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Logout Link+ Admin Write









아이와 보쿠토는 서로 무릎을 꿇고서 마주보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아직 조금 젖은 채였지만 보쿠토도 아이도 신경쓰지 않았다. 보쿠토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카아시는 자. 1초만에 자더라.”

“…….”

“아카아시 내일 회사 안 나가도 되는 거 맞아?”


아이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내일도 아카아시 재우고……. 내일까지만 휴전 동맹이야. 어때.”


아이의 금빛 눈동자와 보쿠토의 금빛 눈동자가 서로 마주친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끝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쿠토가 절하듯 허리를 숙였고 그건 아이도 똑같았다. 


“그럼 밥부터 먹어야 돼.”

“저 숙제부터요. 밥은 아직.”

“아, 그렇지.”


보쿠토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때서야 아이의 젖은 머리를 인식한 눈치였다. 보쿠토가 불쑥 손을 내민다. 아이가 영문을 알 수 없단 얼굴로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아이가 옆에 내려놓은 수건을 손에 쥐고는 무릎걸음으로 아이에게 바짝 다가갔다. 


“머리 안 말리면 감기걸린다.”

“제가 말릴 수 있어요.”

“나도 할 수 있어.” 


아이가 완강하게 말했지만 보쿠토의 고집과 힘이 한 수 위였다. 아이는 금방 포기하고 팔을 축 늘어뜨렸고 보쿠토는 수건으로 신나게 아이의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어때! 아카아시랑 똑같지.”

“……우리 아빠는 드라이어 써줘요.”

“지금 아카아시 자니까 어쩔 수 없잖아.”

“어쨌든요.”


아이가 새침하게 대답한다. 보쿠토는 수건 아래로 언뜻 보이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시선에 잠깐 숨을 들이켰다. 어쩌면 저런 것까지 아카아시를 빼어닮았는지 모를 일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아이는 정말 아카아시의 아이였다. 


보쿠토가 다 되었다고 손을 떼어주자마자 아이가 벌떡 일어나버렸다. 숙제 할 거라며 방으로 들어가 책과 공책을 챙겨오는 모습에서 어른의 손을 탈 여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보쿠토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아이가 썼던 수건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부엌으로 향했다. 아이가 공부하는 사이에 저녁 준비를 할 참이었다. 


냉장고에 정리해 넣어두었던 식재료들을 꺼내고 냄비와 도마를 챙기는 그의 손길이 자못 능숙했다. 보쿠토는 양파 껍질을 벗겨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에는 식칼을 잡았다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테마는 추억 속의 그대에게~! 입니다! 


몇 년 전에 한 TV 쇼에 출연했던 적이 있었다. 그의 전부인인 키리에나 안즈가 막 영화 촬영을 마친 직후였는데 그녀가 거의 처음으로 영화관 스크린이 아니라 TV 화면에 모습을 비추었을 때였다. 배우들과 그 반려자들이 출연하여 반려들이 배우를 위한 요리같은 것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보쿠토도 키리에나도 관심이 없었던 것을 키리에나의 매니저가 반쯤 애걸복걸하다시피 하여 승낙했더랬다. 


진행자가 말하는 ‘추억 속의 그대’라는 것은 부부가 처음 만났을 무렵을 뜻하는 것이었다. 서로 낯설고 풋풋하던 시절에 먹었던 요리를 재현하거나 그 때를 형상화하여 지금의 배우자에게, 그런 말이 진행자의 입에서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도우미로 도쿄에 유명한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라는 쉐프까지 영입해왔다. 


보쿠토는 그 날 TV 쇼에서 불고기를 넣은 주먹밥과 맑은 된장국을 만들었다.  사회자는 깜짝 놀랄만큼 소박한 음식이라며 유난을 떨었고 키리에나는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맛있게 먹어주었다. 


‘그 때부터 알아챘나?’


보쿠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했다. 한 쪽을 보기 시작하면 그것밖에는 할줄 모르는 성격은 그 때도 지금도 여전했고 사회자가 ‘추억 속의 그대’라고 말한 순간 떠오른 것들을 그 시점에 적절한 것으로 되돌려줄 사람도 추억 속에 있었다. 넋을 놓고 만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주먹밥이 떡하니 만들어진 뒤였다. 키리에나는 쟁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투박한 주먹밥 두 개를 잠깐 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 때 쇼에서 도움을 주었던 쉐프는 보쿠토를 보며 미각이 뛰어난 것 같다며 그 뒤 이어진 두어번의 방송 촬영에서도 이것저것 알려주고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 TV쇼 출연은 세 번인가 네 번으로 막을 내렸다. 키리에나가 더 이상은 나가고 싶지 않다고 강경하게 말한 탓이었다. 곧 개봉할 영화의 홍보는 이미 충분했기에 키리에나의 매니저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보쿠토도 더 하자고 매달릴 이유가 없어 선뜻 그만두었더랬다. 


그 뒤로 요리는 보쿠토의 다른 취미 중에 하나가 되었고 키리에나는 매번 그가 한 요리를 잘 먹어 주었다. 제작년까지는 그랬다.


—이젠 정말 못 먹겠어. 


간단하게 만든 샌드위치였다. 키리에나는 식탁 앞에 앉아서 그 샌드위치를 내려다보다가 손도 대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다. 보쿠토는 맛이 없냐고 물었지만 키리에나는 모든 요리가 전부 아주 맛있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가 보쿠토의 요리를 다시 먹는 일은 없었고 보쿠토도 요리 하기를 관두었다. 


어쩌면 키리에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이혼할 때 한 대 맞았어야 했는데…….’


보쿠토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양파를 도마위에 올리고 식칼을 대었다. 식칼이 부드럽게 들어가며 양파가 반으로 잘린다. 보쿠토는 능숙한 손길로 양파를 잘게 썰기 시작했다. 


*


아이가 고집을 부려서 설거지는 아이가 했다. 식기를 건조대에 가지런히 늘어놓고 거실로 돌아왔다. 아이가 소파에 앉아서 책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보쿠토는 아이가 앉은 쪽과는 반대쪽 팔걸이가 있는 곳에 바짝 붙어서 발코니 쪽 야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적뿐인 시간이 한참이나 지속되었을 때 보쿠토가 몸을 한 번 뒤틀었다가 TV의 전원이 들어갔다. 갑자기 소리가 나고 화들짝 놀란 보쿠토가 리모컨을 찾아 온갖 버튼을 누른다. 전원보다 음소거 버튼이 먼저 눌려 실내는 조용해졌지만 화면에서는 소리없는 영상이 요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가 책을 덮었다.


“TV 보셔도 돼요.”

“아, 아니……. 켜려고 한 거 아니야!”


보쿠토가 부정했지만 아이는 그 부정에는 관심이 있는 눈치가 아니었다. 보쿠토의 손에서 직접 리모컨을 가져와 음소거 해두었던 것을 끄고 음량은 적절히 낮춘 뒤 다시 리모컨을 보쿠토에게 돌려준다. 그리고는 책을 펼지는 것이다. 보쿠토는 리모컨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카즈마.”

“……네.”

“내가 싫으면 아카아시한테 싫다고 말하지 그래.”

“…….”

“그럼 아카아시도 나보고 이제 그만 나가라고 할 텐데.”


아이가 단숨에 그를 돌아보았다. 새파랗게 타오르는 황금색 눈동자는 아이답지 않을 만큼 매섭게 보쿠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쿠토는 표정없는 얼굴로 아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한참 뒤에 아이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싫어하지 않아요.”

“에, 거짓말.”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나한테까지 거짓말 할 필요는 없잖아?”


보쿠토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TV에서는 가짜 웃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가 거실 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보쿠토는 살짝 턱을 세우고서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서로 마냥 서먹하여 낯설기만 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윽고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무얼 도와주려고 하기라도 하면 눈을 새파랗게 치켜뜨고서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한다. 밀어내고 멀어지고 노려보는 눈길은 싫어한다는 표현보다는 증오라는 단어에 더 가까웠다. 자신이 그렇게나 잘못한 게 있나 생각해 본다면 이 집에 무턱대고 쳐들어온 것 정도일텐데, 그게 아무리 잘한 것이 아니라곤 해도 그 정도로는 이해하기 어려눈 눈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카아시 앞에서는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낯을 가리는, 익숙하지 않은 서먹함, 딱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다.


“그럼 그 쪽이 알아서 나가면 되잖아요.”


보쿠토는 아이가 자신을 한 번도 제대로 부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쪽이라니, 저 또래 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 더욱 첨예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아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그러기 싫으니까.”

“그럼 계속 계세요. 그러는 걸…….”


아이가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세게 깨문다. 그리고는 또 보쿠토를 노려보았다. 금빛 눈동자에 새파란 빛이 깃들어 그를 찌를 것만 같다. 보쿠토는 입술을 한 번 삐죽했다. 


“알았어. 며칠만 있다가 나갈게.”

“……!”

 

아이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본다. 마치 기적을 마주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보쿠토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린아이의 눈빛이라곤 해도 아카아시와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데 노려보는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마음 편하지만은 않았다. 


“오래 신세지긴 했고.”


코노하에겐 마치 영원히 여기에 있을 것처럼 말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걸 보쿠토는 그 때에도 인지하고 있었다. 


“……진짜……진짜 갈 거예요?”

“너 그렇게 내가 싫냐?”


이쯤 되면 이쪽도 서운할 지경인데, 아이는 그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그저 환히 웃는 것이었다. 안심하고 마음이 놓여 힘이 풀린 듯이 그러면서도 활짝. 보쿠토는 아이가 웃는 얼굴을 처음보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아카아시 만나러 올 거야.”

“…….”


언제 웃었냐는 듯이 또 표정이 굳어서 그를 바라본다. 곧 그 시선은 아이가 품에 안고 있던 책으로 떨어졌다.


“그 정도는 알았어요.”

“야, 너무 싫어하지 말라니까. 나 그래도 아카아시랑은 옛날부터…….”


옛날부터……. 거기까지 말했던 보쿠토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팩 돌렸다. 옛날부터. 아주 옛날부터 소중하게 생각했다. 잃을 수 없었고 그래서 만날 수 없었다. 달리 생각했다면 지금 이 순간 다른 결과가 있었을까.


보쿠토는 소파의 팔걸이에 턱을 괴고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10년만에 만났는데 아카아시는 자신을 본체만체하고 아카아시의 아이는 그만 보면 눈을 못 세워 안달이다. ‘이 집 사람들은 다 나만 싫어해.’ 보쿠토가 투덜거리는 말에 아이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번만은 적의가 보이지 않는 시선이었다.


“정말 그랬으면 나는 좋아했을텐데.”


말간 금빛 눈동자가 처음으로 아이답게 보드라운 빛이었다. 보쿠토는 놀라서 눈만 꿈벅거렸다. 아이가 책을 덮고는 안녕히 주무세요, 그 말만 남겨두고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