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제 2막, 준비 되셨습니까? (22)
“……이게 뭡니까?”
아이 방에 잠든 아이를 내려놓고 나왔던 아카아시는 퇴원하고 며칠 만에 돌아온 집을 그제야 둘러보고 눈을 끔벅였다. 짐을 챙겨들고 뒤따라 들어오던 코노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아프다니까 다들 걱정돼서 이거저거 보내준 거지.”
“이거저거가 너무 많은데요.”
“그러니까 왜 아프고 그래. 내가 몸 관리 하라고 했지.”
“아니, 한다고 한 건데…….”
아카아시는 거실 탁상과 식탁 위에 한가득 올라가 있는 꾸러미들을 하나하나 들쳐보며 미간을 모았다.
“누가 다 주신 겁니까?”
“뭐 여기저기~! 일단 뭐 좀 먹자.”
“제가 할게요.”
“후배는 선배 말 듣는 거다.”
“코노하 선배.”
아카아시가 말리려고 했지만 코노하는 장난치는 듯이 웃는 낯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는 아카아시를 소파에 앉혔다. 사온 죽을 들고는 부엌으로 향한다. 아카아시가 다시 일어서려고 했지만 부엌에서 도로 앉으라는 뜻이 분명히 깃들어 있는, ‘아카아시—.’라고 말하는 코노하의 목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아카아시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허리만 곧추세우고는 탁상 위에 쌓여있는 것을 하나씩 들춰보았다. 반절 정도는 과일이고 반은 영양제 같은 것들이었다. 아카아시는 도톰한 종이 가방 안에 들어있는 것을 꺼냈다. 가방 안에는 또 상자가 들어 있었다. 빳빳한 상자를 열자 영양제가 세 병 담겨있다. 아카아시는 그 중에 한 병을 꺼내들었다. 차르르, 안에서 알약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보쿠토 선배인가?’
어떻게 안 것인지 찾아온 코노하와 자신을 병원까지 옮겨준 장본인인 보쿠토, 자신이 앓아누웠던 걸 알고 있는 건 아마도 그 정도일 것이었다. 코노하가 이런 걸 가져다 놓은 거라면 자신이 했다고 말을 했을 것이고.
그 때 바스락하며 상자 안에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도톰한 종이에 인쇄한 카드 같은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드를 펼쳤다. 종이 위에는 영양제의 복용에 대한 것이 상세히 적혀 있다. 하지만 병원이나 의사 혹은 약사의 이름도 표식도 없었다.
‘뭐지?’
종이를 뒤집어보지만 질 좋은 종이에 인쇄를 한 것뿐이었다. 아카아시는 다시 상자를 정리해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그 곁에 있는 것을 집어 들었다. 꽤 두툼한 종이봉투였다. 아카아시는 조심스레 밀봉된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두 번 접힌, 빽빽하게 인쇄된 종이 뭉치가 스테이플러로 묶여있다. 아카아시는 그 종이를 넘기다가 미간을 보았다.
‘건강 검진? 심지어 1박 2일에 걸쳐서 진행하는?’
빽빽한 종이에 적혀 있는 건 정기 검진의 항목과 절차에 대한 안내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장 하단에는 누군가의 친필로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다.
도쿄 xx병원, 사이토 타쿠미, 전화번호 090-xxx…….
아카아시는 마지막 전화번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개인적인 용도의 휴대전화 번호처럼 보인다. 일정에 맞추어 언제든 연락 바란다는 말이 그 끝에 휘갈긴 듯한 필치로 적혀 있다. 아카아시는 조금 거친 동작으로 그 종이뭉치를 다시 접어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아카아시는 그 곁에 있는 종이 가방을 열어봤다가 그만 어처구니없는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거기엔 알약 같은 것들이 한 번 먹을 분량으로 따로 따로 나뉘어 포장되어 있었다. 한 끼에 한 번씩 먹는다고 해도 족히 한 달은 먹고도 남을 분량이 가득 담겨 있다. 아카아시가 밀봉된 약 봉투의 끄트머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줄줄이 딸려오는 끝에 무언가가 툭 하고 또 떨어졌다.
—아침 기상 시에 한 포, 자기 전에 한 포 섭취하십시오.
—아침과 저녁이 따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아침용 포 : 비타민B1, B2, 비타민C, 오메가3……
“아니, 이게 무슨…….”
아카아시는 기가 막혀 노트를 바라보았다. 수기로 직접 작성된 노트는 저 사이토 타쿠미라는 의사의 연락처를 적은 것과 같은 필체였다. 아카아시는 약포를 다시 종이 가방으로 전부 몰아넣고는 그 옆에 있는 납작하고 커다란 상자를 열었다.
“베개?”
상자 안에는 마치 실크로 만든 옷을 포장한 것처럼 바스락거리는 얇고 투명한 종이가 무언가를 감싸고 있다. 그 종이를 한 겹 한겹 벗겨 내자 보드라운 천으로 감싸인 푹신한 것이 들어있었다. 베개였다.
“코노하 선배? 이게 다 뭡니까? 정말 누가 주신 거죠?”
“어? 아, 그거 뭐……. 그냥 너 아프다니까 선배들이.”
죽을 데우고 있던 코노하가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가 서둘러 가스레인지로 시선을 고정시키곤 말을 돌린다. 아카아시는 부엌으로 향하다가 식탁 위에 놓여있는 것들까지 살펴보았다. 거실의 탁상에 다 놓지 못해서 여기에 둔 것 같았는데 이쪽도 만만치 않았다. 아카아시는 그 중에 묘한 향이 올라오는 종이봉투를 열었다.
“라벤더 향주머니…….”
“잠 잘 자라고 챙겨 넣었나보네.”
“누가요?”
“글쎄, 뭐 다 같이 한 거라서.”
코노하는 얼렁뚱땅 대답하고는 아카아시를 잡아끌었다. 죽부터 먹으라는 뜻이었다. 식탁 위에 쌓인 듯이 놓여있던 종이가방들을 전부 바닥으로 내려 식탁을 깨끗하게 치운 코노하는 죽 그릇을 내려놓고 아카아시를 앉혔다. 아카아시가 수저를 손에 들며 옆을 흘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래 바라보고 있을 순 없었다. 코노하가 입을 연 탓이었다.
“아카아시.”
“네?”
죽을 데운 냄비를 대충 싱크대에 집어넣고 물을 받은 코노하가 아카아시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약속한 때가 됐잖아. 이직하기로.”
유난스레 웃거나 장난을 치는 모습이 훨씬 더 익숙한 선배의 눈가에서 그늘을 본다. 아카아시는 눈을 내리깔았다. 언제나 걱정해준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쓰러졌을 때 아카아시는 그를 향해 5년이라고 했다. 코노하 그와는, 아이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 하고서 2년 만에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다. 코노하는 지금 직장에서 5년만 더 일하겠다고 말하는 아카아시에게 다른 말 없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약속이라는 말만 한 번 더 받아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5년이 지난 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그랬죠.”
“하자.”
“그러려고요, 안 그래도……. 이번 프로젝트만 마무리가 되면 옮기기로 말은 다 됐어요. 유급휴가만 써먹으려고 했던 건데.”
“신나게 써먹었으니까 이제 진짜 옮기는 거다.”
“네, 알겠습니다.”
“정말!?”
“약속했잖습니까. 정말입니다.”
코노하의 얼굴이 활짝 핀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걱정하실 건 없었는데요. 코노하가 곧장 주먹을 쥐어서는 아카아시의 정수리를 약하게 때렸다. 아카아시가 숟가락까지 놓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쥔다. 코노하는 그런 아카아시의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었다.
“하나 있는 후배 놈이 쓰러질 때가 아니면 얼굴도 안 보여주는데 걱정을 안 하냐? 어?”
“그러니까 별 일이 아니라고…….”
“어휴,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지. 이게 다 카즈마 때문이다. 카즈마가 너무 말을 잘 들어서 그래! 애가 좀 더 속을 썩였어야 얘도 내 맘을 좀 알 텐데. 죽이나 빨리 먹어!”
“선배가 때렸잖습니까…….”
“그 나이 먹고도 맞을 짓을 하냐?”
“이 나이가 됐는데도 때린 쪽이 나쁜 거 아닙니까?”
“어쭈? 자꾸 뻗댄다? 어?”
저 죽 먹을 겁니다, 아카아시가 슬쩍 코노하를 흘겨보고는 식탁 위에 떨어뜨렸던 숟가락을 고쳐 쥔다. 코노하는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고등학교 때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숨기는 법이 없는 아카아시였다. 언제고 차분하고 침착한데도 묘한 곳에서 어린애 같은 면은 1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정말 저건 다 뭡니까. 설마 쿠로오 선배한테도 연락했습니까?”
“아 뭐…….”
“진짜 괜찮다니까요.”
“쓰러진 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 어?”
“그렇다고 이게 다 뭡니까. 남들이 보면 어디 죽었다가 관짝 열고 나온 줄 알겠어요.”
“……뭐 그 비슷한 마음이겠지…….”
“네?”
“죽이나 먹어, 인마.”
코노하는 한 번 더 아카아시의 이마를 튕겨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바닥으로 밀어놓았던 종이 가방들을 한 데 모아 소파 옆에 두고, 소파 앞 탁상에 놓여있는 것들도 정리를 한다. 코노하는 그 중에 반쯤 닫힌 상자를 열어보곤 픽 웃음을 흘렸다. 혹시라도 아카아시가 밤에 잠 못 이룰까 싶어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이직할 곳은 정했냐?”
“얘기는 됐어요. 두 달 뒤에 옮기기로.”
“두 달 동안은 쉬게?”
“네. 일단 이번 달까진 출근은 해야 하지만……. 카즈마랑 시간도 좀 보내고 하려고요.”
너무 바빴죠, 그 동안. 아카아시가 작게 중얼거린다. 코노하는 허리를 펴고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다. 얇은 커튼을 넘기자 곧장 바깥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코노하는 아래쪽 주차장을 눈으로 쭉 훑었다. 자동차를 위에서 보고 곧장 차종을 알아볼 정도로 안목이 있지는 않았지만, 낯이 익은 것을 분간해낼 정도는 되었다.
“집에 타고 갈 차는 생겼네…….”
“네?”
“응, 아냐. 여긴 그래도 주차는 좀 수월한 것 같아서.”
“신축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신경 쓴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사 온 거지만.”
“너는 그래, 야 이 자식아. 이사를 했으면 집들이를 해야 될 거 아냐.”
“짐 좀 치우고 하려고 했죠.”
“이사를 한 줄도 몰랐거든?”
“그러니까 정리 다 하고 말씀드리려고 했다니까요.”
또 후배의 목소리가 뚱해진다. 코노하는 웃음을 삼켰다. 지금 놀리시는 거죠, 후배가 그렇게 묻는다. 놀리는 게 아니라 혼내는 거라고 말해보지만 목소리에 위엄이 실리지는 않았다.
“선배도 가서 일하셔야 되잖아요. 저 이제 괜찮으니까 가보세요.”
“그래……. 이제 한 번만 더 이런 일 생기면 진짜 너 혼날 줄 알아, 알겠어?”
“네에…….”
청록색 눈동자가 아래로 시선을 내려뜬다. 비를 맞아서 감기에 걸린 것뿐이라고 꽤나 억울해하는 눈치다. 순식간에 학창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코노하는 서둘러 과거의 환영에서 깨어나곤 부엌까지 걸어가 아카아시 앞의 빈 그릇을 싱크대에 집어넣었다.
“좀 자둬. 이따 일어나서 카즈마랑 저녁 챙겨 먹고. 저녁 뭐 배달 올 거라고 하니까 그거 받아서 먹으면 될 거다.”
“배달이요? 뭔데요?”
“나도 잘은 몰라. 뭐 적당히 먹을 만한 걸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코노하는 잽싸게 말을 얼버무리곤 외투를 챙겨들었다. 아카아시가 일어서려고 했지만 코노하가 도로 자리에 앉혔다. “아픈 애 배웅 받는 취미는 없으니까 얌전히 있어.” 후배의 얼굴이 또 불퉁하니 변했다.
“애 아빠 표정이 이게 뭐냐.”
“애 아빠 취급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그러게 잘 좀 해라, 어? 부주장님!”
“그게 언제적인데 아직도…….”
아카아시가 겨우 표정을 풀고 웃는다. 코노하는 아카아시의 머리를 한 번 헤집고는 아파트를 나섰다. 평일 낮이어서 승강기는 여전히 아카아시의 집이 있는 층수에 멈춰 있었다. 1층까지는 금방이다. 아파트 건물을 나선 코노하는 위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내다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코노하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아파트 현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를 향해 걸어갔다. 방금 전 코노하가 아카아시의 아파트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확인했던 바로 그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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썼던 조연 또 쓰는 재미가 있네요=)
언제나 예쁜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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