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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리리입니다.

이번 행사(보쿠토 배포전, '에이스의 마음가짐')에는 보쿠아카 소설 신간 '방과 후 연애 수업'과 구간 보쿠아카 장편 소설인 '허니문 아일랜드'로 참가합니다~!


위치는 로03, 허니버터링 부스에서 버터스님 벌꿀통님과 함께합니다^-^




방과 후 연애 수업 샘플 (클릭)


방과 후 연애수업의 경우 총 180p, 그 중에서 공개 원고 78p입니다. 한 권으로 완결되었습니다~!




+허니문 아일랜드 샘플 (클릭)


허니문 아일랜드의 경우 총 322p, 그 중에서 공개 원고 분량 약 150p입니다. 한 권으로 완결되었습니다.




통판은 7월 14일 디 페스타 이후로 예정되어 있어요^-^!! 






“아까 지나가던 타치바나 울던…데.”


교실로 돌아왔더니 같은 반이자 동시에 같은 배구부인 코노하가 조심스레 말을 붙여왔다. 보쿠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그래?”

“너한테 고백하러 간 거 아니었어?”


코노하의 질문에 보쿠토는 조금 읽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어, 그랬긴 했는데…….”

“어? 헉, 설마 거절했어?”


코노하가 몹시 믿기 어렵단 투로 반문했다. 과장한 기색이 선명하게 보이는 말투였다. 보쿠토는 조금 미간을 모으고서 코노하를 쳐다보았다.


“응, 거절했는데.”

“갑자기 왜?”

“갑자기라니…….”

“너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굴 거절한 적 없었잖아.”


코노하가 유난스레 묻는 말에 보쿠토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말하니까 꼭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그를 향한 모든 고백에 응한 것처럼 들렸다. 나름대로는 생각했던 것들인데. 모두.


“뭐 좀 더 준비되고 나서……. 안 바쁠 때 만나는 게 나은 것 같아서.”

“어떻게 갑자기 하루아침에 사람이 됐지?”


코노하가 보쿠토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함을 표출했다. 보쿠토는 발끈했지만 거기에 특별한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몇 마디 중얼대듯 대꾸하는 게 고작이었다.


“나도 다 생각이 있었어!”

“그 생각이라는 혹시 게 좋든 싫든 고백하면 다 받아준다는 거였어?”

“…….”


보쿠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코노하를 바라보았다. 코노하의 뒤에서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익숙한 후배의 그림자가 엿보인다는 생각은 착각인가?


“……아니 내가 그렇게 평소에 문제 있어 보였어!? 그럼 말을 좀 해주지!”

“얘 좀 봐……. 잘못은 네가 하고 고쳐주는 건 남이 해주냐? 무상 수리 서비스?”

“…….”


코노하의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보쿠토가 입을 다물자 코노하는 더욱 신묘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들여다본다. 보쿠토가 입술 삐죽이는 것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코노하가 이해되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어디서 벼락 맞았냐?”

“……무슨 말을…….”

“아니 사람이 갑자기 어떻게 변했지? 무슨 깨달음이 있었나 본데.”


보쿠토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코노하를 노려보다가 곧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뭐든지 간에 잘됐긴 하네. 드디어 우리 에이스가 철이 다 들고.”

“나는 평소랑 똑같아!”

“진짜?”


너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 코노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묻는다. 한쪽 눈만 조금 커진 그 표정은 보쿠토의 평소 얼굴을 흉내낸 것이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보쿠토가 억울하단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아니 그냥, 이번 한 번만 거절만 하고 온 거잖아. 내가 그냥 맘이 바뀌어서 그런 거지 뭐 그렇게 변했다고 자꾸….”

“다음에는 거절 안 할거고?”

“내가 좋아하는 애면 안 하지!”

“거봐, 변했다니까.”

“어디가!? 어째서!?”

“아카아시인가, 걔지?”


코노하가 알만하다는 투로 말했다. 뭐라 대꾸하기에는 코노하가 지나치게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목소리였다.


“너 요즘 친하게 지내는 후배.”

“네 후배기도 하잖아.”

“그런 것치곤 네가 너무 안 놔준다는 자각이 없고만.”

“뭐어!?”


보쿠토가 언성을 높였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덜컥 놀라서 몸부터 움츠렸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는데 코노하는 뒤로 물러나기만 했을 뿐 여전히 허여멀건 얼굴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보쿠토의 그 요란한 몸짓이라면 지난 1년간 지독히도 겪어왔던 것이다.


“부활동 할 때 네가 계속 걔랑 얘기하니까. 다들 이름 정도만 알지 걔랑은 말도 못 했다고.”

“그런…그런가?”


내가 그랬어? 보쿠토가 맹하니 묻는 말에 코노하는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쿠토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방해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네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을까나~?”


코노하의 말은 들어본 적이 있다. 보쿠토는 홀린 것 같은 얼굴로 코노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카아시도 그런 말을 했었다.


“역시 너…아카아시와 한패?”

“……너의 집중력과 산만함은 정말 따라갈 수가 없다 야…….”


코노하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를 챘다는 얼굴이었다. 보쿠토만이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알쏭달쏭한 얼굴을 하고 있다. 코노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됐든 잘 됐네. 잘 됐어.”

“뭐, 뭐가?”


보쿠토가 도대체 무얼 얘기하는 거냐고 캐물었지만 코노하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한 학년 위의 선배가 몹시도 성가십니다. 아카아시는 글짓기 대회에 나간다면 재미있는 제목으로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공을 챙겨 들었다.


‘누가 또 무슨 소릴 한 거야…….’


보쿠토는 말을 하는 것도 성가신데 말을 하지 않는 건 두 배로 성가시다는 걸, 아카아시는 지금 깨닫는 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오후 연습이 시작되자마자 달려와선 종알종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이며 그네들의 그 ‘수업’ 얘기며 바삐 할 텐데, 지금은 저 멀찍이 떨어져서는 어딘지 무언가 참고 인내하는 표정에다 시무룩함을 더한 얼굴로 여길 흘끔거리고만 있다.


‘할 말이 있으면 와서 하시지?’


뭔가 할 말이 있지 않고서야 저런 표정이 나오기도 어렵다 싶어서 다가가려고 하면 금방 다른 일이 생기거나 다른 누군가가 말을 붙여왔다. 그게 아니면 보쿠토가 홀연히 사라진다. 그러다가 또 정신을 차리고 나면 보쿠토가 무언가 꾹 참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


보쿠토의 저 전에 없던 이상한 반응을 생각하면 분명히 누군가가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이야기인지는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보쿠토는 온갖 것에서 온갖 반응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캐물어 볼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묘하게 피하는 것처럼 굴기에 오후 연습이 끝나고 개인 연습에서도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보쿠토는 오후 연습이 끝나자마자 ‘아카아시~!’라며 큰 소리로 다가온 것이었다.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 아카아시~! 오늘 연습 잘했어? 아까 너 누구지, 타쿠미였나, 토스 올리면서 짜증 냈지? 다 봤거든?”

“…….”


어찌나 신이 나서 말을 붙여오는지 이쪽에서 순간적으로 말을 잊을 정도였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이며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오후 연습동안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던 것에 대한 반동처럼 말을 폭포 같이 쏟아내고 있었다.


“오늘 누구랑 무슨 얘기 했어요?”

“너 말야, 답답…엥?”


활짝 웃는 얼굴로 신이 나서 말을 늘어놓던 보쿠토가 눈을 꿈벅였다.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보쿠토의 금색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가더니 시선을 피한다.


“아아니?”

“무슨 얘기 했는데요?”

“별 얘기 안 했는데~!?”

“누구하고 무슨 얘기 했어요?”

“아니 아무하고도 아무 말 안 했다니까.”

“코노하 선배하고 무슨 얘기 했어요?”

“어, 어떻게 알았어!?”


보쿠토가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고서 외쳤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보쿠토가 수선을 떨었다.


“아, 아니~! 별 얘기는 아니었는데! 아니 애들이, 아니 그러니까, 내가 너랑 있느라 애들이…너랑 얘기 못한다고 막…….”

“…….”

“나는 잘 몰랐는데 그렇다고 하니까! 그래서 얘기 할 수 있게…내가 옆에 없으면…….”

“…….”


아카아시는 이마를 감싸쥐었다. 보쿠토는 여전히 그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서 우물쭈물 설명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다른 애들하고도 얘기 많이 하라고….”

“무슨 수다 떨러 부활동 해요?”

“그건 물론 아니지만…….”

“그리고 남의 말을 너무 곧이 곧대로 듣지 좀 마세요…….”

“에엥.”

“코노하 선배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그 뜻이 아니라…….”


분명히 전후에 다른 얘기가 있었을 것이다. 아카아시는 보지 않아도 그 상황을 알 것 같아서 웃음을 꾹 참으며 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저도 대화는 하고 싶은 사람과 합니다. 저 알아서요.”

“응…….”

“선배가 그런 식으로 노력할 일이 아니란 거예요.”

“응…….”

“다른 사람하고도요.”

“다른 사람하고도?”

“그러니까 저 말고, 다른…가령 선배의 미래의 애인하고도요. 그 사람의 일은 그 사람하고 얘기를 하세요. 엉뚱한 사람하고 얘기해서 엉뚱한 결론 내지 말고요.”

“핫! 이것도 수업이야!?”

“수업이라기보단…네, 수업이요. 제 말 알겠죠.”


보쿠토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급히 적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언젠가 저 메모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잠자코 보쿠토가 메모하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메모를 다 마친 보쿠토가 상쾌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부활동 할 때도 계속 말 걸어도 되는 거야!?”

“그건 선배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제가 싫으면 말 안 거시면 되는 거고요.”

“아니 너는 무슨 말을 해도 꼭 그런 얘길 하냐!?”

“보통 싫을 때 아니고서야 대화 잘 하다가 안 하는 경우가 있긴 합니까?”

“어…….”


보쿠토가 우물거렸다. 과거 자신의 경험을 되짚어보는 것이었다. 마땅한 결과를 찾지 못한 보쿠토가 어물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설마 아카아시 너도 그렇게 생각한 거야!?”

“뭐 약간은요. 갑자기 말씀을 전혀 안 하시…….”

“아니야!”


보쿠토가 순식간에 가까워져서는 아카아시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쩡 하는 소리에 아카아시가 눈을 크게 떴지만 보쿠토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할 때 보쿠토가 다시 소리쳤다.


“그런 거 절대 아냐!”

“아, 알았어요.”

“아니라는 거 진짜 알겠어!?”

“지금 아주 잘 알겠으니까요. 정말로.”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가 뒤늦게 손을 놓았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아치는 듯했다. 목까지 빨개져서는 서둘러 부채질을 한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보쿠토에게 붙잡혔던 팔뚝을 살짝 주물렀다.


“아, 아팠어? 미안, 내가 힘이 너무…….”

“좋겠네요. 힘 세서.”


뚱한 목소리로 대꾸하면 또 안절부절 못한다. 후배가 마구잡이로 군다고 한 마디 할 법도 하건만 그러질 않았다. 아카아시는 헤아릴 수가 없어서 멀뚱히 보쿠토를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머리 한 쪽 구석에서 이 사람에겐 사실 이 모든 수업 같은 것이 쓸모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밀어냈다.


이 수업을 하자고 강요하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보쿠토였으므로, 그만 둘 시기를 정하는 것도 그일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수업에 대한 거절이라면 자신은 차고 넘치게 했다. 이 이상은 보쿠토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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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후로는 다가오는 보쿠토 배포전에서 회지로 뵙겠습니다~! 

180p로 완결되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x월 xx일 수요일 날씨 : 맑음

오늘은 집으로 가는 길에 교환일기장 삿다!

직원 누나의 추천 노트! 아카아시가 말한 대로

자물쇄도 있다.

무슨 말을 쓰지..

오늘 점심 때 먹은 메론 맛 소다 맛없는 거라서 아카아

시 줬다.

아카아시는 좋은 남자친구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 같다.

이너 스파이크 잘 넣고 싶다.

아빠가 타코야키 사 왔으면 좋겠다.


아카아시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차인다! 이 교환 일기장이라면 하루만에 차인다! 120퍼센트의 확률로 반드시 차인다! 어떻게 이런 걸 줘놓고 그렇게 기대되는 얼굴을 할 수 있지? 아카아시는 헤어지기 전까지 보았던 보쿠토를 떠올리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빨간색 잉크 펜을 먼저 집어들었다.


오늘은 집으로 가는 길에 교환일기장 삿다! → 샀다 입니다.

자물쇄도 있다. →자물쇠

오늘 점심 때 먹은 메론맛 소다 맛없는 거라서 아카아

시 줬다. →맛없는 거 또 주시면 죽습니다.

아카아시는 좋은 남자친구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 같다. →저는 평균입니다..

이너 스파이크 잘 넣고 싶다. →어깨 유연성 증진

아빠가 타코야키 사왔으면 좋겠다. →연비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첨삭을 끝내고 이번엔 검은 펜을 든 아카아시는 다른 쪽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첨삭에서 할 말을 모두 하고 났더니 이제 여기 와선 할 얘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려보내면 보쿠토가 얼마나 울고 불고 난리를 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x월 xx일 수요일 날씨 : 맑음

좀더 상대를 생각한 내용을 적으세요

그렇다고 저에 대한 것은 말고요

공통된 화제에 대한 거라거나 아니면

오늘 있었던 일 중에서 얘기 해주고 싶었던 일 같은 거요.

이너스파이크 연습을 할거면 카메라 같은..

녹화할 게 있으면 좋겠네요.


몇 마디 쓴 것은 좋았는데 일기장의 공백이 의외로 상당해서 부담스러웠다. 아카아시는 머리를 싸매고 내려다보다가 결국 더는 적을 말이 없어 노트를 덮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건 죽어도 남에게 들킬 수 없기 때문에 노트에 잠금쇠를 채운다.


차라리 열쇠를 잃어버리도록 할까? 아카아시는 자신의 손바닥 위, 지나치게 작은 열쇠를 바라보며 잠깐 갈등했다가 그만두었다. 보쿠토의 힘이라면 이런 종잇장 같은 자물쇠야 뜯어버리고도 남는다. 아카아시가 아침부터 일기장의 내용을 궁금해할까 봐 굳이 미리 건네주는 사람이었으니 본인도 이 일기장 안에 무슨 내용일지 궁금해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한 손으로도 열 수 있겠지…….’


조금 아득해진 아카아시는 서둘러 일기장을 책가방에 챙겨 넣었다. 내일 학교에 깜빡하기라도 하면 보쿠토가 반드시 집까지 쳐들어올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


“아카아시, 그거는?”


아침 연습이 끝날 무렵 쿨다운 스트레칭을 하는데 보쿠토가 은근슬쩍 붙어왔다. 가까이 오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훅 몰아쳐 반사적으로 물러난 아카아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뭔데요.”

“아 왜. 그거.”


보쿠토가 손으로 필기하는 시늉을 한다. 어제 그에게 건네준 교환일기장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아카아시가 첫눈에 눈치채고도 모른척 했던.


“하교할 때 드릴게요.”

“엥? 왜? 지금 줘!”

“목소리 좀 낮춰요…….”


마음같아서는 입에 재갈이라도 물리고 싶은데 사람을 상대로 그럴 수야 없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인간의 도리에 탄식했다.


“선배라면 틀림없이 궁금하다고 학교에서 열어보실 것 같으니까요.”

“아, 안 그래.”

“그러실 겁니다.”


아카아시가 보쿠토 코 앞까지 얼굴을 가져다대고서 단호하게 말하는데 보쿠토가 뒤로 물러서지도 못한 채 뻗어있다. 그러길 한참이 지나서야 침을 꼴깍 삼킨 보쿠토가 목을 뒤로 뺐다.


“아, 아, 안 그래.”

“그럼 오후에 받아도 상관없겠네요.”

“!”


보쿠토의 얼굴에 ‘이게 아닌데!’라는 아찔함이 스쳐지나갔지만 아카아시는 못 본척하며 스트레칭을 마무리 지었다. 보쿠토는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답답한 얼굴로 그의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다른 선배가 그를 끌고 가서 스트레칭을 시작할 때까지. 괜히 후배를 괴롭힌다고 한 소리 들은 보쿠토는 잔뜩 불만이 어린 표정이었다. 체육복을 갈아입을 때도 뺨까지 부풀리고서 그를 쳐다본다. 아카아시는 단호한 동작으로 부실 사물함의 문을 닫았다.


“진짜 안 줘?”

“어차피 안 보실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좀…….”

“좀?”

“이렇게 몽실몽실해지지 않을까?”

“아뇨, 구겨집니다. 새카맣게.”

“…….”


보쿠토라면 열어본다. 틀림없이! 아카아시는 확신했다. 물론 대놓고 열어보진 않겠지만, 보쿠토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교실 구석에 숨어서 몰래 열어보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저 체격에 ‘몰래’라는 표현이 가당키나 할까? 하물며 그냥 걸어가기만 해도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저 사람이? 누군가 분명 보쿠토에게 너 뭐 하냐고 물어볼 것이고, 보쿠토는 또 제대로 둘러대지도 못해서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사실이 탄로나게 될 터였다.


배구부의 2학년과 1학년이 자물쇠 채운 교환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절대, 절대 들키고 싶지 않다…….’


다른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야 그의 알 바 아니었다. 부풀려 소문이 나도 보쿠토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테고 고작 1학년에 세터 지망일 뿐인 자신에 대해서라면 아는 사람도 전무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보쿠토를 지나쳐간 그 수많은 애인들……. 보쿠토의 무관심 속에 지쳐가야 했던 그네들이 이 소식을 알게 된다면.


‘칼이라도 맞는 거 아냐?’


농담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아무 말 없이, 아무 논란 없이 참고 견뎌주다 이별을 택한 건 보쿠토를 미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똑같이 공평한 보쿠토 코타로. 그의 관심사라곤 배구뿐. 배구공을 터뜨려도 보쿠토는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을 테니 어쩔 수가 없다고, 상처 받은 와중에도 마음을 달랠 수 있었을 터다.


사귀면서도 데이트는 언제나 언제나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끝내던, 배구 외엔 무신경하던 보쿠토가 갑자기 후배 한 사람과 교환 일기를…….


아카아시의 표정이 말없이 창백해진 가운데에 그가 자신의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수업 마치고. 오후 부활동 마치고! 마치고 나서요.”

“체.”


보쿠토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카아시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


“아, 맞아. 선배. 저 이제 2주 동안은 연습 못 해드려요.”

“에엑~!? 왜?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부활동이 끝나고 난 뒤의 개인 연습을 마무리 지으며 꺼낸 얘기에 보쿠토가 튕기듯 눈을 뜨고 다가왔다. 정말 깜짝 놀란 것 같은 그 모습에 아카아시는 조금 황망한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이제 시험기간이잖아요…….”

“아?”

“중간고사요…….”

“에…….”


사람이란 대단한 것이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보며 생각했다. 아마 처음 만났을 때의 보쿠토라면 여기서 틀림없이 ‘너 시험치기 전에 공부해야 해?’ 따위의 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그래도 말 하기 전에 한 번 혀를 깨물고 눈치를 보는 정도로는 변한 것이다.


“공부 해야 합니다.”

“…그, 그렇지.”

“선배도요. 낙제 있으면 여름에 합숙은 참가 못하지 않나요?”

“에…….”


이것도 알 것 같다. 아카아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입학했을 때부터 슈퍼 루키라고 떠받들어졌을 만큼 실력이 대단한 보쿠토 코타로를 고작 낙제 몇 개 있다고 합숙에서 제외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참가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뭐 안 해도 되는 거면 안 하셔도 되겠죠……. 저는 해야겠으니까 못 도와드려요.”

“아, 아니. 나도 공부 할 거야! 나도!”

“…….”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보쿠토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활활 불타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표정이 마치 그와 자신이 함께 공부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아카아시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교환일기는 여기요.”

“와! 드디어!”

“아니, 집에 가서! 집 가셔서 보세요.”


보쿠토가 당장에 열쇠부터 찾으려고 하는 걸 어렵게 말린 아카아시는 조금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에선 절대 열어보지 마시고요.”

“안 한다니까!”

“못 믿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나에 대한 신뢰를 다 까먹은 거야, 아카아시?”

“그걸 저한테 묻는 그런 점에서?”

“…….”


잠깐 찬물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던 보쿠토지만 금방 회복해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집에 가서 열어볼 교환일기가 어지간히도 기대되는 듯했다.


‘별 내용 안 적었는데…….’


실망했다고 집까지 쫓아오진 않겠지? 괜히 첫날 데려다준다는 걸 거절하지 못한 바람에 자택이 들통나버려서. 아카아시가 불안함을 감추며 교복을 갖춰입는 동안에도 보쿠토는 여전히 설렘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건 두 사람이 자주 저녁을 먹고 가는 요릿집으로 가는 골목 앞까지 이어졌다. 보쿠토는 식당과 아카아시의 집으로 가는 길 사이에서 방황하는 얼굴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결국 간절한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아시, 이거 식당에서 열어보면 안 돼…?”

“별 말 안 적었어요. 저녁 먹고 가실 거면 먹고 가고, 아니면…….”


그러니까 교환일기를 당장 열어보고 싶은데, 아카아시는 집에 가서 열어보라고 말해서 곧장 집으로 가고 싶고, 그와 동시에 배도 고프니 소고기 덮밥도 먹고 싶고, 하지만 그러면 그만큼 교환일기를 열어보는 시간이 미뤄진다는 것이다.


“제발! 아카아시! 제발!”

“…구석 자리에 앉으면요.”

“좋아! 가자! 오늘은 선배가 산다! 빨리 가자!”


아카아시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손을 낚아채더니 식당까지 내달렸다. 아카아시는 만약 또 한 번 교환일기를 쓰게 된다면 그 때는 그래도 한 줄 더 적어드려야겠다, 속으로 작게 생각했다.







“아, 교환일기요.”


아카아시는 교복 셔츠의 단추를 채우며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두 사람 사이에 계속 이어지고 있는 ‘좋은 남자친구’ 교습은 대개 오후 부활동이 끝날 무렵 시작되었다. 보쿠토가 1학년 교실까지 그를 찾아오는 것을 아카아시가 무척이나 싫어했기 때문이다. 오후 부 활동이 끝나면 아카아시의 개인적인 토스 연습이—이라고 쓰고 보쿠토의 스파이크 연습이라고 읽어야 한다—시작되는데, 이 시간은 보쿠토와 아카아시 둘 뿐이라 남들 듣기에 부끄러운 교습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당이 떨어져 손이 흔들릴 지경이 될 때까지 가열차게 연습을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 아카아시가 불쑥 꺼낸 말에 보쿠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교환일기?”

“방금 생각났는데. 보통은 그런 것도 하던데요.”

“그 뭐냐……일기를 서로 바꿔보는 그런 거야? 일기…일기를? 너 일기 써? 진짜냐? 나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데.”


당연히 이쪽도 중학교에 올라오고 나서부터는 쓴 일이 없다. 보쿠토를 놀리려고 꺼낸 말일 뿐이다. 언젠가 보쿠토가 누군가와 사귈 때 교환일기 얘기를 꺼내는 날이 온다면 아주 즐거울 것이다. 자신이 그 정도의 즐거움은 누릴 자격이 있다. 아카아시는 모르는 척 헛기침하곤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노트 한 권에 번갈아 가면서 쓰는 거죠. 편지 교환 같은 느낌으로.”

“……얼굴 보고 말로 하면 안 되는 거야…?”

“말로 하는 건 사라지잖아요. 기록은 영원합니다.”

“뭐냐, 교환일기가 갑자기 경건해졌어…….”

“보통 남들이 못 보게 자물쇠 같은 게 달려 있는 걸로 하는가 보더라고요.”

“아니, 말로 해도 사라지지 않아! 남아 있어! 내 가슴 속에!”


보쿠토가 주먹을 불끈 쥐고 가열차게 말한다. 아카아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제가 엊그제 밥 먹으면서 뭐라고 했죠?”

“아?”

“것봐요, 그것도 벌써 기억이 안 나는데 뭐가 가슴 속에 남아있다는 건지…….”

“아, 아니! 밥 먹으면서 얘길 많이 했잖아! 힌트를 줘!”

“선배가 생각하는 거랑 다른 사람의 생각은 다릅니다.”

“나도 알아!”

“아뇨, 선배는 몰라요.”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사람도 있다는 걸 지금도 부정하고 계시잖아요. 아카아시가 콕 찝어 하는 말에 보쿠토는 반박하고 싶은지 입술만 달싹이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교복 차림이 아니었으면 바닥을 굴렀을 것이다.


“알았어…….”

“뭐가요.”

“교환일기! 알겠어!”

“뭐, 꼭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사귀면서 그런 걸 하는 경우도 있더라는 거니까요.”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을 맺고는 책가방을 챙겨 들었다. 보쿠토는 대단히 큰 결심을 한 것 같은 눈치였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놀리려고 한 말이라는 걸 알 텐데 보쿠토는 철썩같이 믿고 있다. 남들에게 사기당하기 딱 좋은 성격 아닌가, 아카아시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아카아시!”


보쿠토와의 ‘그 교습’은 항상 방과 후에 이루어져서, 오전 연습이 끝날 때 보쿠토가 그를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불현듯 엄습하는 불안함에 침을 삼켰다.


2학년 선배가 말을 걸어오니 아카아시의 동기들은 모두 아침 수업을 준비하러 먼저 들어가버렸고, 그건 다른 선배들 쪽도 마찬가지였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정리를 마치고 나자 남은 것이 보쿠토와 자신 뿐이다. 아카아시는 전력을 다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서 포기했다. 무엇이든지 간에 기어코 보쿠토는 자신에게 얘기하고야 말 것이므로.


“무슨…일이신데요?”

“이거!”


보쿠토가 설렘 가득한 얼굴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을 때 아카아시는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채도 높은 선명한 색깔의 패턴으로 이루어진 하드커버 노트, 옆에는 엄지손톱보다 작은 금속 자물쇠가 달려있다. 자물쇠의 열쇠 구멍은 하트 모양이었다.


“이…이게 설마.”

“아카아시가 사람 사귀는 건 나중에 해보라고 했으니까! 그 동안에 이거 연습 해보게!”

“근데 이걸 왜 제게.”

“교환이잖아, 교환. 혼자서 어떻게 연습하냐?”

“제가 왜…….”

“선생님이잖아?”


그딴 선생 억지로 밀어붙인 게 누군데! 하지만 아카아시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 보쿠토의 눈동자가 태양처럼 반짝반짝 빛나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반드시 이 ‘연습’에 응해주리라 믿는 듯했다.


‘사기에 당하기는 무슨!’


“내일 꼭 써와!”

“이걸 왜 지금 말해주는 거예요…….”


적어도 오늘 하루 정도는 즐겁게 지내고 싶었는데! 기분을 망치는 건 오후부터 해도 늦지 않은데! 아카아시의 억울함은 하나도 모르는 보쿠토가 와하하 웃으며 아카아시의 등을 팡팡 내리쳤다.


“아카아시가 안에 무슨 내용인지 궁금할까봐~! 다른 애들 몰래 봐야 한다?”


윙크를 저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실존 인물을 본 것이 처음인데도 감탄은 나오지 않았다. 보쿠토가 먼저 2학년 교실로 올라가고, 뒤에 남은 아카아시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남을 놀리려 했던 벌을 단단히 받는 기분이었다.


‘알고 하는 거 아냐?’


한 번 골탕 먹어 보라고? 거기까지 생각한 아카아시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보쿠토가 그럴 사람이 아닌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서였다.


*


보쿠토는 오늘 내내 교환일기의 내용에 대해 말하고 싶은 듯한 눈치였지만 아카아시가 단칼에 고개를 내저어 막았다. 어제 ‘교환일기이이~!?’라면서 질색한 사람이 누굽니까, 라고 따져묻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아카아시는 침묵을 택했다.


“아카아시, 왜 안 열어봐?”

“다른 사람 몰래 보라면서요…….”


오후 연습 내내 들뜬 기색 충만한 보쿠토를 보며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가 처져있는 것보다야 나았기에 다들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보쿠토가 왜 들떴는지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아카아시는 헬쓱한 얼굴로 토스를 올려야 했다. 가방 안에 있는 작은 노트를 생각하기만 해도 어깨에 철근을 매단 기분이 된다.


그 기분은 오후 부활동이 모두 끝나고,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개인적인 연습까지 끝나고 난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이었다.


“지금 애들 없잖아.”

“선배가 있잖아요.”

“에이, 열어봐도 되는데.”

“제가 선배를 인간으로 존중해드리는 몇 안되는 순간이니까 조금 더 즐기시는 게 어때요.”

“뭐!? 너 그럼 날 평소에 인간 취급 안 해줬던 거야!?”

“좀더 짐승에 가깝잖아요, 선배는.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에 한계가 있을 텐데, 이 사람은 그런 게 전혀 없는 눈치였다. 1학년인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럴 정도니까 벌써부터 3학년 주전들을 제치고 에이스 취급받는 거겠지. 아카아시는 간단하게 결론짓고는 부실을 나섰다.


“동물? 어떤 거!?”

“…….”


짐승이라고 했던 말은 어디로 갔을까.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말로는 보쿠토를 이긴 것 같았는데……. 기분은…….


“백…하얀색 고양이 같은?”

“엥, 고양이?”


보쿠토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거렸다. 호랑이 같은 듣기 좋은 말을 해줄까보냐, 아카아시는 속으로 다짐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보쿠토가 서둘러 따라왔다.


“알았어, 고양이! 고양이 할게! 고양이 할 테니까 우리 밥 먹고 가자. 배고파 죽겠다.”

“집에 가서 드세요.”

“나 집까지 가다가 쓰러져버릴거야.”

“…….”

“선배가 밥 살테니까 가자~!”

“됐습니다.”

“아카아시이이!”

“계산은 따로 하죠.”

“아? 밥 먹는 거야?”


고개를 끄덕였더니 보쿠토가 신이 나서는 두세걸음 앞서 달려나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뒤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미간을 모았다. 생각해보면 보쿠토는 원하는 걸 모두 손에 쥐었다. 배구부의 추가 연습도 결국 하게 됐고, 이 ‘좋은 남자친구’ 교습도 얻어냈고, 교환일기도 기어코 아카아시가 쓰게 하고, 저녁도…….


“짜증나…….”

“엥?아카아시? 나 뭔가 또 잘못했어?”


달려갔던 보쿠토가 금방 돌아와서는 아카아시의 표정을 살폈다. 아카아시는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보쿠토를 쳐다보다가 그의 뺨을 죽 잡아 늘렸다. 후배가 그런 짓을 하는데도 보쿠토는 아프다고 엄살만 피울 뿐 그 외의 말은 없었다.


“후, 개운해졌다. 밥 먹으러 가죠.”

“뭔데!? 뭐야!? 나만 이러고 너는 개운해지고!? 뭐였는데!?”

“집까지 걸어갈 기력도 없다셨으면서 에너지를 좀 아껴 쓰세요.”

“아카아시이이!”










열흘에 한 번씩 애인을 갈아치우면 아무리 해도 좋은 소문은 나기 어렵건만 왜 그렇게 잠잠했던 건지 알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창가에 앉아 턱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시간이 2학년 교실의 체육수업인 것인지 아래쪽 운동장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올라오는 중이다.


그 시끄러운 소리의 주인공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바로 그 사람, 보쿠토 코타로였다. 아카아시는 동물원의 백호라도 보는 듯이 신묘하단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동급생들 사이를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보쿠토의 모습은 어딘가 어린애가 정신없이 뛰노는 듯한 천진함이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도저히 나쁜 생각이 들려야 들 수가 없기는 할 것이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칼로리가 불타는 것 같네.’


좋아해서 고백했고 상대도 응해주었지만 그게 제대로 흘러가지 못했을 때, 보쿠토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됐을까? 보쿠토는 처음부터 너를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래도 괜찮다고 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원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악질인데…?’


정말로 좋은 사람, 그저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을 뿐인.


때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다. 아래쪽에서 마냥 신나게 뛰어놀던 보쿠토가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가 아카아시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크게 흔든다. 아카아시는 결국 인상을 세게 찌푸린 채 고개를 휙 돌리고 커튼을 치고 말았다.


*


“…….”

“…얘기를, 허억, 좀 해봐!”


체육수업을 마치자마자 뛰어 올라온 것인지 보쿠토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고 호흡도 가빴다. 책상을 내리친 손등 위로 힘줄이 불거져 있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도 형형히 빛나는 중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뭘 얘기해보란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일단은 보쿠토를 끌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한동안 잦아들었던 보쿠토의 방문에 반 친구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들려왔지만 모른 척했다.


“갑자기 오셔서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아까 수업 시작하기 전에! 막 이렇게 찌푸리고 나 쳐다보더니 커튼 홱 친 거 뭐였냐고!”

“아……?”


그 일에 관해서라면 당연히 수업하는 사이 새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에,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말을 한 것을 듣고도 되짚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렸다. 아카아시는 눈만 깜박이다가 수업이 시작하기 직전에 운동장에 있던 보쿠토를 내려다보았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아, 그거….”

“‘아아, 그거’가 아니라고!”

“그냥 갑자기 좀 선배의 예전 애인들에 감정 이입이 돼서.”

“…….”


씩씩거리며 몰아세우던 보쿠토가 단숨에 굳었다. 그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고장 난 고철 인형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요 며칠 아카아시로부터 강도 높은 비난을 받고서 쌓인 죄책감에 종이 울린 듯했다. 허둥지둥하던 손이 결국 내려가고 어깨가 축 처진다. 쩌렁거려야 할 목소리는 꿀이라도 먹은 듯이 조용했다.


“그, 그랬구나.”

“그나저나 그 얘기 하려고 2학년 교실까지 오신 겁니까?”

“…왜 그랬는지 궁금해서…….”


정말로, 없는 조카를 놀려서 울리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재미있다.


아카아시는 이번에야말로 보쿠토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까닭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쪽에서 조금만 흔들면, 저쪽에서는 마치 파도라도 몰아친 것처럼 군다. 커튼을 쳐버리고 싫은 표정을 조금 비췄다고 그 까닭을 캐물으러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바로 그 짝이었다. 저런 걸 어떻게 밀쳐낼 수 있겠는가?


“나 잘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거든…….”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확신했단…?”

“…….”


평소 같았으면 금방 발끈해서 뭐라고 소리쳤을 보쿠토인데 오늘은 어깨를 늘어뜨린채 말이 없다. 아카아시는 왠지 입을 가리고 웃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땀 닦으세요.”


아카아시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어쩌다 한 번씩 들고 다니는 것인데 오늘 때마침 가지고 있었다. 조금 처진 얼굴의 보쿠토가 멍한 얼굴로 땀을 닦다가 손수건이 다 젖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어, 아, 이거 빨아 줄게!”

“네, 부탁드릴게요.”


저런 사람이 있기는 있구나, 아카아시는 허둥지둥거리다가 돌아가는 보쿠토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대책 없이 솔직하고 자기 마음을 밝히는 데에 거리낌이 없고. 그 상대가 한 학년 후배라고 해도, 수업 끝나자마자 달려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물어봤다면 좋았을 텐데.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그의 연인들이 이별을 말하는 그 순간에도 왜 싫어진 것이냐고, 보쿠토는 왜 묻지 않았던 걸까.



*


“…아카아시는 항상…손수건 같은 거 들고 다녀?”


보쿠토가 어색하게 말을 붙여온 건 다음 날이었다. 손수건을 돌려주며 쭈뼛쭈뼛 묻는다. 아카아시는 다림질까지 깔끔하게 된 손수건을 보며 속으로 놀란 마음을 갈무리했다. 보쿠토가 이렇게 신경 썼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집의 누군가가 해준 모양이었다.


“가끔요.”

“그래? 들고 다니는 게 좋을까?”

“뭐, 없는 것보다야 낫겠죠? 화장실에서 손 씻고 나올 때도 편하고.”

“에? 없으면 불편해?”

“……손을 안 씻으시는 건 아니겠죠…….”

“아냐! 씻어! 씻어! 아니 나는 그냥 털어서……. 탈탈 털어서 끝내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야!”

“…….”

“진짜 씻어……. 정말이야…….”


보쿠토가 정말로 울 것 같은 얼굴인지라 아카아시는 헛기침으로 수긍해주었다.


“어쨌든 이번처럼 옆에서 사람이 필요할 때 빌려줄 수도 있고요. 티슈나 그런 것도 좋겠죠.”

“좋아!”


보쿠토가 주먹을 불끈 쥔다. 아카아시의 말대로 손수건이든 티슈든 들고 다닐 마음을 먹은 듯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로 그가 자신의 말을 잘 듣는다는 표현 외에는 다른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나 이렇게 오랫동안 애인 없어 본 거 처음이야…….”

“그간의 상태를 누군가와 사귀는 중이었다고 표현한다면 지나치게 양심이 없는 게 아닐까요?”

“…….”

“애인이 있다 없다는 문장을 빼면 지금도 평소와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아닌가요? 아카아시가 공을 쥐며 덤덤하게 묻는 말에 보쿠토는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않다가 발작하듯이 머리를 쥐어뜯고 바닥에 발을 굴렀다. 깜짝 놀란 아카아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보쿠토를 쳐다만 보길 십여초 가량 지났을 때야 보쿠토가 탈력한 표정으로 양손을 축 늘어뜨렸다. 잠깐 입술을 달싹이던 아카아시가 말했다.


“지금 저한테 성질부린 겁니까?”

“아니야……. 과거의 나를 때리고 싶은데 할 수가 없는 내 마음을 어쩌질 못했어…….”

“흥.”

“내가 진짜 잘못했다는 걸 잘 알겠다…….”

“사실 뭐 사시던 대로 살아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긴 합니다.”

“아…?”


보쿠토와 아카아시 두 사람이 하던 추가연습은 보쿠토가 손수건을 건네주기 전에 이미 마무리가 되어서, 아카아시는 공을 마저 정리하며 보쿠토를 흘끗 쳐다보았다. 보쿠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선배 좋아해 주는 사람 많잖아요. 선배가 누굴 좋아하게 될 때까지도, 아무도 선배를 미워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가 좋은 사람이, 좋은 남자친구가 될 준비를 굳이 하지 않아도 어쩌면 그런 그를 끝까지 참고 견뎌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싶은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보쿠토를 스쳐 지나갈 많은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상처받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보쿠토를 미워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카아시는 여기서 보쿠토가 ‘그런가!?’ 라며 환한 표정과 반가운 목소리로 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좋은 남자친구 선생님’ 노릇도 이 순간으로 마지막일 거라고. 하지만 그가 ‘이 핑계를 진작 생각해냈더라면 좋았을걸’하고 작게 후회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본 것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남들이 나를 미워하고 좋아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무, 물론 좋아해 주면 좋지만.”

“…….”

“어쨌든 내가 잘못했다는 거잖아.”

“사실 뭐 딱히 잘못은 아니죠. 관심 없는 남한테 좀 무신경했다는 게…….”

“무신경하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관심 없는 남이 아니었잖아! 내 애인이었다고!”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어깨를 붙잡고 외쳤다. 아카아시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걸 보고서야 보쿠토도 손을 놓는다. 보쿠토는 조금 좌절한 얼굴이 되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쨌든 내가 뭔가 최선을 다해주지 못했다는 건 알겠으니까……. 너 자꾸 선생님 안 해주려고 이리저리 빼는 거 다 알아!”

“……흠.”


눈치채셨을 줄은 미처 몰랐네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가 또 왁왁 소리쳤다. 두 사람이 체육관을 완전히 나선 건 그로부터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완전히 기력을 탕진한 보쿠토가 터덜터덜 걸으며 아카아시를 잡아끌었다.


“이대론 집 가는 길 도중에 쓰러지겠어. 저녁 먹고 가자. 이 선배가 산다.”


이것도 퇴짜놓진 않겠지, 돌아보는 보쿠토의 눈동자가 형형했다. 아카아시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보쿠토가 급한 걸음으로 그를 잡아끌었다. 자주 가는 정식집인지 점원이 반가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안내한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메뉴를 묻지도 않고 소고기 덮밥 제일 큰 것으로 두 개 주문했다. 젓가락을 쥐려는 보쿠토의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정말로 심하게 허기진 것 같았다.


락교를 부지런히 집어먹는 보쿠토를 멀뚱히 쳐다보던 아카아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요…….”

“응?”

“애인분하고 점심을 단둘이 먹거나 같이 안 먹거나 둘 중에 하납니다.”

“엥?”

“보통은 단둘이 먹던데 어떻게 자기 친구들하고 같이 먹으라고 끌고 왔는지 선배도 참…….”

“아, 아니 뭐 그럼 애인 생겼다고 애인이랑만 먹고 친구들은 버려!?”

“버리란 뜻이 아니라…. 애인이라는 건 선배의 모든 친분 관계 중에서 제일 특별하게 생각해주는 상대라는 거잖습니까. 그 정도 배려는 해주라는 거예요. 남자친구의 친구들이라고 모르는 사람들하고 밥 먹는 게 얼마나 고역인데.”

“그런가……. 나는 친구의 친구랑 먹는 것도 좋은데.”


모든 문제의 원인을 안 것 같다.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선배, 영화나 드라마 보면 눈물 콧물 난리나는 사람이죠.”

“뭐? 아, 아냐! 무슨 소리야!”

“영화에서 사람이나 개가 죽으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밤에 잠도 못 자고.”

“아, 아, 아니라니까!”


귀까지 새빨개져서 전력으로 부정하는 얼굴만 봐도 알겠다. 아카아시는 물끄러미 보쿠토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금방 공감하고, 표현하는 사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마도 다른 사람도 자신 같으리라고, 의심 없이 믿고 있을. 믿는다는 자각조차 없이…….


그런 사람이 왜 그렇게 돌아서는 연인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을까, 아마도 자기 생각과 감정이 틀림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상대에게 무관심했듯이 상대의 감정도 그러했으리라 재단하고, 떠나갈 때에도 그들이 조금도 상처받지 않았으리라 믿고. 그저 멀어짐을 선언했을 뿐이라고.


“선배가 상관없는 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요.”

“엑.”

“선배가 괜찮다고 남들도 다 괜찮은 것도 아니고요.”


전부 다 다른 사람들이라고요, 아카아시가 핀잔조로 하는 말에 보쿠토는 진지하게 듣는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곧 소고기 덮밥이 나왔으므로 아카아시도 보쿠토도 방금 전까지 대화 나누던 화제는 잊고 식사에 몰두했다. 진한 색으로 잘 익은 불고기 위에 광택이 도는 노른자가 자르르 빛나고 붉은 생강의 조각이 꽃처럼 장식되어있다. 밥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기가 가득 쌓인 덮밥은, 보쿠토가 굳이 메뉴를 점찍어 주문할 만큼 무척이나 맛이 좋았다.








지난 몇 주간의 소동이 아주 아무 도움 안 되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공을 주우러 가는 선배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 지난 몇 주간 보쿠토가 있는 유난 없는 유난을 떨며 공 주우러 다닌 덕분이었다.


‘하지만 차라리 공을 주우러 나다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묘하게, 보쿠토가 네 말을 잘 듣네…….


지나가는 2학년 선배가 한 말에 아카아시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이 차이 같은 걸 생각하면 ‘너하곤 얘기를 잘 하네’ 정도로 표현될 수도 있었을 텐데 콕 집어서 ‘말을 잘 듣네’라고 한 것에서 등골을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 같은 게 느껴졌다.


그렇다, 보쿠토는 정말로 자기 선에서는 좋은 학생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이것이 도리어 아카아시를 더욱 괴롭게 했다. 자신이라고 한들 좋은 애인이 뭔지 제대로 알겠는가? 적당히 아무렇게나 지어낸 말을 해주면 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진지하니 이쪽도 제대로 해주어야 할 것 같고, 하지만 자신도 아는 건 없는데…….


“일단…사람을 사귀지 마세요.”

“아?”


이 말도 안 되는 수업 아닌 수업을 시작한 이후로 부 활동이 끝나고 나면 항상 함께 귀가하게 되었다. 다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대?’라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아카아시는 그냥 벽에 콱 머리를 박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보쿠토는 해맑게 웃으며 ‘그치!’라고 대꾸했다. 그치는 뭐가 그치야, 아카아시는 옆에서 속으로 중얼거리기만 했을 뿐이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앉아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브라우니와 에이드 두 개를 주문했다. 보쿠토가 브라우니를 크게 한 술 떠올리는 사이에 툭 하고 던지듯 말한 아카아시는 에이드의 얼음을 휘저으며 창밖을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사람을 사귀지 말라고. 애인을 만들지 마시라고요.”

“왜?”


물음표를 없애버리고 싶다…. 아카아시의 생각을 눈치챈 것인지 브라우니에 코를 박다시피 하고 있던 보쿠토가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았다. 아카아시는 타는 속을 달래기 위해 음료를 쭉 들이키고 말했다.


“애인 사이라는 그런 게 원래 좋아하는 사람하고 사귀는 거잖아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인데 상대가 하잔다고 ‘어 그래’ 하는 게 더 실례예요.”

“그런가…. 하지만 거절하면 상처받잖아.”

“그렇다고 선배가 사귀면서 좋아하려고 노력하시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뭐? 아니야! 노력해!”

“무슨 노력이요.”

“그…….”


아카아시가 들어나 보겠단 태도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거리가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뭐냐, 연습 마치고 하교도 같이 하고…….”

“그거 그쪽에서 기다려 준 거잖아요? 배구부 부활 늦게 끝나는데. 그건 그쪽에서 노력한 건데요.”

“어, 그리고 뭐지…. 점심도 다 같이 먹고…….”

“아, 선배 친구들 있는 자리에 아는 사람 없는 그쪽만 불러다 불편하게 점심 먹게 했다고요?”

“……그, 영화도…! 보고…!”

“그건 당연한 거고요……. 그거 말고 선배의 노력 말입니다. 선배의. 노. 력.”

“…….”


보쿠토가 우는 얼굴이 되어 테이블 위로 엎어진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반쯤 먹다 만 브라우니를 옆으로 밀어둔 채 에이드를 쭉 빨아올렸다. 열감이 가시는 상쾌한 기분이었다.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는 보쿠토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렇게 나쁜 놈이야?”

“그렇죠, 아무래도.”

“아니 너는 한 마디도 좋은 말을 안 해주냐…….”

“좋은 말 안 해주는 사람이니까 관두라고 천 번은 말했지 싶은데…….”

“야! 너, 너가! 그랬잖아! 어어, 남의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하며는 뭐라더라…….”


몸을 벌떡 일으킨 보쿠토가 삿대질을 하다가 또 시무룩해져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카아시는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이 동시에 수십번 일어나는 것처럼 다채로운 표정은 확실히 눈을 떼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그를 좋아했던 그 많은 사람들은 정말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를 좋아한 것도, 미워하지 못한 것도, 헤어진 것도.


“상대방을 좋아하게 되면 그런 노력이 하고 싶어지지 않겠어요? 선배의 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 사람들이 뭐 자원봉사활동 한답시고 선배랑 사귀자고 했던 것도 아닐 거 아녜요.”

“자원 봉사…….”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닐 거라고요. 좋아하니까요, 애쓴 거겠죠. 선배도 그러니까 자기 나쁜 사람 되기 싫다고 남 상처주는 짓은 관두세요.”

“뭐? 그런 거…….”


그런 거 아니야, 라고 단언하듯 외치려 했던 보쿠토의 목소리가 쑥 죽었다. 아카아시는 에이드의 남은 부분을 쭉 들이켰다. 얼음이 녹고 탄산이 빠져서 밍밍한 맛이 났다.


“고백하는데 싫다고 말해서 나쁜 사람 되기 싫었던 거 아닙니까?”


사귀다 보면 어차피 그쪽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할테니까…….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는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보쿠토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계산을 마치고, 아카아시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길에도 계속되었다. 마침내 그가 말문을 튼 것은 아카아시가 현관 열쇠를 찾을 때였다.


“근데 그런 건 진짜 아니었어…….”

“…….”

“내가 그 사람을 잘 모르는데 그 사람이 날 좋아한다고 해도, 잘 모를 테니까……. 그냥 같이 있으면서 알아가다 보면 좋은 친구가 되고 그러다가 진짜로 서로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오는 길 내내 말이 없었던 것은 아카아시의 말을 계속 생각하느라 그런 듯했다. 아카아시는 잠깐 침묵한 채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양손을 꽉 쥐고서, 하지만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눈썹도 어깨도 축 처진 형상이었다.


“하지만 선배……. “

“…….”

“‘그냥 같이 있으면서’라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친구도 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쾌활하고 밝은 성격에 부에서는 2학년인데도 벌써부터 에이스이고 하늘이 뒤집히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이목구비는 뚜렷하고 체격도 좋다. 조건으로만 보자면 빠지는 것 하나 없는 그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모두가 좋아했을 것이다. 자신마저도 그런 장면을 보지 않았더라면—2분 만에 애인이 바뀌는 장면—그를 결코 싫어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런 그의 인간관계는 그가 몸소 지닌 것, 그리고 그가 이따금 보이는 활달한 다정함으로 충분했겠지만.


“…안녕히 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보쿠토는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꾸벅 인사를 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카아시 네의 현관 문이 닫힐 때까지, 보쿠토는 대문 앞에서 알 수 없는 얼굴로 계속 서 있기만 했다.


*


‘망할, 되는 일이 없어!’


아카아시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푹 꺼진 눈의 소년이 그를 보고 있다. 지난 밤 어설프게 밤잠을 설친 흔적이었다.


‘천년 만년 빽빽거릴 것 같은 사람이 왜 갑자기 조용해지고 난리야…….’


보쿠토가 그렇게 생각을 곱씹는 얼굴로 축 처져서 돌아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아카아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난날의 자신을 조금 반성했다. 처음에는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날을 세워 말했다면, 그 다음에는 절대 꺾이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거칠게 말한 것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 사람에게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야 그럴 것이 ‘아, 좀 심했나’싶은 말을 해도 보쿠토는 그저 떼를 쓰듯 소리를 높이거나 토라졌다는 듯이 뺨을 부풀렸다가도 몇 초 가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건성 건성 말하고 마는 건데.’


이렇게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사람 귀찮게 하기로는 도가 튼 인물이지 않았던가? 이 정도도 예상하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았던 게 틀림없다. 아카아시가 그렇게 한숨을 푹 내쉬고 등교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케이지? 밖에서 누가 기다리는데.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니냐?”


등교 시간보다 늦게 출근 준비를 하던 부친이 말을 건넨다. 책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아카아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밖에서 누가 기다린다니,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지나가는 애가 같은 학교 교복이라서 부친이 무언가 착각했을지도, 거기까지 생각했던 아카아시는 부친의 말에도 서두르지 않다가 현관 문을 열었을 때 그만 제꺽 굳고 말았다. 담장 너머에서도 보이는 삐죽한 잿빛 머리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다. 급하게 학교 갔다 오겠단 인사를 하고서 쾅 소리나게 현관문을 닫은 아카아시는 정원을 뛰듯이 가로질러 대문을 벌컥 열었다. 담장에 기대어 서 있던 보쿠토가 활짝 웃으며 아카아시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 가자~!”

“네? 어, 어딜요?”

“응? 학교……. 다른 데 가고 싶어?”

“…선배는 왜 여기 있는데요?”

“어……지나가다가?”

“거짓말을 할 때는 상대를 속이려는 노력이라도 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치만 아침에 데리러 왔다고 하면 좀 너 질색할 것 같은데.”

“정말 굉장히 부담스럽거든요. 진짜로요.”

“거봐아아!”

“그러니까 왜 데리러 오신 거냐고요.”

“아니, 그 뭐냐. 나 스스로 생각해 본 건데? 좋은 남자친구? 데려다주는 게 있으니까 그럼 데리러 오는 게 있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쾌활하게 웃는 얼굴 어디에도 어제의 침울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이 사람?’


어디 한 번 밤 새 잠 설쳐 보라고? 하지만 어제와 달리 활짝 웃는 얼굴 그 어디에도 그런 계책을 꾸며낼 재간은 보이지 않았으므로 아카아시도 사실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생각하신 건 대단하신데 저한테 실천하진 마시고요…. 생각만 하시다가 다음번에 애인이 생기면 그때 하세요, 그때…….”

“…아카아시 너 어디서 막 말싸움 하면 절대 안 지지?”

“아 또 왜요.”

“난 밤에 자다가도 ‘아 그때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라면서 후회하는데 넌 안 그런 애 같아서…….”


기세 좋게 떠들던 보쿠토가 금방 입을 다물었다. 도끼눈을 뜨고 보쿠토를 바라보던 아카아시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보쿠토가 또 금방 활짝 웃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아카아시의, 처음으로 시끄러운 등굣길이었다.







이쯤 거절을 했으니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만두리라 여겼던 아카아시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아카아시가 단호하게 그만두겠다 했던 것이 도리어 보쿠토의 오기를 자극한 것인지, 보쿠토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불도저처럼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부 활동만이었는데 나중에는 쉬는 시간마다 교실에 쳐들어왔고 점심시간에는 그에게 억지로 자신 몫이었던 팩 음료를 쥐여주기까지 했다.


그 유난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반 친구들도 미심쩍다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데다가, 보쿠토의 체격이며 성량이 어디 또 보통 사람이던가? 온 동네에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존재를 견디지 못한 쪽은 아카아시였다.


아카아시가 퀭한 얼굴로 체육관에서 마지막 정리를 할 때 보쿠토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보쿠토 코타로가 웬 세터 지망 1학년을 두고서 장난을 치는 건 이제 모두에게 익숙한 일인지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짧은 시간 동안 세상에게 버림받는 기분을 맛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야!”

“…….”

“아카아시 케이지! 너 세터 하고 싶댔지?”

“네…….”


차라리 그냥 한다고 하는 게 나았을까? 그 말도 안 되는 좋은 남자친구 선생님이라는 걸? 아카아시가 조금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상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럼 연습할 상대 필요하겠네? 공 올려줄 스파이커? 내가 연습 도와줄게!”

“…….”


흔들리던 마음이 사르르 재가 되어 봄바람에 흩어졌다. 아카아시는 퀭한 눈을 들어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자신이 선심을 베푼다는 얼굴을 하고서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가 제 연습을 도와주시는 거라고요……?”

“응! 너도 주전 뛰려면 연습 많이 해야 하잖아?”


이대로 머리를 싸매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얄팍한 술수를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제가 토스하는 공이 바닥에 떨어지면 그걸 주워주신단 거죠?”

“아?”


그래, 그런 것일 리가 없지. 자기 스파이크 연습에 토스 올려줄 사람이 필요한 주제에 어딜 아카아시 그의 연습을 거들어주는 척…….


“부탁할 게 있으면 솔직하게 말을 하세요. 되지도 않는 수 쓰지 말고.”


본심이 들통났다고 생각하는지 보쿠토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간다. 그러다 이윽고 그가 빽 소리쳤다.


“난 항상 솔직했어!”

“아, 그래요? 방금 전에 그건 뭔데요. 제 연습 도와주시는 게 아니라 선배 연습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거잖습니까.”

“그거는 겸사 겸사인 거고…!”

“그런 부분을 솔직하게 말 안 한 거잖아요.”

“아씨, 네가 다 안 된다고 하니까 그렇지!”

“이젠 남 탓?”

“…으아아아아!”


머리를 쥐어뜯던 보쿠토가 속에서 치솟는 열을 이기지 못했는지 바닥을 구른다. 아카아시는 색깔 없는 눈으로 그런 보쿠토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보쿠토는 한참을 그렇게 구르기만 하다가 겨우 진정하고 나서야 바닥에 엎어진 채로 ‘미안’ 하고 사과했다. 울먹이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할 거지…….’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그가 수락할 때까지? 정말일까?


사실 자신이 처음 거절했을 때 보쿠토가 포기하지 않았을 순간부터 뒷목 당기는 서늘함이 느껴지기는 했었다.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알았어요. 하죠, 해요.”

“아?”

“그 망할 좋은 남자친구 선생인지 뭔지 한다고요.”


아카아시가 눌러 붙은 피로로 기진맥진하여 겨우 그렇게 대답했을 때, 처음에 보쿠토는 엎어져있던 채로 고개만 들고 아카아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눈을 꿈벅인다. 5초 쯤 지났을 때 보쿠토가 활짝 웃으며 마치 벼락이 치듯 벌떡 일어나더니 아카아시를 번쩍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어린 조카 비행기 태우듯 하는 동작에 아카아시는 땅에서 발이 떨어지는 경험을 10년 만에 해보았다.


“일단…일단 이런 건 전부 하지 마세요.”

“아?”


신이 난다고 체육관을 뛰어다니며 이리저리 과장된 몸짓을 잔뜩 취하고 있던 보쿠토가 몸을 굳히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카아시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보쿠토는 평생이 가도 그런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보쿠토의 손을 잡아 내렸다.


“남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들지 말란 말입니다….”

“아. 기뻐서 나도 모르게…….”

“그런 건 혼자 하세요, 혼자.”


아카아시의 면박에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던 보쿠토가 번쩍 눈을 떴다.


“진짜 해주는 거지!? 선생님!?”

“……진짜 할 테니까 이제 교실에 찾아오는 것도 그만두세요.”

“그, 그렇게 질색할 일이냐고…….”


뻔뻔하게 구는 정도가 남달리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그도 아카아시가 정색하는 것이 심란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멀거니 그런 보쿠토를 바라보다가 헛기침했다.


“어쨌든 돌아가죠.”

“수업 안 해!? 선생님 해준다고 했잖아!?”

“…….”


아카아시는 갈등과 고뇌가 담긴 얼굴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너무나도 집이 그리워 귀가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여기서 할 만한 얘기도 하나뿐이다. 하지만 귀갓길에는 상대분을 댁까지 데려다주란 말이라도 했다가 보쿠토가 어떻게 반응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설마 날 데려다주겠다고 하기야 하겠어?’


*


“안녕히 가세요…….”

“내일 봐, 아카아시!”


그간에 멸시에 가까울 만큼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봐왔고 내막을 알고 난 뒤에도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현관문 앞에 선 아카아시를 향해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보쿠토에게서는 그간의 갈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눈초리를 전혀 개의치 않았느냐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왜 자길 싫어하느냐고 울듯이 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정말 무서울 만큼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피곤함에 절어서 풀썩 자신의 방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 적응하는 것은 분명히 체력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중등부 시절과는 다른 배구부 연습량도 부담이 되기는 했으나, 지금 자신이 뻗어있는 이유의 팔 할은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사귀던 사람을 데려다준 적은 있냐는 말에 보쿠토는 너무나 당당하게 왜? 라고 대꾸해서 아카아시의 입을 다물렸다. 침묵 끝에 아카아시가 내놓은 ‘보통 헤어질 때 귀갓길 시간이 늦기 마련이고 위험하니까요’라는 대답에 보쿠토도 나름대로 논리적인 답변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늦게 헤어진 적이 없는데?


보쿠토가 몇 주도 버티지 못하고 차이는 이유를 단박에 깨친 기분이 된 아카아시는 잠시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자신의 말에 문제가 있다는 걸,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도통 알지 못한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눈치를 본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결과가 ‘아카아시 집까지 데려다줄게!’였다. 아카아시는 여기서 거절하는 대거리를 치를 체력도 남지 않아서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여주기만 했다.


이제 확실하게 알겠다. 2분 만에 애인을 갈아치운다는 건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줄을 서 있단 얘기였다. 저 사람은 저렇게 지극한 주위의 사랑을 받고 자라서 딱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의 배려만으로 가득 차 있는 인물인 것이다.


‘애당초 왜 좋은 남자친구가 되고 싶단 생각을 하는 거야? 사람을 사귀면 안 되는 사람인 거 아닌가?’


아카아시는 심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몹시 피곤했지만 이제 더는 2학년 선배가 1학년 교실까지 들락거리며 그에게 무언가를 해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실상 옆에서 보기엔 장난기 있는 괴롭힘 수준이었긴 해도—, 부 활동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 하나 갱생시키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못할 일도 아니다. 왜 자신이 그런 부담을 지게 되었는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아카아시는 교복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계속 생각하면서도 눈을 뜨지 못하고서, 피로에 몸을 푹 맡기고 이른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너무한 건 선배죠.”

“…왜!?”


보쿠토가 눈을 번쩍 뜨고 소리쳤다. 아카아시는 윽 하는 얼굴이 되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신이 위협적이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챈 보쿠토가 기죽은 표정으로 헛기침했지만 아카아시는 다시 가까워지지 않았다.


“보통 좋아해서 사귀자고 한 사람이 일주일 만에 헤어지자고 하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 그냥 싫어질 수도 있지.”

“저도 선배를 그냥 싫어할 수도 있죠.”

“아니 그거랑은 얘기가 다르지! 너, 너는 나랑 말 한마디 안 해봤으면서.”


후배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에 보쿠토가 또 크게 움찔했다. 후배는 그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귀는 건 실례 아닌가요.”

“걔, 걔네가 괜찮다고 했는데.”


심지어 지칭이 복수형……. 아카아시는 흐릿한 눈동자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는 것은 둘이니 그렇게 쳐도 맞는 표현이겠지만, 둘만이 아니었을 거라는 묘한 확신이 선다.


“선배를 좋아하니까요.”

“아…?”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인데 뭐든 괜찮다고 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나참.”

“그치만 사귀자고 하는데 거절하면 걔네가 상처….”

“일주일 뒤에 헤어지자고 말하게 하는 게 더 상처 아닐까요?”


보쿠토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카아시를 쳐다보았으므로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의 강이 흐른다. 아카아시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쪽에서 자기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다고 해서 산뜻한 기분일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이제 내가 안 좋아졌으니까 헤어지자고 한 걸 텐데 그럼 기분이 나쁠 이유도…….”


이렇게 단순할 수가 있나! 아카아시는 기가 막힌단 얼굴로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누굴 좋아해 본 적 없어요, 선배는?”

“배구는 좋아하는데.”

“아니 사람요…….”

“엄마 아빠?”

“장난치는 겁니까?”

“아, 아닌데.”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서늘해지고 보쿠토가 쪼그라든 듯이 대답했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심호흡도 두 번쯤 더 하고 입을 열었다.


“좋아해서 열심히 해볼 생각으로 사귀자고 했는데 전혀 상대해주지 않으니까 너무 마음이 많이 상해서, 헤어지자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아……?”

“그랬더니 2분 만에 새 애인을…. 또 일주일 만에 사귀었다가 헤어지고…? 남의 눈에서 눈물나게 하면 자기 눈에선 피눈물 나는 법이란 말도 못 들어 봤습니까?”

“하, 하지만 나는……. 그 애들이 하고 싶다는 대로…….”

“그분들은 선배가 먼저 자기와 뭔가 하고 싶단 마음이 들었으면 했던 거라고, 지금까지 설명했지 않습니까…. 이해가 안 되시면 그냥 관두세요.”

“자, 잠깐만!”


후배가 야멸차게 말하고 돌아서려는 것을 보쿠토가 서둘러 잡아 세웠다.


“그, 그러니까 내가 뭔가 그 잘못했다는 거지! 걔들한테!”

“뭔지는 모르나 봐요.”

“좋은 남자친구가 못 돼줬다는 거잖아!”

“…….”


그 한마디로 압축할 거리인가 싶으면서도 저 말이 나름대로는 정곡인지라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열의에 찬 보쿠토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네가 좀 알려줘!”

“……뭐라고요?”

“좋은 남자친구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쿠토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가득 차서, 별보다 눈부시고 태양처럼 빛나는 눈빛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눈가를 가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싫습니다.”

“…아?”

“선배가 저보다 한 살 많으시잖아요. 제가 알려드릴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반 친구한테 여쭤보시든가….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는 보쿠토가 더 이상 잡아챌 틈도 없이, 아카아시가 쌩하니 자리를 떠났다.


*


솔직하게는, 아카아시는 이것으로 부활동이 완전히 끝장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아마도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부터 배구부의 눈부신 신성으로 이름 높았던 바로 그 보쿠토 코타로, 이제 겨우 2학년이 되었는데도 내년의 주장으로 내정되어 있다는 말이 1학년인 아카아시의 귀에도 들려올 정도인 상대였다. 그런 선배 면전에다 대고 할 말 못 할 말을 모두 했으니 다음 날 더 이상 체육관에 올 필요 없다는 말을 듣는다 해도 놀랍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의외로 아침은 아무 일 없이 시작되었다. 부원들은 모두 반갑게 인사해주었고 워밍 업도 스트레칭도 매끄럽게 이어졌다. 보쿠토와는, 의외로 그도 바쁜 탓에 눈 마주치지 않고 아침 연습을 끝마칠 수 있었다.


보쿠토 선배도 단념했나 보지. 아카아시는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지었다. 애당초 매달릴 건수조차 아니었지 않은가? 후배에게 좋은 남자친구란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게? 하지만 그게 틀려도 단단히 틀린 생각이었다는 것을, 아카아시는 오늘 하루가 채 가기도 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오후 연습도 아침 연습과 다를 바 없이 이어졌다. 모두 몸을 풀고, 제각기 연습을 시작하고, 그러다가 공이 튀어 오르고……. 그걸 주우러 가는 것은 분명 1학년들의 몫일 것이었다. 다들 슬그머니 눈치를 보고 있는 걸 못 견뎌 아카아시가 밖으로 향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튀어나간 사람이 있다.


“내가 갔다 올게!”


아카아시를 거의 끌어다가 체육관 안으로 밀치다시피 하고서는 바람 소리가 나게 뛰어가는 사람은 보쿠토였다. ‘내가 갔다 올게!’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너무 커서 체육관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아카아시가 잠깐 놀라서 눈만 깜박이는 사이에 얼마 지나지 않아 보쿠토가 돌아왔다.


그리고서는 오후 훈련이 끝날 때까지, 아카아시가 공을 주우러 나가려는 낌새만 보이면 보쿠토가 쩌렁쩌렁 자기가 간다고 외치고서는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그걸 아카아시 자신이 하겠다고 같이 속도를 겨룰 수도 없어 어영부영하면 보쿠토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왔다.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보쿠토가 그러고 있으니 자기 공은 제각기 자기들이 주우러 가기 시작하며 연습을 마무리 지었을 때 또다시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잡아 세웠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체육관은 적막했다. 무언가의 낌새를 감지한 아카아시가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아카아시의 저지 자락을 쥔 보쿠토의 손아귀는 단단해서 처음 그랬던 것처럼 쳐낼 수도 없었다. 아카아시가 옷을 버리고 갈까, 라는 생각까지 했을 때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이제 선생님 해줘!”

“뭐라고요?”

“오늘 내가 너 공 주울 거 다 해줬잖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거였습니까….”

“그러니까 해줘!”

“싫다고 말했잖습니까.”


애당초 제가 후배인데 그런 걸 알려드린다는 게 말도 안 되고요, 저도 잘 모르고요……. 하지만 아카아시가 아무리 싫다고 말해도 보쿠토는 막무가내였다. 해달라고 한참이나 버둥거리더니 돌연 앵도라진 듯이 아카아시의 옷깃을 뿌리치고서 배구공이 담겨있는 카트로 향한다. 뭘 하는 건지 기가 막혀 쳐다보고 있던 아카아시는 곧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보쿠토가 배구공을 마구잡이로 내던지는 것이었다. 열린 체육관 문 틈 사이로 공들이 굴러갔다.


“그럼 내가 주워준 거 너 다시 주워와!”


억지를 부려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아카아시는 선뜻 행동으로 옮겼다. 이 정도로 뿌리칠 수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카아시가 그대로 공을 주우러 향하는 것을 본 보쿠토의 눈이 거세게 흔들린다. 그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닌 듯했다.


“아, 아니! 잠깐만! 아카아시! 잠깐만!”


보쿠토가 방금 전에 다시 주워 오라고 외쳤으면서 우당탕 뛰어와서는 체육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주우러 가겠습니다, 비키세요, 아카아시가 그렇게 말했지만 보쿠토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게 아니고……. 이러라는 게 아니잖아!”

“……이러라고 하신 거잖아요.”

“아니야아…….”


보쿠토는 진땀을 흘리는 표정이었다. 말로 설득 하고 싶은데 떠오르는 문장이 없어 자신의 뇌 신경과 악전고투하고 있다는 것이 얼굴만 봐도 술술 읽힐 지경이었으나 아카아시는 개의치 않았다.


“굴러간 공은 주워와야죠. 비켜주세요.”

“자, 잠깐만…….”


체육관 문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기세인지라 결국 아카아시가 무례함을 무릅쓰고 직접 밀치려고 했다. 물론 전혀 통하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쏘아볼 때쯤 해서야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체육관 바닥에 앉혀놓고는 체육관 문을 열었다. 그대로 달려나가서 굴러간 공을 모두 주워오기까지는 눈 깜짝할 새였다.


품에 한 아름 공을 주워들고 와서는 다시 카트에 밀어넣고, 공을 줍기 위해 뛰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까닭으로 땀을 이마에 매단 보쿠토가 아카아시 앞에서 서성였다.


“아니, 나는 이러면 네가 부탁 들어줄 줄 알고…….”

“제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거절할 텐데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너…….”

“무슨 말을 이렇게 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 알아보시…….”

“그! 러! 니! 까! 네가 필요하단 거야!”

“네?”

“나한테 아무도 그런 말 안 해준다고!”


드디어 쓸만한 논리를 찾아낸 보쿠토가 환히 빛나는 얼굴로 아카아시의 두손을 움켜쥐었다. 아카아시가 윽한 얼굴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는 아직 체육관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였다.


“아무도 아무 말 안 해준단 말야~! 너밖에 없어! 그런 질색하는 얼굴 하고 쳐다보는 사람!”

“…….”


이렇게나 심한 말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아카아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자신의 논리에 도취 되어 열정적인 눈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본다. 곧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쿠토의 믿음이 손에 잡힐 듯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빈틈이 되어, 아카아시는 자신의 손을 쥐고 있던 보쿠토를 곧장 끌어당겼다. 보쿠토가 균형을 잃고 휘청하는 사이에 그를 체육관 바닥에 눕히고 손을 뿌리친 아카아시는 재빠르게 옷깃을 추스르고 체육관 문을 열어젖혔다. 보쿠토가 넋빠진 얼굴로 아카아시를 올려다본다.


“그래도 싫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카아시가 돌아서서 나감과 동시에 체육관 문이 닫히고, 해가 다 저문 오후의 체육관이 보쿠토 한 사람과 함께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혐오하는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한 바로 그 사건은, 입학식이 있고서 3주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일어났다.


그 날 일학년 아카아시는 왜 공을 주워오는 것은 언제나 일학년의 몫인지에 대해 고찰하고 있었다. 공을 주워올 사람이 필요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공을 날려버린 사람의 몫이 아닐까? 왜 그걸 무조건 일학년에게 시키는 것인가? 어째서 그런 전통이 생긴 걸까?


누군가에게 물어본다 한들 ‘그건 원래 막내 학년이 하는 거야’ 따위의 대답이 돌아올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아카아시는 체육관 바깥으로 굴러간 공을 주워오기 위해 밖으로 나선 길이었다.


오후의 햇살에 눈이 부셔서 잠깐 미간을 모았다 푼 아카아시는 공이 굴러간 궤적을 따라간다. 공은 어느새 체육관 근처를 돌아 뒤뜰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카아시가 타박타박하던 걸음을 멈춘 건 뒤뜰에 먼저 도착한 선배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보쿠토…선배?’


2학년이면서도 벌써 주전으로 뛰고 있는 스파이커, 아카아시가 고등부에 입학하기 전에도 이름을 떨쳤던 2학년 선배였다. 제멋대로 세워 올린 은회색 머리카락은 아카아시가 살아온 시간을 다 따져도 그밖에 본 일이 없어 뒷모습만 보고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맞은편에는 다른 사람이 서 있다. 아마도 보쿠토와 같은 학년의 소녀인 것 같았다. 공은 보쿠토의 발 근처까지 굴러가 있는데 왠지 선뜻 주우러 향할 수가 없어서 아카아시는 잠깐 벽에 몸을 붙인 채 뒤뜰의 분위기를 살폈다.


“…는 안 되겠어. 헤어져.”


정말 못 나가겠는데, 아카아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보아하니 소녀와 보쿠토는 헤어지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보쿠토가 차이는 것 같다. 어디에서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보쿠토이다보니 그에 관한 것이라면 원치 않아도 알게 되는데, 그러고 보니 여자친구에 관한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다. 그 정도면 저쪽에서 헤어지자고 할 법하기도, 아카아시는 또 속으로 생각했다.


보쿠토는 이제는 전 여자친구가 된 그녀를 특별히 붙잡지 않고 보내주었다. 여자친구가 물기 어린 눈으로 보쿠토를 바라보다 뛰어간다. 아카아시는 모르는 척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차인 것이 머쓱한지 뒤통수를 긁적이며 발끝으로 바닥을 헤집는 중이다.


‘빨리 가셨으면….’


애인에게 차인 것이야 그의 사정이고, 친한 선배도 아닌지라 위로의 말을 전할 일도 없으며, 당장 급한 것은 저 보쿠토가 아니라 보쿠토 근처의 배구공이다. 하지만 아카아시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몇 분 지나기도 전에 한 사람이 더 나타난 것이다. 아까 자리를 뜬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보, 보쿠토! 나와줬구나!”

“어? 아, 어 …….”


나와줬구나? 꼭 나와달라고 말한 건 저 사람인 것 같다. 보쿠토도 덤덤한 몸짓이었다. 나온 사람은 긴장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보쿠토를 몇 번 더 불렀다. 보쿠토는 크게 재촉하는 바 없이 상대의 말을 기다려주었는데…….


“조, 좋아해! 사귀어주세요!”

“에…나하고?”

“응!”

“나는 너 잘은 모르는데…….”

“괜찮아!”

“그래, 그럼! 사귀자!”

 

명쾌한 대답이었다. 잔뜩 긴장해있던 상대가 활짝 웃더니 그러면 부활동 끝나면 보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쿠토가 시간을 잠깐 셈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설레는 목소리로 뛰어나간다. 보쿠토는 그런 상대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어깨를 으쓱하곤 뒷목을 쓸어내렸다.


“어…어?! 너 우리 부 1학년?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아카아시가 딱딱한 걸음으로 나타나자 보쿠토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맞이해준다. 의외의 곳에서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 사람을 만난 반가움이었다.


“아~! 공 가지러 왔어? 내가 가지고…….”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보쿠토가 공을 주워 가려고 했는데 아카아시가 그 공을 낚아챘다. 후배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날이 선 듯 서늘하다는 것을 알아챈 보쿠토가 고개를 갸웃하려다 그의 청록색 눈동자와 마주하곤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공을 챙긴 후배는 그대로 몸을 돌려 척척 돌아간다. 그 발걸음마저 냉랭한 기색이 풀풀 감돌고 있었다.


보쿠토가 내뻗은 손이 어색하게 내려갔다.


*


요즘 보쿠토의 뇌리를 지배하는 것이 있다면 둔해진 것 같은 리시브나 옆 학교 친구에게 스파이크가 족족 막힌다는 것에 대한 것도 아닌, 바로 입부 한 지 얼마 안 된 세터 지망이라는 신입생이었다.


아직 중학생 티를 다 벗지 못한 듯 아닌 듯한 얼굴에다 살도 근육도 부족하여 마릇한 몸의 이 신입생은, 가만히 있으면 눈매가 매서워 보여도 옆에서 동기가 말을 걸면 금방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대화를 나누곤 했다. 세터 지망이라면 앞으로 손을 맞춰볼 일이 있을 테니 연습하는 것을 몇 번 보곤 했을 뿐 아직 대화다운 대화는 한 번도 나눈 일이 없었는데…….


‘왜지!? 뭐지!? 뭐야!?!?’


보쿠토가 실상 그 전까진 이름도 몰라서 속으로 대충 ‘세터지망’ 정도의 호칭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 후배가 자신만 보면 도끼눈을 뜬다. 정확히는 경멸의 눈동자를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보쿠토는 살면서 자신을 그렇게 차갑게 쳐다보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북풍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분리수거함의 분리수거 안 된 것을 보는 듯한 눈길.


처음으로 말문을 터보았던 건 그 후배가 뒤뜰로 공을 주우러 왔을 때였으니까, 2학년 중 누군가가 공 주워오라고 시킨 건가 하는 생각도 살짝 해보았으나 그 후배는 다른 2학년에게도 3학년에게도 정중했고 동기들에게는 살가웠다.


그러니까 정확히, 보쿠토 코타로 그만을 향해 그렇게, 그렇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눈빛을 한다는 거였다. 보쿠토가 살면서 단 한 순간도 정면으로 받아본 적이 없는 그런 표정을.


새 학년이 시작되고 한 달이 넘어가자 다른 동기들도 후배들도 감독과 코치도 남아있는 1학년들을 신뢰하기 시작했고 다들 말문을 터 가며 웃음기 어린 대화를 나누는데 보쿠토만 도통 그 대화에 끼질 못하는 중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 역시 후배들과도 동기들과도 선배들과도 즐겁게 대화를 하긴 하는데, 부의 동료들과 와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신나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퍼뜩 정신을 차려보면 그 후배는 온데간데 없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걸 알아차리고 나면 웃으면서 대화를 할 기분이 사라져 어물쩍 말을 줄이다 그도 자리를 떴다.


하지만 후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단 둘만 있으면 노골적으로 그를 피해간다. 여럿이 있을 땐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하게 돼도 진솔하게 질색하는 얼굴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말이나 해봤어, 우리가!?’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는 게 이렇게까지 충격적일 일인가? 보쿠토가 지난밤 곱씹은 화두는 이것이었는데, 결국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한 번도 그런 대접을 받은 일이 없어 속에서 천불이 올라오는 거라는 얄팍한 판단이 전부였다.


그렇게 후배의 경멸 어린 시선을 견딘 지 어언 열흘째, 결국 보쿠토는 부활동 끝마치고 돌아가는 후배의 가방끈을 붙잡고 말았다.


타악!


“아, 아카아시?”


잡은 손은 바로 그 순간 매섭게 내쳐졌다. 보쿠토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작 뿌리친 후배도 조금 놀란 듯한 표정에 다른 사람들이 되레 보쿠토를 탓했다. 후배를 놀라게 하지 말란 것이었다. 후배가 어렵사리 사과의 말을 하고 보쿠토는 손을 내젓는다. 대단치 않은 일이었기에 부원들은 다시 금방 흩어졌다. 보쿠토가 잠깐만, 하고 불러세우는 말에 후배가 의도를 가늠하는 듯이 매서운 눈으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두 적당히 하교하고 사라진 뒤에, 보쿠토는 겨우 아카아시를 끌고 체육관 뒤뜰로 향할 수 있었다.


이제 봄이 저물고 여름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교정은 푸릇푸릇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죠?”


냉기가 뚝뚝 묻어난다. 어지간한 강호를 상대하는 와중에도 긴장한 적은 없었는데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보쿠토는 후배의 면면을 쳐다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 말야.”

“네.”

“너, 너! 너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하는데!?”

“……네?”


버럭 소리치듯 물으면서도 눈을 꼭 감고 말았는데 살며시 한쪽 눈을 뜨자 후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다.


‘에? 착각이었나?’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보쿠토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였다.


“모르…모릅니까?”

“…진짜 싫어해!?”

“좋아할 수 있는 쪽이 더 신기한 것 같은데요.”

“아, 아니, 왜!? 왜? 우리 얘기도 몇 번 안 했잖아! 너, 너는 후배면서, 어어, 선배를 어떻게…….”


후배의 눈동자 속 온도가 점점 떨어짐에 따라 보쿠토의 목소리도 점점 사그러들었다. 마침내 보쿠토가 입을 다물게 되었을 때 후배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의 몸이 움찔한다.


“도대체가……. 사귀던 애인하고 헤어진 지 2분 만에 새 애인을 사귀는 사람은 어디 있으며…….”

“!”

“그 애인하곤 또 어제 헤어지셨다면서요?”

“아…그건 걔가 헤어지자고 해서…….”

“뭐 선배가 애인 어떻게 사귀든 그건 선배 맘이고 제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요. 쓰레기 아니라곤 못 하겠네요.”


칼같이 떨어지는 비난에 단언이었다. 보쿠토의 눈에 억울함이 방울방울 차올라도 저 북극 같은 후배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말을 마친 후배가 이제 됐죠, 라며 돌아서려는 찰나에 보쿠토가 빽 하고 소리쳤다.


“그, 그런 거 아니, 아니야!”

“……?”

“아니, 그러니까 막, 내가 어떻게 한 게 아니라고…….”


후배가 보쿠토를 쳐다본다. 보쿠토는 서둘러 말을 이으려고 애썼다.


“아니 그 애가, 그, 사귀자고 했는데……. 싫다고 하면 상처받잖아…….”

“…?”

“그래서 알았다 했지. 근데 일주일쯤 되니까 헤어지자고 해서……. 헤어지자고 하는데 내가 뭐라 하기는 좀 그렇잖아. 그래서 알았다고 했는데.”

“…….”

“근데 다른 애가 사귀자고 해서, 나는 너 잘 모르는데 괜찮냐고 하니까 괜찮다고 하길래, 그래서 거절하기 좀 그렇잖아!? 닳는 것도 아닌데!? 전에 있던 애한텐 차였으니까 양다리도 아니었다고?! 그래서 그냥 사귀자고 하는 말에 알았다 한 거 뿐이었단 말야!”

“…….”

“너 진짜 너무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후배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들어 갔지만 눈을 꼭 감고 소리치는 보쿠토는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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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시종일관 어린애처럼 굴었는데, 그런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게 주량이 상당했다. 대수롭지도 않은 얘기를 혼자 즐거운 것처럼 큰 소리로 말을 하면서 목이 따가울 만큼 도수가 센 술을 물처럼 들이켰다. 


바의 조명은 어두운 편이었던지라 남자의 얼굴은 윤곽을 구분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 그림자만으로도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걸 판별할 만했다. 하지만 그런 남자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도 예사롭지는 않았다. 


시끄러운 남자에 옆에 앉아있으니 놀랍도록 조용해 보이는 남자였는데, 시끄러운 쪽이 어둠 속에 홀로 태양인 양 눈에 띄고 어색했다면 이 쪽은 이 어둑한 조명이야말로 자신의 시간이라는 듯이 한 호흡에 한 번 꼬릿짓하는 물새처럼 부드럽게 어우러들었다. 


두 사람은 오늘 이 바에서 처음 만났다. 시끄러운 남자는 일하러 온 낯선 도시의 호텔방이 답답하다고 나온 차였고 조용한 쪽 남자는 오늘 회의에서 만나기로 한 상대가 약속을 깼다며 바람을 쐬러 나왔다고 했다. 바의 옆자리에 앉았다가 팔이 스친 것뿐인 인연이었다. 바텐더는 두 사람 앞에 새로운 술을 놓아주었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떠들어댔고 다른 한 쪽은 듣기만 하는데도 나름대로 대화가 이어졌다. 처음 만난 사이라는데도 한 쪽이 시끄러워지면 다른 한 쪽이 거침없이 핀잔을 주었다. 화제는 낯선 도시의 우중충한 날씨, 입맛에 맞는지 가늠할 수 없는 요리, 지나치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이 도시 사람들에 대한 부담스러움 같은 것들로 이어져갔다. 조용한 남자는 마지막 화제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끄러운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 때만큼은 바텐더마저 손님에 대한 예의를 잊고 그만 빤히 쳐다보고 말았더랬다. 


두 사람은 바가 문을 내릴 때까지 한 잔씩 마시다가 바에 손님이 사라질 즈음하여 자연스레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이라 거리의 가로등조차 숨을 죽이고 있는데 거친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히 소음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끄러운 남자가 조용한 남자를 휙 잡아끌었다. 남자의 손끝은 단단했다. 조용한 남자는 말 없이 시끄러운 남자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말 없이 눈을 마주친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둑했던 바 안보다 가로등과 달빛이 내리쬐는 바깥에서 서로의 얼굴은 더욱 분명하고 또렷하게 보였다. 


곧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격정적인 입맞춤을 시작했다. 이유로 들 수 있는 것들은 많았다. 오늘 그들은 남들이 한달간 먹고 죽을만큼 술을 마셨고, 달빛은 오묘한 은빛으로 출렁거리는 중이었다. 낯선 오토바이 한 대가 두 사람을 재촉하기도 했다. 마침내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조용한 남자는 자신의 등에 와닿는 건물의 벽이 내뿜는 냉기를 느끼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호텔방이 답답해서 나왔다고 했던가요.”

“응. 침대도 커.”


시끄러운 남자가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


호텔의 방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다시 격정적인 키스가 이어졌다. 남자와 남자는 서로 본래 한 몸인 것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호텔의 문에 두 사람의 구두 두 쌍이 나뒹굴었다. 중간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옷자락이 허물처럼 흩어졌다. 습기차고 무른 것이 쉼없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섬유와 섬유가 거칠게 마찰하는 소리 같은 것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두 사람이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건 이 객실의 손님이었고 그 위에 올라탄 것은 이 객실의 주인이었다. 바에서는 한 시도 쉴틈 없이 말을 늘어놓던 시끄러운 남자는 호텔에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다. 드디어 그의 입술이 떨어지며 쉰 듯한 쇳소리가 났다 .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

“한 번 시작하면 무슨 말을 해도 안 봐줄 건데.”


침대에 누운 남자가 턱을 살짝 들고 얕게 웃었다. 호텔의 무드등이 그의 뺨이 물든다. 시끄러운 남자는 그게 마치 달같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채였다.


“다른 사람 쥐고 흔드는 건 제 전공이라서요. 과연 그 쪽이 가능하실지?”

“하, 그래? 남의 말은 죽어도 안 듣는 게 내 전공인데.”


시끄러운 남자의 손이 조용한 남자의 복부 위에 안착했다. 손끝으로 내리누르는 그 손에 단단함이 느껴졌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달이 저물 때까지, 호텔방은 한 시도 조용할 새 없이 격정으로 치달았다.


*


아카아시는 퀭한 머리를 움켜쥐었다. 뒤늦게 올라온 숙취가 망치로 변해 자신의 머리를 꽝꽝 때리는 기분이었다. 


술냄새를 씻기 위해 샤워를 세 번쯤 하고 나왔더니 지난 밤 열락의 상대는 정신없이 자고 있다. 아카아시는 그 시간들을 떠올렸다가 흐뭇한 얼굴로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남의 룸키로 아침 조식까지 마친 아카아시는 로비에 열쇠를 맡겨두고서 그대로 콘서트홀의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은 반드시 협연할 피아니스트를 끌고 오겠다는 에이전시의 연락이 이미 와 있었던 것이다. 


‘조금 격렬했나?’


아카아시는 슬쩍 뻐근한 허리를 쓸어내렸다. 봐주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을 할 때는 귀여운 허세를 부릴 줄도 아네, 싶었는데 지난 밤의 시간이 그의 말을 완벽히 증명했다. 한둘 울린 솜씨가 아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서 정신없이 몸을 내맡긴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피로보다는 오랜만의 운동 끝에 느끼는 상쾌함이 더 클 정도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사무실로 향하는 아카아시의 걸음이 사뭇 경쾌했다. 이 기분대로라면 어제 미팅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제 곧 만날 피아니스트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카아시는 구둣소리에 박자를 맞추며 이번 협연에 대해 생각했다. 에이전시에서 피아니스트에 대해 도통 얘길 해주지 않았지만 후보군은 얼추 알만했다. 이쪽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정도의 실력자면서 지금 국내에 들어와 있는 사람, 에이전시에서 깜짝 선물처럼 그에게 비밀로 하겠다고 할 정도의 인물. 


‘타키자와 요시후미려나? 그 사람이라면 좋지.’


다만 그렇다면 의아하기는 하다. 말 한마디 없이 미팅에서 몸을 숨길 만한 위인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카아시가 사무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콘서트 홀의 관장이 웃는 낯으로 그를 환영했다. 약속한 회의 시간보다야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아카아시를 소파 앞에 앉힌 관장은 다과거리를 내어오며 이번 콘서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협주곡을 선보인 적 없는 피아니스트라 정말 기대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협주곡을 한 적이 없어?’


그렇다면 그가 처음 생각했던 카티자와 요시후미는 아니다. 아카아시는 턱을 매만지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에이전시 쪽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관장은 연신 약올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피아니스트의 이름은 정확히 말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콩쿨 입상한 신출내긴가?’


그렇다면, 그도 그럴 법하다. 이쪽은 나름대로 이름을 쌓아올린 지휘자였으니 갓 콩쿨을 떨쳐내고 올라온 병아리와 협연을 하란 말에 자존심 상할지도 모른다고 신경을 써준 것일지도 몰랐다.


‘별로 그런 거 신경 안 쓰는데…….’


아카아시는 커피의 홀더를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했다. 어차피 지휘지가 제대로 된 지휘자라고 이름을 떨치기까지는 한두해로 될 일이 아니었고 그 전까지 아카아시는 일을 가릴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협연하는 피아니스트가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결국 협연을 시키는 거면 배려라기엔.’


하여튼 에이전시도 일을 재밌게 한다고, 아카아시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약속시간으로부터 십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아카아시는 깨끗하게 비워버린 다과접시를 내려다보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관장은 마중을 가야겠다며 사무실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호들갑을 떨며 다시 돌아왔다. 그의 뒤로 두 사람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한 명은 그의 에이전시 쪽 사람으로 익히 아는 이였고, 낯선 다른 쪽이 예의 그 피아니스트인 것 같았다. 


“아하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보쿠토 씨, 빨리 미안하다고 해요. 우리 지휘자님 무섭단 말야.”

“어이쿠야. 10분인걸요. 아카아시 씨도 화 많이 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아카아시 본인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관장이 먼저 탬버린도 치고 트라이앵글도 쳤다. 캐스터네츠도 치겠네, 아카아시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곧 머리 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아카아시는 멀리서 거대한 심벌즈가 쩡하고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피부가 본디 흰 편인 듯했지만 분명히 다른 원인이 있어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피아니스트는 선명한 금빛 눈동자로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관장과 에이전트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역시 얼굴 보자마자 알줄 알았지. 하하, 아카아시 씨라면 보쿠토 씨와도 문제없이 협연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아! 보쿠토 씨가 문제라는 말은 아니고……. 워낙에 독주를 좋아하시다 보니까요.”


문제가 아니라고? 아카아시는 저 에이전트가 자기 입 위에서 바이올린 활줄을 켜도 감내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피아니스트, ‘보쿠토’라는 이름, ‘독주를 좋아한다’라고 하면 딱 한 사람이 남는다.


소년 시절부터 권위있는 콩쿠르를 모두 휩쓸다시피하며 음악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승승장구한, 현대 음악계의 총아. 그 격정적이고 파워풀한 연주는 호평도 악평도 잔뜩 낳았지만 연주회장에서만큼은 박수를 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피아니스트. 그 제멋대로에 가까운 연주 성향 탓에 협주는 즐기지도 않거니와 한 역사조차 없는 피아니스트…….


‘보쿠토 코타로!’


그리고 그의 그 불타는 듯이 열렬했던 어제의 하룻밤 상대! 그가 어젯밤 바에서 일하러 온 곳이 답답해 도망치다시피 했다고 얘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미팅하기로 했던 피아니스트가 돌연 몸을 감춘 바람에 오늘로 약속이 밀린 것도 어제였다. 꿈이라고 믿고 싶은데 그의 이성이, 그리고 보쿠토의 마찬가지로 뜨악한 얼굴이 이게 현실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보쿠토 씨가 긴장한 건 처음 보는 것 같네요, 하하. 우리 지휘자님 그래도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에요~! 그쵸, 아카아시 씨.”


보쿠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젯밤 일이 아스라히 지나갔다. 바에서 뭐라고 떠들어댔더라? 일하기 싫다는 이야길 했었나? 그리고 바를 나가서, 입을 맞추고, 그대로 호텔로 가서……. 


보쿠토는 허옇게 뜬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건 아카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 쥐고 흔드는 게 전공이라더니!)

(남의 말은 죽어도 안 듣는 게 전공이라더니!)


콘서트홀의 사무실에 이루 말로 못할 어색한 공기가 꽉 들어차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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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스님이 원나잇후 어색하게 마주해버린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를 보고싶다 하셔서 써보았습니다~! 











그 뒤로 보쿠토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약속했던 월수금에 맞추어 학교의 정문 앞으로 나가보았지만 달이 뜰 때까지도 보쿠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몇 번이나 휴대전화의 액정에 빛을 밝혔지만 보쿠토의 연락처를 눌러볼 수는 없었다. 


그 일주일간의 침묵, 아카아시의 즐겁지 않은 휴가가 끝나고 다시 연구실로 복귀한 아카아시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그 계약서를 훔쳐간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여어, 아카아시~! 시험은 어땠어? 잘 나왔어? 성적 나온 것도 몇 개 있던데 확인했냐?”


갤러리에서의 일 이후로 묘하게 눈치를 보는 듯이 굴었던 나미카와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화색이 완연했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자신의 심증을 확신으로 굳혔다. 


“그런가요. 한 만큼 나왔겠죠.”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타인을 망가뜨리는 것이라면 그 얼마나 가엾은 인생인가. 아카아시는 자신의 그러한 초연했던 생각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가엾은 인생 따위가 아니라 단지 어둡고 깊은 악의였다.


“우리 엘리트는 진짜 남달라~!”


나미카와가 느물하게 웃으며 아카아시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아카아시는 나미카와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그 팔을 풀었다. 나미카와는 까칠한 후배라며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툭툭 친다. 그 전이었으면 어디 선배를 무시하는 거냐고 발끈하기부터 했을 텐데 그것마저 태도가 달랐다. 


그 사이에 연구실 사람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아카아시는 선배들에게 인사하며 자연스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아카아시의 뒤로 선배들이 대화 나누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나미카와, 밤이라도 샜냐. 뭐 했냐. 뭐 했기는.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나미카와의 우쭐대는 목소리. 


아카아시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마우스에 손을 올리며 생각했다. 그래, 자신이 보쿠토를 보고 경탄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렇게 질퍽한 진창으로 뛰어들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도 있는데 늪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사람을 보고서 어떻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있나. 


아카아시는 아무 소식이 없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주 그 자리에서 나타난 계약서가 어떻게 된 일인지 이제야 알았다. 알고 나니 사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뭐에 대해서? 내가 보관하던 계약서를 도둑맞았고 그것 때문에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라고?’


그런 말을 하면 보쿠토가 무슨 이야기를 할까?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자신이 사과하고픈 이 마음이 정말로 자신의 실수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미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보쿠토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기 때문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애당초 나미카와를 그의 자취방에 들여 재워주었던 것도 보쿠토 때문이다. 가짜 약혼자 행세를 하고 있으니 그의 집안 어르신들에게 트집잡히지 않기 위해서였지, 그게 아니었다면 나미카와가 낯선 갤러리에서 술에 취해 뻗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나미카와가 결국 아카아시의 계약서를 훔쳐간 것도, 잘잘못을 따지자면 나미카와의 잘못 아닌가. 도둑맞은 사람과 훔쳐간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도둑맞은 사람의 잘못이 성립할 수가 있나. 


그런데 이 모든 이성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하고픈 마음이 드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삼켰다. 등 뒤에서는 선배들이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나미카와는 그에게 하고픈 말이 있는 듯했지만 당장 찾아온 으스댈 기회를 놓치는 것도 아까운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속으로 ‘평생 그러고 있어라.’하고 중얼거리며 논문 파일을 향해 마우스 포인터를 옮겼다. 


그의 마음이 달밤에 잘못 맺힌 이슬처럼 심란해도 논문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




그 뒤로 다시 일주일이 지났지만 보쿠토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계좌로 연락이 왔다. 아카아시는 입금된 그 액수만 보아도 보쿠토가 계약 그대로 정확히 계산해 넣어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걸 받고도 아무 말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카아시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보쿠토의 번호를 찾는 손길은 익숙했다. 자신이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해 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얇은 카디건 하나만 챙겨 연구실 건물의 비상계단에 기대어 선 아카아시는 뿌연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낀 겨울 하늘은 흐릿한 잿빛이었다. 날이 많이 춥지 않아서 눈이 아니라 비가 올 것 같았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쿠토가 전화를 받았다. 아카아시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보쿠토가 자신의 전화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단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여보세요.》

“…….”


막상 전화했지만, 말문이 턱 막혔다. 잘 지냈어요? 잘 지냈으면 보름 가까이 연락 한번 없을 리가 없다. 괜찮으세요? 뭐가 괜찮으냔 말인가? 그가 그토록 바라던 유산을 결국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이? 오랜만이네요. 그럼 오랜만이지 않겠나,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헤어진 지 오늘로 보름째인데. 


《아, 입금은 했어.》

“……네, 봤어요.”

《그동안 고마웠다.》


보쿠토의 말은 딱딱했다. 아카아시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는 모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들통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어요? 그 상황에서 아무 말 못 한 건 당신 아닙니까? 탓을 할 때야 하더라도 몇 날 며칠을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말이라도 하던가요.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수습은 잘 했습니까?”

《…….》


이따금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여기서 멈추는 게 모두에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하고야 말게 되는 말이 있다. 왜 그 한 마디를 참지 못하는지 줄곧 의아했던 아카아시였으나 이제 알 것 같았다. 


사람은 뜻대로 되지 않는 걸 보며 종종 그럴 바에야 다 부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뭐 대충.》

“그렇습니까. ……유산 문제는 유감이…….”

《그게 중요하냐?》


보쿠토의 목소리에서 날 선 못이 느껴졌다.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듯이, 보쿠토의 인내도 어딘가에서 끊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두 사람이 함께 구축해온 모든 게 부서지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 짧은 찰나에 깨달았는데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됐다. 말해 뭐하냐》


보쿠토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비난과 짜증의 기색이 어려있다.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어떤 방향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보쿠토는 사람을 고용해서라도, 비겁한 짓은 싫다고 하던 그가 가족을 속여서라도 조모에게 ‘결혼할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유산이 걸린 것은 핑계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몇 번이나 했다. 


그가 애쓰고 노력했던 것들 전부가 가족 모두 앞에서 밝혀졌고 비난받았으니 말끔한 기분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에게 화풀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지난 이주 간 서로 연락하지 않았으니, 보쿠토에게도 응어리진 마음이 있을 것이었다. 그걸 자제하고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까지 아카아시는 알고 있었다. 


“말씀 재밌게 하시네요.”

《……뭐?》

“비난을 하고 싶으면 똑바로 제 탓을 하시든가요. 어떻게 된 경위인지 모르겠으면 아느냐고 물어나 보시던가요. 의심이 가면 의심하고 있단 얘기라도 하던가요.”

《그렇게 얘기한다 이거야?》

“말해 무엇하냐 하셨죠? 그런데 보쿠토 씨는 아무 말도 안 하셨는데요.”

《……나만 말 안 했냐?》


잔뜩 쉰 것같은 쇳소리였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보쿠토가 소리쳤다.


《너도 아무 말 안 했잖아!》

“제가.”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아카아시의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변명? 할 게 있으면 있는 사람이 먼저 말해야 되는 거 아닌가? 계약서 쓰자는 대로 다 썼더니 그것 때문에 일을 전부 망치고, 그래도 약속한 대금은 지불 했는데 뭐가 또 필요해?》

“제가 지금 더 필요하단 얘기가…….”

《아, 혹시 아키오 그 자식이 뭐 더 얹어주겠단 얘기라도 했어? 아니면 그 나미와카인지 카와인지를 치워주겠대? 그래서 우리 계약서 넘긴 거 아냐?》

“뭐라고요?”

《나하고 있을 땐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아 내가 너무 눈치 없이 한 번에 수긍했나? 몇 번 더 물어볼 걸 그랬지?》

“……그게 할 말입니까?”


차갑게 얼어붙은 것이 단숨에 박살이 나듯, 그들 사이에 있던 모든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간다. 깊이 없이 얄팍했기에 가루로 깨어진 것들은 순식간에 기화되어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아카아시의 말에 더 퍼붓기라도 할 듯이 숨을 들이켰던 보쿠토가 씹어뱉듯 무어라 중얼거리고는 더 할 말 없다고 전화를 뚝 끊었다. 아카아시는 전화가 끊긴 휴대전화를 세게 움켜쥐고 액정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처음부터 계약으로 만난 상대일 뿐이었다.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일은 끝났고 더 이상 만날 일은 없으니 말끔히 버리고 던져버리면 될 것이었다. 


보쿠토의 생각이 부당한 오해이고, 그러니 다시 전화를 해서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면 오해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카아시는 지친 눈으로 흐릿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해를 풀어서 무얼 하나? 일은 이미 벌어졌고, 자신과 보쿠토는 친구조차 못 되는 사이다. 해결한다 해도 돌아오는 건 깨진 것을 억지로 이어붙여 놓은, 다시 쓰지도 못할 도자기 같은 관계뿐이었다. 이런 것은 손에서 놓아버리는 편이 더 편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앞에 놓여있는 목표가 있다. 아카아시는 휴대전화의 액정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보쿠토의 번호를 지웠다. 이게 보쿠토 역시 바라는 바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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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봐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허니문 아일랜드는 322p로 완결, 다가올 대운동회에서 회지로 만나뵙겠습니다^-^! 

(요기까지는 약 150p 분량입니다)


봐주신 분들 덕분에 완결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ㅠㅠ 감사합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조용히 시선을 마주했다. 보쿠토는 조모에게 매달려 장난치느라 바쁜 와중에도 아카아시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크게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확실히, 뭔가 방법이 없긴 하지만…….’


그가 나타난다 해서 어쩐단 말인가? 자신을 보고 숨 한번 쉬기도 전에 결혼식 얘기를 하는 조모의 마음을 어떻게 바꿀 수 있나? 하지만 아카아시는 무언가 계속해서 꺼림칙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은 자기 것을 지킬 때만큼이나 타인의 것을 파멸시키려 들 때 그 열의에 불을 지피는 법이다. 아카아시는 그것을 뼈도 채 굳기 전에 배웠다. 그리고 보쿠토가 원하는 것은, 그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천금을 주어도 팔지 않을 거라고 하는 그 아키오가 이 상황을 흘러가게 내버려 둘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정말 내버려 둘 거였다면 이렇게 제 양친까지 불러들여 판을 키우지도 않았을 테다. 그런데 정말, 자신과 보쿠토의 이 계약 결혼을 무슨 수로 무산시킬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방비할 도리가 없다는 불안감이 스물스물 아카아시의 내면을 파고들어 왔다. 


아키오까지 도착했다는 소리를 들은 조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막내아들 하루키가 곁에서 부축을 거들어주었다. 그렇게 네 사람이 거실로 나섰을 때, 바깥의 분위기는 보쿠토와 아카아시가 안방으로 들어오기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보쿠토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고용인들은 숨을 죽이고서 부엌쪽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어른들은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무슨 일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이 어색한 분위기의 주범은 당연하게도 아키오였다. 아키오만이 과장스러울 만큼 안타깝고 침중한 기색이다. 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폴더?’


종이로 만든, 서류를 보관하는 폴더였다. 


“아키오! 무슨 일이더냐.”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기색에 조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키오는 조금 화가 난 것도 같았다. 조모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아키오가 뚜벅뚜벅 보폭이 큰 걸음으로 보쿠토에게 다가왔다. 순간 아카아시의 심장이 불안함으로 크게 뛰었다. 그리고 그것이 명확한 사고로 뻗어나가기도 전에 아키오가 보쿠토의 가슴팍에 그 폴더를 집어던졌다.


“코타로! 네가 아무리 할머님 유산을 탐을 내도 그렇지!” 


철썩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폴더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 안에 든 서류가 우수수 흩날린다. 그 위에 적힌 글자가 빠르게 읽혔을 때, 아카아시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계약서…!’


보쿠토와 자신의 일을 서류로 정리해둔,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작성했던 바로 그 계약서였다. 



*



“이게 다 무슨…….”


제일 먼저 그 서류를 집어든 사람은 아키오의 부친이었다. 경악이라기보다는 기가 막힌단 목소리로 그 서류를 읽어나가는 것을 보쿠토의 부친이 낚아챘다.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온다. 보쿠토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키오가 열에 뻗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약혼자를 사람을 고용해 대행시킨단 생각을 할 수가 있어! 그것도 할머님 유산이 달린 문제에서!”

“…….”


보쿠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문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키오를 노려봤을 뿐이었다. 


“코타로. 이게 무슨 일이냐.”

“아버지. 설명을…….”

“아키오의 말이 사실이냐? 이 계약서가 사실이야?”

“아키오가 그걸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실이란 말이구나.”


아카아시는 침묵을 선택했다.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보쿠토를 변호한다고? 어떻게? ‘문제’는 자기 스스로 답을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선 아카아시 자신이 바로 그 문제였다. 


“큰아버지도 속이고 막내 삼촌도 속이고 이젠 할머님도 속이려고 했어? 내 친구더라 돈 주고 샀냐고 곧장 물어보던 건 네가 그래서였구나!”


아키오의 목소리에서 주체하지 못한 화가 흘러나왔다. 아카아시는 등 뒤로 돌린 주먹을 세게 쥔 채 바닥에 흩어져있는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보쿠토가 작성해 한 부씩 나눠가진 저것이 어떻게 아키오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키오가 다시 언성을 높이려는데 조모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 손이 향한 곳은 보쿠토의 부친에게로였다. 부친은 숨이 막힌단 얼굴로 조모의 손에 계약서 뭉치를 넘겼다. 조모가 미간을 모으고 눈매를 가늘게 만든 채 계약서를 훑어보았다. 그걸로 용서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지 아키오가 다급히 나섰다. 


“할머님! 어떻…….”

“조용히 하거라, 아키오. ……코타로. 진정 이게 네 생각이었느냐?”

“…….”

“대답을 해!”


머리가 눈처럼 새하얗게 물든, 작은 체구의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박력이었다. 조모를 부축하고 있던 하루키가 작은 목소리로 ‘어머니.’하고 불렀다. 하지만 막내아들의 만류로도 조모의 화는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할머니, 나는…….”

“이 못난 놈! 내가 짝을 찾아오랬더니 그걸 돈을 주고 사? 그 돈이 누구 돈이냐! 네가 번 것이 한 푼이라도 들어 있는 돈이야!? 내가! 내가 벌고! 네 어미 아비가 손가락 한 번 못 펴면서 잠 못자면서 번 돈 아니냐!”

“…….”


아키오를 향해서는 살기넘치는 눈빛을 할 수 있었던 보쿠토였으나 조모를 보고서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윽고 조모의 눈길은 보쿠토 곁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카아시에게로 향했다.


“너도!”

“…….”

“이 철없는 것이 돈을 줄테니 하자 한다고 이런 일을 덜컥 맡았단 말이냐? 생각이 있는 게야 없는 게야! 어찌 돈에 긍지와 명예를 다 갖다 팔아!”


아카아시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조모의 호통아래에서 그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이……. 꼴도 보기 싫다!”


노모가 버럭 소리치고는 저택을 나섰다. 하루키가 다급히 따라붙어 부축한다. 그런 노모의 뒤로 그녀의 아들들이 서둘러 다가갔다. 그건 보쿠토도 마찬가지였지만 매섭게 가로막는 아키오의 걸음에 막혀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보쿠토의 모친이 조용히 아카아시에게 눈짓했다. 이만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아카아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한 뒤 소리 없이 보쿠토의 본가를 나섰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바라보았지만 두 사람은 대화할 수 없었다. 보쿠토의 부친이 곧장 보쿠토를 데리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



고급 주택가 안쪽까지 들어오는 차라고는 전부 자가용뿐이었던지라 아카아시가 대로변까지 나가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도착했을 때, 아카아시는 자취방에 기대어 앉아 탄식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보쿠토 조모의 외침이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찌 돈에 긍지와 명예를 다 갖다 파느냐고? 하지만 돈이 없는 긍지와 명예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힘없는 긍지는 그에게 가족을 찾아주지도 않았고 힘없는 명예가 그의 앞날을 보장해주지도 않았다. 오로지 돈이 바로 그 힘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대꾸할 수 없었다. 그녀가 보쿠토의 친애하는 조모여서도 아니었고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서도 아니라,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이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금전이 급했어도, 아무리 막대한 보수가 주어진다고 해도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됐는데. 돈을 벌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편히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가만히 침대에 기대어 침잠해가던 아카아시는 눈을 감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과 좋은 결말이 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자각이 각성제와 환각제가 오락가락하듯 그의 신경을 괴롭혔다. 계약서 같은 걸 쓸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수습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아카아시는 문득 눈을 떴다. 


아키오가 가져온 그 계약서, 적당히 꾸며낸 가짜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들을 곁눈질로 봤을 때 그 서류는 모두 진짜였다. 자신에게 한 부, 보쿠토에게 한 부뿐인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아키오의 손에……. 


아카아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계약서는 보쿠토에게 한 부, 아카아시 자신에게 한 부 있다. 세상에 단 두 부뿐인 것. 그러니까 그건 자신의 것 아니면 보쿠토의 것이라는 말이었다. 


‘서명이 왼쪽에 있는 건 누가 가져간 계약서였지?’


아카아시는 다급한 동작으로 자취방 책상의 책꽂이를 뒤졌다. 책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지고 수업에 사용한 유인물과 프린트가 흩어지며 날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카아시는 그 계약서를 보관했던 폴더를 찾아냈다. 


“하…….”


양손으로 펼친 폴더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할머님만 뵙는 것 아니었습니까?”


지난번에는 차가 두 대뿐이었던 보쿠토의 본가 차고에는 이미 네 대나 주차가 되어있었다. 차고에서도 들리는 실내의 소음을 보면 안에 한두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다. 조금 당황한 아카아시의 질문에 보쿠토도 놀라서 휴대전화부터 꺼냈다. 누군가에게 급히 메세지를 보내는가 싶더니 곧 답신이 왔다.


“뜨헉.”

“뭔데요. 뭡니까.”

“아 이 개자식이 진짜…….”


상소리를 하는 것은 진짜 그런 감정이 들었기 때문인 것이 반, 나머지 반은 아카아시의 눈치를 보기 위함이었다. 아카아시가 미간을 모았다. 보쿠토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깨물었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막내 삼촌이랑 작은 아버지네도 와 있나 봐.”

“……네?”


아카아시는 이번만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일의 전말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방해할 생각인가 보네요.”

“어어……. 도대체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막내 삼촌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사촌도 와 있습니까?”

“그 자식은 정작 안 왔긴 한데.”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눈치를 살폈다. 싫으니 좋으니 티격태격 한다 해도 보쿠토 입장에서는 그들 모두 평생을 봐온,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여기서 가장 힘들게 된 건 아카아시다. 아카아시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깊은 한숨을 내쉰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쩌겠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사람이 많으니 부끄러워 인사드리지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아 진짜 왜 이렇게 된 거야…….”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함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보쿠토의 모습을 보는 건 그 이상의 즐거움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아카아시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자신 때문에 눈치 보는 사람을 보고서 즐거워하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보통 악질이 아니다. 


“가죠, 보쿠토 씨.”

“이거 끝나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진짜 제일 맛있는 거!”


아카아시가 보조석에서 내리기 직전,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한쪽 손을 잡아채고 말했다. 그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아카아시는 순간적으로 보쿠토가 평생의 맹세 같은 것이라도 하는 거라고 착각할 뻔한 정도였다. 


“고작 먹을 걸로?”

“아, 아아니! 더! 말만 해!”


상기된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는 도통 미움을 살 여지라고는 존재하지 않아서, 아카아시는 어쩐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알 것 같다고. 



*



“어서들 오렴.”


현관에서부터 두 사람을 맞이해준 건 보쿠토의 양친이었다. 한 번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두 사람은 유난할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로 아카아시를 반겼다. 


“아키오는 아직이래?”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꿰어신던 보쿠토가 부친의 질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 자식 오는 줄도 몰랐는데.”

“코타로.”


둘의 대화는 작은 목소리로 이루어졌기에 거실에 있던 그의 숙부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들어가서 먼저 숙부님께 인사드리렴. 유키 씨, 요리는 다 준비 됐어요?”


보쿠토의 모친이 안쪽을 향해 고갯짓하며 가정부에게 질문했다. 앞치마를 걸치고 있던 가정부가 식지 않게 하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정장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여 보쿠토 곁에서 걸음을 맞추었다. 보쿠토가 한쪽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얼굴을 보자니 어쩐지 맥아리 없이 긴장이 풀리는 것이었다. 


“작은 아버지!”

“오, 코타로. 언제 봐도 훤칠하구만. 더 큰 거 아니냐?”

“에이, 고등학교 때부터 이 키였는데요.”

“우리 아키오도 운동을 좀 시킬 걸 그랬어, 으응.”


몸은 마른 편이었으나 초승달 모양으로 접어 휘어뜨린 눈매 하며 인상만은 유한 중년 남자였다. 자주 웃는 탓인지 눈가에는 잔주름이 보기 좋게 자리잡혀 있다. 보쿠토가 대거리를 해대는 그 아키오의 부친이라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으나 처음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아카아시는 남자의 눈빛 아래에 진득이 가라앉아있는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래, 이쪽이 오늘의 주인공이신가?”

“처음 뵙겠습니다.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아카아시라……. 그 아카아시인가?”


아카아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 혼자 남은 성씨가 무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남자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보쿠토의 등을 두드렸다. 


“이거이거, 우리 코타로가 집안엔 아무도 들이질 않더니만 가장 좋은 걸 아껴두고 있었나?”

“아 작은아버지도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그보다 할머니는요? 막내 삼촌도 와 있다더니 안 보이는데.”

“둘 다 안방에 있다.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고 들어가 계셔. 가서 인사드리거라.”

“할머니—!”


보쿠토는 조모의 소재를 듣자마자, 숙부에게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할머니’라고 큰소리로 외치며 아카아시를 잡아끌고서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아카아시가 겨우 그의 숙부에게 눈인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보쿠토는 노크도 하지 않고 안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할~머니!”

“요 녀석아. 할미 귀청 떨어지겠어.”


좌식으로 꾸려진 실내는 무척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화사함보다는 우아함이 엿보이는 내부 장식 속에 보쿠토의 조모는 그 나잇대라고는 연상할 수 없을 만큼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었는데 아주 새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나이도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자리한 세월의 흐름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아카아시가 ‘안방에 이렇게 대책 없이 들어와도 되나’라고 고민하고 있을 때 보쿠토가 대뜸 방을 가로질러 달려가 그의 조모에게 안겨들었다. 그가 전력을 다해 몸을 부대끼면 가냘픈 노모의 몸으로 버틸 수 없는 것을, 그녀가 흔들리지도 않고 보쿠토를 감싸는 것을 보며 아카아시는 조손 사이의 능숙한 애정의 갈래를 알아보았다. 


조모 곁에 줄곧 앉아있던 보쿠토의 막내 숙부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한숨을 내쉬며 아카아시를 향해 손짓했다.


“이제 곧 결혼도 할 녀석이 어리광은……. 네 남자친구 보기 부끄럽지도 않으냐?”

“아카아시는 괜찮아! 그치, 아카아시!”

“…….”


바닥에 반쯤 눕다시피 하며 제 조모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는, 서른이 멀지 않은 이 남자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중인 자신의 애인 설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카아시는 이번만은 능숙하게 대꾸하지 못하고서 애매한 표정으로 겨우 미소만 그리고 말았다. 막내 숙부 하루키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쪽이 우리 손주와 만난다는 아이더냐?”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합니다.”


아카아시는 드러누운 보쿠토 곁으로 다가가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대답했다. 한참 더 조모 곁에서 어리광을 피우던 보쿠토가 조모의 꿀밤을 맞고는 아카아시 곁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그래, K대에서 공부 중이라?”

“예. 내년 가을에 졸업할 예정입니다.”

“식은 그럼 그 이후가 낫겠구나.”


그 말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흘러나와서 아카아시도 보쿠토도 방비하지 못한 찰나에 두 사람을 세게 때리고 지나갔다. 유달리 어리광이 심하게 묻어나는 얼굴로 히죽히죽 웃으며 대꾸하려던 보쿠토도 제꺽 얼어붙었다. 그건 아카아시도 마찬가지였다. 신상명세에 대해서 그 어떤 질문을 들어도 유려하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만난 지 몇 초 만에 결혼식 날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카아시가 입을 달싹거리는 것을 보고 조모가 미간을 모은 채 보쿠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지 청혼도 제대로 하지 않았느냐는 비난이었다.


“코타로?”

“아, 아니 할머니! 만나자마자 결혼식 얘길 하면 어떡해!”

“결혼할 사람 데려온다지 않았니?”

“그렇긴 했는데…….”

“네가 좋다는 사람이면 나도 좋다.”


조모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투로 응했다. 억울한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뜬 건 보쿠토였다. 그의 시선이 홱 하고 돌아가서 자신의 막내 숙부를 바라본다. 하루키가 휘파람을 불며 눈을 피했다. 


그것만으로도 정황이 눈에 들어온 것인지 조모가 혀를 찼다. 


“네 막내 삼촌이 뭐라 했느냐?”

“내가 만나는 애마다 죄다 싫댔단 말야!”

“하루키가 싫다 한마디 했다고 손 놨으면 너도 할 말 없다, 코타로.”

“엣.”


보쿠토가 머쓱하니 눈을 굴렸다. 막내 숙부 하루키가 헛기침하며 아카아시를 향해 사과의 말을 했다.


“미안하네, 아카아시 군. 우리 코타로가 생각도 악의도 없으니 부디 양해해주었으면 해.”


한 번 들었던 적 있는 얘기였기 때문에 아카아시는 여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 때였다. 


—어머, 아키오 왔니. 

—할머니는 안에 계신다. 코타로가 인사 드리고 있어. 


바깥에서 살짝 소란이 일었다. 보쿠토의 사촌이 뒤늦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맞춘 옷은요?》

“그건 우리 부모님 만날 때 입었잖아!”


보쿠토는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핸들을 움직였다. 그의 얼굴에는 활기찬 웃음이 걸려있었다. 해바라기를 사람으로 빚으면 그의 얼굴을 할 거라고, 그의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 얼굴이었다. 


“새로 맞춰야지!”

《하아…….》


아카아시의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눈에 훤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미간을 꾹 누르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거나. 


《오늘이요?》

“응! 고르고 가봉하고 다 만드는 데 시간 좀 걸리니까.”

《그러네요, 약속이 다음 주니까.》


지금 표정도 알만하다.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굴리고 있을 것이다. 시간을 가늠할 때 아카아시가 짓곤 하는 얼굴이었다.


《그럼 일단 옷부터 맞추죠.》

“밥은?”

《지금 당장은 식욕이 없어서요. 보쿠토 씨 지금 어디죠?》

“어, 너희 학교 가는 길? 여기 사거리. 3층짜리 카페 있는 거기.”

《아……. 거의 다 오셨네요. 저 옷만 챙겨입고 정문 쪽에 나올게요.》


보쿠토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아시가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려왔다. 



*




‘입맛 없다더니.’


보쿠토는 핸들에 기대어 머쓱한 표정으로 옆자리에 앉은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아시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서 혼곤히 잠에 빠진 채였다. 옷을 맞추고 잠깐 차를 몰다가 신호가 걸린 틈을 타서 식사는 뭘로 하겠느냐고 물으려 했더니 고 사이 잠들어 버렸다. 


어쩐지 깨울 수가 없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가 없어서 아카아시의 학교 근처까지는 어떻게 도착했다. 오는 길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주위로 클랙슨 소리가 지나가기도 하고 과속방지턱에 걸려 덜컹하기도 했는데 아카아시는 눈을 꼭 감고서 세상 모르고서 잠에 빠졌다. 


‘어제가 시험이었으니까 피곤했을까? 어제 안 쉬었나? 하루 쉬어서는 안 되나?’


괜히 죄책감이 느껴졌다. 지난번에 맞춘 옷 입으면 안 되냐 하던 통화가 아른아른 귓가에 맺혔다. 피곤해서 못 나온다고 하면 됐을걸, 하고 속으로 투덜거려보지만 아카아시가 깨어있다 하더라도 보쿠토의 마음속 말을 읽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다. 그대로 들켰을지도.’


가끔 ‘당신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인다’는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는데 심장 철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쿠토는 입술을 한 번 삐죽했다. 하지만 봐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의 표정은 금방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돈은 어디에 필요한 거지?’


그가 아카아시에게 건네는 금액이, 보쿠토 본인에겐 아주 큰 돈이 아니지만 세간의 기준으론 상당한 액수였다. 당장 한 푼이 급하다기에는 아카아시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풀 하나 없이 제법 말끔한 차림새였고, 그렇다고 그에게서 받은 돈을 어딘가에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날 때마다 옷차림은 단정했지만 그 외의 것들은 변하는 게 없었다. 들고 있는 가방이나 신고 있는 스니커즈, 지갑 같은 것들이. 


딱히 유흥을 즐긴다고도 할 수 없다. 학교 공부가 얼마나 고된지 살이 죽죽 내리는 게 보일 지경인 데다가 그가 공부 외에 달리 쓰는 시간이 없다는 건 보쿠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 얘기를 좀 잘 해볼걸…….’


아카아시를 처음 만났을 때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심술을 부리고 대거리를 하느라, 지금 생각해보니 아카아시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전무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가 준 돈 어디에 쓸 거야?’라고 물어보는 것도 좀 그렇다. 아카아시가 가시 세운 고슴도치처럼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볼 것이 보지 않아도 훤했다. 


“……어디죠, 여기…….”


그 때 아카아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오후의 볕도 눈이 부신지 눈꺼풀을 가느다랗게 뜨고서 주위를 둘러본다. 보쿠토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곧게 세우고 대답했다.


“여기 그! 어디지! 그!”

“……학교 정문이네요. 몇 시입니까?”

“아! 그러니까 지금이!”

“오후 다섯 시네요…….”

“……으응…….”

“깨우지 그러셨어요.”


조금 비뚤게 기대어 잤는지, 아카아시가 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민망해하는 것도 같았다. 보쿠토는 왼쪽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차가 밀려서 방금 왔어.”

“샵에서 학교까지 두시간이나 걸렸다고요?”

“어, 으, 으응. 공사 해서 둘러왔어.”


아카아시는 조금 맑아진 정신으로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양손으로 핸들을 꽉 쥐고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생 거짓말은 못 하고 살 사람이란 말이지…….’

“……조금 시간이 이르긴 하지만 저녁 먹으러 갈까요?”

“입맛 없다지 않았어? 괜찮아?”


그리고 이 기막힌 순간에 보쿠토의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카아시의 눈길이 그의 복부 쪽으로 향한다. 보쿠토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 이거는! 소화가!”

“없던 입맛도 돌아오는 소리네요. 보쿠토 씨 먹고 싶은 걸로 먹으러 가죠.”


보쿠토가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변명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아카아시의 웃는 얼굴 앞에서 무너졌다. 목까지 빨갛게 변한 보쿠토가 고개를 푹 숙이고 ‘가츠동이 먹고싶어…….’라고 중얼거렸다. 아카아시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



약속의 날, 아카아시는 자취하는 원룸 빌라의 1층에서 보쿠토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날이 완연히 추워져서인지 뺨을 스치는 공기가 매섭게 느껴졌다. 아카아시는 코트의 깃을 여몄다. 


오늘은 선물 같은 건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보쿠토가 신신당부하는 소리를 들었기에 아카아시도 맨손이었다. 아카아시는 하얗게 말라붙기 시작한 화단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대학가 근처에선 듣기 어려운 무게감 있는 엔진 소리도 그에겐 이제 낯이 익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앞에 멈춰선 차의 보조석 문이 열렸다. 보쿠토가 보조석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면 연락한댔잖아. 날씨도 추운데.”

“방금 나왔어요. 올 때 됐다 싶어서.”

“너 지금 하는 거 사실 보쿠토 코타로 말은 죽어도 안 듣기 석사 학위인 거 아니야?”


아카아시는 불시에 웃음이 터져서 꾹 눌러 참고는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보쿠토는 투덜거리느라 바빴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제대로 벨트를 매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 다시 페달을 밟았다. 


“드디어 아키오 그 자식한테서 내 유산 뺏어 오는구나!”


보쿠토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껏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창에 턱을 괴고 옆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 사촌에게서는 별다른 일 없었습니까?”

“응. 얌전해~!”

“흠…….”

“왜?”

“좀 그래서요. 오늘 할머님 뵈면 모든 일이 끝나는데 얌전히 있었다는 게.”


보쿠토 씨가 원하는 거라면 얼마를 준다 해도 절대 팔지 않을 사람이라면서요? 아카아시가 염려를 담아 하는 말에도 보쿠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느라 바빴다. 


“뭐 지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그도 그렇습니다만…….”


이번 안건은 순전히 조모의 마음에 달린 일인데, 보쿠토의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는 손쉽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은 아닐 듯했다. 그녀의 조건이라는 것도 보쿠토가 결혼할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었으니 아키오가 아카아시 자신을 어떻게 한다 해도 보쿠토가 다른 사람을 또 데려오면 그만이었다. 


아카아시는 마음 한 켠에 걸리는 것을 밀어두고 긴장을 풀기 위해 손가락을 주물렀다. 보쿠토가 그것을 흘끗 바라보았다.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쳐다보았지만 보쿠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주말이라 해도 저녁 무렵엔 도시에 차가 많았다. 중간중간 정체 구간을 지나고, 완연히 해가 저물어갈 무렵 두 사람은 보쿠토의 본가 저택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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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시는 고개를 젖히고 인공 눈물을 눈에 떨어뜨렸다. 계속 난방이 돌아가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었더니 눈이 뻑뻑했다. 


‘두 개 남았나…….’


어깨를 주무른 아카아시는 휴대전화의 액정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한 시 20분이었고 도서관에 사람은 반절 정도 차 있었다. 시험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라 그런 것 같았다. 


‘피곤하다…….’


평소에도 체력 관리를 꾸준히 해오는 편이었는데 이번 시험은 유달리 고된 느낌이었다. 아카아시는 독서실의 칸막이에 머리를 기댔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보았지만 집중력이 돌아올 기미는 없었다. 아카아시는 가져온 외투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바람이라도 쐴 생각에서였다. 


도서관 복도로 나왔지만 공기가 텁텁한 것은 여전했다. 아카아시는 자판기에서 커피 두 개를 뽑아들고 도서관의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도서관의 수위가 그를 보고서 살짝 인사했다. 매일같이 보는지라 아는 척을 하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자신이 뽑은 커피 두 개 중에 하나를 수위에게 건네주고 바깥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이미 겨울이 서려 있었다. 날이 추워지며 한결 청명해진 밤하늘에는 도심 한가운데에서도 언뜻언뜻 별이 보였다. 천문에는 조예가 없는지라 별자리를 분간할 수는 없었으나 별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화단의 펜스에 살짝 걸치듯 기댄 아카아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


숨을 몰아쉬자 완연히 새하얀 입김이 사르르 흩어졌다. 입고 있는 카디건의 앞섬을 조금 더 추슬러 여민 아카아시는 캔커피를 열었다. 경쾌한 소리가 나며 안에서 따뜻한 김이 흘러나왔다. 양손으로 감싸 쥐어본다. 처음에는 조금 뜨거웠던 캔이지만 지금은 딱 알맞게 따뜻해져 있었다. 


“어~!? 커피 마셨어?”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커피만 마시고 들어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던 아카아시는 그만 마시던 커피를 뿜고 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온 탓이었다. 덕분에 아끼던 카디건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지만 그걸 챙길 여력은 없었다.


“컥, 쿨럭, 보쿠토 씨?”

“아카아시, 애처럼 흘리면서 먹냐?”

“지금 누구 때문인데…….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보쿠토는 품이 딱 맞는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앞섬이 제멋대로 펄럭이고 그건 목에 두른 캐시미어 머플러도 마찬가지였다. 양손에는 커피가 한 잔씩 들려있고 오른손 중지에 걸려서 달랑거리는 건 아마도 자동차 열쇠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 오늘도 도서관에 있을 거 같고 나는 술자리 지겨워서 도망치고? 일석이조!”


아카아시가 기대어 있는 화단에 들고 온 커피와 자동차 열쇠까지 내려놓은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를 빼앗아 옆에 있던 휴지통에 그대로 버리곤—아카아시가 잠깐이라고 만류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그의 손에 자신이 사온 커피를 쥐어 주었다.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는 몰라도 보쿠토가 사온 커피는 그가 들고 있던 캔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오늘 술자리 있으셨습니까? 운전하면 안 되는 거 아녜요?”


양손으로 커피를 감싸 쥔 아카아시는 괜히 귓가가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어, 모르는 척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고 핀잔 주듯 말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보고 서서 제 몫의 커피를 들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안 마셨어.”

“네?”

“여기까지 오려면 차 끌고 와야 하니까. 운전해야 한다고 하고 안 마셨지~! 내가 사고라도 나면 우리 아카아시 수당도 못 주고 고소당할지도 모르는데.”


마지막 말은 경쾌한 농담이었다. 보쿠토가 윙크까지 곁들였다. 아카아시는 살면서 저렇게 윙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아침에 세웠을 머리는 아무래도 지금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듯 내려와 있었는데 그마저도 공들여 세팅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밝은색 코트도 어두운 톤의 캐시미어 머플러도 그림처럼 어울려서, 보쿠토만이 여기에서 이질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오래된 도서관 건물, 낡아서 빛이 흐려진 오렌지빛 가로등. 그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아무렇지않게 윙크를 날리는, 커피를 가져온 남자가 한 명. 


“내일 모레면 다 끝난댔지?”

“네. 모레 10시에 마지막 시험 치면 이번 학기는 끝입니다. 그렇다고 방학은 아니지만 일주일은 쉴 수 있겠죠.”


쉬어도 쉬는 것은 아니겠으나. 


아카아시는 손가락을 굽혀 그 관절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번 주에 시험이 끝나면 곧장 다음주에 있을 보쿠토 조모와의 만남을 준비해야 했다. 옷도 새로 맞추어야 할테고 그 집안 사람들의 생태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한다.


‘만나는 걸 다음주 초로 잡길 잘했지.’


일단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장 큰 벽은 넘어서는 것이었다. 적어도 며칠은 몸도 마음도 쉴 수 있을 것이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계산을 마치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보쿠토를 올려다보았다. 


보쿠토는 입을 후후 불어가며 커피를 식히느라 바빴다. 저 체격으로 그러고 있으니 되레 제법 귀여워 보인다. 거기까지 생각한 아카아시는 빠르게 고개를 흔들곤 자신의 눈을 부볐다. 


“아카아시? 많이 피곤한 거 아냐? 공부할 거 많이 남았어?”

“……조금요.”


얼마나 피곤하면 헛것이 보이나. 아카아시는 속으로 혀를 차며 커피를 넘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보쿠토의 금빛 눈동자가 아래로 처졌다. 제법 걱정을 해주기는 하는 것 같았다. 


보쿠토가 입을 달싹거리다가 도로 닫았다. 보쿠토를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던 아카아시는 미간을 모았다.


“왜요?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

“아, 아니…….”


처음 만났을 때는 천생 뻣뻣하게 구는 도련님 같더니 묘하게 어린애 같달지, 추궁을 하면 눈치 보는 듯한 표정을 보인다. 아카아시는 손등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꾹 눌러 내렸다. 


“뭔데요?”

“말하면 아카아시 화낼 거 같은데…….”

“무슨 말인데요?”

“아니 그……. 뭐냐……. 성적 필요한 거면…….”


한 두과목 정도는 좋게 봐달란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렵지 않다는 얘기였다. 보쿠토는 어물어물 말을 꺼내놓다가 제풀에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면서 제가 버럭했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화를 내지도 않았다. 도리어 의아하다는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뭐, 뭔데. 왜 그렇게 쳐다봐.”

“그런 수단은 전혀 쓰지 않을 사람처럼 생겼잖습니까, 당신.”

“안 썼어! 당연히 안 썼지!”

“그런 것치고는 너무 곧장 생각해내길래요.”

“내 또래 사촌 못 봤냐? 어? 내가 누구랑 부대끼면서 자랐다고 생각하는 거야?”


보쿠토는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열렬히 부정했다. 그런 쪽으로 자신이 의심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억울한 누명 쓰고는 홧병 걸려서라도 못 살 사람이군…….’

“그, 그리고 아카아시가 공부 안 한 것도 아니고 뭐 없는 점수 더 달란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 피곤한 것뿐이고……. 원랜 공부 열심히 하고 잘하니까……. 잘 할 거였고…….”


시간을 살 기회가 있다면 사는 것도 나쁘지 않기도 하고, 보쿠토가 그렇게 말하며 말끝을 웅얼거렸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말에 여러가지 오류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가 말한 것은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결과를 사겠다는 것이라고, 그걸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래도 그런 얘긴 하지 마세요.”

“아 그러니까 말 안 하려고 했어! 그냥 잠깐 생각이 났을 뿐이지!”


그저 잘 봐 달라고 말하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잘 봐주는 것이 유의미한 결과를 갖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가 필요할까? 보쿠토는 그게 얼마인지 알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게 얼마든 지불할 수 있으므로. 


“……그리고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시험을 조금 미뤄주는 게 낫죠.”

“아!”


보쿠토가 눈을 번쩍 떴다. 완전히 깨달음을 얻은 표정인 게, 지금 당장 학과장에게 전화를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아카아시는 말이 그렇다는 것이며 그가 실행할 경우에는 어떤 응징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말을 조리 있게 얘기했다. 보쿠토가 터진 비누 방울 같은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저도 이제 슬슬 올라가 봐야겠어요. 보쿠토 씨도 들어가 보세요.”

“으응…….”


학과에 비리 저지르지 말란 말을 했다고 저렇게 시무룩할 인인가? 아카아시는 반쯤 마신 커피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도 안 한 사인데 보쿠토 씨 힘써서 이런 줄 알면 집안에서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왜? 있는 돈 있는 기회 쓸 수 있는 수단 쓰는 건데.”


보쿠토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집안에서는 이런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그 말을 들으며, 아카아시는 왠지 이쯤 되자 조금 재미있기까지 하여 슬쩍 미소를 안으로 말아 넣고 물었다.


“그럼 보쿠토씨는 왜 그 쓸 수 있는 수단 안 쓰셨는데요.”

“그.”


꿀 먹은 양 입을 다물고만 보쿠토를 보는 것이 생각보다 즐거웠다. 아카아시는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저도 쓰기 싫습니다.” 


그건 올바른 방법이 아니니까. 비겁하니까. 나쁜 짓이라서. 범죄니까. 그리고 보쿠토에게는, 그의 주위에는 저 모든 것이 ‘그래도 우리는 괜찮다’로 포장되어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쿠토는 줄곧 그 방법에서 눈을 돌려왔던 것이다. 아카아시는 머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보쿠토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가지지 못한 자가 고결한 것은 타락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깎아내리며 가진 자가 고결한 것은 진흙 속의 연꽃 보듯 칭송하는 것을 줄곧 혐오해왔는데, 어째서인지 오늘 그중에 절반을 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수한 유혹 속에서도 굽어지지 않은 것을 보는 경이가 짧게 그의 발을 적셨다.


“저 이제 올라가 볼게요.” 


아카아시가 뒤쪽의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쿠토가 뒤통수를 긁적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커피 고마웠습니다. 보쿠토 씨.”

“별것도 아닌데 뭐.”

“별 거예요.”


앞만 보고 숨차게 달려온 인생이었다. 모든 게 한 번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나자 발밑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바닥을 내려다보지도 않고 걸어가는데 아카아시만 그러지 못했다. 남들보다 고된 한 발짝 한 발짝이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다만 간혹 지쳤다. 하지만 그마저도, 피로를 느끼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타일러가며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아카아시는 조금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한 번 더 인사했다. 뒤돌아서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길, 등 뒤에서 보쿠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


“자네는 데이트도 참 답게 하네.”

“네?”

“월수금 딱딱 날짜를 지켜서 만나는 거, 아닌가?”


다섯시 반쯤 되면 연구실은 살짝 어수선해진다. 곧 저녁 식사를 할 때이므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실험은 자연히 뒤로 밀리고 남은 시간동안 간단히 할 일을 하게 되느라 여러 가지 소리가 나고, 그 소리가 어느 정도 커졌다 싶으면 딱 여섯시였다. 제각기들 저녁을 먹자 어디로 가자 얘기를 하는 틈바구니에서 자연스레 사양의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던 아카아시는 연구실 교수의 웃음기 어린 농담에 주춤하고 말았다. 


다들 그러고 보니 그렇다며 놀라는 걸 보고 교수가 그 정도 관찰력도 없이 무슨 실험을 하겠냐며 농을 던졌다. 모두 저녁 식사를 위해 우르르 연구실을 벗어날 때, 마지막으로 나미카와가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아카아시는 그 시선을 모른척하며 엘리베이터 한 대가 오갈 시간이 지났을 때쯤 연구실을 벗어났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여기 별로야?”


맞은편에 앉아있는 보쿠토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뇨. 여기 음식은 맛있네요.”

“그럼 다른 게 문젠가?”

“음……. 그렇다기보다는 간파당한 게 좀 신경 쓰여서.”

“뭐가?”

“교수님이 아시더라고요. 저희 월수금 날짜 맞춰서 만나는 걸.”

“근데?”


보쿠토가 아무것도 모르겠단 얼굴로 밥을 크게 한술 퍼 올렸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몫으로 나온 튀김덮밥의 꽈리고추 튀김을 젓가락으로 건드리며 고민했다. 


“그렇다고 곧장 날짜를 바꾸는 것도 너무 의식하는 것 같고…….”

“엥? 바꿔야 돼?”

“너무 의무감에 만난다는 느낌이 들키는 것 같잖습니까.” 


아카아시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보쿠토는 맹렬하게 튀김 덮밥을 입에 밀어넣는 중이었다. 아카아시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다. 새우 튀김을 크게 한입 베어먹은 보쿠토는 녹차를 향해 손을 뻗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토요일에 만나는 걸 몰라서 그러시는 거 아냐? 일주일에 네번이나 만나는데 이게 사랑해서가 아니면 가능한가.”

“네번이 문제가 아니라 규칙성이 문젭니다.”


아카아시는 말을 잇다 말고 잠깐 멈칫했다. 이걸 자신의 입으로 말하려니 약간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결국 아카아시도 녹차로 손을 뻗었다. 


“사귀는 사이에 보통 하는 ‘보고싶어서 만난다’라는 느낌의 이벤트가 전혀 없는 거잖습니까.”

“아…….”


보쿠토는 이제야 뭐가 문제인지 알았는지, 컵을 내려놓고는 양손에 젓가락을 한짝씩 나뉘어쥐었다.


‘생각 많아질 때의 습관 같은 건가.’ 

“그럼 어떡하지?”

“이번 주는 그냥 이대로 하고, 다음주부턴 3일에 한 번씩 보죠.”

“엑?”

“그럼 1일 4일 7일 10일…이렇게 되는데 홀수와 짝수가 번갈아 나오고 요일이 반복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들도 아무 생각 못하겠죠. 날짜도 고정되니 스케쥴 짜기도 편할테고.”

“엥. 그건 싫은데.”


보쿠토의 젓가락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한 것만큼 조금 당황했다. 보쿠토라면 숫자가 나온 시점에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응할 거라 생각했는데. 


“왜…왜요?”

“그럼 만나는 날 자체가 너무 적어지잖아. 지금까지는 일주일에 4번, 한달에 못해도 열 여섯번은 봤는데……. 그 계산대로 하면 딱 열 번 보는 거 아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카아시, 알바비 너무 날로 받으려는 거 아니고?”

“…….”


보쿠토는 불퉁한 표정이었다. 아카아시는 설마하니 전체 횟수 부분을 보쿠토가 인지하고 지적할 줄은 몰랐던 터라 잠깐 놀라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연구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우리 할머니만 패스하면 되는데, 이제.”

“…그도 그렇네요.”


연구실 사람들이 아카아시와 보쿠토의 데이트 규칙성을 가지고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헉. 설마 그 나미카, 뭐라더라, 하여튼 그 자식이 뭐라고 했어?”

“네? 나미카와 선배요?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아, 놀랐잖아. 그 뒤로 어때? 뭔가 수상쩍은 짓은 안 해?”

“뭐……. 묘하게 유들해지긴 했죠.”


아카아시는 꽈리 고추 튀김을 반으로 나눠 밥 위에 올리며 나미카와에 대해 생각했다. 그 갤러리에서의 파티가 있고 몇 주나 지났다. 나미카와는 그 전까지 사람 속 긁는 소리를 못해 안달이더니, 하룻밤 재워주고 난 뒤로는 기묘하게 눈치를 본다거나 기분나쁘게 상냥하게 군다거나 했다. 


‘보통 그렇게까지 태도가 바뀌나…….’


“얌전해졌단 말이지?”

“네?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보쿠토는 무언가 마음에 드는 듯 들지 않는 듯 뚱한 얼굴이었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내가 손 안 써도 되고 좋네.”

“……마음에 안 든다고 다 치우고 그렇게 살지 마요.”

“내 맘에 안 드는 게 아니라고!?”

“그럼요?”

“야! 너는 나랑 결혼하기로 남들이 다 알 텐데 너를 무시하는 걸 내가 가만 놔두냐 그럼? 너를 무시하는 건 날 무시하는 거야!”

“절 무시하는 건 절 무시하는 거고요. 지금 보쿠토 씨 하신 말씀은 자기 마음에 안 든다 이거잖습니까.”


아카아시는 자신이 억지를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빠른 어조로 몰아붙였다. 보쿠토가 어버버 입만 버끔거리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숟가락 위에 튀김을 올려주었다. 보쿠토는 시무룩한 얼굴로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내가 잘못했어?”


그 한마디에 아카아시의 말문이 턱 막혔다.


갑자기 자신의 말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저 사람은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자신이 싫은 사람을 그냥 남겨두는 것과 그가 싫은 사람을 남겨두는 건 아주 다른 문제가 될지도 몰랐다. 육식동물에게 풀을 삼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있을까?


“그게 아니라……. 제 주위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런 사람 좀 내버려둔다고 저한테 큰일 생기는 건 아니니까요. 제가 알아서 잘하면 돼요. 아카아시가 나직하게 하는 말에 보쿠토가 입술을 삐죽였다. 


“세상에는 남 일에 관심 있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데요, 놀랍게도요. 아카아시 선생님.”


언젠가 그런 애들이 네 발목 잡고 늪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 보쿠토가 과거 아카아시 자신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걸 들으면서도 아카아시는 도리어 작게 웃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제각기 자기 몫의 그릇을 거의 다 비웠을 때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머쓱한 표정이었다.


“그…….”


오갈데 없는 손이 또 젓가락을 한 짝씩 나뉘어 쥐고 있다. 아카아시는 녹차를 찾으며 보쿠토의 말을 기다렸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어린 침묵이 지나고 나서야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부모님이 할머니한테도 벌써 말씀드렸나봐.”

“아.”

“할머니가 한 번 보자고 하셔.”

“생각보다는……이르군요.”

“아키오 자식이 날뛴 것도 있어서 오히려 일이 빨리 풀렸어. 잘됐지 뭐!”

“이번이 결승이겠지요?”


더는 없지요? 아카아시가 놀리듯 묻는 말에 보쿠토가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만 넘기고 몇달간 현상 유지만 해주면 돼.”

“할머님이 마음에 안 들어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별로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통과했고 막내 삼촌도 오케이했는데? 할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된다고 해.”

“어른들의 감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며 녹차로 입가심을 했다. 정말 생각보다 훨씬 이른 만남이었다. 계약에 명시되어 있던 것이니만큼 제대로 이행할 작정이지만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다. 


“아 된다니까! 걱정 말래도!”


보쿠토가 가슴팍을 팡팡 두드렸다. 그의 얼굴에 기대와 희망의 빛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게 묘하게 어딘가 눈이 부셔서 아카아시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이게 끝나면 보쿠토 씨도 바라던 유산을 받는 거지. 나도 돈을 받고.’


그리고 그러면 이제 정말 끝이다. 보쿠토의 자택에서 조모를 뵙고 난 이후의 현상 유지라는 건 어떻게 할 건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나는 날짜는요?”

“아, 그건 너랑 얘기해보고 알려달래.”

“어르신들 되시는 날짜에 저희가 맞춰야죠.”

“그런가? 아, 진짜 이런 거 안 해봤으니 알게 뭐람.”


보쿠토가 모든 게 귀찮단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빤히 보다가 말을 돌렸다.


“할머님께도 누구 소개시켜드린 적이 없었습니까?”

“우리 부모님한테도 아무도 보여준 적이 없다니까? 그리고 애당초 왜 보여주냐?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보쿠토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가 아차한 얼굴이 되어 서둘러 자기 입을 막았다.


“아, 아니. 좋아했지. 좋아했어, 다들. 좋아서 만났어…….”

“어느 쪽이든 문제가 되니까 그 화제는 그만하죠.”

“아, 둘다 문제야?”

“보통 자기 남자친구한테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 진심으로 다 좋아했단 얘길 누가 합니까?”

“아…….”


사람 대하는 것을 보면 능숙한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때는 또 묘하게 맹한 것이 손이 간다. ‘그렇다고 이걸 하나하나 다 알려주고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과 ‘그렇다고 미래에 만날 사람에게 뺨맞게 하는 것도 그렇지 않나’하는 생각이 함께 떠올랐다. 


“그래도 저희 쪽에서 조율 가능하다면……. 2주 뒤가 제 기말고사라서요. 가능하다면 기말고사 끝나고 만나뵐 수 있겠습니까?”

“물론!”


보쿠토가 가슴을 펴곤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어린애의 치기라고 생각해야 할텐데 까닭을 모르게 그 모습이 의지가 되어서, 아카아시는 식당 공기가 답답하니 얼른 나가고 싶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쿠토가 아카아시 따라 서둘러 일어서다 물잔을 엎을 뻔했다. 







“아 이 새끼 보통 진상이 아니네…….”


널부러지듯 쓰러질 뻔한 것을 겨우 세워둔 나미카와를 보고서 보쿠토가 제일 먼저 한 말이었다. 상대가 술 취해 인사불성이라 생각했는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거침이 없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한 번 흘낏 보기는 했으나 별달리 책하는 말은 하지 않고 나미카와를 부축했다. 


“샴페인도 탄산수 수준이던데 이걸 뭐 얼마나 마시면 여기서 정신을 못 차려?”

“술에 약한가보죠.”


아카아시는 그렇게 대꾸하며 나미카와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모두 물 건너 불구경 하듯 쳐다보고 있기만 한 것이,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도움을 줄 뜻은 전혀 없는 게 분명했다.


‘설마 내가 수습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 갤러리에서 나미카와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보쿠토의 사촌이라는 아키오 뿐인 것 같았는데 그가 도움을 줄 생각이 없다면 남은 건 아카아시 자신뿐이다. 여기가 아주 낯선 갤러리나 클럽이었다면, 아니, 보쿠토와 되먹지도 않은 계약을 한 상태만 아니었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버리고 갔겠지만.


‘그 막내 숙부도 보고 있을 테니…….’


보쿠토와의 계약으로 자신이 할 일은 그럴듯한 애인을 연기해 집안의 모든 검사를 통과하고 결혼상대로 허락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술 취한 같은 학과 같은 연구실 선배를 갤러리에 버리고 간다’는 선택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의지할 것은 아키오뿐이었다. 별로 의지하고 싶은 상대는 아니지만 전혀 살갑지도 친하지도 않은 선배를 챙기느니 차라리 그 음험한 보쿠토의 사촌에게 의지하겠다. 아카아시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미카와를 깨우기 위한 손에 힘을 싣기 시작했을 때였다. 


쨍그랑! 


멀리서 얇은 유리잔이 박살나는 소리가 쩡하고 울려퍼졌다. 천장이 높고 사람들이 소리를 높이지 않는 갤러리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는 날카롭고 청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윽 하고 신음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아카아시는 그 목소리가 들어본 적 있다고 생각했다. 


‘설마.’


보쿠토가 나미카와를 들여다보던 자세에서 허리를 펴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미약한 짜증이 올라왔다. 


“이 새끼 약 하고 술 처먹고 난리친 건 아니겠지.”

“……한 번 가 보세요.”

“…….”


보쿠토의 얼굴이 못마땅함으로 낮게 일그러졌다. 알아서 잘 했겠지, 하고 못들은 척 하려고 했던 보쿠토였지만 곧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웨이터들이 흰 천과 구급상자를 들고서 그들을 지나쳐 다급히 뛰어갔던 것이다. 보쿠토는 잠깐만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만 남겨두고 유리 깨진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카아시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요즘 한숨이 늘었어. 안 좋은데.’


옆에 있는 나미카와는 정신을 차릴 기미가 없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보쿠토나 갤러리 점원들의 반응을 보았을 때 다친 사람은 아키오인것 같았고, 그가 다친 상황에서 나미카와까지 챙겨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나미카와를 부탁할 만한 인물로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싫다…….’


앞에서 덤덤하게 군다고 해서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견디지 않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 흘려보내는 것뿐이다. 아카아시는 부당한 대우에 일일이 화를 내는 것에까지 할애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니던 대학원을 그만 둘 수도 없다. 그간의 노력이 열매 맺기까지 남은 시간은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제대로 토로하지 못한 화, 응어리, 어쩔 수 없는 체념의 결정체 같은 사람이 술에 취해 뻗어있는데 신나게 뺨 한대 때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얌전히 챙겨 가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나마 위안이라면 보쿠토가 있다는 것 정도일 테다. 그 거침없이 솔직한 사람이 이 선배에게 마구잡이로 말하는 것을 듣기만 해도 조금은 기분이 풀렸으니까. 


하지만 아카아시의 가냘픈 희망은 몇 분도 가지 않아 완연히 부서졌다.


“보…!”

“하, 아카아시. 이 자식 데리고 병원 좀 갔다 와야 겠다.”


돌아온 보쿠토는 뒤에 혹을 달고 있었다. 창백한 안색의 아키오였다. 잔을 떨어뜨려 깨뜨린 것을 무심결에 만졌다가 심하게 베였다며 손에는 피로 물든 붕대를 감고 있다. 아카아시는 척 봐도 심각해 보이는 그의 상처를 보며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아카아시 너는 택시타고 먼저 들어가. 미안.”


보쿠토가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통째로 그에게 쥐어주고는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보쿠토와 그의 사촌이 자리를 비우고, 이 자리의 주최가 먼저 돌아간 것을 본 사람들도 이 갤러리에 흥미를 잃은 듯이 삼삼오오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미카와의 팔을 어깨에 걸쳤다. 정신을 잃은 사람을 들어 올리자 무게에 숨이 턱 막혔지만 어렵지 않게 부축해 갈 수 있었다. 웨이터들이 차를 잡아주고 부축을 거들어줘 어렵지 않게 택시에 타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나미카와 선배. 선배! 정신 좀 차려보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어려운 건 나미카와의 집주소를 캐내는 일이었다. 인사불성이 된 나미카와는 자기 입으로 집주소를 말하기는커녕 눈을 뜰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아카아시는 한 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싫어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다 한 귀로 듣고 흘리지 말고 사는 곳 정도는 알아놓을 걸…….’


결국 아카아시는 자신의 자취방 주소를 입에 담아야 했다.


*


[집 도착했어?]

[네. 사촌은요?]

[개자식이 엄살 피웠어]


아카아시가 뭐라고 답장해야할지 고민할 때 벨소리가 울렸다. 아카아시는 화들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통화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수화기를 가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미카와는 아카아시의 자취방 바닥에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침대의 이불 한 장을 끌어와 덮어주고는 발코니 쪽으로 나갔다. 밤이 되자 밤공기가 서늘하게 뒷목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 이 자식이 별것도 아니면서 난리쳐서 병원까지 왔어!》

“심하게 다친 게 아니었으면 다행이네요.”

《다행은 무슨……. 너는? 잘 들어갔어?》

“네. 집 왔어요.”

《그 자식은? 선배?》

“데려왔어요.”

《……?》


보쿠토가 아무 말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 선명히 떠올랐다. 아카아시는 한숨 속에 야트막한 웃음을 섞었다. 살짝 입김이 맺혔다. 


“뻗어서 정신은 못 차리지, 아는 사람은 없지……. 보쿠토 씨 사촌이 챙겨줄 것 같지는 않고요. 자기 집 주소도 말을 못하니까 어쩔 수 없이.”

《아니 그렇다고 집에 들여? 길에 버려!》

“어떻게 그럽니까.”

《너 그렇게 상냥한 애였어!? 나한테 그 반만 해주지!》

“지금 내가 왜 나미카와 선배를 데려왔는지 전혀 모른다는 건 알겠네요.”

《뭐! 왜! 뭐!》

“보쿠토 씨의 그 대단한 하루키 숙부님이 보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같은 과 선배를 내치고 갑니까. 매정한 애는 조카사위로 싫다 하시면 어떡해요?”

《아…….》

“그래서 사람이 죽을힘 다해 들쳐 메고 왔더니 한다는 말이 자기한테 더 잘하라고……. 내참.”

《……나 때문이야?》

“그럼 보쿠토 씨 때문이지 누구 때문입니까?”


확 풀죽은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아카아시는 눈을 내리떴다. 그 아키오나 다른 사람이 자길 싫어한단 이야길 할 때는 참 답지 않다 싶을 만큼 아무렇지도 않더니 자기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선배를 굳이 집에 들였다는 얘기에는 이렇게 축 쳐진다. 어린애가 순간순간 온 마음을 기울일 때는 그것이 어떻게도 숨겨지지 않아서 사랑스러운 것처럼 보쿠토도 그랬다. 


‘나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인데.’


누군가가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꿈쩍 않는 것은 그의 마음이 강건하기 때문에, 자신 탓에 누군가가 싫은 일을 했다는 것에 무너지듯 구는 것은 그의 마음이 솔직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도 꺾여나가지 않고 변색되지 않은 것이 바로 앞에서 찬란히 빛나는 걸 보는 건, 조금 눈이 시렸다. 


“그냥 해본 말입니다. 그보다 지갑은 어떡할 거예요. 그 땐 저도 정신이 없어서 가져와버렸는데.”

《아……. 다음에 만날 때 신분증만 챙겨줘. 그거 재발급 귀찮아서.》

“다음 주에 보기로 했잖아요. 그 때까지 괜찮겠습니까?”

《그치만 약속된 날 아닐 때 찾아가면 아카아시 싫어하잖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이 정도는 양해해드릴 수 있어요.”

《나도 남 좋은 일 할 줄도 알거든!》


보쿠토가 팩 소리쳤다. 어떤 표정일지, 목소리만 들어도 눈에 선했다. 아카아시는 난간에 기대어 거리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곧 겨울이 오려는지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사람들의 호흡이 영혼처럼 아른거리고 있었다. 


보쿠토는 통화를 끊을 때까지 다음 주에 약속한 날 만날 것을 거듭 다짐했다. 아카아시가 괜찮다는 말을 두어 번 더 했지만 보쿠토는 굳센 목소리로 다음 주에 꼭, 이라고 대답했다. 


하여튼 오라고 할 때는 안 와요. 아카아시는 전화가 끊어진 액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펜스에 기대어 야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둔 천에 빛나는 수가 놓여있는 것처럼 빛들이 아른거리는 모양새는 큰 그림을 작정하고 그린 것처럼 아름다웠다. 겨울이 다가오는 가을밤이 이상하게 춥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