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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시는 팔짱을 끼고서 현관 옆의 신발장 앞에 서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어깨는 처지고 눈썹도 같은 방향, 온몸으로 시무룩함을 피력하고 있다. 저마저도 나름대로는 마음을 감추려고 하는 것임을 아카아시는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가 어른스러운 척을 하려고 들 때마다 저런 눈길이었으므로. 


“하아, 보쿠토 선배.”

“…….”

“선배 얼굴 아직도 신문 1면에 실리고 있는 거 모르십니까. 작은 편의점도 아니고 대형 마트 같은 데를 가면 다 알아봐요.”

“알아…….”

“그러니까 선배도 지금까지 어디 멀리 안 나가셨던 거잖아요. 거기다…….”


아카아시는 말을 삼키다 말고 미간을 모았다. 아이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아카아시의 손을 잡을 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다, 아이하고 선배가 너무 닮아서 같이 있으면 틀림없이 들키는.’


이혼을 하고 나왔는데 그와 쏙 빼닮은 어린 애와 함께 있으면 누구라도 친아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심지어 저렇게나 눈이 번쩍 뜨이는 외모다. 혼자라면 어떻게 무마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아이까지 함께라면 반드시 들키게…….


아카아시는 눈매를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여전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는 기다리고 있을게, 잘 갔다 와, 그런 말을 웅얼거리는 중이었다. 잠깐 팔짱을 끼고 섰던 아카아시는 아이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모자.”

“응?”

“모자 쓰시면요. 모자 눌러 쓰시고 선글라스를 끼시든 마스크를 하시든 둘 중에 하나 하시고……. 그러고 같이 가요.”


그게 더 눈에 띄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리는 정도의 성의는 보이는 것이 인간된 도리 아니겠는가. 아카아시의 말에 처음에는 눈을 크게 떴던 보쿠토가 반색을 하고는 거실로 뛰어간다. 그리곤 가지고 왔던 짐을 다 뒤집어 엎는다. 하지만 캡모자를 찾아낸 것이 고작이었다. 모자만 쥐고 선 보쿠토가 반쯤은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기에 아카아시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내쉬고 보쿠토의 머리에 모자를 올린 뒤 후드까지 그 위에 뒤집어씌운다. 보쿠토의 시선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만하면…….”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잠깐 바라보다가 결국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 옷장을 열고 아이가 쓰는 조그만 캡모자를 챙겨든 아카아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의 머리 위에도 모자를 씌워주었다. 아이는 모자의 챙을 만지작거렸지만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함박웃음이 걸린 보쿠토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빠르게 고개를 돌리곤 현관문을 잡아 열었다. 


“그럼 얼른 장 보고 돌아오죠.”


오늘은 며칠 전에 먹으려다가 먹지 못했던 햄버그 스테이크를 해먹기 위해 장을 보러 가려는 차였다. 식재료 사들고 올 테니 집을 봐달라는 말에 보쿠토는 버림받은 강아지마냥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두고서 나올 수가 없었다. 


*


“아이스크림은 햄버그 스테이크 재료가 아닌데요.”

“그, 그렇지만.”


커다란 카트에 살짝 통으로 된 아이스크림을 집어넣던 보쿠토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눈동자만 돌리며 얌전히 아카아시의 곁에서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지난 번에 못 먹었단 말야.”

“지난 번에요?”

“…….”


아뿔싸, 보쿠토는 입술을 안으로 꽉 말아깨물었다. 아카아시가 눈을 가늘게 뜨곤 아이스크림을 다시 보쿠토의 손에 쥐어주었다.


“있던 데에 두고 오세요.”

“내, 내가 따로…계산…하면…….”

“그거 한 통 혼자서 다 드시게요? 냉동실 안 빌려줄겁니다.”

“피, 필요 없거든!”

“두고 오세요.”

“씨잉…….”


보쿠토가 왈칵 울상을 짓더니 아이스크림을 제자리에 두러 돌아간다. 아카아시는 그 뒷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보쿠토가 며칠 전에 사놓은 간식이 한아름 남아있었다. 곧 보쿠토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터덜터덜 다가온다. 아카아시는 쇼핑 카트를 끌며 보쿠토를 한 번 흘겨보았다. 


“돼지고기랑 소고기 사고. 양파가 떨어졌으니 양파도 사야겠네요. 카즈마, 다른 먹고싶은 거 있어? 해줄게.”

“저는 다 좋아요.”

“다 말고. 특별히 더 먹고 싶은 건 없어?”


대답은 아이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그럼 나 불고기!”

“…햄버그 스테이크도 고기잖아요. 그리고 보쿠토 선배는 양파나 가져오세요.”

“쳇.”


보쿠토가 또 투덜거리며 야채 코너로 터덜터덜 가는 사이에 아카아시는 몸을 굽히고 아이와 얼굴을 마주했다. 금빛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가며 그를 바라본다. 아카아시가 아이의 모자를 한 번 쓰다듬었다가 챙을 지나 뺨을 감싸쥐었다. 


“카즈마는 간식이나 반찬 정말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진짜 아무거나 좋은데…….”

“정말?”

“……그러면 연근…….”

“연근? 튀김? 조림?”


아이가 금방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이 된다. 아카아시는 그런 카즈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번쩍 안아들었다. 아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뜬다. 아카아시는 아이의 뺨에 얼굴을 가볍게 부볐다. 


“튀김도 조림도 다 해버리자.”

“아, 아니에요. 그러니까…….”

“금방 해줄 수 있어.”


아이가 귀까지 빨개져서는 괜찮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카아시는 고개를 흔들고 들어주지 않았다. 한참이나 실랑이를 하다가 내려줄 즈음에 보쿠토가 양팔 가득 양파를 안고 돌아왔다.


“이, 이거면 돼?”

“……너무 되니까 이것만 주시고 나머지는 이따가 갖다 놓죠.” 

“내가 많이 가져왔어?”

“아주 많이요. 아, 이참에 양파 장아찌도 만들까…….”


아카아시는 우선 카트 안에 양파를 쌓아두고서 고심하며 천천히 카트를 밀었다. 보쿠토가 양파 장아찌는 좋아한다며 환호성을 지르다가 아카아시의 매서운 눈빛을 받고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세 사람의 장보기는 대개가 보쿠토가 어디에 쓰이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것들을 가져오면 아카아시가 돌려보내고, 그 사이사이에 ‘그거 두고 올 때 간장 가져오세요.’ 같은 문장이 오가는 식이었다. 


“카즈마, 너하고 나왔을 때도 저 사람 저랬니?”

“…….”


보쿠토가 퓨전 요리용이라고 쓰인 파인애플이 들어간 소스병을 제자리에 두러 간 사이에 계산대 앞에 선 아카아시가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가 움찔하고는 눈을 피한다. 그걸 본 아카아시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때 같이 간식 사왔다는 거 사실 저 사람 혼자 갔다 온거지.”

“아, 아버지. 그게…….”

“보나마나 혼자 나갔다가 돌아오니 문이 잠겨 있었겠지. 그거 열어 줬었니?”

“……네.”


아이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다. 아카아시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간식같은 것을 욕심내기도 한다고 안심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아이는 여전히 바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보쿠토와 나갔다고 거짓말을 한 것도 보쿠토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카즈마는 저 사람이 싫지는 않아?”


아이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말간 금빛 눈동자가 정말로 똑같은 색이었다. 보쿠토와. 아이를 처음 본 코노하가 그렇게 걱정을 할 법도, 그럴 법도 하였다.


“그럼 다행이다.”


하기사 아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아카아시는 옅게 미소를 그리고는 살며시 아이의 등을 떠밀었다. 아이 근처에는 계산대 바로 앞 조그만 냉동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저 아이스크림 사 가자. 카즈마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그것도.”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샐쭉한 얼굴이 되어 돌려놓았던 아이스크림과 같은 종류의 미니컵을 가리켰다. 아이는 조금 멈칫하다가 고개를 젓고는 같은 것으로 골라 꺼내왔다. 


보쿠토가 퓨전 요리용 파인애플 소스병을 제자리에 두고 돌아왔을 때, 아이스크림은 카트 안의 여러가지 식자재 사이로 모습을 감춘 뒤였다. 



*



“앗 차가워! ……어?”


주말을 맞이해 나가서 장을 보고 번거롭기까지한 과정을 거쳐 요리를 해 먹고, 먹은 것을 다 치우고 난 뒤에 보쿠토가 설거지까지 마치고서 거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보쿠토가 노곤한 주말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몸을 쭉 뻗을 때 그런 그의 뒤에 그림자가 졌다. 


뺨에 닿는 차가운 기척에 보쿠토가 놀라 몸을 움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아카아시는 놀라게 하는 장난을 쳤다고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담백한 얼굴로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오늘 낮에 장을 보며 보쿠토 몰래 사왔던 아이스크림이었다.


“어, 이거 사지 말라고, 아카아시가…….” 

“그랬죠.”

“그런데 어떻게…….”

“몰래 샀습니다. 드세요. 후식이에요.”

“어? 어어?”


당황한 보쿠토의 손에  억지로 아이스크림을 쥐어준 아카아시는 다른 한 손에 있는 아이스크림은 아이를 불러 쥐어주었다. 아카아시가 아이 몫의 아이스크림 뚜껑을 열어주고 있는 사이에 여전히 어딘가 당황한 보쿠토가 다가왔다. 어린애가 걷는 것처럼 어색한 걸음이었다. 


“이, 이거 몰래 샀어?”

“네. 선배가 그렇게 아이스크림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지만요.”


그렇게 말하는 아카아시의 목소리에는 웃음과 놀림이 아주 얕게 섞여 있었다. 보쿠토는 홀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거…….”

“네?”


아카아시는 아이의 손에 스푼을 쥐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갸웃했다. 보쿠토는 아이스크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그 눈가가 붉은 듯도 한 것이 이상하다고, 아카아시가 생각했을 때 보쿠토가 말했다.


“이거, 아카아시가 좋아하는 거라서…….”

“……네?”


아이가 멈칫하며 고개를 든다. 보쿠토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그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언제나 고민없이 선택하곤 했던 것이었다. 줄곧 그랬다. 내내 먹었던 것이다. 학창시절을 내다버리며 함께 지웠던 것들 중에 하나였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저 아이스크림 잘 안 먹어요. 선배 드세요.”


아카아시는 잠깐의 침묵 끝에 담담한 말로 밀어내고는 차 마실 물을 끓이겠다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아이가 그런 아카아시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가서 그에게 자신 몫의 아이스크림을 권했지만, 아카아시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