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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


아이는 눈을 깜박이며 보쿠토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 아카아시와 무슨 대화를 한 것인지, 집으로 돌아온 보쿠토는 혼이 반쯤 빠져나간 얼굴이었다. 발코니의 유리창 앞에 주저앉아서는 멍하니, 창밖도 아니고 바닥만 보고 있다. 아이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보쿠토의 곁으로 몇 걸음 더 다가왔지만 보쿠토는 아이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는 보쿠토를 좀 더 살펴보다가 그의 곁에 담요를 놔주고는 거실의 탁상에 자리잡고 앉았다. 공책을 펼치고 연필을 손에 쥐고서 작은 글씨를 꾹꾹 눌러 적어가던 아이는 한 줄을 끝낼 때마다 보쿠토를 흘끗거렸지만 보쿠토는 여전히 무너진 자세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아이가 숙제를 모두 끝마쳤을 때 보쿠토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반쯤 울것 같은 얼굴이어서 아이가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어디 아파요?”

“응…….”

“어디가요. 약 먹을래요?”


아이가 일어나서 약장으로 가려고 했지만 보쿠토는 고개를 젓고는 아이의 손을 붙들었다. 아이는 이제 걱정이 완연한 얼굴을 하고 보쿠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우리 아버지한테 혼났어요?”

“응? 아니, 그건 아니고……. 아니, 맞을지도……. 아, 아니, 아닌데, 그러니까…….” 


아이가 눈을 깜박거리면서 올려다본다. 보쿠토는 멍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겠지만 아카아시의 아이를 상상했던 적이 있었다. 아카아시를 닮았겠지. 아카아시가 좋아하는 걸 좋아할 거야. 아카아시처럼 똑똑할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마도 나와도 닮은,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정말로 꿈같은 상상일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했던 날은 목끝까지 열이 차올라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바로 눈앞에 그 상상이 고스란히 현실이 되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10년의 시간을 증거하면서.


그가 지난 10년간 아카아시 곁에 있지 못했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면서.


“……카즈마, 있잖아.”


보쿠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소년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이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본다. 작은 행동거지 하나까지도, 아이는 자신의 부친을 쏙 빼닮아있었다. 


“카즈마는 아카아시 많이 좋아?”


보쿠토가 달리 특별한 대답을 바라고서 아이에게 질문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표정을 보리라고도 생각하지는 못했다. 


“네.”


지금껏 언제나 아이답지 않을만큼 동요 없이 차분하던 아이의 얼굴 위로 광채가 돌았다. 그건 빛이었다. 그렇게밖엔 설명할 수 없었다.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들이치는 것처럼 아이의 금빛 눈동자가 눈부셨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그렇구나.”


아이가 보쿠토를 빤히 바라본다. 마치 당신은 어떠하느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보쿠토는 더는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무릎을 세워 고개를 묻었다. 목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즈마는 아카아시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아이는 대답이 없다. 보쿠토는 흘낏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버진 아버지니까요, 어디가 좋으냐고 해도…….”

“아…….”


보쿠토는 불현듯 다른 누군가와 이와 같은 대화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키리에나가 그에게 이런 것을 물은 적이 있었다. 자신의 어디가 좋으냐고. 보쿠토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여러가지 부분에 대하여. 키리에나는 그 이야기를 다 듣고서 알듯 모를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그렇게 대답하며.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전에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아카아시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부실에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있을 때였다. 노을이 창으로 쏟아져 눈을 찔렀고 그가 이맛살을 모으는 사이에 코노하가 물었다. 보쿠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디가라니?

—아니 뭐, 맘에 드는 점이 있으니까 그렇게 좋아 죽고 못사는 거 아냐.

—아니거든? 그리고 아카아시는 그냥 아카아시니까 그렇지. 맘에 드는 점이라고 해봐야, 맘에 안 드는 점이 더 많다고!

—헤에, 맘에 안 드는 점?

—그래! 맨날 일지 쓰면서 나 노려본다거나! 귀찮게 굴면 짜증낸다거나!

—그 뭐냐, 너 네가 말하면서도 그 전후 관계가 명확하다는……. 한 문장 안에 원인과 결과가 다 있다는 생각은 안 드냐?

—뭐가! 몰라, 몰라!


보쿠토는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다가 푹 고개를 파묻었다. 몸 안으로 열이 휘몰아치는 기분이었다. 


“……나도야…….”

“네?”


아이가 반문했지만 보쿠토는 더 이상 소리내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야. 나도 아카아시는 아카아시라서 좋아. 줄곧 좋아했어.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보고 있자면 마음이 너무 떨려서 볼 수가 없었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면서도 잊지 못했다. 매일 밤마다 아카아시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하지도 메세지를 보내지도 못했지만, 매일 밤마다. 


아카아시가 아카아시라서 좋았다.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얼굴을 보지 못해도 목소리를 듣지 못해도 마음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마주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걸, 키리에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아카아시가 퇴근하고 돌아와 내일 아침 식사준비까지 끝마쳤을 때는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는 때였다. 아이가 잠들어있는 방문을 살짝 열어본 아카아시는 소리나지 않게 조용히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가 흠칫했다. 바로 코앞에 보쿠토가 입을 꾹 닫고 서 있었다. 


“보…보쿠토 선배?”


입술을 꽉 맞물린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셔츠 끝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잡아끌고 거실로 향한다. 잡아 끈다고 해도 방향을 일러주는 정도의 미약한 몸짓에 불과했다. 아카아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잠자코 보쿠토의 뒤를 따랐다. 


이젠 거실이 보쿠토의 침실처럼 되어서, 탁상을 한쪽으로 밀어넣은 공간엔 이미 요와 이불이 깔려있었다. 먼저 보쿠토가 이불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없이 진지한 그 모습에 아카아시는 미간을 모으면서도 보쿠토의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일 있어요? 어디 보증 선 건 아니죠?”

“……그거 아니야…….”

“그럼 무슨 일인데요.” 

“이, 이거!”


보쿠토가 고개는 푹 숙이고서 두 손을 번쩍 내밀었다. 아카아시는 깜짝 놀라 몸을 살짝 뒤로 뺐다. 보쿠토의 손에는 종이 쪽지가 접혀있었다. 


“이게……뭔데요?”


아카아시가 주춤거리며 물었지만 보쿠토는 대답 없이 재차 손을 내밀기만 했다. 아카아시는 이맛살을 모은 채 보쿠토가 내미는 쪽지를 조심스레 손가락 끝으로 붙잡았다. 


“도대체 무슨……. ……아.”

“저, 저장 부탁드립니다!” 


반으로 접은 종이를 펼치자 거기엔 또박또박 눌러쓴 이름과 숫자가 있었다. 보쿠토 코타로, 뒤의 것은 그의 휴대전화 번호인 게 틀림 없었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 숫자를 하나 하나 되짚어나간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우스운 자기위안이었다. 


“…….”

“안될……까요오…….”

“…짜증나.”

“엑!? 내 번호 짜증나!?”


보쿠토가 번쩍 고개를 든다. 울상이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10년이 지났는데 번호 하나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사람은 그런 자신은 알지도 못하고서 저렇게 번호를 저장해 달라고 한다. 세상에 숫자같은 건 다 불타 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쿠토가 그를 올려다본다. 아카아시가 툭 내뱉듯 말했다.


“……찾아보니 번호 있었어요.”

“아?”

“그럼 선배도 주무세요. 저도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들어가 볼게요.”

“진짜 번호 있어!?” 

“네.”

“안 지웠어? 정말?”

“…….”


저 얼굴이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바라보는 눈동자가 저렇게 빛이 났고 그러면 이따금씩 자신의 한 호흡까지 모두 그를 향하는 것만 같았다. 저 빛에 이끌려서. 


왜 또 다시 저런 얼굴,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가 없다. 과거의 저 얼굴이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지금도 아닐 것이다. 저 사람이 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어떤 표정을 하게 될까. 키리에나 안즈를 바라볼 땐 어떤 얼굴이었을까, 지금도 저렇게 눈이 멀 것처럼 반짝거리는데. 


‘그러니까 짜증난다고…….’


그렇게 짜증이 치솟고 싫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어야 하는데. 


아카아시는 종이쪽지를 쥐고 있던 손을 자연스레 등 뒤로 돌렸다. 조심스레 감싸쥔다. 손 안의 종이가 어린 새의 깃털처럼 보드랍게 느껴졌다. 


“네. 있었어요.”


잊지 못했으니까. 아카아시는 속으로 말을 삼키고 등을 돌렸다. 뒤에서 보쿠토가 더듬더듬 잘 자, 하고 인사해왔다. 곧장 침실 문을 닫으려 했던 아카아시는 조금 멈칫하고는 다시 문을 조금 열었다. 보쿠토는 계속 아카아시의 침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보쿠토의 얼굴은 잔뜩 상기된 채였다. 저래서 정말 잘 수나 있을까,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그맣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보쿠토가 눈을 크게 뜬다. 그 눈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깊이 접혀서 활짝 웃는 얼굴이 되기까지는 한순간이었다. 유리구슬이 와르르 쏟아지며 빛을 산란하는 것처럼 눈이 아파서 아카아시는 얼른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