“그……사람이랑…….”


아이가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아이의 얼굴은 언제 상기되어 있었냐는 듯이 희게 질린 채였다. 눈동자가 흔들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 사람이라니 누구……설마 보쿠토 선배 말하는 거야?”


아이는 말도 잇지 못하고 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카아시는 도대체 어쩌다가 아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유추해보려다가 그만두고는 서둘러 고개를 저어주었다.


“아냐, 그런 거.”

“……아니……에요?”

“응, 아니야. 그 사람은 잠깐……. 잠깐 일이 있어서, 아는 사이라 며칠 있다 가라고 했던 거지. 우리가 왜 그 사람이랑 같이 살아.”

“……정말요?”

“그럼.”


아이는 겨우 안도한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아이를 번쩍 끌어안고는 그 머리를 쓰다듬고 조금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카즈마, 손님 있어서 사실 싫었구나.”

“아, 아니에요. 그냥……그냥 여쭤봤어요!”


아이가 당황해서는 귀까지 빨개져 어쩔 줄을 모른다. 아이는 정말 그런 게 아니었다고 연거푸 말하다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정말 같이 사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아카아시는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이의 눈매가 풀리는가 싶더니 나오는 작은 한숨은 분명 안도의 한숨이다. 그게 그렇게 걱정이 됐을까, 아카아시는 언뜻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더는 내색하지 않고 아이를 놓아주었다. 


방으로 들어가던 아이가 다시 아카아시가 있는 거실로 조르르 돌아와, 아카아시를 한 번 꼭 끌어안고 돌아갔다. 아카아시는 놀란 듯이 눈을 깜박이다가 그만 미소 짓고 말았다. 




*




“아, 하나는 코코아로. 마시멜로는 띄워서. 하나는 드라이마티니에 레몬 올린 걸로.”

“전 드라이 마티니 안 마시는데요.”

“내 거야.”

“그럼 코코아는요?”

“네 거지.”


쿠로오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아카아시를 바라본다. 아카아시는 기가 막혀서 다시 바텐더를 부르려고 했지만 쿠로오가 그 손을 잡아 내렸다.


“며칠 전에야 병석에서 일어난 사람이 어딜 감히 술을 마셔.”

“술집으로 불러낸 사람이 누군데요.”

“네가 이 시간이 아니면 카즈마랑 있어야 한다고 안 된다고 하니까 그렇지!”


쿠로오는 되레 자신이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아카아시는 방금 전 그가 바텐더에게 읊었던 주문을 떠올리곤 탄식을 삼켰다. 핫초콜렛도 아니고 코코아, 그 단어가 주는 어감에서 쿠로오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눈에 훤했다. 심지어 마시멜로까지.


‘정말 완벽하군.’

“보쿠토, 돌아갔다며.”


바텐더가 작고 하얀 도기그릇에 작은 프렛첼을 담아 내주었다. 쿠로오는 그것을 아카아시 쪽에 가깝게 조금 더 밀어주며 입을 열었다. 아카아시는 과자를 손에 쥔 채, 다만 입에는 넣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미디어도 조용해 졌잖아요. 가실 때 됐죠.” 

“무슨 저승길 보내듯 말하냐.”


애먼 누명에 아카아시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쿠로오는 말을 바꿔주지 않았다. 


“허전하겠네~!”

“허전은 무슨……. 손님과 생선은 3일도 길다고 했습니다.”

“냉정하긴. 든 사람 자리는 몰라도 난 사람 자리는 안다던데.”

“그런가요.”


아카아시가 무덤덤하게 대꾸하는 사이에 음료가 나왔다. 아카아시는 자신 앞에 놓인 고양이 모양 마시멜로우가 둥둥 떠 있는 코코아를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지만 쿠로오는 킬킬거리기만 할 뿐, 음료를 바꿔주지는 않았다. 


“그거 맛있다. 여기 인기 메뉴야.”


아카아시는 쿠로오를 흘겨보았다. 바텐더는 묵묵히 잔을 닦고 있었다. 골목 깊은 곳에 있어서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쳤던 고즈넉한 바였다. 손님도 많지 않았다. 조명은 깊은 오렌지 빛이어서 어둠과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아카아시는 바의 테이블에 팔을 괴고서 머들러 끝으로 고양이 모양 마시멜로우의 귀 부분을 쿡쿡 찔렀다.


“이직하기로 했어요. 들으셨는지도 모르겠지만.”

“못 들었어. 내가 누구한테 듣냐. 어쨌든 잘 됐네. 좀 더 시간여유 있는 데로 가는 거지?”

“네. 카즈마하고 더 함께 있을 수 있겠죠.”

“애 키우는 게 혼자서는 아무래도, 쉬운 일은 아니지…….”

“…….”


아카아시는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와 함께 살겠다고 처음으로 말했던 날도 쿠로오는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혼자서 키우게?


“뭐, 결혼이라도 할까요?”

“컥, 크헙, 쿨럭, 쿨럭쿨럭……!”


처음엔 눈만 둥그렇게 떴던 쿠로오가 히끅하고 술을 넘기다 격렬한 기침을 시작한다. 펍의 모두가 한 번씩 뒤를 돌아본다. 바텐더가 지나가며 티슈를 내놓을 뿐이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며 쿠로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겨우 진정한 쿠로오가 황천 갔다 왔다며 크게 숨을 몰아쉬고 나서 눈물을 닦아내며 아카아시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결혼을 해? 누구랑?”

“뭘 누구랑입니까……. 당연히 농담이지.”


이 사람도 어딘가 이상해졌다, 아카아시는 그런 생각을 숨김없이 눈동자에 담아 쿠로오를 바라보았고 쿠로오는 또 머쓱하고 당황한 얼굴이 되어 헛기침을 하다가 격하게 기침한 기관지가 아프다며 목을 움켜쥐었다. 


“아, 아니. 나는 네가 그러니까……놀라서 그러지. 생전 그런 말 안 하던 애가 갑자기 결혼 얘기를 하니까. 혹시 뭐 진짜 누구 할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해서…….”

“제가 사람 만날 시간이나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더 놀랐다고…….”


정말 크게 놀라기는 했는지 쿠로오의 안색이 살짝 희게 떠 있다. 아카아시는 기꺼운 마음으로 코코아를 입에 댔다.


“진짜 아니지?”

“아니라니까요.”

“나랑 대화하고 결혼할 마음먹은 것도 아니지?”

“아니에요. 사람도 없다니까…….”

“사람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결혼해야겠다고 그런 각오한 것도 아니지?”

“아니래도, 진짜……. 그리고 사람이 생겨도 한 동안은 아니에요.”

“에?”


쿠로오가 눈을 깜박거리며 아카아시를 쳐다보았다. 아카아시는 이 고양이 모양 마시멜로우를 어디서 구입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카즈마가 생각보다……. 좀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요. 집에 누구 들어오고 이러는 거. 아빠 뺏겼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고.”

“아……아.”

“이제 회사도 옮겨서 좀 일찍 퇴근하고 그럴 것 같다고 하니까 아이가 표정이 변해서는 혹시 보쿠토 선배랑 같이 사는 거냐고 하더라고요. 아직 애는 애인가 봐요.”

“에…….”


아카아시는 오늘 밤에 보았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곤 미소 지었다. 괜히 놀라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런 면을 보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먼저였다. 일찍부터 철이 들어 조르는 게 없기만 하다 보니 더욱 그랬다. 


쿠로오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마티니 잔을 기울였다 바로 했다 하기를 반복했다. “쿠로오 선배?” 아카아시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불렀을 때였다. 


그들의 등 뒤, 펍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문에 달려있는 종에서 낮고 은은한 소리가 한 번 울린다. 낯선 손님이 들어올 때 조건반사적으로 돌아보는 이들 몇몇이 전부, 종소리가 가라앉고 가게는 다시 평상시의 상태로 돌아간다. 


낯선 손님은 아카아시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드카 마티니 한 잔.”


헐겁고 기장이 긴 니트 카디건으로 몸을 휘감은 여자였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마티니를 주문하는 목소리는 또렷하고 선명하게 들렸다. 선글라스로 눈매를 가렸지만 턱선만으로도 미모를 짐작케 할 만한 여자였다. 바텐더가 마티니를 만들러 들어갔을 때 여자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는 아카아시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진짜 살아있는 인간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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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막의 웹공개분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동안 봐주신 분들, 예쁜 말씀 남겨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이후로 완결까지는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앞으로 있을 5월의 서울코믹월드와 보쿠아카온리전에서 찾아뵙겠습니다. 


자세한 인포는 이번주 중으로 업데이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