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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석의 문을 열고 안에 털썩 앉는다. 코노하는 홀더에 놓여있던 병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한 모금 넘긴 다음 입을 열었다.


“이젠 다 나았고, 저녁도 배달 될 거라고 말 해줬고, 애는 자고 있고, 죽도 먹였고, 이직도 곧 한다고 하고.”

“…….”

“이직은 두 달 뒤라더라. 출근은 이번 달까지만 한다고 하고.”

“…….”

“이게 뭐 별거라고, 직접 물어보면 되지.”


코노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핸들에 몸을 기대고 있는 장신의 남자가 있다. 보쿠토였다. 보쿠토가 어색한 표정으로 입술을 꽉 말았다. 


“그……. 너무 참견하는 것 같을까봐.”

“참견……. 그걸 전부 다 사다놓고 이제 와서 참견이라는 건 좀.”

“아 코노하!”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베개까지 사놔? 남들이 들으면 유난이라고 욕한다고, 인마.”

“좋은 베개라라니까 샀지…….”

“어디서 얼마주고 샀는데?”

“요기 앞에 백화점에서……. 6만 엔인가?”


보쿠토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웅얼거렸고 코노하는 심한 욕을 입 안으로 중얼거리곤 짜증과 건성이 섞인 목소리로 회사 건물이 있는 길목을 읊조렸다. 


“거기 뭐 어쩌라고?”

“아 빨리 출발하라고! 너 대신해서 내가 다 둘러대 줬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할 거 아냐!”

“아, 알았다! 간다, 가!”


보쿠토가 빽 소리치고는 안전벨트를 매고서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린다. 코노하는 차창에 기대어 끊임없이 험한 말을 중얼거렸다. 한참이나 그러다가 목이 타는지 홀더에 내려놓았던 음료를 다시 들이킨 코노하가 불쑥 보쿠토에게 물었다.


“의사가 욕은 안 하디?”

“몰라.”

“그래, 들리기나 했겠냐. ……그래서 이젠 뭐 어떡할 건데?”

“뭘 어떡해.”

“아카아시랑 말야. 갑자기 연락할 마음먹었던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코노하는 보쿠토의 옆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명한 선을 그리는 얼굴, 또렷한 눈매, 이제는 세월이 흘러 굳어진 턱선. 학창시절에는 지금보단 앳되었겠지, 코노하는 이젠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었다. 


“일단 나도 짐 정리 집 정리 다 하고.”

“너 이사하게?”

“응, 다른 데로.”

“……다른 데 어디?”

“크흠, 일단 다른 데로 이사할거야. 아파, 아파트 같은 데로.” 

“아파트…….” 


코노하는 흰 눈을 뜨고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의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했다. 결단력도 행동력도 재력도 체력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지금까지 참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기는 하였다. 


“진작 좀 하지. 10년이나 걸려서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내, 내가 안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 아니야!”


보쿠토가 빽 소리친다. 코노하는 창틀에 팔을 괴고서 아주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모습을 관람했다. 어느 순간부터 놀려도 당황하지 않고 당황해도 꺾이지 않게 되었던 친구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은 고등학교 시절로 끝이라는 듯이 더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며 사람이 변하고 성장하듯이 보쿠토 그도 그런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주인을 만날 날까지 봉인해 두었던 것뿐이었다. 그것들이 이제 다시 풀리고 있었다.


“안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면 하고 싶은 걸 참았냐?”

“못 했어.”

“…….”

“하고 싶었는데 못 했어. 하면 큰일 날까봐…….”


보쿠토는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쥐고 있는 핸들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주보면 가슴이 떨리고 멀어지면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아픈 감각, 그게 무엇일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심장에서부터 허튼 소리가 튀어나갈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 떨림이 가라앉으면 만나자. 실수하지 않게, 멀어지지 않게. 이 떨림이 가라앉고 나면, 가라앉고 나면……. 


그 떨림이 가라앉을 날은 영원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10년이 걸렸다.

 

코노하는 보쿠토를 바라보던 시선을 바깥쪽으로 돌렸다. 보쿠토가 운전하는 차는 부드럽게 미끄러져 코노하의 회사 앞에 도달했다. 마침내 코노하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서 차에서 내리려 안전벨트의 걸쇠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카즈마가 나를 너무 싫어해! 어떡해?”

“카즈마……? 아카아시 애가?”

“완전 무지하게 싫어해! 뭐가 어디부터 잘못됐지?”

“뭐, 뭐가 어디부터라니, 야! 상식적으로 생각을 좀 해! 좋아할 리가 있겠냐!?”

“왜!?”

“아카아시는 집에 친구고 직장 동료고 들인 적이 없어! 애 때문에! 그런데 네놈이 대뜸 쳐들어갔는데 그럼 그걸 보고 카즈마가 처음 보는 삼촌이라고 배시시 좋아하겠어!?”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어떡해야 좋아해주지?”

“……카즈마하고 친해져서 뭐 어쩌게?”


차 안의 공기가 달아오르다 도로 식어간다. 코노하는 한 손으로는 보쿠토가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안전벨트를 꽉 쥐고서 보쿠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카아시하고 사이좋게 지낼 거면 그냥 아카아시랑 사이좋게 지내면 되잖아. 카즈마하고까지 사이좋아질 필요가 있냐?”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긴장이 내려앉았다. 코노하는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의 금빛 눈동자가 서리처럼 흔들린다. 마침내 코노하가 다시 쏘아붙이려던 순간이었다. 


“이, 있어!”

“!”


코노하는 목소리를 다시 죽였다. 보쿠토의 금빛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있어!”

“뭔데.”


코노하는 보쿠토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면 그걸 기회삼아 그대로 몰아세울 참이었다. 


아카아시와 보쿠토, 두 사람은 함께 한 시간보다 서로 떨어져있었던 시간이 더 길었고 그 떨어져있었던 시간동안 제각기 이룬 것이 있었다. 이제 와서 함께 한다는 건 그간에 이룬 모든 것들을 담보로 한다. 어중간한 마음이라면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나을 거였다. 10년을 서로 없이 지낸 사이 아니던가. 앞으로도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계속 만나야 해.”

“그러니까 아카아시만 만나면 되는…….”

“카즈마는 아카아시 아이잖아.”


보쿠토의 금빛 눈이 마음을 되새김질 하듯이 단단해지며 그를 바라본다. 코노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보쿠토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나 이제 아카아시랑 계속 같이 있을 거란 말이야!”

“…….”

“그러니까 카즈마랑 나, 사이 좋아져야해. 카즈마가 싫어하면 아카아시도 싫어할 거니까.”

“이…….”

“이?”


코노하가 무언가 묘수를 알려줄 것이라 생각했는지 보쿠토의 얼굴에 반짝 화색이 돈다. 코노하의 얼굴이 점점 비틀어진다. 그러다 코노하가 보쿠토의 어깨를 퍽 소리 나게 후려쳤다. 


“이 개자식아!”

“아, 아파! 코노하!”

“애를 다른 사람 환심 사는 데에 쓰려고 드는데 그걸 애가 잘도 좋아라 하겠다! 카즈마가 어리다고 그걸 모를 거 같아?”


코노하는 열불이 치솟아 넥타이를 죽 잡아 당겼다. 


“시설에서도 눈칫밥만 먹다가 겨우 아카아시 만나서 지금도 아카아시 눈 밖에 날까봐 전전긍긍하는 애한테 무…….”

“흥, 그렇단 말이지?”

“보쿠토 코타로! 너 진짜!”

“그럼 나랑 똑같잖아!”

“……뭐?”


보쿠토가 핸들을 세게 쥔 채 정면을 노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코노하는 넥타이를 잡아끌던 손을 내렸다. 눈만 깜박이며 보쿠토를 바라본다. 보쿠토가 겨우 코노하를 돌아보는데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보쿠토는 눈을 꾹 감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카아시 눈 밖에 날까봐 전전긍긍 하는 거……. 나랑 똑같잖아.”

“…….”

“그러니까 괜찮아. 카즈마하고 친해질 수 있어!”

“보쿠토, 너…….”

“요즘 유행하는 장난감 뭐야?”

“……제기랄, 이따 조카한테 물어보고 알려줄게.”


그렇게 겨우 대답한 코노하는 몸에서 힘을 쭉 배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탈력한 느낌에 눈앞이 아찔했다. 코노하는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털어내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넌 그런 것보단 공놀이라도 같이 해 주는 게 낫지 않겠냐.”

“그럴까?” 


보쿠토가 또 금방 웃는다. 코노하는 알아서 하라는 말만 남겨두고 차에서 내려섰다. 보쿠토의 차는 코노하가 내리자마자 다시 출발해 곧 코노하의 눈에서 사라졌다.


코노하는 구겨진 넥타이를 천천히 다시 정돈했다. 곧 탁 터지듯 한숨이 쏟아진다. 코노하는 허리에 손을 얹고서 자신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와서 함께 한다는 건 그간에 이룬 것들을 담보로 한다. 보쿠토는 그럴 마음인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의 하나가 보쿠토의 이혼이라는 것을 코노하는 이제야 인식했다. 이혼을 했기 때문에 아카아시에게 찾아간 것이 아니라 아카아시에게 찾아가기 위해서 이혼을 한 것이다. 


‘왜 이제야…….’


학창시절, 보쿠토와 아카아시는 서로의 소유였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었다. 코노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이따금 후배들을 돌보아주었는데, 그럴 때면 보쿠토는 그 모습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보쿠토 코타로가 고요 속에 머물러 있는 몇 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서서, 아카아시가 웃으며 때로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후배와 함께 있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 때의 보쿠토는 또렷하다 못해 매서운 인상을 주는 눈매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고 그 끝에서 달콤한 어떤 것이 묻어났다. 다른 무엇을 볼 때에도 그런 표정은 한 일이 없었다. 코노하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별이 쏟아지던 여름밤 보쿠토가 그렇게 아카아시를 바라보던 날이 있었다. 왠지 곁에 선 코노하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어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렸고 문득 보쿠토가 코노하를 돌아보며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코노하, 코노하.

—왜.


이쪽이 되레 어쩔 줄 모를 만큼 달콤하게 흐트러진 얼굴로 그를 부른다. 코노하는 괜히 자신이 부끄러워서 퉁명스레 대꾸했다. 보쿠토가 자신의 심장을 꾹 눌렀다.


—가슴이 너무 떨려, 어떡해……?


아, 그건 사랑이었다. 무슨 말도 해줄 필요가 없었다. 동백은 빨간 색이고 하늘은 파란 색인 것처럼 그건 사랑이었다. 그 무엇도 증명할 필요 없이 분명한. 그건 사랑이었다. 


그랬는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