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제 2막, 준비 되셨습니까? (7)
“아니, 그거를 왜 나한테……. 안즈랑 얘기를…….”
보쿠토는 휴대전화를 손으로 감싸쥐고 속삭였다.
아카아시가 쌩하니 들어가버리고, 거실에 혼자 남겨진 보쿠토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서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요즘 일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냐, 그렇게 말했더니 아카아시의 표정이 서늘하게 변했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되레 찬물을 맞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하던 일을 조금 더 마무리하고는 잘 자라는 말만 남겨두고 침실로 들어가버린 아카아시였다.
보쿠토는 그대로 오도카니 앉아서 눈만 깜박였더랬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아카아시의 집에 쳐들어온지 며칠이나 지났고 아직까지도 휴대전화를 켜보지 않았다는 걸 떠올랐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시간이 일렀기에 보쿠토는 이제야 휴대전화를 확인해볼 마음을 먹었다. 충전기를 겨우 찾아서 방전된 휴대전화에 연결하고 전원을 켰다.
메신저 앱의 알림과 문자 메세지가 폭포처럼 띠링띠링 쏟아졌다. 보쿠토는 당황해서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가 쿠션으로 휴대전화를 눌러 소리를 죽였다. 다시 휴대전화를 열었을 때는 메세지 창에 숫자가 세 자리수씩 붙어있었다. 보쿠토는 한숨을 내쉬며 벨소리를 무음으로 바꾸었다. 열어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때 휴대전화가 반짝거린 것이다. 일단 쥐고서 현관 밖으로 뛰어나가려고 했던 보쿠토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뻣뻣하게 굳었다. 바로 오늘 낮에 혼자 나갔다가 못 들어오는 불상사를 겪지 않았던가. 보쿠토는 결국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통화버튼을 누르고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숨을 죽였다.
전화를 한 상대는 키리에나 안즈의 매니저. 다시 말해, 보쿠토 전 부인의 매니저였다.
—그치만 안즈 씨가 이번에 또 드라마도 안 한다고 하고 큰일 났다니까요~!
“그으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말을 하냐고……!”
—보쿠토 씨가 안즈한테 말 좀 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래도 안즈 씨가 보쿠토 씨 말은…….
“나랑 안즈랑은 이혼했거든!”
보쿠토는 언성을 높였다가 서둘러 숨을 죽였다. 매니저는 키리에나 안즈가 작품활동을 다 걷어차고 있다며 앓는 소리에 여념이 없다. 보쿠토는 얼굴을 마른 손으로 쓸어내리며 한숨을 꾹 참았다. 침실 쪽을 흘끗 쳐다본다. 방문은 굳게 닫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그리고 안즈 몇년간 계속 영화찍었잖아. 쉴 때 됐고.”
—그래도 이번 드라마 PD가 푸쉬를…….
“PD고 뭐고 안즈가 안한다면 안하는 거지. 그리고 나랑 안즈랑은 이제 헤어졌다니까.”
—아 보쿠토 씨, 그래도요. 일단 두 사람 다 좋게좋게 헤어졌잖아요. 안즈한테 한 번만 얘기를…….
보쿠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소리가 들렸는지 매니저가 금방 기가 죽은 목소리가 되어 언제 한 번 짬이 나면 또 연락드리겠다는 말로 통화가 끝났다. 보쿠토는 금방 새카맣게 물든 휴대전화 액정을 내려다보다 현관문에 구겨앉은 몸을 기댔다. 바닥에서부터 느껴지는 냉기에 의식이 선명해졌다.
‘두 사람 다 좋게좋게 헤어졌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험한 말 한마디 없이, 헤어지자는 결론에 도달해 억지로 이어놓은 맞지 않는 조각을 다시 나눠놓듯 헤어졌으므로.
‘아냐, 아주 잘 헤어진 건 아니라고! 한 대 맞을 뻔 했단 말야!’
보쿠토는 헤어질 무렵을 떠올리며 투덜거리다 다시 쿵, 하고 현관문에 이마를 대었다.
처음부터 사랑해서 했던 결혼은 아니었다. 그 때에는 그에게 그녀가 필요했다. 절실했다. 이게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거대한 착각 속에서 몇 년의 시간을 허비했는지 모를 일이다.
‘맞을 뻔한게 아니라 그냥 한 대 맞을 걸 그랬어.’
보쿠토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작품활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헤어지며 키리에나는 한동안 영화도 드라마도 다 때려치울거라며 소리쳤었다. 다른 사랑을 연기하느라 자기 사랑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어가는 줄도 몰랐다며.
‘역시 한 대 맞고 왔어야했는데.’
보쿠토는 다시 이마를 쿵 박았다. 키리에나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금방 턱을 세우곤 내년엔 복귀하겠다는 이야기도 함께 했으니 저 매니저가 그렇게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보쿠토는 시름 가득한 표정으로 다른 메시지 창을 열었다.
—너 진짜 이혼했어? 뭔 소리야 이게
—야 보쿠토 너 어디 가있는데 왜 아무데도 없다 그래
—너 설마 아카아시한테 간 건 아니지?
—내가 말은 안 했는데 아카아시한테 애도 있어 새꺄!
‘이미 와 있거든? 이미 알고 있거든?’
물론 여기에 도착해서 알았지만. 보쿠토는 코노하와 쿠로오에게서 쏟아진 메세지를 성의 없이 훑어보았다. 애가 있더라, 그래.
아카아시는 왜 병원에 갔을까. 생각해보면 자신도 의사를 부르거나 병원에 가야할 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적이 있었으니까 아카아시도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런 일이었을 것이다. 그냥 어쩌다가 아파서, 병원에 들른 그런 일. 그리고 거기서 아이를 만났다고. 그러면 그 아이를 입양한 것일까. 아카아시는 어쩌다 아이를 데려올 생각을 했을까. 저렇게 아카아시와 닮았는데 입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지만 아이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닐 터였다.
아카아시는 줄곧 아이와 단 둘이 지내왔던, 걸까.
보쿠토는 문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손 안의 휴대전화에서 빛이 사그러든다. 아카아시를 생각해본다. 지금까지 그의 뇌리에서 아카아시는 주욱 고등학생이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아카아시. 때로는 체육복, 때로는 경기복, 때로는 그의 티셔츠. 선배, 하며 부르곤 했다. 이름을 불러 보라며 놀린 적도 있었다.
줄곧 고등학생이었다. 그의 졸업식 날 그를 바라보던 얼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교복을 단정하게 걸치고서 하던 말. 선배, 졸업,축하드립니다…….
그 뒤로 10년이 지났다. 10년만에 다시 보는 아카아시는 많이 변한 것도 같았는데 동시에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그를 추억의 나락으로 밀어뜨렸다. 이대로 손을 잡으면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는 무엇인지 몰라서 하지 못했던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손을 잡을 수 없다. 어쩌면 아카아시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손을 허락해주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보쿠토는 점멸해가는 의식 속에서 하염없이 자신의 졸업식날의 풍경을 되감았다. 흩날리는 꽃잎과 그 사이로 물결치는 햇빛 속에 있던 아카아시를.
*
“우선 이걸 좀 확실히 하고 싶은데요.”
“…….”
“죄책감을 느끼신다거나 신세를 갚고 싶다고 생각하신다면 다른 방법을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현관 앞 신발장에서 자는 그런 거 말고요.”
아침, 아카아시가의 식탁은 한결 더 조용했다. 아이는 말 없이 식사에만 열중했고 보쿠토는 조금 비뚠 자세로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마음이 비뚤어 자세에까지 드러난 것이 아니라 잠을 잘못 잔 탓에 고개를 바로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맞은 편에 앉은 아카아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보쿠토가 현관문 앞 신발장 구석에 몸을 구겨뜨리고서 자고 있었다.
도대체 어째서인지 까닭조차 알 수가 없었고 보쿠토를 깨웠더니 보쿠토는 목이 돌아간 것 같다며 마냥 울상이었다. 아카아시의 한탄에 보쿠토가 조그만 목소리로 잘못했다며 웅얼거렸다.
“무리는 누가 하는 건지…….”
아카아시가 작게 하는 말은 스쳐 지나갔다. 보쿠토가 고개를 들었다가 윽하는 소리를 내며 목을 감싸쥐었고 아카아시는 했던 말을 다시 해주지 않았다. 대신 아카아시는 다른 소리를 꺼냈다.
“말 나온 김에. 언제까지 계실 겁니까?”
“앗? 나, 나가야 돼?”
“나가야 돼, 가 아니라. 보통은 적당히 눈치 봐서 돌아가잖아요.”
“……으응, 그, 그런데…….”
기가 푹 죽어서는 웅얼거리는 모습 어디에도 에이스 윙스파이커의 기백은 없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맘을 빼앗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구에게도 무너지지 않고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 앞에서는, 매서운 말 한 마디를 들었다고 눈썹도 어깨도 바닥으로 늘어뜨리고서 눈치를 보았다. 그래서 착각했다, 그에게 자신만은 특별했다고.
‘오죽 특별했으면 10년간 연락 한 번 없었지.’
아카아시는 속으로 중얼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이렇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을 정리하지 못해서 이 사람의 이런 얼굴을 보면 안이 뒤흔들렸고 보상을 바란 적 없는 정결한 마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새카맣게 물들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런데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오늘 저녁은 햄버그 스테이크 해 먹죠.”
“…아?”
그런데도, 마주하는 것이 끝내는 싫지가 않다. 그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좋다. 10년만에 만난 사람이었다. 10년만에 목소리를 들었고 10년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마음이 또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울어도 좋으니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카즈마, 좋지?”
아카아시는 당황해서 햄버그 스테이크라는 말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나가라고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해야할지 갈피 잡지 못하는 보쿠토에게서는 눈을 돌리고 아이와 얼굴을 마주했다. 조용히 아침을 먹고 있던 아이는 조금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보쿠토가 계속 목을 삐그덕거린 것 외엔 특별할 것 없는 아침이었다. 보쿠토가 두 사람을 배웅하고 아카아시와 아이가 집을 나선다. 그런데 묻이 닫히기 직전에 다시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아이였다. 보쿠토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카즈마? 뭐 놔두고 갔어?”
“아뇨, 잠시…….”
아이는 차분하게 운동화를 벗고는 큰방으로 들어갔다. 아카아시의 침실이어서 보쿠토는 한 번도 안을 들여다본 적 없는 곳이었다. 아이는 안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는 다시 나왔다. 아이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비닐로 밀봉된 일회용 온열팩이었다.
“어?”
“목 많이 아프시면 이거 대고 있으시라고.”
아이가 보쿠토에게 팩 뭉치를 내민다. 보쿠토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 팩을 바라보다가 아이가 ‘저 지각하니까…….’하고 말문을 텄을 때야 서둘러 물건을 받아들었다. 아이가 다시 신발을 챙겨 신는다.
“아…아카아시가 갖다 주라고 했어?”
신을 다 신고 일어난 아이는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의 새카맣게 테를 두른 금빛 눈동자가 그를 주시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는 보쿠토의 말을 듣지 않고 집을 나섰다. 닫히기 직전, 멀리서 아카아시가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새어들어왔다. “카즈마, 전해드렸니?” 아이가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직전에 문이 닫혔다.
보쿠토는 멍한 얼굴로 손 안의 온열팩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그의 얼굴이 금세 불에 타는 듯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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