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이와오이 - 7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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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오이 | 발렌타인 데이1 2016.02.14
- 이와오이| 고백6 2016.01.03
- 이와오이| 여름의 승리를2 2015.12.27
- 이와오이| 사랑의 말 2015.12.19
- 이와오이| 착한 아이입니다 2015.12.15
- 이와오이| 빛4 2015.12.13
이와오이 전력 주제 : 고백
비밀
“이와이즈미, 나 비밀 있다아~?”
이와이즈미는 깊은 탄식을 뱉어냈다.
*
오이카와 토오루의 주량에 대해 말하자면, 술을 됫박으로 마셔도 안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이쯤 마시면 코끼리도 쓰러지겠다 싶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취기가 도는 것이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그러니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술자리에 동기들이 함께 모이면 오이카와의 앞으로만 술잔이 산더미같이 쌓이곤 했다. 오이카와는 투덜거리면서도 마셔주었고 그 탓에 때로는 오이카와가 먼저 취할 때도 잦았는데,
“이와이즈미.”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를 이렇게 부르면 그건 오이카와가 취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에. 벌써 취했냐?”
“아닌데?”
오이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하나마키가 달아오른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는데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이카와의 옆으로 늘어선 병만 봐도 취할 때가 됐다.
그리고 그렇게 오이카와가 취하고 나면 이와이즈미가 나서서 술자리를 정리하는 것이 그들 모임의 마무리였다.
“나 진짜 안 취했다니까!”
“어, 알아. 아는데 얘네 내일 출근이다. 가야지.”
“이이, 씨이…….”
눈이 도장을 찍듯이 꾹꾹 깜빡, 깜빡하며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만든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지갑이며 머플러 같은 것을 챙기면서 그를 붙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모 노릇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여전하다며 하나마키와 마츠카와가 웃는다. 이와이즈미는 둘을 쏘아보았다. 애를 이 꼴로 취하게 만든 덕분 아니냐. 하나마키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가게 밖으로 나와 둘씩 찢어지고 이와이즈미는 한숨과 함께 오이카와의 목에 머플러를 감아주었다. 밝은 베이지색 머플러에 파뭍힌 오이카와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진짜 취했네.’
평소에도 웃음이 헤픈 편이지만 저렇게 녹진하게 웃는 건 술을 들이 부었을 때 뿐이다. 이와이즈미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다음 동선을 계산했다. 일단 숙취해소제 몇 개를 사서 집에 데려다 놓으면 되려나.
“이와이즈미, 2차 가자! 2차!”
“안 돼.”
“왜애, 가자아아.”
오이카와가 그의 옷깃을 살짝 붙들고서는 살랑살랑 흔들며 떼를 쓴다. 떼를 쓴다고 하기 보단 응석에 가까운 애교였다. 훌쩍 키가 큰 녀석이 그러고 있는데도 생긴 것이 원체 화려한 탓인지 보기 싫지는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마음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너 혼자 술 얼마나 퍼마셨는지 아냐.”
오이카와가 술이 세다면 되레 약한 쪽은 이와이즈미였다. 서너잔만 마셔도 앞이 띵하게 돌고 그 이상 마시면 목부터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것을, 매 술자리마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잡고 버티는 것은 그 술자리마다 언제나 오이카와가 취할 때까지 술이 집중되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글쎄에! 그러니까 가자아.”
“여기서 나까지 취하면 너 데려갈 사람 없다니까.”
“내가 대려가지요오! 가자아!”
살랑살랑 애교를 부리듯이 2차를 가자고 조르던 게 이젠 막무가내로 그의 손을 잡아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힘에 못 이기는 척 끌려가며 그 뒤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술에 취하기 전까진 매번 자기만 이렇게 마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막상 취기가 올랐다 싶으면 그 때부터 2차를 가자 3차를 가자 난리가 난다. 그래서 매번 그가 취했다 싶으면 자리를 정리하는 이와이즈미였다.
“내가 못 산다, 못 살아…….”
결국 오이카와의 조름에 못 이겨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데리고 근처의 조그만 술집으로 향했다. 오이카와는 벌써부터 활짝 웃기에 바쁘다.
간단하게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 안주보다 먼저 술이 나왔다. 이와이즈미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오이카와가 잔에 술을 따르곤 연거푸 들이켰다. 술이 마시고 싶다기보다는 취하고 싶은 것 같았고 그건 취한 오이카와가 술을 마시는 버릇이기도 했다.
“아아, 취하질 않네…….”
“너 취했거든, 이미.”
“아냐, 이와이즈미, 아냐…….”
그 ‘이와이즈미’ 소리 좀 어떻게.
이와이즈미는 하려던 말과 술을 함께 목으로 넘겼다. 시커멓게 커다란 녀석이 이와쨩이 뭐냐, 하며 놀렸던 과거도 분명히 있었는데 어느새 오이카와에서 그 이름이 아닌 말이 나오는 게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안주를 집어먹고 술을 한 병 새로 주문할 때쯤 돌연 오이카와가 그를 불렀다.
“이와이즈미!”
“오냐.”
“이와이즈미, 나 비밀 있다아~?”
이와이즈미는 이대로 머리를 테이블에 박아 테이블 채로 부셔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분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애띠게 생긋생긋 웃으면서 사람 약이라도 올리는 것 같은 표정이던 오이카와가 돌연 어깨를 움츠리며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는다.
“아앗! 비밀인데!”
“그래, 비밀이겠지.”
“나 비밀 있다? 그게 뭔지 모르지?”
“어, 몰라.”
‘이와이즈미’라는 이름이 오이카와가 취했다는 신호탄이라면, 비밀 얘기를 하기 시작하는 건 오이카와가 정말로 반쯤 정신을 놓을 만큼 취했다는 뜻이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잔에 술 대신 물을 채워넣으며 자꾸만 찌푸려지는 인상을 펴기 위해 애썼다. 저 상태의 오이카와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도 이제 일어서면 곧장 고꾸라진다.
‘저 커다란 걸 또 어떻게 집까지 업고…….’
이와이즈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서 오이카와가 웃는다. 이와이즈미는 결국 다 포기하고서 턱을 괸 채 오이카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밀, 있냐.”
“으응, 비밀!”
“뭔데.”
“비밀이니까 말 못하지!”
오이카와의 비밀. 이와이즈미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비밀.
오이카와가 술을 강요당하며 투덜거리는 건 취하고 싶지 않아서이고, 취하고 싶지 않은 건 취하면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취하기 시작할 때 이와이즈미의 이름을 평소와 달리 부르는 건 더 취해서 흐트러져 허튼 소리를 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취해버리고 난 뒤부터 연거푸 술을 들이키는 건, 그렇게 취해서라도 하고픈 말이 있어서.
“말 못하냐.”
“응, 비밀이야.”
녹진히 풀어진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며 비밀을 말한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반쯤 정신이 풀린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하는 대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물 마셔라, 오이카와. 이와이즈미의 말에 오이카와는 또 고개를 끄덕이고는 꼴깍 꼴깍 물을 넘겼다.
물잔을 내려놓은 오이카와가 그를 바라본다. 단 것이 뚝뚝, 그의 시선 끝에 매달려있다. 깊이 깊이 미소를 짓는다. 테이블 위의 손이 슬금슬금 이와이즈미가 있는 쪽으로 향해왔다. 이와이즈미는 모르는 척 자신의 손을 조금 앞에 놓았다. 오이카와는 다른 그릇이라도 건드리는 것처럼 이와이즈미의 손을 매만졌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하고싶은 대로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손을 쥐듯이 꼭 붙잡았다.
“이와이즈미, 나 비밀 있다?”
“오냐.”
“궁금하지?”
“어어, 엄청 궁금해.”
“비밀이지롱!”
그러냐.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내버려두고서 그저 그렇게 대꾸했다. 무슨 비밀인지 다 알고 있다고 말하면 오이카와는 어떤 표정을 할까. 어차피 다음날이 되면 기억도 하지 못하겠지만.
“언제 말해줄래.”
“더 취하면…….”
“이만큼 취해도 말 못하겠냐.”
“으응, 못하겠어…….”
오이카와가 눈동자를 볼 수 없을 만치 눈을 접고 웃으며 고개를 사르르 흔든다. 말 못하겠어, 그러니까 사실은 말하고 싶다는 뜻. 말하고 싶지 않은데,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데 이렇게, 일어서지 못할 만큼 취해도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고백을,
할 수가 없어서…….
“왜 못하겠는데.”
“그야 비밀이니까!”
“그럼 왜 비밀인데.”
“그야……. 좋아하니까…….”
“뭐를.”
“이와쨩을…….”
“얼마만큼.”
“진짜……진짜 많이…….”
오이카와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리며 자신의 팔에 얼굴을 묻는다. 헝클어진 머플러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가 사과처럼 붉었다. 그래도 한쪽 팔은 여전히 앞으로 뻗은 채 이와이즈미의 손을 쥐고 있었다.
“그러냐.”
“응, 비밀이야…….”
그 말을 끝으로 이와이즈미의 손을 쥐고 있던 오이카와의 손에서도 스르륵 힘이 빠져나간다. 완전히 취해서 잠들었다는 뜻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남아있는 술을 휙 들이키곤, 풀어진 오이카와의 손을 이번엔 자신 쪽에서 감싸듯 쥐었다.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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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오이 | 발렌타인 데이
-오이른 전력 주제 : 소문
이와이즈미가 정중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그 표정에는 충분히 미안하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상대는 잠시 말이 없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긴장으로 굳은 얼굴이 까닭을 알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아…….”
탄식 같은 소리를 흘렸던 여학생의 눈동자 위로 금방 눈물방울이 차올랐다. 이와이즈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고개를 꾸벅 떨어뜨렸다. 미안. 거듭된 사과의 말이 오히려 상처였을까, 여학생은 고개를 흔들고는 빠르게 몸을 돌려 그의 앞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이와이즈미는 말 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마른 입술을 다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발렌타인 데이였다.
*
이와이즈미는 부실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혀를 찼다. 일년에 한 번 있는 날이라도 매해 이렇게 난리 법석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역시나, 문이 열리자마자 단내가 퍼지듯 덮쳐왔다.
“선배, 올해도 굉장하네요…….”
“그, 글쎄. 일단 이거 좀 잡, 으아아!”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언가를 껴안고 들어오던 오이카와가 결국엔 뭔가를 놓쳤는지 부실 바닥 위로 들고 있던 걸 쏟고 말았다. 자잘한 종이 상자 같은 것이 우르르 퍼져나간다. 달콤한 향기가 한층 더 진해졌다. 저지를 찾아 걸치던 이와이즈미는 혀를 찼다.
“하여튼…….”
“이, 이와쨩. 좀 도와줘!”
바닥에 앉아서 겨우 수습을 하던 오이카와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다. 이와이즈미는 눈살을 찌푸리고선 산더미같은 초콜릿을 바라보기만 했다.
겉으로 보기에 무게가 없어 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의외로 부활동 외의 친교에는 연약하게 군 탓인지, 오이카와에게 진심으로 부딪혀 오는 상대는 드물어 모두들 그가 절벽위의 꽃이라도 되는 양 굴었고 저 산더미같은 초콜렛이 그 사실의 증거였다.
“아, 큰일났네…….”
사물함 아래에까지 굴러간 초콜렛도 수습해 겨우 정리하는데 오이카와가 곤란한 표정으로 초콜렛 더미를 내려다보며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정리를 함께 도와준 후배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 된다.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머쓱하게 웃고는 손을 내저었다. 후배들이 부실을 나가고 나서야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뭔데?”
“다 섞였어. 나눠먹어도 되는 거랑 안 되는 거 구분해 뒀거든, 애들도 주려고…….”
“뭔 기준으로.”
“어, 그러니까 우정초코……? 나눠먹어도 된다고 말해준 거랑 아닌 걸로.”
그랬는데 다 섞여버렸네. 오이카와가 뺨을 매만지며 곤란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와이즈미는 저 초콜렛 더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매해 받아온 걸 어쩌지 못하고 곤욕스러워하더니 올해만은 수를 쓴 것 같았다. 다 무산되기는 했지만.
오이카와는 의식의 모든 걸 단 하나에만 쏟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배구였다. 애정도 끈기도 집중력도 모두 그 하나, 그래서 그걸 제외한 다른 것들에겐 터무니없이 무르곤 했다. 가령 그를 향해 오는 꽃잎같은 마음과 말들이라거나.
‘그래도 이렇게 밤새 직접 만들었다는걸, 어떻게 거절을 해…….’
시라토리자와로 오라는 권유는 칼같다 못해 냉랭하게 걷어차더니, 누가 뭔가 주는 것 앞에서는 봄날 마지막 눈마냥 흐물흐물 녹았다. 혹자는 왕자님다운 상냥함이라고 일컬었으나 이와이즈미만은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런 곳까지 쓸 단호함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어쩌려고.”
“어쩌긴, 집에 가져가서 먹어야지. 흐아…….”
오이카와가 어색하니 웃더니 금방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벌써 짠게 먹고싶다는 이야기를 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이와이즈미는 말없이 그 초콜렛 더미를 바라만 보았다.
*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서로가 지나치게 가깝기 때문에, 되레 교내에서 상대에 대한 소문에는 느리고 둔했다. 으레 둘 다 알고 있으리라 여겨서 학교의 사람들이 당사자들에겐 상대에 대한 얘기를 드문히 하는 탓이었다.
“에, 에엑? 진짜?”
오후 연습을 다 끝냈을 때였다. 누군가가 이와이즈미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 오늘 발렌타인 초콜렛 다 거절하셨다면서요. 오로지 오이카와에게만 매몰찰 뿐인 이와이즈미였으므로 후배들에게 인망은 두터워 그의 일은 금방 뜨겁게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 누군가가 말했다.
-선배, 좋아하는 사람 있으시다고!
말 한 마디로 체육관 안의 시선이 모조리 이와이즈미에게로 쏠렸다. 그 박력은 이와이즈미도 움찔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선봉장에 오이카와가 있었다. 오이카와는 생전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이었다.
“이와쨩,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어.”
오이카와의 표정이 벼락이라도 친 듯이 흔들렸다. 그리고 오이카와의 그 얼굴을 보고서 다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와이즈미의 말이 진실이라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체육관이 금방 쩡하고 달아올랐다. 이와이즈미가 몇 반의 누구냐고 캐묻는 말들, 언제부터냐는 추궁같은 것들을 건성으로 걷어내며 샤워실로 돌아간다. 그 뒤에 남겨진 오이카와는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 같았다.
“오이카와, 차였냐!”
동기들이 깔깔대며 놀리고서 지나간다. 투닥거리기는 하여도 지나치게 사이가 좋아서 사귀는 것 아니냐며 놀리는 말들이 곧잘 나오곤 하던 두 사람이었다.
“으아!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 그런데 나 진짜 전혀 몰랐어…….”
“네가 그런 반응일 게 뻔하니까 말 안했겠지.”
친구들이 핀잔을 주며 지나가고 그 사이에 서 있는 건 마츠카와와 하나마키였다. 오이카와가 뒤를 획 돌아보며 둘을 쳐다보았다.
“둘은 알고 있었어?”
“뭐를.”
“이와쨩이 조, 좋아한다는 사람…….”
하늘이 무너져도 저런 표정을 짓지는 않지 않을까. 하나마키는 나직하게 혀를 차며 생각했다.
“뭐 소문은 있었지. 오늘 들어오는 초콜렛은 전부 거절했다는 모양이니까.”
“왜 나, 나만 몰랐지?”
그러니까 그걸 몰랐다는 점에서, 이와이즈미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 알아채야 하지 않나 싶지만. 마츠카와는 조금 고개를 기울어뜨렸다.
한 사람은 보통을 뛰어 넘어 눈에 띄고 옆의 사람은 그에 비하자면 놀랄만치 담백한 편이다. 그 화려한 불균형이 둘의 기묘한 관계에도 연막을 치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둘은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 꼴이 되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모르는 건 주위만이 아니었다. 당사자들조차, 아니, 당사자조차.
모두들 너라면 이와이즈미의 일을 모조리 알고 있을거라 생각하여, 아무도 굳이 너에게는 얘기하지 않은 것인데.
“맛키, 누군지 알아? 이와쨩이 좋아한다는 사람.”
“글쎄. 나도 누군지까진.”
하나마키는 능숙하게 모른척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양인지 오이카와는 오랜 친구의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츠카와가 어찌할 바 모르고서 발만 구르는 오이카와의 옷깃을 잡아채어 샤워실로 향했다.
“뭐 이와이즈미가 좋아하는 애가 있을 수도 있지.”
“아, 안 되지!”
“뭐가 안 돼.”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말 하면?”
“어?”
마츠카와가 툭 하고 던지듯 묻는다. 오이카와가 평소와 달리 당황이 버무려진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츠카와는 수건을 챙겨들며 다시 물었다.
“너한테 말하면, 뭐 어떡할건데.”
“아니, 꼭 뭘 어떡하려고 말을 하는 건 아니잖아…….”
“어쨌든 너 이와이즈미를 도와줄 생각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말 안했겠지.”
“!”
스스로의 마음도 모르고서 화들짝 놀란 얼굴이 그를 올려다본다. 마츠카와는 혀를 찼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만의 그 시야 좁은 오만함을 좋아한다. 그래서 오이카와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이럴 땐 오이카와를 이 모양으로 빚어놓은 이와이즈미를 향해 탄식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
세 사람이 샤워실로 들어갔을 땐, 이와이즈미는 이미 씻고 나간 것 같았다. 마츠카와는 반쯤 얼이 나간 것 같은 오이카와를 하나마키에게 떠안기곤 대충 휘리릭 씻고서 바깥으로 향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적당히 털며 부실로 향한다. 문을 열자마자 단내가 훅 하고 풍겼다. 대부분이 오이카와가 받아온 초콜렛들이었다.
“이와이즈미.”
때마침 부실에는 이와이즈미 한 사람 뿐이었다. 마츠카와는 적당히 이와이즈미 곁으로 가서 캐비넷을 정리하는 척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수는 그다지 먹히지 않았다.
“그냥 물어봐.”
“갑자기 왜 맘이 변했어?”
이와이즈미는 마음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마츠카와도 하나마키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옆에서 몇 번 부추긴 적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이와이즈미는 부드럽고 단호하게 넘어갔다.
-글쎄, 봐서.
옆에서 보기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방향이 너무나 명확하여 머뭇거릴 이유조차 없는 것 같았는데도 이와이즈미는 꼼짝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본인이 움직이지 않겠다는데 제3자가 나서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어서 그대로 둔 채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었는데.
“아니, 별로 마음이 변한 건 아닌데……. 조금 짜증나서.”
“짜증?”
“저거.”
이와이즈미는 셔츠를 꿰어입으며 턱짓으로 오이카와의 초콜렛 더미를 가리켰다. 마츠카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와 초콜렛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칠렐레 해서 다 받아 오는 거…….”
“네가 받지 말라고 하면 저 녀석도 안 받을 거 아냐.”
“그렇게 말하긴 싫고.”
저 고집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마츠카와는 혀를 찼고 그의 뜻을 알아들은 이와이즈미는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해명하듯 말했다.
“비슷하겐 말해봤는데. 어차피 먹는 것도 고역스러워 하니까. 그런데 거절하는 말 하는 게 더 힘든 거 같길래.”
“……그럼 왜 네가 그러고 있는데?”
“나중에 되돌려주게.”
“뭐?”
“뒤에 가서 얘기할 때 나는 안 받았다고 말하려고.”
그래야 오이카와 녀석 콧대를 눌러주지. 이와이즈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를 의도한 말투는 아니었다. 둘에 대해 적당히 알고 있는 마츠카와가 그에게 물었고, 그러니까 그 나름대로는 성심성의껏 솔직하게 생각을 말해주는 것 뿐.
“그 ‘뒤’가 언젠데?”
“글쎄…….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형태가 없기 때문에 영원을 확신할 수도 있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그저 오래된 친구라기엔 지나쳤으나 연인이라고는 누구도 먼저 확언하지 않아, 그 무엇도 아닌 채 두 사람은 뭉근하고 둥근 관계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모르는 건 오이카와, 지키는 사람은 이와이즈미였다.
“뭐 오늘일 수도 있고. 한 오십년 쯤 뒤일 수도 있으려나.”
마츠카와는 어처구니 없다는 마음을 표현할 기력도 없어 혀를 차곤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부실의 문이 열리며 오이카와와 하나마키가 들어왔다. 오이카와가 곧장 이와이즈미에게 다가가는 거센 걸음에 문가에 기대두었던 종이봉투가 넘어져 안의 초콜렛이 우르르 쏟아졌지만 오이카와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와쨩!”
“어, 왜. 머리나 말려.”
“좋아한다는 애 누구냐니까! 왜 말 안해주고 도망 가!?”
샤워를 끝내자마자 뛰어왔는지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와이즈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캐비넷에서 수건을 꺼내 오이카와의 머리에 얹어주었지만 오이카와는 그 수건을 잡아채며 다시 이와이즈미에게 물었다.
“이거 말고, 누구냐구!”
“아 없어. 없다고. 머리 당장 안 말리냐, 오이카와.”
“……없어?”
눈앞에 당장 닥친 시비를 피하기 위한 변명인 게 분명한 ‘없다’는 말인데도, 오이카와는 마치 갈대가 바람에 휩쓸리듯 감정의 방향을 틀고서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없어. 그냥 둘러댄 말이야. 그리고 넌. 머리, 말리라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손에서 다시 수건을 빼와 그의 머리에 올리곤 거칠게 부벼주었다. 수건에 시야가 가린 오이카와가 아프다며 빽빽거렸지만 처음 부실에 들이닥칠 때의 박력은 없었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압정 아래에 겨우 반쯤 머리를 말렸을 때 하나마키가 소리쳐 둘을 불렀다. 넷이 모여 부실 바닥에 산개한 초콜렛을 겨우 치우고 정리한다. 그 와중에 오이카와가 무엇이 우정초콜렛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며 울상을 지으면서 중얼거려, 마츠카와가 흘끗 이와이즈미를 바라보게 했다. 이와이즈미가 시원하게 오이카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악! 아파! 이와쨩! 왜!”
“단내 퍼져서 짜증나.”
“윽…….”
오이카와가 조그만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한다. 그리고 초콜렛을 사이에 둔 둘의 실랑이는, 적어도 교내에서의 실랑이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츠카와는 양손에 커다란 종이봉투를 주렁주렁 쥐고서 귀가하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거리가 멀어지며 흐릿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와쨩, 이거 먹는 거 도와줄거지?’ ‘안 도와준 적 있었냐.’ 여느 때와 똑같이, 오후의 햇살처럼 강렬하고 굴곡없이 평이한 음성은 금방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관계는 사소한 가시 하나에도 상하고 틀어질 수 있다. 그 관계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채로 유지하기 위하여, 오이카와의 찬란한 외양보다 더한 연막이 필요하다면 이와이즈미는 기꺼이 그리할 셈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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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른 전력 주제 : 처음
이와이즈미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
“어? 진짜? 누군데?”
오이카와는 마시던 드링크를 곧장 입에서 떼고 몸을 휙 돌렸다. 덕분에 먹다 만 음료가 주륵 흘러서 이와이즈미는 미간을 찌푸리곤 수건 한 장을 오이카와의 얼굴에 부볐다. 오이카와가 수건을 걷어내며 재차 물었다.
“누구냐니까!”
“말하면 아냐, 네가.”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얼굴에 묻은 액체가 적당히 닦인 걸 확인하곤 땀을 닦았다. 오이카와가 그런 이와이즈미의 체육복을 붙들었다.
“그래도, 누군데? 언제부터?”
“어제부터.”
“왜 자꾸 누구인지 말을 안 하는 건데에!”
“후배야, 후배. 2학년인데…….”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배구 외에는 관심도 없는 녀석이 말한들 알겠나 싶어서, 말해봤자 소용없겠다 여긴 것 뿐인데 숨긴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건지 오이카와는 물러날 줄을 몰랐다.
“어제? 어제 언제?”
“어제 연습 끝나고.”
“……학생회 회의 있었을 때?”
“어어.”
이와이즈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한 달에 한 번씩 학생회에서 동아리 부장들과 함께 진행하는 회의가 있는 날이었고 한 달 중에 딱 하루, 이와이즈미가 혼자 귀가하는 날이기도 했다.
“이와쨩 좋아하는 사람 있는 줄 전혀 몰랐는데…….”
오이카와가 먹다 만 드링크 병을 양손으로 쥐고서 시무룩하니 쳐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와이즈미는 머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냥 나 좋다고 하니까…….”
“엑.”
“뭐, 뭔데.”
“이와쨩 헤퍼! 헤퍼!”
“너야말로 너 좋다고 하면 금방 칠렐레 해서 사귀잖냐!”
“나는……!”
뭐라 말을 하려던 오이카와는 결국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기만 하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와이즈미는 그런 오이카와의 이마를 꾹 눌러 밀어냈다. 자기는 신명나게 여자친구를 만들었다가 헤어졌다가 만들었다가 헤어졌다가 하더니.
“너는 뭐.”
“나랑은 경우가 다르지!”
“뭐가, 어떻게 다른데.”
이와이즈미는 땀을 다 닦아낸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그저 병을 양손에 쥔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처진 표정을 바꾸지 못했다.
“하여튼 애예요, 애.”
“몰라…….”
오이카와의 표정에는 온통 섭섭함이 엉망진창으로 묻어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손가락으로 오이카와의 이마를 한 번 튕겼다. 오이카와가 한 손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이마를 매만지며 먼저 코트로 나가는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
오이카와는 쿨다운을 위해 스트레칭하며 멍하니 이와이즈미의 여자친구에 대해 생각했다. 여자친구, 여자친구.
그가 알기론 이와이즈미의 첫 여자친구였다. 그 전까지 이와이즈미는 여자 문제엔 도통 무감각하게 굴곤 했으니까. 줄기차게 여자친구를 갈아치운 건 오이카와 쪽이었다. 오이카와는 왈칵 바닥에 엎어지고 싶은 마음을 겨우 추슬렀다.
‘왜 갑자기 여자친구를!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포인트는 그것이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저 쪽에서 좋아한다고 해서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와이즈미는 깊은 마음이 있어서 응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귈 필요 없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런 말을 할 근거가 부족했다. 이와이즈미의 말대로, 누가 좋다고 하면 금방 사귀고 하기를 반복했던 건 오이카와 그였다.
‘하지만 나랑은 경우가 다르잖아!’
으아아아!
오이카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체육관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내가 누구때문에 아무나라도 만나고 다닌 건데! 오이카와는 팔뚝으로 눈을 가린 채 발을 굴렀다. 죽어도 말을 할 수는 없고, 말을 할 수 없으니 말릴 수도 없다. 오이카와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그랬을까. 마음이 그래도 그냥 아무도 만나지 말고 있을걸.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람에게 진실되고 다정한 이와이즈미였다. 그러니까 매번 오이카와 그가 어리게 때로는 어리석게 굴어도 곁에 있어준 걸 안다. 상대방이 그저 좋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관계가 시작된 이상은, 분명 이와이즈미도 최선을 다할 게 분명했다. 최선을 다하다보면 자연스레 마음도 기울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기울면.
“오이카와. 뭐하냐. 일어나.”
“흐업.”
오이카와는 깜짝 놀라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치웠다. 이와이즈미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후다닥 몸을 일으켜세웠다.
“어, 이와쨩. 벌써 교복 갈아입었어?”
“어어. 오늘은 나 먼저 간다.”
“에……?”
오이카와는 바닥에 앉은 채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이와이즈미가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보고 있다가 팔 사이에 손을 넣어 번쩍 일으켜세운다. 오이카와는 입으로 맥아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겨우 몸을 바로했다.
“여자친구가 어디 가자고 해서 그런다 했어. 먼저 갈테니까. 내일 보자.”
“어……. 어어, 응…….”
오이카와는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울적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말았다. 이와이즈미가 또 애냐, 하고 그의 등을 한 번 내리치고는 척척 걸어 체육관을 벗어난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게 맞은 등을 애써 매만지며 겨우 울상을 지었다.
애라고 구박할 거면 애 취급을 해달란 말이야. 애를 혼자 두고 가는 게 어딨어…….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미적거리며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오이카와는 교복 위에 저지를 걸치고선 터덜터덜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부 일지까지 적당히 정리를 마치고 나자 아무도 남은 사람이 없었다.
학생회 회의도 없는 날인데 혼자 돌아가는 건 처음이야……. 오이카와는 노을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하나씩 하나씩 들어오는 걸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보면 그에게는 모든 처음이 이와이즈미였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이미 세상에는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그야 이와쨩 생일이 나보다 더 빠르니까 당연하지!’
그의 손을 이끌고서 어른 손의 반도 차지 않을 발걸음으로 어린 세상의 가장 먼 곳까지 이끌고 가주었던 것도 이와이즈미였다. 눈을 뜨고 본 생에 첫 친구였다. 서로가 싫다며 빽빽 소리를 지르면서 머리를 쥐어뜯고 싸운 것도 이와이즈미가 처음, 한겨울 눈밭에서 구르고 뛰놀다가 오이카와 혼자 감기에 걸려 골골댈 때에 병문안을 와 준 것도 이와이즈미가 처음이었다.
배구 ‘놀이’에 함께 어울려 준 것도 이와이즈미가 처음, 방황하는 그를 때려가면서까지 일으켜 세운 것도 이와이즈미, 그리고…….
‘처음이란 처음은 전부 다 가져갈 줄 누가 알았겠어!?’
오이카와는 돌연 억울해져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빈 깡통을 발로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앞에 있던 초등학생들이 놀라 그를 돌아보곤 쌩하니 도망친다. 오이카와는 엉거주춤 사과를 하려던 손을 떨어뜨렸다.
-사랑에 빠진 것도,
이와이즈미가 처음…….
오이카와는 기력이 쭉 빠져 걷다 말고 가로등에 몸을 기댔다. 죽고 싶다……. 우울함이 발끝에서부터 꾸역꾸역 기어올라오는 감각에 오이카와는 치를 떨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항변할 말은 있었다.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었노라고. 넘어져 울고 있으면 툴툴거리면서도 달려와 일으켜주었고, 열이 올라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땐 눈을 뜨는 순간마다 걱정어린 표정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튼 짓을 하려 들면 손을 쥐고서 놓지를 않았고 늪에 파묻혀 허우적거릴 때에는 거침없이 그를 끌고 나왔다.
그가 어떤 잘못을 해도 어떤 실수를 해도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생에 오이카와를 내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코 오이카와가 똑바로 걸어가게 만들어주었다. 옆을 보면 뚱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했지만 그렇게 언제나 옆에 있어 주었다.
정말로 사랑에 빠지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음을 말한다는 선택지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일생의 전부를 친구로 지내왔고 서로가 단 하나뿐인 절친한 친구라고 믿고 있었다. 말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오이카와는 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저울을 기울여보고 있었다. 마음을 고백하는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친구에게 솔직했다는 알량한 자기 위안, 그리고 아마도 미안하다는 이와이즈미의 사과. 그 이후의 어색하고 서먹한 거리감, 어쩌면 그대로 이별. 아주, 아주 어쩌면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끄덕여줄지도 모를 일이지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두고서 도박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차피 지금도 좋아한다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걸로 됐다고, 사귀어봤자 만나고 헤어지기밖에 더하겠어, 그러니까 이 마음은 평생 마음 속에만 묻어두고서 계속 함께 하겠다고.
‘으흑, 이건 생각 못했다고! 이와쨩한테 여자친구는!’
그래도 때로는 차마 이와이즈미에게 모두 보여주지 못한 마음이 넘쳐 흘렀다. 그럴 때면 오이카와는 그저 혼자 철철 흘러넘치는 것들을 애써 손으로 끌어모으다 어쩔 줄 몰랐다. 그러다 그런 순간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오이카와는 그것들을 모아서, 넘치고 흘러버린 것들을 모아서 줘버리곤 했다. 이와이즈미에게 해주지 못하는 것들을.
오이카와의 여자친구들은 모두 그런 식이었다. 모두가 한 사람 대신이었고 그래서 오래가지 못했다. 잘못했다는 생각은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안다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그의 머리를 후려칠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여자친구에게 오이카와가 그랬듯 그러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오이카와와 같은 이유로 만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진심으로, 자기 마음까지 기울만큼 진심으로 다정하려 노력하겠지.
오이카와는 쿵 하고 전봇대에 머리를 한 번 박았다가 비끗하여 쓰린 상처를 매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오늘은 여자친구랑 안 가?”
“우리 부활동은 늦게 끝나잖아. 먼저 가라고 했어.”
아, 그렇지. 오이카와는 겨우 조금 풀어진 미소를 그렸다. 어제 하루 이와이즈미를 먼저 다른 길로 보낸 것뿐이었는데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저절로 새어나오려는 안도의 한숨을 안으로 끌어모았다.
“어제는 데이트 잘 했어?”
“어, 뭐. 그럭저럭.”
“또 그런다! 이와쨩 여자친구한테 그러면 미움받아요!”
“내 여친이 넌줄아냐.”
“그…….”
나 지금 내장이 푹 하고 긁힌 기분 들지 않았어? 오이카와는 속으로 왈칵 눈물을 삼켰다. 이와이즈미가 그에게 언제나 툭툭 던지곤 하는 그런 말일 뿐인데도 마음처럼 유연한 반응을 해낼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애써 웃었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너 이마는 또 뭔데? 왜 그래?”
“어? 아…….”
오이카와는 깜짝 놀라서 앞머리가 스쳐지나가는 쪽 이마를 손으로 가렸다. 어제 괜히 속이 상해서 전봇대에 대고 쿵쿵거리다가 이 꼴이 났다곤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으면 했지! 오이카와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서 대번에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뭔데. 어디다 또 갖다 박았냐?”
“아, 아니. 그게. 길 가다가…….”
아아, 지금 오이카와 씨 표정 엉망일게 분명해요. 오이카와는 속으로 울상을 삼키곤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았다. 이와이즈미가 팔을 뻗어 이마를 가리고 있는 오이카와의 손을 휙 잡아내렸다.
“또 약도 안 발랐지?”
“어어…….”
“얼굴 말곤 볼 것도 없는 놈이.”
“아, 아니거든! 이 오이카와 씨가 좀 잘생기긴 했지만!”
겨우 보통 때처럼 발끈하는 얼굴을 만들어서 빽 소리쳤더니 이와이즈미가 그의 등을 퍽 하고 내리쳤다. 집에 가서 연고 똑바로 발라, 임마. 이와쨩, 아파……. 오이카와는 으레 그러듯 홧홧한 등을 매만지며 울상을 지었고 이와이즈미가 전혀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정면을 본다. 오이카와는 어렵게 눈을 피해 입술을 삐죽거렸다. 고작 이런 걸로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내가 마음에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이런 거 알아서 좀 해라. 나이가 몇인데.”
“……왜? 이와쨩이 챙겨줄 거잖아!”
“이게 사람을 진짜 보모인줄 알지?”
이와이즈미가 확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돌아본다. 오이카와는 아니라며 서둘러 부정에 부정을 하고 사과까지 십수마디를 더 덧붙인 뒤에야 이와이즈미의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이와이즈미는 때때로 여자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오이카와를 두고서 먼저 돌아가는 일이 생겼고,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붙잡지는 않았다. 데이트 에스코트는 잘 해주느냐고 놀리는 말을 겨우 할 뿐이었다.
“……오늘도 데이트 있어?”
“어, 아아…….”
이와이즈미가 교복을 평소보다 서둘러 갈아입으면, 그건 그 날 그녀와의 일정이 있다는 뜻이다. 오이카와는 스스로의 상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동자를 굴리며 짚어보았다. 오늘 오이카와 씨는 표정부터 웃는 얼굴이 나와주질 않네요. 그야 이와쨩이 어제도 데이트 갔으면서 오늘 또 가니까!
“이와쨩, 그거……. 꼭 가야 돼?”
“……꼭 가야되는 게 아니라 약속이니까 그렇지.”
이와이즈미가 답지않게 조금 어르듯이 말한다. 오이카와는 겨우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등을 후려치는 이와쨩이 나아. 여자친구랑 약속 어기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상냥해지기까지 하는 이와쨩이라니, 정말로 최악이야.
“그으~렇지, 뭐! 그럼 안녕히 다녀오시죠, 이와쨩! 오이카와 씨는 오늘도 혼자 돌아가겠습니다아.”
오이카와는 장난기를 한껏 섞어 투덜거렸다. 그 말에 이와이즈미가 돌아서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섭섭하냐.”
그를 구박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답을 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드는 데에 모든 기력을 쏟아붓고 있는 오이카와로서는 감정을 종잡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오이카와가 무슨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이 입술을 툴툴거렸다.
“섭서업? 당연히 섭섭하지! 여자친구 생기고 나서부터 이와쨩이 나한테 불성실해졌다구?”
“……말은 잘해요. 너도 그랬거든!”
“나, 나는 안 그랬어!”
오이카와는 이 말만은 진심을 담아 빽 소리쳤지만 이와이즈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 그래, 건성으로 대답하곤 몸을 돌려 체육관을 나간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손에서 힘을 푼 오이카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가 여자친구 만들었을 때 상처받은 것처럼 말하고 있어…….
그런 거, 전혀 아니면서.
*
연인들이 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처음에 대하여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느냐 한다면, 오이카와는 억울해서 버럭 외칠 말이 많았다. 나도 사람인걸! 아픈 생각은 피하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생각해두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싶어지고 만다. 이와이즈미가 데이트도 갔겠다 아무도 건드릴 사람이 없으니 신명나게 혼자서 서브 연습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이카와는 처음엔 가로등 뒤에 어찌어찌 숨었다가 이 얇은 기둥으로는 무엇도 가리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골목을 찾아들어갔다. 멀찍이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서로 한 손을 맞잡고 있다. 그리고 그 둘 중에 한 명은, 오이카와가 그림자만 보고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와쨩……이랑 이와쨩 여자친구다…….’
으아. 지나가는 길인가? 어쩌지? 진짜로 보고싶진 않은데. 오이카와는 골목길 사이에 주저앉아서 배구공을 꽉 끌어안은 채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했다. 담이라도 타고 넘어볼까? 진심으로 담벼락을 올려다보았지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넘어가는 건 무리일게 뻔했다.
다행이 두 사람은 오이카와가 있는 골목길까지 오지는 않았다. 이 근처가 이와이즈미의 여자친구네 집인 모양이었다.
‘데려다줬나보네. 하긴 나도 데려다주는데.’
오이카와는 골목 너머로 흘끗 쳐다보곤 괜히 뺨을 부풀리고 투정조로 생각했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뭐라고 하고 울겠는가. 친구한테 여자친구가 생겨서요? 여자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줘서요? 오이카와는 입술을 꽉꽉 깨물고서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데 목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대화 소리가 멎은 뒤였다. 오이카와는 슬쩍 골목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가로등의 어둑한 불빛 아래에서도 이와이즈미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이와이즈미가 앞에 선 소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넘겼다. 그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이와이즈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뚝, 오이카와는 자신의 손등에 떨어진 빗방울을 내려다보았다. 늦은 밤이었으나 구름 하나 없이 청명한 날이었다. 오이카와는 덧없는 웃음이라도 지어보려고 했지만 빗방울은 쉴새없이 툭투둑 떨어져내렸다.
생각, 했어야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물밀듯이 쏟아졌다. 생각을 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아무런 각오도 다짐도 없이 직시하고 만 현실은 몹시도 아팠다. 둘은 연인사이이고, 몇 번이나 데이트도 했고, 손을 맞잡고 귀가하니까, 그 다음도 어쩌면 당연한데.
그런데…….
“……오이카와.”
“흐압.”
배구공 위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던 오이카와는 깜짝 놀라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등 뒤로 가로등 빛을 인 이와이즈미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놀란 오이카와가 뒤로 넘어가려는데 이와이즈미가 덥석 그의 팔을 잡아채 일으켜 세웠다.
“어, 어떻게.”
“뭘 어떻게야. 숨는 것부터 다 봤거든.”
“지, 진짜?”
오이카와를 세워놓고서, 이와이즈미는 팔짱을 낀 채 오이카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오이카와는 놀라서 눈물이 그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줄 모른 채 이와이즈미의 눈을 피했다.
“울었냐?”
“아, 아니거든요? 이 오이카와 씨가 왜 울어요?”
“흠.”
‘안 믿어’라는 뜻의 흠, 이다. 오이카와는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만 했다. 그 뒤로 한참이나 오이카와를 바라만 보던 이와이즈미가 덥석 오이카와의 손을 낚아챘다.
“가자.”
오이카와는 손을 뿌리치지도 않고 맥아리 없이 이끌려가며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렸을 때와 똑같았다. 그가 처음으로 또래 친구들과 다투었을 때, 이와이즈미는 어디선가 번쩍 하고 나타나서는 다툼도 시비도 다 주먹으로 꽝꽝 끝내버리곤 이렇게 그의 손을 잡아 끌고 집으로 향하곤 했다.
“……어어, 이와쨩, 여기 어디…야……?”
집으로 향하곤 했는데……. 오이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자주 가지 않는 공원이었다. 시간이 늦어 지나가는 사람도 없이 한적했다. 공원 벤치 쪽에 다다랐을 때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손을 놓고 뒤돌아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너 왜 울었는데.”
“크헙.”
이와쨩, 너무 직구야……. 오이카와는 굳은 표정을 풀질 못하고서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말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서운해 죽겠는데?”
“……어어, 그게요…….”
“왜 울었어. 뭘 보고 울었는데. 거기 숨어서 뭐했어?”
“아, 아니…….”
나 안 그래도 요즘 쭉 서러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추궁하면. 오이카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어떻게든 둘러댈 말을 쥐어짜고 싶었지만 이와이즈미가 입맞추는 현장을 목격한 충격과 근래의 마음고생 탓인지 생각만큼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저기요, 이와쨩…….”
“어. 말해봐.”
“그러니까 그게요…….”
마음이 짓이겨지고 그렇게 흐르는 진물이 차고 넘쳐서 버럭 외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어떻게도 이와이즈미를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야, 아, 아니. 야, 오이카와. 내가 뭐, 뭐랬다고 울어. 야. 야야.”
“우, 우는 거 아니거든!?”
오이카와는 빽 소리치고는 결국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으아, 눈물아 좀 그쳐봐! 주인님 인생이 망하고 있다구! 하지만 말을 들을 줄 모르는 눈물은 그칠 줄도 모른다. 한참을 당황해 허둥거리던 이와이즈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오해하게 하지 마라, 오이카와.”
“무, 무슨 오해요.”
오이카와는 앵도라진 목소리를 내면서도 서둘러 눈물을 그치게 하려고 애썼다. 노력한 것은 보람이 있어서 목소리에는 눈물이 꽉 들어차긴 했으나 그나마 멈출 수 있었다.
“내가 여자친구 생긴 게 뭐라고 네가 이렇게 우냐.”
“…….”
이와쨩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게 뭐라고 내가 우냐고? 그야, 내 세계가 전부 망가지게 생겼으니까. 이 말을 할줄 알고. 죽어도 안 할거야. 죽어도. 죽어도, 절대, 죽어도…….
“너 이렇게 울고 그러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긴 하냐? 어? 멍청아.”
“무, 무슨 생각을 하는데.”
바보라는 생각? 멍청이라는 생각? 아, 이미 멍청이라고 불렀지. 그러면 귀찮고 번거롭다고 생각할까? 손이 많이 간다고?
오이카와는 답은 이미 알고 있다며 젖은 뺨을 쓱쓱 닦아냈고.
“아, 나 좋아하나? 하고 생각하거든.”
오이카와의 눈물로 젖은 종이같은 세계가 단번에 찢어졌다.
*
오이카와는 처음에는 얼어붙었다가 그 다음에는 입을 딱 벌리고서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이와이즈미는 아까 전부터 쭉 그를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어떻게 알았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끝내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피하고서 한숨을 쉬었다. 햇빛은 모두 자취를 감춘 어둑한 밤이어서 붉어진 목덜미는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여자친구는 도대체 왜 만들고 다녔냐?”
“마, 만든 건 이와쨩이잖아!”
“네가 먼저거든.”
일부러 평소마냥 구박하는 투로 말을 해보는데 겨우 그치게 해두었던 오이카와의 눈물이 또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내가 죄인이지,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오이카와의 뺨을 손바닥으로 쓱쓱 닦아냈다. 그래도 눈물은 멎지를 않았다.
“그리고 울기는 왜 우냐고, 도대체.”
“이, 이와쨩이 뽀뽀했잖아! 여자친구랑! 첫키스!”
“……이게 진짜. 일단 안했고 했어도 첫키스는 아니거든!?”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오이카와가 세상이 다 무너진 표정을 지으며 이와이즈미를 바라본다. 이와이즈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꾹꾹 내리눌렀다. 이 녀석 새까맣게 다 잊어먹었구만?
“그, 그럼 누구랑 했어? 나 몰래 했어?”
“뭘 너 몰래 해!”
“그럼 누구냐니까!”
“너다, 임마! 너! 너! 초등학교 때 대차게 박아놓곤 다 까먹었지? 어?”
“……아?”
오이카와가 둥글게 뜬 눈을 깊이있게 깜빡, 했다. 남은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그제야 눈물을 그친 형상이다. 이와이즈미는 머리가 띵하고 아파서 아까부터 연거푸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아무 관심 없다는 듯이, 몇 번이나 여자친구가 바뀌는 것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보기만 해야했다. 그런가보다 했다. 자신의 마음은 열병으로 생각해 묻어두기로 했다. 언제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워 눈을 뗄 수 없었던 그의 소꿉친구는, 그의 시선도 관심도 마음도 모조리 가져가놓고서는 모르는 척 새침하게 웃기만 했다. 그래, 그만해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서는 그를 보는 오이카와는 언제고 수도꼭지가 터질 듯이 아슬아슬 울듯 말듯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세상의 마음 아픈 것은 모두 자기 심장에 둔 것처럼 다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또 금방 마음이 흔들려서 약속도 무엇도 다 그만두고 저 녀석 챙겨 집에 가야겠다, 싶다가도.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했다가도.
“말해.”
“네, 넵?”
“말하라고. 나한테. 지금. 네가 하는 생각.”
저렇게 울려가면서까지, 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당장 말해.”
“……도망 안 간다고 약속해.”
“약속해.”
“서먹해지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줘.”
“약속한다.”
“앞으로도 쭉 나랑 있어줄 거라고도 약속해.”
“……빨리 말 안하냐?”
오이카와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우느라 지쳐, 귓가에는 땀방울이 맺혀있다. 닦아주고 싶었다.
“이와쨩이 좋아…….”
“맨날 하는 말이잖아.”
“…….”
“어떻게 좋은데.”
“그, 그럼 이와쨩은?! 나 좋다고는 한 번도 말 안했-.”
오이카와가 번쩍 고개를 들고 빽 소리치다가 그의 목소리가 이와이즈미의 입술에 푹 묻혔다. 은하수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뒤에 이와이즈미가 겨우 오이카와를 놓아주었다. 이와이즈미는 제발 붉어진 얼굴이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말했다.
“이렇게 좋다고.”
“…….”
“어떻게 좋은데, 넌.”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결국 오이카와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오이카와가 그의 옷깃을 붙잡은 채 하늘을 보고 펑펑 울어버렸던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울기만 한다. 이와이즈미는 우는 오이카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오이카와는 정작 기억도 하지 못하는 불꽃같은 첫 입맞춤의 추억을 연거푸 말해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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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른 전력 주제 - 선물
맴맴맴맴
벌써부터 매미가 울기 시작한다. 해가 다 떨어져가는데도 매미는 쉴 줄을 몰랐다.
한창 서브 연습에 열중하던 오이카와는 멀찍이서 이와이즈미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연습하고 싶었지만, 학기 초에 염좌로 잠깐 고생했던 일이 있었던 탓에 이와이즈미의 말이라면 꼼짝을 못 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원래 꼼짝도 못했는데!’
오이카와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샤워실로 향했다.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이와이즈미의 표정이 심상찮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꼭 모으고서 애띠게 웃었다.
“이, 이와쨩?”
“집에 가서 몰래 연습 더 해봐라, 한 번?”
“그, 그런 생각 안 했거든요!”
몰래 했다가 염좌 오는 바람에 된통 걸렸지 않던가. 오이카와는 자기도 모르게 헬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의 이와이즈미는 정말로 굉장했다. 제대로 화도 내지 않고 그를 병원에 처박아 놓고서는 그 뒤로 며칠간 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등하교는 꼬박꼬박 하던대로 같이 하고, 그런데 말은 하질 않고, 두 사람이 겨우 화해 아닌 화해를 한건 오이카와가 다시는 무리하지 않겠다고 반쯤 울며 빌고 난 뒤였다.
“거짓말 하면 내가 어쩐다고 했지?”
“……죽여버린댔어요…….”
“잘 알고 있네.”
칼같이 서늘하게 말한 이와이즈미가 수건 하나를 챙겨들고 먼저 샤워실로 향한다. 오이카와는 이미 둘 밖에 남지 않아 빈 체육관을 한 번 뒤돌아보곤 이와이즈미를 따라 샤워실로 향했다.
인터하이 예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
고등학생, 소꿉친구. 이 두 단어가 만나면 보통 두 사람 사이에 10년 이상의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말인즉슨 매년 다가오는 생일을 챙기는 게 점점 더 일이 된다는 얘기다.
그래도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나름 서로의 생일을 정성껏 챙기는 편이었다. 케이크나 파티같은 건 친구들과 다같이 하더라도 선물만은 직접 고른 것으로. 새벽 12시가 되는 순간, 서로의 집 앞에서. 그 직접 고른 것이 대개는 배구화라거나 무릎보호대일 때가 많았지만 어떤 날은 무늬가 특이한 창문용 커튼이었고 어떤 날은 품이 꼭 맞는 후드티였다.
하지만 이번 여름만은.
오이카와는 배구공을 양 손으로 쥔 채 코트 너머를 주시하며 심호흡했다. 이번 여름, 다가오는 이와이즈미의 생일에는 아주 특별한 걸 선물로 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주지 못했던 것, 하지만 매년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줄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마저 올해가 마지막.
오이카와는 공을 띄우고 코트 쪽을 향해 힘주어 발을 내딛었다. 몸을 낮추며 한 발 한 발 달린다. 응축된 힘으로 몸을 띄우며 젖히고 그대로 내리친다. 콰앙, 체육관을 울리는 요란한 소리가 난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오이카와는 곧 민망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다른 생각 좀 했기로서니 곧장 아웃일 건 뭐람~!’
“오이카와.”
“……왜, 왜 그러십니까아, 이와쨩.”
때마침 체육관에 들어온 이와이즈미가 빗나간 서브를 본 모양이었다. 굴러가는 공을 흘끗 보더니 오이카와를 바라본다.
“집중 못하겠으면 쉬어.”
“그, 그런 거 아냐.”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공을 띄우고 서브를 넣었다. 이번에는 코트 안쪽에 확실히 들어간다. 그 공을 잠시 바라본 이와이즈미가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워밍업을 위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오이카와가 공 던지는 것 하나만 봐도 상태를 알겠다는 태도였다. 하긴 그러니까 조금 무리를 할까 말까 싶으면 귀신같이 알아채서는 끌고 가는 거겠지, 오이카와는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공을 손에 쥐었다.
-이와쨩은 배구 하고 싶어?
중학교 때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고 지금도 묻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묻지 못할 거다.
자신이 배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더라, 그것은 뚜렷하게 기억에 있었다. TV에서 보았던 모습에 푹 빠졌다. 저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손에 공을 쥐었다. 위로 던졌다, 앞으로 달렸다, 뛰어올라 내리쳤다. 그래도 부족했다. 더, 좀 더, 좀 더, 앞으로, 좀 더, 위로.
정신없이 내달리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을 때 자신의 옆에는 이와이즈미가 있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는 배구공 가지고 노는 그를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어린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면 아마도 자신때문이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싫은 것에, 오로지 타인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몰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와쨩, 아닌 척 해도 엄청 다정한걸…….’
오이카와는 결국 서브를 넣지 않은 채 공을 꽉 쥐었다. 때때로 하는 말은 매섭고 그가 허튼 소리를 한다 싶으면 후려치는 데에 망설임이라곤 없는 이와이즈미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지울 수 없는 그의 다정함이 있었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으니 짧다면 짧은 인생일 것이나 그 시간동안 그를 끌어들였던 늪에서 매번 그를 건져올린 것이 이와이즈미였다. 온힘을 다하여, 함께 빠져드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오이카와를 위해서.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오이카와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이카와 그가 이와이즈미에 대해 잘 아느냐고 묻는다면, 둘과 오랜 시간을 보낸 친구들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었으나 오이카와 본인만은 속으로 부정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가 배구를 하게 된 것도, 윙스파이커라는 포지션을 잡게 된 것도, 마침내 아오바죠사이의 에이스가 된 것까지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물흐르듯 흘러가버렸고 때문에 오이카와는 그 모든 길목에서 이와이즈미에게 하고 싶으냐고 묻는 것을 잊고 말았다.
어렸을 때에는 물을 줄 몰랐고 도중에는 묻는 것을 잊었고 이제는 묻는 것이 두려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당연히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마저 때로는 자기세뇌가 아닌가 돌이켜보곤 했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배구에 관심도 없으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면 이와이즈미는 초등학교 시절도, 중학교 3년년과 고등학교 3년까지도 전부 오로지 오이카와 그만을 위하여 그 모든 시간을 배구에 쏟아부은 셈이 된다. 그럴리야 없을 거다. 아무리 이와이즈미라도. 그러니까 좋아서, 배구가 좋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 그리고 그렇게 믿기 때문에.
오이카와는 가볍게 숨을 들이키고, 몇 백번 몇 천번 몇 만번 해와 몸에 익은 동작 그대로 위를 향해 공을 띄웠다. 아름답게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공을 따라 첫발에 힘을 주어 내딛는다. 몸을 억누르듯 굽힌다. 달린다. 튕기듯 뛰어올라, 목표로 한 곳을 향해 내리친다.
콰앙!
체육관 바닥에 거세게 부딪힌 공이 튀어간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건 몇 되지 않았다. 그 몇 되지 않는 것 중에 하나였다. 시작이 어찌되었든 이와이즈미가 지금 아오바죠사이의 에이스 윙스파이커라는 사실은.
그래서 오이카와는, 지난 시간 내내 생각해왔다. 이와이즈미에게 주고 싶은 것을.
*
내 에이스에게,
눈부신 승리를…….
바닥에 떨어지는 공은 이쪽 코트에 있었다. 정렬하고 인사를 하고, 그리고 물러설 때까지 오이카와아는 굳은 얼굴이기는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전국으로의 길은 또다시 시라토리자와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몇 번째인지 세지는 않았다. 학교로 돌아오는 버스 안은 고요했지만 학교에 도착했을 때, 오이카와는 웃는 얼굴로 부원들을 다독거리고 해산시켰다. 감독님과 코치님이 그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돌아가 휑한 체육관에는 오이카와와 그의 뒤에 서 있는 이와이즈미 두 사람 뿐이었다.
“오이카와.”
오이카와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알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웃는 얼굴은 마지막 한 사람이 체육관을 나가는 순간 함께 잃어버렸다. 오이카와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낙하한다. 이와이즈미는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끝내 오이카와의 아래에, 빗방울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날 때까지.
“오이카와.”
한 번 더 이름을 불러본다. 그래도 돌아보지 않는다. 이와이즈미는 걸음을 옮겨 오이카와의 앞에 섰다. 오이카와는 울고 있었다. 눈물을 닦아내지도 않고 그저 흘러넘치게 두고서.
강호라는 학교에 있지만 라이벌은 있었고 이긴 횟수만큼 진 적도 많았으나, 오이카와는 언제나 패배에는 면역이 없는 듯이 지고 난 다음이면 진정할 줄을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우는 걸 마지막으로 본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는데. 이와이즈미는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야, 오이카와.”
“흐어엉, 이와쨩~!”
그리고 마침내 오이카와가 풀썩 주저앉더니 그의 바짓단을 붙잡고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를 높여 운다. 이와이즈미는 깜짝 놀랐다가 서둘러 마주 앉아서 어떻게든 그가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했지만, 오이카와는 그저 터뜨리듯 울기만 할 뿐이었다.
“흐어어엉!”
목을 놓고 꺼이꺼이 울어댄다. 온 뺨이 눈물로 젖어들어간다. 이와이즈미는 그 눈물을 어떻게든 닦아주려고 했지만 그의 손이 훔쳐내는 것보다 쏟아지는 게 더 많았다.
“봄고, 하기로 했잖아.”
패배 앞에서 다시 한 번 더 일어서기로, 모두와 함께 결의하였다. 한 번 더 도전하기로. 말을 꺼낸 건 오이카와 본인이었으므로 그 얘기로 그를 달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되레 왈칵 오이카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늦어! 그건 늦는단 말야!”
오이카와는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고 울었다. 봄고는 남아 있으니 거기서 한 번 더.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이 여름은, 6월의 승부는, 그래서 얻을 초록빛 승리는 올해가 마지막이었다. 올해가 마지막 인터하이였다.
하지만 그를 달래기 위해 그저 앞에서 어색한 위로의 말을 늘어놓고 있는 이와이즈미에게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어서 오이카와는 하염없이 떼라도 쓰듯 엉엉 울기만 했다.
너에게 승리를 주고 싶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가올 너의 생일에 그동안 우리가 가장 갖고 싶었던 것, 내가 나의 단 하나뿐인 에이스에게 가장 주고싶었던 것을 안겨주려 했다.
“뭐가 늦는데. 뭐에 늦어. 너 왜 우는 건데.”
다른 부원들 앞에서는 잘도 의연한 척을 해놓고서 돌아서면 분해 어쩔 줄 모르는 거야 익히 아는 바였지만, 모두와 함께 봄고에 다시 가자고 말한 본인의 얘기가 이상하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뺨을 거칠게 문지르며 윽박지르는 듯이 또는 다정하게 달래는 듯이 말했다.
“내가, 이와쨩한테……!”
오이카와가 홱 고개를 들고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와이즈미는 눈물로 젖어서, 그리고 그가 눈물을 닦아낸답시고 문지르는 통에 발갛게 달아오르는 뺨으로 그를 보는 오이카와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패배 앞에서 익숙해지지 않고 익숙해지지 않으려하는 모습은 익히 봐왔다. 하지만 오늘의 눈물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나한테? 너 다른 땐 몰라도 오늘은 실수한 거 없었어.”
“그런 말이 아니야!”
“그럼.”
“이와쨩은……. 이와쨩은 내 맘 몰라!”
“그래, 모른다. 모르니까 좀 알려줘 보라고! 이 멍청아!”
그래도 오이카와는 계속 계속, 소리 높여 울기만 했다. 이와이즈미는 입술을 꽉 깨물고 한숨을 삼켰다.
“야. 오이카와. 목 쉬니까 이제 그만 울어.”
“허어엉, 허어어엉!”
“내일 애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냐. 하, 눈도 다 붓겠네. 야, 오이카와.”
이 어린 녀석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신이시여! 이와이즈미는 천장을 쳐다보고 한탄했다. 자신이라고 해서 오이카와가 이렇게 우는 걸 듣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건만.
“오이카와!”
“이와쨩은, 이와쨩은 내 맘 몰라!”
“너도 몰라! 너야말로 몰라!”
이와이즈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윽박지르듯 버럭 외치는 말에 오이카와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꼬리를 타고 남은 눈물이 한 번 넘쳤다가 마지막 남은 방울이 또르르 타고 흐른다. 겨우 울음을 그친 모양새였다.
“아. 이제 좀 그쳤네. 진정 좀 해라. 일단 나가서 포카리 사올테니까…….”
“내, 내가 뭘 모르는데? 이와쨩?”
“그럼 너부터 왜 우는지 말해보던가.”
“……나, 나는. 우리가 져서.”
“그것만이 아니잖아. 내가 너 거짓말하면 어쩐댔냐.”
“……죽여버린댔어요…….”
“그럼 이실직고 해라.”
이와이즈미가 몰아세우고 결국 오이카와가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와이즈미는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생일 선물…….”
“생일 선물?”
“이와쨩 생일 선물, 주고 싶었어…….”
“아직 며칠 남았어. 주면 되겠네.”
“아 진짜! 이와쨩! 눈치라고는 없어가지고!”
결국 오이카와가 팩 고개를 들고는 그를 노려본다. 이와이즈미는 험악하게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오이카와의 양뺨을 붙잡고 쭉 잡아늘렸다.
“아, 아하(아파)!”
“다시 말해봐. 내 생일 선물을 주고 싶었는데 뭐 어쨌다고?”
“아야야야~!”
“설마 ‘전국으로 가는 승리를 생일선물로 주고싶었어’이딴 얘기는 아니겠지? 그래서 선물을 못 줘서 지금까지 이렇게 울었다는 그런 얘기는 정말로 아니겠지, 바보카와?”
“…….”
오이카와가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서 또 금방 그 눈꼬리에 눈물을 채웠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뺨에서 손을 떼고 그의 등을 철썩 내리쳤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아, 아파! 이거, 이거는 진짜로 아팠어! 이와쨩!”
“그건 내가 너한테 줄 거였어!”
“……아?”
오이카와가 눈을 깜박거린다. 두 어번, 더 깜박거렸고 덕분에 또 눈물이 뚝 떨어졌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는 7월, 여름이 한층 더 불타오를 때.
가장 신록으로 물들었을 그 승리를,
내가, 너에게…….
“그러니까 넌 주제넘는 소리 하지 말고 그만 집 가자. 나 진심으로 배고프다.”
“어, 이와쨩? 그러니까…….”
이와이즈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챙겨드는 와중에도 오이카와는 체육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만 있다. 결국 이와이즈미는 깊이 깊이 한숨을 내쉬곤 오이카와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고 번쩍 일으켜세웠다. 집 가자고. 이와이즈미가 으르렁대듯 말하자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쩔 줄 모르는 그대로였다.
“이 멍청한 걸 주장으로 세워놓고, 우리도 참 잘하는 짓이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가방까지 챙겨들고서 그의 손을 낚아채듯 쥐어 잡고 끌었다. 밖으로 향하자 끌려오긴 한다. 이와쨩, 하고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여전히 습기에 차 있었다.
기왕 울게 할거라면 기쁨의 눈물을 선물로 주고싶었지만.
“올해 생일 선물은 늦다, 바보카와.”
“어, 어어?”
“겨울에 줄 거니까 그렇게 알아.”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서, 매미가 계속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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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ㅇ..앙... 행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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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소재 / 초현실 소재
***
피 흘리며 식어가는 이와이즈미의 몸을 붙들고 있는 오이카와 앞에 악마가 나타나 말했다.
-시간을 되돌려주마.
오이카와는 친구의 시체를 품에 붙들고 악마를 올려다보았다. 악마가 빙그레 웃었다.
-시간을 되돌려주마.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신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시간을 되돌려줄 수는 있지.
녹인 설탕처럼 진득하고 다정한 말씨였다. 그래서 더욱 악마임을 실감하게 된다. 오이카와는 우는 얼굴 그대로 악마를 바라보았다. 악마가 눈을 접고 웃으며 말했다.
-대신 네 사랑의 말은 모두 내가 받아가마.
오이카와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젖은 얼굴로 악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너는 네 친구에게 사랑해서 하는 그 모든 말을 할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보고싶다는 말도 그립다는 말도 할 수 없다.
오이카와는 울면서도 악마를 쏘아보았고 악마가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어쩌면, 내가 가고 난 뒤에 상냥한 천사가 와줄지도 모르지. 천사를 기다려봐도 좋아.
오이카와는 눈물이 철철 흐르는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거야말로 악마다운 말이네. 하지만 난 이와쨩을 두고서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다른 기회를 기다리지는 못해. 그러지는 않아.
-사랑해서 하는 그 모든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악마가 관대한 목소리로, 정말 괜찮으냐고 염려라도 하는 듯이 물었다. 오이카와는 눈물을 쏟으면서도 억지 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평생을 말할 생각 없었어.
낮은 그의 말에 악마는 웃었고 모래시계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선택을 주저하지 않는 그대에게 선물을 한가지 더 주지.
악마의 모래시계가 춤을 추었다.
-네 바람을 이룰 수 있을 때까지 무한의 기회를. 선물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악마의 선물은 어디까지 선물인가.
*
오이카와는 눈을 번쩍 떴다. 꿈? 얼굴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해가 지는 오후, 그의 손에서 배구공이 왔다, 갔다 춤을 췄다. 노을에 비쳐 긴 그림자가 이리저리 춤을 추다가 엇하는 사이에 배구공이 제멋대로 튀어나갔다. 이와이즈미가 타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숨을 쉰다. 공을 주으러 가는 사람은 이와이즈미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오이카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꿈? 그렇게 현실적인 꿈이 있을 수가 있을까. 오이카와는 서둘러 이부자락 주위에 손을 뻗었다. 금방 휴대전화가 잡힌다. 5월 19일, 화요일. AM 5시 23분.
금요일……이었는데. 그건 확실했다. 다음날이 주말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다시 화요일일까. 악마가 말했다. 시간을 돌려주겠다고. 꿈이 아니었나? 정말로 그 모든 일은 있었던 일이고, 자신은, 지금은…….
오이카와는 이불을 걷고 나왔다. 더는 자고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
“이와쨩!”
“오이카와. ……너 눈이 왜 또 그래? 밤에 또 잠 안잤냐!”
익숙한 등교길이었다. 매일매일 함께 하기를 이제 6년째. 무언가 기억과는 다른 점을 되짚어보려해도 똑같은 그림을 또 보는 것처럼 낯익기만 해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아, 아냐. 무서운 꿈 꿨단 말야.”
“무서운 꿈?”
오이카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나 완전 울고 불고 하면서 깼다고.
“무슨 꿈이었는데.”
“…….”
그렇지만 이와쨩에게 네가 죽는 꿈을 꾸었다고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 오이카와는 속으로 생각하곤 ‘몰라, 기억안나.’라고 말했다.
“바보냐.”
“흥. 이와쨩이 매일 때리니 오이카와 씨 정말로 바보가 됐나보지요!”
“얼씨구.”
정말로 꿈이지 않았을까? 오이카와는 희망을 가져보았다. 손을 적시던 피도, 눈을 어지럽히던 붉은 빛도 당장 바로 앞에서 봤던 것처럼 생생했지만 그래도 그건 꿈이지 않았을까.
“……바보카와. 진짜 너 괜찮냐?”
“……몰라. 난 이와쨩이-.”
없으면 안 되니까, 그 말을 하려고 했다.
열린 입으로 새어나오는 소리가 없다. 오이카와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어섰고 이와이즈미도 굳은 얼굴이 되어 그를 바라본다. 오이카와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감쌌다. 이와쨩이 없으면 안 돼. 다시 말하려 했지만 그저 입술만 버끔거릴 뿐이었다. 숨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야, 오이카와! 너 괜찮아? 오이카와!”
“아, 아아. 아. 괜찮아, 괜찮아. 놀랐지, 이와쨩?”
“이……. 이 망할 오이카와! 사람을 놀래켜도 그런 걸로 그러냐!”
오이카와가 다시 활짝 웃으며 짓궃은 표정을 지었고 잠시 얼어있던 이와이즈미가 왕창 얼굴을 구겼다. 그의 매서운 손에 등을 맞으면서도 오이카와는 장난스레 웃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사랑해서 하는 그 모든 말을 할 수 없다.
악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금요일 오후, 오이카와는 그날 내내 이상했다. 불안한 것 같기도 했고 초조한 것 같기도 했으며 울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부활동 하는 내내 오이카와는 도통 집중을 하지 못했다. 스파이크는 치는 족족 아웃이거나 네트에 부딪혔고 누가 불러도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화를 냈던 이와이즈미도 그쯤 되면 걱정스러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몸이 안좋으면 집으로 돌아가서 쉬라고 했지만 오이카와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오이카와.”
“……응?”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가방끈을 꽉 붙들고서 걸음을 맞추는 오이카와를 흘끗 바라보았다. 조금 사선 아랫쪽을 향한 눈길에 달라붙은 진득하고 검은 것은 불안함이었다.
“너 무슨 일인데. 왜 그래?”
오이카와는 가방 하나만 메고 있었다. 교문 앞에 우뚝 멈춰선다. 오이카와는 본래도 피부가 흰 편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은 유독 하얬다. 핏기가 없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와이즈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때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가방끈을 잡아당겼다.
“이와쨩, 오늘……. 오늘 다른 길로 가자.”
“왜. 어디로.”
“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제 맛키가 과자 맛있는 데 알려줬어. 거기, 거기 가자.”
정말 가고싶었다기 보단 방금 겨우 쥐어짠 것 같은 이유였다.
“갑자기 웬 과자야.”
“먹고 싶어서 그래. 이와쨩, 나하고-.”
오이카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처럼 입을 버끔거렸지만 새어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그것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오이카와의 얼굴은 절박했다. 울 것 같기도 했다. 과자같은 거 먹고 싶은 얼굴이 아니잖아.
“……알았어. 가자. 표정 좀 풀어.”
“…….”
오이카와가 흐릿하게 웃더니 이와이즈미를 잡아 끌었다. 교문까지 왔던 지지부진했던 걸음은 어디로 갔는지 빠르고 급한 걸음이었다. 오이카와가 뒤쪽의 골목을 한 번 돌아보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 진짜 무슨 일 있으면 말을 해라.”
“내가 언제 이와쨩한테 말 안 한적 있었어?”
잠깐 사이에 기분이 급변했는지 오이카와는 조금쯤 웃는 얼굴이기까지 했다. 오늘 오후 들어 처음 보는 미소 비슷한 것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속으로 얕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실없이 웃는 게 제일 잘 어울리는 놈이 어울리지도 않게 심각한 척은.
그리고 그것이 그의 ‘그 날’의 마지막 감상이 되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가 오이카와의 바로 곁에 있던 이와이즈미를 곧장 치고 지나갔다.
*
“맙소사. 그 쪽지시험 어려운 걸 다 맞았다고?”
목요일 점심시간, 하나마키가 주스팩에 빨대를 꽂아 쭉쭉 빨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이카와가 명석한 편이기는 그 과학 교사는 어렵고 깐깐하게 문제를 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나도 답 알려줘! 우리 다음 시간인데.”
“엣헴. 오이카와 님이라고 불러주면 모두 알려주지요.”
“저 바보카와 뭘 잘못 먹은 거 아닌가 몰라.”
“이와쨩은 나한테만 너무하는 거 아니야!?”
“너무하긴 뭘 너무해!”
여느때처럼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게 한 소리를 던지고, 그 사이에 하나마키는 빈 노트를 가져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와이즈미 군, 미안하지만 일단 다음 시간 나의 생존을 위해주시게. 그의 장난스러운 말에 이와이즈미가 혀를 차곤 오이카와를 놓아주었다.
“너 문제까지 다 외웠냐?”
“그으럼!”
오이카와가 번호를 적고 그 옆에 바로 답을 적는데 거침이 없었다. 하나마키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똑똑하긴 했어도 얘가 이런 애는 아니었는데? 하나마키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 뒤늦게 그들에게 다가온 마츠카와가 책상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응? 맛츤, 왔어? 맛츤도 알려줘?”
“얘 진짜로 뭐 잘못 먹었나본데…….”
“그치! 마츠카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나마키에게 밀려 잠자코 있던 이와이즈미가 동조자를 얻어 벌떡 일어선다. 오이카와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내가 똑똑한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야!”
“그야 넌 바보카와니까.”
이와이즈미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마츠카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마키가 웃었다.
*
“얘 또 왜 이래?”
“오늘 과학 쪽지시험 말아먹었대. 다 틀렸다는데.”
“뭐? 다 틀려? 과장 아니고?”
오이카와는 머리위로 웅웅 울리는 이와이즈미와 하나마키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책상에 엎드린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건 그런데 섬세도 하다. 시험 망쳤다고 이러고 있어?”
“내 말이.”
“……둘 다 내맘 몰라!”
결국 오이카와는 벌떡 일어나서 빽 소리를 치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뒤에서 이와이즈미가 어처구니 없다는 목소리로 큰 소리를 냈지만 오이카와는 못 들은 척하고 복도를 내달렸다. 멈춘 건 마츠카와와 부딪혔을 때였다. 오이카와는 마츠카와의 어깨에 부딪힌 자신의 팔을 쓰다듬으며 울상을 지었다.
“아야야……. 깜빡했네.”
“어딜 그렇게 뛰어가? 뭘 깜빡했는데.”
“맛츤이 지금 오는 거요! 오이카와 씨는 우울하니까 그럼 가던 길 가겠습니다아. ……교실에 이와쨩이랑 맛키 있어. 얼른 가봐.”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달려온 방향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마츠카와는 오이카와의 미소가 어딘가 바스러진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감각은 금방 사라졌다.
*
“오버워크는 안 된다고 했잖아!”
“그,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냥! 그냥!”
이와이즈미는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오이카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금요일 오후, 연습하는 내내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은 오이카와였다. 오후의 부활동이 끝나고 집에 가기 위해 교복을 갈아입을 때까지도 그랬다. 부쩍 지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어디 아픈가, 하는데 돌연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옷깃을 붙잡았다. 체육관에 조금만 있자.
왈칵 성을 내려는데 오이카와가 아무 말 없이 그의 옷자락을 쥐고 있기만 한다. 그 지치고 절박한 모습은 본 일이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이와쨩.”
“어어.”
연습을 할 것도 아니고 앉아만 있자니, 도대체 뭘 하자는 거지. 불이 다 켜진 체육관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앉아서, 이와이즈미는 혀를 차면서도 시간이 아깝다 싶어 과학교사가 내준 과제를 꺼냈다. 내일까지 해 가야 했다. 그가 과제에 집중하느라 건성으로 대답하자 오이카와가 금방 앵도라진 목소리를 낸다. 이와이즈미는 혀를 찼다. 어휴, 저 어리광쟁이.
“나 이거 내일까지 해가야 된다고.”
“내가 다 해줄게!”
“바보 오이카와가 무슨 수로. 쪽지시험도 다 틀렸으면서?”
“할 수 있어!”
오이카와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이와이즈미의 손에서 프린트를 휙 뺏들었다. 이와이즈미는 해 볼테면 해보라는 뜻에서 잠자코 손을 놓고 오이카와가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이와이즈미 곁에서 체육관 바닥에 대놓고 엎드린 오이카와가 단번에 프린트의 빈칸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야. 너 아무거나 쓰면 안 된다고!”
“아무거나 쓰는 거 아니야! 정답이라고!”
“계산도 안 하고 적는 게 어디가 정답이냐!”
“이와쨩은 나 못 믿어!?”
“바보카와를 어딜 믿냐!”
“그럼……. 그럼 내일 확인해 보면 되잖아!”
“……네 오답을 내가 혼나는 걸로 확인해 보라고 지금 그러는 거냐?”
이와이즈미가 음산하게 물어보는데도 오이카와는 자신이 적은 게 전부 정답이라고 빽빽 우겼다. 이와이즈미는 이 이상 대거리를 하기도 지쳐, 그래 네 맘대로 해라 하고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몇 분 되지 않아 오이카와는 남은 빈칸을 전부 채워서 이와이즈미에게 돌려주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체육관 바닥에 뻗듯이 엎드려 있다가 몸을 돌리고 천장을 향해 누웠다. 이와이즈미 역시 한숨을 내쉬곤 그와 비슷하게 천장을 보고서 드러누웠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뒤에 오이카와가 말했다.
“있지, 이와쨩.”
“어어.”
이와이즈미는 하늘을 향해 프린트를 펼쳐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방금 오이카와가 답을 적어다 준 것이었다. 진짜 정답인가? 묘하게 맞는 것 같은 느낌이긴 한데…….
“……? 오이카와? 왜 말을 하다 마냐.”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갸웃하던 이와이즈미가 조용해진 친구를 흘낏 돌아보았다. 오이카와가 살짝 고개를 돌린 채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입술을 삐죽거린다.
“됐어, 흥. 이와쨩 바보.”
“뭐야!”
또 뭐! 또 왜! 이와이즈미가 벌컥 소리를 치려는데 오이카와가 한 번도 그에게 본 적 없는 표정으로 꽃처럼 애띠게 웃었다.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내일?”
누구 생일이라도 되냐?
이와이즈미가 툴툴거리는데 오이카와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아무 소리 없이 다시 다물렸다. 그리고 돌연 오이카와가 몸을 돌려 이와이즈미의 위에 올라탔다. 뭐 하는 짓이냐며 이와이즈미가 꽥 한 마디 하려 했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콰아앙!
체육관의 천장에 달려있던 조명이 그의 위로 떨어졌다.
이와이즈미를 보는 오이카와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
이와이즈미 앞에는 갈색으로 물든, 다 구겨지고 찢어진 프린트 한 장이 놓여있었다. 오이카와의 피를 흠뻑 먹은 것이었다. 그것을 쥔 이와이즈미의 손은 핏기하나 없이 창백했다.
-이런, 이런.
머리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이와이즈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백 하고도 한 번 더 푼 문제였단다. 그건 모두 정답이란다.
녹인 설탕처럼 다정하고 진득한 목소리가 말한다.
-시간을,
악마가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돌려줄 수도 있다.
이와이즈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피를 먹은 종이가 그의 손 안에서 구겨져갔다.
-음, 하지만 내 대가는 가혹하다고들 하더군. 그 친구는 만족한 모양이었지만. 그러니 내가 가고 난 뒤에 올지도 모를 천사를 기다려봐도 좋아.
표정이 없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악마를 향한다. 악마가 다정하게 웃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되돌리겠다는 거로구나.
-그렇다면 네 사랑의 말을 모두 가져가마.
-너는 네 친구에게서, 그가 너를 사랑하여 하는 그 모든 말을 들을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보고싶다는 말도 그립다는 말도 들을 수 없다.
-그래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면.
악마가 관대한 목소리로, 정말 괜찮으냐고 염려라도 하는 듯이 물었다. 벌떡 일어난 이와이즈미가 악마의 멱살을 쥐어틀었다. 그딴 거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어. 평생 듣지 못해도 상관없어, 돌릴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그의 말에 악마는 웃었고 모래시계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선택을 주저하지 않는 그대에게 선물을 한가지 더 주지.
악마의 모래시계가 춤을 추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었단다.
악마의 선물은 어디까지 선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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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ㅠㅠ... 아 모르겠다... ㅠㅠ... ㅇㄱㅂㅈㅇㅏㅇㄱ지ㅏ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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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아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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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뭐 봐요?”
간식을 한아름 챙겨들고 방으로 올라가려던 오이카와는 거실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앉아 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내보고 있었다. 오래된 상자 안에서 나온 것들은 하나같이 낡아서 빛이 바래있었다.
“토오루 초등학교 때 통지표.”
“히엑. 그거 아직 가지고 있어요?”
오이카와가 질린 표정을 지어도 어머니는 온화하게 웃으며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물든 종이를 펼쳐보았다.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뭐라고 써뒀는지 아니?”
“뭐라는데요?”
“고집이 세다, 어리광이 많다, 애교가 많다……. 전부 이런 얘기네.”
“별로 고집 안 세거든요!”
오이카와가 발끈한 얼굴로 뾰로통하게 말하곤 모친의 옆에 앉아 어린 시절 받아온 통지표 몇 개를 열어봤지만 다 비슷비슷한 말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아드님이 인기가 많습니다, 친구와 사이가 좋아요,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로 고집이 있는 편이네요, 어리광이 좀 있어요, 눈물이 많네요. 오이카와는 입술을 몇 번 삐죽거리고 낡은 통지표를 다시 상자 안으로 밀어넣었다.
“나 고집 안 부리는데.”
“하지메 군이 다 들어주니까 그런거지.”
“고집은 이와쨩이 더 해요!”
오이카와는 아들인 자신보다 친구 편을 더 드는 부모님을 바라보다가 들고왔던 간식을 다시 챙겨들곤 쿵쾅대며 위로 향했다. 아래층에서 부모님들이 ‘어휴, 저 응석을 어쩌면 좋아’라며 웃음 섞어 중얼거리는 걸 알면서도.
*
“이-와쨩!”
“……나 죽는다, 오이카와…….”
아침 부활동을 위한 이른 등교길, 이와이즈미는 목을 대뜸 감아오는 팔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섰다. 오이카와가 겨우 팔을 풀고는 이와이즈미를 보다가 퍼뜩 생각난 이야기를 꺼냈다.
“이와쨩, 초등학교 때 통지표 같은 거 아직 갖고 있어?”
“어? 글쎄. 나는 모르겠는데.”
“어제 우리 엄마랑 아빠가 그거 꺼내 보는데 있지.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 알아?”
“고집 많다. 어리광 많다. 떼 쓴다.”
“…….”
“뻔하지.”
이와이즈미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세 개를 탁탁탁 말했고 오이카와의 입을 다물리는 데에 성공했다. 잠시 말이 없던 오이카와가 한층 더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
“뭘 어떻게 알아……. 너에 대해 써있을 거 아냐.”
“나 고집 안 부리거든? 떼 안 쓰거든? 어리광 같은 거 없거든?”
“너 고집, 하. 네 고집이 그게 사람 고집이냐? 그리고 떼 미친듯이 많이 써. 마지막으로 지금 이게 어리광이야.”
“…….”
오이카와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이와이즈미를 노려본다. 이와이즈미는 해 볼테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멈춰서서 그 표정을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고집부렸는데!”
“지금. 고집 안 부리는 사람이면 이쯤에서 ‘아, 내가 그런가?’하고 물러선다고.”
“…….”
“연습 늦는다. 빨리 가자.”
“……이와쨩은 그럼 통지표에 뭐라고 적혀있었는데?”
“난 그게 아직 있는지도 모르겠다니까.”
이와이즈미는 거짓말을 하며 인상을 쓰고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빨리 가자는 재촉에 오이카와가 몇 번 입술을 삐죽거리긴 해도 결국 그와 걸음을 맞춘다. 이와이즈미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오이카와의 얼굴을 흘끗 한 번 보곤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곧장 오이카와가 왜 자길 보고 한숨을 쉬냐고 빽빽거린다. 이와이즈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해야 겨우 오이카와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오이카와는, 볕 한번을 못 본것처럼 허옇게 질려서는 키는 겨우 보통이었으나 팔다리도 말라붙고 가느다래 잔병치레가 잦았다. 계집애마냥 곱상하게 생긴 녀석이 마르고 약하니 또래 남자애들과는 곧잘 시비가 붙었다. 시비라기보다는 상대들의 일방적인 괴롭힘이었는데 그걸 일일이 옆에서 챙기고 다닌 건 이와이즈미였다.
초등학생 수준의 유치한 괴롭힘인 것을 조금만 굽히고 들어가면 무마될 텐데도 매번 꿋꿋하게 자존심을 세우고 버텨 상처를 더 만드는 오이카와였고, 그렇게 독하게 눈물 한 방울 흘리질 않다가 이와이즈미만 오면 그에게 매달려 훌쩍대곤 했다. 그게 고집이지 그럼 무엇이겠는가.
그러던 녀석이 어느날 갑자기 뜬금없이 배구를 하겠다고 했다. 애들끼리 술래잡기를 한다고 달리기만 해도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녀석이 TV에서 봤다며 공 하나를 챙겨들고 나타나서는, 혼자서 공을 던지고 받고 난리인데 그걸 어떻게 또 두고만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말려도 봤지만 내가 왜 이걸 못할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눈을 새파랗게 만들어서 쳐다보는데 결국 어찌할 수 없어 같이 하게 되었다. 하겠다고 하겠다고 하는 걸 말릴 수 없다면 눈이 닿는 곳에 두는 게 나았다. 저 하고싶은 대로 하다가 또 시퍼렇게 질려서 뻗어있으면 그걸 어쩌려고. 원하는 포지션은 세터라고 하기에 그래, 그러면 옆에서 공을 쳐주마 하고 자연히 그는 스파이커를 하게 되었고 그 고집이!
그 고집이 지금 여기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 이와쨩? 왜 그렇게 노려보는 거예요……?”
“아니다. 됐다. 가자.”
“이와쨩? 화, 화났어?”
그런데도 자긴 고집같은 거 안 부린다고! 잘도 그런 뻔뻔한 말을 해?
지금의 오이카와에게서는 어린 시절 창백하게 말랐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 덕에 오이카와의 부모님은 지금도 여전히 이와이즈미라면 버선발로 맞이해주곤 했다.
“빨리 안 오냐! 늦는다니까!”
“이, 이와쨩~!”
이와이즈미가 버럭 소리치는 말에 오이카와가 서둘러 그에게 달라붙었다.
*
“…….”
“…….”
이와이즈미는 죽고싶다고 생각했고 오이카와는 꽃이 피어나는 듯이 웃으며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오후 부활동까지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와이즈미의 모친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토오루까지 불러서 같이 저녁먹자~’라는 상냥한 메세지였다. 매일같이 투닥거릴 수 있을만큼 친한 사이였고 저녁을 이웃에서 함께 하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모친의 메세지를 보여주었고 오이카와는 선뜻 고개를 끄덕여 둘이 함께 이와이즈미의 집으로 들어가는데 그 집안엔 이미 손님이 있었다. 오이카와의 모친이었다.
“이와쨩 통지표예요? 뭐라고 쓰여있어요?”
오이카와가 거의 신발을 내팽개치듯이 벗어두고는 이와이즈미의 모친에게 한껏 애교를 섞어 말을 붙였다. 오이카와의 어머니가 어젯밤 아들의 초등학교 시절 통지표 얘기를 했다가 자연스레 열어보게 된 것 같았다. 이와이즈미는 득도한 심정으로 오이카와가 엉망으로 벗어놓고 간 신발을 대충 툭툭 발로 쳐서 정리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에엑.”
“뭐, 왜.”
“재미없네, 이와쨩 건…….”
이와이즈미는 한껏 입꼬리를 끌어올려 비웃음을 그렸다. 오이카와의 모친만 없었어도 바보카와, 하고 쏘아붙여주었을 일이었다.
“좋은 말만 있잖아?”
“토오루는 그렇게 고집쟁이라고 쓰여있다며?”
“……네에…….”
이와이즈미는 어머니의 곁에 털썩 앉아 자신의 유년기를 기록해놓은 종잇장을 펼쳤다. 쓰여있는 말은 대개가 비슷비슷했다. 끈기가 있습니다, 책임감이 투철합니다, 친구를 잘 챙겨줍니다, 착한 아이입니다.
이와이즈미가 언성을 높여 겨우 통지표를 정리하고, 오이카와의 모친까지 함께 다같이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서 어른들의 심부름으로 주스와 과자를 사러 마트에 가는 길은 둘의 몫이었다.
“이와쨩은 어차피 좋은 말만 적혀있었으면서 왜 말 안해줬어.”
“있는 걸 지금 봤다니까. 너희 어머님이 와서 얘기 안했으면 몰랐어.”
“치.”
오이카와가 불퉁한 표정을 짓는다.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끈기가 있습니다, 무슨 끈기를 말하는가. 우는 오이카와의 손을 놓지 않는 끈기일 것이다. 책임감이 투철합니다, 무슨 책임감일까. 아픈 오이카와의 손을 놓지 않는 책임감일 것이다. 친구를 잘 챙겨줍니다, 어떤 친구를. ……오이카와를. 착한 아이입니다, 착한.
오이카와는 투덜거리다가 금방 통지표에 대한 것은 잊고 마트에서 저 좋을대로 간식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는 세 개중에 한 개 꼴로 허락해주었다. 그 고집쟁이가 그래도 말을 듣기는 듣게 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이네, 이와이즈미의 말에 오이카와가 고집 안 부린다고 또 투덜거린다. 이와이즈미는 피식 웃고는 말았다.
너에게 착하다는 얘기밖에 적혀있지 않은 통지표를 어떻게 말해주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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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와오이 행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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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토오루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뒤에 서서 그 등을 바라보며 때때로 생각했다. 저건 정말 사람일까? 가끔 인간 아닌 것이, 신령이나 요정 혹은 신이 되다 만 어떤 것이 인간 가죽을 뒤집어쓰고 사람 행세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이와쨩~!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머리 나빠진다?”
“닥쳐.”
“히엑.”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을 때면 영락없이 보통 또래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서 매서운 소리를 뱉으면 울상을 지으며 매달린다. 아니, 이런 면은 오히려 또래들에 비하자면 훨씬 애교가 있다는 느낌일테지만.
“자, 스파이크 다시!”
네트 근처에 서서 오이카와가 웃으면서 공을 올렸다. 이와이즈미는 망설이지 않고 뛰어올라 공을 내리쳤다. 코트 바닥과 공이 부딪히고 시원한 소리가 난다. 오늘 컨디션 좋네, 이와쨩? 오이카와가 싱긋이 웃었다.
3학년 마지막 봄고가 얼마 남지 않았다.
*
패배 앞에서 일어서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적된 패배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이와이즈미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그것을 실감했다. 몇 번째인지 세는 것을 그만 둔지도 오래였다. 시라토리자와와 붙으면 졌다. 듀스, 동점, 어쩌면, 혹시, 그런 단어가 쓰인 적은 제법 있었지만 결과는 한결같았다. 붙으면, 졌다.
라이벌? 서로를 의식하고 난 이후로 한 번도 이기지를 못했는데 그런 것을 두고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나. 한 세트를 빼앗았다는 게 의미를 가질 정도라면 그건 호적수니 라이벌이니 그런 거창한 표현을 할 수 없다. 저쪽은 일방적인 승자, 이쪽은 언제나 도전자일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무참히, 박살나고 부서지고 깨져 산산조각나는 도전자.
그러면 그 무참히, 박살나고 부서지고 깨져 산산조각나는 도전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이와이즈미에게 그것은 오이카와였다. 그러면 오이카와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자신에게는 오이카와가 있다. 오이카와의 바람이, 그가 존재함이 이와이즈미를 떠밀어 끝없이 노력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니 오이카와가 그렇게 노력할 수 있는 원동력이 자신이 될 수는 없었다. 그건 모순이다.
전국으로 가겠다는 꿈이 그의 원동력일까? 그렇다면 오이카와는 그 목표가 내리 거친 삭풍을 맞고서도 그 형체를 제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지키고 있다는 뜻인가.
도대체,
어떻게?
노력이 부족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누군가 그에게, 그들에게 조금 더 노력하지 그랬느냐며 동정하고 위로한다면 이와이즈미는 그 동정과 위로 모두 내팽개칠 자신이 있었다. 감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럴 만큼은 당당하게 노력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지고 말았는가. 그런 식으로 파고들어가면 남은 이유는 둘 뿐이었다. 상대가 우수해서, 우리가 부족해서. 그런데도 오이카와는.
그 매서운, 시라토리자와라는 이름의 삭풍 앞에서 목표를 지키기 위해 성벽을 쌓을 수도 있었고 해자에 물을 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상대의 재능을 탓하는 것으로 성벽을 쌓아올리지 않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하는 것으로 해자에 물을 대지 않으며, 오로지 스스로 더 노력하는 것만으로 매서운 삭풍 앞에 유리등불같은 그 꿈을 지켜왔다.
차라리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때때로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공평하지 않은 재능을 앞에 두고 같은 출발선을 디디고 선 현실을 탓하기를 바랐다. 저런 재능 같은 건 정말로 어쩔 수가 없다고 조금쯤은 억울해하기를 바랐다.
패배하고 부서져도 꺾이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사무치게 가혹했고.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마음은 경이를 불러일으켜 따라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칫. 서브, 맘에 안 들어…….”
“오늘은 할 만큼 했어, 가자.”
“하지만 이와쨩…….”
이와이즈미는 마음에 들지 않으니 조금 더 하고 싶다고 말하는 오이카와의 뒷목을 잡아끌었다. 사람 속을 득득 긁어놓는 말을 우습게 하곤 하는 오이카와지만, 이와이즈미가 행동으로까지 나서는 일에는 잠자코 따르곤 했다.
“조금만 더 연습하면 될 것 같은데.”
“내일 해.”
“좀 더 빨리 하고 싶은데.”
“내일 하라고 했다.”
“윽. 알겠습니다아…….”
오이카와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렸어도 쿨다운을 하곤 얌전히 샤워실로 간다. 이와이즈미는 먼저 옷을 갈아입고 오이카와가 나오길 기다렸다.
오이카와는 노력하기 위해 흘릴 땀을 무서워하지 않고 비참해하지 않는다. 날 때부터 손에 모든 걸 쥐고 태어났다는 듯이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서, 온힘을 다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도 한 점 두려움이 없었다.
‘넌 사람들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겠냐?’
아마도 시험기간이었을 것이다. 점심 시간,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와 함께 복도에서 바깥을 내려다보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떠드는 말을 듣고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서 주스를 야금야금 마시던 오이카와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
‘오늘 테스트인데 어제 드라마 봐버렸다, 라거나. 그런 말 하는 거.’
‘아……. 뭐 이해는 안 되지만 알기는 알아. 필사적으로 열심히 해서 나온 점수보다 애쓰지 않았는데도 받아낸 점수가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아니면 실패하면 창피하다고 생각해서 미리 선수쳐서 변명하는 거라거나.’
오이카와가 다 마신 주스 팩을 꼼꼼히 접으며, 그 행동과는 다르게 시큰둥하고 건성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와이즈미는 그런 오이카와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도 좋은 성적이 나온다면 그것은 자연히 타고나길 명석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귀결되어서. 만약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마땅히 내가 노력했는데도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해는 안 되냐?’
‘응. 뭐든지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편이 훨씬 멋지다구? 이 오이카와 씨처럼!’
그렇게 말하며 흡사 천진한 어린 아이처럼 활짝 웃는데…….
철렁, 하고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아마도 자신의 심장이었으리라, 이와이즈미는 생각했다.
*
오이카와는 천재성이, 재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지지 못하고 가질 수 없는 걸 탐하는 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비겁하게 만든다. 가지지 못한 것을 탓하게 되고 가진 자를 질시하게 되고 그것이 스스로의 발밑에 늪과 같은 구덩이를 만든다는 것을 배운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리고 그 뒤로 오이카와는 그런 것들을 그저 깨끗하게, 마음에 들어하지 않기로 했다.
“아, 역시 싫네! 천재들이란!”
오이카와가 뾰족한 목소리로 말하고 이와이즈미가 그런 오이카와를 질질 끌고 코트로 향했다.
“난 네가 더 싫거든.”
“왜요? 이 오이카와 씨 어디가 싫은데요, 이와쨩!”
“후배 괴롭히지 좀 마라!”
“조언 해준건데?”
“얼씨구.”
오이카와는 매몰찬 이와이즈미를 향해 몇 번더 입술을 삐죽거리고는 얌전히 워밍업을 위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이와이즈미가 그를 타박하는 것은 지난 월요일, 우연히 만난 지난 중학교 후배와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는 팔을 쭉 뻗는 것으로 스트레칭을 마무리짓고 가볍게 어깨를 주물렀다.
이와이즈미는 공을 가지고 코트 한 쪽으로 향하는 오이카와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곤 자신도 공을 챙겨들었다. 지금 오이카와가 그 후배에 대한 감상은 간단히 말하면 ‘싫다’이지만 동시에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아주 담백하게, 좋아하지 않으니까 싫어한다. 굳이 몇 가지를 더 덧붙이자면 세터로서는 지지 않겠다는 것 정도일까.
‘후배랑 진심으로 경쟁하는 거 쪽팔리지도 않냐.’
‘에? 왜?’
두 살이나 어린 후배. 누가 보아도 폭발적이고 화려한 천재성을 온몸에 가득 채우고서 나타난 후배를, 적어도 지금 당장은 월등히 우수한 실력을 가진 선배가 유치하게 괴롭히거나 심술궂은 말을 하곤 하는 모습은 그저 장난처럼 보였지만 이와이즈미는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서 그에게 지고 싶지 않아, 이기겠어, 오이카와의 그런 생각이 손에 잡혔다.
‘나이가 나보다 어리다고 걔가 세터 안 한대?’
‘누가 그렇대냐.’
‘그럼 누구나 다 경쟁자야. 그런데 그 중에서 토비오쨩이 제일……. 아아! 정말 이런 말 하게 하지 말라구! 그 녀석이 제일!’
‘그래, 그래. 알았다. 됐어.’
처음 보았을 때 상대는 중학교 1학년, 키도 몸집도 기술도 아직은 오이카와에게 미치지 못하고서 겨우 초등학교 티를 벗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에 그 또래중에서는 가장 완성되어 있는 오이카와가 주전을 뺏길 일도 없고 이 1년만 지나면 한동안은 후배와 부딪힐 일조차 없을텐데도,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전력으로 카게야마에게 지지 않겠다는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뜯어보듯 바라보았지만 오이카와는 괜히 카게야마의 이야기로 자극받아, 잔뜩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서브 연습을 하러 가버렸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어떤 것들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것으로 빚어져 있다는 걸 그 때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의 자존심은 진주와 같아서 진흙에서 태어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그의 노력은 다이아몬드와 같아서 어디에 대어도 부서지지 않고 영롱하기만 했다.
*
“너, 시라토리자와에 갔으면 어땠을거 같냐?”
그 말을 한 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서 오이카와의 반응을 떠보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그쪽의 에이스이자 주장인 우시지마가 지치지 않고서 오이카와에게 시라토리자와에 오라고 권유하기에 되레 듣는 쪽이 나가떨어졌던 평범한 오후, 평범한 귀갓길이었다. 그 말을 들은 오이카와는 멀뚱하니 대답했다.
“몰라.”
“야. 대답을 좀 성의껏 해봐라.”
“모른다니까? 그런 거 생각 해본 적도 없어. 앞으로 생각해 볼 일도 없고.”
내가 시라토리자와에 왜 가?
오이카와는 화가 나지도, 토라지지도 않은 채 그저 무덤덤하게 음료를 입에 넣으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한 번도 생각도 해보지 않았고 생각해 볼 일도 없는, 조금도 관심 없는 화제에 응하는 태도였다.
“왜? 우시와카가 이와쨩한테도 뭐라고 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으으. 뭐 갔으면……. 우시와카쨩한테 토스 올려줬으려나?”
그래도 이와이즈미가 물었다는 이유만으로, 결국 오이카와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을 하고 답을 말해주었다. 가서 배구를 할 것이고 그는 세터, 우시지마는 스파이커니 그닥 대단찮은 답이랄 것도 없었으나. 이와이즈미는 양손으로 음료수 병을 붙들고 있는 오이카와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그의 주름진 미간을 손으로 꾹 눌러주었다.
“이와쨩?”
오이카와 그가 그렇게 바라는 전국으로의 길을 매해 당연한 것처럼 밟아가고 있는 시라토리자와에서, 지치지도 않고 손을 내민다. 그가 가장 원하는 달콤한 과실을 흔들며 유혹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탐나지 않았냐.
당장 그렇게 묻지 않은 건, 그 질문을 했다간 눈 앞의 저 녀석이 당장이라도 주먹질을 해버릴 거란 걸 잘 알아서였다.
“……가고싶단 생각은 한 적 없냐?”
그런데도 묻고 말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음료수 병을 조물거리던 오이카와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이와이즈미는 변명하지도 않고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은 채 멈춰 서서 오이카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이카와가 백지처럼 표정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어.”
“시라토리자와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냐고? 지금 그렇게 물었어?”
“어.”
그리고 물론 당연하지만 얻어맞았다. 맞을 소리를 했다는 걸 알면서도 이와이즈미는 왜 때리느냐고 성질을 부렸고 오이카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커다란 눈에서 구슬같은 것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오이카와는 자신이 우는 줄도 모르고서 이와이즈미의 멱살을 쥐어틀고 노려보았다.
“왜 그런 걸 묻는건데, 이와쨩.”
이와이즈미는 터져나간 입술 끝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표정을 바꾸지 않기 위해 힘을 주고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이맛살을 일그러뜨린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처음으로 보는, 비참해하는 오이카와의 얼굴이었다.
“……오이카와.”
“왜, 도대체 왜 그런 걸……, 어떻게 이와쨩이 나한테 그런 걸 묻는 건데! 내가 그래보였어? 내가, 내가 여기가 아니라 시라토리자와에서…….”
“아니야. 아니다. 오이카와. 미안해. 아니야. 그런 게.”
이와이즈미의 옷깃을 쥐어틀었던 오이카와의 손에서 힘이 풀리고 그가 바닥에 주저앉는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삼켰다. 우는 오이카와의 입에서 온갖 말이 다 나왔다. 내가 이와쨩에게 토스를 그렇게 못했어? 아니면, 내가 다른 에이스를 찾는 것 같기라도 했어? 그것도 아니면 내가 그저 이길 수만 있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였어?
이와이즈미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전부 다 틀렸다고 고개를 저었다. 눈물로 온통 젖은 오이카와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럼 도대체 왜 물어본거야.”
“…….”
단지 ‘가고 싶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하면, 이 녀석은 정말로 어떤 표정을 할까. 이와이즈미는 열었던 입술을 다시 닫았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재능을 탓하는 일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을 비하하는 일에 몰두하지 않는 오이카와였다. 오로지 스스로의 힘만으로 올곧게 마음을 일으켜세워 다듬고 앞으로 향하는 그에게, 나는 너와는 달리 기댈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면 그는 어떤 표정을 할 것인가.
“……거길 가고 싶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야…….”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이와이즈미를 두고서 오이카와가 엉엉 운다. 다른 에이스 같은 거 필요없어. 다른 학교 필요 없어. 너희가 아니면 안 된단 말야. 네가 아니면 안 된단 말야……. 나한테는, 너밖에는.
이와이즈미는 우는 오이카와에게 사과하며 그를 달랬다. 이 한마디를 위해서 결국 오이카와를 울리고 말았다. 눈물을 겨우 그친 오이카와가 매섭게 한 번 그를 쏘아보곤 걸음을 빠르게 앞세워 걸어나간다. 화도 났고 토라지기도 했으니 최선을 다해 달래주라는 뜻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등을 바라보며 오이카와가 해주었던 말을 되짚어보았다. 지금의 저 눈물과 저 말이 모두,
일생의 빚이었고
빛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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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 뭔말을 하고싶은건지 모르겠는글
그래도 이와오이행쇼..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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