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Logout Link+ Admin Write







“다녀오셨습니까.”

“다녀오셨습니까~!”


아카아시는 살짝 헛웃음을 삼키고서 아이의 뒤에 선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보쿠토가 팔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앞에 선 아이는 조금 어색한 눈치이기는 했으나 이젠 익숙해진 듯하다. 나흘이나 함께 있었으니 익숙해질 때도 되기는 했다. 


저녁을 먹고 나자 보쿠토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달려든다. 요령이 부족해서 항상 곁에서 아이가 거들어야 했지만 그게 미울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가 숙제까지 하고 나자 졸음이 몰려오는지 거실의 소파 앞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아이를 안아 들어 침실에 눕혀 재우고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그렇게 방문에서 등을 돌리고 나서야,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단 둘이 남은 시간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많이 졸립대?”

“오늘 체육수업 있는 날이라 피곤했나 봐요.”


보쿠토는 아이가 갑자기 이른 시간에 잠든 것이 조금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아카아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안쪽 깊은 곳에 상비해둔 맥주가 있다. 아이가 잠든 틈을 타 간만에 맥주 캔을 따는데 그 소리를 듣고 보쿠토가 기웃거린다. 아카아시는 말 없이 캔 하나를 더 꺼내 보쿠토에게 건넸다. 


“수, 술이야?”

“네? 그럼 술이죠.”

“아……. 아, 그렇네. 그렇지.”


치즈 몇 조각도 함께 꺼내 접시에 덜던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유난한 반응에 미간을 모았다. 보쿠토는 한 손에는 캔을 쥔 채 그것을 바라보며 뺨을 긁적였다. 재밌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처럼 웃음기 어린 얼굴이었다. 


“아카아시가 술 마시는 거 처음봐서.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술 마실 수 있지…….”

“술 마실 수 있게 된지는 10년이나 됐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어?”

“……뭐 영원히 10대로 살고 싶으신가보네요.”


아카아시는 가볍게 쏘아붙이고는 안주 접시를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소파에 기대어 앉는다. 보쿠토도 소파 앞에 자리잡고 앉았다. 같이 반주라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보쿠토가 의욕적으로 치즈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맞아 맞아!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치!”

“저는 아니에요.”

“어?”


보쿠토가 맥주를 넘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카아시는 아무것도 없어 새카만 화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화면 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보쿠토의 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도.


“저는 죽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 그, 그래?”

“저한텐 지옥같았어요.”

“……아…….”


마음이 불타는데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신중하자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서, 단어를 고르고 말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어 그에게 다가가자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연은 흐릿해졌고 보쿠토는 다른 반려와 인생을 함께하겠다는 서약을 하고야 말았다. 둘 사이에 유형화된 약속은 그 무엇도 없었으니 그게 누구의 탓도 아니다. 하지만 그 기다리고 참고 또 기다리고 되새겨온 시간이, 그리하여 아무것도 맺지 못한 않은 그 시간이 그에게 기쁨을 남겨놓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화면에서 천천히 눈을 떼고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고개를 숙이고서 자신의 맥주캔만 바라보고 있었다. 침울해진 것을 알 것 같았다. 여전히 숨기는 것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까지 떠올렸던 아카아시는 그만 손에 힘이 들어가 캔을 찌그러뜨리고 말았다. 다행이 맥주는 반 이상이 비어 흘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아카아시는 말 없이 남은 맥주를 모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한 보쿠토가 뒤늦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 아카아시는 모르는 척하고선 짧게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유달리 이른 시간이지만 잠들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그러기 위한 술이었을 뿐이었다.  



*



함께해온 시간이, 자신이 기쁘거나 즐거워했던 시간이 다른 한 사람에겐 전부 지옥이었다고 한다면.


보쿠토는 욕실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 속에는 왠지 모르게 퀭한 얼굴의 남자가 이죽이는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동안 이 작은 아파트는 온통 보쿠토의 차지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보쿠토가 별다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닷새 가까이 지내는 동안 휴대전화는 켜 본 적도 없고 그건 TV도 마찬가지다. 보쿠토는 소파에 푹 늘어져 아카아시가 읽던 책을 보거나, 아니면 아이가 하교하기 전에 아침 식사 설거지를 해놓거나 했다. 


‘오늘은 바닥 청소도 해놓자~! ……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기력이 없다. 보쿠토는 억지로 세수를 하고 욕실을 나섰다. 세 사람이 있을 때엔 북적거리는 것 같은 아파트가 혼자에겐 지나치게 넓었다. 보쿠토는 거실의 발코니 창 앞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아파트단지 바깥쪽 인도로 오가는 사람과 차들이 작게 보인다. 보쿠토는 유리창에 쿵하고 이마를 박았다. 


‘힘들었……나?’


즐거웠던 고교시절, 이라고는 해도 10년도 전의 일이다. 사실 모든 일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흐릿하다 못해 백지 상태였고 기억나는 것들은 즐거웠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한 추억들이었다. 그 추억의 대부분을,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모든 것에 아카아시가 있다. 보쿠토가 고교 시절을 즐거웠다고 단언하는 건 그래서였다. 


그 시간들이 아카아시에겐 힘들었던 걸까. 지옥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그럴지도…….’


보쿠토는 다시 한 번 유리창에 이마를 쿵, 박았다. 자신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행동으로 보이는 것도 스스로가 제멋대로라는 자각은 있었다. 고교 시절의 친구들은 곁에 있는 아카아시를 보며 저런 것까지 다 받아주느냐고 놀리곤 했다. 그 때 아카아시도 그 얘기를 같이 들었었는데. 뭐라고 했더라. 그러게요, 그랬었나.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단 한 번도, 연락을.


보쿠토는 다시 쾅 하고 유리창에 이마를 박았다가 소리가 크게 울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유리창 다 깨지는 줄 알았네, 그렇게 말하며 일부러 수선을 떨어본다. 하지만 가라앉은 기분은 나아질 줄을 모른다. 보쿠토는 찬장을 요란하게 열어보다가 간식이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간식이라도 사다 놓으면 되겠다! 신세지고 있으니까!” 


보쿠토는 혼잣말을 큰 소리로 하고는 지갑만 챙겨 집 밖으로 나섰다. 열쇠 생각이 언뜻 났지만 자동으로 잠긴다고 했던 아카아시의 목소리도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양손 가득 간식거리를 한아름이나 사들고 돌아왔을 때, 보쿠토는 깨달았다. 자동으로 잠긴다고 하는 말이 자동으로 열린다는 말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카아시가 열쇠 문제로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었는지도. 


보쿠토는 아연한 얼굴로 현관문을 바라보았지만 방법은 없었다. 휴대전화는 집 안에, 자신은 집 밖에. 열쇠는 아카아시와 그의 아이에게, 그리고 자신에겐 산더미같은 간식 뿐. 


“아! 아이스크림!”


보쿠토는 그 와중에 사온 것들 중에서 아이스크림을 떠올리곤 황급히 비닐 봉투를 뒤져 아이스크림을 찾아냈다. 종류별로 다 사왔던지라 아이스바가 세 개, 종이통에 담긴 게 두 개나 있다. 보쿠토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우선 아이스바 하나를 먼저 뜯어 입에 물었다. 하지만 다른 봉투까지 아무리 뒤져도 스푼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보쿠토는 세 입만에 아이스바 하나를 끝장내고 다음 아이스바를 손에 들며 쿵, 이번에는 현관 문에 이마를 박았다. 하지만 기적처럼 문이 열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카즈마 몇 시에 오더라…….”


하지만 몇 시에 온다고 해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보쿠토는 울적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만 내려다보다가 주르르 주저앉아 문을 등에 대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스크림을 급히 두개나 먹어치웠더니 머리가 욱씬거렸다. 하나가 더 남아있지만 차마 먹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몸이 추운 것도 같았다. 


무턱대고 아카아시의 집까지 쳐들어왔지만 그 뒤로 무언가가 제대로 잘 풀렸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자신을 보던 아카아시의 얼굴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새하얗게 핏기가 가시던 표정, 커다랗게 뜬 눈. 10년만에 보는 얼굴인데 거기에 반가움은 없었다. 


그 뒤로 함께 지낸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아카아시에게선 그리움 조각조차 찾을 수가 없다. 함께 지내는 아이는 자신에게 도통 관심이 없는 눈치였고 아카아시는, 아카아시에겐…….


보쿠토는 무릎을 세워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지만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보다 다른 곳이 더 추웠다. 마음같은 것이. 


그러면 이제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민폐 끼치는 것따위 그만두고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걸.’


보쿠토는 속으로 1초, 2초, 3초, 카즈마가 하교하고 돌아올 시간을 재며 웅얼거렸다. 그에게도 이건 마지막 기회이고 또, 마지막 빛이었다. 돌아오는데에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더는 둘러갈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아카아시에게서 완전히 아니라는 거절을 듣기 전까지는. 


‘열쇠 깜빡하고 나왔다고 하면 카즈마가 어떻게 볼까.’


그 아이에겐 도통 어떻게 해도 호감을 사지 못하고 있다. 친척 어린아이들과는 금방 친해지곤 했던 보쿠토에게 아카아시의 아이는 처음 겪는 크나큰 벽이었다. 


보쿠토는 아이스크림이 녹아가는 것을 흘끗 바라보았다. 바스락, 비닐 봉투 속의 과자 하나가 굴러 떨어졌지만 보쿠토는 내버려두었다. 아이가 돌아오기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