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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지나가던 타치바나 울던…데.”


교실로 돌아왔더니 같은 반이자 동시에 같은 배구부인 코노하가 조심스레 말을 붙여왔다. 보쿠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그래?”

“너한테 고백하러 간 거 아니었어?”


코노하의 질문에 보쿠토는 조금 읽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어, 그랬긴 했는데…….”

“어? 헉, 설마 거절했어?”


코노하가 몹시 믿기 어렵단 투로 반문했다. 과장한 기색이 선명하게 보이는 말투였다. 보쿠토는 조금 미간을 모으고서 코노하를 쳐다보았다.


“응, 거절했는데.”

“갑자기 왜?”

“갑자기라니…….”

“너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굴 거절한 적 없었잖아.”


코노하가 유난스레 묻는 말에 보쿠토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렇게 말하니까 꼭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그를 향한 모든 고백에 응한 것처럼 들렸다. 나름대로는 생각했던 것들인데. 모두.


“뭐 좀 더 준비되고 나서……. 안 바쁠 때 만나는 게 나은 것 같아서.”

“어떻게 갑자기 하루아침에 사람이 됐지?”


코노하가 보쿠토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함을 표출했다. 보쿠토는 발끈했지만 거기에 특별한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몇 마디 중얼대듯 대꾸하는 게 고작이었다.


“나도 다 생각이 있었어!”

“그 생각이라는 혹시 게 좋든 싫든 고백하면 다 받아준다는 거였어?”

“…….”


보쿠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코노하를 바라보았다. 코노하의 뒤에서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익숙한 후배의 그림자가 엿보인다는 생각은 착각인가?


“……아니 내가 그렇게 평소에 문제 있어 보였어!? 그럼 말을 좀 해주지!”

“얘 좀 봐……. 잘못은 네가 하고 고쳐주는 건 남이 해주냐? 무상 수리 서비스?”

“…….”


코노하의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보쿠토가 입을 다물자 코노하는 더욱 신묘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들여다본다. 보쿠토가 입술 삐죽이는 것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코노하가 이해되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어디서 벼락 맞았냐?”

“……무슨 말을…….”

“아니 사람이 갑자기 어떻게 변했지? 무슨 깨달음이 있었나 본데.”


보쿠토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코노하를 노려보다가 곧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뭐든지 간에 잘됐긴 하네. 드디어 우리 에이스가 철이 다 들고.”

“나는 평소랑 똑같아!”

“진짜?”


너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 코노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묻는다. 한쪽 눈만 조금 커진 그 표정은 보쿠토의 평소 얼굴을 흉내낸 것이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보쿠토가 억울하단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아니 그냥, 이번 한 번만 거절만 하고 온 거잖아. 내가 그냥 맘이 바뀌어서 그런 거지 뭐 그렇게 변했다고 자꾸….”

“다음에는 거절 안 할거고?”

“내가 좋아하는 애면 안 하지!”

“거봐, 변했다니까.”

“어디가!? 어째서!?”

“아카아시인가, 걔지?”


코노하가 알만하다는 투로 말했다. 뭐라 대꾸하기에는 코노하가 지나치게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목소리였다.


“너 요즘 친하게 지내는 후배.”

“네 후배기도 하잖아.”

“그런 것치곤 네가 너무 안 놔준다는 자각이 없고만.”

“뭐어!?”


보쿠토가 언성을 높였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덜컥 놀라서 몸부터 움츠렸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는데 코노하는 뒤로 물러나기만 했을 뿐 여전히 허여멀건 얼굴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보쿠토의 그 요란한 몸짓이라면 지난 1년간 지독히도 겪어왔던 것이다.


“부활동 할 때 네가 계속 걔랑 얘기하니까. 다들 이름 정도만 알지 걔랑은 말도 못 했다고.”

“그런…그런가?”


내가 그랬어? 보쿠토가 맹하니 묻는 말에 코노하는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쿠토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방해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네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을까나~?”


코노하의 말은 들어본 적이 있다. 보쿠토는 홀린 것 같은 얼굴로 코노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카아시도 그런 말을 했었다.


“역시 너…아카아시와 한패?”

“……너의 집중력과 산만함은 정말 따라갈 수가 없다 야…….”


코노하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를 챘다는 얼굴이었다. 보쿠토만이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알쏭달쏭한 얼굴을 하고 있다. 코노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됐든 잘 됐네. 잘 됐어.”

“뭐, 뭐가?”


보쿠토가 도대체 무얼 얘기하는 거냐고 캐물었지만 코노하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한 학년 위의 선배가 몹시도 성가십니다. 아카아시는 글짓기 대회에 나간다면 재미있는 제목으로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공을 챙겨 들었다.


‘누가 또 무슨 소릴 한 거야…….’


보쿠토는 말을 하는 것도 성가신데 말을 하지 않는 건 두 배로 성가시다는 걸, 아카아시는 지금 깨닫는 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오후 연습이 시작되자마자 달려와선 종알종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이며 그네들의 그 ‘수업’ 얘기며 바삐 할 텐데, 지금은 저 멀찍이 떨어져서는 어딘지 무언가 참고 인내하는 표정에다 시무룩함을 더한 얼굴로 여길 흘끔거리고만 있다.


‘할 말이 있으면 와서 하시지?’


뭔가 할 말이 있지 않고서야 저런 표정이 나오기도 어렵다 싶어서 다가가려고 하면 금방 다른 일이 생기거나 다른 누군가가 말을 붙여왔다. 그게 아니면 보쿠토가 홀연히 사라진다. 그러다가 또 정신을 차리고 나면 보쿠토가 무언가 꾹 참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


보쿠토의 저 전에 없던 이상한 반응을 생각하면 분명히 누군가가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이야기인지는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보쿠토는 온갖 것에서 온갖 반응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캐물어 볼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묘하게 피하는 것처럼 굴기에 오후 연습이 끝나고 개인 연습에서도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보쿠토는 오후 연습이 끝나자마자 ‘아카아시~!’라며 큰 소리로 다가온 것이었다.


“…보쿠토 선배.”

“아카아시 아카아시~! 오늘 연습 잘했어? 아까 너 누구지, 타쿠미였나, 토스 올리면서 짜증 냈지? 다 봤거든?”

“…….”


어찌나 신이 나서 말을 붙여오는지 이쪽에서 순간적으로 말을 잊을 정도였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이며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오후 연습동안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던 것에 대한 반동처럼 말을 폭포 같이 쏟아내고 있었다.


“오늘 누구랑 무슨 얘기 했어요?”

“너 말야, 답답…엥?”


활짝 웃는 얼굴로 신이 나서 말을 늘어놓던 보쿠토가 눈을 꿈벅였다.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보쿠토의 금색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가더니 시선을 피한다.


“아아니?”

“무슨 얘기 했는데요?”

“별 얘기 안 했는데~!?”

“누구하고 무슨 얘기 했어요?”

“아니 아무하고도 아무 말 안 했다니까.”

“코노하 선배하고 무슨 얘기 했어요?”

“어, 어떻게 알았어!?”


보쿠토가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고서 외쳤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보쿠토가 수선을 떨었다.


“아, 아니~! 별 얘기는 아니었는데! 아니 애들이, 아니 그러니까, 내가 너랑 있느라 애들이…너랑 얘기 못한다고 막…….”

“…….”

“나는 잘 몰랐는데 그렇다고 하니까! 그래서 얘기 할 수 있게…내가 옆에 없으면…….”

“…….”


아카아시는 이마를 감싸쥐었다. 보쿠토는 여전히 그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서 우물쭈물 설명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다른 애들하고도 얘기 많이 하라고….”

“무슨 수다 떨러 부활동 해요?”

“그건 물론 아니지만…….”

“그리고 남의 말을 너무 곧이 곧대로 듣지 좀 마세요…….”

“에엥.”

“코노하 선배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그 뜻이 아니라…….”


분명히 전후에 다른 얘기가 있었을 것이다. 아카아시는 보지 않아도 그 상황을 알 것 같아서 웃음을 꾹 참으며 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저도 대화는 하고 싶은 사람과 합니다. 저 알아서요.”

“응…….”

“선배가 그런 식으로 노력할 일이 아니란 거예요.”

“응…….”

“다른 사람하고도요.”

“다른 사람하고도?”

“그러니까 저 말고, 다른…가령 선배의 미래의 애인하고도요. 그 사람의 일은 그 사람하고 얘기를 하세요. 엉뚱한 사람하고 얘기해서 엉뚱한 결론 내지 말고요.”

“핫! 이것도 수업이야!?”

“수업이라기보단…네, 수업이요. 제 말 알겠죠.”


보쿠토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급히 적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언젠가 저 메모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잠자코 보쿠토가 메모하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메모를 다 마친 보쿠토가 상쾌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부활동 할 때도 계속 말 걸어도 되는 거야!?”

“그건 선배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제가 싫으면 말 안 거시면 되는 거고요.”

“아니 너는 무슨 말을 해도 꼭 그런 얘길 하냐!?”

“보통 싫을 때 아니고서야 대화 잘 하다가 안 하는 경우가 있긴 합니까?”

“어…….”


보쿠토가 우물거렸다. 과거 자신의 경험을 되짚어보는 것이었다. 마땅한 결과를 찾지 못한 보쿠토가 어물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설마 아카아시 너도 그렇게 생각한 거야!?”

“뭐 약간은요. 갑자기 말씀을 전혀 안 하시…….”

“아니야!”


보쿠토가 순식간에 가까워져서는 아카아시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쩡 하는 소리에 아카아시가 눈을 크게 떴지만 보쿠토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할 때 보쿠토가 다시 소리쳤다.


“그런 거 절대 아냐!”

“아, 알았어요.”

“아니라는 거 진짜 알겠어!?”

“지금 아주 잘 알겠으니까요. 정말로.”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가 뒤늦게 손을 놓았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아치는 듯했다. 목까지 빨개져서는 서둘러 부채질을 한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보쿠토에게 붙잡혔던 팔뚝을 살짝 주물렀다.


“아, 아팠어? 미안, 내가 힘이 너무…….”

“좋겠네요. 힘 세서.”


뚱한 목소리로 대꾸하면 또 안절부절 못한다. 후배가 마구잡이로 군다고 한 마디 할 법도 하건만 그러질 않았다. 아카아시는 헤아릴 수가 없어서 멀뚱히 보쿠토를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머리 한 쪽 구석에서 이 사람에겐 사실 이 모든 수업 같은 것이 쓸모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밀어냈다.


이 수업을 하자고 강요하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보쿠토였으므로, 그만 둘 시기를 정하는 것도 그일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수업에 대한 거절이라면 자신은 차고 넘치게 했다. 이 이상은 보쿠토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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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후로는 다가오는 보쿠토 배포전에서 회지로 뵙겠습니다~! 

180p로 완결되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x월 xx일 수요일 날씨 : 맑음

오늘은 집으로 가는 길에 교환일기장 삿다!

직원 누나의 추천 노트! 아카아시가 말한 대로

자물쇄도 있다.

무슨 말을 쓰지..

오늘 점심 때 먹은 메론 맛 소다 맛없는 거라서 아카아

시 줬다.

아카아시는 좋은 남자친구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 같다.

이너 스파이크 잘 넣고 싶다.

아빠가 타코야키 사 왔으면 좋겠다.


아카아시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차인다! 이 교환 일기장이라면 하루만에 차인다! 120퍼센트의 확률로 반드시 차인다! 어떻게 이런 걸 줘놓고 그렇게 기대되는 얼굴을 할 수 있지? 아카아시는 헤어지기 전까지 보았던 보쿠토를 떠올리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빨간색 잉크 펜을 먼저 집어들었다.


오늘은 집으로 가는 길에 교환일기장 삿다! → 샀다 입니다.

자물쇄도 있다. →자물쇠

오늘 점심 때 먹은 메론맛 소다 맛없는 거라서 아카아

시 줬다. →맛없는 거 또 주시면 죽습니다.

아카아시는 좋은 남자친구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 같다. →저는 평균입니다..

이너 스파이크 잘 넣고 싶다. →어깨 유연성 증진

아빠가 타코야키 사왔으면 좋겠다. →연비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첨삭을 끝내고 이번엔 검은 펜을 든 아카아시는 다른 쪽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첨삭에서 할 말을 모두 하고 났더니 이제 여기 와선 할 얘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려보내면 보쿠토가 얼마나 울고 불고 난리를 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x월 xx일 수요일 날씨 : 맑음

좀더 상대를 생각한 내용을 적으세요

그렇다고 저에 대한 것은 말고요

공통된 화제에 대한 거라거나 아니면

오늘 있었던 일 중에서 얘기 해주고 싶었던 일 같은 거요.

이너스파이크 연습을 할거면 카메라 같은..

녹화할 게 있으면 좋겠네요.


몇 마디 쓴 것은 좋았는데 일기장의 공백이 의외로 상당해서 부담스러웠다. 아카아시는 머리를 싸매고 내려다보다가 결국 더는 적을 말이 없어 노트를 덮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건 죽어도 남에게 들킬 수 없기 때문에 노트에 잠금쇠를 채운다.


차라리 열쇠를 잃어버리도록 할까? 아카아시는 자신의 손바닥 위, 지나치게 작은 열쇠를 바라보며 잠깐 갈등했다가 그만두었다. 보쿠토의 힘이라면 이런 종잇장 같은 자물쇠야 뜯어버리고도 남는다. 아카아시가 아침부터 일기장의 내용을 궁금해할까 봐 굳이 미리 건네주는 사람이었으니 본인도 이 일기장 안에 무슨 내용일지 궁금해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한 손으로도 열 수 있겠지…….’


조금 아득해진 아카아시는 서둘러 일기장을 책가방에 챙겨 넣었다. 내일 학교에 깜빡하기라도 하면 보쿠토가 반드시 집까지 쳐들어올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


“아카아시, 그거는?”


아침 연습이 끝날 무렵 쿨다운 스트레칭을 하는데 보쿠토가 은근슬쩍 붙어왔다. 가까이 오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훅 몰아쳐 반사적으로 물러난 아카아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뭔데요.”

“아 왜. 그거.”


보쿠토가 손으로 필기하는 시늉을 한다. 어제 그에게 건네준 교환일기장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아카아시가 첫눈에 눈치채고도 모른척 했던.


“하교할 때 드릴게요.”

“엥? 왜? 지금 줘!”

“목소리 좀 낮춰요…….”


마음같아서는 입에 재갈이라도 물리고 싶은데 사람을 상대로 그럴 수야 없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인간의 도리에 탄식했다.


“선배라면 틀림없이 궁금하다고 학교에서 열어보실 것 같으니까요.”

“아, 안 그래.”

“그러실 겁니다.”


아카아시가 보쿠토 코 앞까지 얼굴을 가져다대고서 단호하게 말하는데 보쿠토가 뒤로 물러서지도 못한 채 뻗어있다. 그러길 한참이 지나서야 침을 꼴깍 삼킨 보쿠토가 목을 뒤로 뺐다.


“아, 아, 안 그래.”

“그럼 오후에 받아도 상관없겠네요.”

“!”


보쿠토의 얼굴에 ‘이게 아닌데!’라는 아찔함이 스쳐지나갔지만 아카아시는 못 본척하며 스트레칭을 마무리 지었다. 보쿠토는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답답한 얼굴로 그의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다른 선배가 그를 끌고 가서 스트레칭을 시작할 때까지. 괜히 후배를 괴롭힌다고 한 소리 들은 보쿠토는 잔뜩 불만이 어린 표정이었다. 체육복을 갈아입을 때도 뺨까지 부풀리고서 그를 쳐다본다. 아카아시는 단호한 동작으로 부실 사물함의 문을 닫았다.


“진짜 안 줘?”

“어차피 안 보실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좀…….”

“좀?”

“이렇게 몽실몽실해지지 않을까?”

“아뇨, 구겨집니다. 새카맣게.”

“…….”


보쿠토라면 열어본다. 틀림없이! 아카아시는 확신했다. 물론 대놓고 열어보진 않겠지만, 보쿠토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교실 구석에 숨어서 몰래 열어보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저 체격에 ‘몰래’라는 표현이 가당키나 할까? 하물며 그냥 걸어가기만 해도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저 사람이? 누군가 분명 보쿠토에게 너 뭐 하냐고 물어볼 것이고, 보쿠토는 또 제대로 둘러대지도 못해서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사실이 탄로나게 될 터였다.


배구부의 2학년과 1학년이 자물쇠 채운 교환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절대, 절대 들키고 싶지 않다…….’


다른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야 그의 알 바 아니었다. 부풀려 소문이 나도 보쿠토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테고 고작 1학년에 세터 지망일 뿐인 자신에 대해서라면 아는 사람도 전무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보쿠토를 지나쳐간 그 수많은 애인들……. 보쿠토의 무관심 속에 지쳐가야 했던 그네들이 이 소식을 알게 된다면.


‘칼이라도 맞는 거 아냐?’


농담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아무 말 없이, 아무 논란 없이 참고 견뎌주다 이별을 택한 건 보쿠토를 미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똑같이 공평한 보쿠토 코타로. 그의 관심사라곤 배구뿐. 배구공을 터뜨려도 보쿠토는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을 테니 어쩔 수가 없다고, 상처 받은 와중에도 마음을 달랠 수 있었을 터다.


사귀면서도 데이트는 언제나 언제나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끝내던, 배구 외엔 무신경하던 보쿠토가 갑자기 후배 한 사람과 교환 일기를…….


아카아시의 표정이 말없이 창백해진 가운데에 그가 자신의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수업 마치고. 오후 부활동 마치고! 마치고 나서요.”

“체.”


보쿠토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카아시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


“아, 맞아. 선배. 저 이제 2주 동안은 연습 못 해드려요.”

“에엑~!? 왜?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부활동이 끝나고 난 뒤의 개인 연습을 마무리 지으며 꺼낸 얘기에 보쿠토가 튕기듯 눈을 뜨고 다가왔다. 정말 깜짝 놀란 것 같은 그 모습에 아카아시는 조금 황망한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이제 시험기간이잖아요…….”

“아?”

“중간고사요…….”

“에…….”


사람이란 대단한 것이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보며 생각했다. 아마 처음 만났을 때의 보쿠토라면 여기서 틀림없이 ‘너 시험치기 전에 공부해야 해?’ 따위의 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그래도 말 하기 전에 한 번 혀를 깨물고 눈치를 보는 정도로는 변한 것이다.


“공부 해야 합니다.”

“…그, 그렇지.”

“선배도요. 낙제 있으면 여름에 합숙은 참가 못하지 않나요?”

“에…….”


이것도 알 것 같다. 아카아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입학했을 때부터 슈퍼 루키라고 떠받들어졌을 만큼 실력이 대단한 보쿠토 코타로를 고작 낙제 몇 개 있다고 합숙에서 제외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참가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뭐 안 해도 되는 거면 안 하셔도 되겠죠……. 저는 해야겠으니까 못 도와드려요.”

“아, 아니. 나도 공부 할 거야! 나도!”

“…….”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보쿠토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활활 불타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표정이 마치 그와 자신이 함께 공부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아카아시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교환일기는 여기요.”

“와! 드디어!”

“아니, 집에 가서! 집 가셔서 보세요.”


보쿠토가 당장에 열쇠부터 찾으려고 하는 걸 어렵게 말린 아카아시는 조금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에선 절대 열어보지 마시고요.”

“안 한다니까!”

“못 믿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나에 대한 신뢰를 다 까먹은 거야, 아카아시?”

“그걸 저한테 묻는 그런 점에서?”

“…….”


잠깐 찬물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던 보쿠토지만 금방 회복해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집에 가서 열어볼 교환일기가 어지간히도 기대되는 듯했다.


‘별 내용 안 적었는데…….’


실망했다고 집까지 쫓아오진 않겠지? 괜히 첫날 데려다준다는 걸 거절하지 못한 바람에 자택이 들통나버려서. 아카아시가 불안함을 감추며 교복을 갖춰입는 동안에도 보쿠토는 여전히 설렘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건 두 사람이 자주 저녁을 먹고 가는 요릿집으로 가는 골목 앞까지 이어졌다. 보쿠토는 식당과 아카아시의 집으로 가는 길 사이에서 방황하는 얼굴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결국 간절한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아시, 이거 식당에서 열어보면 안 돼…?”

“별 말 안 적었어요. 저녁 먹고 가실 거면 먹고 가고, 아니면…….”


그러니까 교환일기를 당장 열어보고 싶은데, 아카아시는 집에 가서 열어보라고 말해서 곧장 집으로 가고 싶고, 그와 동시에 배도 고프니 소고기 덮밥도 먹고 싶고, 하지만 그러면 그만큼 교환일기를 열어보는 시간이 미뤄진다는 것이다.


“제발! 아카아시! 제발!”

“…구석 자리에 앉으면요.”

“좋아! 가자! 오늘은 선배가 산다! 빨리 가자!”


아카아시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손을 낚아채더니 식당까지 내달렸다. 아카아시는 만약 또 한 번 교환일기를 쓰게 된다면 그 때는 그래도 한 줄 더 적어드려야겠다, 속으로 작게 생각했다.







“아, 교환일기요.”


아카아시는 교복 셔츠의 단추를 채우며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두 사람 사이에 계속 이어지고 있는 ‘좋은 남자친구’ 교습은 대개 오후 부활동이 끝날 무렵 시작되었다. 보쿠토가 1학년 교실까지 그를 찾아오는 것을 아카아시가 무척이나 싫어했기 때문이다. 오후 부 활동이 끝나면 아카아시의 개인적인 토스 연습이—이라고 쓰고 보쿠토의 스파이크 연습이라고 읽어야 한다—시작되는데, 이 시간은 보쿠토와 아카아시 둘 뿐이라 남들 듣기에 부끄러운 교습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당이 떨어져 손이 흔들릴 지경이 될 때까지 가열차게 연습을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 아카아시가 불쑥 꺼낸 말에 보쿠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교환일기?”

“방금 생각났는데. 보통은 그런 것도 하던데요.”

“그 뭐냐……일기를 서로 바꿔보는 그런 거야? 일기…일기를? 너 일기 써? 진짜냐? 나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데.”


당연히 이쪽도 중학교에 올라오고 나서부터는 쓴 일이 없다. 보쿠토를 놀리려고 꺼낸 말일 뿐이다. 언젠가 보쿠토가 누군가와 사귈 때 교환일기 얘기를 꺼내는 날이 온다면 아주 즐거울 것이다. 자신이 그 정도의 즐거움은 누릴 자격이 있다. 아카아시는 모르는 척 헛기침하곤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노트 한 권에 번갈아 가면서 쓰는 거죠. 편지 교환 같은 느낌으로.”

“……얼굴 보고 말로 하면 안 되는 거야…?”

“말로 하는 건 사라지잖아요. 기록은 영원합니다.”

“뭐냐, 교환일기가 갑자기 경건해졌어…….”

“보통 남들이 못 보게 자물쇠 같은 게 달려 있는 걸로 하는가 보더라고요.”

“아니, 말로 해도 사라지지 않아! 남아 있어! 내 가슴 속에!”


보쿠토가 주먹을 불끈 쥐고 가열차게 말한다. 아카아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제가 엊그제 밥 먹으면서 뭐라고 했죠?”

“아?”

“것봐요, 그것도 벌써 기억이 안 나는데 뭐가 가슴 속에 남아있다는 건지…….”

“아, 아니! 밥 먹으면서 얘길 많이 했잖아! 힌트를 줘!”

“선배가 생각하는 거랑 다른 사람의 생각은 다릅니다.”

“나도 알아!”

“아뇨, 선배는 몰라요.”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사람도 있다는 걸 지금도 부정하고 계시잖아요. 아카아시가 콕 찝어 하는 말에 보쿠토는 반박하고 싶은지 입술만 달싹이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교복 차림이 아니었으면 바닥을 굴렀을 것이다.


“알았어…….”

“뭐가요.”

“교환일기! 알겠어!”

“뭐, 꼭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사귀면서 그런 걸 하는 경우도 있더라는 거니까요.”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을 맺고는 책가방을 챙겨 들었다. 보쿠토는 대단히 큰 결심을 한 것 같은 눈치였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놀리려고 한 말이라는 걸 알 텐데 보쿠토는 철썩같이 믿고 있다. 남들에게 사기당하기 딱 좋은 성격 아닌가, 아카아시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아카아시!”


보쿠토와의 ‘그 교습’은 항상 방과 후에 이루어져서, 오전 연습이 끝날 때 보쿠토가 그를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불현듯 엄습하는 불안함에 침을 삼켰다.


2학년 선배가 말을 걸어오니 아카아시의 동기들은 모두 아침 수업을 준비하러 먼저 들어가버렸고, 그건 다른 선배들 쪽도 마찬가지였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정리를 마치고 나자 남은 것이 보쿠토와 자신 뿐이다. 아카아시는 전력을 다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서 포기했다. 무엇이든지 간에 기어코 보쿠토는 자신에게 얘기하고야 말 것이므로.


“무슨…일이신데요?”

“이거!”


보쿠토가 설렘 가득한 얼굴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을 때 아카아시는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채도 높은 선명한 색깔의 패턴으로 이루어진 하드커버 노트, 옆에는 엄지손톱보다 작은 금속 자물쇠가 달려있다. 자물쇠의 열쇠 구멍은 하트 모양이었다.


“이…이게 설마.”

“아카아시가 사람 사귀는 건 나중에 해보라고 했으니까! 그 동안에 이거 연습 해보게!”

“근데 이걸 왜 제게.”

“교환이잖아, 교환. 혼자서 어떻게 연습하냐?”

“제가 왜…….”

“선생님이잖아?”


그딴 선생 억지로 밀어붙인 게 누군데! 하지만 아카아시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 보쿠토의 눈동자가 태양처럼 반짝반짝 빛나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반드시 이 ‘연습’에 응해주리라 믿는 듯했다.


‘사기에 당하기는 무슨!’


“내일 꼭 써와!”

“이걸 왜 지금 말해주는 거예요…….”


적어도 오늘 하루 정도는 즐겁게 지내고 싶었는데! 기분을 망치는 건 오후부터 해도 늦지 않은데! 아카아시의 억울함은 하나도 모르는 보쿠토가 와하하 웃으며 아카아시의 등을 팡팡 내리쳤다.


“아카아시가 안에 무슨 내용인지 궁금할까봐~! 다른 애들 몰래 봐야 한다?”


윙크를 저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실존 인물을 본 것이 처음인데도 감탄은 나오지 않았다. 보쿠토가 먼저 2학년 교실로 올라가고, 뒤에 남은 아카아시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남을 놀리려 했던 벌을 단단히 받는 기분이었다.


‘알고 하는 거 아냐?’


한 번 골탕 먹어 보라고? 거기까지 생각한 아카아시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보쿠토가 그럴 사람이 아닌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서였다.


*


보쿠토는 오늘 내내 교환일기의 내용에 대해 말하고 싶은 듯한 눈치였지만 아카아시가 단칼에 고개를 내저어 막았다. 어제 ‘교환일기이이~!?’라면서 질색한 사람이 누굽니까, 라고 따져묻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아카아시는 침묵을 택했다.


“아카아시, 왜 안 열어봐?”

“다른 사람 몰래 보라면서요…….”


오후 연습 내내 들뜬 기색 충만한 보쿠토를 보며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가 처져있는 것보다야 나았기에 다들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보쿠토가 왜 들떴는지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아카아시는 헬쓱한 얼굴로 토스를 올려야 했다. 가방 안에 있는 작은 노트를 생각하기만 해도 어깨에 철근을 매단 기분이 된다.


그 기분은 오후 부활동이 모두 끝나고,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개인적인 연습까지 끝나고 난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이었다.


“지금 애들 없잖아.”

“선배가 있잖아요.”

“에이, 열어봐도 되는데.”

“제가 선배를 인간으로 존중해드리는 몇 안되는 순간이니까 조금 더 즐기시는 게 어때요.”

“뭐!? 너 그럼 날 평소에 인간 취급 안 해줬던 거야!?”

“좀더 짐승에 가깝잖아요, 선배는.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에 한계가 있을 텐데, 이 사람은 그런 게 전혀 없는 눈치였다. 1학년인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럴 정도니까 벌써부터 3학년 주전들을 제치고 에이스 취급받는 거겠지. 아카아시는 간단하게 결론짓고는 부실을 나섰다.


“동물? 어떤 거!?”

“…….”


짐승이라고 했던 말은 어디로 갔을까.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말로는 보쿠토를 이긴 것 같았는데……. 기분은…….


“백…하얀색 고양이 같은?”

“엥, 고양이?”


보쿠토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거렸다. 호랑이 같은 듣기 좋은 말을 해줄까보냐, 아카아시는 속으로 다짐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보쿠토가 서둘러 따라왔다.


“알았어, 고양이! 고양이 할게! 고양이 할 테니까 우리 밥 먹고 가자. 배고파 죽겠다.”

“집에 가서 드세요.”

“나 집까지 가다가 쓰러져버릴거야.”

“…….”

“선배가 밥 살테니까 가자~!”

“됐습니다.”

“아카아시이이!”

“계산은 따로 하죠.”

“아? 밥 먹는 거야?”


고개를 끄덕였더니 보쿠토가 신이 나서는 두세걸음 앞서 달려나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뒤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미간을 모았다. 생각해보면 보쿠토는 원하는 걸 모두 손에 쥐었다. 배구부의 추가 연습도 결국 하게 됐고, 이 ‘좋은 남자친구’ 교습도 얻어냈고, 교환일기도 기어코 아카아시가 쓰게 하고, 저녁도…….


“짜증나…….”

“엥?아카아시? 나 뭔가 또 잘못했어?”


달려갔던 보쿠토가 금방 돌아와서는 아카아시의 표정을 살폈다. 아카아시는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보쿠토를 쳐다보다가 그의 뺨을 죽 잡아 늘렸다. 후배가 그런 짓을 하는데도 보쿠토는 아프다고 엄살만 피울 뿐 그 외의 말은 없었다.


“후, 개운해졌다. 밥 먹으러 가죠.”

“뭔데!? 뭐야!? 나만 이러고 너는 개운해지고!? 뭐였는데!?”

“집까지 걸어갈 기력도 없다셨으면서 에너지를 좀 아껴 쓰세요.”

“아카아시이이!”










열흘에 한 번씩 애인을 갈아치우면 아무리 해도 좋은 소문은 나기 어렵건만 왜 그렇게 잠잠했던 건지 알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창가에 앉아 턱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시간이 2학년 교실의 체육수업인 것인지 아래쪽 운동장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올라오는 중이다.


그 시끄러운 소리의 주인공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바로 그 사람, 보쿠토 코타로였다. 아카아시는 동물원의 백호라도 보는 듯이 신묘하단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동급생들 사이를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보쿠토의 모습은 어딘가 어린애가 정신없이 뛰노는 듯한 천진함이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도저히 나쁜 생각이 들려야 들 수가 없기는 할 것이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칼로리가 불타는 것 같네.’


좋아해서 고백했고 상대도 응해주었지만 그게 제대로 흘러가지 못했을 때, 보쿠토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됐을까? 보쿠토는 처음부터 너를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래도 괜찮다고 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원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악질인데…?’


정말로 좋은 사람, 그저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을 뿐인.


때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다. 아래쪽에서 마냥 신나게 뛰어놀던 보쿠토가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가 아카아시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크게 흔든다. 아카아시는 결국 인상을 세게 찌푸린 채 고개를 휙 돌리고 커튼을 치고 말았다.


*


“…….”

“…얘기를, 허억, 좀 해봐!”


체육수업을 마치자마자 뛰어 올라온 것인지 보쿠토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고 호흡도 가빴다. 책상을 내리친 손등 위로 힘줄이 불거져 있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도 형형히 빛나는 중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뭘 얘기해보란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일단은 보쿠토를 끌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한동안 잦아들었던 보쿠토의 방문에 반 친구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들려왔지만 모른 척했다.


“갑자기 오셔서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아까 수업 시작하기 전에! 막 이렇게 찌푸리고 나 쳐다보더니 커튼 홱 친 거 뭐였냐고!”

“아……?”


그 일에 관해서라면 당연히 수업하는 사이 새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에,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말을 한 것을 듣고도 되짚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렸다. 아카아시는 눈만 깜박이다가 수업이 시작하기 직전에 운동장에 있던 보쿠토를 내려다보았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아, 그거….”

“‘아아, 그거’가 아니라고!”

“그냥 갑자기 좀 선배의 예전 애인들에 감정 이입이 돼서.”

“…….”


씩씩거리며 몰아세우던 보쿠토가 단숨에 굳었다. 그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고장 난 고철 인형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요 며칠 아카아시로부터 강도 높은 비난을 받고서 쌓인 죄책감에 종이 울린 듯했다. 허둥지둥하던 손이 결국 내려가고 어깨가 축 처진다. 쩌렁거려야 할 목소리는 꿀이라도 먹은 듯이 조용했다.


“그, 그랬구나.”

“그나저나 그 얘기 하려고 2학년 교실까지 오신 겁니까?”

“…왜 그랬는지 궁금해서…….”


정말로, 없는 조카를 놀려서 울리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재미있다.


아카아시는 이번에야말로 보쿠토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까닭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쪽에서 조금만 흔들면, 저쪽에서는 마치 파도라도 몰아친 것처럼 군다. 커튼을 쳐버리고 싫은 표정을 조금 비췄다고 그 까닭을 캐물으러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바로 그 짝이었다. 저런 걸 어떻게 밀쳐낼 수 있겠는가?


“나 잘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거든…….”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확신했단…?”

“…….”


평소 같았으면 금방 발끈해서 뭐라고 소리쳤을 보쿠토인데 오늘은 어깨를 늘어뜨린채 말이 없다. 아카아시는 왠지 입을 가리고 웃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땀 닦으세요.”


아카아시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어쩌다 한 번씩 들고 다니는 것인데 오늘 때마침 가지고 있었다. 조금 처진 얼굴의 보쿠토가 멍한 얼굴로 땀을 닦다가 손수건이 다 젖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어, 아, 이거 빨아 줄게!”

“네, 부탁드릴게요.”


저런 사람이 있기는 있구나, 아카아시는 허둥지둥거리다가 돌아가는 보쿠토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대책 없이 솔직하고 자기 마음을 밝히는 데에 거리낌이 없고. 그 상대가 한 학년 후배라고 해도, 수업 끝나자마자 달려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물어봤다면 좋았을 텐데.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그의 연인들이 이별을 말하는 그 순간에도 왜 싫어진 것이냐고, 보쿠토는 왜 묻지 않았던 걸까.



*


“…아카아시는 항상…손수건 같은 거 들고 다녀?”


보쿠토가 어색하게 말을 붙여온 건 다음 날이었다. 손수건을 돌려주며 쭈뼛쭈뼛 묻는다. 아카아시는 다림질까지 깔끔하게 된 손수건을 보며 속으로 놀란 마음을 갈무리했다. 보쿠토가 이렇게 신경 썼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집의 누군가가 해준 모양이었다.


“가끔요.”

“그래? 들고 다니는 게 좋을까?”

“뭐, 없는 것보다야 낫겠죠? 화장실에서 손 씻고 나올 때도 편하고.”

“에? 없으면 불편해?”

“……손을 안 씻으시는 건 아니겠죠…….”

“아냐! 씻어! 씻어! 아니 나는 그냥 털어서……. 탈탈 털어서 끝내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야!”

“…….”

“진짜 씻어……. 정말이야…….”


보쿠토가 정말로 울 것 같은 얼굴인지라 아카아시는 헛기침으로 수긍해주었다.


“어쨌든 이번처럼 옆에서 사람이 필요할 때 빌려줄 수도 있고요. 티슈나 그런 것도 좋겠죠.”

“좋아!”


보쿠토가 주먹을 불끈 쥔다. 아카아시의 말대로 손수건이든 티슈든 들고 다닐 마음을 먹은 듯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로 그가 자신의 말을 잘 듣는다는 표현 외에는 다른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나 이렇게 오랫동안 애인 없어 본 거 처음이야…….”

“그간의 상태를 누군가와 사귀는 중이었다고 표현한다면 지나치게 양심이 없는 게 아닐까요?”

“…….”

“애인이 있다 없다는 문장을 빼면 지금도 평소와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아닌가요? 아카아시가 공을 쥐며 덤덤하게 묻는 말에 보쿠토는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않다가 발작하듯이 머리를 쥐어뜯고 바닥에 발을 굴렀다. 깜짝 놀란 아카아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보쿠토를 쳐다만 보길 십여초 가량 지났을 때야 보쿠토가 탈력한 표정으로 양손을 축 늘어뜨렸다. 잠깐 입술을 달싹이던 아카아시가 말했다.


“지금 저한테 성질부린 겁니까?”

“아니야……. 과거의 나를 때리고 싶은데 할 수가 없는 내 마음을 어쩌질 못했어…….”

“흥.”

“내가 진짜 잘못했다는 걸 잘 알겠다…….”

“사실 뭐 사시던 대로 살아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긴 합니다.”

“아…?”


보쿠토와 아카아시 두 사람이 하던 추가연습은 보쿠토가 손수건을 건네주기 전에 이미 마무리가 되어서, 아카아시는 공을 마저 정리하며 보쿠토를 흘끗 쳐다보았다. 보쿠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선배 좋아해 주는 사람 많잖아요. 선배가 누굴 좋아하게 될 때까지도, 아무도 선배를 미워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가 좋은 사람이, 좋은 남자친구가 될 준비를 굳이 하지 않아도 어쩌면 그런 그를 끝까지 참고 견뎌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싶은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보쿠토를 스쳐 지나갈 많은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상처받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보쿠토를 미워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카아시는 여기서 보쿠토가 ‘그런가!?’ 라며 환한 표정과 반가운 목소리로 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좋은 남자친구 선생님’ 노릇도 이 순간으로 마지막일 거라고. 하지만 그가 ‘이 핑계를 진작 생각해냈더라면 좋았을걸’하고 작게 후회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본 것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남들이 나를 미워하고 좋아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무, 물론 좋아해 주면 좋지만.”

“…….”

“어쨌든 내가 잘못했다는 거잖아.”

“사실 뭐 딱히 잘못은 아니죠. 관심 없는 남한테 좀 무신경했다는 게…….”

“무신경하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관심 없는 남이 아니었잖아! 내 애인이었다고!”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어깨를 붙잡고 외쳤다. 아카아시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걸 보고서야 보쿠토도 손을 놓는다. 보쿠토는 조금 좌절한 얼굴이 되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쨌든 내가 뭔가 최선을 다해주지 못했다는 건 알겠으니까……. 너 자꾸 선생님 안 해주려고 이리저리 빼는 거 다 알아!”

“……흠.”


눈치채셨을 줄은 미처 몰랐네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가 또 왁왁 소리쳤다. 두 사람이 체육관을 완전히 나선 건 그로부터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완전히 기력을 탕진한 보쿠토가 터덜터덜 걸으며 아카아시를 잡아끌었다.


“이대론 집 가는 길 도중에 쓰러지겠어. 저녁 먹고 가자. 이 선배가 산다.”


이것도 퇴짜놓진 않겠지, 돌아보는 보쿠토의 눈동자가 형형했다. 아카아시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보쿠토가 급한 걸음으로 그를 잡아끌었다. 자주 가는 정식집인지 점원이 반가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안내한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메뉴를 묻지도 않고 소고기 덮밥 제일 큰 것으로 두 개 주문했다. 젓가락을 쥐려는 보쿠토의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정말로 심하게 허기진 것 같았다.


락교를 부지런히 집어먹는 보쿠토를 멀뚱히 쳐다보던 아카아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요…….”

“응?”

“애인분하고 점심을 단둘이 먹거나 같이 안 먹거나 둘 중에 하납니다.”

“엥?”

“보통은 단둘이 먹던데 어떻게 자기 친구들하고 같이 먹으라고 끌고 왔는지 선배도 참…….”

“아, 아니 뭐 그럼 애인 생겼다고 애인이랑만 먹고 친구들은 버려!?”

“버리란 뜻이 아니라…. 애인이라는 건 선배의 모든 친분 관계 중에서 제일 특별하게 생각해주는 상대라는 거잖습니까. 그 정도 배려는 해주라는 거예요. 남자친구의 친구들이라고 모르는 사람들하고 밥 먹는 게 얼마나 고역인데.”

“그런가……. 나는 친구의 친구랑 먹는 것도 좋은데.”


모든 문제의 원인을 안 것 같다.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선배, 영화나 드라마 보면 눈물 콧물 난리나는 사람이죠.”

“뭐? 아, 아냐! 무슨 소리야!”

“영화에서 사람이나 개가 죽으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밤에 잠도 못 자고.”

“아, 아, 아니라니까!”


귀까지 새빨개져서 전력으로 부정하는 얼굴만 봐도 알겠다. 아카아시는 물끄러미 보쿠토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금방 공감하고, 표현하는 사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마도 다른 사람도 자신 같으리라고, 의심 없이 믿고 있을. 믿는다는 자각조차 없이…….


그런 사람이 왜 그렇게 돌아서는 연인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을까, 아마도 자기 생각과 감정이 틀림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상대에게 무관심했듯이 상대의 감정도 그러했으리라 재단하고, 떠나갈 때에도 그들이 조금도 상처받지 않았으리라 믿고. 그저 멀어짐을 선언했을 뿐이라고.


“선배가 상관없는 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요.”

“엑.”

“선배가 괜찮다고 남들도 다 괜찮은 것도 아니고요.”


전부 다 다른 사람들이라고요, 아카아시가 핀잔조로 하는 말에 보쿠토는 진지하게 듣는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곧 소고기 덮밥이 나왔으므로 아카아시도 보쿠토도 방금 전까지 대화 나누던 화제는 잊고 식사에 몰두했다. 진한 색으로 잘 익은 불고기 위에 광택이 도는 노른자가 자르르 빛나고 붉은 생강의 조각이 꽃처럼 장식되어있다. 밥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기가 가득 쌓인 덮밥은, 보쿠토가 굳이 메뉴를 점찍어 주문할 만큼 무척이나 맛이 좋았다.








지난 몇 주간의 소동이 아주 아무 도움 안 되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공을 주우러 가는 선배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 지난 몇 주간 보쿠토가 있는 유난 없는 유난을 떨며 공 주우러 다닌 덕분이었다.


‘하지만 차라리 공을 주우러 나다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묘하게, 보쿠토가 네 말을 잘 듣네…….


지나가는 2학년 선배가 한 말에 아카아시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이 차이 같은 걸 생각하면 ‘너하곤 얘기를 잘 하네’ 정도로 표현될 수도 있었을 텐데 콕 집어서 ‘말을 잘 듣네’라고 한 것에서 등골을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 같은 게 느껴졌다.


그렇다, 보쿠토는 정말로 자기 선에서는 좋은 학생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이것이 도리어 아카아시를 더욱 괴롭게 했다. 자신이라고 한들 좋은 애인이 뭔지 제대로 알겠는가? 적당히 아무렇게나 지어낸 말을 해주면 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진지하니 이쪽도 제대로 해주어야 할 것 같고, 하지만 자신도 아는 건 없는데…….


“일단…사람을 사귀지 마세요.”

“아?”


이 말도 안 되는 수업 아닌 수업을 시작한 이후로 부 활동이 끝나고 나면 항상 함께 귀가하게 되었다. 다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대?’라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아카아시는 그냥 벽에 콱 머리를 박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보쿠토는 해맑게 웃으며 ‘그치!’라고 대꾸했다. 그치는 뭐가 그치야, 아카아시는 옆에서 속으로 중얼거리기만 했을 뿐이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앉아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브라우니와 에이드 두 개를 주문했다. 보쿠토가 브라우니를 크게 한 술 떠올리는 사이에 툭 하고 던지듯 말한 아카아시는 에이드의 얼음을 휘저으며 창밖을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사람을 사귀지 말라고. 애인을 만들지 마시라고요.”

“왜?”


물음표를 없애버리고 싶다…. 아카아시의 생각을 눈치챈 것인지 브라우니에 코를 박다시피 하고 있던 보쿠토가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았다. 아카아시는 타는 속을 달래기 위해 음료를 쭉 들이키고 말했다.


“애인 사이라는 그런 게 원래 좋아하는 사람하고 사귀는 거잖아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인데 상대가 하잔다고 ‘어 그래’ 하는 게 더 실례예요.”

“그런가…. 하지만 거절하면 상처받잖아.”

“그렇다고 선배가 사귀면서 좋아하려고 노력하시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뭐? 아니야! 노력해!”

“무슨 노력이요.”

“그…….”


아카아시가 들어나 보겠단 태도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거리가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뭐냐, 연습 마치고 하교도 같이 하고…….”

“그거 그쪽에서 기다려 준 거잖아요? 배구부 부활 늦게 끝나는데. 그건 그쪽에서 노력한 건데요.”

“어, 그리고 뭐지…. 점심도 다 같이 먹고…….”

“아, 선배 친구들 있는 자리에 아는 사람 없는 그쪽만 불러다 불편하게 점심 먹게 했다고요?”

“……그, 영화도…! 보고…!”

“그건 당연한 거고요……. 그거 말고 선배의 노력 말입니다. 선배의. 노. 력.”

“…….”


보쿠토가 우는 얼굴이 되어 테이블 위로 엎어진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반쯤 먹다 만 브라우니를 옆으로 밀어둔 채 에이드를 쭉 빨아올렸다. 열감이 가시는 상쾌한 기분이었다.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는 보쿠토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렇게 나쁜 놈이야?”

“그렇죠, 아무래도.”

“아니 너는 한 마디도 좋은 말을 안 해주냐…….”

“좋은 말 안 해주는 사람이니까 관두라고 천 번은 말했지 싶은데…….”

“야! 너, 너가! 그랬잖아! 어어, 남의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하며는 뭐라더라…….”


몸을 벌떡 일으킨 보쿠토가 삿대질을 하다가 또 시무룩해져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카아시는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이 동시에 수십번 일어나는 것처럼 다채로운 표정은 확실히 눈을 떼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그를 좋아했던 그 많은 사람들은 정말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를 좋아한 것도, 미워하지 못한 것도, 헤어진 것도.


“상대방을 좋아하게 되면 그런 노력이 하고 싶어지지 않겠어요? 선배의 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 사람들이 뭐 자원봉사활동 한답시고 선배랑 사귀자고 했던 것도 아닐 거 아녜요.”

“자원 봉사…….”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닐 거라고요. 좋아하니까요, 애쓴 거겠죠. 선배도 그러니까 자기 나쁜 사람 되기 싫다고 남 상처주는 짓은 관두세요.”

“뭐? 그런 거…….”


그런 거 아니야, 라고 단언하듯 외치려 했던 보쿠토의 목소리가 쑥 죽었다. 아카아시는 에이드의 남은 부분을 쭉 들이켰다. 얼음이 녹고 탄산이 빠져서 밍밍한 맛이 났다.


“고백하는데 싫다고 말해서 나쁜 사람 되기 싫었던 거 아닙니까?”


사귀다 보면 어차피 그쪽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할테니까…….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는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보쿠토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계산을 마치고, 아카아시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길에도 계속되었다. 마침내 그가 말문을 튼 것은 아카아시가 현관 열쇠를 찾을 때였다.


“근데 그런 건 진짜 아니었어…….”

“…….”

“내가 그 사람을 잘 모르는데 그 사람이 날 좋아한다고 해도, 잘 모를 테니까……. 그냥 같이 있으면서 알아가다 보면 좋은 친구가 되고 그러다가 진짜로 서로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오는 길 내내 말이 없었던 것은 아카아시의 말을 계속 생각하느라 그런 듯했다. 아카아시는 잠깐 침묵한 채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양손을 꽉 쥐고서, 하지만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눈썹도 어깨도 축 처진 형상이었다.


“하지만 선배……. “

“…….”

“‘그냥 같이 있으면서’라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친구도 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쾌활하고 밝은 성격에 부에서는 2학년인데도 벌써부터 에이스이고 하늘이 뒤집히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이목구비는 뚜렷하고 체격도 좋다. 조건으로만 보자면 빠지는 것 하나 없는 그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모두가 좋아했을 것이다. 자신마저도 그런 장면을 보지 않았더라면—2분 만에 애인이 바뀌는 장면—그를 결코 싫어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런 그의 인간관계는 그가 몸소 지닌 것, 그리고 그가 이따금 보이는 활달한 다정함으로 충분했겠지만.


“…안녕히 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보쿠토는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꾸벅 인사를 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카아시 네의 현관 문이 닫힐 때까지, 보쿠토는 대문 앞에서 알 수 없는 얼굴로 계속 서 있기만 했다.


*


‘망할, 되는 일이 없어!’


아카아시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푹 꺼진 눈의 소년이 그를 보고 있다. 지난 밤 어설프게 밤잠을 설친 흔적이었다.


‘천년 만년 빽빽거릴 것 같은 사람이 왜 갑자기 조용해지고 난리야…….’


보쿠토가 그렇게 생각을 곱씹는 얼굴로 축 처져서 돌아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아카아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난날의 자신을 조금 반성했다. 처음에는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날을 세워 말했다면, 그 다음에는 절대 꺾이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거칠게 말한 것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 사람에게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야 그럴 것이 ‘아, 좀 심했나’싶은 말을 해도 보쿠토는 그저 떼를 쓰듯 소리를 높이거나 토라졌다는 듯이 뺨을 부풀렸다가도 몇 초 가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건성 건성 말하고 마는 건데.’


이렇게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사람 귀찮게 하기로는 도가 튼 인물이지 않았던가? 이 정도도 예상하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았던 게 틀림없다. 아카아시가 그렇게 한숨을 푹 내쉬고 등교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케이지? 밖에서 누가 기다리는데.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니냐?”


등교 시간보다 늦게 출근 준비를 하던 부친이 말을 건넨다. 책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아카아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밖에서 누가 기다린다니,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지나가는 애가 같은 학교 교복이라서 부친이 무언가 착각했을지도, 거기까지 생각했던 아카아시는 부친의 말에도 서두르지 않다가 현관 문을 열었을 때 그만 제꺽 굳고 말았다. 담장 너머에서도 보이는 삐죽한 잿빛 머리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다. 급하게 학교 갔다 오겠단 인사를 하고서 쾅 소리나게 현관문을 닫은 아카아시는 정원을 뛰듯이 가로질러 대문을 벌컥 열었다. 담장에 기대어 서 있던 보쿠토가 활짝 웃으며 아카아시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 가자~!”

“네? 어, 어딜요?”

“응? 학교……. 다른 데 가고 싶어?”

“…선배는 왜 여기 있는데요?”

“어……지나가다가?”

“거짓말을 할 때는 상대를 속이려는 노력이라도 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치만 아침에 데리러 왔다고 하면 좀 너 질색할 것 같은데.”

“정말 굉장히 부담스럽거든요. 진짜로요.”

“거봐아아!”

“그러니까 왜 데리러 오신 거냐고요.”

“아니, 그 뭐냐. 나 스스로 생각해 본 건데? 좋은 남자친구? 데려다주는 게 있으니까 그럼 데리러 오는 게 있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쾌활하게 웃는 얼굴 어디에도 어제의 침울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이 사람?’


어디 한 번 밤 새 잠 설쳐 보라고? 하지만 어제와 달리 활짝 웃는 얼굴 그 어디에도 그런 계책을 꾸며낼 재간은 보이지 않았으므로 아카아시도 사실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생각하신 건 대단하신데 저한테 실천하진 마시고요…. 생각만 하시다가 다음번에 애인이 생기면 그때 하세요, 그때…….”

“…아카아시 너 어디서 막 말싸움 하면 절대 안 지지?”

“아 또 왜요.”

“난 밤에 자다가도 ‘아 그때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라면서 후회하는데 넌 안 그런 애 같아서…….”


기세 좋게 떠들던 보쿠토가 금방 입을 다물었다. 도끼눈을 뜨고 보쿠토를 바라보던 아카아시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보쿠토가 또 금방 활짝 웃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아카아시의, 처음으로 시끄러운 등굣길이었다.







이쯤 거절을 했으니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만두리라 여겼던 아카아시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아카아시가 단호하게 그만두겠다 했던 것이 도리어 보쿠토의 오기를 자극한 것인지, 보쿠토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불도저처럼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부 활동만이었는데 나중에는 쉬는 시간마다 교실에 쳐들어왔고 점심시간에는 그에게 억지로 자신 몫이었던 팩 음료를 쥐여주기까지 했다.


그 유난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반 친구들도 미심쩍다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데다가, 보쿠토의 체격이며 성량이 어디 또 보통 사람이던가? 온 동네에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존재를 견디지 못한 쪽은 아카아시였다.


아카아시가 퀭한 얼굴로 체육관에서 마지막 정리를 할 때 보쿠토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보쿠토 코타로가 웬 세터 지망 1학년을 두고서 장난을 치는 건 이제 모두에게 익숙한 일인지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짧은 시간 동안 세상에게 버림받는 기분을 맛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야!”

“…….”

“아카아시 케이지! 너 세터 하고 싶댔지?”

“네…….”


차라리 그냥 한다고 하는 게 나았을까? 그 말도 안 되는 좋은 남자친구 선생님이라는 걸? 아카아시가 조금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상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럼 연습할 상대 필요하겠네? 공 올려줄 스파이커? 내가 연습 도와줄게!”

“…….”


흔들리던 마음이 사르르 재가 되어 봄바람에 흩어졌다. 아카아시는 퀭한 눈을 들어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자신이 선심을 베푼다는 얼굴을 하고서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가 제 연습을 도와주시는 거라고요……?”

“응! 너도 주전 뛰려면 연습 많이 해야 하잖아?”


이대로 머리를 싸매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얄팍한 술수를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제가 토스하는 공이 바닥에 떨어지면 그걸 주워주신단 거죠?”

“아?”


그래, 그런 것일 리가 없지. 자기 스파이크 연습에 토스 올려줄 사람이 필요한 주제에 어딜 아카아시 그의 연습을 거들어주는 척…….


“부탁할 게 있으면 솔직하게 말을 하세요. 되지도 않는 수 쓰지 말고.”


본심이 들통났다고 생각하는지 보쿠토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간다. 그러다 이윽고 그가 빽 소리쳤다.


“난 항상 솔직했어!”

“아, 그래요? 방금 전에 그건 뭔데요. 제 연습 도와주시는 게 아니라 선배 연습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거잖습니까.”

“그거는 겸사 겸사인 거고…!”

“그런 부분을 솔직하게 말 안 한 거잖아요.”

“아씨, 네가 다 안 된다고 하니까 그렇지!”

“이젠 남 탓?”

“…으아아아아!”


머리를 쥐어뜯던 보쿠토가 속에서 치솟는 열을 이기지 못했는지 바닥을 구른다. 아카아시는 색깔 없는 눈으로 그런 보쿠토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보쿠토는 한참을 그렇게 구르기만 하다가 겨우 진정하고 나서야 바닥에 엎어진 채로 ‘미안’ 하고 사과했다. 울먹이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할 거지…….’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그가 수락할 때까지? 정말일까?


사실 자신이 처음 거절했을 때 보쿠토가 포기하지 않았을 순간부터 뒷목 당기는 서늘함이 느껴지기는 했었다.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알았어요. 하죠, 해요.”

“아?”

“그 망할 좋은 남자친구 선생인지 뭔지 한다고요.”


아카아시가 눌러 붙은 피로로 기진맥진하여 겨우 그렇게 대답했을 때, 처음에 보쿠토는 엎어져있던 채로 고개만 들고 아카아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눈을 꿈벅인다. 5초 쯤 지났을 때 보쿠토가 활짝 웃으며 마치 벼락이 치듯 벌떡 일어나더니 아카아시를 번쩍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어린 조카 비행기 태우듯 하는 동작에 아카아시는 땅에서 발이 떨어지는 경험을 10년 만에 해보았다.


“일단…일단 이런 건 전부 하지 마세요.”

“아?”


신이 난다고 체육관을 뛰어다니며 이리저리 과장된 몸짓을 잔뜩 취하고 있던 보쿠토가 몸을 굳히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카아시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보쿠토는 평생이 가도 그런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보쿠토의 손을 잡아 내렸다.


“남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들지 말란 말입니다….”

“아. 기뻐서 나도 모르게…….”

“그런 건 혼자 하세요, 혼자.”


아카아시의 면박에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던 보쿠토가 번쩍 눈을 떴다.


“진짜 해주는 거지!? 선생님!?”

“……진짜 할 테니까 이제 교실에 찾아오는 것도 그만두세요.”

“그, 그렇게 질색할 일이냐고…….”


뻔뻔하게 구는 정도가 남달리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그도 아카아시가 정색하는 것이 심란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멀거니 그런 보쿠토를 바라보다가 헛기침했다.


“어쨌든 돌아가죠.”

“수업 안 해!? 선생님 해준다고 했잖아!?”

“…….”


아카아시는 갈등과 고뇌가 담긴 얼굴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너무나도 집이 그리워 귀가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여기서 할 만한 얘기도 하나뿐이다. 하지만 귀갓길에는 상대분을 댁까지 데려다주란 말이라도 했다가 보쿠토가 어떻게 반응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설마 날 데려다주겠다고 하기야 하겠어?’


*


“안녕히 가세요…….”

“내일 봐, 아카아시!”


그간에 멸시에 가까울 만큼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봐왔고 내막을 알고 난 뒤에도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현관문 앞에 선 아카아시를 향해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보쿠토에게서는 그간의 갈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눈초리를 전혀 개의치 않았느냐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왜 자길 싫어하느냐고 울듯이 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정말 무서울 만큼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피곤함에 절어서 풀썩 자신의 방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 적응하는 것은 분명히 체력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중등부 시절과는 다른 배구부 연습량도 부담이 되기는 했으나, 지금 자신이 뻗어있는 이유의 팔 할은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사귀던 사람을 데려다준 적은 있냐는 말에 보쿠토는 너무나 당당하게 왜? 라고 대꾸해서 아카아시의 입을 다물렸다. 침묵 끝에 아카아시가 내놓은 ‘보통 헤어질 때 귀갓길 시간이 늦기 마련이고 위험하니까요’라는 대답에 보쿠토도 나름대로 논리적인 답변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늦게 헤어진 적이 없는데?


보쿠토가 몇 주도 버티지 못하고 차이는 이유를 단박에 깨친 기분이 된 아카아시는 잠시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자신의 말에 문제가 있다는 걸,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도통 알지 못한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눈치를 본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결과가 ‘아카아시 집까지 데려다줄게!’였다. 아카아시는 여기서 거절하는 대거리를 치를 체력도 남지 않아서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여주기만 했다.


이제 확실하게 알겠다. 2분 만에 애인을 갈아치운다는 건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줄을 서 있단 얘기였다. 저 사람은 저렇게 지극한 주위의 사랑을 받고 자라서 딱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의 배려만으로 가득 차 있는 인물인 것이다.


‘애당초 왜 좋은 남자친구가 되고 싶단 생각을 하는 거야? 사람을 사귀면 안 되는 사람인 거 아닌가?’


아카아시는 심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몹시 피곤했지만 이제 더는 2학년 선배가 1학년 교실까지 들락거리며 그에게 무언가를 해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실상 옆에서 보기엔 장난기 있는 괴롭힘 수준이었긴 해도—, 부 활동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 하나 갱생시키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못할 일도 아니다. 왜 자신이 그런 부담을 지게 되었는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아카아시는 교복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계속 생각하면서도 눈을 뜨지 못하고서, 피로에 몸을 푹 맡기고 이른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너무한 건 선배죠.”

“…왜!?”


보쿠토가 눈을 번쩍 뜨고 소리쳤다. 아카아시는 윽 하는 얼굴이 되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신이 위협적이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챈 보쿠토가 기죽은 표정으로 헛기침했지만 아카아시는 다시 가까워지지 않았다.


“보통 좋아해서 사귀자고 한 사람이 일주일 만에 헤어지자고 하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 그냥 싫어질 수도 있지.”

“저도 선배를 그냥 싫어할 수도 있죠.”

“아니 그거랑은 얘기가 다르지! 너, 너는 나랑 말 한마디 안 해봤으면서.”


후배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에 보쿠토가 또 크게 움찔했다. 후배는 그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귀는 건 실례 아닌가요.”

“걔, 걔네가 괜찮다고 했는데.”


심지어 지칭이 복수형……. 아카아시는 흐릿한 눈동자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는 것은 둘이니 그렇게 쳐도 맞는 표현이겠지만, 둘만이 아니었을 거라는 묘한 확신이 선다.


“선배를 좋아하니까요.”

“아…?”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인데 뭐든 괜찮다고 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나참.”

“그치만 사귀자고 하는데 거절하면 걔네가 상처….”

“일주일 뒤에 헤어지자고 말하게 하는 게 더 상처 아닐까요?”


보쿠토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카아시를 쳐다보았으므로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의 강이 흐른다. 아카아시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쪽에서 자기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다고 해서 산뜻한 기분일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이제 내가 안 좋아졌으니까 헤어지자고 한 걸 텐데 그럼 기분이 나쁠 이유도…….”


이렇게 단순할 수가 있나! 아카아시는 기가 막힌단 얼굴로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누굴 좋아해 본 적 없어요, 선배는?”

“배구는 좋아하는데.”

“아니 사람요…….”

“엄마 아빠?”

“장난치는 겁니까?”

“아, 아닌데.”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서늘해지고 보쿠토가 쪼그라든 듯이 대답했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심호흡도 두 번쯤 더 하고 입을 열었다.


“좋아해서 열심히 해볼 생각으로 사귀자고 했는데 전혀 상대해주지 않으니까 너무 마음이 많이 상해서, 헤어지자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아……?”

“그랬더니 2분 만에 새 애인을…. 또 일주일 만에 사귀었다가 헤어지고…? 남의 눈에서 눈물나게 하면 자기 눈에선 피눈물 나는 법이란 말도 못 들어 봤습니까?”

“하, 하지만 나는……. 그 애들이 하고 싶다는 대로…….”

“그분들은 선배가 먼저 자기와 뭔가 하고 싶단 마음이 들었으면 했던 거라고, 지금까지 설명했지 않습니까…. 이해가 안 되시면 그냥 관두세요.”

“자, 잠깐만!”


후배가 야멸차게 말하고 돌아서려는 것을 보쿠토가 서둘러 잡아 세웠다.


“그, 그러니까 내가 뭔가 그 잘못했다는 거지! 걔들한테!”

“뭔지는 모르나 봐요.”

“좋은 남자친구가 못 돼줬다는 거잖아!”

“…….”


그 한마디로 압축할 거리인가 싶으면서도 저 말이 나름대로는 정곡인지라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열의에 찬 보쿠토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네가 좀 알려줘!”

“……뭐라고요?”

“좋은 남자친구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쿠토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가득 차서, 별보다 눈부시고 태양처럼 빛나는 눈빛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눈가를 가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싫습니다.”

“…아?”

“선배가 저보다 한 살 많으시잖아요. 제가 알려드릴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반 친구한테 여쭤보시든가….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는 보쿠토가 더 이상 잡아챌 틈도 없이, 아카아시가 쌩하니 자리를 떠났다.


*


솔직하게는, 아카아시는 이것으로 부활동이 완전히 끝장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아마도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부터 배구부의 눈부신 신성으로 이름 높았던 바로 그 보쿠토 코타로, 이제 겨우 2학년이 되었는데도 내년의 주장으로 내정되어 있다는 말이 1학년인 아카아시의 귀에도 들려올 정도인 상대였다. 그런 선배 면전에다 대고 할 말 못 할 말을 모두 했으니 다음 날 더 이상 체육관에 올 필요 없다는 말을 듣는다 해도 놀랍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의외로 아침은 아무 일 없이 시작되었다. 부원들은 모두 반갑게 인사해주었고 워밍 업도 스트레칭도 매끄럽게 이어졌다. 보쿠토와는, 의외로 그도 바쁜 탓에 눈 마주치지 않고 아침 연습을 끝마칠 수 있었다.


보쿠토 선배도 단념했나 보지. 아카아시는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지었다. 애당초 매달릴 건수조차 아니었지 않은가? 후배에게 좋은 남자친구란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게? 하지만 그게 틀려도 단단히 틀린 생각이었다는 것을, 아카아시는 오늘 하루가 채 가기도 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오후 연습도 아침 연습과 다를 바 없이 이어졌다. 모두 몸을 풀고, 제각기 연습을 시작하고, 그러다가 공이 튀어 오르고……. 그걸 주우러 가는 것은 분명 1학년들의 몫일 것이었다. 다들 슬그머니 눈치를 보고 있는 걸 못 견뎌 아카아시가 밖으로 향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튀어나간 사람이 있다.


“내가 갔다 올게!”


아카아시를 거의 끌어다가 체육관 안으로 밀치다시피 하고서는 바람 소리가 나게 뛰어가는 사람은 보쿠토였다. ‘내가 갔다 올게!’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너무 커서 체육관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아카아시가 잠깐 놀라서 눈만 깜박이는 사이에 얼마 지나지 않아 보쿠토가 돌아왔다.


그리고서는 오후 훈련이 끝날 때까지, 아카아시가 공을 주우러 나가려는 낌새만 보이면 보쿠토가 쩌렁쩌렁 자기가 간다고 외치고서는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그걸 아카아시 자신이 하겠다고 같이 속도를 겨룰 수도 없어 어영부영하면 보쿠토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왔다.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보쿠토가 그러고 있으니 자기 공은 제각기 자기들이 주우러 가기 시작하며 연습을 마무리 지었을 때 또다시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잡아 세웠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체육관은 적막했다. 무언가의 낌새를 감지한 아카아시가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아카아시의 저지 자락을 쥔 보쿠토의 손아귀는 단단해서 처음 그랬던 것처럼 쳐낼 수도 없었다. 아카아시가 옷을 버리고 갈까, 라는 생각까지 했을 때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이제 선생님 해줘!”

“뭐라고요?”

“오늘 내가 너 공 주울 거 다 해줬잖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거였습니까….”

“그러니까 해줘!”

“싫다고 말했잖습니까.”


애당초 제가 후배인데 그런 걸 알려드린다는 게 말도 안 되고요, 저도 잘 모르고요……. 하지만 아카아시가 아무리 싫다고 말해도 보쿠토는 막무가내였다. 해달라고 한참이나 버둥거리더니 돌연 앵도라진 듯이 아카아시의 옷깃을 뿌리치고서 배구공이 담겨있는 카트로 향한다. 뭘 하는 건지 기가 막혀 쳐다보고 있던 아카아시는 곧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보쿠토가 배구공을 마구잡이로 내던지는 것이었다. 열린 체육관 문 틈 사이로 공들이 굴러갔다.


“그럼 내가 주워준 거 너 다시 주워와!”


억지를 부려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아카아시는 선뜻 행동으로 옮겼다. 이 정도로 뿌리칠 수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카아시가 그대로 공을 주우러 향하는 것을 본 보쿠토의 눈이 거세게 흔들린다. 그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닌 듯했다.


“아, 아니! 잠깐만! 아카아시! 잠깐만!”


보쿠토가 방금 전에 다시 주워 오라고 외쳤으면서 우당탕 뛰어와서는 체육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주우러 가겠습니다, 비키세요, 아카아시가 그렇게 말했지만 보쿠토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게 아니고……. 이러라는 게 아니잖아!”

“……이러라고 하신 거잖아요.”

“아니야아…….”


보쿠토는 진땀을 흘리는 표정이었다. 말로 설득 하고 싶은데 떠오르는 문장이 없어 자신의 뇌 신경과 악전고투하고 있다는 것이 얼굴만 봐도 술술 읽힐 지경이었으나 아카아시는 개의치 않았다.


“굴러간 공은 주워와야죠. 비켜주세요.”

“자, 잠깐만…….”


체육관 문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기세인지라 결국 아카아시가 무례함을 무릅쓰고 직접 밀치려고 했다. 물론 전혀 통하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쏘아볼 때쯤 해서야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체육관 바닥에 앉혀놓고는 체육관 문을 열었다. 그대로 달려나가서 굴러간 공을 모두 주워오기까지는 눈 깜짝할 새였다.


품에 한 아름 공을 주워들고 와서는 다시 카트에 밀어넣고, 공을 줍기 위해 뛰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까닭으로 땀을 이마에 매단 보쿠토가 아카아시 앞에서 서성였다.


“아니, 나는 이러면 네가 부탁 들어줄 줄 알고…….”

“제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거절할 텐데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너…….”

“무슨 말을 이렇게 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 알아보시…….”

“그! 러! 니! 까! 네가 필요하단 거야!”

“네?”

“나한테 아무도 그런 말 안 해준다고!”


드디어 쓸만한 논리를 찾아낸 보쿠토가 환히 빛나는 얼굴로 아카아시의 두손을 움켜쥐었다. 아카아시가 윽한 얼굴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는 아직 체육관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였다.


“아무도 아무 말 안 해준단 말야~! 너밖에 없어! 그런 질색하는 얼굴 하고 쳐다보는 사람!”

“…….”


이렇게나 심한 말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아카아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자신의 논리에 도취 되어 열정적인 눈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본다. 곧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쿠토의 믿음이 손에 잡힐 듯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빈틈이 되어, 아카아시는 자신의 손을 쥐고 있던 보쿠토를 곧장 끌어당겼다. 보쿠토가 균형을 잃고 휘청하는 사이에 그를 체육관 바닥에 눕히고 손을 뿌리친 아카아시는 재빠르게 옷깃을 추스르고 체육관 문을 열어젖혔다. 보쿠토가 넋빠진 얼굴로 아카아시를 올려다본다.


“그래도 싫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카아시가 돌아서서 나감과 동시에 체육관 문이 닫히고, 해가 다 저문 오후의 체육관이 보쿠토 한 사람과 함께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남자는 시종일관 어린애처럼 굴었는데, 그런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게 주량이 상당했다. 대수롭지도 않은 얘기를 혼자 즐거운 것처럼 큰 소리로 말을 하면서 목이 따가울 만큼 도수가 센 술을 물처럼 들이켰다. 


바의 조명은 어두운 편이었던지라 남자의 얼굴은 윤곽을 구분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 그림자만으로도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걸 판별할 만했다. 하지만 그런 남자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도 예사롭지는 않았다. 


시끄러운 남자에 옆에 앉아있으니 놀랍도록 조용해 보이는 남자였는데, 시끄러운 쪽이 어둠 속에 홀로 태양인 양 눈에 띄고 어색했다면 이 쪽은 이 어둑한 조명이야말로 자신의 시간이라는 듯이 한 호흡에 한 번 꼬릿짓하는 물새처럼 부드럽게 어우러들었다. 


두 사람은 오늘 이 바에서 처음 만났다. 시끄러운 남자는 일하러 온 낯선 도시의 호텔방이 답답하다고 나온 차였고 조용한 쪽 남자는 오늘 회의에서 만나기로 한 상대가 약속을 깼다며 바람을 쐬러 나왔다고 했다. 바의 옆자리에 앉았다가 팔이 스친 것뿐인 인연이었다. 바텐더는 두 사람 앞에 새로운 술을 놓아주었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떠들어댔고 다른 한 쪽은 듣기만 하는데도 나름대로 대화가 이어졌다. 처음 만난 사이라는데도 한 쪽이 시끄러워지면 다른 한 쪽이 거침없이 핀잔을 주었다. 화제는 낯선 도시의 우중충한 날씨, 입맛에 맞는지 가늠할 수 없는 요리, 지나치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이 도시 사람들에 대한 부담스러움 같은 것들로 이어져갔다. 조용한 남자는 마지막 화제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끄러운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 때만큼은 바텐더마저 손님에 대한 예의를 잊고 그만 빤히 쳐다보고 말았더랬다. 


두 사람은 바가 문을 내릴 때까지 한 잔씩 마시다가 바에 손님이 사라질 즈음하여 자연스레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이라 거리의 가로등조차 숨을 죽이고 있는데 거친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히 소음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끄러운 남자가 조용한 남자를 휙 잡아끌었다. 남자의 손끝은 단단했다. 조용한 남자는 말 없이 시끄러운 남자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말 없이 눈을 마주친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둑했던 바 안보다 가로등과 달빛이 내리쬐는 바깥에서 서로의 얼굴은 더욱 분명하고 또렷하게 보였다. 


곧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격정적인 입맞춤을 시작했다. 이유로 들 수 있는 것들은 많았다. 오늘 그들은 남들이 한달간 먹고 죽을만큼 술을 마셨고, 달빛은 오묘한 은빛으로 출렁거리는 중이었다. 낯선 오토바이 한 대가 두 사람을 재촉하기도 했다. 마침내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조용한 남자는 자신의 등에 와닿는 건물의 벽이 내뿜는 냉기를 느끼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호텔방이 답답해서 나왔다고 했던가요.”

“응. 침대도 커.”


시끄러운 남자가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


호텔의 방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다시 격정적인 키스가 이어졌다. 남자와 남자는 서로 본래 한 몸인 것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호텔의 문에 두 사람의 구두 두 쌍이 나뒹굴었다. 중간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옷자락이 허물처럼 흩어졌다. 습기차고 무른 것이 쉼없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섬유와 섬유가 거칠게 마찰하는 소리 같은 것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두 사람이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건 이 객실의 손님이었고 그 위에 올라탄 것은 이 객실의 주인이었다. 바에서는 한 시도 쉴틈 없이 말을 늘어놓던 시끄러운 남자는 호텔에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다. 드디어 그의 입술이 떨어지며 쉰 듯한 쇳소리가 났다 .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

“한 번 시작하면 무슨 말을 해도 안 봐줄 건데.”


침대에 누운 남자가 턱을 살짝 들고 얕게 웃었다. 호텔의 무드등이 그의 뺨이 물든다. 시끄러운 남자는 그게 마치 달같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채였다.


“다른 사람 쥐고 흔드는 건 제 전공이라서요. 과연 그 쪽이 가능하실지?”

“하, 그래? 남의 말은 죽어도 안 듣는 게 내 전공인데.”


시끄러운 남자의 손이 조용한 남자의 복부 위에 안착했다. 손끝으로 내리누르는 그 손에 단단함이 느껴졌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달이 저물 때까지, 호텔방은 한 시도 조용할 새 없이 격정으로 치달았다.


*


아카아시는 퀭한 머리를 움켜쥐었다. 뒤늦게 올라온 숙취가 망치로 변해 자신의 머리를 꽝꽝 때리는 기분이었다. 


술냄새를 씻기 위해 샤워를 세 번쯤 하고 나왔더니 지난 밤 열락의 상대는 정신없이 자고 있다. 아카아시는 그 시간들을 떠올렸다가 흐뭇한 얼굴로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남의 룸키로 아침 조식까지 마친 아카아시는 로비에 열쇠를 맡겨두고서 그대로 콘서트홀의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은 반드시 협연할 피아니스트를 끌고 오겠다는 에이전시의 연락이 이미 와 있었던 것이다. 


‘조금 격렬했나?’


아카아시는 슬쩍 뻐근한 허리를 쓸어내렸다. 봐주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을 할 때는 귀여운 허세를 부릴 줄도 아네, 싶었는데 지난 밤의 시간이 그의 말을 완벽히 증명했다. 한둘 울린 솜씨가 아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서 정신없이 몸을 내맡긴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피로보다는 오랜만의 운동 끝에 느끼는 상쾌함이 더 클 정도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사무실로 향하는 아카아시의 걸음이 사뭇 경쾌했다. 이 기분대로라면 어제 미팅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제 곧 만날 피아니스트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카아시는 구둣소리에 박자를 맞추며 이번 협연에 대해 생각했다. 에이전시에서 피아니스트에 대해 도통 얘길 해주지 않았지만 후보군은 얼추 알만했다. 이쪽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정도의 실력자면서 지금 국내에 들어와 있는 사람, 에이전시에서 깜짝 선물처럼 그에게 비밀로 하겠다고 할 정도의 인물. 


‘타키자와 요시후미려나? 그 사람이라면 좋지.’


다만 그렇다면 의아하기는 하다. 말 한마디 없이 미팅에서 몸을 숨길 만한 위인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카아시가 사무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콘서트 홀의 관장이 웃는 낯으로 그를 환영했다. 약속한 회의 시간보다야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아카아시를 소파 앞에 앉힌 관장은 다과거리를 내어오며 이번 콘서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협주곡을 선보인 적 없는 피아니스트라 정말 기대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협주곡을 한 적이 없어?’


그렇다면 그가 처음 생각했던 카티자와 요시후미는 아니다. 아카아시는 턱을 매만지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에이전시 쪽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관장은 연신 약올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피아니스트의 이름은 정확히 말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콩쿨 입상한 신출내긴가?’


그렇다면, 그도 그럴 법하다. 이쪽은 나름대로 이름을 쌓아올린 지휘자였으니 갓 콩쿨을 떨쳐내고 올라온 병아리와 협연을 하란 말에 자존심 상할지도 모른다고 신경을 써준 것일지도 몰랐다.


‘별로 그런 거 신경 안 쓰는데…….’


아카아시는 커피의 홀더를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했다. 어차피 지휘지가 제대로 된 지휘자라고 이름을 떨치기까지는 한두해로 될 일이 아니었고 그 전까지 아카아시는 일을 가릴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협연하는 피아니스트가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결국 협연을 시키는 거면 배려라기엔.’


하여튼 에이전시도 일을 재밌게 한다고, 아카아시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약속시간으로부터 십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아카아시는 깨끗하게 비워버린 다과접시를 내려다보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관장은 마중을 가야겠다며 사무실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호들갑을 떨며 다시 돌아왔다. 그의 뒤로 두 사람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한 명은 그의 에이전시 쪽 사람으로 익히 아는 이였고, 낯선 다른 쪽이 예의 그 피아니스트인 것 같았다. 


“아하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보쿠토 씨, 빨리 미안하다고 해요. 우리 지휘자님 무섭단 말야.”

“어이쿠야. 10분인걸요. 아카아시 씨도 화 많이 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아카아시 본인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관장이 먼저 탬버린도 치고 트라이앵글도 쳤다. 캐스터네츠도 치겠네, 아카아시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곧 머리 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아카아시는 멀리서 거대한 심벌즈가 쩡하고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피부가 본디 흰 편인 듯했지만 분명히 다른 원인이 있어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피아니스트는 선명한 금빛 눈동자로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관장과 에이전트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역시 얼굴 보자마자 알줄 알았지. 하하, 아카아시 씨라면 보쿠토 씨와도 문제없이 협연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아! 보쿠토 씨가 문제라는 말은 아니고……. 워낙에 독주를 좋아하시다 보니까요.”


문제가 아니라고? 아카아시는 저 에이전트가 자기 입 위에서 바이올린 활줄을 켜도 감내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피아니스트, ‘보쿠토’라는 이름, ‘독주를 좋아한다’라고 하면 딱 한 사람이 남는다.


소년 시절부터 권위있는 콩쿠르를 모두 휩쓸다시피하며 음악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승승장구한, 현대 음악계의 총아. 그 격정적이고 파워풀한 연주는 호평도 악평도 잔뜩 낳았지만 연주회장에서만큼은 박수를 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피아니스트. 그 제멋대로에 가까운 연주 성향 탓에 협주는 즐기지도 않거니와 한 역사조차 없는 피아니스트…….


‘보쿠토 코타로!’


그리고 그의 그 불타는 듯이 열렬했던 어제의 하룻밤 상대! 그가 어젯밤 바에서 일하러 온 곳이 답답해 도망치다시피 했다고 얘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미팅하기로 했던 피아니스트가 돌연 몸을 감춘 바람에 오늘로 약속이 밀린 것도 어제였다. 꿈이라고 믿고 싶은데 그의 이성이, 그리고 보쿠토의 마찬가지로 뜨악한 얼굴이 이게 현실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보쿠토 씨가 긴장한 건 처음 보는 것 같네요, 하하. 우리 지휘자님 그래도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에요~! 그쵸, 아카아시 씨.”


보쿠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젯밤 일이 아스라히 지나갔다. 바에서 뭐라고 떠들어댔더라? 일하기 싫다는 이야길 했었나? 그리고 바를 나가서, 입을 맞추고, 그대로 호텔로 가서……. 


보쿠토는 허옇게 뜬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건 아카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 쥐고 흔드는 게 전공이라더니!)

(남의 말은 죽어도 안 듣는 게 전공이라더니!)


콘서트홀의 사무실에 이루 말로 못할 어색한 공기가 꽉 들어차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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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스님이 원나잇후 어색하게 마주해버린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를 보고싶다 하셔서 써보았습니다~! 









2018년 1월 후쿠로다니 온리전 '사립 후쿠로다니 학원 입학 설명회'에서 발매될 짧은 단편 소설입니다~!

오래 전 도입부만 써두었던 것을 마무리해서 가져가려 합니다^-^!


140*210 | 인쇄 | 약 45p 예정 | 5,000









Happy Birthday to you, to me










“사랑을 위해서…….”


보쿠토는 자신 앞에 엉켜 널브러진 실과 두꺼운 대바늘을 내려다보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당신은 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보쿠토를 보고서 만년 어린애 같은 녀석이라고 평가하곤 했지만, 그것도 코트 위에서는 평이 달라졌다. 그리고 코트 위가 아니더라도 보쿠토에게는 나름대로 타인에겐 드러나지 않는 진지한 면이 있었다. 


가령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나?’같은 화두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점에서.


보쿠토는 이따금 자신이 마음을 둔 소년을 보면서 자신이 그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가늠해보곤 했다. 마음은 진심이었고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에는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무릎이나 어깨를, 혹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기꺼이. 


보쿠토는 자신의 생각을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아카아시를 대신할 만한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겨우 고등학생의 풋풋하기 짝이 없는 감상이라고 비웃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누구에게도 말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심지어 아카아시 본인에게조차—아무도 그의 생각에 대해 입을 대지 않았다.


보쿠토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냈던 건 정말 순전히 우연이었다. 


“헤, 신기하네…….”

“그래? 의외로 간단한데.”

“이거 해서 겨울에 두르고 다니는 거야?”

“아니, 남자친구 선물!”


교실 한쪽에 반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 앉아있는 건 뜨개질을 하고 있는 소녀였다. 소녀의 손끝에는 한 뼘 가량 편물이 늘어져 있다. 소녀가 직접 뜬 것이다. 


“이만큼 뜨는 데 얼마나 걸려?”


보쿠토가 천진하게 묻는 말에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삼 일쯤 걸렸나?”

“힉……. 그럼 목도리 완성하려면 한참 더 해야 되네?”

“그렇겠지?”

“그냥 사는 게 낫지 않아?”


그 말을 한 순간 그 자리의 모두가 보쿠토를 휙 돌아보았다. 보쿠토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만드는 박력이 있는 눈빛이었다. 뜨개질을 하는 소녀만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이건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그런가…….”

“좋아하면 이런 저런 거 다 해주고 싶기도 하고. 보쿠토 군은 좋아하는 사람 없어?”

“있는데.”


보쿠토는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덤덤하게 수긍했다. 소녀가 조금 짓궂게 웃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보쿠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좋아하는 상대에 아카아시를 대입했더니 자신이 좀 무신경하게 말한 걸까 하는 반성도 들었다. 


“보쿠토 군은 좋아하는 앨 위해서 이런 거 해주는 건 시간낭비 같아?”

“물론 아니지!”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조금 발끈해서 외쳐버렸던 것이다. 


“난 그 애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곧장 싸늘해지는 교실, 그리고 바로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지 않는 건 그의 맞은편에 있던 뜨개질 하는 소녀뿐이었다. 소녀는 처음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윽고 가늘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뜨개질은 못 해주겠어?”

“못해주는 게 아니라 한 번도 안 해봐서 그렇지……. 아 왜 웃어!”


보쿠토가 옆의 친구를 퍽 하고 때렸다. 맞은 친구가 안색이 변해서는 웃지 않았다고 손을 내젓는데 뜨개질 하던 소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의 편물을 들어보였다.


“보쿠토 군도 한 번 해 볼래? 목도리?”


그리고 보쿠토는 그대로 함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평상시였다면 이렇게까지 쉽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보쿠토에게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상대에게 마음을 고백해 본 적도 없다는 것, 남들에겐 처음으로 말한 그 애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친구들이 웃었다는 것, 특유의 호승심이 그 순간에도 제 역할을 다 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카아시 생일!’


한 달 뒤가 바로 그의 생일이었다. 


보쿠토로서는 그 순간 기세 좋게 ‘뜨개질을 하겠다.’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음이 담긴 편물이라는 것이 그 때는 어찌나 반짝이며 그를 유혹했는지 모른다. 동시에 이런 걸 받고서 감동할 아카아시를 생각했더니 그만 홀랑 넘어가 버린 것이다. 보쿠토는 그대로 반 친구의 손에 이끌려 대바늘과 실을 고르고, 코를 만드는 법과 뜨는 법을 배워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씻고 책상에 앉자마자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버리면서 어떻게 만드는 것이었는지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었다. 인터넷으로 무언가 찾아보려고 했지만 떠오르는 단어도 ‘뜨개질’이 전부, 무슨 뜨기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만 난다. 보쿠토는 좌절을 삼키는 얼굴로 실 뭉치와 대나무 바늘을 내려다보았다. 


‘아카아시가 기뻐하긴 할까.’


한 뼘도 뜨지 못했는데 옆선은 들쭉날쭉하고 무늬를 넣는 것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다. 이쯤 되니 한 달 안에 이걸 완성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보쿠토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 후배를 생각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손은 아래로 내려왔고 그의 표정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 후배의 첫인상은 새침하네, 였다. 목소리도 덩치도 큰 또래의 소년들 사이에서 갓 중학교를 졸업하고 와 말수도 적고 얄팍한 몸, 얌전히 서 있는 소년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새침한 후배가 그의 연습을 마지막까지 함께해주는 단 한 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다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의 후배는 필요 이상으로 달콤한 말을 해주는 일도 없고, 그보다는 오히려 매서울 때가 더 많으며 상대가 선배라고 져주는 일도 없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양보하지 않고 이기려고 하는데 어찌나 손속이 매서운지 모를 일이다. 학생 식당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그가 자신이 아껴놓은 마지막 새우튀김을 홀라당 먹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동기들은 하나같이 둘을 보고 사이가 좋다고 했지만 보쿠토는 투덜거리기만 했었다.


그런 날이 이어지다가, 앞이 몽롱하고 정신이 들지 않는 것 같은 날이 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다가 교실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 했을 때야 친구들이 열난다며 양호실로 그를 보냈다. 정신없이 잠에 빠져 누워 있다가 눈을 떴는데 가장 먼저 보인 건 청록색 눈동자였다. 후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그의 이마와 뺨에 손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다 이불을 덮어주고는 ‘조금 더 주무세요.’ 하고서 눈을 덮어주는데. 


보쿠토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다 지고 있는 늦은 오후였다. 푹 자고 일어났더니 몽롱하던 것도 어느새 사라지고 상쾌한 기분이 되었다. 배는 많이 고픈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돌아보는데 노을 속에 후배가 서 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평소에는 까맣기만 하던 머리카락에 노을의 붉은 광택이 부드럽게 돌아 전혀 모르던 보석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청록색 눈동자에도 그 따뜻하고 붉은 색이 물들어 있었다. 일어난 그를 보고 다가와서는 이마에 손을 한 번 대어보곤 열이 내렸내요, 그런 말을 하는데. 집에 돌아가자며 그를 바라보는데, 그 순간 보쿠토는 어쩐지 다시 열이 오르는 기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좋았다. 죽어라 연습하고서도 분해서 숨을 몰아쉬고 있으면 그러다 감기 걸린다며 대뜸 낚아채어 샤워실로 끌고 가는 후배의 그 손도 좋았고 무엇에도 욕심 내는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이기려고 악무는 입술도 보기 좋았다. 가끔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고 느끼는지 주먹을 꼭 쥐고 그를 노려볼 때도, 그 눈매마저 좋았다.


그토록 어른스러운데 귀엽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것도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하고 볼 때도 있었다. 가끔 운동화를 접어신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괜히 웃음과 장난기가 동해 뒤를 따라다니며 “아카아시, 신발 똑바로 신어야지~!” 하고는 귀찮아하는 그를 골려주곤 했다. 


해가 지나 새로 1학년이 들어왔을 때에는 심통도 났다. 자신에게도 후배가 생겼다며 항상 담담하던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반짝거리고 그의 앞에서도 딱딱하던 말투까지 후배에겐 물러지는데 마음이 틀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자신이 그를 보듯이 그가 다른 후배를 보게 될까봐 마음 상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이게 어떤 마음인지도 그 때 알았다.


아카아시, 좋아해! 


이런 말은 그에게 몇 번이나 했고 그 때마다 후배는 흘려듣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보쿠토는 굳이 그걸 붙들고 있지 않았다. 욕심낼 필요가 없었던 것도 같다. 사람은 만족한 것에 대해서 달리 무언가를 추구하지는 않지 않던가. 


그런데 덥석 실과 바늘을 사서 양손에 쥐어틀고 끙끙 앓게 된 것은  새삼 이제 곧 겨울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그와는 멀어지게 된다. 지금처럼 점심때마다 쉬는 시간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더는 없다. 


지금까지야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의 후배가 아직도 그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고 있는 것이라면 똑바로 말을 전해야 했다.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으아아아…….”


한 뼘도 뜨지 못한 편물을 들어본다. 


보쿠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있지, 손가락에서 쥐날 거 같은데 원래 그래?”

“…….”


소녀가 애잔한 눈길로 보쿠토의 편물을 바라보았다. 옆선과 코가 들쭉날쭉한 그것은 빈말로라도 그럴듯하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는데 그걸 손에 쥐고 있는 보쿠토가 한없이 진지했다. 체격이 강건한지라 보쿠토의 손에 있는 바늘과 앞에 놓인 털실이 장난감 모형 같기만 하다.


“음……. 쥐가 났었나……. 나도 처음 해볼 때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소녀가 어색한 말투로 애써 보쿠토를 위해주는 동안, 보쿠토는 털실과 바늘을 쥐고 악전고투하는 중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어제 했던  것보다는 검지 손톱만큼은 늘었다. 두 단은 더 뜬 것 같았다. 


“많이 했네.”

“그치! 어제 밤새 했어.”

“……밤새?”

“응, 자꾸 뭔가 모르겠지만 이상해가지구 풀었다가 다시 뜨느라…….”

“그렇구나…….”


소녀는 어쩐지 그 두 줄만 색이 진한 것 같은 편물을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보쿠토가 침울한 표정이 되어 소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좀만 더 힘내면 될 거야!”

“정말 될까…….”

“이런 건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보쿠토는 신의 음성을 듣는 사제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소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괜한 짓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너는 진짜로 사서 주는 게 더 낫겠다’라는 말로 물릴 수는 없었다.


“그보다 보쿠토 군, 부활동 가 봐야하는 거 아냐?”

“아! 맞다! 아카아시!”


보쿠토는 몇 코를 더 뜨다가 소녀의 말을 듣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굴러 가려고 하는 털실에 바늘을 챙겨 가방 안에 쑤셔 넣고는 소녀를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을 벌컥 열자 복도는 벌써 학생들이 하교하고 돌아가 한산했다. 보쿠토는 서둘러 복도를 질주하다 로비 한 가운데에서 아카아시를 발견하곤 멈춰 섰다.


“보쿠토 선배.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의 후배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단정한 얼굴도 오늘은 조금 찌푸린 채다. 보쿠토는 아니라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아니! 아무 일 없었는데?”

“연락도 안 받으셔서 무슨 일 있나 했어요.”


연락? 보쿠토는 놀라서 품을 뒤졌다. 휴대전화는 무음으로 되어 있었다. 아카아시에게서 전화가 한 통, 메세지가 두 통 와 있다. 보쿠토는 허둥지둥 사과의 말을 읊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언제나 아카아시의 교실로 달려가 그와 함께 부활동에 가곤 했는데 갑자기 나타나지 않아서 걱정한 모양이었다.


“별 일 없는 거면 됐어요. 가요. 늦겠네요.”

“어, 으, 으응!”


보쿠토는 진땀을 쓸어 넘기며 아카아시와 나란히 걸음을 맞추었다. 그의 후배는 그와 보폭을 맞추어 걸어가며 오늘 있을 연습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장 봄고도 문제긴 하지만 내년도 걱정이네요. 감독님도 염려하시는 것 같고요. 내년 부주장도 생각해봐야겠어요. 아, 감독님께서 봄고 엔트리에 일 학년을 더 넣을까 하시던데 저는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습니다. 선배네 대학 입학처에서 오신 분과 하신 얘기는 잘 됐습니까?


“아?”


아카아시가 하는 말을 끄덕끄덕하며 듣기만 하던 보쿠토는 마지막 문장에서 아카아시가 자신을 쳐다보았을 때에 맹한 표정으로 반문하고 말았다. 아카아시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 얘기 안 들으신 겁니까?”

“아, 아니! 아니 다 들었지. 들었는데……. 입학처 사람?”

“오늘 점심 때 대학 입학처에서 보쿠토 선배 보러 왔다고 했었잖아요.”

“아, 그랬지…….”


그런 일이 있었지, 뜨개질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다. 보쿠토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Y대에서 왔는데 자기네 대학 들어오라 그러더라고.”

“그래서요?”


기실 입학처에서 고등학교 3학년인 학생에게 찾아왔으면 할 얘기란 뻔했다. 보쿠토는 머리카락 끝을 잡아당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해보겠다고 했지. 바로 정하긴 좀 그래서.”

“조건은 들어보셨어요?”

“조건?”

“학비는 어떻게 해주는지, 필요한 실적은 있는지, 추가지원은 달리 뭐가 있는지 그런 거요.”

“아……. 뭐라 뭐라 말하긴 하던데 그게 다 그런 거였나?”

“선배.”

“아, 아니. 막 이상한 얘길 하길래~! 나는 잘 모르겠고 그래서.”


보쿠토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연락이 온 Y대는 그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대학이었고 진학 의사도 있었는데, 금전적 지원 같은 문제는 그에게는 불필요한 부분이었던지라 건성으로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버릇 잘못 들면 나중에 정말 잘 들어둬야 되는 문제에서도 대충 넘어가게 된다고 제가 말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했어요……. 아! 뭔가 팸플릿 같은 거 줬어! 그거 있어!”

“어디 봐요.”


보쿠토는 허둥지둥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급히 집어넣었던 털실을 발견하고는 턱 하고 다시 가방 문을 닫았다. 옆에서 후배가 바라보고 있는 걸 알지만 차마 다시 열 수는 없었다.


“까……깜빡했나보다, 교실에 있나봐…….”

“시간 날 때 한 번 확인해보세요. 부모님께도 여쭤보시고요.”

“으응, 알았어…….”


괜히 잘못한 것 같기도 하고 한 소리 들은 느낌이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으려니 아카아시가 잠깐 침묵했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응?”

“진학 어떻게 할지 결정하시면 말씀 해주세요.”


선배가 보나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시곤 깜빡했다고 할 게 뻔해서 미리 말하는 거예요, 아카아시가 그렇게 말하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약속하고 확답을 받아내겠다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보쿠토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곤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다, 당연하지! 엄마 아빠한텐 말 안 해도 아카아시한테는 할 거라고!”

“아니, 부모님께는 말씀 드리라니까요…….”


보쿠토가 버럭 외치는 소리에 아카아시는 핀잔을 던지면서도 그렇게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등 뒤에서 와락 목부터 끌어안아 기대자 똑바로 걸어가라며 투덜대기는 했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장래 희망이 뭐야?”

“건물주요.”

“…….”


시무룩한 얼굴로 서포터를 고르며 물었던 보쿠토는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아카아시를 돌아보았다. 옆에서 서포터 고르는 것을 지켜봐주고 있던 아카아시가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주말의 번화가는 그 이름 그대로 사람들로 가득 차 북적거리고 있다. 오래 사용해 늘어진 보쿠토의 서포터를 구매하려 함께 나왔던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바꿔보고 싶다고 말했던 서포터를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세계 평화를 추구할 나이는 지났잖아요. 갑자기 왜요? 집에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니, 며칠 전에 그……. Y대 그거 있잖아. 그거 부모님이랑 얘기 했거든.”

“그런데요?”

“나도 좋고 조건도 좋고 부모님도 다 좋다는데…….”


보쿠토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답지 않은 모습에도 아카아시는 흔들림 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근데 부모님이 좋다고 하시면서도 바로 결정하지 말고 자꾸만 생각을 해보라는 거야. 장래를 결정할 중요한 일이라고……. 근데 좋다며? 뭘 더 생각하라는 거야?”

“…….”

“장학급도 다 준대! 생활 지원 어쩌고 뭐도 해준다고 하고 다른 조건 필요 없이 와주기만 하래잖아. 좋은 거 아냐? 나도 좋은데 엄마 아빤 자꾸 뭘 더 장래 어쩌고 미래 어쩌고 생각해보라고만 하고. 그래서 내 꿈이 뭔지 생각해봤는데!”

“네.”

“난 꿈을 생각해 본 적이 없더라고…….”


침몰당하는 게 이런 기분인가,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서포터를 양손에 든 채 그렇게 생각했다. 보쿠토는 분하기까지 한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덤덤하게 말했다.


“선밴 앞만 보고 돌진하는 타입이니까요. 그렇다고 미래에 대해 아무 생각도 안 해봤을 거라곤 생각 못했지만.”

“생각을 안 한건 아냐!”

“무슨 생각을 하셨는데요?”


보나마나 아침부터 밤까지 배구연습하고 며칠에 한번 꼴로 상대팀을 깨부수는 삶이겠지, 아카아시는 단조롭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시간이 지나도 보쿠토가 말이 없자 고개를 갸웃했다. 보쿠토는 왠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

“아침에도 아이스크림 먹을 수 있게 되겠지 라고?”

“…….”

“아, 아앗, 농담! 농담이고! 아카아시 진정해! 농담이었어! 농담이고! 그냥 막연히 당장 하고 싶은 건 배구니까 배구 하는 것만 생각했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는 그 ‘앞으로’가 와 봐야 아는 거 아니냐고.”


보쿠토는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똑같은 서포터를 집었다 놓았다 하기를 반복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걸 생각해보느라 많이 심란했던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어쨌든 지금 하고 싶은 게 배구라면 그냥 그걸로 하시면 되겠네요. 국내에 있는 대학 중에서는 큰 일이 없는 한 Y대 거기가 제일 낫기도 하고…….”

“그치만!”

“?”


보쿠토가 뭔가 마음이 걸리는 얼굴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아시가 고개를 갸웃할 때 양손을 꼭 움켜쥔 보쿠토가 외치듯 말했다.


“그치만 나중에는 뭐 먹고 살아!?”

“……그런 고차원적인 걸 고민하셨을 줄은…….”

“아카아시는 걱정도 안 돼!?”

“걱정이 돼서 꿈이 건물주인 건데요.”

“아.”


보쿠토가 힘주어 쥐고 있는 손가락을 하나 하나 풀어서 서포터 두개를 양손에 쥐고 보쿠토에게 선택을 강요한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고른 것 하나를 챙겨들고, 자신이 사용할 쿨링 스프레이도 고른 다음 계산을 마쳤다. 그 때까지 보쿠토는 맹한 얼굴로 아카아시를 따라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늦가을의 서리 같은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옷깃을 추스른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옷 단추도 채워주곤 그를 이끌고 자주 가는 경양식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햄버그 스테이크와 리조토 따위를 넉넉하게 시키고 난 뒤에야 아카아시는 입을 열었다. 


“운동선수로 돈을 벌면 그 돈으로 노후까지 지내는 거죠. 중간에 코치나 감독 일도 할 거고. 교사가 될 수도 있다니까 교직 이수도 해놓으시면 좋고……. 보쿠토 선배면 뭐 광고를 찍거나 하실 수도 있고요. “

“광고?”

“…….”


이건 왜인지 곧이곧대로 말해주고 싶지 않다. 아카아시는 살짝 입을 다물고 물을 따랐다. 보쿠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걸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부모님도 그런 걸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은 아닐 거고요.”

“그럼 뭘 걱정하신 거야?”

“보쿠토 선배가 진짜 원하는 일을 하셨으면 하는 거죠. 기왕이면 좋고 편한 길로요.”

“그럼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 이거다 싶으면 그걸로 결정해도 되는 거야?”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가만 바라보았다. 어지간히도 진지하게 고민을 한 것인지 심각한 표정이었다. 전에 없이 애를 쓴 듯이 얼굴에도 언뜻 피로가 엿보인다. 아카아시는 뺨을 매만졌다.


“그래도 뭐든 실행하기 전에 주위에 한 번 얘기는 하시고요. 지금처럼.”

“말하면 돼?”

“딱히 되고 안 되고 그런 게 아니라……. 아, 누가 보증 서달라고 하면 그건 진짜 말하셔야 돼요.”

“아무도 나한테 보증 서달라곤 안해, 아카아시…….”

“어쨌든요.”

“그래서 얘기하면 그걸로 딱 결정을 해도 되는 거야? 빠르게, 바로, 상관없어?”


아카아시는 여기서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보쿠토의 회로는 견고하고 직선적이어서 한 번 명령어가 잘못 입력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잘 해야 했다. 


“신중하실 수 있는 데까지는 신중하게 선택하고 고르고 하시고요. 충분히 신중했다 싶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괜찮은 거지?”

“신중하게 생각하실 수 있는 곳까지는 고려하시고요. 생각하시고요. 그 다음에요.”


뭔가 실수를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보쿠토의 눈동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마음을 다잡고 ‘저한테라도 꼭 뭔가 얘기는 하세요.’라는 말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뚜둑!


“아악!”


보쿠토는 꿱 비명을 질렀다. 그의 손 안에서 두꺼운 대나무바늘이 반으로 부러진 채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꾸만 코가 엉키는 기분에 힘을 준다는 게 잘못 한 것인지 바늘이 그대로 두 동강이 났다. 보쿠토는 기가 막힌단 얼굴로 편물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 한숨과 함께 조심조심 부러진 바늘을 빼냈다. 그리곤 익숙하게, 책상 옆의 바구니에서 새 바늘을 꺼냈다. 대바늘을 부러뜨린 것도 벌써 세 번째였다.

바늘을 다시 코에 끼워 넣은 보쿠토는 빠진 것이 없나 확인해보곤 한숨과 함께 손을 놓았다. 시간은 째깍째깍 달려가는데 편물은 겨우 두 뼘째였다.


‘장갑을 한다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실과 바늘로 원통형 구조를 뜬다는 건 보쿠토에겐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지금 이만큼 해낸 것도 그에게는 감격스럽기 그지없다. 보쿠토는 익숙하지 않은 대바늘을 쥐고 고군분투하느라 저린 손을 주무르며 잠시 편물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 보쿠토는 의자를 밀어 책꽂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장 근처에 꽂혀있는 노트가 한 권 있다. 보쿠토는 손을 한 번 털어 옷깃에 슥슥 닦고는 노트를 꺼냈다.


노트는 그의 평소 필체와는 다르게 단정하고 정갈하게 쓰여진 것이었는데 온통 보쿠토 코타로 그에 대해 적혀있었다. 보쿠토가 지난 그의 생일날 아카아시에게서 받은 것이다. 보쿠토는 풀어지려는 입매를 꼭 다잡고 노트를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겨보았다. 몇 번이나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다른 식으로 새로웠다. 


—A에 몰두하면 B를 잊는 경우가 종종 있음. 머리를 비울 것!

—컨디션에 따라 기량의 격차가 큰 편. 팀원의 상성이 중요

—현재로서는 Y대, B대, C대 추천

—일지 나만 써…….


중간 구석 즈음해서 작게 적혀있는 낙서는 작성한 아카아시 본인도 눈치 채지 못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이걸 줄 생각은 아니었다고 말했기도 했다. 이런 낙서는 제법 여기저기에 적혀 있었다. 


—오늘 경기 서브 대단

—평소에 도대체 어떤 식으로 체력 쌓는 거지? 이해가…….

—이너스파이크 성공. 뭐 다 가졌냐 사람이…….


보쿠토는 마지막으로 읽은 낙서에 손끝을 가져다댔다. 다 가졌다니,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게 하나 있어서 지금 이렇게 대바늘을 손에 쥐고 악전고투하며 뜨개질을 한 단 한 단 쌓아 올리고 있는데. 제일 손에 들어 와주지 않는 사람의 낙서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노트를 들어 올려 본다. 실내 조명의 빛에 닿은 노트는 살짝 오래된 감이 있다. 보쿠토는 거기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가 금방 얼굴이 달아올라서는 팔만 격렬하게 흔들다 침대로 몸을 던졌다. 


갑자기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된 건 ‘장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의 일 같은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눈앞에 당장 닥친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코트도 상대팀도 아카아시도 배구공도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랬는데 불현듯 깨달았던 것이다. 지금 이 고민은 그만의 것이다. 내년이 되면 아카아시는 여전히 고등학교에 남아있는데 자신만 떠나게 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그 이후에 다시 일 년이 지나면?


그 때는 아카아시도 고등학교를 떠날 것이고 지금의 그가 하고 있는 고민도 하게 될 것이었다. 앞선 일 년은 어쩔 수 없다. 그가 먼저 떠나는 것이니까, 참아야 할 사람도 보쿠토 자신이다. 하지만 그 다음 해는 아카아시의 선택이었다. 아카아시의 미래였다. 


‘건물주…….’


아카아시의 꿈이 건물주 같은 거였을 줄이야! 보쿠토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건물? 빌딩 같은 걸 말하나? 아니면 빌라? 건물을 사주면 되나?  어디에 있는 걸로? 몇 층이나 돼야 하지? 얼마쯤 하지? 얼마나 벌면?’


부동산 쪽으로는 접근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막막하기만 하다. 보쿠토는 한참을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일어나 앉아 머리를 싸맸다. 사실 지금 건물 가격을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미래에 건물이 있어도 받아줄 사람이 곁에 없으면 아무 짝에 쓸모없는 일이다. 


보쿠토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다 뽑혀 나온 머리카락을 툭툭 털어내곤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대바늘과 털실을 손에 쥐었다. 하물며 고작 목도리 하나에도 순서가 있어서 바닥부터 차곡차곡 한 단 한 단 떠올려 가야하지 않던가? 그의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이 목도리를 떠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먼저다. 


보쿠토는 크게 심호흡을 하곤 조심조심 바늘을 움직여나갔다. 





“선배 요즘 밤에 안 주무시고 뭐 하시는 거 있습니까?”


여기서 대뜸 ‘어떻게 알았어!?’라고 외칠 뻔했다. 보쿠토는 퀭한 눈으로 돌아보았다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아카아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아침연습이라곤 해도 평소엔 항상 쌩쌩했던 사람이 답지 않게 피로한 듯 굴고 있으니 걱정이 된 것 같았다. 


“아,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내가 네 생일선물을 마련한다고 이렇게 힘내고 있다고 생일 한참 전부터 말할 수야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한참 전도 아니지만! 사실은 코앞이지만! 그래서 밤잠 줄여가며 뜨고 있지만!’


하다보면 조금은 능숙해질 법도 했는데, 다른 건 다 그렇게 금방 금방 익숙해지곤 하더니 뜨개질만큼은 조금도 익숙해질 기미가 없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새 바늘을 갈아치우고 있었고 벌써 다섯 번째 같은 대바늘만 사가는 그를, 털실 가게 주인도 이제 슬슬 미심쩍은 얼굴이 되어 쳐다보고 있었다. 보쿠토는 다음 여분 바늘은 같은 반 친구에게 부탁해두었다. 그가 뜨개질을 시작하게 만든 주범인 그 소녀는 이미 벌써 목도리를 다 완성하고 그를 도와주기만 하고 있기도 했다. 


‘오늘도……. 헉, 맞아! 오늘도!’


퍼뜩 정신을 차린 보쿠토는 피곤에 절어 미적미적 짐을 챙기던 손길에 속도를 붙였다. 아침 부활동이 끝나면 반 친구가 편물 뜨기를 도와준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옆에서 아카아시가 쳐다보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급했다. 아카아시의 생일이 코앞이었던 것이다. 


우당탕 뛰어서 부실을 나가 교실로 올라가자 조금 일찍 등교한 같은 반 소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보쿠토는 숨을 몰아쉬며 급히 사과의 말을 토해냈다.


“미, 미안! 아침 연습 끝나고 바로 왔는데!”

“나도 숙제하고 있었어. 보쿠토 군, 많이 떴어?”

“어제 좀 열심히 하긴 했는데…….”


보쿠토는 금방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되어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들고 소녀 앞에 앉았다. 보쿠토의 말대로 그의 손에 들린 편물은 제법 길이감이 생긴 차였다. 목에 한 번은 두를 만했다. 


“어제 또 바늘이 부러져가지고……. 원래 이렇게 자주 부러져? 소모품이야?”

“……그, 그럴지도……. 일단은 나무로 만들어진 거니까…….”


소녀는 자신은 한 번도 대바늘을 부러뜨려본 적이 없다는 말도, 쇠로 된 대바늘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도 꾹 참았다. 그 사이에 보쿠토는 진중한 얼굴로 그녀 앞에 편물을 펼쳐보였다. 


“아, 뭔가 궁금한 게 있댔지. 어떤 거야?”

“여기 처음 부분 있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보쿠토의 표정은 심각했다. 소녀는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되어 보쿠토가 가리키는 부분을 쳐다보았다. 보쿠토가 처음 대바늘을 쥐고 떠올렸던 목도리의 초반 쪽이었다. 코도 고르지 않고 옆선도 울퉁불퉁하다. 실의 색깔이나 광택도 들쭉날쭉한 건 몇 번이나 거듭 풀었다 다시 떴다 하길 반복해서였다.


“처, 처음 부분은……. 보통은 다 그래. 막 특별히 이상한 건 아니야.”

“어떻게 고칠 수는 없을까?”


보쿠토가 간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소녀는 입을 꼭 다물고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 떠버리고 난 뒤에? 편물을 고치고 싶다고?


“실을 다 풀어서 처음부터 새로 뜨는 수밖에는…….”

“시, 시간 없는데.”

“그런데 막 심하게 이상하진 않은데?”


사실 심하게 이상한 편이기는 했지만 소녀는 보쿠토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곱게 말해주었다. 보쿠토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정말이야, 심하게 이상한 건 아니고……. 아! 다 뜨고 나서 술을 달거나 하면 좀 괜찮을 것 같아.”

“술?”

“그러니까 털실을 여러가닥으로 모아서 만든 장식 같은 거……. 커튼이나 카펫 가장자리에 이렇게 있는 거 있잖아.”

“아! 그렇구나, 그거도 할 수 있어?”

“그건 간단하니까 다 뜨고 나면 도와줄게.”

“응…….”


보쿠토가 진중한 표정으로 다시 대바늘을 양손에 쥔다. 건장한 체격의, 소년이라기보다는 이미 청년에 가까운 보쿠토에게 대바늘과 털실은 깜찍한 장식품처럼 보였다. 소녀는 보쿠토가 뜨기 편하도록 말려있는 털실을 풀어주다가 보쿠토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아카아시가 좋아할까…….”

“…….”


소녀가 허옇게 뜬 얼굴로 ‘아카아시? 너희 부주장 그 아카아시 말하는 거야? 네가 매일 찾아가는 그 아카아시? 그래서 우리 반 애들 전부가 이름을 알고 있는 그 후배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른 채, 보쿠토는 아침 수업종이 칠 때까지 뜨개질에 열중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한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야…….”

“도 닦냐?”


보쿠토가 오후 연습이 끝난 체육관 바닥에 드러누워 중얼거리는 말에 곁을 지나가던 코노하가 툭 말을 던졌다. 보쿠토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허허롭게 웃음 짓기만 했다. 


그것도 잠시, 벌떡 일어나더니 팔을 휘저으며 스파이크 연습을 하자는 보쿠토의 외침이 체육관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동기들은 물론이고 후배들까지 안색이 변해서 누가 쫓아내기라도 하는 것 마냥 짐을 챙기는 동작이 빨라진다. 그 가운데에 여유가 있는 건 딱 한 사람, 아카아시 케이지였다. 


코노하는 동정을 담아 한 살 어린 후배를 바라보았다.


“너도 참 어련하다. 저걸 다 해주고.”

“어차피……. 얼마 안 남았잖아요.”


아카아시의 말에는 묘한 쓸쓸함이 아무도 모르게 숨겨져 있었지만 3년 내내 태양 같은 보쿠토의 곁에서 지내느라 남달리 눈치가 비상해진 코노하의 눈을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코노하는 마냥 어른스러워 보이는 후배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보다 키가 큰 후배였던지라 팔을 조금 뻗어야 했지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저 녀석이 딱 저 짝이겠네.”


언제나 큰 목소리로 요란하게 체육관을 종횡무진 하던 한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면 그 허전함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이 후배는 그 요란한 녀석과 내내 붙어 지냈던 차였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긴 하네요.”

“응?”

“이제 부일지 제가 안 쓸 거니까요.”


내내 부일지를 쓰게 했던 것에 아무래도 한이 맺힌 듯 후배의 목소리가 정교하게 갈려있다. 코노하는 컷흠 하고 헛기침하며 어색하게 웃다가 후다닥 체육관에서 도망쳤다. 


“아카아시~! 토스 올려줘!”

“…….”

“왜, 왜? 왜 그렇게 봐? 뭐 묻었어?”


오후 연습이 끝났다고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빠지고 난 뒤, 코노하까지 도망치듯 모습을 감추기가 무섭게 보쿠토가 토스를 졸라댔다. 아카아시는 괜히 뚱한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일지를 일 년쯤 더 써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하다니.’


죽어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가능하다면 무덤까지 가지고 가고 싶다. 보쿠토가 있어주기만 한다면 까짓 일지쯤이야 몇 년이고 더 쓰겠다는 생각을 했단 걸 보쿠토가 알게 되는 순간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카아시……? 많이 피곤해……? 오늘 쉴까?”

“피곤하신 건 선배 쪽이겠죠.”

“엑. 아, 아닌데.”

“눈 밑에 그늘이 이만큼 내려왔는데요.”


쏘아붙이는 말에 보쿠토가 깜짝 놀라서는 체육관 출입문이 있는 쪽 벽에 달려있는 거울을 향해 달려갔다. 아카아시는 팔을 뒤로 돌리고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밤잠을 설치기라도 하는 걸까.’


짐작이 가는 것이 딱 하나 있기는 하다. 요 근래에 보쿠토가 갑자기 장래 문제로 고민을 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누자면 아마도 둘러갈 여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쯤으로 나눌 수 있을 텐데, 보쿠토는 전자 쪽이었다. 그러니 사실은 그가 무얼 어떻게 어떤 선택을 해도 상관없겠지만 기왕이면 어딘가에서 실패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여 쓴맛을 보기 보다는 달고 온전한 길로 가기를 바라는 것이 마음 준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심리였다. 그래서 신중히 선택하라 말을 했던 것인데.


‘설마 밤새 그렇게 신중하게 고민하시는 건 아니겠지?’


하나에 몰두하면 정신없이 빠져드는 사람인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오후 부활동이 끝나고 하는 이 추가연습을 3년 내내 한 번도 빼먹지 않은 사람이었다. 얼굴만 봐서는 있는 요령 없는 요령 다 부리게 생겼으면서 사실은 결벽할 만큼 끈질기게 성실하다.


‘차라리 그냥 이거다 하고 느낌이 오는 걸로 찍으라고 할 걸 그랬나?’


맹수의 특권인지 묘하게 감만은 좋은 사람이라 아주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을 텐데,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감추었다. 보쿠토가 이대로 못생겨지면 어떡하냐며 울며 뛰어왔기 때문이었다. 





“다……다 떴다!”


보쿠토가 마지막 코를 덧씌우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고, 그 소리에 자습하라 이야기했던 교사도 반 친구들도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보쿠토의 손 위에서 빛나는 편물을 바라보았다. 


살짝 푸른 빛이 도는 회색 털실로 짜낸 단순한 무늬의 목도리였다. 딱 한 번을 겨우 여유 있게 감을 수 있을 듯 짧은 것 같았지만 반 친구들 중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되레 모두 감격한 얼굴이 되어 울먹거릴 뿐이었다. 보쿠토가 저 목도리 하나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이 교실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때마침 학교 수업이 마치는 종이 울리고, 친구들이 모두 보쿠토의 등을 한 번씩 토닥거리고서는 교실을 나선다. 보쿠토는 곧장 자신의 뜨개질을 도와준 소녀 앞에 앉아서 완성한 목도리를 내밀었다.


“수, 술 다는 것 좀 가르쳐줘!”


잠시 육아의 감동에 대해 곱씹고 있던 소녀는 보쿠토가 내민 목도리와 얼마 남지 않은 실을 내려다보며 고심했다. 실이 많지 않아서 목도리의 양쪽 끝에 모두 술을 달기에는 무리인 것 같았다.


“보쿠토 군, 이렇게 끝을 모아서 도톰한 술을 하나씩 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 그러면 첫 부분 마감이 맘에 들지 않는 것도 감출 수 있을 것 같아.”


소녀의 제안에 곰곰이 생각해보던 보쿠토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보쿠토에게 술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양끝에 큼직한 술을 하나씩 달고 나자 정말로 목도리가 완성되었다. 보쿠토가 또 감격했다.


“날짜에 맞추다니……. 기적인가봐…….”

“보쿠토 군이 애썼으니까 그렇지. 아카……그 애도 좋아할 거야.”

“정말 좋아할까!? 건물도 받아줄까!?”

“…….”


소녀는 보쿠토의 문장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됐는지, 그 건물이라는 것은 갑자기 어떻게 튀어나온 것인지 지적하기보다는 애매한 얼굴로 웃으며 응원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저 별처럼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보쿠토의 귀에 들리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 때 교실 뒷문 쪽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은 듣기 드문 소리라 남아있던 몇 되지 않는 학생들이 모두 뒤를 돌아본다. 뒷문에 서 있는 사람은 보쿠토의 배구부 후배, 그리고 이 반의 모두가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아카아시 케이지였다. 


평소에는 인상적일 만큼 단정한 차림새인데 오늘만은 단추도 하나 풀려있고 타이도 느슨했다.


“아, 아, 아카아시! 아카아시! 잠깐만! 잠시만!”


온몸으로 책상 위를 덮은 보쿠토는 교복 상의로 목도리를 감추고는 서둘러 책가방을 챙겼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거동이었는데 희끗한 얼굴의 후배는 특별히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관심을 가지는 기색도 없이 멀뚱히 서서 그를 기다릴 뿐이었다. 


목도리를 가방 깊숙이 집어넣은 보쿠토는 소녀를 향해 입술을 벙긋거려 들리지 않는 감사 인사를 전한 뒤 후배와 함께 발걸음을 맞췄다.


“오, 오늘은 아카아시가 왔네.”

“항상 선배가 먼저 와 주셨으니까요. 이런 날도 있어야죠.”

“그, 그래?”


계단을 2층이나 더 내려가고 나서야 겨우 평정을 되찾은 보쿠토는 옆에서 걸음을 맞추는 아카아시를 슬쩍 훑어보았다.


“아카아시, 목에 단추 풀어졌어.”

“아……. 오늘 좀 이리저리 치였더니. 뭐 선배만큼은 아니지만요.”

“나?”

“선배 생일 때 선밴 하늘을 걸어 다녔잖아요.”

“아.”


보쿠토는 순간 헬쓱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생일날, 정말 기쁘게도 요란하게 축하를 받았지만 당혹스러운 것도 분명히 있었다. 3년간 친분을 쌓아 격의 없어진 친구들이 그를 들어 올린 채 복도를 질주했던 것이다. 걸음마를 떼고 난 이후로 다른 누군가에게 안긴 채 들려본 기억이 전무했던 보쿠토로서는 비행기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체감한 날이기도 했다. 


“어차피 체육복 갈아입을 거라 대충 먼지만 털었어요. 그러는 선배는 뭐……. 언제나와 마찬가지시네요.”


보쿠토를 위아래로 훑어본 아카아시가 살짝 포기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보쿠토는 소매를 걷어 올리는 것의 편리함을 설파하다가 로비를 스치고 지나가는 찬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12월의 공기가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춥죠? 체육관 빨리 가요.”

“벼, 별로 춥진 않거든!”


발끈해서 소리쳤지만 별로 먹히지는 않는다는 걸 보쿠토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어린애 달래기라도 하듯이 ‘네, 네~’하고 만다. 보쿠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카아신 내가 선밴 거 알긴 해? 모르지?”

“……저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걸요.”


후배의 목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체육관에 도착하고 난 뒤였다. 두 사람이 평소보다 조금 늦었는지 먼저 도착한 부원들이 인사하는 소리에 보쿠토는 그만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그 날 오후 연습에서 보쿠토는 날개가 돋은 듯했다. 며칠째 잠이 부족했는지 눈 밑의 낯선 그늘은 여전했지만 표정만은 환했고 말 그대로 날아다니다시피 하여, 고작 스파이크 연습만으로도 공이 터질 것 같았다. 거기에 어울려주던 아카아시가 아주 오랜만에 기진맥진했다.


“헉, 아카아시……. 괜찮아?”

“…….”


숨을 몰아쉬던 아카아시가 체육관 바닥에 드러누워 버린다. 둘 밖에 남지 않은 체육관이었던지라 체면 차리지 않는 그의 얼굴을 보고서 보쿠토는 배시시 웃더니 마실 것과 타월을 챙겨들고 다시 아카아시의 곁으로 돌아왔다.


“아카아시 이렇게 뻗어있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그치.”

“그야 1학년 때나 이랬으니까 그렇죠.”


고작해야 1년 전 일인데 오랜만인 것 같고 그렇다며 보쿠토는 수건으로 아카아시의 땀을 닦아주었다. 애써 다 닦았다고 생각했을 때 아카아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앞에서 누워있다고 눈치주신 겁니까?”

“아, 아니거든!”

“아니면 숨을 못 쉬게 만들어서 저를 없애시려고…….”

“뭐!? 아카아시 없으면 나도 죽을 거야!”


농담으로 한 이야기에 터무니없는 대꾸가, 그것도 진심으로 가득 찬 문장이 되돌아왔을 때 뻔뻔하게 앉아있는 기술 따위는 익히지 못한 아카아시였다. 아카아시는 놀라서 눈을 꿈벅거렸다. 보쿠토는 그런 아카아시를 눈치 채지도 못하고 열렬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진짜야! 그러니까 진짜 아카아시 죽으면 안 돼!”


평소였다면 “사람은 누구나 늙으면 죽습니다.”하고 덤덤하게 말했을 텐데 왠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렵게 입을 열고는 알았다고 답하는 게 고작이었다. 


보쿠토의 ‘아카아시 죽으면 안 돼’타령은 아카아시가 샤워를 마치고 교복으로 다시 갈아입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보쿠토가 말을 멈춘 건 아카아시가 오늘 부활동이 있기 전 보쿠토의 교실로 그를 데리러 갔던 것부터 후회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일지까지 다 쓰고 나서 필기구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보쿠토는 조용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오후 부활동 내내 날아다닌 모습을 조금도 연상할 수 없는 기복이었다. 


설마하니 오늘 죽는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때문에 저러나 싶어서 아카아시가 무어라 말이라도 해보려는 찰나에 보쿠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아카아시는 눈만 크게 뜨고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가방 안에 양손을 집어넣고 있는 보쿠토의 표정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 아, 아카아시!”

“네, 네……. 말씀……하세요.”

“생일! 축하한다!”


그리고 그의 얼굴 가득히, 따뜻하고 포근한 것이 차올랐다. 처음에 느낀 건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이었고 곧바로 어떤 익숙한 향기가 따라붙었다. 익숙할 수밖에 없는 그것, 그건 보쿠토가 사용하는 비누 냄새였다. 


“아……?”


아카아시는 자신의 얼굴에 들이밀어졌던 편물을 펼쳐보았다. 색은 무척이나 세련되었지만 만듦새를 보아서는 절대 판매할 수 없는 형상이었다. 코의 크기도 들쑥날쑥했고 옆면도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기 바쁘다. 이런 건 어디서 돈을 주고 사려고 해도 찾아보기 어려울 거였다. 

멍하니 목도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카아시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보쿠토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꿋꿋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다시 목도리를 내려다보았다. 라벨이나 상표도 없는, 어설픈 솜씨로 사람이 직접 뜬 것 같은 목도리. 심지어 포장도 무엇도 없고 새빨개진 얼굴로 여길 보고 있는 보쿠토. 


“……설마 이거 보쿠토 선배가 직접 만든 겁니까?”

“아카아시 별로 안 기뻐하는 거 같애…….”

“아니, 정말이에요? 선배가요?”

“응…….”


보쿠토는 이제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었다.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닫았다. 그 사이 보쿠토가 자신의 양손을 맞잡고 웅얼거렸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는 줄 아예 몰라서……. 좀 잘 못 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거든……. 시간 맞추려고 힘냈어…….”

“……설마 밤에 잠을 못 잤던 것도.”

“으, 으응……. 며칠 밤 좀 샜나?”


보쿠토가 뺨을 긁적거린다. 아카아시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닫고는 다시 목도리를 내려다보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 모습에 보쿠토의 얼굴도 점점 시무룩해져갔다. 


“……아카아시가 좋아하면 나도 좋아한다고 할랬는데.”

“……뭐라고요?”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목도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카아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보쿠토는 바닥을 보고 있느라 아카아시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울먹거리는 듯이 혹은 투덜거리는 듯이 소리를 웅얼거렸다.


“그래도 열심히 한 거니까 집에 보관이라도 해 주면 안 될……아, 아카아시?”


애달픈 목소리로 말하다 고개를 들었던 보쿠토는 자신의 코앞에 와있는 후배의 얼굴에 흠칫했다. 금방 뺨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되었지만 어째서인지 물러설 수가 없다. 후배는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선배가 밤에 잠 못 주무시는 것 같아서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아? 그랬어?”

“그랬는데 제 생일 선물을 만드시느라 그랬다고요?”

“그게 어쩌다보니…….”

“다음부턴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알겠습니까.”

“그치만 시간 맞추고 싶었고…….”


보쿠토가 무어라 변명을 하는데 아카아시가 찌릿 하고 노려보았다. 보쿠토가 흡 하고 입을 다문다. 그 사이에 아카아시는 묘하게 만족스러운 것도 같고 기쁜 것도 같은, 어쩐지 알기 어려운 표정으로 목도리를 바라보다가 그걸 목에 둘렀다. 한 번 두르기에 딱 넉넉한 길이였다. 아카아시가 도톰한 술의 끝자락을 만지작거린다. 그걸 홀린 듯 보고 있던 보쿠토가 문득 말했다.


“……맘에 들어?”

“네. 아주요. 정말 좋네요.”

“진짜?”

“네. 정말로. 무척 기쁩니다. 고마워요, 보쿠토 선배.”

“정말로?”

“네.”


보쿠토가 재차 묻는 말에도 아카아시는 거듭 대답해주었다. 그러기를 대여섯번쯤 더 했을 때, 아카아시는 조금 웃는 것 같은 얼굴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선배. 저는 정말 기뻐하고 있으니까요.”

“어?”

“이제 선배 차례죠. 할 말 하세요. 지금.”

“어어.”


보쿠토는 눈을 깜빡거리며 아카아시를 쳐다보았다. 아카아시는 목에 목도리를 두르고 있을 뿐 언뜻 보자면 평상시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보쿠토는 그를 감돌고 있는 기류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살짝 들뜬 공기, 조금은 옅어진 눈동자까지 모두 아카아시의 기쁨을 표출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기뻐하는 것이다. 그가 어설프게 짜낸 목도리를 받고서.


그리고 나는 아카아시가 기뻐해주면, 말을 하려고.


“어……. 그러니까, 아카아시…….”

“네.”

“난 아카아시가…….”


하물며 작은 목도리 하나도 완성하기 위해서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보쿠토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가는 문장을 제어하지 못했다.


“아카아시를…….”

“네.”

“아카아시 나랑 결혼하자!”

“……네?”

“그게 건물 상속세가.”

“……네?”

“내, 내가 알아봤는데 배우자끼리가 상속세가 제일……. 내가 건물을……. 어떻게 가져오면……. 그럼 아카아시 장래희망……. 나랑, 내 옆에서…….”


보쿠토는 말을 횡설수설했고 아카아시는 그 모든 빛의 파편을 보고 있기만 했다. 마침내 그것이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그의 눈을 멀게 할 때까지. 


“전 싫은데요.”


보쿠토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카아시는 그 표정을 충분히 감상한 다음 목도리에 턱과 입을 파묻었다. 


“전 선배하고 사랑해서 결혼할 겁니다.”

“……진짜?”

“네.”

“오늘 내 생일 아니라 아카아시 생일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선물 받는 거 같아…….”


그 말이 자신에게는 선물인데, 보쿠토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아카아시는 그의 금빛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한껏 몽롱하게 풀어진 얼굴이 되었다가 또 금방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펑 하고 소리가 날 것 같다. 그리곤 보쿠토가 냉큼 그에게 다가와 아카아시의 양손을 잡아챘다.


“아카아시도 신중하게 생각한 거야?”


‘도’라는 것은, 보쿠토는 이미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란 이야기였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을 망설여서가 아니라 차분히 말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그건 이미 늦은 일이었다. 입술과 입술이 금방 맞닿더니 이윽고 더운 소리를 내며 떨어지지 않는다. 보쿠토가 물러선 건 아카아시의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뒤였다.


아카아시는 숨이 차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붉어진 얼굴을 겨우 다스리며 충분히 보쿠토와 거리를 벌렸다.


“전 항상 신중하게 생각해요.”

“그럼 우리 이제 사실혼? 그런 거야?”

“이 때 쓰는 말 아닙니다. 그리고 그건.”


무엇이든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 건 자신이면서 직접 뜬 엉성한 편물로 부딪혀오는 고백 아닌 엉뚱한 고백에 홀라당 넘어가는 것도 자신이었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꾹 삼켰지만 목도리를 풀지는 않았다. 


“그건 내년 보쿠토 선배 생일 선물로 드릴 거니까요.”

“……아?”

“착하게 기다리고 계셔야 됩니다. 아셨죠.”


밟아온 나날보다 남은 날이 훨씬 긴 이 때에 아직은 섣부른 선택을 하면서도 아카아시는 몸을 기울였다. 보쿠토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입을 맞춘다. 맹수가 영역을 표시하는 것처럼 수줍음이라고는 모르는 격렬한 입맞춤이 끝나면 갓 피어난 꽃잎처럼 얼굴을 붉히고 선 보쿠토가 있다. 


아카아시는 지금 당장 보쿠토의 생일이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도 티내지 않고서 다만 보쿠토가 다시 맞부딪혀 오는 입술에만 의식을 기울였다. 몇 번이고 거듭된 입맞춤이 끝나고, 겨우 호흡보다는 입맞춤이 오간다고 해야 할 짧은 거리 속에서 보쿠토가 작게 속삭였다.


“그거 만든다고 대바늘 열 개쯤 부러뜨린 거 있지…….”

“진심으로 여러 가지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나 배구 좋아하고 잘해서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아슬아슬하게 세 손가락엔 못 들지만요.”

“아카아시 진짜 이러기야!?”


보쿠토가 왈칵 그의 입술을 깨물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웃음을 꾹 눌러 참고는 보쿠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눌렀다 뗐다.


“저한텐 첫 손가락이니까 된 것 아닌가요.”


보쿠토가 금방 감동했다며 달려들어서, 아카아시는 헝클어지려는 목도리를 추스르기 위해 애써야했다. 보쿠토가 그런 아카아시의 마음도 모르고 연거푸 입맞춤을 했다. 


다가올 가을을 기다리는 겨울해가 저물어갔다.





버터스님의 그림을 보고 써보았습니다~!






—저희 비행기는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까지 가는…….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짐들은 위쪽 보관함에 넣어 주시고 아울러 보관함을 여실 때에는 먼저 넣은 다른 짐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유의…….

—Cabin crew door side standby.

—Number two clear.


이륙하기 직전의 비행기 내부는 가장 소란스럽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등을 돌리자마자 성의 없는 표정으로 입가에 남은 과자 부스러기를 손끝으로 털어내곤 뒷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앞으로 약 열 두 시간은 열어볼 생각이 없을 물건이었다. 


동기En : 오늘 리유니온 못 온다며

동기En : 무슨 일 있어?

동기En : 아직 파리야? 지난주에 입국 했다지 않았나


그대로 답장 없이 휴대전화 전원을 끌까 했던 보쿠토는 잠깐 멈칫하고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얘가 누구였더라? ‘En’이라고 붙여놓은 걸 보면 영국에서 공부할 때 만난 녀석인 것 같은데, 까지는 생각이 나고 그 이상으론 가물가물했다. 그래도 번호를 저장해 놓은 걸 보면 의미가 있는 상대일 거였다.


나 오늘 출국


짧게 답장을 보내고 다시 휴대전화를 끌려는데 하는데 금방 메세지가 날아왔다. 


동기En :  어디로? 또 나가? 할아버님이 보내심?


이제는 귀찮음이 조금 더 커져서, 메세지를 확인하고도 답신 없이 바로 전원을 내리려 했던 보쿠토는 조부가 보냈냐는 문장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 부분은 괜히 찔려서 답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건 아니고, 독일 간다


이번엔 정말로 메세지를 보내자마자 바로 휴대전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로고가 뜨며 까맣게 물들어간다. 그걸 적당히 옆에 놓아둘 때 기내 안내 방송이 시작되었다. 여태껏 모든 방송을 귓등으로 듣던 보쿠토가 눈을 반짝 뜨고 허리를 폈다.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xx 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비행기는 프랑크푸르트까지 가는 xx 항공 789편입니다. 프랑크푸르트까지 여러분을 모실 기장은 타키자와 요시후미이며 저는 객실 승무원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프랑크푸르트까지의 비행 시간은 11시간 30분으로 예정하고 있으며…….


나직하고 단정한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감미롭기까지 하다. 보쿠토는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는 뱃사공마냥 기내 방송을 음미했다. 그리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흘러나왔다. 


—……기기는 탐승 시부터 도착 후 내리실 때까지 계속해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지금 확인하시고 전원을 꺼 주시기 바랍니다. 여행 도중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저희 승무원을 불러주십시오. 프랑크 푸르트까지 저희 xx 항공과 함께 편안한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이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보쿠토가 한 달에 700만엔을 흩뿌리며 기어코 비행기에 오르는 것은 아카아시의 바로 저 말을 듣기 위해서나 다름없었다.


방송이 끝나고 바깥을 향해 목을 쭉 빼고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면 벨을 누르거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곧 그의 담당 승무원—바로 아카아시 케이지가!—이 모습을 나타냈다. 


“손님, 곧 이륙이 시작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방금 전까지 스피커를 통해 부드럽게 울리던 목소리가 바로 눈앞에 있다. 보쿠토는 눈을 반짝이며 아카아시를 올려다보았다.


“점심은 언제 나와?”

“직선 비행을 시작할 35000피트 상공 궤도에 올라선 후에 나올 예정입니다. 외울 때도 되신 것 같습니다, 손님.”

“알지만 아카아시 목소리로 듣고 싶어서 그러지!”

“아, 네…….”

“있지, 아카아시~!”


이런 목소리로 부르면 청록색 눈동자가 윽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겨우 다시 돌아온다. 보쿠토는 장난기어린 웃음을 꾹 눌러 참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로 엉덩이 한 번만 만지게 해 주면 안 돼?”


그 뒤로는 아카아시가 가차 없이 움직였다. 그를 내려다보는 그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성큼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의 허리춤으로 팔을 뻗는다. 그 적극적인 공세에 되레 보쿠토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데 아카아시의 양 손이 좌석 벨트에 가 있었다.


달칵 소리 나게 버클을 맞춰 끼우고는 그대로 끈을 쭉 잡아당겨버린다. 보쿠토가 컥 소리를 낼 때에야 손을 놓은 아카아시가 산뜻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곧 이륙할 테니 안전을 위해 좌석 벨트를 매주셔야죠, 손님.”

“아, 아카아시! 너어!”

“이륙 할 때까지 의자도 바로해주시고요.”


보쿠토가 앉아있던 의자를 매끄럽고 격렬하게 바로세운 승무원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보쿠토는 그렇지 못했다.


“아카아시! 너 진짜 자꾸 그렇게 굴 거야!?”

“손님, 필요한 게 있으시면 또 불러주세요.”

“너 비행기랑 너랑 묶어서 사버린다!”

“저희 회장님은 거지에게 비행기를 기증하는 일은 있어도 귀사에 팔지는 않으실 거라 사료됩니다. 그리고 다른 손님들이 시끄럽다고 하시니까요, 쉿?”


아카아시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고 떼를 쓰려고 했던 보쿠토였지만, 아카아시의 검지가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누를 때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마냥 지고 있을 수만은 없다. 불만스런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노려보던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을 입술로 깨물었다.


“보쿠-손님!”


아카아시가 억눌린 목소리로 작게 외치는 소리에 손가락을 놔준 보쿠토가 히쭉 웃으며 뒤돌아선 아카아시의 엉덩이에 기어코 손을 올렸다. 아카아시가 그의 손을 매섭게 쳐낸다. 


하지만 보쿠토의 표정도 금방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선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입술을 눌렀던 입술을 자신의 입술에 가볍게 갖다 대고는 사라지듯 커튼 너머로 몸을 숨겼다. 



*



아카아시는 A1석 옆에 서서 한숨을 꾹 눌러 삼켰다. 깨어 있을 때는 일곱 살 난 어린애마냥 요란하던 남자였는데 잠에 빠진 모습은 순한 양 같다. 아카아시는 몸을 기울여 남자의 좌석 옆으로 늘어선 세 개의 창문을 하나 하나 닫았다. 달칵하는 소리가 나도 남자는 깨지 않았다. 


덮을 이불을 펼쳐 어깨부터 발끝까지 덮어준 아카아시는 어둡고 아늑해진 시트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곤 몸을 바로 세웠다. 하지만 벗어나지는 못했다. 어느새 일어난 남자가 아카아시의 손목을 낚아챈 것이었다.


“……아카아시?”

“주무십시오, 손님.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으니까요.”


잠깐 잠이 들었을 남자의 목소리는 그 사이에도 잠겨 나직했다. 아카아시는 비행기가 이륙하고 난 뒤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시 남자를 뉘어주었다. 


“안 잘거야……. 아카아시, 일하러 가야 돼……?”

“아뇨, 여기 있을 겁니다.”

“응…….”


눈을 쓸어주자 다시금 잠이 든다. 손목을 잡아챘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아카아시는 그 손도 이불 안으로 넣어주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남자를 지켜보고 있다가 조용히 커튼을 치며 물러났다.


‘주무셔?’


바깥으로 나오자 동료 승무원이 자는 시늉을 해보이며 그에게 물었다. 아카아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좌석과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


“이 참에 올라가서 잠깐 쉬어요, 아카아시 씨.”


아카아시는 고개를 저었다. 언뜻 보자면 손님에게 시달리는 것 같지만, 막상 저 남자에게 붙들려있는 동안 아카아시는 다른 일을 하지 않게 된다. 


‘그걸 의도하고 하는 행동은 아니겠지만.’


동료 승무원과 승객들에게 나눠줄 간식 카트를 준비하며, 아카아시는 그의 손님이 있는 좌석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근처를 오가는 사람조차 없어 가려둔 커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요번에는 일찍 주무시네요.”


본래는 손님이 언제 자는지 깨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까지 떠들 리가 없지만 저 손님은 특별하고 또 유별나다. 이렇게 집약적인 일등석 탑승객, 승무원 중 한 사람만 해바라기 마냥 바라면서 다른 승무원들에겐 놀랄 만큼 무심하고 산뜻한 태도에 번듯한 외모와 체격 그리고 암암리에 알려진 집안까지 더해지면 모두가 한 번씩은 오며가며 떠들게 되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남자가 올라탔던 다른 비행을 떠올리고는 묵묵히 정리를 돕기만 했다. 이륙 시간이 제각각이었지만 워낙 자주 비행기를 탄 터라 얼추 가늠은 되었다. 


‘피곤한가?’


낮 열두시에 출발하는 비행기인데 벌써 곯아떨어질 만큼 피곤한 걸까, 아카아시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커튼이 차르르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카아시 맞은편에서 카트에 물품을 챙겨 넣던 승무원이 먼저 웃으며 아카아시의 뒤쪽으로 턱짓했다. A1석의 커튼이 열려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손짓도 보였다. 아카아시가 한숨을 내쉬며, 그 한숨 안으로 웃음을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승객 여러분, 이 항공기는 잠시 뒤 난기류를 통과할 예정입니다. 착석하셔서 좌석 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좌석 벨트 사인이 꺼질 때까지…….


안내 방송을 마친 아카아시는 비행기가 흔들릴 조짐을 느끼며 A1석 쪽을 바라보았다. 좌석의 남자는 자다 깨다 하기를 반복했는데 지금은 잠을 자는 중인 것 같았다. 승무원들이 지정된 자리에 자리 잡고 앉는 동안 아카아시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A1석을 향해 다가갔다.


“손님. 손님.”


그가 덮어주었던 이불을 걷어낸 아카아시는 몇 번 남자를 깨우는 시늉만 하고서는 남자의 허리 뒤로 손을 돌려 좌석벨트를 찾아냈다. 금방 답답하다고 풀어놓은 것이었다. 아주 꽉 죄지 않을 정도로 길이를 조정하고 다시 좌석벨트를 채우는 사이에도 남자는 깨지 않았다. 


다만 잠결이겠으나 그의 팔이 아카아시의 어깨를 스쳐 목을 끌어안았다.


“…….”

“으응, 아카아시…….”


자다 일어난 어린애마냥 손이 뜨끈해 스치는 목에 열기가 옮겨붙는 느낌이었다. 아카아시는 그 팔을 부드럽게 풀어 남자의 자리에 곱게 정리해주고는 다시 이불을 덮어주었다. 


난기류는 그의 마음에 든 것인가, 아카아시는 팔을 등 뒤로 뻗어 커튼을 끝까지 쳐두고서는 살짝 몸을 숙였다. 


어둑한 기내 안, 비상등의 조명만이 불빛의 전부인 순간 가장자리가 뭉그러진 그림자가 살짝 겹쳤다 떨어졌다. 



*



“그럼 사무장님, 아카아시~! 이따 또 만나!”

“안녕히 가십시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사무장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그리며 쾌활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야 귀국할 때에도 같은 비행기를 이용하게 될 테니 또 만날 것이겠지만 저 말을 마치 이웃집 친구와 인사하는 양 말하는 남자의 천진한 목소리가 제법 애교 있었던 탓이었다.


“저만큼 솔직한 사람도 드물어~!”


사무장이 은근한 내심을 담아 옆에 서 있는 승무원을 바라보았다. 열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저 남자를 전담했던 아카아시가 선배 후배 가릴 것 없이 머리채를 잡아버릴지도 모른다는 표정이 되었을 때야 사무장이 헛기침을 했다. 


“손님과 연애는 금지였지 않습니까?”

“뭐 몰래 하는 거지…….”

“사무장이 할 말입니까, 그게…….”


아카아시의 핀잔에 사무장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기내로 돌아간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내젓고 사무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비행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짐과 승객들을 모두 내리고, 비행기를 한 번 모두 둘러본 뒤 승무원들도 비행기에서 내려선다. 입국심사를 통과하고 숙소로 향하는 길에 올랐을 때야 아카아시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열었다. 읽지 않은 메세지가 서너 개쯤 되고, 아카아시는 그 중에 제일 위에 올라와 있는 메세지를 눌렀다. 메세지 수신 시간은 30분 전이었다. 


B.K : 아카아시 요기 하야트 603호!


아카아시는 하얏트 호텔의 위치와 자신의 숙소 위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다 한숨을 내쉬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론가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와 함께 형체가 점점 떠오르다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멀잖아요 거기

B.K : 여기가 좋다나봐……

잠이나 좀 주무시고 계세요

무리한 거 아니에요?

B.K : 그렇게 무리한 건 아닌데

B.K : 티났어?

기내에서 내내 잠만 자는데 티나죠

B.K : 이번에 아카아시네 회사가 완전 뒤통수쳤단 말야

B.K : 그거 수습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러니까 항공사 바꾸랬잖아요 

B.K : 또또

B.K : 아카아시두 괜히 좋으면서

B.K : 괜히 그런말 한다~!



힘들었으면 얌전히 집에서 쉴 일이지 굳이 자신의 비행 일정에 맞춰 비행기에 탈거라고 고집을 부리나, 아카아시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연인이 사랑스레 미워서 휴대전화만 노려보다가 액정의 빛을 꺼뜨렸다. 


곧 폭풍 같은 메세지 알람이 오기 시작하고 동료 승무원이 불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볼 때에야 아카아시는 한숨과 함께 다시 휴대전화를 손에 쥐었다. 


한시도 내버려둘 수가 없기로는 하늘 위나 지상이나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아카아시가 승무원




>>>










오늘도 하늘 위에서 벨이 울린다. 


*


승무원은 사람들이 작은 짐가방을 들고 걸어오는 모습이 언뜻 비친 통로를 확인하며 탑승구 쪽을 바라보고 옷깃을 바로 했다. 그와 가까운 사람이라면 알아볼 수 있는 피로가 붙어있는 눈매였다. 아니나다를까 곁에 선 사무장이 그 얼굴을 보곤 짓궂은 표정으로 조그맣게 웃어주었다. 


지금 탑승을 시작한 승객들은  일등석과 비즈니스클래스 쪽의 승객들이었다. 승객들이라고는 해도 이번 비행의 일등석 승객은 세 명이 전부인지라, 복도에 모습을 비춘 것도 두 사람 뿐이었다. 그리고 그 둘 중에 앞서서 경쾌하게 걸어오고 있는 남자가 있다. 옆에서 누가 기웃거리기라도 하면 10년은 알아온 친구 대하듯 인사를 할 것같은 얼굴이었다.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승무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끝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아-카-아-시!”

“…….”

“……크흠, 탑승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번 비행의…….”


사무장은 아무리 봐도 이쪽엔 도통 관심이 없는 승객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그렸다. 그래도 인사를 도중에 관둘 수는 없으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무리짓고 조용히 곁에 선 승무원을 바라보았다. 승무원은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 얼굴 위에 선명히 드러나있었지만 상사의 눈총에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탑승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번 비행에서 A1석부터…….”

“아카아시, 아카아시~! 잘 지냈어? 오랜만이지!”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손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뒤에 다른 손님이.”

“앗…….”


뒤쪽에 선 다른 탑승객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란 말을 했다고 생의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들은 듯이 어깨가 축 처져서 안으로 들어가는 비행기 탑승객을 또 보기란 어려운 일일 터였다. 


두 번째 탑승객도 무사히 환대를 마치고 아직 오지 않은 세 번째 탑승객을 기다리고 있을 때, 객석 쪽에서 다른 승무원 한 사람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사무장이 어련하겠는가 하는 표정으로 곁에 선 승무원을 향해 고갯짓했다.


“아카아시 씨, 들어가봐.”

“아직 다른 한 분이…….”

“그건 유코 씨 부를테니까.”

“하지만.”

“VIP잖아. 진상 피우는 것도 아닌데 잘 좀 해줘.”


순간 승무원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변했지만 사무장은 눈동자를 굴리며 안 보이는 척, 안 들리는 척 딴청을 피웠다. 자신이 이 승무원의 상사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친구였다면 숱이 얼마 남지도 않은 머리채를 잡혔을지도 모른다. 


결국 승무원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몸을 돌리자마자 곤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다른 승무원, 유코가 반색하며 그를 환영했다. 


“아카아시 씨, 얼른 들어가봐. 엄청 시무룩해지셔서…….”

“…….”


지금껏 사무장과 대치하던 승무원, 아카아시 케이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유코는 그런 아카아시를 보고서도 모르는 표정을 짓고는 사무장 곁으로 가 탑승객을 기다린다. 아카아시는 미련이 한껏 남은 표정으로 탑승구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일등석 캐빈(cabin)으로 향했다. 


아카아시가 승무원으로 오르는 비행기의 A1, 창가 자리엔 언제나 한 사람이 있다. 물론 아닐 때도 있다. 당일 왕복이 끝나는 홍콩행 같은 경우엔 그가 없는 날이 더 많다. 하지만 오늘처럼 프랑크푸르트나 런던, 시드니 등 열 시간 이상의 장기 비행을 할 때면 항상 그가 있었다. 


‘VIP? VIP긴 하지, 한달에 열 번을 일등석을 타는데.’


비행 시간이 열 시간이 넘어가는 일등석 티켓은 왕복에 150만엔쯤 된다. 다섯 곳만 오가도 700만엔이 훌쩍이다. 이런 손님이 VIP지 무엇이겠나? 그리고 비행기에서 일등석 손님이란 교양과 양식있는 신과도 같다. 


그리고 저 손님은 사무장의 말대로 그다지 피곤하게 굴지 않고, 도리어 좋은 손님인 축이었다. 키 크고 잘생겼으며 몸도 좋고 돈도 많은데 덩치에 어울리지 않을만큼 사랑스러운 애교도 있다. ‘손님 점수표’같은 게 있다면 승무원들이 모두 10점 만점에 12점을 주었을 법한 손님이었다. 아카아시만 제외하고. 


“……손님, 겉옷 걸어드릴까요.”

“아카아시!”


시트에 푹 퍼지듯 누워서는 창밖만 보고 있던 남자가 화르륵 몸을 일으킨다. 아카아시는 최대한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가 헛기침 몇 번으로 표정을 정리하곤 겉옷을 벗어서 아카아시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륙까지는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하는데, 마실 것과 간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가져다 드릴까요?”

“아카아신 아침 먹었어?”

“……저는 먹었습니다. 손님께서…….”

“아카아시 먹었으면 나도 됐어~!”


싱글싱글 웃는 금빛 눈동자가 그를 바라본다. 아카아시는 그 어떤 손님 앞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다른 짐은 없으십니까? 말씀해주시면…….”

“없어, 탈 때 보냈어!”


그러셨겠죠.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단정한 표정으로 남자를 주시하다 허리를 폈다.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그럼 이…….”

“앗, 아, 아! 아카아시이이~!”


‘이만’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소리가 쭉 늘어진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한 번 꽉 깨물었다가 펴고는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남자가 수줍은 듯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아카아시는 이것이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틀어질 전조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차마 입을 다물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잠자코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남자가 속삭이듯 손을 모은다. 아카아시는 몸을 숙이고 남자의 말에 귀기울였다.


“저기, 아카아시…….”

“예.”

“엉덩이 한 번만 만지게 해주면 안 돼?”

“……손님.”


아카아시는 이 상황에서 도리어 미소를 짓고 만 자기자신을 독려하며 남자의 금빛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등석에 제공되는 식기는 쇠로 만든 커틀러리 세트라는 걸 아십니까?”

“그…….”

“물론 아시겠죠. 이번 달에만 세 번째 탑승이시니까요. 그 나이프는 고기도 부드럽게 자르죠.”

“그, 그렇……죠…….”

“그렇겠지요? 이륙 전까지 간단한 간식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뒤에서 남자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카아시는 깨끗히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


자신의 근무 일정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아카아시는 당장 사무장을 찾아가 언성을 높이고 대치했지만 사무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직원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힘쓰지는 않았다. 높으신 분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고, 이번 달에도 보너스를 챙겨주겠다는 말이 전부였다. 


아카아시는 그 자리에서 사무장의 책상을 엎어버리려고 했지만 사무장이 잽싸게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침중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서고 말았었다. 


그야 그럴 것이, 항공사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상대는 일등석과 비즈니스 클래스 탑승 고객이다. 그 상황에서 한달에 최소 다섯 번 이상 일등석에 올라타는 손님에게 지극한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 손님의 목적은 단 하나, 승무원 아카아시 케이지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사실을 알았을 때 아카아시가 노발대발 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직원을 팔아서 고객을 유치할 생각을 하느냐고 아카아시가 목소리를 높여도 돌아오는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업무 시프트가 새어나갈리가 없다는 진심어린 부정이 당연히 첫번째였는데, 그 주장은 그 손님이 벌써 여섯차례 아카아시가 탑승하는 비행기만 골라 탔다는 사실로 인해 무산되었다. 그 다음에는 윗선에서 알아가는 것 같다는 변명이 나왔고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변명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무엇도 수리되지 않은 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손님, 빵과 마실 걸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카아시도 먹을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괜찮습니다…….”


사양의 말을 한 뒤 테이블에 테이블 보를 깔고서 빵과 음료를 올린 아카아시는, 야무지게 빵을 먹어치우는 남자를 아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웅? 아카아시?”


그의 저돌적인 호감 표시는, 그 표정만은 천진한 어린애 같은데 얼굴을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한 달에 700만엔을 하늘 위에 흩뿌리는 자금력과 그 만나고 싶은 사람의 업무 일정표를 기어코 손에 넣는 집념에 내키는 대로 해외를 들락거릴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 운용이 더해져 실로 무시무시한 박력이 있다. 


“손님.”

“응! 이거 먹을래? 이 빵 되게 맛있다. 얼마 전에 광고 봤거든, 프랑스 어디 버터만 쓰는 거라고 했지? 우리 빵도 여기로 바꾸라고 할까.”

“예, 빵도 바꾸시고 손님 항공사도 바꾸심이 어떠하신지요.”

“에…….”


그리고 이 남자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하나, 아카아시가 근무 중인 항공사와 경쟁 관계에 있는 항공사 오너의 하나 있는 장손이기 때문이다. 


아카아시가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또 다른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집안이 비행기를 굴려 먹고 사는데 왜 남의 회사 비행기를 자꾸 오르려 드는가? 심지어 저 남자는 전용기도 따로 있었다. 그런데 매번, 굳이, 아카아시가 일을 하는 일정에 항공기를 골라 타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하나다. 


아카아시를 만나기 위해서. 


“아카아시, 이직하게? 우리 회사 올 거야?”


남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아카아시는 목구멍으로 솟아오르는 울화를 꾹 눌렀다.


“개소……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네요. 제 말은, 이렇게 이동 시간이 기니 보다 심신에 편한 쪽을 이용하셔서 손님의 안위에…….”

“내 심신이 이거 좋대서 타는 건데.”

“안 좋습니다.”

“내, 내가 좋다니까?”

“안 좋다니까요.”

“아 진짜! 아카아시!”


남자가 체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응석부리는 투로 말을 했지만 아카아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이기도 했다.


“곧 있으면 이륙할테니 테이블을 정리하겠습니다.”


반이나 남은 빵과 음료를 모두 치우고 테이블보까지 접어버리자 남자가 또다시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카아시는 턱을 세우곤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매섭게 등을 돌렸다.








안/예/은의 미스/터미스터/리를 듣고 썼습니다~! 

배구선수 보쿠토x첩보요원 아카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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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보쿠토는 푹 젖은 셔츠를 쭉 당겨 짜며 툴툴거렸다. 잠깐 집 앞의 편의점에 갔다 올 생각이었는데 손에 비닐봉투를 달랑거리며 편의점 문을 나서자마자 빗방울이 투툭 떨어지다가, 갑자기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온 몸이 쫄딱 젖어버린 뒤였다. 


괜히 부지런을 떨었다고 후회를 해도 이미 늦었다. 곧장 마시려고 했던 맥주는 조금 더 기다려야 겠다. 보쿠토는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투를 시무룩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이 꼴로는 샤워가 먼저였다. 


“어!”


머리도 한 번 털고 안으로 터덜터덜 들어가는데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있었다. 보쿠토는 눈을 크게 뜨고는 반가운 표정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남자는 그도 한 번 본 일이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에 옆집으로 이사 온 바로 그 사람이다. 


“앗! 잠깐만요!”


꼿꼿한 자세로 서 있던 검은 머리 남자가 보쿠토를 보더니 엘리베이터 안, 버튼이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곧장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어어, 어……감사……어?”


보쿠토가 당황하며 달려왔을 땐 이미 눈앞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깨끗이 닫힌 뒤였다. 보쿠토가 문을 쾅쾅 두드렸지만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가기만 한다. 위쪽 액정의 숫자가 무정하게도 바뀌어갔다. ‘1’이었던 것이 곧장 2, 3, 4……. 마침내 14까지 올라가고 나서야 멈춘다.


얼빠진 얼굴로 닫힌 문을 쳐다보기만 하던 보쿠토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댔다. 하지만 아무리 요란하게 눌러도 엘리베이터 위의 숫자는 ‘14’에서 도통 내려올 줄을 몰랐다. 영원히 거기에 있을 작정인 것 같았다. 이쯤 되니 기가 막히기까지 한다. 보쿠토는 열을 내고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갑작스러운 폭우에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요란한 빗소리만이 그를 조롱할 뿐이었다. 


“뭔데 이거?”


편의점에 갔다 오는 것뿐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폭우가 쏟아져 그를 쫄딱 젖게 만들더니 이웃집 남자는 그를 보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고 그렇게 올라간 엘리베이터는 내려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우주의 무엇인가가 그를 놀리려고 날을 잡고 찾아온 게 아니면 이럴 수 없지 않나? 차마 계단을 걸어 올라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멍하니 엘리베이터만 쳐다보는데 경비원이 우산을 쓰고 달려왔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 같으니 수리기사를 불러야겠다는 것이었다. 


보쿠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여전히 ‘14’에 고정되어 있는 엘리베이터를 흘끗 본 뒤에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


쿵! 


시즌이 끝나고 한동안은 자유의 몸인지라, 보쿠토는 방탕한 자세로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맥주 캔을 홀짝이고 있었다. TV에서는 개봉한지 십년은 더 된 액션 영화를 해주고 있었다. 그 때 들린 것이다, 정체불명의 울림소리가. 


보쿠토는 조용히 맥주 캔을 내려놓고 TV의 볼륨을 낮췄다. 세계를 구원할 사명을 가진 스파이는 소리 없이 입만 빵긋대기 시작한다. 보쿠토는 소파에서 일어나 소파와 벽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며칠 전에 이미 소파를 조금 당겨놓았기에 무리 없이 몸이 들어갔다. 보쿠토는 숨을 죽이고 벽에 귀를 갖다 댔다. 


‘뭐야, 뭐지?’


이 옆집에는 그의 눈앞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아버린 바로 그 남자가 살고 있었다. 문 앞에서 엘리베이터가 닫혔던 그 날 있었던 유일하게 좋은 일이라곤 어떤 잡지 회사에서 응모권에 당첨됐다며 파자마를 선물해주겠다는 연락이 온 게 전부였다.


그 뒤로 보쿠토는 옆집 남자를 생각하며 만나기만 해봐라, 하고서 이를 갈고 있었는데 생각만큼 쉽게 상대를 만날 수는 없었다. 남들 출퇴근 시간에도 코빼기 하나 비추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두문불출하는 건가, 했지만 보쿠토는 몇 번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옆집 문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검은 정장의 끄트머리를. 인기척에 돌아보는 눈매는 길고 매끄러웠고 안의 청록색 눈동자는 얄팍했다. 옆집 남자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아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의 코끝을 스치던 묘한 냄새. 시트러스가 섞인 비냄새 아래에 묵직이 가라앉아서 정체를 감추고 있는 화약 냄새. 


보쿠토가 그 냄새를 알아채고 몸을 휙 돌렸을 때 옆집은 이미 문이 닫히고 난 뒤였다. 이쯤 되니 대단히 수상쩍다는 생각이 든다. 보쿠토가 쫄딱 젖은 채로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던 그 날에도 그 남자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비 한 방울 묻지 않은, 깨끗하게 날이 서 있는 양복을. 


밤이나 낮이나 규칙성 없는 소음이 종종 들려왔고 그 때마다 보쿠토는 숨을 죽이고 다음 소리를 기다렸지만 연이어 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몇 번 쿵쾅거리기라도 하면 그 핑계를 대고서 옆집에 쳐들어가보기라도 할 텐데 그럴 수도 없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보쿠토가 계속 숨을 죽인 채 벽에 귀를 바싹 대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매번 이렇다. 보쿠토가 실망에 휩싸여 벽에서 귀를 떼려고 할 때였다.


‘어엇!’


달칵하고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건 정확히 말해 벽을 통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집 현관문 근처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옆집 남자가 문을 열고 외출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보쿠토는 현관으로 튀어나갔다. 하지만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현관문에 달려있는 렌즈에 눈을 대기만 했다.


한밤중인데도 복도는 센서 등이 켜져 환했다. 옆집 문이 열렸다 닫히는 것 같았다. 옆집 남자는 이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각이 잡힌 정장을 걸치고 있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남자가 보쿠토의 집 앞을 지나갈 때였다. 


“!”


남자가 보쿠토의 현관문을 흘끗 보고는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대고서는, 웃는 듯 아닌 듯 미묘한 표정만 남겨놓고 미끄러지듯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마치 렌즈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보쿠토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


“야, 옆집이 말야…….”


세 명은 이미 죽었고, 살아있는 것도 세 명 뿐이었지만 그 중에 제정신을 챙기고 있는 건 둘 뿐이었다. 한 명은 술을 더 마시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기어코 탄산음료를 엎었다. 코노하가 막말을 섞어 욕을 하고서 그를 밀쳐두고는 엎어진 걸 치우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 보쿠토, 뭐라고 했냐?”

“코노하, 옆집이 말야……. 내, 내 이야기는 아니고.”


더 마시겠다고 떼를 쓰던 동기의 뒷목을 쳐서 밀어놓은 코노하는 빈 잔에 생수를 채워 왔다. 


보쿠토가 선수 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로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이렇게 거나하게 모임을 갖는 건 시즌이 끝나고 난 뒤가 되었다. 대개는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모여서 내일을 맡겨놓은 것처럼 죽자고 먹어대는 모임이었다. 도무지 갱신되는 법이 없는, 보쿠토의 고루한 취향에 맞춘 오래된 액션 영화를 보는 것은 덤이다. 


코노하는 보쿠토 앞에 잔을 놓아주고는 엎어져 죽어 있는 친구를 밀어내고 앉았다. 보쿠토는 심각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내 얘기는 아니고 내 친구 얘긴데 옆집이…….”


코노하는 여기서 ‘네가 우리 말고 친구가 있냐?’라고 한 마디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옆집이?”

“옆집이 그 뭐냐……. 얼마 전에 옆집에 사람이 이사 왔는데. 옆집 남자가 첩보 요원 같아. 어떡하냐, 그럼?”

“에…….”


코노하의 눈가가 떨떠름하게 변했다. 이 나이 먹고 터무니없는 소리하는 걸 들으면 대개들 짓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보쿠토는 그런 코노하의 얼굴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서 진중한 얼굴이었다.


“막……. 하여튼 막 무슨 요원인 거 같은데! 무슨 비밀 임무 중인 것도 같고! 어떡, 어떡하지?”

“뭘 어떡해……. 알아서 먹고 살게 냅둬.”

“야! 막 무슨 위험한 임무면 어떡하냐고!”

“생명 수당 받겠지…….”

“아 진짜 코노하! 그 쪽 말고 나 말야! 내가 어떡하냐고!”

“친구 얘기라며.”

“아.”


보쿠토가 서둘러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건 그의 학창시절 버릇과 달라진 게 없었다. 코노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생수를 들이켰다. 보쿠토가 참선하는 표정이 되어 진지하게 말을 고쳤다.


“사실 지금 우리 옆집이…….”

“날고 기는 요원님이 뭐가 아쉬워서 너희 집 옆집에 오냐.”


보쿠토의 눈이 동그랗게 변해서는 꿈벅거린다. 듣고 보니 그렇다는 얼굴이다. 코노하는 혀를 끌끌 찼다. 


“왜 무슨 첩보 요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유를 들어나 보자.”

“아니 그게……. 왜 얼마 전에 비 엄청 쏟아졌던 날 있잖아, 갑자기.”

“아아.”

“편의점 가서 맥주랑 우마이봉 사들고 왔는데 비를 쫄딱 맞았거든. 그래서 막 아파트 입구에서 물 짜고 난리를 쳐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더니 옆집 남자가 있는 거 아냐.”

“아하.”

“옆집 사람이 엘레베이터를 타고 있었는데……. 내가 잠깐만요! 하면서 뛰어갔거든.”

“으응.”

“그런데 그대로 문을 닫아버리는 거야! 내 눈앞에서!”

“…….”

“진짜 내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가지고, 내가 뛰어오는 걸 빤히 보면서 닫아버리더라니까?”

“……그래서 첩보 요원이라고?”

“아, 아니. 그건 아니고. 하여튼 너무 기막히잖아. 내가 그래서 만나기만 하면 한 소리 할 거라고 딱 별렀단 말이지.”


보쿠토는 그렇게 말하며 또 속이 답답한지 코노하가 가져온 생수를 쭉 들이켰다. 코노하는 딱히 감정도 애정도 영혼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맞장구를 쳐주기만 했지만 보쿠토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근데 진짜 코빼기도 모습을 비추질 않아요! 말이 되냐 이게? 사람들 왔다 갔다 하는 시간엔 절대 안 나와. 한밤중에나 슬쩍 나오는 거 같고…….”

“일이 밤에 하는 건가보지.”

“근데 맨날 정장만 입고!”

“회사 내규가 그런갑지.”

“화약 냄새가 났다고!” 

“향수 냄새를 네가 잘못 맡은 거 아냐?”

“…….”


보쿠토가 뭐라고 항변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천천히 다물었다. 어깨가 축 늘어진다. 주장하는 모든 문장을 후려친 코노하는 마지막 삼진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곤 보쿠토가 말하는 옆집이 있다는 벽을 톡톡 두드렸다. 보쿠토가 깜짝 놀라서 코노하의 손을 낚아챘다. 코노하가 손가락 다 부러지겠다고 한참이나 엄살을 부리고 나서야 보쿠토는 그 손을 놓아주었다. 


“옆집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데.”

“키는 나보다 쬐끔 작나? 180은 넘은 거 같고……. 머리는 까만색이고 눈썹도 까맣고……. 눈매는 이렇게 가늘고 청록색 눈동자인데…….”

“아니 한 번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다면서 왜 이렇게 잘 알아.”

“뭘 잘 알아. 그리고 보긴 봤다고 했잖아.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 봤다니까.”

“보통……. 아니다, 아냐. 여튼 그래서 이 옆집에 요원님이 사신다고? 경호나 해달라고 해라. 너 요새 무슨 스토커 하나 붙었다며.”

“요즘은 안 보이는데다가 무슨 경호를 해 달라고 하냐. 인사도 한 번 안 해봤는데.”


보쿠토는 상기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코노하는 보쿠토의 그 고전적인 영화 취향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보쿠토는 지금 이 상황이 영화의 도입부쯤 되는 걸로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 인사를 하러 가면 되겠네.”

“……엥?”

“옆집 사람이라며.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댔지? 인사나 한 번 해. 우리 또래 남자야?”

“어, 아마도…….”

“이웃도 됐는데 맥주 한잔 합시다~! 하면 되지.”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 이런 게 통할 리야 없겠지만, 전국의 전광판과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고 있는 보쿠토 코타로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본토에 발 디디고 사는 사람이라면 어디에서건 한 번은 보쿠토의 얼굴을 봤을 것이다. 대단히 뛰어난 배구선수이자 그 수려한 피지컬과 마스크를 십분 활용에 광고를 몇 개나 찍어댔는데 그의 얼굴과 신분을 모르는 쪽이 더 이상하다.


“그, 그러면 되려나?”


그나저나 그 스파이인지 첩보 요원인지 하는 이웃 남자가 도대체 얼마나 어떻게 생겼길래 이 자식이 이 난리람, 코노하는 들뜬 것이 분명한 보쿠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술에 취해 뻗은 친구들을 수습하려면 이런 것에까지 기력을 낭비할 수 없었다. 


보쿠토는 벌써 옆집 사람과 한잔 마주치는 생각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


“안녕하세요, 옆집인데요~! ……는 너무 어색한가?”


보쿠토는 거울 앞에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자기 자신을 노려보았다. 현관에는 맥주 두 캔과 성심을 다해 고른 우마이봉 세트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나서려다가 긴장이 돼서 그만 다시 화장실로 뛰어 들어온 보쿠토였다. 대사 몇 가지를 이리저리 조합해보던 보쿠토는 일단 부딪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늘은 밤이 됐는데도 옆집 남자가 나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쉬는 날인 것 같았다. 몇 차례 쿵, 쿵 하는 정체 모를 소음이 났기에 확신하는 바였다. 보쿠토는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한 맥주캔과 안주용 과자를 챙겨들고는 집을 나섰다. 문을 열자 복도의 센서등에 불이 들어왔다. 


‘어?’


옆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평소와 달리 옆집 문이 반 뼘 정도 열려 있었다. 보쿠토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은 조용히 자신의 현관문을 닫았다. 


‘왜 문을 열어뒀지? 더워서 그런가?’


에어컨이 고장난걸까? 보쿠토는 고개를 갸웃하며 옆집 문 앞에 섰다.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건 자신이 긴장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왜인지 노크를 하기도, 초인종을 누르기도 망설여진 보쿠토는 슬쩍 현관문을 당겨 조금만 더 열어보았다. 


내부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삭막한 풍경이었다. 누군가가 이사를 온 집이라기보다는 이사를 올 집인 것 같다. 사람이 없는 것처럼 컴컴했고 현관에는 신발 하나도 나와있는 게 없었다. 현관에서부터 이어진 바닥의 묘한 먼지 자국은 구둣자국인 것 같았다.


“어, 저기요……?”


여기만 뭔가 지독하게 조용하지 않아? 보쿠토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보쿠토가 목소리를 내보았지만 응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보쿠토가 안으로 들어온 순간 현관의 센서등이 팟 하고 빛을 발했고 그 때 보쿠토는 어둠에 가리워져 있던 모든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거실의 소파를 사이에 두고 다섯인지 여섯인지 혹은 열인지,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모두 새카만 정장에 구두를 신고 있다. 실내 바닥의 구둣발 자국은 모두 저 사람들이 낸 것 같았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그들은 모두 서로를 향해 양팔을 뻗고 있었다. 손에는 무엇인가를 쥔 채.


“어……. 옆집, 저기 옆집에서 왔는데.”


그 다섯인지 여섯인지 열인지 그 이상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한 순간에 보쿠토를 돌아본다. 총구의 끝이 차르르 그를 향할 때 보쿠토는 눈을 한 번 꿈벅였고 그들 사이에서 옆집 남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옆집 남자는 여전히 새카만 정장에 흰 셔츠, 그리고 꼭 자기 눈같은 푸른색 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도 총이.


보쿠토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그가 들고 있던 맥주가 타앙,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그 순간 모든 일이 시작되어버렸다.


*


그 뒤부터는 모든 게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가 ‘보쿠토 씨!’라고 소리쳤는데 아마도 옆집 남자가 그를 부른 것 같았다.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소파에 있던 쿠션 하나가 허공으로 떠올라 터지며 흰 솜을 뿜어낸다. 그와 동시에 탕탕탕 하는 총성이 정신없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쨍그랑 하고 유리창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고 천장이 갑자기 닿을 듯이 가까워지는 것도 같았다. 소파와 쿠션, 종이컵 더미가 마치 만국기 마술처럼 허공을 요란하게 오갔고 그 사이 사이를 총알이 마음껏 누볐다. 


귀가 먹먹하게 울리는 소리, 몸이 어딘가 요란히 부딪히는 것 같은 감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꼭 감고 있던 보쿠토는 이윽고 주위가 죽을만큼 조용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웅웅 울리는 듯이 먹먹하기만 한 귀에 다른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 때였다. 


‘심장 소리……?’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하고 보쿠토가 겨우 눈을 꿈벅거릴 때 그 심장소리도 멀어졌다. 보쿠토는 자신이 누군가의 가슴팍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는 걸 그 때야 알아보았다.


“다친 덴 없으십니까?”

“아…….”


실내는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여기저기에 도대체 언제 들어선 것인지 모를 간이 전구가 빛을 밝히고 있는데 온 벽에 다 총구멍이 나 있고 바닥엔 터진 패브릭과 솜이 천지로 돌아다녔다. 있는 유리란 유리는 전부 다 깨져서 찬란할 만큼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그 사이에 붉은 자국들을 보고서 정신이 번쩍 든 보쿠토가 입을 딱 벌렸지만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옆집 남자는 팔뚝을 걷고 있었다. 옆에는 또 처음 보는 사람이 붙어서 그의 팔에 거즈를 붙여주고 있다. 옆집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치료해주는 사람은 가차 없었다. 그의 처치가 끝나자 다른 사람에게로 향한다. 그 뒤로 모르는 사람이 서너 명 더 들어와 실내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보쿠토는 입을 버끔거리며 그 모든 걸 쳐다보기만 했다.


“보쿠토 씨. 다친 덴 없습니까?”

“어, 어, 없는데……. 나는,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듣고 본 건 뭐였지? 자신이 이 집에 들어왔을 땐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실내에 남아있는, 정장을 걸친 사람들은 몇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남은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이며 이건 무슨 일이고 내 맥주와 우마이봉은…….


“아…….”


때마침 실내를 청소하던 사람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던, 형상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인 캔을 집어 들었다. 안에서부터 황금빛 투명한 액체가 자르르 흘러나온다. 보쿠토가 들고 왔던 맥주캔이었다. 같이 있던 다른 것들은 문자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이게……. 당신은…….”

“유감스럽지만.”


옆집 남자는 담백한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팔뚝의 상처에서 흘렀던 피가 뚝 하고 바닥에 떨어져서 보쿠토가 퍼드득 놀랐다. 


“덕분에 작전 본부가 엉망이 됐으니 신세지겠습니다.”

“자, 작전 본부?”

“그리고 봐선 안 되는 걸 보셨기 때문에 한동안은 24시간 풀타임 감시가 있겠습니다. 불편하셔도 참아주세요.”

“아, 아니, 저기요! 저기!”


자기 할 말만 뱉은 남자가 옆을 지나가는 다른 사람에게서 서류가방 하나를 받아들더니 척척 걸어간다. 정말 당장 자신의 집으로 가버릴 기세였던지라 보쿠토는 허둥지둥 남자를 따라나섰다.


“아니, 이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아니 그보다 우리 집에 간다고!? 왜!? 왜!”

“말씀드렸다시피 덕분에 여기가 엉망이 됐으니까요.”

“아, 아니 그게 왜 나 때문인데! 니네들이 총질을 해서! 아씨, 진짜 주, 죽는 줄 알았네!”

“보쿠토 씨가 들어오는 바람에 총격전이 됐잖습니까. 서로 견제만 하고 끝낼 수 있었는데도 말이죠. 오지 말라고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

“누, 눈치를 줘!? 언제!? 아니 저기 우리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남들이 봤으면 영락없이 야근하고서 자택으로 돌아온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누르곤 안으로 들어간다. 보쿠토가 혼비백산했지만 옆집 남자는 거침이 없었다. 


“생일로 현관 비밀번호는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것 아닙니까. 웬만하면 바꾸세요.”

“생일!? 내 생일도 알아!? 다, 당신 누군데! 누구야!”


옆에서 보쿠토가 꽥꽥거려도 남자는 시종일관 흔들림 없는 표정이었다. 따라 들어온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더니 서류에는 무언가를 기입하고 서명까지 해서 넘겼다. 그것을 서너 번쯤 반복하고서 마침내 단 둘이 남았을 때야 옆집 남자가 보쿠토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안 해! 잘 부탁 안 해! 안 한다고!”

“그럼 저는 피곤해서 먼저 자겠습니다.”


하지만 보쿠토가 어떻게든 해보기 위해 말을 찾아 헤매는 사이에, 아카아시라고 이름을 밝힌 옆집 남자는 그대로 보쿠토의 침실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한 점 망설임도 없는 것이 처음부터 침실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 내 침대거든!”

“보쿠토 씨도 여기서 주무시던가요.”


보쿠토가 요란하게 따라 들어갔을 때 아카아시는 이미 양복을 벗고 파자마 차림이었다.


“그거 그 파자마 내가 이번에 이벤트 당첨됐던 건데! 아직 개시도 안 한 건데!”

“저희가 당첨시켜드린 겁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그대로 침대에 들어가더니 베개 하나는 자신이 베고 하나는 끌어안고서 눈을 감는다. 보쿠토는 몇 번 더 이 말도 안 되는 폭거에 대해 소리치다가 그만 남자가 정말 자는 듯 보이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결국 침대만 몇 번이나 뱅뱅 돌다가 침대로 기어들어온 보쿠토는 머리에 아무 것도 베지 못한 채 눈만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이었다. 옆자리에 옆집 남자가 누워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는 것 같은데 옆집 남자는 남의 집에서 잘도 잔다. 보쿠토는 마음속으로 네 번쯤 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를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옆집도 조용해지고 이 침실마저 보쿠토의 쌕쌕하는 숨소리만 남았을 때, 보쿠토의 옆집 남자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묘한 웃음기가 있다. 


—옥상에서부터 내려오던 잔챙이 둘도 치웠어. 케이지, 거기서 잘 거야?


남자는 귓속에서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고서 자신이 안고 있던 베개를 보쿠토의 머리 아래에 넣어주었다. 


—그 사람 스토커는 잘 훈계해서 내보냈어.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라더라.

“누가?”

—쿠로가. 

“다행이군.”

—그쪽을 본부로 쓸 거면 짐 보낼게. 내일쯤 갈거야.

“응, 부탁해. 켄마.”

—통신 종료.


남자, 아카아시는 귓속의 목소리가 ‘통신 종료’를 말하자 이어피스를 빼냈다. 구름이 걷히고 침실에 달빛이 들이찼다. 아카아시는 이불을 걷어차는 이웃 남자를 보며 고개를 내젓고는 그가 걷어찬 이불을 덮고서 잠에 빠져들었다.


***


“켄마. 왜 닫았어?”


아카아시는 몸을 세우며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바라보았다. 금방 2가 되었다가 곧 3, 4, 5, 그렇게 차례대로 숫자가 커졌다. 


승강기 안에는 아카아시뿐이었지만 아카아시의 혼잣말에 대한 대꾸는 그의 귓속에서 울려 퍼졌다.


—호기심 넘치는 사람이야. 너무 친해지면 곤란해.

“그렇긴 한데…….”

—아무리 네가 그 사람 팬이라도.

“그래서 한 말은 아냐.”


아카아시는 엘리베이터의 벽에 몸을 기대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열림 버튼을 눌렀는데 엘리베이터의 문은 그가 닫힘 버튼을 누른 것 마냥 단호하게 닫혔고, 아카아시가 마지막으로 본 건 황망한 보쿠토의 눈동자였다. 누군가가 강제로 닫았다면 지금 상황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다. 


—무보수 호위까지 해주는 건 팬이라서, 아니야? ……그 사람 편지함에 있던 건?

“수거했어.”


아카아시는 등 뒤로 돌린 채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앞으로 돌려 살펴보았다. 보쿠토에게 붙었다는 악질 스토커가 매번 보내는 것이었다. 무게감과 냄새를 살펴봤을 때 죽은 쥐 같은 걸 넣어둔 것 같다. 


“추적해줘.”

—……알았어.

“그건 그렇고 이번 임무 세팅은?”

—끝났어. 조심해. 눈치 챈 녀석들이 있는 것 같으니까.


아카아시는 귓가로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간단한 대답을 하거나 했고 엘리베이터가 14층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타는 사람은 없었다. 


“그보다 기분 상한 것 같으니 무슨 이벤트라도 당첨시켜 줘야겠어.”


눈앞에서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보이는 그 어처구니없고 황망한 표정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아카아시가 꾹 참고 하는 말에 귓속의 이어피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린애야? ……알았어. 파자마 하나 보낼게.


음성 너머에서도 귀찮아하는 표정이 눈에 역력하다. 아카아시는 작게 웃음을 삼켰다. 때를 맞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눈치는 벌써 챈 것 같네. 엘리베이터 봉쇄.”

—……라져.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14층에서 내려가지 못했던 것이다.













140*210 | 약 200p | 16,000원 예정


+3~5편의 여름 이야기 단편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샘플은 추가될 수 있습니다.

+8월 서울 코믹월드 보쿠아카 소설본 신간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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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

“답답해 죽겠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보쿠토가 의자의 등받이를 뒤로 눕히며 버둥거렸다. 곁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는 매니저의 표정이 황망하게 일그러졌다. 보쿠토가 보고 있는 건 그의 대본이었다. 


“얘 사랑한다는 얘길 영화 끝날 때까지 안 해. 왜 안하냐? 으아아아!”

“작가한테 가서 따지실래요?”

“으아, 속 터져!”


보쿠토가 버둥거리는 소리에 다른 스태프들이 웃으며 지나간다. 매니저는 무덤덤한 얼굴로 보쿠토의 얼굴에 쿨링 스프레이를 분사했다.


“으푸우웁!”

“그러게요, 보쿠토 씨는 천년이 가도 이해 못 하시겠죠……. 말 못하는 사람의 맘 같은 건. 진짜 어떻게 이런 역을 하셨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나도 이해는 해. 이해는 하는데 답답하다는 거지! 얘가 지금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만 했어봐, 여자주인공이랑도 잘 되고 이렇게 퍼주기만 하다가 끝나지도 않았을 거 아냐!”

“하하, 그러게요…….”

“너 나한테 아주 무관심해. 알지?”

“네.”


매니저는 그렇게 대답하곤 보쿠토의 얼굴 위에 자외선 차단제를 덧발라주었다. 


“팔 토시 하실래요? 아니면 위에 셔츠 하나 더 입을래요?”

“…….”

“빨리요. 피부 더 타면 안 된다고요.”

“난 안 타잖아.”

“벌겋게 익을 뿐이죠.”


며칠 전에 숲길에서의 추격 장면을 촬영하느라 보쿠토는 팔다리가 긁히기도 많이 긁힌데다가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 며칠은 고생을 했다. 검게 그을리지는 않지만 화상을 입는 것이다. 


보쿠토는 투덜거리길 관두고 얌전히 긴팔 셔츠를 앞으로 꿰어 입었다.


“선풍기 갖다 줘.”

“덥다고 찬바람 너무 쐬지 말래요.”

“뭐? 왜? 누가!”

“감기 걸리신다고요.”


어쨌든 냉풍기 바람 오고 있잖아요, 별로 덥지도 않구만, 보쿠토의 매니저는 그렇게 말을 남겨놓고 자리를 뜬다. 보쿠토가 간절히 부르며 팔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팔을 몇 번 더 휘저은 보쿠토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을 인지하고는 입술을 비죽거리고 가슴팍 위에 턱 소리 나게 팔을 내려놓았다. 멍하니 위를 보다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자 저기는 또 촬영 준비에 한창이었다. 


스태프들, 배우들, 그들을 훑어보던 보쿠토는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 옆에 있는 조수와 이야길 나누고 있는 촬영 감독이었다. 


그가 가만히 서 있는 자세는 길고 곧았다. 보쿠토 자신도 큰 편인데 저 촬영 감독 역시 결코 작은 키는 아니었다. 몇 센티미터 정도나 차이가 날까. 그런데도 몸은 그보다 훨씬 더 가늘었다. 아마 그의 매니저가 이 얘길 들었으면 어떻게 보쿠토 씨의 몸과 비교해서 가늘지 않을 사람이 있기나 하겠느냐며 핀잔을 던졌겠지만, 보쿠토는 마냥 촬영 감독의 옆모습을 감상하기만 했다. 


카메라가 많이 무겁다더니 얄팍한 몸에도 마른 근육이 제법 붙어있는 편이다. 턱선은 매끄럽고 얼굴엔 살이 별로 없었다.


‘얼굴이 작아서 뭘 한 입만 먹어도 뺨이 다람쥐가 되나봐.’


눈매는 가늘고 길었다. 안의 눈동자는 청록색이었다. 보쿠토는 저런 색을 본 적이 있었다. 햇빛조차 투과하지 못하는 깊은 바다가 저런 색깔이었던 것 같다. 머리는 먹을 바른 듯이 새카만 빛이어서 더욱 단정한 듯 혹은 차가운 듯한 인상이 되었다. 


‘잘못 치면 부러지겠네.’


보쿠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보통 감독들은 며칠쯤 날밤을 지새우며 촬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인상었는데-아니면 날밤을 지새우며 촬영을 강행할 것 같은 인상-, 저쪽은 그랬다간 카메라보다 사람부터 넘어가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님이 그렇게 밥 때 챙기나…….’


식사란 밥 때에 먹는 것이 아니라 촬영이 끝나고 난 뒤에 먹는 거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 촬영장은 열두시 땡 하면 점심 먹고 여섯시 땡 하면 저녁 먹는 식이었다. 보쿠토는 자신의 추론이 그럴듯하여 고개를 끄덕이고는 찬바람이 가까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때의 보쿠토는 아직까지 저 촬영 감독을 잘 몰랐던 것이다. 식사를 제 때 하지 않으면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눈매가 북풍 설원마냥 험악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


“저, 아카아시 씨…….”

“응?”


조리개를 조정하던 촬영감독의 조수가 아련한 목소리로 촬영 감독을 불렀다. 옆에서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확인하던 중이었던 아카아시가 고개를 들고 자신보다도 키가 큰 조수를 바라보았다. 


“왜?”

“저쪽에서 누가 자꾸 쳐다보는데요…….”

“누구……아.”

“용건이 있는 건가 싶어서요.”


아카아시는 조수 오나가가 가리키는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가 그 시선의 정체를 알아차리곤 다시 카메라 쪽으로 눈을 돌렸다.


“신경 쓰지 마. 조리개는?”

“끝났습니다.”

“메모리는?”

“충분한데……. 저어…….”

“원래 사람을 아무 생각 없이 저런 식으로 쳐다보는 사람이야.”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간간히 구름이 흘러가긴 했지만 쨍하니 볕이 맑은 날이었다. 습기는 차오르고 있었지만 아직 마구 불쾌할 정도는 아니다. 아카아시가 손을 내밀었고 오나가는 당연하다는 듯이 익숙하게 주머니를 뒤져 냉각 시트를 꺼냈다.


“붙일래?”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가서 저 사람한테 주고 와.”

“…….”

“그럼 안 쳐다보겠지.”


포장을 꺼내 능숙한 손길로 목덜미에 냉각 시트를 붙인 촬영 감독이 하나 남은 시트를 오나가에게 내밀었다. 


오나가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부터 계속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 그리고 아카아시가 간단하게 ‘저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 배우는 이 극장가의 흥행 보증 수표라고 불리는 바로 그 보쿠토 코타로였다. 어려서 아역부터 시작해 경력으로 따져도 이 자리에서는 가장 선배인 셈이었고 필모그래피까지 굉장해서 스크린 아니면 보기도 어려운 사람인데다가, 같은 업계에서 일하기에 더욱 쉽사리 말 붙일 수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안 가고 뭐해.”

“하, 하지만…….”

“빨리 갔다 와서 조명 맞춰보고 조리개 다시 조정해야 해.”

“아, 알겠습니다!”


일을 해야 한다고 몰아세우자 조수도 얼른 달려간다. 아카아시는 뷰파인더를 내려다보며 조수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상기된 얼굴의 오나가가 돌아왔다. 주춤거렸으면서도 굉장한 배우와 말을 해보았다고 들뜬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일 해야지.”

“아, 저…….”

“응?”

“보쿠토 씨가 엄청 좋아하시던데 혹시 원래 알던 사이이신……?”

“아니. 원래 그런 사람이야. 이 한여름에 냉각 시트를 가져다주는데 그러면 좋아하겠지.”


아카아시는 서늘하게 대꾸하고는 편집 모니터에 비친 모습을 흘끗 쳐다보았다. 회색 화면 위로 스태프 하나를 붙잡고 뒷목에 시트를 붙이느라 요란법석을 떨고 있는 보쿠토가 눈에 보였다. 


아카아시는 모니터에 비친 화면으로도 눈이 마주치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빨리 촬영을 끝내야 퇴근도 빠르다. 집중해서 일을 하기에도 바빴다. 아카아시의 손짓에 조명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조명 감독이 일할 시간이라고 외치는 소리에 스태프들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나, 요시히데를……좋아하는 걸까?”


소녀같은 여자, 아이리가 등을 보인 채 중얼거린다. 저 끝에 겨우 보이는 흐릿한 그림자가 바로 그 요시히데였다. 아이리 뒤에 선 아키히토는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다. 처음에는 손을 뻗었다가 결국 아이리를 잡지 못한 채 떨어뜨리고 만다. 힘껏 찌푸린 눈썹 아래에 애써 웃음을 지으려 하지만 허물어질 뿐이다. 하지만 그 얼굴도 아이리가 아키히토 그를 뒤돌아 볼 때에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변해 있었다.


아키히토가 물었다.


“좋아하는 것 같아?”


아이리는 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남자를 향해 빛내는 눈이었다. 아키히토는 잠깐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또 웃는다. 요시히데가 부럽네, 농담같은 말에 아이리가 부끄러워하며 뺨을 붉힌다. 해가 저문다……. 


그리고 다시 아이리가 이제는 없는 요시히데를 바라보기 위해 등을 돌렸을 때, 아키히토의 한쪽 눈에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노을에 물들어 붉은 보석 같은 눈물이었다.


해가 지는 침묵 끝에 슬레이트가 딱 하며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그제야 스태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도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영화 감독까지 살짝 들뜬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정도 되는 연륜이기에 이런 화면을 보고도 들뜬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리라.


방금 전까지 아키히토 역을 하고 있던 보쿠토는 카메라가 꺼졌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발까지 구르며 눈물을 그치려고 했지만 역으로 더 후두둑 떨어지기만 한다. 매니저가 얼른 물티슈를 뽑아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보쿠토 씨!”

“화, 화면은? 잘 나왔어?”

“예. 잘 나왔대요.”

“아~! 이거 눈물이 안 그쳐! 으아아!”


애써 웃음을 터뜨리는데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스태프들도 그 모습에 웃고 말았다. 방금 함께 씬을 촬영한 배우들에게 한 마디씩 칭찬을 한 감독이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보쿠토에게 다가갔다. 


“화면 정말 괜찮게 나왔어.”

“아, 정말요? 그럼 됐는데, 으아아! 이거 진짜! 눈물 왜 안 멈춰, 정말!”

“하하, 거기서 눈물이 나와줄 줄 몰랐는데.”

“저도요! 울 생각 없었거든요! 아 근데 속이 터지잖아요~! 망할, 말 좀 하지…….”

 

극 속의 인물이 사랑을 뱉어내지 못하는 걸로 한참이나 열을 토하던 보쿠토는 겨우 눈물을 닦아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서 언제 또 이렇게 될지 모르니 촬영장에 자신의 물병을 따로 챙겨 둬야겠다며 너스레까지 떨고 나서, 보쿠토는 슬쩍 눈을 돌려 촬영 감독을 바라보았다. 


아카아시는 현장 편집 기사와 함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우들 쪽은 쳐다볼 생각도 관심도 없는 것 같다. 보쿠토는 괜히 입술을 한 번 삐죽거렸다. 


오늘 마지막 촬영 분이 멋드러지게 찍히면서 얼추 마무리 분위기가 되어가는 와중에, 현장 편집이 거의 다 된 것인지 감독이 배우들을 불렀다. 


“잘 나왔어. 좋아, 좋아.”

“오…….”

“OST는 다 작업 끝났어요?”

“아직 작업 중이야. 이런 느낌 정도로만 생각해.”

“보쿠토 씨 어떻게 거기서 눈물이 나왔어요? 진짜 대단해…….”


촬영분을 확인하는 사이에 다른 스태프들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비가 올 것 같다며 이제부터 세트장에서 촬영이라는 소리, 일일촬영표 다시 써야 한다며 조감독이 우는 소리, 기자재와 짐을 챙겨 넣느라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것이 쩡쩡 울려퍼졌다. 


“정리 다 되면 딱 저녁 때군. 식사들 하고 가겠나?”

“좋죠~!” 


스태프들도 즐거워하며 반기는 사이에 얼추 짐정리가 다 끝났을 때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먼저 일어섰다. 


“오늘 고생들 하셨습니다. 식사 맛있게들 하시고, 저희는 가볼게요.”

“일촬표 나오는 대로 바로 연락하지.”

“예. 그럼 다들 쉬세요.”


다른 스태프들은 당연한 것 같았고 누군가가 제대로 붙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명 감독이 서글서글한 얼굴로 웃으며 인사했고 뒤에 선 촬영 감독이 고개를 까딱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뭐라 말이라도 해보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보쿠토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어 출구 쪽만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가, 갔네요?”

“아아, 일 끝났으니까.”

“식사는요? 다 같이 밥 먹기로 했잖아요!?”


보쿠토가 숫제 억울한 목소리로 소리치는데 타케유키 감독이 지긋한 얼굴로 씩 웃었다.


“누구 씨가 밥 먹을 때마다 괴롭히니 도망간 거겠지.”

“으, 으윽. 아닌데…….”

“하하, 농담이야. 내일부터 세트장 촬영이라 그 쪽 확인한다고 먼저 간 거니까 신경 쓰지 말게.”

“아…….”


타케유키 감독이 보쿠토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는 현장에서 철수하자고 말을 돌린다. 보쿠토는 괜히 영문을 알 수 없이 아쉬워서 뺨만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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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스님 리퀘스트인 영화배우 보쿠토x카메라맨 아카아시입니다uㅅu!

버터스님과 함께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아직 해조차 뜨지 않은 새카만 새벽이었지만 촬영 현장은 환한 빛으로 밝혀져 있고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분주했다. 바삐 분장을 하고 있던 배우 한 사람이 보쿠토를 알아보곤 일어나서 인사하려 했지만 보쿠토가 손을 내저어 만류했다. 


근처에 지나가는 스태프 한 사람을 붙잡아 간의 의자를 펼친 보쿠토는 구석에 앉아 촬영장을 휘휘 둘러보았다. 촬영을 준비하는 카메라는 조금 먼 쪽에 있었다. 그리고 그 카메라의 곁에 한 사람이 서서 해가 떠오르는 쪽을 바라보고 있다.


기자재 움직이는 소리, 사람들이 소리 높여 떠들고 외치는 소리, 오가는 발자국 소리, 물건을 찾고 헤매는 소리, 이곳은 온갖 소음으로 시끌벅적한데 저 카메라가 있는 저곳만은 다른 세계인 듯이 고요했다. 보쿠토는 저 자리가 조용한 것이 아니라 저기에 서 있는 사람이 어딘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모든 것들 사이에서 혼자만 고요한 사람.


하지만 그 정체 모를 고요함은 금방 깨졌다. 이번에 촬영을 해야 하는 배우와 감독이 그 쪽으로 다가간 것이다.


“이쪽 방향에서 카메라가 들어가는데 의식하진 말고 하도록 하고. 마츠모토, 대사 봐서 알겠지만 이 새벽은 그냥 새벽이 아니라는 거. ‘요시히데’가 마음을 먹는 장면이니까 그것만 생각해주고, 냉풍기 어딨어? 애들 벌써 더워하네. 찬바람 쐬면서 대기하고 있어. 촬영 시작은…….”


배우들을 향해 빠르게 말을 늘어놓던 타케유키 감독이 고개를 들고 옆에 서 있던 촬영 감독을 돌아보았다. 아직 어두운 먼 하늘을 보며 카메라를 만지던 촬영감독은 카메라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곤 말했다.


“해 조금만 더 뜨면……20분 정도면 되겠습니다. 해는 순식간에 뜨면서 빛이 변하니까 이번 씬은 원 테이크로 가야 합니다. 안 그럼 내일 새벽에 다시 찍어야 하니까.”

“아, 아카아시. 애들 부담 주지 말고.”

“여러번 촬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만…….”


옆에서 조명 감독이 살짝 당황했지만 촬영 감독은 굴하지 않으며 이 정도로 부담가지실 리가 없지 않느냐는 소리나 늘어놓는다. 


보쿠토는 일부러 챙겨 나온 대본은 펼쳐보지도 않고서 그쪽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씬은 해가 한낮에 떠 있을 때여서 벌써부터 대기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역을 맡은 탓에 일찍부터 연습할 겸하여 나왔던 차였다.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20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스태프들이 부산히 움직이며 준비를 시작한다. 그 사이에 배우들에게 할 말을 모두 마친 감독이 보쿠토에게 다가왔다.


“날도 더운데 왜 벌써 나왔나? 때 되면 사람 보낼텐데.”

“날도 더운데 같이 나와 있어야죠. 그런데 이 장면, 좀 더 어두울 때 할 줄 알았는데 해가 뜨는 순간 찍네요?”

“빛이 뜨면서 그림자와 색이 순식간에 바뀌는데 그게 아주 좋더군. 덕분에 한 번에 가야 하지만……. 프리 프로덕션 때 샘플 촬영을 해봤는데 그걸 보고 우리 조명이 아주 혀를 내둘렀다고. 역시 큰 형님한텐 못 이긴다고 말이지.”

“큰 형님?”

“태양말야.”


하늘을 한 번 가리키고는 ‘굉장한 화면이 나올 거야’ 라고 말한 감독은 곧 비밀이란 이야기를 덧붙였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배우들이 알게 되면 정말로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보쿠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촬영 현장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순간 보쿠토가 본 것은 세트 위에 서 있는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표정의 배우들과, 그 배우들을 비추는 카메라 뒤에서 한 손에 주먹밥을 쥐고 우물거리는 촬영 감독이었다. 보쿠토가 보는 쪽으로 나란히 방향을 틀었던 타케유키 감독은 그 모습이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아침을 굶겼군……. 이번 씬만 끝나면 다들 밥부터 먹어야겠어.”


감독이 보쿠토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곤 자리를 뜬다. 보쿠토는 눈까지 휘둥그레 뜨고서 촬영감독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딘가 차갑기까지 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자기 얼굴 반만 한 주먹밥을 들고서 열심히 우물거리고 있다. 


입이 짧을 것 같다는 편견에 딱 들어맞는 인상인 주제에!


촬영 감독은 기어코 그 큰 주먹밥을 야무지게 전부 입에 밀어 넣어 해치웠다. 뺨에 묻었던 마지막 밥알까지 말끔히 없애는 데에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주먹밥을 눈 깜짝할 새에 먹어치우고서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인지 물티슈를 꺼내 손을 닦고 다시 카메라 앞에 서는데, 그 순간 촬영 감독의 눈빛이 변했다. 


줄곧 그를 지켜보고 있던 보쿠토에게 그 변화는, 방금 전 촬영감독 본인이 말한 것처럼 떠오르는 해 마냥 순간의 것이었다. 한 순간 전까지는 분명히 새카만 어둠이었는데 지금은 태양이 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안개가 역력하던 흐린 풍경 속에서 갑자기 빛나는 혜성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보쿠토는 저 사람이 방금 전까지 내 손만 한 주먹밥을 혼자 한입에 털어먹은 사람이라고 아무나 붙잡고서 외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이 흠칫할 만큼 놀라버린 걸 어떻게든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보쿠토가 스스로의 마음을 어떻게도 정의하지 못할 때 뒤편의 조명들이 하나 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둠은 고요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배우의 윤곽은 그림자에 잠겨 흐릿하기만 했다. 해가 떠오르는 것은 인지하지 못할 순간이었는데 그 때를 맞추어 부드러운 조명이 들어간다. 배우의 얼굴 위로 햇빛이 물에 번지듯 스며들었다. 아직 어리고 여린 빛 아래에서 배우의 표정이 움직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위가 완전히 환하게 변해 있었다. 새벽이 끝난 것이다. 빠르게 현장 편집을 마쳤을 때 감독이 손짓해 보쿠토를 불렀다. 보쿠토에게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보쿠토는 대본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모니터 쪽으로 다가갔다. 


작은 모니터 속에서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어둠 속에서 빛은 다채롭게 반짝이며 사람의 얼굴에 아름다운 붓질을 해주었다. 처음 보는 어떤 것이 태어나는 것도 같았다. 그 때 바로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색보정은 조금 해야겠지만요. 좋네요.”


보쿠토는 홀린 듯이 옆을 돌아보았다. 저 장면을 화면에 담아낸 사람이었다. 촬영 감독은 현장 편집본을 바라보다가 옆에서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본다. 촬영 감독은 그를 오래 보고 있지는 않았다. 한 번 고개를 까딱거리곤 다음 촬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보쿠토만이 거기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어둠에서 새벽으로 색이 바뀌는 저 한 순간 속에 서고 싶다, 그래서 저 사람에게 찍히고 싶다. 강렬한 어떤 것이 보쿠토의 마음을 보쿠토도 모르는 사이에 사로잡았다. 


*


‘아니, 뭔가 찍히고 어쩌고 하기 전에 말이나 좀 해보고 싶다…….’


한 낮에 하는 촬영은 버거웠다. 보쿠토 정도의 체력이 아니었다면 진작 탈수가 오든 일사병이 오든 와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숲길 사이를 질주하는 장면이었기에 더했다. 스태프들이 펼쳐 놓은 상에 드러누운 보쿠토는 땀에 푹 젖어 손만 까딱거렸다. 냉풍기를 조금 더 가까이 가져오란 뜻이었다. 스태프 한 사람이 서둘러 보쿠토 쪽으로 냉풍기 바람을 틀었다.


촬영 감독은 말수가 많지 않은 편이었다. 한 사단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여러 인력을 끌어와 일을 하는 것이니만큼 모두가 다 서로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곤 해도 말이 적었다. 필요한 말만 깔끔하게 하고 사적인 잡담은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몇 마디 사담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자신의 조수와 함께 말하는 게 전부다. 


심지어 보쿠토 그에게는 더욱 말이 없었다. 다른 배우들에게는 이번 씬은 원 테이크로 가야 한다, 어디서 어떻게 해라, 조명을 어떤 식으로 받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이라도 종종 하는데 자신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아직 그럴 분량은 아닌 거라 그런 거라고 스스로 위안하곤 있지만.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좀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촬영 감독이 게걸스럽게 먹는 것도 아닌데, 그저 단정하게 젓가락질과 숫가락질을 반복하는 것뿐인데 쉬는 틈이 없었다. 말을 걸려고 하면 그 냉철한 얼굴에 뺨 가득 음식을 넣었는지 볼을 부풀리고서는 그를 쳐다보는데 차마 그렇게 열심히 먹는 걸 방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는 보쿠토도 체력에 부쳐 열심히 먹어대느라 그들이 있는 테이블은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그렇게 보쿠토는 몇 주 간 아주 열심히 촬영에만 임할 수 있었다. 


“더워……. 더워 죽을 것 같아…….”

“보쿠토 씨, 땀 닦고 물드세요.”


스태프가 차갑게 만든 수건과 이온 음료를 내민다. 보쿠토는 헉헉대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스태프가 시키는 대로 땀을 닦아내고 수분을 보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스태프가 다시 그에게 붙어 분장을 고쳐주었다. 


“나 지금 물 짜내는 수건 된 기분이야.”

“한 씬만 더 하면 된대요.”

“나 진짜 죽을 거 같다고. 나 아니었으면 이거 못 찍었다고. 이거 오늘 꼭 몰아서 해야 될 필요 있어? 어차피 여기 방학 때 아역 데리고 다시 오잖아.”


보쿠토가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어린애처럼 투정부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숲에서 벌어지는, 영화에 나오는 모든 추격씬을 오늘 하루 동안 다 찍고 있었다. 같은 배경이 나오는 씬을 한 번에 몰아 찍는 것이야 현장에서는 당연하다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무리할 필요가 있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쿠토의 말은 과장도 자기자랑도 아니었다. 보쿠토 코타로나 되니까 시나리오에서 요구하는 모든 추격전을 오늘 하루에 해내는 것이지 다른 배우였다면 진작 병원에 실려 갔을 것이다.


보쿠토의 말에 스태프 역시 동의한다는 얼굴로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일정이 빡빡한가, 그런 말로 맞장구치다가 문득 얼굴이 희게 질려 후다닥 도망치듯 물러났다. 


“어? 야, 어디가! 왜 얘길 하다 말고…….”


보쿠토는 입을 다물었다. 등줄기부터 서늘한 감각이 타고 올라온다. 보쿠토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무늬 없는 간단한 셔츠와 진을 걸친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쿠토는 촬영 감독을 앞두고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촬영 스케줄 뒷담화 같았다. 


촬영 감독을 탓한 게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이참에 스케줄 얘기를 해봐? 그래도 아주 못할 건 아니긴 한데. 그냥 나는 오늘 다 몰아 찍는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서 그런 거라고…….


“더 이상 못 뜁니까?”

“아, 아뇹!”

“그럼 다음 씬 가죠.”

“넵!”


보쿠토는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 감독은 땀 닦으라며 보쿠토에게 마른 수건을 내밀더니 그걸로 됐는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곤 촬영을 준비하러 간다.


보쿠토는 손에서 바삭하게 구겨지는 수건을 내려다보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아니, 너무한 거 아냐?”

“뭐가 또……. 초반이라 긴장하고 바쁜 거겠지.”

“나를 추천을 했으면 날 좋아해서 추천한 거 아닌가!? 근데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코노하는 영혼이 없는 눈동자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보쿠토는 탁상을 두드리며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영화 촬영이 시작되어 한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줄로만 알았는데 해가 저물 무렵 대뜸 전화가 왔고 지금은 새벽 두 시다. 코노하는 무생물처럼 눈앞에 놓여있는 두부 요리를 젓가락으로 헤집기만 했다. 


“일 잘하면 됐지…….”

“일은 잘 하는데~!”

“촬영도 다 안 끝났는데 일 잘하는지 어떻게 알기는 안대.”

“아 그거는 뭐. 아니, 보면 알지!”


보쿠토가 탁상을 내리치며 소리친다. 코노하는 두부가 잠겨있는 간장 양념을 사수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정확히 그 사람이 너한테 어떻게 하는데?”


잔에 데운 술을 따른 코노하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보쿠토가 배신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계속 얘기 했잖아!”

“그러니까 좀 디테일하게, 상세하게 말해 보란 말이야……. 네가 말 걸면 무시해? 대답도 안 해?”

“아니, 그건 아닌데…….”

“대답은 해줘?”

“응.”

“해줄 말 안 해준 적은?”

“아직 딱히 해줄 말 같은 게 있었던 적은 없었고…….”

“뭐 네가 가까이 오면 도망가기라도 해?”

“그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뭐가 문제야? 촬영이 힘든데 조정을 안 해줘?”

“아니, 내 말은!”


보쿠토가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린다. 코노하는 그러고도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얼굴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할 말을 강구하던 보쿠토가 결국 탁상에 이마를 박았다.


“아 씨, 그러니까 이게 좀…….”


뭔가 하소연을 하고 싶은데 코노하가 따박 따박 짚는 대로 보자면 문제라고 할 만한 게 없어서 결국 입을 다물게 된다. 그게 너무 답답해 다시 보쿠토가 고개를 번쩍 드는데 코노하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보자, 음……. 그 촬영 감독이 좀 그렇대.”

“어? 뭐가?”

“친구 중에 누가 그 사람하고 같이 일해본 적 있나보더라. 그 사람 원래 좀 그렇대.”

“원래 어떤데!?”

“일 할 때는 일만 하고 카메라 손에서 놓으면 혼도 손에서 놓는 것 같다는데.”

“……뭐?”

“원체 일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 거 같다고…….”


보쿠토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코노하는 그런 보쿠토의 면면을 살피듯 바라보았다. 주위 사람들은 보쿠토를 보며 천상 막내에 떼쟁이라고들 하지만 코노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응석에 가까운 성미는 막내라기 보다는 가진 자의 여유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자길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이렇게 열불을 내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인데. 


“촬영할 땐 집중해서 하고 일 끝나면 원랜 대꾸도 안 해준대. 그냥 집에 간다고 하더라. 네 말에 대답이라도 해준 걸 보면 너 신경 써주기는 하나봐.”

“그, 그런가…….”

“그래도 일할 때 필요한 의사소통은 다 똑바로 한다는데.”

“나는 일…….”


일할 때를 말하는 게 아니야, 보쿠토는 거기까지 말을 하려다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코노하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본다. 보쿠토는 영문도 모르고서 하려던 말과 술을 함께 삼켰다.




------




버터스님 리퀘스트인 영화배우 보쿠토x카메라맨 아카아시입니다uㅅu!

버터스님과 함께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크흠, 아카아시 씨.”

“네.”

“그……. 셔츠 멋지네요.”

“아아, 네…….”

“…….”


보쿠토 코타로, 프로필 상의 키는 186, 직업 영화배우. 


그리고 그가 캐스팅된 ‘물빛 달그림자’ 촬영 7일 째, 그가 촬영 감독에게 사적으로 들은 대답은 ‘아아’와 ‘네’ 뿐이었다. 


*


“말이 되냐 이게?”

“뭐 네가 맘에 들었나보지…….”


코노하는 오랜 친구를 앞에 두고 그가 내민 대본을 넘겨보며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대본에는 거친 글씨로 여러가지 메모가 되어 있다. 보쿠토가 쓴 것인 듯했다.


“그리고 이거, 시나리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멜로는 아닌 거 같은데…….”

“어쨌든 엄청 달게 찍는 장면은 왕창 나오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하자고 했겠지.”


코노하는 대본을 내려놓고 오랜 친구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도통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기는 했다. 야미지 타케유키 감독이라고 하면 숨막히면서도 치열하고 밀도 있는 묘사로 유명한 명감독으로, 영화 배우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와 영화를 찍어보고 싶어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타케유키 감독이 보쿠토에게 먼저 시나리오를 보냈다. 코노하는 그 때 보쿠토가 공중제비를 돌았다고 해도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나도 못 할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날 캐스팅할 생각을 했지?”


공황에 빠진 보쿠토가 머리를 양쪽으로 쥐어뜯으며 절박한 얼굴로 코노하를 바라본다. 코노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뭐라 말은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렇다, 저 보쿠토 코타로. 185에 육박하는 키와 평소의 운동으로 다져진 체격, 격렬하고 다양한 표정이 결합하여 보쿠토가 주로 찍어온 영화는 액션이나 범죄, 스릴러 쪽이었고 극장가에서도 '액션의 보증수표 보쿠토 코타로'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연히 부드러운 드라마가 있는 영화와는 줄곧 거리가 멀었고 그런 영화를 찍는다고 해도 보쿠토의 역은 그 가운데에 가장 격렬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타케유키 감독이 이번에 보쿠토에게 내민 역은.


“음, 여자주인공을 위해서 뭐든 헌신하다가 뒤통수 맞고도 또 헌신하는 역이라……. 너한텐 좀 생소하긴 하네.”

“그치! 그치!”


보쿠토가 탁상에 손을 짚고 몸을 벌떡 일으키며 동의를 구한다. 코노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보쿠토를 올려다보았다. 보쿠토는 지난 영화에서 자신을 배신한 동료 경찰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는, 전직 경찰이자 연쇄살인범 역을 맡았었고 그 연기는 무척이나 호평을 받았다. 


“그치, 네가 뒤통수를 맞으면야 멱을 따면 땄겠지…….” 

“어떻게 이런 역으로 날 캐스팅할 생각을 하냐!?”

“배역 얘기는 해봤어? 뭐 바꿔본다거나.”

“꼭 이 역을 해줬으면 좋겠대…….”

“그럼 그냥 하지 그래.”


코노하가 정리하듯 내린 결론에 보쿠토는 탁상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 못하는 건 하기 싫어.”

“아, 예. 그러시겠죠.”

“못하는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단 말야! 하기 싫다고!”

“아 그럼 거절 해!”

“그치만 타케유키 감독이잖아! 하고 싶어!”


코노하는 탁상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뭉툭하고 무게감 있는, 휘두르기 적합할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다잡은 코노하는 크게 한 번 심호흡했다. 


“그 감독도 어련히 알아서 배우를 골랐겠지. 너도 이런 연기도 한 번은 할 때가 되긴 했지 않아? 이미지 너무 고정되는 것도 그렇잖아.”

“…….”

“널 고른 게 신기하긴 하다만……. 타케유키 감독이 널 캐스팅하자고 했대?”

“이 역으로 누굴 할지 고민하다가 원랜 오디션을 보기로 했다는데……. 촬영 감독이 날 추천했대잖아.”

“촬영감독? 누군데?”

“아카아시 케이지. 들어 봤냐?”


코노하는 입을 떡 벌렸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케이지? 야, 당연히 들어봤지! 지지난주에 개봉한 그 뭐냐, ‘그림자 계곡의 의자’ 그거 찍었잖아. 그게 올해 상은 다 타놨다고 얼마나 난리였냐. 아카아시 케이지가 우리나라 돌아왔나? 다음 영화도 해외에서 작업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몰라, 왔나보지……. 근데 무슨 아직 하반기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올해 상을 다 타놨대.”


살짝 흥분해 떠들던 코노하는 보쿠토의 투덜거림은 들은 척도 않고 재빠르게 말했다.


“타케유키 감독에 카메라가 아카아시 케이지면 야, 그냥 해. 어지간하면.”

“나도 하고 싶다니까? 근데 역할이! 내 역할이! 으아아!”


보쿠토가 탁상 위에 엎어져버린다. 코노하는 대본을 다시 넘겨보며 슬쩍 말을 꺼냈다.


“그……. 너 어쨌든 멜로도 한 번 찍어본 적은 있잖아.”

“…….”


보쿠토는 말이 없다. 코노하는 자신이 말을 꺼냈으면서도 입술을 안으로 말아 깨물며 조용히 대본만 넘겨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보쿠토의 첫 데뷔는 로맨스 영화였다. 남녀 주연은 당대 이름 높은 쟁쟁한 배우들이 전격 캐스팅했던 터라 배우 얼굴만으로도 손익분기점을 장담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가 떠돌던. 당시 대중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 신인 보쿠토 코타로에게도 살짝 관심이 기울었고 영화가 그대로 성공했다면 보쿠토도 탄탄대로를 걸었겠지만…….


“흥행은 그랬다 쳐도 그 영화가 망한 게 네 탓도 아니었고. 넌 잘했었잖아.”

“쫄딱 망한 건 망한 거라고.”


엎어져있던 보쿠토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코노하의 팔을 쳐 그의 손에 있던 대본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보쿠토는 굳은 얼굴로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데뷔한 작품이 손익분기점의 첫 글자도 말할 수 없을 만큼 패망했다고 해서 보쿠토가 배우가 되겠다는 뜻을 꺾지는 않았지만, 그로부터 보쿠토가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르기까지 과정이 순탄하지도 않았다. 


“그치만 결국 할 거잖아. 그만 찡찡대, 자식아.”

“코노하아아!”


정말 하지 않을 거였다면 그를 붙잡고서 하소연을 늘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코노하는 들어줄 만큼 들어주었다고 판단하곤 몸을 일으켰다. 붙잡으려는 보쿠토의 팔을 쳐낸 건 이렇게 귀찮게 군 것에 대한 작은 화풀이였다. 


그리고 그 날 밤 보쿠토는 침대 위에서 10분을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영화를 찍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


그 뒤로 영화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보쿠토는 자신을 추천했다는 그 촬영 감독이 찍은 영화를 모두 돌려보았다.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오디션을 보기로 했다는데 그걸 무르고 자신을 추천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 어떻게 영화를 찍기에 그런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촬영 감독의 가장 최근 작품이 화면 속에서 재생되고 있는 중이었다. 스피커에서 미려한 바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듯 흘러나오고 있다. 그리고 스크린 위의 여자가 뒤를 돌아본다.


“허…….”


여자는 봄 햇살에 감싸인 듯이 포근한 빛으로 둘러싸여서 카메라 너머의 보쿠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꽃향기가 감도는 듯한 느낌, 보쿠토는 자신이 그 여자를 사랑하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였다. 


잠시 홀린 듯이 화면을 바라보던 보쿠토는 고개를 털어내고 소파 한쪽에 내팽개쳐두었던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 사이에 영화는 끝이 났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보쿠토는 손에 쥔 시나리오 너머로 엔드 크레딧에 올라가는 이름을 바라보았다.


Executive Producers ……

Director of Photography | Akaashi Keiji 

Production Designer ……

Edited by ……


그리고 더욱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저 촬영 감독의 스펙트럼은 놀라울 만큼 넓고 다양했다. 당연히 모든 작품이 전부 흥행에 성공한 것도 아니어서 ‘맙소사, 이런 것도 찍었나?’ 싶은 작품도 있었고 ‘이게 이 촬영 감독 거였나?’ 하는 것도 있었다. 그 밖에 극장가를 굵직하게 흔든 것도 몇 개나 있다. 장르는 다양했다. 로맨스, 코미디, 액션, 스릴러, 드라마……. 


그 모든 걸 다 봤지만 도대체 어느 면에서 자신이 이 사람 마음에 들어 역까지 따내게 되었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프리 프로덕션(pre production)이 진행되는 동안 보쿠토는 시나리오 작가에게서 추천받은 영상과 책을 모조리 독파하고, 초반 촬영분에서 요구하는 대로 슬렌더한 몸매를 위해 체중감량을 하며 영화를 준비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성향의 캐릭터를 연구하고 연습하는 사이에 시간은 바람처럼 흘러갔고 촬영일이 다가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마침내 크랭크 인에 들어가는 날 촬영스텝들과 모두 만나는 자리에서 보쿠토는 처음으로 그 촬영 감독을 보았더랬다. 그야 터무니없는 배역에 자신을 추천한 사람이라고 하니 영화를 찾아보며 그 촬영 감독의 얼굴도 사진으로 보기는 했다. 보쿠토는 촬영 감독을 실물로 본 순간 그 인터뷰의 프로필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는 몰라도 인물을 조금도 제대로 담지 못한 사진이었다고 생각했다.


‘사진보다 훨씬 더…….’


목깃이 있는 밝은 색 폴로티와 검은 진을 걸친 남자는 말수 없는 얼굴로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영화감독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차례차례 소개해줄 때에나 자신의 이름을 소리 내 말했다. 


그리고 그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이후로 보쿠토가 촬영이 시작된 7일 내내 저 촬영감독에게서 들은 대꾸라고는 ‘아아’와 ‘네’ 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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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스님 리퀘스트인 영화배우 보쿠토x카메라맨 아카아시입니다uㅅ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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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x아카아시

동양풍 AU 장편소설 적월하향 외전





첫 번째 이야기 

 



황후가 직접 ‘부탁’이라고 말을 하기까지 했다. 세자는 치밀어오르는 한숨을 내리누르며 깊이 절했다. 자신이 한숨을 쉬고 싶은들 황후의 마음만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일로 또다시 황상이 또 예친왕의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며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황상께옵서는 태자 책봉에 아무 관심이 없으십니다…….’

 

황제가 관심이 있는 거라면 딱 하나일 것이다. 바로 그의 눈앞에 있는 이 황후 말이다.

 

*

 

“아무데도 없어. 아무데도.”

 

쿠로오는 얼굴이 허옇게 뜬 채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 역시 굳은 얼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탁상을 앞에 두고 바삐 좌우로 오가며 아무데도 없다고 세 번쯤 더 중얼거린 쿠로오는 마침내 그 앞에 털썩 앉았다.

 

“싸웠어?”

“…….”

“뭘로 싸웠어.”

“…….”

“마마, 말씀을 좀 해주세요, 네? 무위영 애들 죽습니다~!”

 

무위장군의 말을 듣고 있던 아카아시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다시 다물어 무위장군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무위장군이 쥐고 있는 탁상이 파르르 떨린다. 결국 아카아시가 한숨과 함께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후원 문제로 좀 다퉜습니다.”

“후……원? 후궁 말이야?”

 

쿠로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람과 사람이 다투는 이유는 무수히 많을 것이지만, 저 두 사람이라면 결코 다투지 않을 거라고 모두들 생각하는 문제가 몇 있었다. 후원 같은 화제라면 그 중에서도 장원과 방안을 가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 아니 그 문제로 싸울 일이 있어? 어떻게 싸웠냐? 황상은……. 보쿠토는 후원엔 가지도 않잖아.”

 

모든 후궁은 후원에 있는데 황제는 후원이라면 발길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후원에 들락거렸던 것은 아카아시가 아직 후원에 머무를 때였다. 그가 마침내 황후가 되었을 때, 황제는 후원이 지상에서 존재부터 사라진 것처럼 굴었다. 즉 황후의 침궁에만 드나들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한 마디 했더니…….”

“……아니, 지금 이해가 안 되는데……. ‘그래서’는 어디서 나온 그래서고 뭐라고……무슨 한 마디를 해?”

“후원에 있는 것도 세 사람 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계속 방치하고 있고. 낮에라도 찾아가거나 그게 아니면 후궁이라도 늘리라고 했더니.”

 

쿠로오는 그야말로 입을 딱 벌렸다. 황후의 도리를 다 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지, 자신만 찾는 황제를 후궁에게 내돌리려고 하는 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보쿠토가 뛰쳐나갈 만도 하네!”

 

보쿠토가 무슨 마음, 어떤 생각으로 버림받은 황자의 자리에서부터 동궁을 차지하고 마침내 보위에 올랐는지 옆에서 전부 보아온 쿠로오였다. 모든게 저 한 사람, 지금 그가 마침내 황후로 앉혀놓은 저 한 사람 때문이었고 그 탓에 쿠로오는 계속 걱정하기도 했다. 저러다 정인이 변심하기라도 하면 보쿠토도 무너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황제의 정인은 변심하지 않고 황제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카아시가 쿠로오를 쏘아보았다.

 

“백가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아.”

“금빈에 대한 처우가 박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백가의 병권은 전부 백공이 휘어잡고 있다고는 해도 궁에서 이렇게 자기 가문 사람을 박대하니 그 안에서 반발하는 자들이 있을테고.”

“그건 좀 자업자득이지…….”

 

쿠로오는 휘파람 부는 시늉을 하며 대꾸했다. 금빈에 대한 대우가 다른 두 후궁에 대한 것보다 유난히 박한 것은 처음에 보쿠토가 후원에서 아카아시를 찾아냈을 때 아카아시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 금빈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보쿠토가 그녀에게 무심하게는 굴지언정 냉랭하게 구는 일까지는 없었을텐데. 

 

“사람이 실수 한 번 한 걸로 그러면 아니되지요.”

“…….”

“해서 얘기를 좀 했더니 곧장 뛰쳐나가셔서…….”

“…….”

 

저 무시무시할 정도의 엄격함에는 기가 질리고 만다. 한숨을 내쉬는 얄팍한 뺨을 보아도 가슴아픈 마음은 일지 않았다. 다만 보쿠토에 대한 동정심이 치솟을 뿐이었다. 

 

“너는 속도 없냐.”

“속이 왜 없습니까.”

“금빈이 어디 서왕모 아들래미 쥐어박았다고 황상이 저러냐? 너 때렸다고 그러는 거잖아, 너. 너는 네가 맞아놓고 실수 한 번이라고 넘어가냐.”

“그럼 제가 넘어가자고 해야지, 누가 합니까. 다른 사람이 그런 이야길 했으면…….”

“…….”

 

생각해보니 그건 또 맞는 말이다. 쿠로오는 마른 입을 다셨다. 금빈의 처우에 대해 용서를 해라 말아라 하고 다른 사람이 입을 댔으면 보쿠토의 그 불같은 성미에 절대 참지 않았을 것이다. 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피를 보는 것도 전혀 겁내지 않는 사람이 무슨 짓을 벌였을지 알 수가 없다.

 

“딱한 마음도 있습니다. 이 궁에 단 한 사람만 보고 입궁한 것이지 않습니까.”

“퍽이나 딱하겠다. 그 사람들이 황상하고 정애 나누자고 입궁했겠냐.”

“그래도요. 그리고…….”

 

아카아시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탁상 위의 화병에 꽂아둔 꽃잎이 그 한숨을 타고 파르르 떨린다. 쿠로오는 속으로는 한탄하면서도 아카아시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어쨌든 보쿠토 씨가……황상께서 누구의 원망을 사고 할 성격은 아니지 않습니까. 궁에 들어오지만 않았더라면. 원망 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이쿠야. 후원에서 황상을 원망하겠냐? 너를 원망하지.”

“뭐 그러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요.”

 

아카아시는 눈썹하나 깜짝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쿠로오는 혀를 찼다. 무슨 말을 해도 이쪽은 후원의 다른 후궁들과는 격이 다르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나라를 사분하는 적가의 후계자 노릇을 해온 인물이고 동시에 들판에 버려졌던 황자를 황제의 자리에까지 끌어올린 인물인 것이다. 

 

“다 좋아, 그걸로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 싸움을 하든 마음대로 해. 그런데 궁 안에서 해주면 안 되겠냐? 평소에 도망가던 데는 전부 다 뒤져봤는데도 안 나오잖아! 다퉜다고 황상이 가출을 하면 어떡하냐, 진짜!”

“그건……. 저도 좀 곤란하긴 하네요. 공무는 세자를 불러 맡겨두긴 했는데.”

“곤란해? 나는 피가 말라요, 마마! 피가!”

 

쿠로오가 가슴을 퍽퍽 두드렸지만, 아카아시는 난처한 듯이 눈썹을 내려뜨릴 뿐 답을 주지는 못했다. 


*


황제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소년 황자 시절부터 바란 건 그저 자신의 정인과 보내는 다정한 시간 뿐이었다. 그런데 어린 소년 황자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고 그의 정인은 모든 걸 가지고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소년 황자는 그의 정인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고싶다는 욕심만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냈다. 처음에는 그가 머무를 궁, 그 다음에는 친왕의 지위, 황태자의 자리, 그리고 마침내 보위에 오르기까지는 몇 년밖에 걸리지 않았더랬다.

 

황제에게는 나라에 대한 이상도 없고 꿈이나 희망도 없으며, 의무감도 없고 책임감도 없다. 그의 그 모든 것은 단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가만히 두었으면 망가졌을 것이 분명한 험히 기울어가는 저울추의 균형을 잡아준 것은 바로 그의 정인이자 이제는 황후가 된 아카아시였다. 

 

황제는 국정에 성실히 임했다. 오로지 아카아시가 원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금빈은 진즉 내쳐지고 후원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쿠로오는 후원의 존재 자체가 하루 하루 황제의 인내심을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곤 했다. 황제는 아카아시와 자신이 멀어질 수도 있는, 그러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시야에서 치워버리려 들었다. 처음에는 금빈이었고 그 다음에는 후가 아니라 빈이라는 아카아시의 지위였다. 즉위 전후로 아카아시와 헤어져야 했던 잠깐의 시간이 황제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문제를 아카아시의 입으로 직접 말을 했으니, 황제의 반응이 어떠했겠는가……. 

 

“네가 여기 있는데 어디로 가겠냐 싶긴 하다만 그래도…….”

 

*

 

두 번째 이야기

 

도성의 장터는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그나마 한산했던 것은 얼마 전 서북면 쪽에서 전쟁이 있었을 적 정도일 것이다. 도자기로 만든 풍경을 늘어놓고 파는 가게 앞에서 하나하나 건드려 청명한 소리를 내보던 후타쿠치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도 그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도성을 순찰 중이었다. 다른 금위영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 조금 다른 의견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후타쿠치의 의견은 그랬다. 그런데 차르르 하는 풍경 소리 너머 골목 안쪽에서 수상쩍은 광경이 흘끗 엿보인 것이었다. 후타쿠치는 그렇게 세게 치다간 부서진다며 울상 짓는 상인을 보곤 풍경 하나를 아무렇게나 골라 계산하고 골목 쪽으로 다가갔다. 

 

장터의 뒷골목 쪽 그늘이 진 으슥한 곳에서 서너명이 모여 무언가를 거래를 하고 있었다. 구성원은 다양했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네가 무언가를 파는 중이었고 사는 사람은 사내 하나, 규수 하나, 그리고 뭣도 모르는 것같은 코흘리개 어린 종 하나였다. 후타쿠치는 기척 하나 없이 숨을 죽이고서는 그들 뒤에 조용히 서서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이번에 새로 나온 거라 몇 장 없소.”

“저 나으리가 기다리고 있어서 빨리 가봐야하니까 저부터 사면 안 되나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게 벌써 새치기를 하려고 해? 쩌어기 찌그러져 있어! 노인네, 내가 세 장 사겠소.”

“아니, 이보세요. 저게 딱 봐도 세 장인데 그쪽이 세 장 다 사가면 이쪽은 어쩌라고요?”

“내가 제일 먼저 왔으니 내가 먼저 사겠다는 겁니다. 뒤에 몇 장이 남든 내 알 바는 아니지 않습니까? 노인장, 셈부터 하시오.”

“상도덕이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적어도 두 장만 사시든가요!”

“저기요, 그래서 도련님이 두장에 아가씨까지 한 장 사면 저는요?”

“꼬맹이는 천천히 기다리면 되잖니. 누나가 급해요.”

“저 이거 못 사가면 나으리한테 맞을지도 모른단 말예요!”

“그렇게 급하면 그 나으리더러 오시라 하든가! 노인장, 계산부터 합시다.”

 

가만히 지켜보던 후타쿠치가 계산하자고 보채는 청년의 뒤에서 툭 하고 기척을 냈다.

 

“—그래서, 저게 뭐요?”

“우, 우와아아악!”

“에그머니나!”

 

바로 뒤에서 소리가 들리자 청년도 규수도 어린 종도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는 혼비백산한 얼굴로 도망친다. 남은 건 무언가를 팔고 있던 노인과 후타쿠치 뿐이었다. 후타쿠치는 줄행랑을 치는 그네들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다가 마찬가지로 도망가려 하는 노인네의 뒷목을 낚아챘다.

 

“나도 그게 뭔지 구경이나 해봅시다.”

“아, 아이고, 나으리. 그게 별거 아닙니다요. 소인은 지금 볼일이 급해서 뒷간에 얼른…….”

“그 볼일이랑 같이 뒷간에 빠지고 싶은 거 아니면 빨리 봅시다.”

“그, 그냥 그림이옵니다. 제가 정말로 급해서…….”

“어떤 그림인데요. 보자니까? 응?”

 

후타쿠치의 표정이 위험한 방향으로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노인은 그의 얼굴이 어떤 미래를 내포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는 계속 감추고 있던 얇은 화선지 뭉치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 이것이옵니다. 흔한 미인도일 뿐 별 건 아니옵니다.”

“흔한 미인도를 무슨 뒷골목에서 밀수라도 하는 양…….”

 

화선지를 낚아채며 비꼬려고 하던 후타쿠치는 천천히 목소리를 죽였다. 그의 말은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흩어졌고 그걸 뭐라고 생각했는지 노인이 필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것이, 어여쁜 자태를 그려놓은 걸 파는 것인데, 그림이 워낙 출중하여 시장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보니까, 하여…….

 

“……이게 뭐야.”

 

하지만 후타쿠치는 노인의 얘기는 하나도 듣지 않은 채, 실로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화선지 속에 그려진 인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먹을 부어 새카맣게 칠한 머리카락과 얄팍한 턱선, 먼 곳을 보는 듯한 시선은 청록빛이다. 옷깃으로 몸을 꽁꽁 싸매다시피하여 드러난 건 담뱃대를 들고 있는 손 끝 뿐인데도 형용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다.

 

다른 두 장도 같은 인물을 그린, 비슷한 것들이다. 입고 있는 옷이나 자세가 조금씩 다를 뿐이다. 

 

후타쿠치는 마른 입술을 다셨다. 저 담뱃대는 그의 기억에도 있는 것이었다. 그 주인에게 도로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었다. 후타쿠치의 형형한 눈빛이 노인에게로 향했다. 노인이 까닭도 모르고서 딸꾹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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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가 보이는 아카아시와 인간 행세를 하고 있는 보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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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울부짖었다. 그 앞에는 나무로 만든 발이 너머에 앉아있는 어린 소년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소년은 말이 없다.  발 너머에서 비져 나온 소년의 긴 옷자락이 노인의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어떻게도, 어떻게도 아니되겠소?

—사람의 명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뿐인 손자요, 내 어찌 포기하겠소!

—……하지만 태양이 뜰 것입니다.


발 너머로 소년의 작은 손이 노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작은 손이었던지라 얹은 것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주름진 눈이 일그러진 채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린 소년은 한 번 더 말했다.


—태양이 뜰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기다리세요. 아이답지 않은 나직한 목소리에는 온기가 있었다.



*



아카아시는 아주 오랜만에 쾌적하게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도심의 눅눅한 공기는 산속의 공기에 비하자면 쾌적하다곤 조금도 할 수 없었지만, 아카아시는 심리적인 쾌적함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머리맡에 도토리나 밤톨이 있지도 않았고 옷 천지에 꽃잎이 흩뿌려있지도 않다. 방문 밖에 동물의 시체가 있지도 않고 그의 앞에 엎드려서 말 한마디 들어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허튼 꿈을 꾸지도 않고 푹 자고 일어났는데 이보다 더 쾌적할 수 있을까! 


아카아시는 그대로 기지개를 한 번 켜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서는 식기가 달그락거리며 고소한 요리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카아시의 걸음소리를 들었는지 부엌 쪽에서 앞치마 차림의 남자가 한 손에는 국자를 든 채 나타났다.


“케이지, 일어났니?”


계단의 손잡이를 쥐고서 잠깐 멈추어 섰던 아카아시는 낯설지만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꾸벅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삼촌.”

“그래, 그래. 잘 잤다. 우리 케이지도 잘 잤어?”

“네. 숙모는요……?”

“출근하셨다. 오늘 회사에 큰 손님이 오셔서 준비할 게 많나다봐. 우리는 아침 먹자, 케이지.”


그의 숙부가 아카아시를 이끌고 원목을 통으로 잘라 만든 식탁 앞에 앉혔다. 린넨으로 만든 테이블 매트 위에는 청색으로 무늬를 그려 넣은 식기가 정갈하게 자리 잡았다. 


“넓은 집이 휑하다 했는데 케이지가 와서 너무 좋네.”


숙부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카아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카아시는 이 사람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거의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의 조부가 그를 데리고 키우는 내내 산을 찾아와서 자신이 아카아시를 키우겠다고 했던 남자였다. 그의 조부가 미성년자 노동력 착취 중이었지만 친인척 중에서 아카아시를 데리고 나와 키우겠다고 말했던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케이지, 오늘 학교 가지? 떨리겠네.”

“조금요.”


아카아시는 숙부가 차려준 요리에 입을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일 긴장했던 것은 이 집에 오던 날이었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얼마나 요란한 괴물들이 살고 있을지 눈앞이 까마득했다. 그럼에도 오겠다고 생각했던 건 차라리 사람에게서 거리를 두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도시는 오히려 그가 지냈던 산보다 훨씬 더 조용하고 쾌적하다. 자잘한 요괴들은 물에 씻겨나간 듯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고요했다. 있다 해도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느낌이었고 섣부르게 요란을 피우는 녀석들도 없다.


‘평생 도시에서 살고 싶다…….’

“삼촌이 학교까지 태워주마.”

“괜찮습니다.”

“삼촌이 안 괜찮아서 그래. 꼭 한 번쯤 태워주고 싶었단다, 응?”


숙부의 간절한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아카아시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가 지내던 곳에 있던 요괴들이 그의 표정을 보았으면 저 아카아시도 약한 게 있다며 낄낄 그를 놀렸을 터였다. 감정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데 있어서 더딘 면이 없잖아 있는 아카아시에게, 대놓고 드러내 표현하는 이들은 언제나 적응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아카아시의 목이 살짝 붉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이지?”


아카아시가 승낙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의 숙부가 활짝 웃으며 기뻐한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인생에 저런 사람은 숙부 한 사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고작 한나절 만에 철회하게 될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


‘정말 아무것도 아무도 없네.’


아카아시는 책상에 앉아서 펜을 손에 쥐어보며 생각했다. 처음 보는 교사는 열심히 문장의 의미와 뜻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 설명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과 같은 이들도 몇 명 있다. 옆의 또래와 속닥거리고 있는 이들도 있다. 


아카아시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펜을 손 안에서 굴리며 창밖으로 교정을 내려다보았다. 드넓은 운동장에는 체육 수업을 진행 중인 학생들도 눈에 보였다. 공을 가지고 놀고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달리 특별한 것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조용해…….’


말을 걸어오는 것들도 없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불쑥 그의 눈앞에 나타나 절을 하거나 혹은 죽이려고 달려드는 일도 없다. 깊은 바다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처럼 조용하고 안락했다. 태어나서 기억이 존재한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인 것 같았다. 


숙부와 숙모를 따라 산을 나오는 길에도 그런 그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들이 있었다. 도시로 가면 이보다 더할 거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래도 굳이 억지를 부려 숙부와 숙모의 손을 잡고 산을 나선 건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울며 매달리는 사람들을, 그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들,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죽어버리겠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여긴 정말 천국인가?’


그랬는데 그가 감수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은 전무했고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이 그를 맞이해주었다. 숙부와 숙모의 집으로 들어와 주위를 몇 바퀴 둘러보았지만 그 사이에도 그의 눈에 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격스러울 정도의 평안이었다. 이와 같기만 하다면 여기에서 평생 살고 싶을 정도다.


학교는 처음 와보았지만 생각보다는 즐거웠다. 그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은 똑같았지만 산에서와는 다르게 그 눈빛은 금방 사그러들었고, 그를 앞에 두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없고 우는 사람도 없었다. 또래 소년소녀들은 어색하지만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를 해주었고 교과서가 없는 그에게 책을 펼쳐 주기도 했다. 점심은 뒤에 앉은 친구가 함께 먹어주었는데 아침에 숙부가 싸주었던 그의 호화로운 도시락을 보면서 눈을 빛내기에 반찬을 함께 먹었더랬다. 


인생에 처음 맞이하는 평화를 두고서 아카아시는 마침내 말로만 들었던 ‘부활동’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보았다. 그의 지난 인생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던 건 앉아서 말하고 쓰고 읽는 것이었으니 부활동은 움직이는 것으로 해보고 싶었다. 주위에 빛나는 것들이 워낙 요란했던 터라 햇볕 아래에서 하는 것은 제외하고, 활은 한 때 죽어라 쏘았던 전력이 있어서 궁도 같은 것도 빼고, 이리 저리 추슬러보니 배구부 하나 남는다. 


“아, 배구부! 우리학교 배구부 진짜 세대. 작년에 진짜 대단한 선배도 들어왔다고 하더라.”


점심을 같이 먹었던 뒷자리의 반 친구가 그의 고민을 눈치 채고는 살갑게 말을 붙여주었다. 세거나 약하거나 하는 것은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니 금방 마음이 섰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바로 몇 시간 뒤에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할 줄 아는 궁도나 할 것을 그랬다고. 


*


배구부의 입부를 원하는 신입생 수는 상당히 많았다. 강호라더니 정말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야 그 모두를 아주 처음 보았지만 그들 가운데엔 서로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 듯했고 선후배간에 벌써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 


아마도 3학년 선배인 것 같은 사람이 신입생들을 데리고 준비운동을 지도해주었다. 익숙하게 몸을 푸는 아카아시를 보며 선배는 운동했던 적이 있냐고 묻기도 했다. 아카아시는 활을 쏴 본 적이 있다고만 짧게 대답했다. 


그 때까지는 아카아시의 몸도 마음도 살짝 들뜬 상태였다. 체육관에 와 보니 배구는 생각보다 재미있어 보이는데다가, 도쿄 한 복판은 모든 문명이 집결되어 있었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말 놀라울 만큼 인외의 것들이 눈에 띄지 않아 조용하다. 숙부와 숙모는 그를 애틋이 여겨주고 학교의 부활동까지도 즐거울 것 같으니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인 아카아시가 조금은 들뜨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같이 몸을 풀던 다른 신입생의 스트레칭을 도와주던 아카아시의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요한 순간이 바로 그 때 끝났다. 


“흐아아, 러닝 끝났습니다~!”

“2학년들! 왜 또 이렇게 늦었어. 보쿠토 너지!”

“우와아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축구부 자식들이~!”


체육관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달리기를 끝내고 왔는지 열기에 찬 인간들이 안으로 들이닥쳐 금방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들 가운데에 가장 목소리가 큰 소년이 3학년 선배의 꾸중에도 기 하나 죽는 것 없이 웃으며 따박따박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 악! 아카아시! 아, 아파! 아카아시!”

“어, 아, 미안…….”


아카아시 아래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소년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부원들의 시선이 쏠린다. 아카아시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사과하고는 얼른 물러났다. 


“아카아시? 괜찮아? 나, 난 괜찮으니까……. 내가 살짝 놀라서 소리쳤나봐, 미안해…….”

“아,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라…….”


스트레칭을 받던 소년이 우물쭈물 사과했지만 아카아시는 그것에 대답하지 못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거대한 힘의 덩어리가 이쪽을 향해 샛노란 눈을 뜨고 있는 게 느껴진다. 아카아시는 지금까지 저것을 눈치채지 못한 자신을 목졸라버리고 싶었다. 


“신입생들?”

“그래, 인마! 부주장인 보쿠토 네 녀석이 훈련시켜줘야 하는데 러닝에 또 정신이 팔려서, 응?”

“그게 아니라 축구부 놈들이 우리 뛰는데 공을 차잖아요!”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카아시는 이제 파리하게 뜬 얼굴로 주춤주춤 뒷걸음 질쳤다. 


‘어쩐지 조용하다 했어. 어쩐지 아무것도 없다고……!’


인간이 많다는 건 먹이가 많다는 뜻이다. 가장 인구가 밀집된 도쿄, 달리 말하자면 가장 먹을 게 많은 이 곳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엔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했는데 생에 처음 느껴보는 고요함에 취해서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도피했던 것이다.


깊은 바다에 몸을 파묻은 것처럼 고요했던 감각은 이제 심해의 수압으로 변해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숨을 들이마시고 최대한 다가오는 목소리에서 눈을 피한 채 뒷걸음질 쳤다. 


“응?”


쩌렁쩌렁 자신의 선배와 대화하며 오던 것이 고개를 갸웃한다. 아카아시는 침을 한 번 삼켰다. 부활동은 오늘로 끝이었다. 당장 그만둘 것이다. 아카아시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뒷걸음질이 조금 늦었고 그 기세 넘치는 것이 순식간에 다가와 아카아시를 붙잡았다.


“너, 신입생?”

“…….”


아카아시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샛노란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재밌는 것을 보는 듯이 익살맞은 표정에 역동적인 눈썹이 감정을 고스란히 표출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세운 머리카락은 은빛에 잿빛까지 섞여 몹시 눈에 띄었지만 어디로 보아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저 눈동자가.


금빛 눈동자가 순간 크게 뜨이더니 반짝 빛났다. 아카아시는 숨을 들이켰다. 저 눈을 하고서 어떻게 인간인 척 하고 있을 수 있지? 어째서 아무도 모르지? 아카아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것과 이렇게 가까이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너, 눈치 챘구나?”


인간이 아닌 주제에 마치 재밌는 걸 본 인간 아이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짓궂게 웃고 있다. 아카아시는 납빛이 된 얼굴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요거 확 잡아먹어버릴까?”


그리고 그 말에 당황한 아카아시가 그만 반사적으로 자신을 붙잡고 있던 그것을 그대로 엎어치기 해버리고 말았다.


콰아앙! 


커다란 근육 덩어리가 체육관 바닥에 그대로 내리꽂히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금빛 눈이 꿈벅이며 위를 올려다본다.


체육관이 지옥 같은 침묵에 잠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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