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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보쿠토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약속했던 월수금에 맞추어 학교의 정문 앞으로 나가보았지만 달이 뜰 때까지도 보쿠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몇 번이나 휴대전화의 액정에 빛을 밝혔지만 보쿠토의 연락처를 눌러볼 수는 없었다. 


그 일주일간의 침묵, 아카아시의 즐겁지 않은 휴가가 끝나고 다시 연구실로 복귀한 아카아시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그 계약서를 훔쳐간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여어, 아카아시~! 시험은 어땠어? 잘 나왔어? 성적 나온 것도 몇 개 있던데 확인했냐?”


갤러리에서의 일 이후로 묘하게 눈치를 보는 듯이 굴었던 나미카와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화색이 완연했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자신의 심증을 확신으로 굳혔다. 


“그런가요. 한 만큼 나왔겠죠.”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타인을 망가뜨리는 것이라면 그 얼마나 가엾은 인생인가. 아카아시는 자신의 그러한 초연했던 생각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가엾은 인생 따위가 아니라 단지 어둡고 깊은 악의였다.


“우리 엘리트는 진짜 남달라~!”


나미카와가 느물하게 웃으며 아카아시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아카아시는 나미카와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그 팔을 풀었다. 나미카와는 까칠한 후배라며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툭툭 친다. 그 전이었으면 어디 선배를 무시하는 거냐고 발끈하기부터 했을 텐데 그것마저 태도가 달랐다. 


그 사이에 연구실 사람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아카아시는 선배들에게 인사하며 자연스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아카아시의 뒤로 선배들이 대화 나누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나미카와, 밤이라도 샜냐. 뭐 했냐. 뭐 했기는.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나미카와의 우쭐대는 목소리. 


아카아시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마우스에 손을 올리며 생각했다. 그래, 자신이 보쿠토를 보고 경탄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렇게 질퍽한 진창으로 뛰어들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도 있는데 늪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사람을 보고서 어떻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있나. 


아카아시는 아무 소식이 없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주 그 자리에서 나타난 계약서가 어떻게 된 일인지 이제야 알았다. 알고 나니 사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뭐에 대해서? 내가 보관하던 계약서를 도둑맞았고 그것 때문에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라고?’


그런 말을 하면 보쿠토가 무슨 이야기를 할까?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자신이 사과하고픈 이 마음이 정말로 자신의 실수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미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보쿠토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기 때문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애당초 나미카와를 그의 자취방에 들여 재워주었던 것도 보쿠토 때문이다. 가짜 약혼자 행세를 하고 있으니 그의 집안 어르신들에게 트집잡히지 않기 위해서였지, 그게 아니었다면 나미카와가 낯선 갤러리에서 술에 취해 뻗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나미카와가 결국 아카아시의 계약서를 훔쳐간 것도, 잘잘못을 따지자면 나미카와의 잘못 아닌가. 도둑맞은 사람과 훔쳐간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도둑맞은 사람의 잘못이 성립할 수가 있나. 


그런데 이 모든 이성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하고픈 마음이 드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삼켰다. 등 뒤에서는 선배들이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나미카와는 그에게 하고픈 말이 있는 듯했지만 당장 찾아온 으스댈 기회를 놓치는 것도 아까운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속으로 ‘평생 그러고 있어라.’하고 중얼거리며 논문 파일을 향해 마우스 포인터를 옮겼다. 


그의 마음이 달밤에 잘못 맺힌 이슬처럼 심란해도 논문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




그 뒤로 다시 일주일이 지났지만 보쿠토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계좌로 연락이 왔다. 아카아시는 입금된 그 액수만 보아도 보쿠토가 계약 그대로 정확히 계산해 넣어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걸 받고도 아무 말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카아시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보쿠토의 번호를 찾는 손길은 익숙했다. 자신이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해 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얇은 카디건 하나만 챙겨 연구실 건물의 비상계단에 기대어 선 아카아시는 뿌연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낀 겨울 하늘은 흐릿한 잿빛이었다. 날이 많이 춥지 않아서 눈이 아니라 비가 올 것 같았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쿠토가 전화를 받았다. 아카아시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보쿠토가 자신의 전화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단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여보세요.》

“…….”


막상 전화했지만, 말문이 턱 막혔다. 잘 지냈어요? 잘 지냈으면 보름 가까이 연락 한번 없을 리가 없다. 괜찮으세요? 뭐가 괜찮으냔 말인가? 그가 그토록 바라던 유산을 결국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이? 오랜만이네요. 그럼 오랜만이지 않겠나,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헤어진 지 오늘로 보름째인데. 


《아, 입금은 했어.》

“……네, 봤어요.”

《그동안 고마웠다.》


보쿠토의 말은 딱딱했다. 아카아시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는 모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들통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어요? 그 상황에서 아무 말 못 한 건 당신 아닙니까? 탓을 할 때야 하더라도 몇 날 며칠을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말이라도 하던가요.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수습은 잘 했습니까?”

《…….》


이따금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여기서 멈추는 게 모두에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하고야 말게 되는 말이 있다. 왜 그 한 마디를 참지 못하는지 줄곧 의아했던 아카아시였으나 이제 알 것 같았다. 


사람은 뜻대로 되지 않는 걸 보며 종종 그럴 바에야 다 부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뭐 대충.》

“그렇습니까. ……유산 문제는 유감이…….”

《그게 중요하냐?》


보쿠토의 목소리에서 날 선 못이 느껴졌다.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듯이, 보쿠토의 인내도 어딘가에서 끊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두 사람이 함께 구축해온 모든 게 부서지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 짧은 찰나에 깨달았는데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됐다. 말해 뭐하냐》


보쿠토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비난과 짜증의 기색이 어려있다.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어떤 방향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보쿠토는 사람을 고용해서라도, 비겁한 짓은 싫다고 하던 그가 가족을 속여서라도 조모에게 ‘결혼할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유산이 걸린 것은 핑계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몇 번이나 했다. 


그가 애쓰고 노력했던 것들 전부가 가족 모두 앞에서 밝혀졌고 비난받았으니 말끔한 기분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에게 화풀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지난 이주 간 서로 연락하지 않았으니, 보쿠토에게도 응어리진 마음이 있을 것이었다. 그걸 자제하고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까지 아카아시는 알고 있었다. 


“말씀 재밌게 하시네요.”

《……뭐?》

“비난을 하고 싶으면 똑바로 제 탓을 하시든가요. 어떻게 된 경위인지 모르겠으면 아느냐고 물어나 보시던가요. 의심이 가면 의심하고 있단 얘기라도 하던가요.”

《그렇게 얘기한다 이거야?》

“말해 무엇하냐 하셨죠? 그런데 보쿠토 씨는 아무 말도 안 하셨는데요.”

《……나만 말 안 했냐?》


잔뜩 쉰 것같은 쇳소리였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보쿠토가 소리쳤다.


《너도 아무 말 안 했잖아!》

“제가.”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아카아시의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변명? 할 게 있으면 있는 사람이 먼저 말해야 되는 거 아닌가? 계약서 쓰자는 대로 다 썼더니 그것 때문에 일을 전부 망치고, 그래도 약속한 대금은 지불 했는데 뭐가 또 필요해?》

“제가 지금 더 필요하단 얘기가…….”

《아, 혹시 아키오 그 자식이 뭐 더 얹어주겠단 얘기라도 했어? 아니면 그 나미와카인지 카와인지를 치워주겠대? 그래서 우리 계약서 넘긴 거 아냐?》

“뭐라고요?”

《나하고 있을 땐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아 내가 너무 눈치 없이 한 번에 수긍했나? 몇 번 더 물어볼 걸 그랬지?》

“……그게 할 말입니까?”


차갑게 얼어붙은 것이 단숨에 박살이 나듯, 그들 사이에 있던 모든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간다. 깊이 없이 얄팍했기에 가루로 깨어진 것들은 순식간에 기화되어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아카아시의 말에 더 퍼붓기라도 할 듯이 숨을 들이켰던 보쿠토가 씹어뱉듯 무어라 중얼거리고는 더 할 말 없다고 전화를 뚝 끊었다. 아카아시는 전화가 끊긴 휴대전화를 세게 움켜쥐고 액정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처음부터 계약으로 만난 상대일 뿐이었다.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일은 끝났고 더 이상 만날 일은 없으니 말끔히 버리고 던져버리면 될 것이었다. 


보쿠토의 생각이 부당한 오해이고, 그러니 다시 전화를 해서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면 오해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카아시는 지친 눈으로 흐릿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해를 풀어서 무얼 하나? 일은 이미 벌어졌고, 자신과 보쿠토는 친구조차 못 되는 사이다. 해결한다 해도 돌아오는 건 깨진 것을 억지로 이어붙여 놓은, 다시 쓰지도 못할 도자기 같은 관계뿐이었다. 이런 것은 손에서 놓아버리는 편이 더 편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앞에 놓여있는 목표가 있다. 아카아시는 휴대전화의 액정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보쿠토의 번호를 지웠다. 이게 보쿠토 역시 바라는 바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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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봐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허니문 아일랜드는 322p로 완결, 다가올 대운동회에서 회지로 만나뵙겠습니다^-^! 

(요기까지는 약 150p 분량입니다)


봐주신 분들 덕분에 완결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ㅠㅠ 감사합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조용히 시선을 마주했다. 보쿠토는 조모에게 매달려 장난치느라 바쁜 와중에도 아카아시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크게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확실히, 뭔가 방법이 없긴 하지만…….’


그가 나타난다 해서 어쩐단 말인가? 자신을 보고 숨 한번 쉬기도 전에 결혼식 얘기를 하는 조모의 마음을 어떻게 바꿀 수 있나? 하지만 아카아시는 무언가 계속해서 꺼림칙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은 자기 것을 지킬 때만큼이나 타인의 것을 파멸시키려 들 때 그 열의에 불을 지피는 법이다. 아카아시는 그것을 뼈도 채 굳기 전에 배웠다. 그리고 보쿠토가 원하는 것은, 그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천금을 주어도 팔지 않을 거라고 하는 그 아키오가 이 상황을 흘러가게 내버려 둘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정말 내버려 둘 거였다면 이렇게 제 양친까지 불러들여 판을 키우지도 않았을 테다. 그런데 정말, 자신과 보쿠토의 이 계약 결혼을 무슨 수로 무산시킬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방비할 도리가 없다는 불안감이 스물스물 아카아시의 내면을 파고들어 왔다. 


아키오까지 도착했다는 소리를 들은 조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막내아들 하루키가 곁에서 부축을 거들어주었다. 그렇게 네 사람이 거실로 나섰을 때, 바깥의 분위기는 보쿠토와 아카아시가 안방으로 들어오기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보쿠토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고용인들은 숨을 죽이고서 부엌쪽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어른들은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무슨 일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이 어색한 분위기의 주범은 당연하게도 아키오였다. 아키오만이 과장스러울 만큼 안타깝고 침중한 기색이다. 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폴더?’


종이로 만든, 서류를 보관하는 폴더였다. 


“아키오! 무슨 일이더냐.”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기색에 조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키오는 조금 화가 난 것도 같았다. 조모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아키오가 뚜벅뚜벅 보폭이 큰 걸음으로 보쿠토에게 다가왔다. 순간 아카아시의 심장이 불안함으로 크게 뛰었다. 그리고 그것이 명확한 사고로 뻗어나가기도 전에 아키오가 보쿠토의 가슴팍에 그 폴더를 집어던졌다.


“코타로! 네가 아무리 할머님 유산을 탐을 내도 그렇지!” 


철썩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폴더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 안에 든 서류가 우수수 흩날린다. 그 위에 적힌 글자가 빠르게 읽혔을 때, 아카아시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계약서…!’


보쿠토와 자신의 일을 서류로 정리해둔,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작성했던 바로 그 계약서였다. 



*



“이게 다 무슨…….”


제일 먼저 그 서류를 집어든 사람은 아키오의 부친이었다. 경악이라기보다는 기가 막힌단 목소리로 그 서류를 읽어나가는 것을 보쿠토의 부친이 낚아챘다.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온다. 보쿠토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키오가 열에 뻗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약혼자를 사람을 고용해 대행시킨단 생각을 할 수가 있어! 그것도 할머님 유산이 달린 문제에서!”

“…….”


보쿠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문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키오를 노려봤을 뿐이었다. 


“코타로. 이게 무슨 일이냐.”

“아버지. 설명을…….”

“아키오의 말이 사실이냐? 이 계약서가 사실이야?”

“아키오가 그걸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실이란 말이구나.”


아카아시는 침묵을 선택했다.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보쿠토를 변호한다고? 어떻게? ‘문제’는 자기 스스로 답을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선 아카아시 자신이 바로 그 문제였다. 


“큰아버지도 속이고 막내 삼촌도 속이고 이젠 할머님도 속이려고 했어? 내 친구더라 돈 주고 샀냐고 곧장 물어보던 건 네가 그래서였구나!”


아키오의 목소리에서 주체하지 못한 화가 흘러나왔다. 아카아시는 등 뒤로 돌린 주먹을 세게 쥔 채 바닥에 흩어져있는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보쿠토가 작성해 한 부씩 나눠가진 저것이 어떻게 아키오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키오가 다시 언성을 높이려는데 조모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 손이 향한 곳은 보쿠토의 부친에게로였다. 부친은 숨이 막힌단 얼굴로 조모의 손에 계약서 뭉치를 넘겼다. 조모가 미간을 모으고 눈매를 가늘게 만든 채 계약서를 훑어보았다. 그걸로 용서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지 아키오가 다급히 나섰다. 


“할머님! 어떻…….”

“조용히 하거라, 아키오. ……코타로. 진정 이게 네 생각이었느냐?”

“…….”

“대답을 해!”


머리가 눈처럼 새하얗게 물든, 작은 체구의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박력이었다. 조모를 부축하고 있던 하루키가 작은 목소리로 ‘어머니.’하고 불렀다. 하지만 막내아들의 만류로도 조모의 화는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할머니, 나는…….”

“이 못난 놈! 내가 짝을 찾아오랬더니 그걸 돈을 주고 사? 그 돈이 누구 돈이냐! 네가 번 것이 한 푼이라도 들어 있는 돈이야!? 내가! 내가 벌고! 네 어미 아비가 손가락 한 번 못 펴면서 잠 못자면서 번 돈 아니냐!”

“…….”


아키오를 향해서는 살기넘치는 눈빛을 할 수 있었던 보쿠토였으나 조모를 보고서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윽고 조모의 눈길은 보쿠토 곁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카아시에게로 향했다.


“너도!”

“…….”

“이 철없는 것이 돈을 줄테니 하자 한다고 이런 일을 덜컥 맡았단 말이냐? 생각이 있는 게야 없는 게야! 어찌 돈에 긍지와 명예를 다 갖다 팔아!”


아카아시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조모의 호통아래에서 그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이……. 꼴도 보기 싫다!”


노모가 버럭 소리치고는 저택을 나섰다. 하루키가 다급히 따라붙어 부축한다. 그런 노모의 뒤로 그녀의 아들들이 서둘러 다가갔다. 그건 보쿠토도 마찬가지였지만 매섭게 가로막는 아키오의 걸음에 막혀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보쿠토의 모친이 조용히 아카아시에게 눈짓했다. 이만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아카아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한 뒤 소리 없이 보쿠토의 본가를 나섰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바라보았지만 두 사람은 대화할 수 없었다. 보쿠토의 부친이 곧장 보쿠토를 데리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



고급 주택가 안쪽까지 들어오는 차라고는 전부 자가용뿐이었던지라 아카아시가 대로변까지 나가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도착했을 때, 아카아시는 자취방에 기대어 앉아 탄식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보쿠토 조모의 외침이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찌 돈에 긍지와 명예를 다 갖다 파느냐고? 하지만 돈이 없는 긍지와 명예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힘없는 긍지는 그에게 가족을 찾아주지도 않았고 힘없는 명예가 그의 앞날을 보장해주지도 않았다. 오로지 돈이 바로 그 힘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대꾸할 수 없었다. 그녀가 보쿠토의 친애하는 조모여서도 아니었고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서도 아니라,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이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금전이 급했어도, 아무리 막대한 보수가 주어진다고 해도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됐는데. 돈을 벌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편히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가만히 침대에 기대어 침잠해가던 아카아시는 눈을 감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과 좋은 결말이 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자각이 각성제와 환각제가 오락가락하듯 그의 신경을 괴롭혔다. 계약서 같은 걸 쓸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수습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아카아시는 문득 눈을 떴다. 


아키오가 가져온 그 계약서, 적당히 꾸며낸 가짜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들을 곁눈질로 봤을 때 그 서류는 모두 진짜였다. 자신에게 한 부, 보쿠토에게 한 부뿐인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아키오의 손에……. 


아카아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계약서는 보쿠토에게 한 부, 아카아시 자신에게 한 부 있다. 세상에 단 두 부뿐인 것. 그러니까 그건 자신의 것 아니면 보쿠토의 것이라는 말이었다. 


‘서명이 왼쪽에 있는 건 누가 가져간 계약서였지?’


아카아시는 다급한 동작으로 자취방 책상의 책꽂이를 뒤졌다. 책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지고 수업에 사용한 유인물과 프린트가 흩어지며 날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카아시는 그 계약서를 보관했던 폴더를 찾아냈다. 


“하…….”


양손으로 펼친 폴더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할머님만 뵙는 것 아니었습니까?”


지난번에는 차가 두 대뿐이었던 보쿠토의 본가 차고에는 이미 네 대나 주차가 되어있었다. 차고에서도 들리는 실내의 소음을 보면 안에 한두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다. 조금 당황한 아카아시의 질문에 보쿠토도 놀라서 휴대전화부터 꺼냈다. 누군가에게 급히 메세지를 보내는가 싶더니 곧 답신이 왔다.


“뜨헉.”

“뭔데요. 뭡니까.”

“아 이 개자식이 진짜…….”


상소리를 하는 것은 진짜 그런 감정이 들었기 때문인 것이 반, 나머지 반은 아카아시의 눈치를 보기 위함이었다. 아카아시가 미간을 모았다. 보쿠토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깨물었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막내 삼촌이랑 작은 아버지네도 와 있나 봐.”

“……네?”


아카아시는 이번만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일의 전말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방해할 생각인가 보네요.”

“어어……. 도대체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막내 삼촌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사촌도 와 있습니까?”

“그 자식은 정작 안 왔긴 한데.”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눈치를 살폈다. 싫으니 좋으니 티격태격 한다 해도 보쿠토 입장에서는 그들 모두 평생을 봐온,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여기서 가장 힘들게 된 건 아카아시다. 아카아시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깊은 한숨을 내쉰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쩌겠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사람이 많으니 부끄러워 인사드리지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아 진짜 왜 이렇게 된 거야…….”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함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보쿠토의 모습을 보는 건 그 이상의 즐거움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아카아시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자신 때문에 눈치 보는 사람을 보고서 즐거워하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보통 악질이 아니다. 


“가죠, 보쿠토 씨.”

“이거 끝나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진짜 제일 맛있는 거!”


아카아시가 보조석에서 내리기 직전,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한쪽 손을 잡아채고 말했다. 그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아카아시는 순간적으로 보쿠토가 평생의 맹세 같은 것이라도 하는 거라고 착각할 뻔한 정도였다. 


“고작 먹을 걸로?”

“아, 아아니! 더! 말만 해!”


상기된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는 도통 미움을 살 여지라고는 존재하지 않아서, 아카아시는 어쩐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알 것 같다고. 



*



“어서들 오렴.”


현관에서부터 두 사람을 맞이해준 건 보쿠토의 양친이었다. 한 번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두 사람은 유난할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로 아카아시를 반겼다. 


“아키오는 아직이래?”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꿰어신던 보쿠토가 부친의 질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 자식 오는 줄도 몰랐는데.”

“코타로.”


둘의 대화는 작은 목소리로 이루어졌기에 거실에 있던 그의 숙부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들어가서 먼저 숙부님께 인사드리렴. 유키 씨, 요리는 다 준비 됐어요?”


보쿠토의 모친이 안쪽을 향해 고갯짓하며 가정부에게 질문했다. 앞치마를 걸치고 있던 가정부가 식지 않게 하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정장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여 보쿠토 곁에서 걸음을 맞추었다. 보쿠토가 한쪽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얼굴을 보자니 어쩐지 맥아리 없이 긴장이 풀리는 것이었다. 


“작은 아버지!”

“오, 코타로. 언제 봐도 훤칠하구만. 더 큰 거 아니냐?”

“에이, 고등학교 때부터 이 키였는데요.”

“우리 아키오도 운동을 좀 시킬 걸 그랬어, 으응.”


몸은 마른 편이었으나 초승달 모양으로 접어 휘어뜨린 눈매 하며 인상만은 유한 중년 남자였다. 자주 웃는 탓인지 눈가에는 잔주름이 보기 좋게 자리잡혀 있다. 보쿠토가 대거리를 해대는 그 아키오의 부친이라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으나 처음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아카아시는 남자의 눈빛 아래에 진득이 가라앉아있는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래, 이쪽이 오늘의 주인공이신가?”

“처음 뵙겠습니다.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아카아시라……. 그 아카아시인가?”


아카아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 혼자 남은 성씨가 무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남자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보쿠토의 등을 두드렸다. 


“이거이거, 우리 코타로가 집안엔 아무도 들이질 않더니만 가장 좋은 걸 아껴두고 있었나?”

“아 작은아버지도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그보다 할머니는요? 막내 삼촌도 와 있다더니 안 보이는데.”

“둘 다 안방에 있다.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고 들어가 계셔. 가서 인사드리거라.”

“할머니—!”


보쿠토는 조모의 소재를 듣자마자, 숙부에게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할머니’라고 큰소리로 외치며 아카아시를 잡아끌고서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아카아시가 겨우 그의 숙부에게 눈인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보쿠토는 노크도 하지 않고 안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할~머니!”

“요 녀석아. 할미 귀청 떨어지겠어.”


좌식으로 꾸려진 실내는 무척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화사함보다는 우아함이 엿보이는 내부 장식 속에 보쿠토의 조모는 그 나잇대라고는 연상할 수 없을 만큼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었는데 아주 새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나이도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자리한 세월의 흐름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아카아시가 ‘안방에 이렇게 대책 없이 들어와도 되나’라고 고민하고 있을 때 보쿠토가 대뜸 방을 가로질러 달려가 그의 조모에게 안겨들었다. 그가 전력을 다해 몸을 부대끼면 가냘픈 노모의 몸으로 버틸 수 없는 것을, 그녀가 흔들리지도 않고 보쿠토를 감싸는 것을 보며 아카아시는 조손 사이의 능숙한 애정의 갈래를 알아보았다. 


조모 곁에 줄곧 앉아있던 보쿠토의 막내 숙부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한숨을 내쉬며 아카아시를 향해 손짓했다.


“이제 곧 결혼도 할 녀석이 어리광은……. 네 남자친구 보기 부끄럽지도 않으냐?”

“아카아시는 괜찮아! 그치, 아카아시!”

“…….”


바닥에 반쯤 눕다시피 하며 제 조모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는, 서른이 멀지 않은 이 남자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중인 자신의 애인 설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카아시는 이번만은 능숙하게 대꾸하지 못하고서 애매한 표정으로 겨우 미소만 그리고 말았다. 막내 숙부 하루키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쪽이 우리 손주와 만난다는 아이더냐?”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합니다.”


아카아시는 드러누운 보쿠토 곁으로 다가가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대답했다. 한참 더 조모 곁에서 어리광을 피우던 보쿠토가 조모의 꿀밤을 맞고는 아카아시 곁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그래, K대에서 공부 중이라?”

“예. 내년 가을에 졸업할 예정입니다.”

“식은 그럼 그 이후가 낫겠구나.”


그 말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흘러나와서 아카아시도 보쿠토도 방비하지 못한 찰나에 두 사람을 세게 때리고 지나갔다. 유달리 어리광이 심하게 묻어나는 얼굴로 히죽히죽 웃으며 대꾸하려던 보쿠토도 제꺽 얼어붙었다. 그건 아카아시도 마찬가지였다. 신상명세에 대해서 그 어떤 질문을 들어도 유려하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만난 지 몇 초 만에 결혼식 날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카아시가 입을 달싹거리는 것을 보고 조모가 미간을 모은 채 보쿠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지 청혼도 제대로 하지 않았느냐는 비난이었다.


“코타로?”

“아, 아니 할머니! 만나자마자 결혼식 얘길 하면 어떡해!”

“결혼할 사람 데려온다지 않았니?”

“그렇긴 했는데…….”

“네가 좋다는 사람이면 나도 좋다.”


조모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투로 응했다. 억울한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뜬 건 보쿠토였다. 그의 시선이 홱 하고 돌아가서 자신의 막내 숙부를 바라본다. 하루키가 휘파람을 불며 눈을 피했다. 


그것만으로도 정황이 눈에 들어온 것인지 조모가 혀를 찼다. 


“네 막내 삼촌이 뭐라 했느냐?”

“내가 만나는 애마다 죄다 싫댔단 말야!”

“하루키가 싫다 한마디 했다고 손 놨으면 너도 할 말 없다, 코타로.”

“엣.”


보쿠토가 머쓱하니 눈을 굴렸다. 막내 숙부 하루키가 헛기침하며 아카아시를 향해 사과의 말을 했다.


“미안하네, 아카아시 군. 우리 코타로가 생각도 악의도 없으니 부디 양해해주었으면 해.”


한 번 들었던 적 있는 얘기였기 때문에 아카아시는 여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 때였다. 


—어머, 아키오 왔니. 

—할머니는 안에 계신다. 코타로가 인사 드리고 있어. 


바깥에서 살짝 소란이 일었다. 보쿠토의 사촌이 뒤늦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맞춘 옷은요?》

“그건 우리 부모님 만날 때 입었잖아!”


보쿠토는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핸들을 움직였다. 그의 얼굴에는 활기찬 웃음이 걸려있었다. 해바라기를 사람으로 빚으면 그의 얼굴을 할 거라고, 그의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 얼굴이었다. 


“새로 맞춰야지!”

《하아…….》


아카아시의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눈에 훤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미간을 꾹 누르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거나. 


《오늘이요?》

“응! 고르고 가봉하고 다 만드는 데 시간 좀 걸리니까.”

《그러네요, 약속이 다음 주니까.》


지금 표정도 알만하다.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굴리고 있을 것이다. 시간을 가늠할 때 아카아시가 짓곤 하는 얼굴이었다.


《그럼 일단 옷부터 맞추죠.》

“밥은?”

《지금 당장은 식욕이 없어서요. 보쿠토 씨 지금 어디죠?》

“어, 너희 학교 가는 길? 여기 사거리. 3층짜리 카페 있는 거기.”

《아……. 거의 다 오셨네요. 저 옷만 챙겨입고 정문 쪽에 나올게요.》


보쿠토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아시가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려왔다. 



*




‘입맛 없다더니.’


보쿠토는 핸들에 기대어 머쓱한 표정으로 옆자리에 앉은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아시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서 혼곤히 잠에 빠진 채였다. 옷을 맞추고 잠깐 차를 몰다가 신호가 걸린 틈을 타서 식사는 뭘로 하겠느냐고 물으려 했더니 고 사이 잠들어 버렸다. 


어쩐지 깨울 수가 없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가 없어서 아카아시의 학교 근처까지는 어떻게 도착했다. 오는 길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주위로 클랙슨 소리가 지나가기도 하고 과속방지턱에 걸려 덜컹하기도 했는데 아카아시는 눈을 꼭 감고서 세상 모르고서 잠에 빠졌다. 


‘어제가 시험이었으니까 피곤했을까? 어제 안 쉬었나? 하루 쉬어서는 안 되나?’


괜히 죄책감이 느껴졌다. 지난번에 맞춘 옷 입으면 안 되냐 하던 통화가 아른아른 귓가에 맺혔다. 피곤해서 못 나온다고 하면 됐을걸, 하고 속으로 투덜거려보지만 아카아시가 깨어있다 하더라도 보쿠토의 마음속 말을 읽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다. 그대로 들켰을지도.’


가끔 ‘당신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인다’는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는데 심장 철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쿠토는 입술을 한 번 삐죽했다. 하지만 봐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의 표정은 금방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돈은 어디에 필요한 거지?’


그가 아카아시에게 건네는 금액이, 보쿠토 본인에겐 아주 큰 돈이 아니지만 세간의 기준으론 상당한 액수였다. 당장 한 푼이 급하다기에는 아카아시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풀 하나 없이 제법 말끔한 차림새였고, 그렇다고 그에게서 받은 돈을 어딘가에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날 때마다 옷차림은 단정했지만 그 외의 것들은 변하는 게 없었다. 들고 있는 가방이나 신고 있는 스니커즈, 지갑 같은 것들이. 


딱히 유흥을 즐긴다고도 할 수 없다. 학교 공부가 얼마나 고된지 살이 죽죽 내리는 게 보일 지경인 데다가 그가 공부 외에 달리 쓰는 시간이 없다는 건 보쿠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 얘기를 좀 잘 해볼걸…….’


아카아시를 처음 만났을 때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심술을 부리고 대거리를 하느라, 지금 생각해보니 아카아시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전무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가 준 돈 어디에 쓸 거야?’라고 물어보는 것도 좀 그렇다. 아카아시가 가시 세운 고슴도치처럼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볼 것이 보지 않아도 훤했다. 


“……어디죠, 여기…….”


그 때 아카아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오후의 볕도 눈이 부신지 눈꺼풀을 가느다랗게 뜨고서 주위를 둘러본다. 보쿠토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곧게 세우고 대답했다.


“여기 그! 어디지! 그!”

“……학교 정문이네요. 몇 시입니까?”

“아! 그러니까 지금이!”

“오후 다섯 시네요…….”

“……으응…….”

“깨우지 그러셨어요.”


조금 비뚤게 기대어 잤는지, 아카아시가 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민망해하는 것도 같았다. 보쿠토는 왼쪽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차가 밀려서 방금 왔어.”

“샵에서 학교까지 두시간이나 걸렸다고요?”

“어, 으, 으응. 공사 해서 둘러왔어.”


아카아시는 조금 맑아진 정신으로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양손으로 핸들을 꽉 쥐고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생 거짓말은 못 하고 살 사람이란 말이지…….’

“……조금 시간이 이르긴 하지만 저녁 먹으러 갈까요?”

“입맛 없다지 않았어? 괜찮아?”


그리고 이 기막힌 순간에 보쿠토의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카아시의 눈길이 그의 복부 쪽으로 향한다. 보쿠토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 이거는! 소화가!”

“없던 입맛도 돌아오는 소리네요. 보쿠토 씨 먹고 싶은 걸로 먹으러 가죠.”


보쿠토가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변명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아카아시의 웃는 얼굴 앞에서 무너졌다. 목까지 빨갛게 변한 보쿠토가 고개를 푹 숙이고 ‘가츠동이 먹고싶어…….’라고 중얼거렸다. 아카아시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



약속의 날, 아카아시는 자취하는 원룸 빌라의 1층에서 보쿠토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날이 완연히 추워져서인지 뺨을 스치는 공기가 매섭게 느껴졌다. 아카아시는 코트의 깃을 여몄다. 


오늘은 선물 같은 건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보쿠토가 신신당부하는 소리를 들었기에 아카아시도 맨손이었다. 아카아시는 하얗게 말라붙기 시작한 화단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대학가 근처에선 듣기 어려운 무게감 있는 엔진 소리도 그에겐 이제 낯이 익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앞에 멈춰선 차의 보조석 문이 열렸다. 보쿠토가 보조석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면 연락한댔잖아. 날씨도 추운데.”

“방금 나왔어요. 올 때 됐다 싶어서.”

“너 지금 하는 거 사실 보쿠토 코타로 말은 죽어도 안 듣기 석사 학위인 거 아니야?”


아카아시는 불시에 웃음이 터져서 꾹 눌러 참고는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보쿠토는 투덜거리느라 바빴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제대로 벨트를 매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 다시 페달을 밟았다. 


“드디어 아키오 그 자식한테서 내 유산 뺏어 오는구나!”


보쿠토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껏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창에 턱을 괴고 옆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 사촌에게서는 별다른 일 없었습니까?”

“응. 얌전해~!”

“흠…….”

“왜?”

“좀 그래서요. 오늘 할머님 뵈면 모든 일이 끝나는데 얌전히 있었다는 게.”


보쿠토 씨가 원하는 거라면 얼마를 준다 해도 절대 팔지 않을 사람이라면서요? 아카아시가 염려를 담아 하는 말에도 보쿠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느라 바빴다. 


“뭐 지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그도 그렇습니다만…….”


이번 안건은 순전히 조모의 마음에 달린 일인데, 보쿠토의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는 손쉽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은 아닐 듯했다. 그녀의 조건이라는 것도 보쿠토가 결혼할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었으니 아키오가 아카아시 자신을 어떻게 한다 해도 보쿠토가 다른 사람을 또 데려오면 그만이었다. 


아카아시는 마음 한 켠에 걸리는 것을 밀어두고 긴장을 풀기 위해 손가락을 주물렀다. 보쿠토가 그것을 흘끗 바라보았다.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쳐다보았지만 보쿠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주말이라 해도 저녁 무렵엔 도시에 차가 많았다. 중간중간 정체 구간을 지나고, 완연히 해가 저물어갈 무렵 두 사람은 보쿠토의 본가 저택 앞에 도착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젖히고 인공 눈물을 눈에 떨어뜨렸다. 계속 난방이 돌아가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었더니 눈이 뻑뻑했다. 


‘두 개 남았나…….’


어깨를 주무른 아카아시는 휴대전화의 액정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한 시 20분이었고 도서관에 사람은 반절 정도 차 있었다. 시험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라 그런 것 같았다. 


‘피곤하다…….’


평소에도 체력 관리를 꾸준히 해오는 편이었는데 이번 시험은 유달리 고된 느낌이었다. 아카아시는 독서실의 칸막이에 머리를 기댔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보았지만 집중력이 돌아올 기미는 없었다. 아카아시는 가져온 외투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바람이라도 쐴 생각에서였다. 


도서관 복도로 나왔지만 공기가 텁텁한 것은 여전했다. 아카아시는 자판기에서 커피 두 개를 뽑아들고 도서관의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도서관의 수위가 그를 보고서 살짝 인사했다. 매일같이 보는지라 아는 척을 하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자신이 뽑은 커피 두 개 중에 하나를 수위에게 건네주고 바깥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이미 겨울이 서려 있었다. 날이 추워지며 한결 청명해진 밤하늘에는 도심 한가운데에서도 언뜻언뜻 별이 보였다. 천문에는 조예가 없는지라 별자리를 분간할 수는 없었으나 별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화단의 펜스에 살짝 걸치듯 기댄 아카아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


숨을 몰아쉬자 완연히 새하얀 입김이 사르르 흩어졌다. 입고 있는 카디건의 앞섬을 조금 더 추슬러 여민 아카아시는 캔커피를 열었다. 경쾌한 소리가 나며 안에서 따뜻한 김이 흘러나왔다. 양손으로 감싸 쥐어본다. 처음에는 조금 뜨거웠던 캔이지만 지금은 딱 알맞게 따뜻해져 있었다. 


“어~!? 커피 마셨어?”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커피만 마시고 들어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던 아카아시는 그만 마시던 커피를 뿜고 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온 탓이었다. 덕분에 아끼던 카디건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지만 그걸 챙길 여력은 없었다.


“컥, 쿨럭, 보쿠토 씨?”

“아카아시, 애처럼 흘리면서 먹냐?”

“지금 누구 때문인데…….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보쿠토는 품이 딱 맞는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앞섬이 제멋대로 펄럭이고 그건 목에 두른 캐시미어 머플러도 마찬가지였다. 양손에는 커피가 한 잔씩 들려있고 오른손 중지에 걸려서 달랑거리는 건 아마도 자동차 열쇠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 오늘도 도서관에 있을 거 같고 나는 술자리 지겨워서 도망치고? 일석이조!”


아카아시가 기대어 있는 화단에 들고 온 커피와 자동차 열쇠까지 내려놓은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를 빼앗아 옆에 있던 휴지통에 그대로 버리곤—아카아시가 잠깐이라고 만류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그의 손에 자신이 사온 커피를 쥐어 주었다.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는 몰라도 보쿠토가 사온 커피는 그가 들고 있던 캔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오늘 술자리 있으셨습니까? 운전하면 안 되는 거 아녜요?”


양손으로 커피를 감싸 쥔 아카아시는 괜히 귓가가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어, 모르는 척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고 핀잔 주듯 말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보고 서서 제 몫의 커피를 들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안 마셨어.”

“네?”

“여기까지 오려면 차 끌고 와야 하니까. 운전해야 한다고 하고 안 마셨지~! 내가 사고라도 나면 우리 아카아시 수당도 못 주고 고소당할지도 모르는데.”


마지막 말은 경쾌한 농담이었다. 보쿠토가 윙크까지 곁들였다. 아카아시는 살면서 저렇게 윙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아침에 세웠을 머리는 아무래도 지금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듯 내려와 있었는데 그마저도 공들여 세팅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밝은색 코트도 어두운 톤의 캐시미어 머플러도 그림처럼 어울려서, 보쿠토만이 여기에서 이질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오래된 도서관 건물, 낡아서 빛이 흐려진 오렌지빛 가로등. 그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아무렇지않게 윙크를 날리는, 커피를 가져온 남자가 한 명. 


“내일 모레면 다 끝난댔지?”

“네. 모레 10시에 마지막 시험 치면 이번 학기는 끝입니다. 그렇다고 방학은 아니지만 일주일은 쉴 수 있겠죠.”


쉬어도 쉬는 것은 아니겠으나. 


아카아시는 손가락을 굽혀 그 관절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번 주에 시험이 끝나면 곧장 다음주에 있을 보쿠토 조모와의 만남을 준비해야 했다. 옷도 새로 맞추어야 할테고 그 집안 사람들의 생태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한다.


‘만나는 걸 다음주 초로 잡길 잘했지.’


일단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장 큰 벽은 넘어서는 것이었다. 적어도 며칠은 몸도 마음도 쉴 수 있을 것이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계산을 마치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보쿠토를 올려다보았다. 


보쿠토는 입을 후후 불어가며 커피를 식히느라 바빴다. 저 체격으로 그러고 있으니 되레 제법 귀여워 보인다. 거기까지 생각한 아카아시는 빠르게 고개를 흔들곤 자신의 눈을 부볐다. 


“아카아시? 많이 피곤한 거 아냐? 공부할 거 많이 남았어?”

“……조금요.”


얼마나 피곤하면 헛것이 보이나. 아카아시는 속으로 혀를 차며 커피를 넘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보쿠토의 금빛 눈동자가 아래로 처졌다. 제법 걱정을 해주기는 하는 것 같았다. 


보쿠토가 입을 달싹거리다가 도로 닫았다. 보쿠토를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던 아카아시는 미간을 모았다.


“왜요?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

“아, 아니…….”


처음 만났을 때는 천생 뻣뻣하게 구는 도련님 같더니 묘하게 어린애 같달지, 추궁을 하면 눈치 보는 듯한 표정을 보인다. 아카아시는 손등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꾹 눌러 내렸다. 


“뭔데요?”

“말하면 아카아시 화낼 거 같은데…….”

“무슨 말인데요?”

“아니 그……. 뭐냐……. 성적 필요한 거면…….”


한 두과목 정도는 좋게 봐달란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렵지 않다는 얘기였다. 보쿠토는 어물어물 말을 꺼내놓다가 제풀에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면서 제가 버럭했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화를 내지도 않았다. 도리어 의아하다는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뭐, 뭔데. 왜 그렇게 쳐다봐.”

“그런 수단은 전혀 쓰지 않을 사람처럼 생겼잖습니까, 당신.”

“안 썼어! 당연히 안 썼지!”

“그런 것치고는 너무 곧장 생각해내길래요.”

“내 또래 사촌 못 봤냐? 어? 내가 누구랑 부대끼면서 자랐다고 생각하는 거야?”


보쿠토는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열렬히 부정했다. 그런 쪽으로 자신이 의심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억울한 누명 쓰고는 홧병 걸려서라도 못 살 사람이군…….’

“그, 그리고 아카아시가 공부 안 한 것도 아니고 뭐 없는 점수 더 달란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 피곤한 것뿐이고……. 원랜 공부 열심히 하고 잘하니까……. 잘 할 거였고…….”


시간을 살 기회가 있다면 사는 것도 나쁘지 않기도 하고, 보쿠토가 그렇게 말하며 말끝을 웅얼거렸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말에 여러가지 오류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가 말한 것은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결과를 사겠다는 것이라고, 그걸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래도 그런 얘긴 하지 마세요.”

“아 그러니까 말 안 하려고 했어! 그냥 잠깐 생각이 났을 뿐이지!”


그저 잘 봐 달라고 말하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잘 봐주는 것이 유의미한 결과를 갖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가 필요할까? 보쿠토는 그게 얼마인지 알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게 얼마든 지불할 수 있으므로. 


“……그리고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시험을 조금 미뤄주는 게 낫죠.”

“아!”


보쿠토가 눈을 번쩍 떴다. 완전히 깨달음을 얻은 표정인 게, 지금 당장 학과장에게 전화를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아카아시는 말이 그렇다는 것이며 그가 실행할 경우에는 어떤 응징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말을 조리 있게 얘기했다. 보쿠토가 터진 비누 방울 같은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저도 이제 슬슬 올라가 봐야겠어요. 보쿠토 씨도 들어가 보세요.”

“으응…….”


학과에 비리 저지르지 말란 말을 했다고 저렇게 시무룩할 인인가? 아카아시는 반쯤 마신 커피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도 안 한 사인데 보쿠토 씨 힘써서 이런 줄 알면 집안에서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왜? 있는 돈 있는 기회 쓸 수 있는 수단 쓰는 건데.”


보쿠토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집안에서는 이런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그 말을 들으며, 아카아시는 왠지 이쯤 되자 조금 재미있기까지 하여 슬쩍 미소를 안으로 말아 넣고 물었다.


“그럼 보쿠토씨는 왜 그 쓸 수 있는 수단 안 쓰셨는데요.”

“그.”


꿀 먹은 양 입을 다물고만 보쿠토를 보는 것이 생각보다 즐거웠다. 아카아시는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저도 쓰기 싫습니다.” 


그건 올바른 방법이 아니니까. 비겁하니까. 나쁜 짓이라서. 범죄니까. 그리고 보쿠토에게는, 그의 주위에는 저 모든 것이 ‘그래도 우리는 괜찮다’로 포장되어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쿠토는 줄곧 그 방법에서 눈을 돌려왔던 것이다. 아카아시는 머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보쿠토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가지지 못한 자가 고결한 것은 타락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깎아내리며 가진 자가 고결한 것은 진흙 속의 연꽃 보듯 칭송하는 것을 줄곧 혐오해왔는데, 어째서인지 오늘 그중에 절반을 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수한 유혹 속에서도 굽어지지 않은 것을 보는 경이가 짧게 그의 발을 적셨다.


“저 이제 올라가 볼게요.” 


아카아시가 뒤쪽의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쿠토가 뒤통수를 긁적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커피 고마웠습니다. 보쿠토 씨.”

“별것도 아닌데 뭐.”

“별 거예요.”


앞만 보고 숨차게 달려온 인생이었다. 모든 게 한 번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나자 발밑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바닥을 내려다보지도 않고 걸어가는데 아카아시만 그러지 못했다. 남들보다 고된 한 발짝 한 발짝이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다만 간혹 지쳤다. 하지만 그마저도, 피로를 느끼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타일러가며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아카아시는 조금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한 번 더 인사했다. 뒤돌아서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길, 등 뒤에서 보쿠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


“자네는 데이트도 참 답게 하네.”

“네?”

“월수금 딱딱 날짜를 지켜서 만나는 거, 아닌가?”


다섯시 반쯤 되면 연구실은 살짝 어수선해진다. 곧 저녁 식사를 할 때이므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실험은 자연히 뒤로 밀리고 남은 시간동안 간단히 할 일을 하게 되느라 여러 가지 소리가 나고, 그 소리가 어느 정도 커졌다 싶으면 딱 여섯시였다. 제각기들 저녁을 먹자 어디로 가자 얘기를 하는 틈바구니에서 자연스레 사양의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던 아카아시는 연구실 교수의 웃음기 어린 농담에 주춤하고 말았다. 


다들 그러고 보니 그렇다며 놀라는 걸 보고 교수가 그 정도 관찰력도 없이 무슨 실험을 하겠냐며 농을 던졌다. 모두 저녁 식사를 위해 우르르 연구실을 벗어날 때, 마지막으로 나미카와가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아카아시는 그 시선을 모른척하며 엘리베이터 한 대가 오갈 시간이 지났을 때쯤 연구실을 벗어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여기 별로야?”


맞은편에 앉아있는 보쿠토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뇨. 여기 음식은 맛있네요.”

“그럼 다른 게 문젠가?”

“음……. 그렇다기보다는 간파당한 게 좀 신경 쓰여서.”

“뭐가?”

“교수님이 아시더라고요. 저희 월수금 날짜 맞춰서 만나는 걸.”

“근데?”


보쿠토가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로 밥을 크게 한술 퍼 올렸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몫으로 나온 튀김덮밥의 꽈리고추 튀김을 젓가락으로 건드리며 고민했다. 


“그렇다고 곧장 날짜를 바꾸는 것도 너무 의식하는 것 같고…….”

“엥? 바꿔야 돼?”

“너무 의무감에 만난다는 느낌이 들키는 것 같잖습니까.” 


아카아시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보쿠토는 맹렬하게 튀김 덮밥을 입에 밀어넣는 중이었다. 아카아시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다. 새우 튀김을 크게 한입 베어먹은 보쿠토는 녹차를 향해 손을 뻗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토요일에 만나는 걸 몰라서 그러시는 거 아냐? 일주일에 네번이나 만나는데 이게 사랑해서가 아니면 가능한가.”

“네번이 문제가 아니라 규칙성이 문젭니다.”


아카아시는 말을 잇다 말고 잠깐 멈칫했다. 이걸 자신의 입으로 말하려니 약간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결국 아카아시도 녹차로 손을 뻗었다. 


“사귀는 사이에 보통 하는 ‘보고싶어서 만난다’라는 느낌의 이벤트가 전혀 없는 거잖습니까.”

“아…….”


보쿠토는 이제야 뭐가 문제인지 알았는지, 컵을 내려놓고는 양손에 젓가락을 한짝씩 나뉘어쥐었다.


‘생각 많아질 때의 습관 같은 건가.’ 

“그럼 어떡하지?”

“이번 주는 그냥 이대로 하고, 다음주부턴 3일에 한 번씩 보죠.”

“엑?”

“그럼 1일 4일 7일 10일…이렇게 되는데 홀수와 짝수가 번갈아 나오고 요일이 반복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들도 아무 생각 못하겠죠. 날짜도 고정되니 스케쥴 짜기도 편할테고.”

“엥. 그건 싫은데.”


보쿠토의 젓가락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한 것만큼 조금 당황했다. 보쿠토라면 숫자가 나온 시점에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응할 거라 생각했는데. 


“왜…왜요?”

“그럼 만나는 날 자체가 너무 적어지잖아. 지금까지는 일주일에 4번, 한달에 못해도 열 여섯번은 봤는데……. 그 계산대로 하면 딱 열 번 보는 거 아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카아시, 알바비 너무 날로 받으려는 거 아니고?”

“…….”


보쿠토는 불퉁한 표정이었다. 아카아시는 설마하니 전체 횟수 부분을 보쿠토가 인지하고 지적할 줄은 몰랐던 터라 잠깐 놀라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연구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우리 할머니만 패스하면 되는데, 이제.”

“…그도 그렇네요.”


연구실 사람들이 아카아시와 보쿠토의 데이트 규칙성을 가지고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헉. 설마 그 나미카, 뭐라더라, 하여튼 그 자식이 뭐라고 했어?”

“네? 나미카와 선배요?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아, 놀랐잖아. 그 뒤로 어때? 뭔가 수상쩍은 짓은 안 해?”

“뭐……. 묘하게 유들해지긴 했죠.”


아카아시는 꽈리 고추 튀김을 반으로 나눠 밥 위에 올리며 나미카와에 대해 생각했다. 그 갤러리에서의 파티가 있고 몇 주나 지났다. 나미카와는 그 전까지 사람 속 긁는 소리를 못해 안달이더니, 하룻밤 재워주고 난 뒤로는 기묘하게 눈치를 본다거나 기분나쁘게 상냥하게 군다거나 했다. 


‘보통 그렇게까지 태도가 바뀌나…….’


“얌전해졌단 말이지?”

“네?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보쿠토는 무언가 마음에 드는 듯 들지 않는 듯 뚱한 얼굴이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내가 손 안 써도 되고 좋네.”

“……마음에 안 든다고 다 치우고 그렇게 살지 마요.”

“내 맘에 안 드는 게 아니라고!?”

“그럼요?”

“야! 너는 나랑 결혼하기로 남들이 다 알 텐데 너를 무시하는 걸 내가 가만 놔두냐 그럼? 너를 무시하는 건 날 무시하는 거야!”

“절 무시하는 건 절 무시하는 거고요. 지금 보쿠토 씨 하신 말씀은 자기 마음에 안 든다 이거잖습니까.”


아카아시는 자신이 억지를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빠른 어조로 몰아붙였다. 보쿠토가 어버버 입만 버끔거리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숟가락 위에 튀김을 올려주었다. 보쿠토는 시무룩한 얼굴로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내가 잘못했어?”


그 한마디에 아카아시의 말문이 턱 막혔다.


갑자기 자신의 말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저 사람은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자신이 싫은 사람을 그냥 남겨두는 것과 그가 싫은 사람을 남겨두는 건 아주 다른 문제가 될지도 몰랐다. 육식동물에게 풀을 삼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있을까?


“그게 아니라……. 제 주위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런 사람 좀 내버려둔다고 저한테 큰일 생기는 건 아니니까요. 제가 알아서 잘하면 돼요. 아카아시가 나직하게 하는 말에 보쿠토가 입술을 삐죽였다. 


“세상에는 남 일에 관심 있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데요, 놀랍게도요. 아카아시 선생님.”


언젠가 그런 애들이 네 발목 잡고 늪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 보쿠토가 과거 아카아시 자신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걸 들으면서도 아카아시는 도리어 작게 웃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제각기 자기 몫의 그릇을 거의 다 비웠을 때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머쓱한 표정이었다.


“그…….”


오갈데 없는 손이 또 젓가락을 한 짝씩 나뉘어 쥐고 있다. 아카아시는 녹차를 찾으며 보쿠토의 말을 기다렸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어린 침묵이 지나고 나서야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부모님이 할머니한테도 벌써 말씀드렸나봐.”

“아.”

“할머니가 한 번 보자고 하셔.”

“생각보다는……이르군요.”

“아키오 자식이 날뛴 것도 있어서 오히려 일이 빨리 풀렸어. 잘됐지 뭐!”

“이번이 결승이겠지요?”


더는 없지요? 아카아시가 놀리듯 묻는 말에 보쿠토가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만 넘기고 몇달간 현상 유지만 해주면 돼.”

“할머님이 마음에 안 들어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별로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통과했고 막내 삼촌도 오케이했는데? 할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된다고 해.”

“어른들의 감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며 녹차로 입가심을 했다. 정말 생각보다 훨씬 이른 만남이었다. 계약에 명시되어 있던 것이니만큼 제대로 이행할 작정이지만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아 된다니까! 걱정 말래도!”


보쿠토가 가슴팍을 팡팡 두드렸다. 그의 얼굴에 기대와 희망의 빛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게 묘하게 어딘가 눈이 부셔서 아카아시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이게 끝나면 보쿠토 씨도 바라던 유산을 받는 거지. 나도 돈을 받고.’


그리고 그러면 이제 정말 끝이다. 보쿠토의 자택에서 조모를 뵙고 난 이후의 현상 유지라는 건 어떻게 할 건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나는 날짜는요?”

“아, 그건 너랑 얘기해보고 알려달래.”

“어르신들 되시는 날짜에 저희가 맞춰야죠.”

“그런가? 아, 진짜 이런 거 안 해봤으니 알게 뭐람.”


보쿠토가 모든 게 귀찮단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빤히 보다가 말을 돌렸다.


“할머님께도 누구 소개시켜드린 적이 없었습니까?”

“우리 부모님한테도 아무도 보여준 적이 없다니까? 그리고 애당초 왜 보여주냐?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보쿠토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가 아차한 얼굴이 되어 서둘러 자기 입을 막았다.


“아, 아니. 좋아했지. 좋아했어, 다들. 좋아서 만났어…….”

“어느 쪽이든 문제가 되니까 그 화제는 그만하죠.”

“아, 둘다 문제야?”

“보통 자기 남자친구한테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 진심으로 다 좋아했단 얘길 누가 합니까?”

“아…….”


사람 대하는 것을 보면 능숙한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때는 또 묘하게 맹한 것이 손이 간다. ‘그렇다고 이걸 하나하나 다 알려주고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과 ‘그렇다고 미래에 만날 사람에게 뺨맞게 하는 것도 그렇지 않나’하는 생각이 함께 떠올랐다. 


“그래도 저희 쪽에서 조율 가능하다면……. 2주 뒤가 제 기말고사라서요. 가능하다면 기말고사 끝나고 만나뵐 수 있겠습니까?”

“물론!”


보쿠토가 가슴을 펴곤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어린애의 치기라고 생각해야 할텐데 까닭을 모르게 그 모습이 의지가 되어서, 아카아시는 식당 공기가 답답하니 얼른 나가고 싶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쿠토가 아카아시 따라 서둘러 일어서다 물잔을 엎을 뻔했다. 







“아 이 새끼 보통 진상이 아니네…….”


널부러지듯 쓰러질 뻔한 것을 겨우 세워둔 나미카와를 보고서 보쿠토가 제일 먼저 한 말이었다. 상대가 술 취해 인사불성이라 생각했는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거침이 없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한 번 흘낏 보기는 했으나 별달리 책하는 말은 하지 않고 나미카와를 부축했다. 


“샴페인도 탄산수 수준이던데 이걸 뭐 얼마나 마시면 여기서 정신을 못 차려?”

“술에 약한가보죠.”


아카아시는 그렇게 대꾸하며 나미카와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모두 물 건너 불구경 하듯 쳐다보고 있기만 한 것이,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도움을 줄 뜻은 전혀 없는 게 분명했다.


‘설마 내가 수습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 갤러리에서 나미카와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보쿠토의 사촌이라는 아키오 뿐인 것 같았는데 그가 도움을 줄 생각이 없다면 남은 건 아카아시 자신뿐이다. 여기가 아주 낯선 갤러리나 클럽이었다면, 아니, 보쿠토와 되먹지도 않은 계약을 한 상태만 아니었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버리고 갔겠지만.


‘그 막내 숙부도 보고 있을 테니…….’


보쿠토와의 계약으로 자신이 할 일은 그럴듯한 애인을 연기해 집안의 모든 검사를 통과하고 결혼상대로 허락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술 취한 같은 학과 같은 연구실 선배를 갤러리에 버리고 간다’는 선택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의지할 것은 아키오뿐이었다. 별로 의지하고 싶은 상대는 아니지만 전혀 살갑지도 친하지도 않은 선배를 챙기느니 차라리 그 음험한 보쿠토의 사촌에게 의지하겠다. 아카아시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미카와를 깨우기 위한 손에 힘을 싣기 시작했을 때였다. 


쨍그랑! 


멀리서 얇은 유리잔이 박살나는 소리가 쩡하고 울려퍼졌다. 천장이 높고 사람들이 소리를 높이지 않는 갤러리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는 날카롭고 청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윽 하고 신음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아카아시는 그 목소리가 들어본 적 있다고 생각했다. 


‘설마.’


보쿠토가 나미카와를 들여다보던 자세에서 허리를 펴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미약한 짜증이 올라왔다. 


“이 새끼 약 하고 술 처먹고 난리친 건 아니겠지.”

“……한 번 가 보세요.”

“…….”


보쿠토의 얼굴이 못마땅함으로 낮게 일그러졌다. 알아서 잘 했겠지, 하고 못들은 척 하려고 했던 보쿠토였지만 곧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웨이터들이 흰 천과 구급상자를 들고서 그들을 지나쳐 다급히 뛰어갔던 것이다. 보쿠토는 잠깐만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만 남겨두고 유리 깨진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카아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요즘 한숨이 늘었어. 안 좋은데.’


옆에 있는 나미카와는 정신을 차릴 기미가 없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보쿠토나 갤러리 점원들의 반응을 보았을 때 다친 사람은 아키오인것 같았고, 그가 다친 상황에서 나미카와까지 챙겨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나미카와를 부탁할 만한 인물로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싫다…….’


앞에서 덤덤하게 군다고 해서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견디지 않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 흘려보내는 것뿐이다. 아카아시는 부당한 대우에 일일이 화를 내는 것에까지 할애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니던 대학원을 그만 둘 수도 없다. 그간의 노력이 열매 맺기까지 남은 시간은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제대로 토로하지 못한 화, 응어리, 어쩔 수 없는 체념의 결정체 같은 사람이 술에 취해 뻗어있는데 신나게 뺨 한대 때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얌전히 챙겨 가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나마 위안이라면 보쿠토가 있다는 것 정도일 테다. 그 거침없이 솔직한 사람이 이 선배에게 마구잡이로 말하는 것을 듣기만 해도 조금은 기분이 풀렸으니까. 


하지만 아카아시의 가냘픈 희망은 몇 분도 가지 않아 완연히 부서졌다.


“보…!”

“하, 아카아시. 이 자식 데리고 병원 좀 갔다 와야 겠다.”


돌아온 보쿠토는 뒤에 혹을 달고 있었다. 창백한 안색의 아키오였다. 잔을 떨어뜨려 깨뜨린 것을 무심결에 만졌다가 심하게 베였다며 손에는 피로 물든 붕대를 감고 있다. 아카아시는 척 봐도 심각해 보이는 그의 상처를 보며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아카아시 너는 택시타고 먼저 들어가. 미안.”


보쿠토가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통째로 그에게 쥐어주고는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보쿠토와 그의 사촌이 자리를 비우고, 이 자리의 주최가 먼저 돌아간 것을 본 사람들도 이 갤러리에 흥미를 잃은 듯이 삼삼오오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미카와의 팔을 어깨에 걸쳤다. 정신을 잃은 사람을 들어 올리자 무게에 숨이 턱 막혔지만 어렵지 않게 부축해 갈 수 있었다. 웨이터들이 차를 잡아주고 부축을 거들어줘 어렵지 않게 택시에 타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나미카와 선배. 선배! 정신 좀 차려보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어려운 건 나미카와의 집주소를 캐내는 일이었다. 인사불성이 된 나미카와는 자기 입으로 집주소를 말하기는커녕 눈을 뜰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아카아시는 한 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싫어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다 한 귀로 듣고 흘리지 말고 사는 곳 정도는 알아놓을 걸…….’


결국 아카아시는 자신의 자취방 주소를 입에 담아야 했다.


*


[집 도착했어?]

[네. 사촌은요?]

[개자식이 엄살 피웠어]


아카아시가 뭐라고 답장해야할지 고민할 때 벨소리가 울렸다. 아카아시는 화들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통화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수화기를 가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미카와는 아카아시의 자취방 바닥에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침대의 이불 한 장을 끌어와 덮어주고는 발코니 쪽으로 나갔다. 밤이 되자 밤공기가 서늘하게 뒷목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 이 자식이 별것도 아니면서 난리쳐서 병원까지 왔어!》

“심하게 다친 게 아니었으면 다행이네요.”

《다행은 무슨……. 너는? 잘 들어갔어?》

“네. 집 왔어요.”

《그 자식은? 선배?》

“데려왔어요.”

《……?》


보쿠토가 아무 말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 선명히 떠올랐다. 아카아시는 한숨 속에 야트막한 웃음을 섞었다. 살짝 입김이 맺혔다. 


“뻗어서 정신은 못 차리지, 아는 사람은 없지……. 보쿠토 씨 사촌이 챙겨줄 것 같지는 않고요. 자기 집 주소도 말을 못하니까 어쩔 수 없이.”

《아니 그렇다고 집에 들여? 길에 버려!》

“어떻게 그럽니까.”

《너 그렇게 상냥한 애였어!? 나한테 그 반만 해주지!》

“지금 내가 왜 나미카와 선배를 데려왔는지 전혀 모른다는 건 알겠네요.”

《뭐! 왜! 뭐!》

“보쿠토 씨의 그 대단한 하루키 숙부님이 보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같은 과 선배를 내치고 갑니까. 매정한 애는 조카사위로 싫다 하시면 어떡해요?”

《아…….》

“그래서 사람이 죽을힘 다해 들쳐 메고 왔더니 한다는 말이 자기한테 더 잘하라고……. 내참.”

《……나 때문이야?》

“그럼 보쿠토 씨 때문이지 누구 때문입니까?”


확 풀죽은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아카아시는 눈을 내리떴다. 그 아키오나 다른 사람이 자길 싫어한단 이야길 할 때는 참 답지 않다 싶을 만큼 아무렇지도 않더니 자기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선배를 굳이 집에 들였다는 얘기에는 이렇게 축 쳐진다. 어린애가 순간순간 온 마음을 기울일 때는 그것이 어떻게도 숨겨지지 않아서 사랑스러운 것처럼 보쿠토도 그랬다. 


‘나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인데.’


누군가가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꿈쩍 않는 것은 그의 마음이 강건하기 때문에, 자신 탓에 누군가가 싫은 일을 했다는 것에 무너지듯 구는 것은 그의 마음이 솔직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도 꺾여나가지 않고 변색되지 않은 것이 바로 앞에서 찬란히 빛나는 걸 보는 건, 조금 눈이 시렸다. 


“그냥 해본 말입니다. 그보다 지갑은 어떡할 거예요. 그 땐 저도 정신이 없어서 가져와버렸는데.”

《아……. 다음에 만날 때 신분증만 챙겨줘. 그거 재발급 귀찮아서.》

“다음 주에 보기로 했잖아요. 그 때까지 괜찮겠습니까?”

《그치만 약속된 날 아닐 때 찾아가면 아카아시 싫어하잖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이 정도는 양해해드릴 수 있어요.”

《나도 남 좋은 일 할 줄도 알거든!》


보쿠토가 팩 소리쳤다. 어떤 표정일지, 목소리만 들어도 눈에 선했다. 아카아시는 난간에 기대어 거리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곧 겨울이 오려는지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사람들의 호흡이 영혼처럼 아른거리고 있었다. 


보쿠토는 통화를 끊을 때까지 다음 주에 약속한 날 만날 것을 거듭 다짐했다. 아카아시가 괜찮다는 말을 두어 번 더 했지만 보쿠토는 굳센 목소리로 다음 주에 꼭, 이라고 대답했다. 


하여튼 오라고 할 때는 안 와요. 아카아시는 전화가 끊어진 액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펜스에 기대어 야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둔 천에 빛나는 수가 놓여있는 것처럼 빛들이 아른거리는 모양새는 큰 그림을 작정하고 그린 것처럼 아름다웠다. 겨울이 다가오는 가을밤이 이상하게 춥지 않았다. 






“이야, 우연이다!”

“우연은 개뿔…….”


보쿠토가 이죽거리며 중얼거리는 소리는 다행이 아카아시의 귀에밖에 들리지 않았다. 


“선배 오시는 줄 몰랐네요.”

“나도 야~! 이런 데서 너를 보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깔보는 듯한 표정이지만 평소보다 훨씬 더 애쓴 기색이 역력했다. 아카아시는 옆의 보쿠토를 흘끗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만사 관심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줄곧 ‘정말 하나도 이해를 못하겠다’고 떠들던 현대 미술 작품을 갑자기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으니까. 


“옆에는 그 애인?”

“예. 그렇게 됐네요. 혼자 오셨습니까?”


나미카와는 이쯤에서 적당히 보쿠토와 인사를 나누리라 생각했는지, 아카아시의 야멸찬 화제 전환에 잠시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나는 뭐 친구 얼굴 보고 그러려고.”

“친구?”


보쿠토가 그 소리에 슬쩍 끼어들었다. 그 어조가 명백히 ‘네가 이런 데에 친구가 있어?’ 였기 때문에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옷깃을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만류해야 했다. 보쿠토는 다시 흥미를 잃고 그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 나미카와의 ‘친구’가 등장했을 때엔 보쿠토도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사람이자 보쿠토의 바로 그 사촌.


“아키오?”


보쿠토 아키오였다. 


“어~! 코타로. 왔어? 언제 왔냐. 왔으면 인사부터 해주지!”

“그쪽 둘이 언제부터 친구였지?”


사촌이 살갑게 인사하며 다가왔지만 보쿠토가 노골적으로 웩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보쿠토의 사촌, 아키오가 내쳐진 자신의 손을 보며 살짝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방 웃는 표정으로 바꾸었다. 


“학업 성취가 뛰어난 인재를 놓칠 수는 없지 않겠어? 너는 경영엔 별로 참가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

“아, 돈 주고 샀어?”


아키오가 관대한 척 말하는 것을 단칼에 끊은 보쿠토가 이제야 이해했다는 명쾌한 얼굴로 두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상쾌한 모욕에 아키오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가 겨우 폈다. 


“우정에 돈을 운운하는 건 서운하지. 그보다 숙부님은 만나 뵈었어?”

“어, 삼촌은 들어올 때 봤어.”

“우리 장래의 형수님 보곤 뭐라셔?”

“맘에 든대. 뭐 나만 곤란해졌지. 내가 개짓거리 하면 뻥 차버리라고 우리 아카아시한테 자꾸 농담을 해서 말야.”


보쿠토의 손이 아카아시의 허리를 단단히 휘어감았다. 두 사람이 만나고 가장 가까이 접촉한 순간이었다.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려다 자연스레 내쉬고는 보쿠토의 가슴팍에 몸을 가까이 했다. 


“아하하, 이제 진짜 곤란해진 건 나네. 네가 정말 이대로 짠 하고 결혼해 버리면 내 유산도 전부 너한테 갈 거 아냐.”

“전부는 아니지. 고작 섬 하나 가지고 뭐 그렇게 엄살이야?”


보쿠토가 한쪽 눈썹만 치켜 올리며 핀잔 던지듯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키오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보쿠토의 그 말만 기다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키오가 웃음소리를 섞어 보쿠토의 어깨를 툭 쳤다. 


“너야말로 고작 섬 하나 때문에? 응? 평생 가는 사람 안 막고 오는 사람 안 막더니 갑자기 아무나 데려와서 여기저기 소개 시키고 난리잖냐~!”


‘아하하’하는 경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문장이었지만 그 말에 같이 웃은 사람은 나미카와 정도였다. 보쿠토는 멀뚱한 얼굴로 아키오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지나가는 웨이터에게서 샴페인이 찬 것으로 잔을 바꿨다. 그 때까지도 아키오와 나미카와는 즐거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고 있었다.


“아키오. 좋은 자리 아니냐? 오랜만에 삼촌도 오셨고.”

“그렇지?”

“너도 친구인지 하인인지 데리고 있고.”


보쿠토가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잔에 든 샴페인이 넘치기 직전에 정교할 만큼 섬세하게 멈춘 보쿠토가 그 잔을 아키오에게 불쑥 내밀었다. 아키오가 당황해서 잔을 받자마자 안에 든 샴페인이 아키오의 손에 쏟아졌다.


“그러니까 적당히 해라. 좋은 자리 망치지 않게.”


아키오가 옷에 묻은 샴페인에 호들갑을 떨 때 보쿠토가 그대로 아카아시를 데리고 두 사람 앞에서 벗어났다. 뒤쪽에 가벼운 소란이 일었지만 아카아시만 한 번 뒤를 흘끗 돌아보았을 뿐, 보쿠토는 보폭이 큰 걸음걸이로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앞을 향해서만 걸어갔다. 


*


“……조심하세요.”

“하, 진짜—!! …응?”


갤러리 바깥에 마련된 테라스에서 격렬하게 부채질하며 샴페인 두 잔을 연거푸 비운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작은 목소리에 그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는 열이 오른 보쿠토의 얼굴을 보며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입에 담고 만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를?” 

“저 사람이요. 이름이 아키오인가.”

“걔를 조심하라고?”


보쿠토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육식과 맹수가 조그만 설치류를 조심하란 충고를 들을 때에나 저런 표정이 나올 것이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이 좋지 않습니다.”

“걔가 썩은 생선 같은 눈빛인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쥐도 궁지에 물리면 무는 법이잖습니까.”


그 말을 들은 보쿠토가 처음엔 얼빠진 표정을 짓다가 나중에는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아카아시는 즐거운 얘기를 한 게 아니라며 보쿠토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보쿠토는 들은 척도 않고 신명나게 웃다가 겨우 허리를 폈다.


“너 진짜 내 애인 하기에 정말 완벽한 애네.”

“갑자기 뭡니까…….”

“그래서 결국 그 자식이 쥐새끼란 거 아냐?”


자기가 말하고 또 웃겼는지 배를 잡고 웃는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유가 그렇단 법입니다.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유산이 문제가 아니라 보쿠토 씨를 싫어하는 모양인데.”

“저 자식이 날 싫어한 건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일걸.”


아카아시는 말을 해놓고도 아차 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보쿠토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성격 나쁘단 소리 한 번 했을 땐 세상 무너진 듯이 굴더니.’


그러면서 누가 자길 싫어한다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익숙한가보네요.”

“정확히 말하면 누가 날 싫어하는 거엔 익숙하지.”

“……그렇습니까?”

“응. 근데 난 잘못한 게 없으니까? 뭐 맘대로 하라고 내버려두고 있지만.”


보쿠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카아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지간히 제멋대로인가 싶었더니 묘하게 마음이 여린 구석도 있고, 푹하고 찌르면 찌르는 대로 난리가 나는 사람인가 싶었더니 또 의외로 몹시 단단하다. 


“근데 그거야말로 내가 할 말 아닌가? 네가 더 조심해야겠는데?”


보쿠토는 다 비운 샴페인잔 두개를 서로 총총 맞부딪히는 장난을 치며 말했다. 아카아시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요?”

“아키오는 날 공격할 필요가 없어. 뭐 내가 싫기야 하겠지만. 너만 없어지면 되니까 네 선배 자식을 섭외한 거 같은데?”

“그걸 그쪽이 그렇게 담담하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잠자코 보쿠토의 말을 듣던 아카아시가 험악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보쿠토에게 바짝 다가가 그의 타이를 손에 얽어 쥐었다.


“곧 있으면 대학원도 졸업인데 이 아르바이트 때문에 망치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아, 아니 왜 나를!? 왜 나한테 뭐라고 해!?”

“알아서 지켜주세요. 알겠습니까.”

“그거야 나도 당연히 하는 건데……. 아니 내 말은……. 내가 그렇다고 너희 연구실에 죽치고 앉아서 저 새끼가 허튼짓 하나 안 하나 살펴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


보쿠토가 언성을 높였지만 그게 듣기 싫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쿠토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발을 굴렀다. 


“넌 내가 진짜 그러면 질색할거면서!”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러기만 해봐요. 아카아시가 도끼눈을 뜨고 보쿠토를 노려보았다. 보쿠토의 눈동자에 분함이 한가득 들어찼다.


“나처럼 괄시받는 고용주도 어디 없을 거다. 아까 전엔 보니까 너네 선배가 아키오 손도 닦아주고 옷도 닦아주고 하던데.”

“저도 그쯤은 해드리잖아요.”

“남들 볼 때만 해주잖아!”


보쿠토가 버럭 외치다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아카아시는 그 표정을 보고 설마 다른 사람이 야외 테라스에 들어왔나 싶어 휙 돌렸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보쿠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사람 놀라게 그런 표정을……. 보쿠토 씨?”

“아, 아무것도 아냐.”

“술 너무 마신 거 아닙니까?”

“아냐! 아니라고. 샴페인이 무슨 술이야.”

“술 취한 사람 맞는 거 같은데.”


아카아시가 눈살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보쿠토가 양손을 푸드덕거렸다. 본인이 아니라고 저렇게 열심히 주장하는데 달리 어쩔 방도야 없다. 아카아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기만 했다. 


그리고 정말로 술 취한 사람은, 이 야외 테라스가 아닌 실내에서 나타났다. 












“여긴 갤러리 아닙니까?”

“막내 삼촌이 예술을 좋아해.”

“어쩐지…….”


아카아시는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오전부터 보쿠토에게 끌려다니며 맞춘 스타일이었다. 세미정장에 타이는 없이, 가볍지만 격식은 챙긴 차림새에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으나 설마하니 갤러리로 가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저 집안에서 집 한채 외의 유산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모친 생전에 표출하는 기질을 생각해보면 보통 사람은 아니었을 것을 알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클럽이 나았나?”

“아뇨. 그런 덴 가본 적도 없어서요. 차라리 갤러리가 낫죠.”

“…가본 적이 없어?”

“네. 보쿠토 씨는 자주 가보셨나 봐요.”

“아, 아니! 나는! 나는! 그 뭐냐! 친구! 아! 쿠로오 따라서!”

“갈 수도 있죠…….”


그렇게까지 변명할 일 아닌데요, 아카아시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오히려 그 덤덤함 때문에 보쿠토는 더 변명을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보쿠토의 열화와 같은 자기변호는 그 열렬하게 매달리는 모습에 아카아시가 질겁을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 코타로~! 왔냐!”


두 사람이 그렇게 입구에서 한참 투닥거릴 때 안쪽에서부터 누군가가 달려 나왔다. 아카아시는 남자를 보자마자 보쿠토가 말한 그 ‘막내 삼촌’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보쿠토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가진 듯한 황금색 눈동자,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편견에 딱 들어맞는 고상한 그늘이 진 눈매, 훤칠한 키에 마릇한 몸까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삼촌!”


이 파티에 참석한다고 얘기한 자리에서도 그가 있었다고 하니 바로 며칠 전에도 얼굴을 본 사이일 텐데도 나이 차이 얼마 나지 않는 조카를 몹시 반가워하는 얼굴에는 애정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었기에 갤러리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걸어가고 있었다. 둘을 보고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보쿠토의 막내 삼촌은 그들에게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고는 보쿠토와 아카아시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형이상학적인 현대 미술 작품들로 조화롭게 채워져, 은은한 불빛을 받으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샴페인이나 간단한 간식거리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오가며 그림에 대해 간단한 감평을 남기는 소리가 속살속살 들려왔다. 


“그래서 이쪽이……우리 코타로의, 드디어 마침내 피앙세이신가.”

“처음 뵙겠습니다.”


‘드디어 마침내’라는 수식어까지 줄줄이 붙다니 그간에 보쿠토가 어땠는지 알만도 했다. 아카아시가 슬쩍 쳐다보는 눈길에 보쿠토가 황급히 손을 내젓다가 헛기침했다. 


“커흐흠. 삼촌, 이쪽은 아카아시 케이지. 아카아시, 이쪽은 우리 막내 삼촌, 하루키 삼촌.”

“흐응……. 피앙세라면서 아직까지 ‘아카아시’라고 부르네? 응?”


보쿠토의 막내 삼촌, 하루키가 짓궂은 표정으로 놀리듯이 말했다. 보쿠토가 뜨끔한 표정을 짓지만 않았다면 그럴싸하게 완성되었을지도 모른다. 보쿠토의 표정을 보고 하루키가 의아한 얼굴을 하는 사이에 아카아시가 날렵하게 보쿠토의 손을 깍찌 껴 붙잡았다. 


“제가 많이 매달려서, 저만 자꾸 코타로라고 부르네요.”

“그, 그게 아니라.”

“오호…….”


하루키는 잔뜩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가락을 꽉 힘주어 쥐었다. 겨우 사태 수습에 동참한 보쿠토가 크게 헛기침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화제를 돌렸다. 


“그, 그래서. 삼촌 마음에 들어? 우리 아카…케이지?”

“왜 우리 장손이 갑자기 내 눈치를 보는 척을 하실까?”

“보는 척이 아니라 나는 항상 신경 썼잖아!”

“무슨 소리람? 이 삼촌이 하는 말은 전부 귓등으로 듣고 흘렸잖냐.”

“아 삼촌!”


아카아시는 놀라움을 속으로 잘 갈무리 하며 둘의 만담같은 대화를 지켜보았다. 보쿠토가 은근히 애교와 응석이 많은 성미라는 걸 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이 하루키 앞에서는 그 어리광의 정도가 남달랐다. 막내 숙부와 첫 조카이니 나이 차이도 그다지 나지 않아 형처럼 생각하며 자란 내막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이 녀석아. 사람을 앞에 모셔두고 그런 걸 물어보면 못 쓴다.”

“아 맘에 들면 그냥 든다고 말하면 되잖아! 나쁜 말도 아닌데!”

“나쁜 말이든 좋은 말이든 사람 평가하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좋은 말도 못 해?”

“어허, 요 녀석이.”


아카아시는 무대 위의 희극이라도 보는 것처럼 담백한 얼굴로 두 사람의 대치를 쳐다보았다. 


‘좋은 말이 아니니까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기서 좋은 말이면 못할 게 뭐가 있냐고 계속 밀어붙이는 보쿠토의 담대함도 보통이 아니다. 오늘 저 막내 숙부에게서 자신의 애인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반드시 듣고 말 작정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뭐 하지만 그래, 굳이 말을 하자면.”


하루키가 지긋이 웃었다. 아카아시는 자기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는 느낌에 눈을 깜박였다. 하루키가 가볍게 아카아시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장손 잘 좀 부탁드립니다. 아카아시 씨. 이 녀석이 성격이 급해서 벌써 부모님 인사시키고 난리인데 아카아시 씨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그냥 뻥 차버리세요.”

“아 삼촌! 왜 그런 말을 해!”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아니 그리고 삼촌은 아카아시 뭘 봤다고 벌써 날 부탁한다고 하냐!?”

“요 녀석이 좋은 말 해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보쿠토가 아차 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한 번 흘끗 바라보았다가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뻥 차버리는 일은 없겠지만요.”

“아니 근데 삼촌이 누구한테 그런 말 한 적 없었잖아!”

“좋은 분 데려왔으면 좋은 말 하는 거지. 네 말대로 좋은 말도 못 할 거야 있겠냐?”

“아카아시 얼마나 봤다고!?”

“척 보면 알지 얌마.”


하루키가 보쿠토의 콧잔등을 한 번 튕기고는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좋은 시간 보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러면서 아카아시 그를 지긋이 한 번 바라보고는 더 방해하지 않겠다고 자리를 뜨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까닭 모를 묵직함을 느끼며 눈인사했다.


“허…….”

“안으로 들어가서 뭐라도 좀 마시죠.”

“허어…….”


보쿠토는 실로 신묘하다는 얼굴로 아카아시를 뜯어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짧은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보쿠토가 원하는 대화를 끝내기 전에는 다른 일을 하지 못할 거란 걸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왜요. 또 뭐가 그렇게 신기하십니까.”

“삼촌이 뭐 좋은 소리 하는 거 처음 봐. 만난 지 10분도 안 됐잖아? 네 어딜 보고 좋다고 한 거야?”

“지금 굉장히 실례인 말 마구잡이로 하고 있는 건 알죠?”

“신기하네…….”

“보쿠토 씨가 면전에서 좋은 말 하라고 몰아세우고 여긴 갤러리인데 어지간해선 좋은 말해주시죠.”

“우리 삼촌은 안 그래.”

“그러신가요. 제가 정말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어디가!?”

“…….”


이걸 한 대 때려, 말아? 아카아시는 기가 막힌단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뜯어보기에 바쁘다. 아카아시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자신의 이마를 꾹 누를 때 보쿠토가 깨달았다는 얼굴로 자신의 손을 짝하고 마주쳤다.


“얼굴인가?”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들어가죠. 목 마릅니다.”

“무슨 말만 하면 헛소리래. 네에, 네에~!”


선생님 말씀은 제가 잘 들어야겠죠! 보쿠토가 소년처럼 혀를 에베베하고는 기꺼이 샴페인 두 잔을 집어 들고 그에게 왔다. 아카아시도 결국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이 고상한 파티는 대부분이 아카아시의 예상 안에서 굴러갔다. 중간쯤에 보쿠토의 사촌이 나타났고 보쿠토의 속을 득득 긁고 나갔으며 거기에 보쿠토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응했다. 그네들의 막내 숙부의 중재가 없었으면 또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카아시가 보쿠토와 함께 갤러리의 절반쯤 둘러보았을 때야, 아카아시는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어~! 아카아시?”


어색한 연기가 그를 보고 놀란 척하는 것뿐이라는 게 훤히 드러나는 얼굴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아카아시가 자신도 모르게 옆사람의 손을 꽉 쥐었다. 보쿠토가 흘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대꾸하지 못했다. 보쿠토가 슬쩍 고개를 기울여 그에게 속삭였다.


“너희 실험실 그 새끼가 왜 여기 있어?”

“그걸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나는 안 불렀다?”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사이에 나미카와가 웃는 낯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손에 있는 샴페인 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








“그 파티에…….”

“파티입니까? 무려?”

“아, 아니. 모임. 모임! 모임에.”


보쿠토가 황급히 단어를 수정했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걸 물릴 수는 없었다. 아카아시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미간에 손을 올렸다. 그런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았으나.


“그 모임에 우리 막내 삼촌이 오는데.”

“대가족이군요.”

“막내 삼촌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뛰쳐나갔다가 지금은 집만 한 채 받고 딴 건 물려받을 생각 없다고 한 사람이거든.”

“흠.” 


아카아시는 머리 속으로 보쿠토 집안의 가계도를 그려보았다. 집안 유산 대부분을 물려받기로 되어 있을 이 사람과 아마도 적당히 나눠 받을 사촌. 유산의 분배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음에도 이 복마전에서 발을 빼겠다고 선언한 막내 삼촌.

 

‘아직 삼촌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아직 미혼일 수도 있겠군.’

“거기다 막내잖아. 그래서 우리 할머니가 엄청 그런단 말이지.”

“유산은 아무것도 안 받기로 한 막내아들이란 말이군요.”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가만히 두기만 해도 절로 눈길이 가는 막내아들일 것이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랑도 좀 친하고.”

“그런데요?”

“지금까지 집에 아무도 인사 안 시킨 건 막내 삼촌 탓도 있거든.”

 

저 인사시키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아마 지금까지 보쿠토가 만나온 사람들 얘기일 것이다. 보쿠토가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아카아시는 놀란 내심을 갈무리하며 메밀 국수를 입에 집어 넣었다.

 

“삼촌이 내 애인들 다 싫다고 뭐라 했어. 삼촌이 그러니까 나도 좀 그렇고 할머니도 그렇고…….”

“그러니까 예선전 뒤로 본선이 그냥 본선이 아니라 준결승전부터 해야 한다는 거군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멀건 국수를 내려다보았다.

 

“그 삼촌 분을 파티 말고 다른 장소에서 따로 만나 뵙는 건 안 되는 겁니까?”

“삼촌은 편들어 주는 거 싫어해.”

“……지금 당신은 나갈지 안 나갈지도 모르는 그 사촌 파티에 나와주는 거 자체가 사촌 편들어 주는 거 아닙니까?”

“아, 그게 내가 나와버린다고 해서 삼촌이 오기로 한 거거든.”

 

보쿠토가 해맑게 웃는다. 아카아시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표정을 본 보쿠토가 그제야 헛기침했다.

 

“아니 그럼 거기서 삼촌도 있는데 내가 안 간다고는 못 하잖아!”

“허……. 그래서 그 삼촌이 절 마음에 들어 하셔야 된다 이거군요.”

“뭐 이젠 삼촌이 맘에 안 들어해도 어쩔 수 없지. 밀고 나갈 거야. 나갈 건데……. 그……. 출석하는 성의? 정도랄까?”

“얼굴만 비추면 됩니까?”

“응! 응응!”

 

보쿠토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겠습니다…….”

“진짜로 미안해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지친 표정 하지 마아…….”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고개를 들어본다. 보쿠토가 애원과 울상이 섞인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원한다는, 사촌한테 갈지도 모른다는 유산 말입니다.”

“응.”

“보쿠토 씨가 그 사촌에게서 사 오면 안 되는 겁니까?”

“걔가 날 얼마나 싫어하는데. 자기 손에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 자식은 죽어도 안 팔아.”

“방법이 전혀 없습니까?”

 

보쿠토는 지금까지 어린애처럼 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완연히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 되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방밥이야 있겠지. 만들면 되지.”

“그런데 안 하는 거군요.”

“그 자식도 할머니 손자니까.”

 

이번엔 아카아시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테이블 위에 침묵이 흐른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보쿠토가 남은 락교를 하나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유산을 누구한테 줄까 고민하는 게 아냐. 나한테 줄 거야. 그냥 당신 생전에 내 짝을 보고 싶어서 으름장 놓으시는 거지. 그러니까 난 할머니 소원 들어드리는 거라고, 유산은 부수적인 거고.”

“거짓말로 들어드리는 소원 아닙니까?”

 

보쿠토는 남은 락교를 하나 더 입에 넣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소원 이뤄드리고 싶다는 손자 마음이 중요한 거야.”

“뭐 그렇다고 하죠.”

 

다 먹었으면 일어나죠, 그렇게 말한 아카아시가 자신 몫의 쟁반을 집어 들려고 했지만 그보다 보쿠토가 더 빨랐다. 보쿠토는 자신의 쟁반을 왼손에, 아카아시의 쟁반을 오른손에 들고는 놀랍도록 균형감각 있는 걸음으로 퇴식구를 향해 걸어갔다. 쟁반 두 개를 나란히 집어넣은 보쿠토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잘 안다고?”

“어디서 찾아 보셨나보네요.”

“요즘엔 이런 거 동영상도 있더라? 학생 식당에서 밥 사는 법이랑 다 먹은 거 처리하는 법 이런 거.”

 

농담이었는데 정말로 찾아본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기가 막힌단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쿠토가 또 뭐가 문제냐며 달려든다. 그걸 겨우 진정시킨 아카아시는 학생 식당 1층에서 커피를 사들었다.

 

“저는 이제 다시 연구실 가봐야겠습니다.”

“주말에 나와주는 거지?”

“별 수 없죠. 준비는 맡기겠습니다.”

“나만 믿어!”

 

보쿠토가 함지막하게 웃는 얼굴이 되어 가슴을 두드렸다. 노을이 저물 때 골목에서 헤어지는 어린애처럼 손을 마구 흔들며 자신의 스포츠카를 향해 뛰어가는, 스물 중반이 훌쩍 넘은 남자…….

 

“하아…….”

 

말도 안 되는 아르바이트를 받아들인 게 잘못이었을까? 하지만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등을 돌렸다.

 

*

 

“어음, 아카아시?”

 

내일 있을 수업에 대비해 논문을 정리하던 아카아시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엔 나미카와가 조금 비딱한 자세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엊그제도 저 페이지더니.’

 

연구실은 모두 퇴근하고, 아카아시 그와 나미카와 뿐이었다. 대개는 아카아시가 정리를 하고 들어가는 편인데 웬일로 나미카와가 늦게까지 남아있다. 아카아시는 나미카와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을 붙이며 딴청을 피우느라 죽죽 긋고 있는 형광펜을 흘끗 바라보았다. 제법 오래 기다렸는지 메마른 형광펜에서는 아무 색도 나오지 않았다.

 

“아직 안 가셨네요? 무슨 일이십니까?”

“너 오늘 그……. 찾아온 사람 말야.”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을까? 연애 얘기 말고는 할 말이 없나? 심지어 한 번도 사이가 좋았던 적이라곤 없는 이 선배까지? 아카아시가 흐릿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미카와는 자신이 할 말에 집중하느라 그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지난 번에 그 사람 아냐?”

“지난 번이요?”

“왜 그……. 너 편의점에서…….”

“아, 선배 작은할아버지 장례식 가신 날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 아! 어, 그래. 그 날 말야.”

“아, 큰할아버지라고 하셨는데 제가 착각했네요. 그 날이죠?”

 

설마 요 며칠 사이에 또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아니겠죠? 아카아시가 걱정과 염려를 담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미카와의 표정이 소태 씹은 듯이 변했다가 겨우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도 순간적으로 헷갈…렸네…….”

 

그야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없으니까 그렇겠죠. 아카아시는 속으로 비꼬듯 대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데요, 왜요?

 

“아, 아니. 그냥 혹시나 하고~! 무슨 사이야?”

 

나미카와가 슬쩍 묻는다. 아카아시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 사람이 왜 이제 와서 호기심을 가지는지 알 것 같았다. 그 편의점에서 만났을 때는 보쿠토도 아카아시도 삼각김밥과 병에 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땐 나미카와의 눈에 보쿠토라는 존재가 눈에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휘황찬란한 스포츠카를 끌고 왔지.’

 

이 나라에서 주로 생산되는 차들과는 모양새부터 아주 다른 낮고 날렵한, 그리고 미려한 곡선을 그리는 차체는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척하니 알아볼 만큼 고가의 물건이었다. 또래로 보이는 나잇대의 남자가 그런 차를 끌고 나타났는데 연구실 후배와 아는 사이인 듯 보이니 호기심이 치솟은 것이다.

 

“애인입니다.”

“아, 애인이……뭐라고!? 애인!?”

아카아시는 나미카와가 왜 놀라는지도, 왜 관심을 가지는지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아니. 나는 놀라서……. 너 누구 만나는 사람도 없지 않았냐? 어디서 만났어?”

“쿠로오 선배가 소개해주셨습니다.”

“아.”


쿠로오의 이름까지 나오자 나미카와가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떨렸다. 그리곤 서둘러 먼저 들어가겠다는 인사를 남겨놓고서 후다닥 짐을 챙겨 연구실을 나선다. 아카아시는 나미카와가 몇 번 들춰보지도 않은 것 같은 논문 뭉치를 흘끗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쿠로오가 아직 학교에 있었을 때 나미카와는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았다. 아카아시를 향한 노골적인 이죽거림이 시작된 것도 쿠로오가 졸업하고 난 뒤였다. 평소 무서워하던 선배의 이름이 나오니 기가 죽어 달아난 꼴을, 아카아시는 되짚어보지도 않고서 다시 논문에 집중했다. 주말에도 보쿠토에게 끌려다녀야 하니 시간이 있을 때 좀 더 힘을 내야 했다. 







아카아시는 퀭한 얼굴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실험실 사람들과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가는 길, 그만 붙잡혀 학교 정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먼저 떠나는 실험실 사람들이 그를 흘끗거리는 것이 여기에서도 눈에 들어왔다. 아카아시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야! 야! 그렇게까지 좌절할 일이야!? 내 얼굴을 보는 게 그렇게까지 절망할 일이냐고!”

“하…….”


그의 앞에서 양손을 수선스레 놀리는 사람은 보쿠토였다. 아카아시는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깜깜한 암흑 속에 자신의 정신을 내맡겼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보쿠토는 한참 입술을 삐죽거리며 발을 구르는 중이었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진짜 질색하냐, 너…….”

“모처럼 일 안 하는 날이었는데 고용주를 만나면 보통은 이렇습니다.”

“보통은 고용주한테 티 안 내거든!?”


불만스레 빽 소리친 보쿠토는 금방 어깨를 모으고 가련한 표정을 빚어냈다. 아카아시가 노골적으로 ‘으’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보쿠토는 개의치 않았다.


“나 좀 살려주라.”

“제 수당은 제대로 결제되게 변호사와 처리해두셨습니까?”

“…….”


애걸하는 표정이던 보쿠토가 잠깐 뻣뻣하게 굳었다. 보쿠토는 입술을 한 번 악물곤 다시 애절한 표정을 만들었다. 


“해놨어.”

“거짓말하지 마시죠.”

“아 진짜 이럴래? 너 확 그냥…….”

“그냥 뭐요?”

“데이트 때마다 파스타만 먹는다.”


그 말에야 아카아시가 멈칫했다. 보쿠토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감싸 쥐고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데요.”

“부모님이 네가 진짜로 맘에 드셨나 봐.”

“그런데요.”

“그래서 좀……. 자랑을 하셨어…….”

“저희 어제 만나 뵈었는데요? 어제!”

“그러니까 오늘 낮 동안 자랑을 하셨다는 거잖아.”

“그래서요.”


아카아시가 팔짱을 끼고서 물었다. 보쿠토가 어색하니 웃음을 그렸다.


“작은 아버지네한테도 자랑을 했나 봐…….”

“어제 만났는데요!?”

“그러니까 오늘 낮 동안 했다고! 하여간 그래서……. 사촌 그 새끼가…….”

“…….”


아카아시가 ‘말이나 해 보시죠. 들어는 드리겠습니다.’라는 얼굴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가 손가락 끝을 서로 맞대고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번 주말 저녁에 다 같이 만나자고 자리를 또 만들어서…….”

“파업하겠습니다.”

“야! 야야야, 아카아시이~!”

“이거 놓으시죠.”


아카아시가 매섭게 말하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보쿠토의 팔 힘을 이기지는 못했다. 아무리 뿌리쳐도 떨어지지 않는다. 아카아시는 욱신거리는 팔뚝을 붙잡았다. 보쿠토는 솜털을 쥐고 있다는 듯한 손짓에 완전히 애걸하는 표정이었다. 


“제발! 이거만 나가주면 성과금! 성과금 줄게!”

“성과금이요? 요즘 회사 성과금은 1000 퍼센트 단위인 건 아십니까?”

“……그…….”

“못하시겠으면 손 놓으시죠.”

“아 해! 한다고! 줘! 줄게!”

“자세한 경위를 들어보도록 하죠. 그 전에 식사부터요. 연구실 다시 가봐야 하니까 빨리 먹을 수 있는 걸로요.”


아카아시가 정문 안쪽으로 고갯짓했다. 학생 식당으로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보쿠토는 아무것도 모른 채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거만 먹고 진짜 괜찮아……?”


보쿠토는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는 얼굴이었다. 아카아시는 무신경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학생 식당에서 나온 저녁용 단품 메뉴인 메밀국수는 다른 밑반찬이라고는 락교 하나뿐인 단촐한 구성이었다. 


“그래서 그 이번 주말에 그 자리가 어떻게 된 건데요? 꼭 나가야 합니까? 안 나가면 안 되는 거예요? 당신 성격도 별로잖아요. 왜 나간다고 했습니까? 성격대로 거절해버리지.”

“야! 내 성격이 어디가 어때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야 되는 성격은 보통 별론데요…….”


아카아시의 표정에 보쿠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인내하는 표정에 아카아시는 말이 심했나 싶어 살짝 눈을 피했다. 잠깐 동안 두 사람 뿐인 테이블 위에 침묵이 흘렀다. 보쿠토는 젓가락을 양손에 한 짝씩 나뉘어 쥐고서 심호흡하는 중이었다. 


“그렇구나…….”


사과라도 해야 하나, 하고 아카아시가 생각할 때 보쿠토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닿았다. 아카아시가 눈을 깜박였다. 보쿠토가 꾹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별로인거네…….”

“……아주 나쁘단 얘기는 아닙니다.”

“아무도 말 안 해줘서 몰랐어…….”


보쿠토는 지금 거의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카아시는 조금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해도 꿈쩍도 않기에 강철처럼 단단한 마음의 소유자인 줄로만 알았다. 성격 별로라는 한 마디에 곧장 울 것 같은 얼굴이 나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야 누가 당신한테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왜!?”


아, 또다시.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을 보고 있자니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유력한 가문, 그 장자의 외동아들로 즉 장손, 현재 최대의 관심사는 물려받을 수많은 것들 가운데에 섬 하나 뺏기지 않는 것이라는 이 남자에게 날 때부터 감히 누가 무슨 말을 했겠는가?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현대 사회에서 저 정도의 후광이라면 그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의지조차 사멸했을 것이다. 아카아시는 잠시 마음을 추슬렀다. 


“보쿠토 씨.”

“응.”

“가진 게 많은 사람 앞에서는 주눅이 들게 됩니다.”

“왜?”


당신은 안 가져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거겠죠, 그 말은 이상하게도 나오지 않았다. 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은 그가 타고나길 모든 걸 손에 쥐고 태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생각 때문이었다. 


“자기가 가지지 못한 걸 생각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모든 걸 쥔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하죠.”

“아니 왜!?”

“기분 상하게 했다고 그쪽에서 보복하려고 들어도 방어할 수단이 없지 않습니까.”

“기분 좀 상하게 했다고 뭐라도 하려고 하는 쪽이 이상한 거 아냐?”

“세상은 대다수의 이상한 사람과 몇 안 되는 보통 사람으로 굴러가고 있거든요. 놀랍게도.”


보쿠토가 정말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아카아시는 그만 비꼬려는 의지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어쨌든 그래서 왜 거절하지 않는 겁니까? 꼭 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내 성격이 그렇게 별로란 말야? 아무도 말도 못할 만큼? 나한테 뭐라 하면 내가 뭐 두들겨 패기라도 할 줄 알았단 거잖아.”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말은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말한다. 아카아시는 ‘두들겨 팬다’ 정도의 표현에 속으로 혀를 차며 대꾸했다.


“그런 저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닌데요.”

“어쨌든 그런 거잖아…….”


실수했나? 아카아시는 다른 의미로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강렬하게 깨달았다. 보쿠토는 기존의 목적했던 화제에 관해 이야기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밑도 끝도 없이 침울해진 얼굴, 축 늘어진 어깨, 영원히 그의 양손에 하나씩 떨어져 있을 것 같은 두 짝의 젓가락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전화의 액정을 흘끗 바라보았다. 조금 전 연구실의 선배에게서 온 메세지가 온 덕분에 액정에는  시간이 함께 떠 있었다. 


‘삼십분 안에 돌아가야 한다…….’


이 허술한 식사를 하는 데에 10분. 보쿠토의 이야기를 듣는 데에 또 10분. 연구실까지 돌아가기 전에 커피 한 잔 하는 데에 10분. 허비할 시간은 조금도 없었다. 아카아시의 판단은 빨랐다.


“사실 제가 심술부렸습니다. 아무렇게나 말한 거예요.”

“엥?”

“보쿠토 씨 성격 좋습니다. 출중하시죠.”

“에…에에. 거짓말이지?”

“제가 싫은 말 하는 거 보신 적 있습니까?”

“……그건 아닌데…….”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보쿠토였지만 조금만 더 하면 완전히 그의 말을 믿을 기세였다.


“그럼 왜 그렇게 거짓말한 건데!”

“심술부린 거라고 했잖아요.”

“왜 심술부렸냐고 묻고 있는 거거든? 삐졌어? 뭐 화났어? 내가 뭐 잘못했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셨잖아요. 연구실 사람들도 다 봤고요.”

“내가 남자친구로 그렇게 창피한 거야?”

“그 정도는 아닌데요. 어쨌든 귀찮은 설명을 해야 하니까요.”

“알았어, 그럼 앞으로 진짜 꼭 연락하고 올 테니까 이젠 심술부리지 마!”

“알겠습니다.”

“심술부린 것도 사과해!”

“미안합니다.”

“…….”


보쿠토의 표정이 형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일그러졌다. 아카아시는 이젠 도무지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할 일은 다 해줬지 않냐는 뜻이 역력한 얼굴을 보고 드디어 보쿠토가 한 손에 젓가락 두 짝을 모두 쥐었다.


“나도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서로 사과했으니 이제 됐죠 뭐.”


여기서 ‘그래서 본론이 뭐죠?’라고 물으면 제아무리 보쿠토라고 해도 그의 의도를 눈치챌 게 분명했던지라, 아카아시는 조금 더 참았다. 그리고 인내의 보람이 있게도 보쿠토는 세입 만에 작은 메밀국수를 깔끔하게 해치우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보쿠토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카아시는 그것이 보쿠토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을 때나 짓는 표정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 얼굴을 지금 처음 보았다는 것도. 


“그래? 그럼 재미없는 너희 집으로 돌아가지그래.”

“너무 매몰차게 그러지 말지~! 그쪽이 새 약혼자?”

“눈 깔아. 신경 꺼. 돌아가.”


등골이 섬뜩할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옆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보쿠토의 눈매는 매섭게 치뜬 채였지만 입매에는 미소가 있다. 아카아시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야, 너 아무리 재산이 탐나도 그렇지~! 그 많은 애인들 다 뿌리치고 이렇게 급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데려온 거야?”


아카아시는 뒷짐을 진 채 덤덤히 그 사촌의 말을 듣기만 했다. 단어 선정이 노골적으로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다. 발끈하기에는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몹시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데다가, 자신이 보쿠토와 ‘진실한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도 아니다 보니 마음 깊이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야, 미래의 제수씨! 요 녀석이 얼마나 날렸느냐면요!”


눈치를 안 보는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그것만은 핏줄인 게 확실하다고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무언가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보쿠토가 한달음에 그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어틀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커, 컥!”

“제수씨 아니고 형수님이다, 똑바로 해라?”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 살벌하게 웃는 얼굴의 보쿠토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말하는 내용과 기세가 어울리지 않아 그 위화감이 험악함에 힘을 더했다. 작은 키도 아니건만 사촌의 발이 땅끝에 겨우 닿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를 놓아준 보쿠토가 사촌의 주름진 옷깃을 탁탁 건드렸다. 펼쳐주려는 것 같았지만 도리어 가볍게 몇 대 더 친 꼴이 되었다. 


“보…코타로 씨.”

“가자.”


아카아시가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목을 잡아채고는 거침없이 정원을 벗어났다. 아카아시는 뒤를 흘낏 돌아보았다. 한껏 졸렸던 목을 풀고 있는 남자가 두 사람을 음험한 눈길로 노려보고 있었다. 


*


“유산 문제가 얽혔다는 게 저 사람입니까?”

“어.”

“그래도 부모님껜 잘 하시나 보네요. 두 분 모두 환영하는 것 같고.”

“아직 유산 물려받은 게 없는데 환영 안 하면 어떡해? 저 새끼가 저래도 할머니 손자고.”


보쿠토는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소태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입안에 다과를 쑤셔 넣고 있었다. 야외 테라스 쪽에서 보이는 거실의 풍경 속에는 보쿠토의 양친과 갑작스레 방문한 그의 사촌이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유리창이 닫혀있어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스콘에 버터 스프레드를 듬뿍 올려 입으로 가져가고 있던 보쿠토가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기다린다는 표정이었다. 뭐라 말하려고 했던 아카아시는 돌연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얘길 내가 해서 뭐하겠어.’


두 사람이 만나서 하는 일이라는 게 연인 행세를 하는 것뿐, 그걸 제외하면 건조하기 짝이 없는 사이였다. 저 사촌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으니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말은 아무리 담백하게 해석하려고 해도 진실한 걱정과 염려인 것처럼 들렸다. 


‘괜히 오해라도 하면 곤란하고.’


연애 같은 건 절대 안 된다고 서로 못 박아두지 않았던가? 아카아시는 생각을 정리하곤 보쿠토의 앞으로 찻잔을 밀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보쿠토는 남은 차를 생수 마시듯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인사 안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 자식이랑 있어서 일이 잘 풀린 적이 없다. 상종 안 하는 게 나아. 부모님도 알고.”


당장 앞에서는 웃고 하하호호 해도 자식한테 물려줄 유산 뺏어갈지도 모르는 놈이 예뻐 보여 봤자 얼마나 예뻐 보이겠냐? 보쿠토가 이죽거리듯이 말하고는 바깥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나가자는 말이었다. 


아카아시는 잠깐 테라스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림으로 그린 듯이 아름다운 실내, 중년 부부와 젊은이 한 사람. 


“못 나오겠어?”


아카아시가 잠시 서서 머뭇거린 것을 테라스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해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보쿠토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아카아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카아시가 거절이나 사양의 말을 하기도 전에 양손으로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보쿠토 씨!”

“언제는 코타로 씨라며?”


그러더니 아카아시를 울타리에 앉히고, 자신은 번쩍 뛰어넘는다. 아카아시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이 일련의 흐름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지만 먼저 울타리를 뛰어넘은 보쿠토가 자신을 향해 양팔을 벌렸을 때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서? 뛰어내려. 별로 높지도 않잖아.”

“아…….”

“난 저 자식이랑은 더 말하고 싶지 않다고.”


보쿠토가 투정이라도 부리듯이 그를 향해 재촉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현관으로 나오려면 필히 그의 사촌과 부딪히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아카아시는 말없이 보쿠토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손을 휘저었다.


“이 정도는 가뿐합니다. 가서 차에 시동이나 걸고 있든가요.”

“에, 뭐야. 영 못 하는 거 같길래 해준 건데.”


보쿠토의 시선을 피해서 가뿐히 뛰어내리자 보쿠토는 속았다며 투덜거렸다. 아카아시는 속인 적 없다고 간신히 대꾸할 뿐이었다. 


“아~! 진짜 끝났다! 아!”

“이걸로 끝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 초 칠래? 진짜?”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건 보쿠토가 신이 나 소리치다가 아카아시의 덤덤한 반응에 입을 삐죽거렸다. 아카아시는 안전벨트를 끌어당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중요한 건 할머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예선은 끝을 내야 본선을 할 거 아냐.”

“예선 끝난 걸 본선 끝난 것처럼 말씀하시길래요.”

“……너 그 뭐냐…….”


핸들을 양손에 쥔 보쿠토가 입을 버끔거리며 아카아시를 쳐다보았다. 아카아시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요?”

“아니다……. 정신 차리겠습니다요, 정신 차릴게요. 선생님!”

“그쪽 같은 학생은 별로인데요.”

“내가 말을 하질 말았어야 했는데! 입을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보쿠토가 자신의 입을 쥐어뜯듯 주먹으로 때리며 소리쳤다. 아카아시가 그 말에는 결국 졌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보쿠토는 말이 없다. 작게 웃던 것을 그친 아카아시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어? 아, 아니. 아무것도…….”


얼빠진 얼굴로 아카아시를 쳐다보던 보쿠토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차고의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그들을 배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일은 쉬어.”

“오늘 큰일 했다고 휴가 주는 건가요.”

“네, 휴가입니다, 선생님.”


보쿠토가 이죽거렸다. 아카아시는 차창에 기대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라고 해서 보쿠토의 양친을 만나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았다. 보쿠토의 본가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한쪽으로 미뤄두었던 피로가 밀려든다. 아카아시는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자동차의 백미러에 이쪽을 주시하는 누군가의 신형이 살짝 보인 것 같았지만 금세 멀어져 확인할 수 없었다. 


“많이 피곤했어?”

“긴장했으니까요.”

“긴장한 거 하나도 모르겠던데…….”

“자기 남자친구 부모님 만나는데 긴장 안 하는 사람이 어딨, 컥!”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늘어놓던 아카아시는 자동차가 급정거한 덕분에 앞으로 휙 쏠리며 말을 멈춰야 했다. 핸들을 양손에 쥔 보쿠토는 떨리는 눈동자로 정면을 바라보고만 있다. 넓지 않은 주택가 사이의 도로라 설마 뭔가 치기라도 했나 싶어 아카아시가 주위를 살펴보려는데 보쿠토가 삐그덕거리는 몸짓으로 옆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뭐, 뭐라…고…….”

“뭔가 쳤어요? 그런 거 같진 않았는데? 앞에 뭐가 있었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없었어! 지금 누가 봐도 이거 내가 놀라서 멈춰버린 거잖아!”

“놀라요? 뭐에 놀랍니까?”


아카아시는 갑자기 압력을 받은 가슴팍을 쓸어내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친 게 없다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보쿠토가 뭐에 놀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참이나 버벅거리는 얼굴로 입술만 달싹거리던 보쿠토는 번뜩이듯 깨달음을 얻은 얼굴이 되어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랬었지…….”

“뭐가 말입니까? 삼도천 구경하고 온 입장에선 도대체 뭐가 그렇게 놀랐는지 알고 싶습니다만.”


아카아시가 따박따박 말을 늘어놓았지만, 보쿠토는 여전히 혼이 나간 듯이 얼빠진 얼굴로 핸들을 움직일 뿐이었다. ‘그게 계약이었지…….’라는 말만 중얼거리며. 


아무리 다그쳐도 말을 해줄 기세가 아닌 데다가 괜히 얘기하다가 또 이렇게 덜컥 차를 세워버리면 그게 더 곤란한 일이다. 아카아시는 이 이상 캐묻는 것을 그만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고용주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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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주시는 댓글 모두 잘 보고있습니다ㅠㅠ 

덕분에 힘내서 계속 쓸 수 있어요ㅠㅠ

다만 지금 대운동회 마감이(..) 너무.. 급해서.. 

마감 친 연후에 모두 답글을 달 예정이에요ㅠㅠ! 

항상 감사합니다ㅠㅠ!







“긴장은 제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옷깃을 살짝 잡아당겨 바로잡던 아카아시는 옆에서 창백한 얼굴로 운전하고 있는 보쿠토를 흘끗 바라보았다. 주차를 해 놓은지는 한참 됐는데 보쿠토의 양손은 아직도 핸들을 꽉 쥐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작게 혀를 찼다. 


“보쿠토 씨.”

“나도 당연히 긴장되지! 잊었냐? 좋아하는 애를 데리고 집에 가는 설정이라고!”

“그렇기는 합니다만…….”

“아아아……. 집에서 뭐라고 하면 어떡하지?”

“어쩌겠습니까.”

“도망가기 없기다.”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하던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였다. 걱정하는 게 자신에 대한 거였나? 내가 못해 먹겠다고 그만두기라도 할까 봐? 보쿠토는 여전히 긴장해 차가운 손으로 핸들을 놓고 아카아시의 손을 꼭 쥐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좀 그래. 이상한 소리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줘. 알았지? 내가 미리 사과할게.”

“……받은 돈이 있으니까 당연히 도망칠 일도 없습니다.”


아카아시는 산뜻하게 대꾸했지만 보쿠토는 불안함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부모님이 이상한 말을 해서 아카아시가 기분이 상해 도망이라도 치면 어떡하지’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보쿠토는 머리를 쥐어뜯으려고 했다가, 아카아시의 손길에 겨우 멈출 수 있었다. 


“그 정도는 알아서 잘 할 테니 걱정마세요.”

“으응…….”


매사에 뻣뻣한 도련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귀여운 구석도 있다. 아카아시는 흐트러진 그의 넥타이를 톡톡 가리켰다.


“타이 바로 매고 가죠. 주차장에 들어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나온다고 걱정하고 계시겠습니다.”

“으응…….”


하지만 집에 딸린 주차장에 차를 대어 놓고 바깥으로 나올 때까지도 보쿠토 목깃의 타이는 여전히 헝클어진 채였다. 아카아시는 혀를 차곤 손짓했다. 


‘천생 도련님인가.’


그다지 키 차이는 많이 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카아시는 어렵지 않게 보쿠토의 타이를 바로 매어줄 수 있었다. 보쿠토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손길을 내버려 두고서 자신은 앞일을 걱정하며 울상을 짓기에 바빴다. 


얼추 보쿠토를 단정한 꼴로 만든 아카아시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뭐 놔두고 왔어?”

“정확히는 가져온 거요.”


빳빳하고 도톰한 종이로 만든 종이봉투 안에는 묵직한 것이 들어있는지 무게감이 느껴졌다. 보쿠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따로 청구할 테니 그리 아세요.”

“뭐, 뭔데.”


아카아시는 당황이 역력한 보쿠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피식 웃었는데,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저를 놀리는 줄도 모르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어 서둘러 그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뭐야? 뭔데? 많이 비싸?”

“많이 안 비쌉니다. 들어가죠.”


머리 위에 물음표를 달아주면 딱이겠는데. 아카아시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실없는 상상을 하며 현관 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현관을 보니 그제야 다시 정신이 드는지 보쿠토는 크흠 하고 목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


“어머…….”

“허…….”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세 사람이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집사로 보이는 남자 한 사람과 보쿠토 부부였다. 보쿠토는 자연스럽게 겉옷을 벗어 넘기려다가 오늘 본가에 방문한 목적을 떠올리고는 손을 저어 집사를 물렸다. 제일 먼저 당황한 표정을 지은 건 집사였다. 아카아시는 이 기묘한 분위기에도 차분한 표정을 잃지 않고 보쿠토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보쿠토 부부는 보쿠토 코타로가 어디에서 난 것인지 누구라도 확답할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부친 쪽은 시간까지 얹어진 잿빛 머리, 모친 쪽은 아직도 윤기가 도는 흑발이었다. 유달리 큰 눈은 모친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았고 보쿠토 특유의 매서운 안광은 부친의 것인 듯했다. 


편하지만 고상함을 잃지 않은 차림새의 부부는 처음에는 환영한다는 듯이 미소를 짓다가 자신의 아들을 보고선 멈칫했다. 


그 멈칫거림은 보쿠토와 아카아시가 부부 맞은편 자리에 앉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보쿠토가 반쯤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지라 자리에는 침묵뿐이었다. 아카아시는 치밀어오르는 한숨을 꾹 참고 발끝으로 보쿠토를 툭 건드렸다. 얼른 인사하라는 말이었다.


“어, 아. 아버지. 어머니. 여기 아카아시.”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어, 아카아시.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랑 아버지. 인사해…?”

“처음 뵙겠습니다. 코타로 씨에게 신세 지고 있습니다.”

“코-커헉.”


보쿠토가 눈을 대문짝만하게 뜨고서 ‘코타로 씨!?’라고 반문하려는 걸 대뜸 발을 밟아 막았다. 보쿠토가 겨우 숨을 들이켰다. 


“어머, 사이가 좋네…….”


모친 쪽은 시종일관 놀랍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고, 부친 쪽이 그나마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으나 그쪽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모친의 감탄사에 보쿠토가 미간을 찌푸리고 버럭 했다.


“사이 좋으니까 데려왔지!”

“너랑 사이좋은 건 쿠로오 군 정도잖니.”

“내가 사귀었던 그 애들은 다 뭐 사이 나빴어!?”


보쿠토가 버럭 외친 순간 ‘코타로!’하고 노호성 같은 소리를 낸 건 부친 쪽이었다. 아카아시도 보쿠토도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한 부친이 언성을 높였다.


“어디 이런 자리에서 막돼먹은 소리를 하느냐!”

“아, 아버지.”

“아카아시 군에게 사과하거라!”

“아, 아니. 아니 저는, 괜찮은…….”

“코타로!”


그야말로 폭풍 같은 전개였다. 보쿠토는 익숙한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아카아시를 돌아보았다. 


“미안, 아카아시…….”

“아카아시 군, 아들의 교육이 부족해 미안하네. 생각도 악의도 없는 녀석이니…….”

“괜찮습니다. 코타로 씨가 나쁜 뜻이 없는 사람인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카아시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미소에 되레 보쿠토가 흠칫했지만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을 세게 쥐어 잡았다 놓았다. 그와 동시에 아카아시는 챙겨온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어머, 뭐 이런걸.”


모친이 눈을 깜박이며 아카아시가 내미는 종이 봉투를 받았다. 안에는 조그만 종이 상자가 들어있었다. 


“앤틱이긴 하지만 좋은 물건으로 구했습니다. 마음에는 드실지…….”

“세상에, 향수병인가요?”

“예.”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에어캡으로 둘러싸인 금빛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리스탈 병 위에 작은 뚜껑은 장미와 새를 조각한 것이고 바닥을 감싸는 물결 모양의 금형까지 같은 색이었다. 흑발의 미려한 중년 여성이 손에 들고 있자 그 아름다움이 한결 더 돋보인다. 아카아시는 ‘실례’라고 짧게 말하고는 직접 손을 뻗어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안쪽으로 긴 유리 막대가 딸려 나왔다. 


“담아 사용하셔도 되고, 장식용으로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어 준비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귀한 걸 받아도 될지.”

“사실은 코타로 씨가 준비하자고 얘길 한 것이니까…….”

“어머.”


모친 쪽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상냥도 하셔라. 이래 봬도 저 아이의 엄마랍니다. 저 녀석이 이런 걸 준비할 센스가 없다는 거야 제가 더 잘 알지요.”

“어, 어머니!”

“코타로,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우선 식사부터 할까요?”


앤틱 향수병을 조심스레 양손으로 받쳐 든 모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이닝 쪽으로 고갯짓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을 잡은 채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보쿠토 씨. 이제 통상 모드로 돌아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 뭐지? 뭐지? 너 뭐냐?”


점심 겸 저녁에 가까운 만찬이 끝나고 그 다음은 야외에서의 티타임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 양친의 모든 대화를 매끄럽게 이끌어나갔다. 그 자리에서 고장이 난 건 보쿠토뿐이었다. 


잔을 엎고, 쏟고, 과자를 떨어뜨리고, 실수를 연발하는 아들을 보며 양친은 혀를 찼고 그와 동시에 아들의 연인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아들을 부탁했다. 그 분위기가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이어져, 지금은 안쪽에서 챙겨줄 게 있으니 준비할 시간 동안 젊은 사람들끼리 시간을 보내라는 권유에 따라 정원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뭐가요.”

“나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누구 이렇게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처음 봐…….”

“그렇습니까?”

“내가 사귀던 애들은 얼굴도 안 보려고 했는데. 아, 앗차. 미안. 그러니까…….”

“아, 예전 애인들 언급하는 거라면 사실 상관없습니다. 저희가 진짜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요.”


아카아시가 덤덤하게 말했다. 보쿠토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달리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아카아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 애인 얘길 두 번 했다간 보쿠토 씨가 산 채로 묻히시겠던데요.”

“으, 으응.”

“그리고 향수병은 구하느라 고생했습니다. 값 쳐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시는 대로 긁어다 드리겠습니다요.”


부모님과 만나는 자리가 부드럽게 끝난 것이 여간 놀라운 일인지, 평소라면 툴툴거릴 말에도 보쿠토는 납작한 태도가 되어 수긍하기만 했다. 이렇게 유한 반응을 보이면 놀리려고 마음먹었던 자신이 나쁜 사람 같다. 아카아시가 괜히 무안하여 목 뒤를 한 번 쓸어내릴 때였다.


“여어~! 코타로!”


어디서 눅진히 눌러 붙은 것 같은 목소리가 보쿠토를 부른다. 아카아시는 뒤를 돌아보았다. 보쿠토와 자신 또래의 젊은 남자였다. 보쿠토와는 묘하게 닮은 윤곽이 엿보이기에 누군가 싶어 보쿠토를 돌아보았을 때, 아카아시는 오늘 이 저택에 온 이후 처음으로 매섭게 빛나는 보쿠토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누굽니까?”

“내 사촌.”


아카아시가 속삭이듯 묻는 말에 보쿠토가 쥐어 씹는 것 같은 목소리를 낸다. 그 사이에 한 걸음 한 걸음 그 사촌이라는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저 불타는 듯한 눈빛과 ‘사촌’이라는 관계를 듣고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섬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그 사촌이로군.’ 

“네 녀석이 우리 집엔 무슨 일이냐?”

“지나가는 길에 인사하러 들렀지~! 재밌는 소식도 들리길래 말야.”










“인사요? 집안에?”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몹시 서늘했기 때문에, 보쿠토는 그것이 사전에 계약된, 분명하게 명시된 조건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움찔했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분위기 좋다고 생각했던 가정식 요릿집의 실내 온도가 5도는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가, 가기로 했잖아.”

“안 간다고 하진 않았는데요.”

“그럼 그 눈빛 좀 어떻게 해보면 안 되겠냐?”


보쿠토는 투덜거리며 숟가락을 움켜쥐고 밥을 크게 한 술 떠올렸다. 아카아시는 슬쩍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보쿠토 씨.”

“으, 으응?”

“보통 만난 지 고작 한두달 만에 집안에 인사드리러 가자고 하면 진상으로 낙인찍힌다는 거 알고는 있습니까?”

“아?”


보쿠토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그 얼굴만 보자면 천진한 어린애가 신묘한 것을 처음 본 듯했다. 아카아시는 구제불능을 보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쿠토가 금방 발끈했다.


“사, 사람이 잘 모르는 게 있을 수도 있는 거야!”

“그러시겠죠.”


아카아시는 시큰둥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놓인, 반쯤 먹은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보쿠토와 함께 먹어온 요란할 정도로 휘황찬란했던 파인 다이닝에 비하자면 아주 소박한 가게의, 한 그릇 요리였다. 


‘밥으로 식사를 하자고 해도 들은 척도 않더니.’


본인도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부담스러운 부탁이라는 자각이 조금쯤은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이제야 아카아시가 먹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 요리를 먹으러 와서 얘길 하는 것일 테다. 


“집안 어른께서 보자고 하십니까?”

“어? 왜, 왜……?”

“지금껏 제가 본 보쿠토 씨의 전 애인들만 한 손을 넘겼는데요. 그 분들하곤 집에 인사 드리러 간 적 있습니까?”


아카아시가 여상한 어투로 말을 늘어놓는데도 보쿠토는 허파를 찔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입술을 비틀어 깨물더니 오른손엔 숟가락, 왼손에는 젓가락을 꼭 쥐었다. 


“아니……. 그 사람들하고는……. 없는데…….”

“그런데 한 달만에 저를 데려가면 집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보쿠토 씨의 결혼에 유산이 달려있다고 들었는데요. 뭐 집에서 보자고 하신 거면 그냥 방문하면 되겠지만 보쿠토 씨의 의견이라면 미루는 게 낫겠습니다.”

“집에서! 집에서 보자고 한 거야! 됐냐!”


보쿠토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뒤쪽 테이블에서 흘끗쳐다본다. 부엌 쪽에서도 직원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모으고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보쿠토가 제풀에 퍼드득 기가 죽어 수저를 내려놓고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앱니까? 맘에 안 들면 내리치게.”

“마음에 안 든게 아니라 답답해서……. 아 네가 말을 그렇게 하니까 그런 거 아냐!”

“이제 남 탓까지?”


풀코스 밟으시네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는 새하얗게 재가 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태어나서 이딴 대접 진짜 처음이다…….”

“그렇습니까.”


아카아시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하곤 식사를 재개했다. 그 대단한 집안의 장손, 못 가진 것 하나 없이 모두 가진 남자. 조금쯤 어린애처럼 군다고 한들 누가 무어라 했겠으며 만난지 한 달 만에 집에 인사드리러 가자고 말했다 해도 아무도 꺼리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말이 의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난 뭐 한다고 꼬박꼬박 한 마디씩 해가지고…….’


아카아시는 속으로 스스로를 질책했다. 하지만 대화는 혼자 하는 게 아닌 만치 그것이 자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쪽은 일방적인 고용인인 셈이니 자신의 말이야 흘려듣거나 무시하면 될 것인데,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리저리 튀어나가니 자신도 자꾸만 하지 않을 얘기도 하고 굳이 입을 대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남탓이니 보쿠토 씨 보고 뭐라할 게 아니군, 아카아시는 자조하곤 입을 열었다.


“언제인데요?”

“……뭐가?”

“집에 인사드리러 가자고 했잖아요. 날짜, 언제냐고요.”


준비는 보쿠토 씨가 알아서 다 해주시겠죠? 아카아시는 일부러 비꼼을 담아 한 마디 더 던졌는데, 문득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 인사드리러 가자는 말을 하는 아카아시를 보는 보쿠토의 눈이 태양처럼 환히 빛나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비꼬는 말은 들리지도 않은 것 같은 표정이다. 사람을 압도하는 빛 앞에서 말을 잊을 수 밖에 없었다. 


“진짜 가주는 거야? 진짜?”

“……그게 계약이니까요. 당연하잖아요.”


못 가진 것 하나 없이 모두 가진 남자, 아아. 자신의 생각은 어쩌면 이다지도 틀릴 줄을 모르는가. 기쁘다는 표정 한 가닥도 숨김이 없는 그 얼굴을 보며 아카아시는 생각하고야 말았다. 


*       


“샵에서 맞추는 게 처음이라고?”


소파에 앉아서 팔걸이에 팔을 걸치며 시종일관 심드렁한 표정으로 지겨운 것을 보듯 하고 있던 보쿠토가 자세까지 바로하곤 진심을 다해 놀란 듯이 말했다. 도리어 눈치를 보는 듯한 표정이 된 건 아카아시의 몸에 붙어서 줄자를 대어보고 있던 재봉사였다. 


아카아시는 그 악의라고는 한 톨도 없는 보쿠토의 놀람에 적절히 대꾸해주었다. 


“보통은 취직을 해야……. 취직을 해도 맞춤까지는 안 가죠.”

“맞춰 입지 않으면 뭘 어떻게 해?”

“마네킹 벗겨 입죠.”

“흐에에?”

“아, 하하……. 고객님께서는 워낙 수치가 좋으셔서 그러셔도 핏감 좋으셨겠어요.”


재봉사로서는 최선을 다한 추임새였다. 보쿠토가 그 최선에 제동을 걸었다. 


“나는? 마네킹 수준은 아닌가?”

“고, 고객님은 그…근육이 있으시니까요. 마네킹 사이즈보다는 조금 꽉 끼게 맞지 않으실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입술에 발린 말일 게 분명하다고 속으로 생각했을 텐데, 아카아시는 치수를 재는 와중에도 재봉사의 말에 작게 동감하고 말았다. 


조금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는 보쿠토는 딱 맞게 걸친 셔츠 위로 마네킹보다 두터운 근육의 굴곡이 세심히 드러나 있었다. 실험실과 강의실을 오가는 게 전부인 아카아시로서는 보기 드문 몸이기도 했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복부 쪽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키 차이는 얼마 안 나는데 몸무게는 5킬로는 더 차이나겠네…….’


보쿠토가 재봉사의 말에 신이 나서 몇 마디 더 하려는 걸 눈빛으로 억누른 아카아시는 재봉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봉사는 보쿠토를 막아준 아카아시를 향해 감사의 눈빛을 보내고는 작업을 속행했다. 


가봉 일정까지 받아들고 테일러 샵을 나오는 길, 보쿠토는 주머니에서 자동차 열쇠를 뒤적거리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요즘은 밤새는 거 없나?”

“네.”

“그 자식은 어때?”

“누구요?”


아카아시가 보조석에 오르며 반문했다. 보쿠토도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며 대답했다.


“왜 그 너 선배 어쩌고 하던 애.”

“아, 나미카와 선배요? 어떠긴요. 별 거 없는데요.”

“처리해줘?”


보쿠토가 아무렇지도 물었다. 시동은 부드럽게 걸리고 엔진 소리가 묵직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에 아카아시가 안전벨트를 끌어내리다 멈칫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보지도 않은 채, 자연스레 정면을 바라보며 핸들과 스틱을 손에 쥐고 있었다. 


“……뭐라고요?”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잠긴 채 울려퍼졌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흘끗 돌아보았다.


“뭐냐, 감기냐? 우리 집 오기 전엔 나아야 돼. 집안에 노익장이 있어서 병자는 취급 안 한다.”


보쿠토의 말은 농담을 섞은 나름의 걱정과 염려였다. 아카아시는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보쿠토는 금방 저녁 메뉴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근처의 레스토랑은 전부 한 바퀴씩 돈 것 같다는 투덜거림이었다. 


“너 뭔가 더 맛있었던 데 없어? 있으면 한 번 더 가자. 아니면 쿠로오한테 물어볼까?”


보쿠토의 손가락이 리듬감 있게 핸들을 두드렸다. 배고프다는 응석어린 투정도 더해진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목을 주물렀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고개를 돌렸다.


“저 가츠동이요.”

“엑? 그건 어제 먹었잖아!”

“맛있었던 거 말하라고 하시길래 말 한건데요.”

“아 진짜 까탈스럽다 너!”

“매번 다른 메뉴를 먹어야 하는 쪽이 더 까탈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은 다 틀려먹었지? 응? 하나도 맞는 말이 없지?”

“지금 말은 맞았네요.”

“~~!!”


보쿠토가 비명을 지를 것 같은 표정으로 옆을 쳐다보았지만 아카아시와 눈을 마주칠 수는 없었다. 아카아시가 계속 창밖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내가 어떻게 너를 말로 이기겠냐? 가자, 가츠동. 먹자! 먹어! 열 그릇, 아니 열 그릇이 뭐냐? 백 그릇 먹자!”


입으로는 한 마디도 못 이기겠다며 투덜거리곤 있지만 오늘 아카아시의 옷을 새로 맞춰준 건으로 일이 뜻대로 풀려서인지, 보쿠토는 기분이 좋은 듯한 눈치였다. 아카아시는 대꾸하지 않고 차 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다른 세계를 살아온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모른척 해왔다는 걸 이따금 깨닫는 때가 있다. 오늘은 바로 이 순간이 그런 때였다. 저 보쿠토 코타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눈앞에서 치워버리며 사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도 치워버리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은, 그가 가진 금전이면 된다. 바로 지금의 자신처럼.


아카아시는 차창 밖의 풍경에서도 눈을 감았다. 보쿠토는 분명 험한 소리만 하는 자신 역시 마음에 들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참아주고 있는 건 계약이 걸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임계선을 넘기면 자신 역시 ‘처리할’ 대상이 되는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마음 깊은 곳에서 뾰족한 조각이 튀어올랐다 다시 내장을 긁으며 가라앉았다. 




















아카아시의 학교 정문에 차를 댄 보쿠토는 핸들을 양손으로 쥐고 고심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며 노을이 그의 얼굴에 굴곡을 그렸지만 보쿠토는 그게 눈부신 줄도 모른 채 심각한 고뇌 중이었다. 학생들이 오고가며 화려한 스포츠카를 흘끗거리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 자식들이 내가 어디 가는지 정보 팔고 있는 거 아냐?’


그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 이유는 하나, 요즘 들어 부쩍 가는 레스토랑마다 그의 예전 애인들을 꼭 한 번씩 만나기 때문이다. 그냥 만나는 거라면 그도 크게 개의치 않았을 텐데 그럴 때마다 자신의 고용인이 자신을…….


’무슨 천하의 방탕한 쓰레기 보듯이 보잖아…….’


자신이 방탕하지 않았단 것은 아니다.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막지 않기는 했었다. 그래도 한 번에 두 사람을 만나는 짓은 정말 하지 않았는데, 예전 인연을 연이어 몇 명이나 보니 고용인의 눈빛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보쿠토는 오늘도 어딜 가든 누군가와 또 만날 거라 확신했고 그 탓에 지금 아카아시에게 그의 학교 앞에 도착했다는 연락도 하지 못한 채였다.


’아, 미치겠네! 진짜! 얘네는 왜 갑자기 이렇게 튀어나오는 거야!’


이유는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처음에 아카아시를 두고 결혼 운운해버린 것 때문일 테다. 지금까지 누굴 만나도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한 적이 없던 그였다. 


그 때 보쿠토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보쿠토는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뜨는 이름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세요…….”

《보쿠토 씨. 도착하셨어요?》

“어, 방금. 지금 학교 앞에 와 있어.”

《아…….》


뭔가 탄식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아카아시 본인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보쿠토는 전화를 끊고 보조석 쪽 창문을 내려 몸을 기울였다. 아카아시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쪽 팔에 걸치고 있는 건 실험실에 입었던 흰 가운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


아카아시가 차창 쪽으로 몸을 기울이곤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음, 보쿠토 씨. 미리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늦었네요.”

“뭔데. 무슨 일 있어?”

“실험이 좀 급한데 잘못돼서……. 당장 수습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오늘 저녁은 못 먹을 것 같습니다.”


실험실에서부터 곧장 뛰어온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가슴팍도 계속 오르락내리락하고 있고 머리카락도 조금 흐트러졌다. 보쿠토는 눈동자를 도르르 왼쪽으로 한 바퀴 굴렸다.


“너는 밥은 먹었고?”

“아뇨. 지금 나온 김에 편의점 들러서 간단하게 해결하고 다시…….”

“그럼 나도 그거 먹지 뭐.”

“네?”

“옆에서 얌전히 입 다물고 밥만 먹고 가겠다고.”


보쿠토는 간단하게 말하곤 운전석에서 내려섰다. 자동차 열쇠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아카아시 곁으로 다가가자 아카아시가 이해하기 어렵단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아닙니다.”


해가 다 저물어가는 저녁이었기에 교정은 한산한 편이었다. 보쿠토는 손그늘을 만들어 지는 해의 찌르는 듯한 빛을 피했다.


“학교 안에도 편의점이 있나?”

“대학 안 다니셨습니까?”

“다녔거든……. 편의점 안 가본 것뿐이야!”

“…….”


아카아시가 여러 가지 의미로 불신의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바라본다. 보쿠토는 입술을 삐죽이며 턱을 세웠다. 사람이 대학교 내의 편의점 쯤 안 들러봤을 수도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온 것도 오랜만이네.”

“와본 적이 있습니까?”

“쿠로오도 여기 나왔으니까. 축제 때 가끔 왔어. 아, 그러고 보니 조금 있으면 가을 축제 할 때 아냐?”

“그런 것 같네요.”

“‘같네요’? 너희 학교 축제잖아.”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보쿠토의 얼굴에 아카아시는 한심하단 표정을 숨기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전 그런 데에 관심 없어서요.”

“아니 뭐에 관심 있는데, 그럼?”

“돈 버는 데요.”

“…….”

“그래서 이런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잖습니까.”


아카아시의 눈빛이 그를 향한다. 보쿠토는 입을 닫았다.


’잠~깐 살갑다고 방심했다! 방심했어!’


진흙으로 숨을 쉬는 기분이 다시금 든다. 보쿠토는 툴툴거리며 조용히 아카아시를 따라 교내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카아시가 먼저 편의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하며 문에 설치된 작은 종이 경쾌한 소리를 내고 점원이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반가운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했다. 


“드시고 싶은 걸로 고르세요.”

“우와, 진짜 이거밖에 안 해? 가격?”

“네.”


보쿠토는 편의점에 들어오자마자 눈까지 휘둥그레져서는 주위를 둘러보기 바쁘다. 대단히 신이 난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이것저것 집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자잘하고 터무니없는 과자들이었다. 그것으로 끼니가 될 리가 없다. 아카아시는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허기지면 따로 챙겨먹을 테니 그가 염려할 영역은 아니었다. 


“와! 아카아시가 고른 건 뭐야?”

“오니기리요.”

“맛있어?”

“밥이잖아요.”


보쿠토가 품에 한아름 안고 있는 과자를 겨냥한 말이었는데 보쿠토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선 아카아시가 고른 걸 하나 더 집었다. 편의점의 다른 손님들이 흘끗거리기 시작한다. 편의점에서 백화점에 처음 온 어린애처럼 구는 장신의 성인 남성을 보면 누구나 저렇게 쳐다보기는 할 테지, 아카아시는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하며 커피도 두 개 골랐다. 


“다 고르셨으면 계산 하죠.”

“응!”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손짓을 따라 편의점 계산대 위에 과자를 우르르 쏟아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저 환한 얼굴이 부담스러워서 슬쩍 시선을 피한 채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응? 아카아시가 사?”

“예. 오늘은 제가 약속을 깼으니까요.”

“흐응~!”


보쿠토가 눈동자를 크게 뜬 채 한쪽 입술을 틀어 올렸다. 재밌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한 번 흔들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계산을 마쳤다. 


봉투 하나에는 보쿠토가 고른 것을 전부 쓸어 담고 자신의 것은 양손에 쥔 아카아시는 편의점의 야외 파라솔 아래에 자리 잡고 앉았다. 어느새 해가 다 저물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거……. 어떻게 여는 거야?”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자신을 천하의 머저리 보듯 보는 걸 알았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주먹밥의 비닐 포장을 벗기는 방식은 신묘했고 그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살짝 힘을 주었지만 주먹밥의 김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리 주세요.”

“사람이 모를 수도 있지…….”

“아무 말 안 했습니다.”

“눈으로 말했잖아.”

“저 지금 주먹밥 보면서 포장 뜯고 있어요.”

“닥치면 될 거 아냐.”

“닥치라고는 안 했는데요.”


아카아시는 덤덤하게 말하며 보쿠토에게 포장을 다 벗긴 주먹밥을 내밀었다. 보쿠토는 입술을 한 번 삐죽거리곤 그 주먹밥을 손에 쥐었다.


“이거 먹고 가서 또 일해?”

“네.”

“언제까지?”

“글쎄요, 마감은 일단 내일이니까요.”

“뭔데. 그럼 내일도 못 봐?”

“아뇨. 마감하고 나올 거예요. 저 밥 먹게 좀 조용히 계시면 안 됩니까?”

“……아깐 닥치지 말라며.”


아카아시의 눈빛이 엄정했다. 보쿠토는 ’에베베’하는 표정을 한 번 짓곤 주먹밥을 크게 베어 먹었다. 아카아시는 야금야금 먹는다 싶더니 반쯤 해치운 차였다. 아카아시가 입에 주먹밥을 문 채로 페트병에 든 커피를 열려고 하는 걸 보고서 보쿠토가 남은 주먹밥을 자기 입에 털어 넣고는 커피를 대신 따주었다. 


아카아시가 조금 놀란 듯이 그를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였다.


“여! 아카아시? 여기 있었네?”


조금 과장된 목소리가 아카아시를 부르며 다가왔다. 보쿠토는 입 안에 가득 든 주먹밥을 우물거리며 편의점 의자에 등을 기대고서 상대를 돌아보았다. 작달막한 키에 학교 점퍼를 걸치고 있는 남자였다. 흘끗 아카아시를 보자 살짝 표정이 굳은 아카아시가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나미카와 선배.”

“실험은 끝났어~?”

“이제 들어가서 계속 해야죠.”

“이야, 미안하다 야. 내 실험인데, 그치? 내가 그 큰할아버지 장례식 가야 돼가지고. 미안해요~! 갔다 와서 한 턱 쏠게!”

“……예.”

“하룻밤만 새면 뭐 우리 아카아시는 거뜬하지~? 그치? 근데 이분은 누구냐? 새 스폰서야? 우리 교수님은 뻥 차고?”

“……그런 거 아닙니다.”

“아차차! 비밀이지? 어쨌든 실험! 잘 부탁하고! 난 간다~!”


남자는 보쿠토가 펼쳐놓은 과자도 능청스레 집어 입에 밀어 넣고는 자리를 떴다. 주절거리던 사람도 떠나고 아카아시는 말이 없어 편의점의 야외석은 고요했다. 


보쿠토는 입에 있던 주먹밥을 다 씹어 삼키고는 말했다.


“지금 저 새끼는 뭔데?”

“저희 실험실 선배입니다. 새끼가 뭐예요, 새끼가.”

“너도 은근슬쩍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저 새끼 실험을 왜 네가 해?”

“선배라고 말했잖아요. 바쁘셔서 도와주는 거예요.”

“저거 큰할아버지 장례식 어떻게 봐도 거짓말 아냐?”

“장례식이라고 하는데 거짓말이냐고 어떻게 물어봅니까.”


아카아시는 덤덤했다. 입맛이 가셨는지 반쯤 남은 주먹밥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고서 커피만 들이킨다. 보쿠토는 구매한 것들 중에서 신 맛이 나는 젤리를 뜯어 입에 넣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나미카와 선배’가 했던 얘기를 되짚었다.


“스폰서는 무슨 얘기?”

“저 선배가 오해가 좀 있으셔서.”

“오해인 건 확실해?”


보쿠토의 시선이 날카롭게 벼리어 아카아시를 향했다. 아카아시는 빈 페트병의 뚜껑을 돌려 닫으며 끄덕였다.


“……네.”

“흐응……. 근데 내가 스폰서라는 건 오해는 아니지 않아?”

“고용주를 보통 스폰서라고 합니까? 인생 재밌게 사시는군요.”

“야, 너는 나한텐 이렇게 매섭게 잘하면서 저 개새끼한텐 왜 한 마디도 못하냐?”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겁니다. 말은 말을 알아듣는 상대한테 하는 거니까요. 다 드셨으면 일어나죠. 전 실험하러 가야되니까.”


아카아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혀 기다려줄 기색이 아니었던지라 보쿠토도 펼쳐놓았던 과자를 다시 봉투에 쓸어 담으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카아시는 빈 페트병은 재활용함에, 먹다 남은 주먹밥은 일반쓰레기통에 버린 뒤 남은 커피 하나만 한 손에 챙겨들었다. 


“그거 나 주는 거 아니었어?”

“제 생명수인데요.”

“쳇…….”


툴툴거려도 아카아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보쿠토는 됐다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카아시는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가 오늘 약속 못 지켜 미안하단 말을 남겨놓고 등을 돌렸다. 


보쿠토는 과자가 잔뜩 든 편의점 봉투를 휘휘 돌리며 아카아시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흠, 나미…카와랬지. 나미카와 선배.”


보쿠토는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 위로 숫자패드가 떠오르자 익숙한 단축번호를 누르며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반대쪽 손에서는 여전히 편의점 봉투가 쥐불놀이마냥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어, 알아봐 줄게 있어서. K대에……. 아, 얘 전공이 뭔지 안 들었네. 무슨 실험하는 과인데.”


보쿠토가 교정을 가로질러 자신의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걸어가며 단말기 너머의 상대에게 방금 전 들었던 이름을 읊어주곤 전화를 끊었다.


“그나저나 얜 이거 먹고 사나? 이러니 말랐지.”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며, 보쿠토는 보조석에 던져 넣은 편의점 봉투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래도 과일향이 나던 신 맛의 젤리는 나쁘지 않았다. 


“커피가 뭐였는지 생각이 안 나네…….”


아카아시가 어떻게 페트병을 손에 쥐고 있었는지, 그가 마신 게 목젖을 타고 어떻게 내려갔는지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페트병의 상표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음에 물어보지 뭐, 보쿠토는 간단히 생각을 정리하곤 휠을 돌렸다. 









지정한 날마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해야한다는 약속은 착실하게 이행되었다. 아카아시는 약속한 날은 항상 시간을 비웠고 특별히 바쁘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름대로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보쿠토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아카아시를 흘끗 쳐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릇하다는 인상은 있었는데 요 며칠 사이에 그가 왜 말랐는지도 알게 되었다. 


“살아는 있냐?”

“아마도요.”

“어떻게 직장인보다 더 바쁘냐?”

“대학생은 퇴근 시간이 없으니까요.”

“아니, 저기……. 나도 대학은 나왔거든…….”


내 대학 때랑은 다른 거 같아서 한 얘기라고 어물거렸지만 옆자리에 몸을 깊이 파묻은 아카아시는 그의 생각에 크게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보쿠토는 벨트 매라는 말만 하고는 조용히 핸들을 돌렸다. 


“돈은 뭐에 필요해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냐?”


아르바이트란 보쿠토의 연인인 척 행세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아카아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돌아보았다. 


“돈이 필요 없는 사람도 있습니까? 아, 돈이 너무 많으셔서 모른다거나…….”

“아 그 얘기가 아니고! 너 무슨 장학금도 받는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아셨는데요? 알바생도 백그라운드 체크합니까?”

“……. “


이렇게까지 한 마디도 지지 않을 일인가, 보쿠토는 괜히 심통맞은 얼굴이 되어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아카아시가 ‘진짜 체크 했어요?’하고 연거푸 물어본 통에 결국 입을 열어 대답했다.


“집에서 누구 만나는지 확인했나봐. 웬일로 사람 잘 골랐다고 덕분에 칭찬 들었어.”

“그 전엔 어떤 사람들 만나고 다녔길래…….”


아카아시가 눈까지 가늘게 뜨고서 그를 돌아보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말문이 막힌 보쿠토는 결국 내가 죽어도 입 여나 봐라 하는 얼굴로 입술만 꽉 깨물고 핸들을 잡았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데리고 향한 곳은 분위기가 제법 괜찮은 레스토랑이었다. 웨이터는 보쿠토의 얼굴을 알아보는 눈치다. 아카아시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웨이터가 채워준 물잔부터 손에 쥐었다.


“양식 좋아하시나봐요.”

“딱히 뭘 더 좋아하는 것 같진 않은데.”

“다섯 번인가 봤는데 다 양식만 먹었잖아요.”

“다른 거 먹고 싶으면 말로 하지 그래.”

“다음 번엔 밥으로 가죠.”

“진짜 말하네…….”


보쿠토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모으고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말 하라면서요.”

“아 누가 뭐래. 요리나 주문해.”

“오늘의 코스로요.”

“…….”


주문을 고르는 데에 기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간결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보쿠토는 괜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표정으로 메뉴판을 펼쳤다. 하지만 평소 즐겨 먹던 메뉴도 오늘은 괜히 끌리지 않아서 결국 주문은 오늘의 요리 2인분이었다.


“뭡니까.”

“뭐가.”

“아무것도 아니면 말고요.”

“아니, 야, 너…….”

“말씀하세요.”


아카아시가 어느새 비운 물잔에 다시 물을 채우며 말했다. 들어는 주겠다는 투였다. 보쿠토는 손에 쥐고 있던 포크가 그만 휘어지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서 다시 펼쳐 내려놓느라 할 말을 깜빡하고 말았다.


“아니……. 아니다. 밥이나 먹자.”


할 말 없으면 말고요, 아카아시는 또 그렇게 대꾸하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하얀색 종이로 만든 것 같은 네모난 포였다. 가장자리를 가볍게 비틀어 뜯더니 안에 든 것을 입에 털어넣는다. 다 비운 포를 반으로 접어 테이블 구석에 내려놓고 물을 마시는 것까지 익숙한 동작이었다.


“너 약값 필요하냐?”

“…….”


아카아시가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서둘러 양손을 내저었다.


“아니 내 말은 어디 아프거나 그러냐고. Drug, 그런 말이 아니라.”

“비타민B입니다. 영양제요. 신진대사를 돕고 암을 예방하죠.”

“아, 어. 그래…….”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이 아카아시에게 가면 다시 시위에 얹혀 되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보쿠토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렇게 박한 대우를 받아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뭐지 얜? 아니, 내가 문젠가?’

“……그쪽도 영양제 드셔야 할 나이 아닌가요, 이제?”

“이제? 이제까진 아니거든! 너랑 한 살 차이 나거든!”

“그러니까 드실 때 아닌가 해서요. 피로에는 밀크시슬도 좋습니다. 칼슘도 좀 드세요.”

“뼈는 튼튼하거든.”

“아, 예민하신 거 같길래.”


이 때는 정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 했는데 때마침 요리가 나와버리는 바람에, 보쿠토는 결국 다시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



“너 그 뭐냐…….”

“?”


디저트까지 말끔하게 끝을 낸 아카아시가 스푼을 내려놓으며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보쿠토가 조금 떨리는 눈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말할 수 있냐…….”

“제가 어떻게 말하는데요?”

“듣는 사람이 진흙으로 숨쉬는 기분이 들게.”


남들보다 풍족하게 누리며 자랐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남들보다 배로 여유있는 삶이었다는 것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아시와 있는 매분 매초가 그를 새삼스레 일깨워주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호화롭고 안락한 꽃밭을 거닐며 살았는지!


“연애는 곤란하다면서요?”

“어.”

“그래서 그런 건데, 왜요. 불편하세요? 살갑게 할까요.”


일이니까요, 고용주 말씀대로 하죠. 아카아시가 냅킨 끝자락으로 입매를 닦으며 대꾸했다. 


보쿠토는 그 말에 입술 끝을 악물었다. 아카아시의 말인즉슨 모든 게 그의 자업자득이란 뜻이었다. 평범한 경우였다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코웃음 치고 흘려들었을 얘기인데, ‘살갑게 할까요.’라는 한 마디에 흔들리고 말았다. 


‘입만 한 번 벙긋하면 저 클레이모어같은 성미를 죽일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에 더 자존심이 상한 보쿠토가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릴 때였다.


“코타로 군?”


보쿠토와 아카아시가 동시에 한 곳을 바라보았다. 테이블에 다가온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을 뗄 수 없이 호화로운 차림새인데 표정만은 천진난만하기까지 했다.


“어……리카.”

“요즘 바쁘다더니, 살 빠진 것 좀 봐. 이 쪽은 누구? 처음 뵙네요.”


천진난만한 소녀 같은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이 보쿠토의 옆에 서더니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누군가 언뜻 보고서는 여자친구가 아니라 아내 아니냐고 할 법한 동작이었다. 아카아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 없이 남은 음료만 말끔히 해치웠다. 그 표정에 보쿠토가 한 번 표정을 구겨뜨렸다 펴고는 여자의 팔을 풀었다.


“내가 결혼할 사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내가 결혼할 사람이라고. 만나서 반가웠다, 리카.”

“코, 코타로 군? 코타로 군! 잠시, 그게 무슨, 무슨 말이야! 그냥 애인이지? 잠깐 만나는 거지?”

“아니. 결혼할 거라니까. 케이지, 가자.”


여자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크게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다음에 또 보자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뜬다.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쳐다보았다. 


“대단하네요.”

“뭐, 뭐가.”

“잠깐 만나는 사이 정도는 용인해줄 의사가 있으셨나 본데요. 결혼만 그쪽하고 해주면.”

“누가 걔랑 결혼한대!? 난 너랑 해! 너랑! 일단은!”

“몇 명 더 있습니까?”


웨이터가 계산을 끝낸 카드를 다시 가져다주었을 때 아카아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레스토랑 밖으로 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승강기에 오르며 보쿠토가 미간을 모은 채 반문했다.


“뭐가 몇 명이야?”

“‘애인정도라면 괜찮다’라고 말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는 겁니다. 혹은 ‘인정 못해’ 뭐 그런 말을 할 사람도요. 저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싶네요.”

“야! 고용주 명령이다. 너 말, 그, 뭐냐, 그……그! 그래! 순하게 해! 순하게!”

“아, 그 제안은 취소입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아니겠네요.”

“뭐?! 야! 뭐가! 왜! 뭐가 문제야!”

“그래서 몇 명이나 더 있냐니까요.”


까닥하다간 뺨도 맞겠는데요. 아카아시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보쿠토는 정말로 목끝까지 반박할 말이 치솟아 올랐는데 그 모든게 왕창 엉켜버리는 기분에, 승강기가 지하까지 내려가는 내내 입만 버끔거리고 있어야 했다. 


“문 열어주세요.”


아카아시는 옆에서 보쿠토가 머리 뚜껑을 열 두번은 여닫고 있어도 개의치 않고서, 보쿠토의 자동차 보조석에서 차문을 가볍게 노크하며 그를 독촉했다. 자신에게 달려들 보쿠토의 전 애인들이 몇 명이나 되느냐보다 지금 당장 그가 안착할 자동차의 시트가 더 중요하다는 투였다. 


보쿠토는 하얗게 재가 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는 자동차 열쇠의 전자버튼을 눌렀다. 삐빅하는 전자음과 함께 잠금이 풀리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보쿠토는 레스토랑에서부터 아카아시의 학교로 다시 돌아가는 길 내내 아카아시에게 반박할 말을 쥐어짜냈지만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전혀 모르는 듯이 ‘밥 맛있었습니다.’라는 산뜻한 한 마디만 남기고서 차에서 내려섰다. 보쿠토가 붙잡을 새도 없이 바람처럼 날렵했다. 


“쿠로오 개자식…….”


연소되지 못한 단어들이 그의 가슴안에 갑갑히 쌓여가고, 보쿠토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이 인연을 주선한 당사자를 향해 분노를 불태웠다. 하지만 쿠로오가 그의 뇌리에서 다섯번쯤 불타 재가 되어도 학교로 향하는 아카아시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어디야?》


아카아시는 전화를 받자마자 용건부터 묻는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지야 알고 있었지만.


“학교입니다. 그리고 일 외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을텐데요.”

《일이니까. 아, 보인다.》


그리곤 대뜸 전화가 끊어졌다. 아카아시는 ‘보쿠토 씨’라고 이름이 떠 있는 액정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서 함께 걷던 친구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대답도 하기 전에 멀리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 아카아시~!”


학교 정문 입구에 유선형의 새카만 스포츠카 한 대가 주차되어 있다. 거기에 기댄 남자가 휴대전화를 뒷주머니에 넣으며 아카아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카아시는 누구냐고 묻는 친구들의 말에 못 들은 척하며 한숨을 꾹 눌러 참았다. 


먼저 자리를 비켜주는 친구들이 연신 이쪽을 흘끗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아카아시는 그 쪽으론 더 이상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 애인 데리러 오는 게 뭐 꼭 일이 있어야 할 수 있나?”


보쿠토는 당연한 일을 한다는 투였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쪽 댁에 가서 제가 애인인 척 해드리면 되는 일 아닙니까.”

“어제 제대로 얘길 못했는데, 이래봬도 귀한 장손이거든. 지켜보는 눈이 많다고.”


보쿠토가 엄지와 검지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즉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갑자기 데려가서는 결혼할 사람이라 말하는 건 통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였다.


“……평상시에도 지속적인 애인 행세에 대해서는 말씀 안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어제 제대로 얘길 못했다고 말했잖아. 방금.”

“하…….”


아카아시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내쉰다. 보쿠토가 그 모습을 보고서 이마 사이에 힘을 주었다. 


“뭔데.”

“저 바쁩니다.”

“밥만 먹어. 밥도 안 먹고 공부하진 않을 거 아냐.”

“…….”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라서, 아카아시는 허리에 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고민했다. 그리고 한참의 고민 끝에 아카아시는 손등으로 이마를 한 번 꾹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제 탓이니 특별히 추가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저녁 먹으러 가죠.”

“…….”


보쿠토의 눈썹과 입술 끝이 동시에 꿈틀했지만 아카아시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보조석 문을 열었다. 그대로 앉으려고 했던 아카아시는 보조석을 차지하고 있는 꽃다발을 보았을 때야 보쿠토를 돌아보았다.


“이건 뭡니까?”

“뭐긴 뭐야. 너 주려고 가져왔지.”

“엊그제 만나고 처음으로 다시 보는데 꽃다발을 가져오셨다고요?”

“아 사귀는 사이엔 꽃도 주고 그런 거 아냐? 그냥 좀 조용히 받아주면 안 되냐?”

“…….”


보쿠토가 한숨인지 짜증인지 아니면 투정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팩 소리쳤다. 언성이 높아져 지나가던 사람이 돌아보기까지 했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곤 꽃다발을 챙겨들고 보조석에 앉았다. 보쿠토는 대꾸도 하지 않는 아카아시를 보고서 기가 막힌단 얼굴로 운전석에 앉았다.


“뭐 먹을 건데?”

“저한테 묻습니까?”


보쿠토가 유려하게 운전대 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러 와, 꽃도 줬지, 너도 조금은 일 하라고. 먹고 싶은 것 정도는 고를 수 있잖아.”

“빨리 먹을 수 있는 거요.”

“……오냐, 알았다.”


툭 튀어나온 아카아시의 대답에 입술을 한 번 악물었던 보쿠토가 씩 웃으며 차도 위에 자신의 자동차를 올렸다. 스포츠카는 미끄러지듯 차도를 가르며 나아갔고 아카아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꺽 메뉴를 말하지 않은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


“원래 예악 안 하면 못 들어오는 데지만 말이지. 먹고 싶은 거 맘껏 골라.”


보쿠토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의기양양하게 말했고 이번엔 아카아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서버가 그의 얇은 카디건과 전공서적들, 그리고 꽃다발까지 보관해주겠다며 가져갔다. 아카아시는 불이 붙어 일렁거리는 티라이트를 노려보았다. 


레스토랑의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에서 부드럽게 깨어진 빛이 흩어지며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아뮤즈 부쉬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리한 백합 조개에 와사비를 사용한 소스가 곁들여져 나왔다. 직원이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해주고 자리를 뜨자마자 보쿠토가 낼름 한 입에 털어넣었다. 


아카아시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빨리 먹을 수 있는 거라고 말 했잖습니까.”

“여기 요리 금방 금방 나와. 그보다 빨리 골라야 빨리 나오지 않겠냐?”


씩 올라간 보쿠토의 입꼬리가 전적으로 고의라는 걸 만천하에 밝히고 있다. 그가 턱짓으로 메뉴판을 가리켰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푹 내쉬곤 자신 앞에 놓인 아주 작은 그릇을 바라보았다. 직원이 뭐라고 했더라, 아카아시가 고민하는 찰나에 보쿠토가 턱을 괴고서 말했다.


“백합. 맛있다니까, 여기. 얼른 먹어~!”

“재밌나보군요.”

“뚱한 얼굴 마주보고 있는 게 뭐가 재밌다고.”


아카아시는 밉살맞은 소리나 하는 고용주를 한 번 흘끗 보고서는 요리를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조금도 비리지 않은 바다 향이 감도는가 싶더니 곧 조개의 맛이 입안에 퍼졌다. 조개를 모두 넘겼을 땐 와사비의 상쾌한 매운맛이 입맛을 다시게 했다. 정말로 맛이 있었기 때문에 아카아시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리고 마주보고 있던 보쿠토가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비끗했다.


“우, 우왓!”

“뭡니까. 불장난 합니까?”


아카아시가 미간을 모으고선 흐트러진 티라이트를 바로잡았다. 보쿠토가 부끄러운지 헛기침을 한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젓다가 적당히 요리를 골랐다. 


그와 동시에 아주 여유롭고 맛 좋은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


“집 어디랬지?”

“학교요.”

“엥?”


놀랄 만큼 느긋한 저녁식사가 끝나고, 자연히 아카아시를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했던 보쿠토는 양손에 핸들을 쥔 채 옆을 돌아보았다. 아카아시는 품에 차곡차곡 전공 서적을 쌓은 채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다.


“연구실 들어가 봐야 합니다. 학교로 가주세요.”

“해 다 졌는데?”

“해 뜰 때까지 해야 하는 수가 있으니까 빨리 좀 가주시죠.”

“쳇, 잘 먹어 놓고 말은…….”


보쿠토가 스틱에 손을 올리며 투덜거렸다. 아카아시는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쥔 채 빠르게 답장하기 시작했다. 보쿠토는 운전하면서 옆을 흘끗거리긴 했지만 특별히 무언가를 묻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저녁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져 늦는 것에 대해 연구실 선배들에게 메세지를 보내며 팔에 걸쳐 안다시피 한 꽃다발을 한 번 더 추슬렀다. 무릎에는 전공책을 삼단으로 쌓고 그 위에 꽃다발을 올린 채 메세지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향기가 있는 꽃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데 이 꽃다발에선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여기저기 다 연락을 마친 아카아시는 뻣뻣한 목을 한 번 주무르며 차창에 기댔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 위에는 자동차의 빛들이 별처럼 점멸하고 있었다.


“다음부터.”

“응?”

“또 이런 식으로 레스토랑 고르면 추가금 청구할 겁니다.”

“……뭐? 야! 내가 밥도 샀는데!”

“밥은 원래 사기로 돼있었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아니 그럼 네가 처음부터 똑바로 먹고 싶은 걸 정했으면 됐잖아!”

“제가 빨리 먹을 수 있는 거라고 말할 때는 요리 나오는 시간 포함 20분, 왕복시간 포함 40분 만에 먹을 수 있는 메뉴입니다.”

“아니, 얘가 사람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네?”

“그리고 일주일 스케쥴은 일주일 전에 말씀해 주시고요. 오늘처럼 갑자기 찾아오지 말고.”

“우리 만난 게 이틀 전인데 시간을 거슬러 스케쥴 잡아야 됩니까, 아카아시 님?”

“이번 주는 어쩔 수 없으니 다음 주 스케쥴부터 잡죠.”

“…….”


보쿠토는 핸들을 꽉 쥐고서 전방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누가 봤으면 신호등의 빨간불이 그의 대단한 원수라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말에 대답한 건 그의 차가 아카아시의 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을 때였다.


“저녁은 일주일에 세 번 같이 먹어. 월, 수, 금. 시간은 너 편할 때에 맞추고 토요일은 데이트다.”

“……데이트…….”


아카아시가 숨기지 않고 ‘우웩’하는 얼굴이었기에 보쿠토가 또 발끈했다.


“아 계약이 그거잖아!”

“그랬죠. 데이트는 어떤 데이트인가요.”

“……영화보고 저녁 먹고 헤어져.”

“네, 그렇게 하죠.”

“아? 정말?”


두 사람이 대화를 한 모든 시간 가운데에 아카아시가 순순히 대답한 건 처음이었기에 보쿠토가 눈까지 크게 뜨고서 그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는 뭘 그렇게까지 반문 하냐는 뚱한 표정으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네. 문제될 거 없잖아요. 월수금 저녁, 토요일은 영화 추가.”

“그, 그래.”

“가보겠습니다, 그럼.”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곤 안전벨트를 풀었다. 품에 전공책과 꽃다발을 추스르고 일어선다. 보쿠토는 핸들에 기댄 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차에서 내려 문을 닫기 위해 창문을 손에 쥐었던 아카아시가 문득 할 말이 떠올랐다는 듯이 살짝 안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응? 왜?”

“오늘 저녁 맛있었습니다.”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아카아시는 차 문을 닫고 등을 돌렸다. 해가 뜰 때까지 실험실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농담만은 아니었다.







계약서에 서명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카아시를 따라 나서려고 했던 쿠로오는 자신의 뒷목을 낚아채는 보쿠토의 손길에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아카아시는 눈치 챘다는 듯이 굳이 따라올 필요 없다는 표정으로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카페를 나섰다.


“아 왜.”

“너는 소개를 해준다는 게 저런 애냐?”

“비밀 확실히 엄수, 어른들에게 프리패스, 네 녀석보다 돈이 더 필요한 사람이 어디 흔한 줄 알아!?”

“어른들에게 프리패스? 저게 프리패스야?”


앞에서 개소리 하고 있으면 연령성별을 불문하고 눈빛으로 두드려 팰 것 같은 저 기세를 못 봤느냐 외치는 보쿠토에게, 쿠로오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 끝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어디 유서 깊은 가문 독자라던데. 지금은 혼자 남긴 했지만. 너희 집에 데려가기만 해도 그 아카아시냐며 바로 통과 확신한다.”

“근데 왜 그런 집안 애가 돈이 필요해.”

“방금 혼자 남았단 말 못 들었냐?”

“엑…….”


보쿠토는 뇌에서 생각이 엉킨 표정으로 쿠로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쿠로오는 손을 내젓고 설명하기를 관두었다.


“어쨌든 그 얘길 당사자에겐 하지 말고. 일은 확실하니까. 아 그리고 그렇게 맘에 안 들면 계약을 하지 말지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나보고 뭐라고 해?”

“야! 아까 그 상황에서 어떻게 안 한다고 할 수가 있냐!”


보쿠토는 양손으로 자신의 팔을 격렬히 쓰다듬으며 부르르 떨었다. 그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입금 계좌와 은행까지 알려주는데 거기서 ‘아 됐고요~!’이런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평소엔 잘만 하면서.”

“너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보쿠토는 투덜거리고 있긴 했지만 정말로 질색이진 않은 듯했다. 쿠로오는 턱을 괴고서 얼음이 반쯤 녹은 커피를 휘휘 저었다. 아카아시가 있던 자리에 놓인 커피는 한 모금도 줄지 않은 채였다. 


“근데 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돼?”

“우리 할머니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보쿠토는 머리를 긁적였다. 조모의 건강검진 결과라면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할머니 마지막 소원인데 뭐……. 어쩌겠냐.”

“그 마지막 소원 말씀하는 방식이 살벌도 하다. 너희 집안 사람들은 다 그러냐.”


보쿠토가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 쿠로오는 한탄을 삼키곤 고개를 흔들었다. 아끼는 손주의 결혼식을 보고 싶다는 말을, 결혼하지 않으면 상속을 젖혀버린다는 말로 할 수 있는 집안이라니.


“근데 나보다 돈이 중요한 애라는 건 무슨 말이야. 내가 바로 돈인데?”


커피나 쭉 들이켜고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다 들어갈 생각이었던 쿠로오는 순간 커피에 사레가 들려 격렬하게 기침했다. 보쿠토는 당연한 말을 하는 듯이 담백한 얼굴이었다. 쿠로오는 헬쓱한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크헉, 흡, 흐억……. 그러니까 걔도 좋아하는 애 따로 있어.”

“아, 그래? 근데 나랑 일해도 된대?”

“멀리 있나보더라.”

“뭐 나는 그거까진 책임 안 지고 내 일에도 껄쩍대는 거 용납 못하니까 알아서 하라 그래라.”

“네가 말해. 걔랑 계약은 네가 했잖아.”


쿠로오는 양손을 들어보였다. 소개시켜줬으니 자신은 그걸로 손 떼겠다는 뜻이었다. 보쿠토가 한쪽 눈만 찌푸린 채 쿠로오를 노려보았다.


“나중에 네 후배 울렸다고 나한테 뭐라 하지 마라.”

“글쎄, 누가 울지…….”


쿠로오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듣지 못한 보쿠토는 커피의 얼음을 흔들어 마시느라 여념이 없기만 했다. 쿠로오는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고 빙긋이 웃었다. 


*


“걔가 다 자기 좋다는 애들만 봐서 그래. 네가 이해해라.”

“네? 뭐가요?”


첫 대면에서 아무래도 지나치게 솔직한 모습을 보인 보쿠토 탓에 아카아시의 기분이 상했으리라 생각해서 굳이 저녁을 먹자고 불러냈는데, 아카아시는 도리어 쿠로오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쿠로오가 무어라 응대하려 한 순간 때를 맞추어 요리가 나왔다. 쿠로오가 다음 말을 할 수 있었던 건 접시 위의 요리가 반쯤 비었을 때였다. 


“아……. 그 사람이요.”


아카아시가 물잔을 들어 입을 축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쿠로오가 말을 해서 그제야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그 전까지는 정말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눈치다.


“고용주의 소양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고용주?”

“돈을 제때 잘 주면 됩니다. 좀 바보여도.”

“……입금 됐냐?”


아카아시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즉 개소리로 치부한 건 전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단 말이지…….’


여러 가지 의미로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맺어준 게 자신이지만 정말 어디서 이렇게 엮였나 싶을 정도로. 쿠로오는 식사를 마무리 지으며 아카아시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폈다. 


“아, 그리고…….”

“네?”

“보쿠토 녀석한테 슬쩍 말해놨거든. 연애로 얽힐 걱정은 하지 말라는 얘길 하다보니까…….”


쿠로오의 그 다음 말은 사과였기 때문에 아카아시가 그보다 빨리 말을 잘랐다.


“잘됐네요. 서로 불필요한 걱정에 에너지 쓸 필요 없고.”


말미는 서늘해도 근본은 배려인 것을 알고 있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웃음에 이쪽을 노려보는 시선을 마주하곤 숨을 쏙 들이켰다. 


“그런데 너 진짜 유학, 가려고?”


앞뒤에 생략된 말은 아마 ‘이렇게 돈을 구해서’ 정도일 것이었다. 디저트에 스푼을 올리던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였다.


“그건 이미 결정됐습니다. 가기로. 돈을 구한 건 유학자금이 아니라 투자자금이 필요해서고요.”

“……투자자금?”

“빨리 돈을 벌어야 하니까요. 좋은 투자처가 보이면 투자해야죠.”

“……그래, 뭐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유학은 언제?”

“내년이요. 내년 9월. 출국은 8월쯤이겠지만요.”


지금이 가을이니 딱 일 년 조금 안 되게 남은 셈이었다. 그 전까지 보쿠토와의 일은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다. 쿠로오는 아카아시를 따라 느긋하게 디저트를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준비하면서 정리하면 되겠네.”

“네.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머쓱하다, 야.”


쿠로오가 정말 조금 부끄럽기까지 해서 손을 내젓는데도 아카아시는 굽힘없이 당당한 눈빛이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좋은 고용주니까요.’라는 말이 깃들어있다. 즉 바보지만 돈은 잘 주니 됐다는 뜻이다. 


“그 뭐냐……. 너무 혼내지 말고.”

“어떻게 제가, 고용주께 감히 그러겠습니까?”


아카아시가 능청스러울 만큼 매끄럽게 말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욱 불안해진 쿠로오였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두 사람이 해나가야 할 여정이었다. 하지만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 길, 결국 쿠로오는 한 마디 더 덧대고 말았다.


“그 뭐랄까, 꾸중보다는 칭찬이 더 먹히는 그런 놈이니까…….”

“저한테 애 맡기십니까?”

“지금 굉장히 그런 심정이 됐어.”


저 가차 없는 후배가 손에 쥔 건 돈밖에 없는 바보를 보고서 뭐라고 할지 눈에 선하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선배를 보는 아카아시의 눈빛이 형용하기 어려운 색을 띄고 있었다.


“뭐, 고양이 키우듯 하면 되는 건가요.”

“개과긴 한데…….”

“잘 알겠습니다.”

“알겠어!?”

“요는 애완동물이라는 거죠.”


아니……. 그게……. 


뭔가 지적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없었다. 마음 속 깊은 내면에서 후배의 말에 동감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애써 입술만 달싹이던 쿠로오는 이번엔 이 후배를 위하여 어깨를 붙잡았다.


“그, 뭐냐, 어, 동물이긴 한데 개로 치면 늑대고 고양이로 치면…….”

“호부견자 없단 말씀입니까? 뭐 그 보쿠토 가문 장손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어 응 근데 그게…….”


쿠로오는 울상을 애써 다잡았다. 자신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보쿠토는 같은 항렬 내에서도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건 그가 보쿠토 가문의 첫째라서 그 핏줄을 이어받은 덕이라기 보단 저 혼자 어디 별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듯이 강맹한 성정을 발하는 것이었다. 


짐승이라 한다면 그 중에서도 최상위 포식자, 흉폭한 맹수인 그는…….


‘인간계 룰을 안 따른단 점에서 더 그런 거거든…….’


쿠로오의 심려 넘치는 눈빛을 받은 아카아시는 얇은 트렌치코트를 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겠습니다.”


그 말이 흡사 ‘개에게 물리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로 들렸다. 


쿠로오는 아끼던 인형을 사촌에게 빼앗기는 심정을 십분 느끼며 그런 아카아시를 배웅했다. 어느 쪽을 아끼는 장난감으로 여겼는지는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 




계약연애 혹은 결혼 보쿠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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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필요해.”


쿠로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저런 심각한 얼굴로도 얼마든지 터무니없는 사고를 친다는 걸 쿠로오는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사람.”

“후쿠오카 쪽에 작은 섬 기억나?”

“기억 나겠냐…….”

“아 있어, 우리 할머니 거.”

“그래 그렇겠지. 근데.”

“할머니가…….”


보쿠토는 말을 하면서도 실시간으로 좌절이 점점 깊어지는 얼굴이었다. 쿠로오는 무성의한 표정 그대로 음료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고 쭉 들이켰다. 


“할머니가 그 섬을 내 사촌한테 물려주겠대!”

“다른 섬 달라고 해.”

“그 섬은 특별하단 말야! 꼭 내가 가져야 한다고!”

“아-아아, ‘그 섬’……. 근데 무슨 사람이 필요해.”

“결혼할 사람 데려오면 축하 선물로 나한테 주겠대, 할머니가. 그 섬을.”

“…….”


쿠로오는 다시 한 번 빨대를 쭉 빨았다. 앞에 앉은 보쿠토는 쿠로오가 해결책을 손에 쥐고 있다는 양 간절한 얼굴이었다. 쿠로오는 커피를 내려놓고 지끈거리는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네 결혼 문제는 해결했지 않냐?”


해결을 했고 말고, 그 때의 난리를 생각하면 당연히 해결이 되었어야만 한다.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험악해지려는 표정을 다스리며 심호흡했다. 보쿠토는 그런 쿠로오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했지, 했는데.”

“그런데?”

“그래서 어머니 아버진 이제 손 놨는데 할머니 말론 내가 말한 바로 그 사람 데려오라고.”


보쿠토가 헤헷, 하고 웃었기 때문에 쿠로오는 자신의 손에 칼이 들려있지 않다는 사실에 잠시 속으로 감사 기도를 올렸다.


“넌 기억 안 나겠지만 그 도쿄 일보 회장 딸이 참 예뻤거든.”

“아 그랬어?”

“그리고 손도 매웠거든…….”

“아, 그랬지.”


보쿠토가 머쓱하게 웃더니 ‘그 때 고마웠다!’ 한 마디로 넘어가려 한다. 쿠로오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에 든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러지 않으면 그 도쿄 일보 회장의 영애와 같은 짓을 할 것 같아서였다. 


“이 개자식아, 사람이 대신 선보러 나가서 커피 뒤집어쓰고 뺨까지 맞아주고 와서는 다리 부러진 네놈 수발까지 다 들어줬더니 이제 와서 그게 아무짝에 소용이 없다고!”


하지만 결국 소리치고 말았다. 벌떡 일어나서 외치는 소리에 카페 안이 삽시간에 침묵에 잠겨들었다. 모두가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다. 보쿠토마저 깜짝 놀랐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쿠로오는 차마 더는 소리치지 못하고, 그 와중에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거듭 사죄의 뜻으로 고개를 꾸벅 꾸벅 숙여 보인 다음 다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쿠, 쿠로오……. 화났어?”

“너는 조용히 있어라, 지금 생각하고 있으니까.”

“넵.”


쿠로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침착하게 생각하려 애썼다. 


보쿠토의 연애결혼에 대한 열망은 단지 열망만이 아니었는데, 보통 그와 비슷한 이들이 어떠한지 비추어봤을 때 대단히 유별난 경우였다. 연애야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자유롭게들 하지만 대개는 그 이후에 격이 맞는 집안끼리 혼사를 맺기 마련이고 심지어는 아직도 매파를 보내는 고루한 전통을 고집하는 가문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보쿠토는 그 모든 것에 대하여 격렬히 거부했다. 본인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고 유년기부터 으름장을 놓았는데 집안 어른들이야 당연히 아직 철없는 도련님의 지나가는 말로 생각해 귀애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 으름장이 스물다섯 넘어서까지 지속됐을 때는 슬슬 애간장이 타기 시작하여, 거대 언론사 회장의 영애와 게눈 감추듯 맞선을 놓아주었던 것이다.


물론 보쿠토는 얌전히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어떻게든 수를 쥐어짜 그 선에는 쿠로오를 대신 보내고 자신은 자택 3층 그의 방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소동을 벌였다. 그걸 단순한 소동만으로 끝내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의사 표현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 같다며 정말로 뛰어내린 것이다.


그 사건은 보쿠토의 다리만 부러진 정도로 마무리되었지만 부모 입장에서야 대경실색하여 더는 강요할 수 없게 되었고, 보쿠토는 다리 하나면 싸게 먹혔다며 행복에 겨운 병실 생활을 보냈다. 거기서 기쁘지 않았던 건 보쿠토의 부모님과 그 언론사 회장의 영애에게 뺨맞고 커피 맞고 돌아온 쿠로오뿐이었다. 


그것으로 쿠로오는 보쿠토의 결혼 문제가 더 이상 수면 위로 올라올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줄곧 그랬었다…….


“아 그러게 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을 해, 이 멍청아! 처음부터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결혼한다고 했어야지!”

“그게 딱히 거짓말은 아닌…….”

“뭐가 아닌데? 아홉 살 때 만난 그 작은 꼬마 숙녀? 얼굴 못 본지 이제 20년 돼간다 야? 찾긴 했냐? 찾아보긴 했어?”

“아 쿠로오! 자꾸 삐딱하게 굴래!?”

“삐딱하게 구는 건 너야! 탈선한 기차는 너라고!”

“하여튼 그래서 빨리 아무나 데려가야 된단 말야아아!”

“너는 살인이 불법이라서 산 줄 알아라.”


쿠로오의 목소리가 정말로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보쿠토는 입술을 삐죽이며 턱을 괴었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치만 진짜 급한데…….”

“……너 좋다는 애들 많잖아. 아무나 데리고 가서 여자 친구 역할 좀 해달라고 하면 되지.”

“비밀 엄수가 핵심이라고. 그리고 진짜 결혼하는 거라고 착각하면 어떡하냐?”


보쿠토 본인의 것은 물론이고 그 가문의 재력을 생각하면, 가짜 결혼 계약 같은 걸 하자고 했다가 상대방이 미친 척 눈 딱 감고 진짜 결혼으로 밀어붙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막연한 불안만은 아니었다. 


쿠로오는 그런 보쿠토를 빤히 쳐다보다 혀를 찼다. 


“보수는 제대로 쳐줄 거냐?”

“응? 쿠로오 너는 안 되는데. 우리 부모님도 너 다 아니까 너랑 결혼하는 척 해봤, 앗, 악, 아야! 아파! 아파아파아파!”


보쿠토는 쿠로오에게 거나하게 등짝을 엊어 맞고는 눈물이 핑 고인 얼굴로 쭈그러들었다. 쿠로오는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고 손으로 부채질했다. 


“이 개자식이 진짜 미친……소리 작작 하고. 사람 구해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보수는 비싸게 쳐줘라.”

“어? 진짜?”


눈물까지 맺혀있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쿠로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이쪽은 아카아시 케이지. 우리 과 후배였어! 아카아시, 이 개자……. 이 고용주는 보쿠토 코타로. 보쿠토, 인사 해.”

“…….”

“…….”


보쿠토는 뚱한 얼굴로 자신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옆에서 쿠로오는 산뜻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웃으며 두 사람을 소개해주고는 디저트를 고르러 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뭐야?’


쿠로오가 데려온 사람은 보쿠토 그의 예상과는 한참이나 다른 사람이었다. 막연히 어른에게 선보이기에 쓸 만한, 살갑고 애교 있는 인상의 사람을 소개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애교는 무슨 한 블록 밖에서도 냉풍이 불겠는데.’


얄팍한 턱선에 서늘한 눈매 하며, 생기기야 모자람 없기는 했으나 가만히 있기만 해도 찬바람이 쌩쌩 분다. 심지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마저도 무관심하기 짝이 없었다. 보쿠토는 자신을 저렇게 카페의 장식물 쳐다보듯 보는 사람을 살면서 오늘 처음 봤다.


“응? 뭐야? 인사 했어? 왜 낯가리고 그러냐, 보쿠토.”

“아니, 쿠로오. 야. 너…….”

“확실해. 이 형아 말 믿어라.”

“…….”


아카아시라는 이름의 남자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쿠로오가 보쿠토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둘 사이에 잠깐의 기류가 흐르고 마침내 보쿠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내가 아카아시한테 기본적인 것만 얘기 했으니까 지금부…….”

“야.”


쿠로오가 웃는 낯으로 ‘지금부턴 커피라도 한 잔 하면서 자세한 걸 얘기해보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부르는 게 빨랐다.


“내가 지금 사정이 사정이라 당장 사람이 급해서 어쩔 수 없는데.”

“보, 보쿠토?”

“너 진짜로 결혼해서 우리집 들어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알겠냐? 나랑 진짜로 연애하고~ 그런 거 생각도 하지 말고.”


당황한 쿠로오가 퍽 하고 보쿠토의 등을 내리쳤지만 그의 냉랭한 표정을 풀지는 못했다. 쿠로오는 급히 대상을 바꾸어 아카아시를 향해 ‘이 녀석이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닌데 너를 처음 봐서 낯을 가리나보다’하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아카아시의 말이 더 빨랐다.


“저도 사정이 급하지만 않았으면 이딴 알바는 안 합니다.”

“이, 이딴 알바? 야!”

“계약서 확인부터 하시죠.”


뭔가 서류철 같은 걸 들고 왔기에 공부만 한 샌님인가, 라고 무심결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서류가 그 서류가 아닌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쿠로오가 기껏 주문해온 디저트와 커피를 테이블 구석으로 밀어버리곤 서류철 안에 든 종이를 꺼내 올려놓았다. 탕 하는 소리가 나고 덩치 큰 남자 두 사람이 스스로도 모르게 움찔했다.


“일당은 xxxxx엔 이상입니다. 업무 외적인 연락은 일절 받지 않습니다. 스케쥴은 일주일 전에 미리 조정해주시고, 관계에 필요한 설정이 있다면 제시해주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허용하는 스킨쉽은 다른 사람이 앞에 있을 때 한정하여 손잡기 혹은 팔짱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추가금과 필요성 여부에 따라서 고려해보겠습니다. 계약 도중에 필요한 물품은 그쪽을 통해 일체 협력 받는다는 조건이며 모든 물품은 반납하지 않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