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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가 진의 버릇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두 사람만의 졸업파티는 진의 자택에까지 이어졌고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소년들은 찬장에 잠들어있던 술병에도 손을 뻗었다. 


술에 취한 진은 그날 프롬 파티의 퀸에 대해 밤새도록 떠들었고 니노는 그런 진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다. 지적이고 명석한 그 퀸은 분명히 어떤 면에서는 진의 취향이었던 것 같다. 좋아했던 것도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니노는 조금도 마음상한 것 없이, 초조해하는 것도 없이 그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더랬다. 


그 다음번에 술을 마셨을 때 진은 같은 대학, 같은 과의 여학생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니노는 빙긋이 웃으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진은 그녀가 얼마나 똑똑한지, 얼마나 결단력이 있으며 지적인지,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니노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더랬다.


그 다음에는 지금의 상관인 모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같은 사람을 존경하는, 통하는 바가 있는, 지적이고 냉철한 여자. 니노는 그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웃는 낯으로 들어주었다. 실상 진에게 술을 왕창 먹이는 것도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진이 지금은 누구를 좋아하는지, 듣기 위해서. 


진은 술에 취하면 자신이 마음에 둔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끊임없이.


*


“너 말이다, 나한테만 술을 먹이고…….”

“딱히 먹이는 건 아니지만.”


니노는 가볍게 부정하고는 턱을 괴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진이 술잔을 손에 들고 흔들고 있었다. 니노는 진 앞에 치즈와 말린 과일을 밀어주기만 했다. 그의 부정에 걸맞게 술을 입으로 넘기는 건 진이었다. 


“내가 취하는 게 재밌는 거야?”

“조금?”


니노는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흘끗 둘러보았다. 고급 식자재를 쓰는 와인바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렇게 시끄럽지는 않았다. 모두 목소리를 낮추고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속삭일 뿐이다. 그 중에는 대화를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 테이블도 있었다. 아마도 진을 호위하는 자들일 것이다. 


ACCA의 쿠데타 미수가 있었던 이후로 진의 신분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이렇게 여기 저기에서 몰래 숨어 호위하는 자들이 눈에 띄곤 했다. 진은 그런 것들을 모두 불편해했지만 내버려두었다. 왕실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넌 내가 바보짓 하는 거 항상 재밌어했지, 고등학교 때부터…….”

“그렇지는 않았는데.”


니노의 말에도 진은 술잔을 기울이며 투덜거린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시절의 일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이었다. 대개는 이런 자리에서 따지고 들기는 커녕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사사로운 일들 뿐이다. 니노는 조금 당황해서 그 모든 게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변명했지만 진은 ‘그럼 그게 아니면 뭐냐’라고 그를 몰아세웠다. 


진의 투정 아닌 투정은 그가 테이블 위에 엎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제야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니노를 흘끗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자를 취할 때까지 마시게 내버려뒀다는 질책의 눈빛이었다. 니노는 억울했지만 항변하지 않고 진을 부축해 가게를 나섰다.


“진, 제대로 걸어야지.”


부축을 해보지만 진의 걸음은 휘청이기만 한다. 종내에는 체중을 완연히 니노에게 실어댔다. 니노는 그걸 떠받치며 말로는 계속 ‘제대로 걸어야지’, ‘조심해야지’ 따위의 소리를 속삭였지만 진과는 숨 한마디 들어갈 틈도 벌리지 않고서 그를 이끌어 맨션으로 향했다. 


진의 맨션으로 돌아가자 두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깬 로타가 가운을 두르고서 걸어나왔다.


“또 술을 이렇게. 니노, 적당히 먹이랬잖아.”

“내가 먹인 게 아니야.”


아리따운 공주의 힐난에 니노는 열심히 항변했다. 로타는 졸린 와중에도 훈계하는 표정으로 니노와 정신차리지 못하는 오라비를 노려보고는 침구를 준비해주었다. 자고 가라는 그녀의 말에 니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술에 취할 때면 답답하다는 이유로 항상 소파에 드러눕곤 하던 진은 버릇대로 소파에 몸을 파묻고, 그 사이에 로타에게서 베개와 얇은 이불을 받아온 니노는 진의 목 아래에 베개를 넣어주고 이불까지 덮어준 뒤에야 한숨을 돌렸다. 로타가 그에게도 이불과 베개를 내주곤 내일 수업이 있다며 침실로 쏙 몸을 숨긴다. 


로타도 방으로 돌아가고 진은 잠에 빠져, 깨어있는 사람은 니노 혼자인 거실은 고요했다. 너른 창으로 별빛 드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니노는 턱을 괴고서 잠에 빠진 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무슨 얘기 했더라…….’


진보다야 덜취했다고 해도 그 역시 술을 마시긴 마셨던지라 정신이 몽롱했다. 


진은 매번 니노가 잔뜩 술을 먹인다며 투덜거렸는데, 그에 관해서라면 니노도 할 말은 있었다. 우선 전혀 거절하지 않는 진도 문제가 있다. 마시라고 술을 따라주기는 했지만 진도 ‘됐다’거나 ‘안 마실래’라는 말은 일절 않고서, 항상 또 먹이는 거냐거나 매번 이런 식이라거나 하는 투덜거림만 뱉고는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그럼 거절하면 되잖아’라고 하면 또 네가 주는 건데 어떻게 그러느냐는 소리를 해서…….


그래도 진에게 술을 내밀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술에 취한 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이 지금 진의 마음을 차지한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진의 사랑은 강가의 잔물결처럼 고요하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열띤 마음을 토로하는 법 없이, 그저 고요히 상대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다 그 상대를 도와줄 일이라도 생긴다면 기꺼이 도와주지만 그것으로 마음을 사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진은 그 강물같이 잔잔한 사랑으로 뭍의 모래를 사그러뜨리듯 마음을 접었다.


혹자는 그것이 용기가 없어 지켜보는 것뿐이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니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천 명의 사람만큼 천 가지의 사랑이 있다. 진의 사랑이 그러하다면, 니노에게는 그것으로 전부였다. 그리고 그 고요한 사랑이 열에 들떠 떠드는 순간은 진이 술에 취했을 때뿐이다. 니노는 그래서 진에게 술을 먹이곤 했다. 그의 사랑이 어디쯤에 다다랐는지 가늠해보기 위해서. 


“어…….”


잠에 빠진 진의 금발을 사륵사륵 쓸며 오늘의 대화를 되새겨보던 니노는 흠칫하며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오늘 밤, 진은 하루 종일 니노의 이야기를 했다. 네가 고등학교 때 어떠했고 대학 때는 어땠고, 그래서 지금은 또 어떠하다고. 와인바에 들어가기 전부터 모든 기억을 다 뒤져봐도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니노의 이야기뿐이었다.


*


“니노?”

“으응?”

“요즘 너 다른 생각 많이 한다.”


진이 담배를 입에 물며 핀잔을 던진다. 니노는 자연스럽게 옆에 선 진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거야? 술 마시잔 얘기도 하지 않고……. 혹시 도와에서.”

“그런 일은 아니야.”


그러니까 일이 있기는 있는 거네, 진은 속으로 생각을 삼키곤 오랜 친구의 옆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깊이 있는 눈매에 그늘진 머리카락, 언제나 안경을 쓴 모습이 익숙했는데 최근에는 자주 안경을 벗는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부터 그렇다. 그에게는 아마 그 안경도 굴레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말로 해본 적은 없었다.


“얘기할 상대가 필요하면 말해.”

“……으응.”


말을 해놓고도 새삼스러워서 진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을 해보니 니노가 그에게 딱히 무언가를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술을 마실 때도 그렇다. 항상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이고—무슨 이야기인지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들어주는 쪽은 니노다. 일상 생활에서야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오늘 저녁 같이 먹자.”

“오늘?”

“로타는 친구들하고 먹고 들어온대. 저녁 혼자 먹기 싫어.”


이렇게까지 말하면 니노는 거절하지 않는다. 일이 있기 전까지는 무의식중에 알고 있던 것이었는데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니노는 잠깐 뺨을 긁적였을 뿐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휴대전화를 꺼내 이리저리 연락하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약속을 미루는 것 같았지만 진은 자신의 제안을 철회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어지면 말해, 라는 말로는 니노는 결코 말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에게 달리 자신의 일을 말할 상대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니노의 30년은 모조리 자신이 집어삼켰으므로. 


평소에는 항상 이런 저런 봐둔 가게가 있다며 그를 이끌고 가던 니노였지만 이번만은 진이 앞장섰다. 그들이 갔던 가게들 가운데에 술과 맛좋은 치즈가 나오던 가게였다. 식사를 하러 가자더니 술이 먼저냐며 한 마디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런 말도 없다. 진은 자리를 잡고 앉아 술과 요깃거리를 시키고는 니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요즘 니노는 부쩍 눈에 띄게 말수가 적어졌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진은 알 수 있었다. 평소에는 뻔히 다 알면서도 무슨 일이 있었냐거나 요즘은 재미있는 사람이 없냐거나 하고 묻는 그였는데, 요 근래엔 그런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간혹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때는 늘었다. 그 때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니노는 바쁜 일이 생겼다며 훌쩍 자리를 비워버려 질문을 봉쇄했다. 


종업원이 와인과 음식을 내왔다. 진은 니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평소엔 항상 니노가 먼저 따라줬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잔에서 붉은 포도주가 맑게 찰랑거렸다. 


“니노. 일 하는 건 어때? 할만 해?”

“응? 음, 뭐……. 그냥 그렇지.”


로타와 자신이 신분에 대해 알게 된 후로 궁을 드나들게 되면서 니노의 일도 끝이 났다고 했다. 그 뒤로 아무 일이 없어진 그에게 ‘진짜’ 잡지사 일을 권한 건 진이었다. 일생을 사진 찍는 것만 보고 사진을 찍기만 해온 그였다. 그 사진 찍는 일이 싫지 않다면 다른 방식으로 계속해보는 건 어떨까 했던 것이다. 처음엔 영문 모를 저항감을 느끼던 것 같은 니노였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듯했다.


“며칠 전엔 립스틱을 세워놓고 찍었지……. 색이 고왔어.”

“로타한테 추천할 만한 건 없었어?”

“음, 생각을 못했는데……. 다음번에 한 번 물어보지 뭐.”


그 뒤로 다시 대화가 끊긴다. 진은 와인잔을 홀짝거리며 미간을 모았다. 말 하고 싶지 않다는데야 몰아세울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속은 답답한 것이, 이렇게 한 잔 두 잔 홀짝거리고 있다 보면 어느새 니노가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해봐도 별달리 소용이 있지는 않았다. 


“피곤해? 들어갈까?”


술도 한 병 비우고 적당히 배도 채웠겠다, 니노는 아무리 두고 있어도 무슨 말을 할 것 같지도 않으니 돌아갈까 하는데 니노가 덥석, 일어나려는 진의 손을 붙들었다.


“……괜찮아. 조금만 더 마시자.”


진은 눈을 깜박거리다 도로 자리에 앉았다. 꼭 말을 해야만 하는 게 친구 사이는 아니다. 그리고 니노에게 필요한 게 시간이라면, 진은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니노는 그 뒤로 포도주 두 병을 더 시켰고 진은 투덜거리면서도 니노가 따라주는 술을 모두 받아마셨다. 


*


눈을 떴을 땐 달이 드높은 새벽이었다. 너른 창으로 별과 달의 빛이 몸을 적셔준다. 진은 몸에 두른 익숙한 담요를 끌어안으며 팔을 뻗었다. 곧 그의 손에 물잔이 잡혔다.


“……니노, 깨 있었어?”


잠깐 사이에 잠들었다고 목이 잠겼다. 진은 몸을 일으키며 다른 소파에 앉아 있는 니노를 바라보았다. 


주위를 밝힌 빛이라고는 복도 아랫쪽의 조그만 전구에서 새어나오는 온화한 주황색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전부였다. 그 속에 니노는 가만히 어둠에 물든 채 앉아서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혀 자지 않은 눈치였다. 


“로타는?”

“일찍 자러 들어갔어.”

“……물 마실래?”


마른 목을 축이고 나니 니노의 목소리도 나직이 가라앉아있다는 게 느껴졌다. 진의 질문에 니노가 고개를 젓는다. 진은 몸을 바로하고 앉았다. 술기운에 두통이 느껴졌지만 정신은 뚜렷했다. 


“니노.”

“……응?”

“내가 혹시 술 마시면서 이상한 소리라도 했어?”


니노의 태도가 이상해졌던 건 며칠 전 둘이 나란히 술에 취해 뻗었던 날부터였다. 평소에 자신의 술자리 버릇에 대해서라면 모브 본부장에 대해 거듭 이야기 한다고 했던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니 그런 대화를 했던 건 ACCA의 쿠데타가 있기 전 딱 한 번이다. 그 뒤로 달리 무슨 소리를 한 건지는 전혀 모른다는 걸 진은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다. 


“뭐? 아니,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그럼 왜 그러느냐고 묻고 싶지만 니노의 눈동자가 달그림자에 물들어있다. 니노는 그대로 한참이나 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니노?”

“요즘은……. 요즘은 아무 얘기 안 해.”

“예전엔 했어?”

“했지.”

“무슨 얘기.”

“이런 저런 얘기…….”


역시 니노가 무슨 얘길 하는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전혀 기억에 없다. 니노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겠지만. 


진이 무언가 말을 더 해야할지 고심하는 표정이 되었을 때 문득 니노가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까지 그를 둘러싸고 있던 팽팽한 공기가 단숨에 물러진 것 같았다. 눈매가 녹진히 풀린 채 그를 보고 있다. 진이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볼 때야 니노는 말아쥐었던 손을 풀었다.


“니노?”

“아아……. 이제 괜찮아.”

“이제?”


정말로 지금까지 괜찮지 않았던 뜻이지 않으냐고 한 마디 하고 싶었는데 저 풀린 눈동자를 보니 할 말이 사라져버렸다. 


진은 괜히 한숨을 내쉬기만 했다. 니노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데 더는 추궁할 수도 없다. 니노가 괜찮아졌다면 그걸로 된 셈이었다. 자신에게 할 이야기라면 어련히 알아서 이야기할 것이다.


“한 잔만 더 마실까?”

“괜찮아지자마자 나 술부터 먹이는 거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말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진은 어딘가 모르게 작게 안도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니노의 표정도, 술을 권하는 목소리도 이제야 평소와 다를 바가 없다. 


진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니노는 진의 부엌 찬장에서 술병을 두 개 더 꺼내왔다. 그 모습을 진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니노는 눈동자를 한 번 굴렸다.


“……내가 그렇게 이상했나?”

“이상했어.”


포도주를 맥주처럼 마시면서 진은 투덜거렸다. 니노는 이젠 웃기까지 한다. 얄미워서 정강이를 차줄까 하다가 그만둔 진은 니노의 잔에 왕창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니노는 그것까지 웃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진에게 물었다.


“걱정했어?”

“넌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네.”


진은 구워져 나온 빵에 크림치즈를 매끄럽게 바르다 한숨을 내쉬었다. 니노는 지긋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그럼.”


그 대답이, 니노로서는 몹시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진은 니노가 배부른 맹수마냥 느긋하게 웃는 것을 보고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술은 결국 또 진의 몫이었다.


*


집에서 술을 두 병이나 더 마시고, 정말로 뻗어버린 진을 추슬러주던 니노는 등 뒤에서 느껴진 기척에 침을 꿀꺽 삼켰다. 뒤를 돌아보니 가운을 걸친 로타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로타의 불효령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니노는 자신을 보고만 있는 로타와 시선을 마주하기만 했다. 한참이나 그를 올려다보던 로타는 어른스러운 한숨을 내쉬고는 ‘괜찮아졌나봐. 오늘만 봐주는 거야!’ 라는 말만 남겨놓고 쌩하니 몸을 돌려 침실로 돌아갔다. 


진을 소파에 뉘어놓고서 담요까지 덮어주고 난 뒤에야 니노는 긴장이 풀린 얼굴로 소파에 기대었다. 진은 눈매까지 붉게 달아올라서는 어린애처럼 잠에 빠져있었다. 


자신이 한동안 이상하기는 무척 이상했나보다, 니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에 빠져든 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간이 늦어 어둑한 거실에 달빛만이 진의 실루엣을 장식하고 있다. 몇 번이나 본 모습이었는데 오늘만은 어딘가 특별했다. 


다감한 진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가 다시 사그러드는 동안, 니노는 마음의 한 점 꺼림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어려서 사고로 부모를 잃은 뒤로 진은 ‘잃을 수 없는 사람’을 고르는 데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애당초 강한 성격이 아니었던 탓도 있어 그의 집착은 옅었고 마음은 신중했다. 


그리고 자신은 진에게 이미 그 ‘잃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기다리면 된다. 자신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진이 이따금 수줍은 얼굴로 이름을 말하는 그녀들은 결코 진의 그 울타리 안에 들어오진 못할 것이었다. 그 울타리는 보이지 않는 발밑 아래로 하염없이 깊었고 그걸 눈치 채고 있는 건 니노 자신뿐이었다. 진 스스로도 모르는 것을, 그래서 니노는 기다렸다.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 때가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술에 취에 열에 들뜬 얼굴로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진을, 이렇게 빨리 보게 될 거라고는. 


그래서 그 동안 니노는 자신의 마음과 진의 마음을 가늠해보며 어찌할 바 모르기만 했던 것이다. 생각만 해오던 것이 갑자기 눈앞에 닥쳐와 당황한 것과 동시에 진의 마음에서 피었다가 모래처럼 허물어졌던 사람들이 떠오르고 만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그녀들처럼 져버릴 것이 두려워 아무 말 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니노는 진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붉게 물든 눈가로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진을 보는 건 그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심장은 첫사랑하는 소년처럼 급하게 뛰었고 목은 자꾸 말랐다. 진이 취하지 않았다면 그가 손을 뻗어올 때마다 귓가를 붉히는 니노를 알아챘을지도 모르겠지만. 


니노는 작은 웃음을 속으로 삼키고는 허리를 숙이고 진의 머리칼에 입맞춤했다. 이제 그런 모습을 실컷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 진은 처음 보는 자신의 모습에 무어라고 할까. 놀라서 도망칠지도 모르니 이제 도망치지 못하게 끌어안고 자야겠다, 니노는 마음을 먹고는 잠든 진을 추슬러 침실로 향했다. 


진이 잠결에 무어라고 말했지만 니노는 모르는 척했다. 해가 뜨고 진이 일어나서 기겁하며 그를 흔들어 깨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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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트세모 | 우산

2017. 5. 18. 12:55


제트 의인화


****





비는 세상을 전부 마모시켜버릴 기세로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세모는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내 신고 건물 바깥 너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하늘은 천둥과 번개까지 더해 비를 퍼붓기만 할 뿐이었다. 소년소녀들이 까르르 소리를 내며 우산을 쓰는 둥 마는 둥 하여 빗속을 뛰어서 멀어진다. 세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산은 항상 사물함에 챙겨놓기 때문에 문제될 건 없었지만 이렇게나 비가 쏟아져서야 우산이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천년 만년 비 그치기만 기다릴 수도 없으니. 어느새 학생들도 대부분 하교해 교정은 고요했다. 가방을 고쳐 맨 세모는 내리는 비를 다시 한 번 더 쳐다보곤 팡 하고 우산을 펼쳤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딛었을 때.



“……?”



세모는 우산을 들어올리기도 전에 발밑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보곤 고개를 들었다. 낯선 남자가 곁에서 커다란 우산을 세모 쪽으로 기울여 들고 있었다. 처음보는 얼굴이다. 세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는 묘하게 그의 시선을 피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모 위로 드리운 우산은 거두지 않고서 꿋꿋이 서 있었다.



“저기…….”



세모가 말을 거는데, 그 말을 듣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세모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보다 키도 몸도 훌쩍 큰 성인 남자였다. 아빠보다 더 큰것 같아. 세모는 속으로 생각했다. 따뜻한 노을같은 주황색이 감도는 머리카락 아래에 어쩐지 긴장한 듯 상기된 뺨, 이쪽을 흘끗거리는 눈동자…….



“……제트?”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낸 건 어째서였을까. 세모는 얼른 다시 누구냐고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빗물에 나뭇잎 춤추듯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세모가 들고 있던 우산이 바닥을 나뒹굴고, 한참은 멀고도 높이 있던 얼굴은 뺨이 닿을 만큼 가깝다. 어느새 그가 세모를 번쩍 들어올려 껴안은 탓이었다. 훌쩍 시야가 높아지고 그의 눈과 남자의 눈이 마주한다. 기쁨이 만개하는 꽃처럼 찬연하게 피어나는 눈동자가 세모를 보더니 깊이 깊이 웃었다. 부벼오는 뺨은 조금 서늘했다. 



“-어-어떻게 된 거야, 제트.”

“리모 박사님이 이렇게 해주셨다구, 그러더라구! 나는 세모가 나를 못 알아볼줄 알았다고 그러더라구!”

“딱 보니까 넌데 뭐.”



세모는 놀란 기색을 꾹 누르고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곤 여전히 그를 보고 싱글벙글하기에 바쁜 남자를 바라보았다. 세모가 그를 한 번에 알아본 것이 어지간히도 기쁜 눈치였다. 



“그런데 왜 말을 안 하고 서 있기만 했어.”

“그, 그게. 세모가 제트를 안 믿어 줄까봐, 걱정이……. 돼서… 라고 그러더라구…….”



남자의 귀가 빨개져서는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한다. 남자는 세모를 여전히 안아든 채 뜨문뜨문 말을 이었다.



“리모 박사님이, 세모를 안아 줄수 있는 로봇으로 만들고 싶다고 그러더라구. 그래서 제트도 찬성했다고 그러더라구. 그런데 이런 모습이 되자마자 박사님이 세모한테 말도 없이 마중 보내버릴 줄은 몰랐다구……. 그러더라구……. 무, 물론 세모 마중은 언제나 좋다고! 그러더라구!”



그래서 안 내려놓는건가. 세모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우산 두개를 보며 납득했다. 그런 세모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조심스레 세모의 눈치를 살폈다.



“세모는……. 저기, 이 모습이 맘에 드는지, 라고 그러더라고…….”

“응, 좋아.”



세모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집에 가게 내려줘’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만 그 말이 쑥 들어가고 말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 꿈결처럼 밝았다. 안도와 기쁨이 고운 천의 자수처럼 아름답게 맺혀 그를 보고 있다. 세모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게 그렇게 걱정됐어?”



제트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별로,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것도 아닌데. 어차피 다 너잖아.”



그리고 세모는 말을 한 것을 조금 후회했다. 그러잖아도 기분이 눈에 보일 듯 그림으로 그린 듯 티가 나는 제트였는데 이렇게 사람의 모습이 되니 더했다. 금방 눈이 그렁그렁해진다. 이러다가 정말로 울겠다 싶은 생각이 든 세모가 얼른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내려달라고 말을 돌렸다. 세모를 바닥에 내려준 제트가 세모의 우산을 접어 챙겨들고 저가 가져온 우산을 세모 쪽으로 기울였다. 그리고는 왠지 안절부절못하더니 조심스레 세모의 손을 잡아 저의 허리께 옷자락에 올려놓는다. 



“자, 잡고 가라고, 그러더라구…….”

“괜찮은데.”

“길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러더라구…….”

“안 잃어버리는데.”

“……!”



뭔가 더 말해볼까 하던 세모는 아무래도 여기서 더 하면 제트가 정말로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싶어져 그만두곤 제트의 셔츠 자락을 손으로 붙잡았다. 금방 활짝 웃는 얼굴이 된 제트가 한껏 세모 쪽으로 우산을 기울인 채 소년의 걸음에 발을 맞추었다. 세상을 부술 듯이 쏟아지는 폭우가 우산을 때리느라 바쁜데도 이상하게 우산 속은 고요했다. 세모는 흘끗 고개를 올려 옆을 쳐다보았다. 웃고 있는 제트가 기다린듯이 금방 시선을 마주해왔다.



“제트. 너 어깨 다 젖잖아. 우산…….”

“어린이는 비 맞으면 감기 걸린다고 그러더라고! 제트는 무지무지 튼튼하다 그러더라구!”



제트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있다. 세모는 조그맣게 웃음과 한숨을 섞어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이길 수가 없다.



“제트는 이렇게 사람이 돼서 좋아?”

“완전 좋다구 그러더라고!”

“왜?”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않아 올려다보자 또 귓가가 빨갛다. 세모는 눈을 깜박거렸다. 잠깐 동안 빗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이제 어디든 갈 수 있다고 그러더라구…….”

“어디든?”

“세모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이미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제트가 고개를 저었다. 



“세모가 방에서 울고 있으면, 세모가 차고로 나오기 전에는……. 제트가 곁으로 갈 수 없어서……. 라고 그러더라구…….”

“벼, 별로 울거나 그런 적 없잖아.”



이번에는 세모의 귀끝이 붉어졌다. 제트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만. 아주 가끔이었다고 해도 그래도 곁에서 위로해주지 못했던 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르 하고 울던 밤, 수면모드를 껐다 켰다 하길 반복하며 밤을 지새우고 겨우 해가 떠 세모가 차고로 내려올 적이면 꼭 소년의 눈밑이 붉게 짓물러 있었다. 세모, 하고 이름을 부르면 그런 날의 세모는 꼭 딴청을 피우며 출발을 재촉하기만 한다. 알아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별이 떨어지고 해가 떠오르길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



“그래도…….”

“알았어.”

“!”

“나도 제트가 이렇게 되니까 좋아.”



그렇게 말한 세모가 잠깐 머뭇거리며 제트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살짝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리곤 팔 근처의 옷깃을 살며시 잡는다. 그걸 보고있던 제트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호흡을 멈추곤 세모를 번쩍 안아들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어 당황한 세모가 제트의 이름을 부르며 그만 내려달라고 해도 제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싱글벙글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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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푸치노 두 잔이요. 하나는 시나몬 뺀 걸로. 사과케이크 하나랑 치즈와 감자 올려 구운 토스트로.”


진은 노천카페의 의자에 몸을 미끄러뜨리고 앉아서 맞은편에 앉아있는 니노가 음료 주문하는 걸 잠자코 바라보았다. 웨이터가 자리를 뜬다. 니노가 고개를 갸웃하며 진을 돌아보았다.


“뭐 묻었어?”

“아니……. 너 시나몬 안 먹네, 그러고 보니까.”

“음, 향이 나니까.”

“그 향때문에 먹는 거잖아, 시나몬은.”


니노는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원이 커피 두 잔과 케이크를 내어왔다. 진은 사과 케이크에 포크를 찔러넣더가 고개를 들고 진을 바라보았다.


“여기 사과 케이크도 시나몬, 안 넣는구나.”

“그렇네~.” 


니노는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웃는 낯인 채 포크로 사과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는다. 진은 반쯤 사라진 사과 케이크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담배 케이스에 손을 올렸다. 둥근 카푸치노 머그에는 갈빛 시나몬 파우더가 천사의 발자국처럼 올라가 있었다. 



*



“응?그러고보니 마늘도 안 먹지 않아? 싫어하는 거 아닐까?”

“그런가……. 샐러리나 고수같은 것도 안 먹었던 것 같지.”

“응, 니노는 카레도~!”


롯타가 진 앞에 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놓아주며 말한다. 진은 김이 올라오는 치즈 토스트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향이 강한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네. 전혀 몰랐어.”

“니노는 자기 얘기 잘 안 하니까 말이지. 특히 뭐 싫다곤 얘기한 적 없지 않아?”


롯타가 그렇게 말하며 진의 맞은편에 자리잡고 앉았다. TV에서는 오늘의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늘 바돈의 날씨입니다. 완연한 봄날씨로, 포근하고 쾌청한 하루가 지속될…….


“집에 초대해서 식사할 땐……. 뭔가 가리는 건 본 적이 없는데.”

“아, 그건 그렇다. 잘 못 먹는데 참아준걸까? 다음번에 한 번 물어봐야겠어.”


롯타가 가열차게 토스트를 입에 밀어넣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초콜렛 좋아하는 건 알고 있는데, 롯타의 말에 니노는 턱을 괸 채 TV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만 저녁 무렵에는 갑작스러운 강수 확률이 있습니다. 소나기가 내릴지도 모르…….


“롯타, 우산 챙겨.”

“응, 오빠도! 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어?”

“……아니, 밖에서 먹을 것 같아. 먼저 먹고 있을래?”


롯타가 고개를 끄덕인다. 진은 한 입 베어먹은 치즈 토스트를 내려다보았다. 노릇하게 구운 치즈가 올라간 토스트였다. 진은 식탁에 턱을 괸 채 토스트를 손으로 들어 바라보았다. 


“치즈 토스트도 안 먹네, 니노 녀석.”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진은 그렇게 중얼거리곤 덥석, 토스트를 베어먹었다. 



*



고요한 가운데에 투둑투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진은 비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은 진의 자리에 있는 스탠드만으로 아슬아슬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빗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한다. 진은 스탠드 불을 끄고서 서류가방을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ACCA 건물은 이미 모두가 퇴근해 고요했다. 복도의 창 너머로 비가 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게 고작이다. 진은 건물의 출입구 앞에 도착해서야 망설임없는 걸음을 멈추었다. 등 뒤에서 출입문이 소리 없이 닫힌다. 진은 표정없는 얼굴로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비에 젖어 미끄러지는 듯한 아스팔트 위로 가로등의 오렌지빛 불빛이 흩어졌다.


잠깐의 고요 끝에 그의 발치에 긴 그림자가 기울어졌다.


“—진. 우산 안 가져왔어?”

“니노.”


반 보 뒤에서 말을 붙여오는 사람이 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났지만 진은 놀라지 않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가죽으로 만든 재킷을 걸친 니노가 빙긋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는 우산을 쓰고 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바짓단이 살짝 젖은 걸 보면 비가 내리자마자 나선 모양이었다. 


“응. 두고 왔어.”

“집까지 가자.”


니노가 우산을 바깥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우산의 천 위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진은 고개를 들고 우산을 바라보다가 니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깥에서 저녁 먹고 갈까.”

“롯타는?”

“먹었대, 먼저.”


진은 먼저 한 걸음 내딛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기에 니노가 망설임 없이 따라붙어 우산을 기울여주었다. 찰박찰박, 비가 온 거리를 걸어간다. 진은 말을 이었다.


“뭐 먹을래?”

“글쎄, 아무거나?”

“그럼 파스타 어때?”

“파스타 먹고 싶었어?”

“응, 조금…….”


조그맣게 대답하면 금방 옆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니노는 눈여겨 보아둔 파스타 가게가 있다며 우산을 들지 않은 쪽으로 골목을 가리켰다. 진은 그 방향으로 차분이 걸어가며 시야에 언뜻언뜻 들어오는 우산의 끝자락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

“응?”

“고등학교 때 말야, 한 번도 우산이 없었던 적이 없네.”

“아아.”

“내가 네 우산 열 개쯤은 가져갔던 것 같은데.”

“하하, 그야 왕자님이 비 맞게 할 수는 없잖아?” 

“그런가. 왕자는 아니지만 말야.”

“글쎄.”


니노가 딱히 긍정도 부정도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진이 무어라 하기 전에 오래된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가 나타났다. 


“아, 여기야.”


비가 와서인지 가게 안은 드문드문 빈자리가 엿보였다. 진은 니노의 곁에 서서 니노가 우산 정리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우산을 접은 니노가 가게의 문 앞에 놓여있는 철제 우산통에 우산을 넣고는 가게 문을 열었다. 진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두 분이십니까?”


웨이터가 정중한 표정으로 묻는다. 진의 뒤에 서 있는 니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가쪽으로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웨이터가 한 쪽으로 앞장섰다. 


진은 걸치고 있던 얇은 코트를 벗어 의자에 대충 걸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웨이터가 메뉴판을 두 개 놓아주고 자리를 뜬다. 니노가 메뉴판을 펼쳐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뭐 먹을래??”

“음……. 고민이네.”


진은 테이블에 팔을 괴고서 메뉴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니노는 테이블 위에 올라와있는 진의 메뉴판을 흘끗 바라보며 뭐랑 뭐, 하고 물었다.


“버섯 크림 파스타하고 알리오 올리오.”

“그럼 뭐가 조금이라도 더 먹고 싶은데?”

“버섯 크림일까…….”

“술은? 됐어?”

“달콤한 걸로.”


진의 대답이 끝나고 니노가 망설임 없이 웨이터와 시선을 맞추었다. 웨이터가 지체없이 다가온다. 니노는 메뉴판을 넘기며 주문했다. “버섯 크림 파스타 하나, 알리오 올리오 하나, 와인은 모스카토로 만든 걸로.” 웨이터가 한번 더 주문한 목록을 확인한다. “와인은 병으로 드릴까요?” 니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주문이 끝났다. 


“너 먹고싶은 걸로 먹지.”

“먹고 싶었어.”

“알리오 올리오를?”


대답 없이, 니노는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대뜸 카메라를 꺼내 진의 모습을 찍는다. 진은 미간을 모으고 한숨을 내쉬었다.


“왜 또 찍는거야? 이제 찍을 필요 없잖아.”

“표정이 좋아서. 안 찍으면 아쉽잖아.”

“어두워서 잘 나오지도 않잖아.”

“잘 나왔어.”


두 사람이 사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먼저 와인과 식전 바게뜨가 서빙되었고 잠깐의 시간을 두고 요리가 나왔다. 


“버섯 크림 파스타는 어느 쪽입니까?”

“저쪽이요.”


니노가 진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알리오 올리오는 니노의 앞으로 올라간다. 니노가 파스타를 포크에 한 바퀴 감아서 입에 넣었다. 진은 파스타 면에 포크를 찔러넣었다가 한쪽 팔을 괴고서 니노를 바라보았다.


“응? 진?”


아무리 봐도 진이 무얼 먹을 기색을 보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본다. 진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니노.”

“응.”

“마늘 싫어하는 건 아니야?”

“……아아……. 지금 유도 신문 걸린 건가?”


니노는 한 순간에 며칠 전의 시나몬까지 연결짓고는 작게 쓴웃음지었다. 진은 둘러가는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니노가 와인잔을 손에 쥐었다. 


“그냥 물어보지.”

“그냥 물어보면 보나마나 둘러대거나 아니라거나 할 것 같아서.”


향채를 특별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먹어야 할 상황이 오면 거리끼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먹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는 달리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유가 있다면 그게 무슨 이유일까? 


니노의 30년은 모두 진 자신이 저당잡고 있었다.


“그…….”

“응.”

“……냄새 나니까?”

“……하?”


플레이트에 기울여두었던 포크가 미끄러지며 소리가 난다. 웨이터가 다가왔지만 니노가 아무 일도 아니라며 돌려 보냈다. 진의 얼굴을 마주하는 니노의 표정이 다소 곤혹스러운 것 같았다. 


“음,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별로 안 먹는 버릇이 들어서.”

“왜? 마늘이나 시나몬 먹으면 그렇게 냄새 나? 나한테서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진, 제발.” 


니노가 간절한 목소리로 진을 부른다. 진은 푸른 눈을 두어번 깜박, 깜박 했다. 전에는 무슨 일이건 깊이 캐묻는 법이 없는 진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혈통에 대한 것마저 그랬다. 물어보아야한다고 판단하고서 그를 향해 질문했지만, 거기에 파고드는 기색은 없었다. 진이 바라는 것도, 듣고 만족한 것도 니노 자신이 해준 이야기까지였다. 태도가 변한 건 ACCA 100주년 기념식이 끝나고 나서부터였다. 


‘아닌가, 어쩌면 그 전부터.’


니노는 폐부쪽으로 향하려는 자신의 손과 시선을 꾹 누르고 진을 바라보았다. 


“진.”

“재밌는 이야기를 찾았거든, 니노.”


진은 감흥없는 얼굴로 포크를 한 번 휘저었다 내려놓고는 안주머니에 넣어둔 작은 노트를 꺼냈다. 노트 안 쪽에는 작은 종이가 책갈피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진은 그 부분을 펼쳐 니노 앞에 내려놓았다. 니노의 눈길이 그쪽으로 떨어졌다. 


책을 복사해 특정 부분을 잘라낸 것이었다. 


“왕족의 시종들은 향채를 일절 먹지 않았대. 모시는 주인을 위해서. 백과사전에나 남은 이야기같은데 말야.”

“음…….”

“너도, 그런 거야?” 

“둘러대도 들어주지 않겠다는 표정이네.”


니노는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그 노트를 다시 접어 진에게 돌려주었다. 


“확실히, 그래. 그랬었어.”


왕족의 시종, 그 시종을 모시던 가문으로 향이 짙은 음식을 기피하는 것은 주인을 위한 당연한 일보 중에 하나였다. 향채는 물론이거니와 치즈나 단백질, 고기도 최소한으로만 섭취한다. 곁에 섰을 때 오로지 주인을 즐겁게 할 향기만을 몸에 두르기 위해서였다. 


 식사는 언제나 밍밍했고 먹는 즐거움은 이따금씩 입에 넣는 초콜렛이 전부.


“지금은 그냥 그랬던 버릇이 남아서 좀 덜 먹게 되는 것 뿐이야.”

“싫어해? 좋아해?”


진이 진지한 표정이 되어 묻는다. 이번에는 니노 쪽이 턱을 괴고서 진의 그 얼굴을 감상했다. 100주년 기념식이 끝나고 나서부터 진은 이런 화제에서 물러서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니노가 도와 가문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지, 무엇을 희생했는지 가늠해야 하는 문제 앞에서는.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는 단지 향채에 대해 묻는 것일 뿐이겠지만 니노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해.”

“마늘도? 생강도? 시나몬도? 치즈도?”

“생강은……. 생강은 정말로 그냥 싫어하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생강 과자라니, 사람이 먹을 게 아니라고?”


그렇지 않냐며 동의를 구하는 말에 진이 겨우 작게 웃음을 흘린다. 니노는 마음 깊은 곳에서 겨우 안도의 한숨을 흘려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지만 진이 정색을 하고 표정을 굳히면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 넘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진의 웃는 얼굴은 금방 멎었다.


“좋아하는 거면 잔뜩 먹으란 말야, 바보야.”

“……바보 소리 들을 것까진…….”

“못 먹는데 억지로 먹이는 게 아니라면 됐어. 안 바꿔줄거니까 그거 다 먹어.”

“처음부터 다 먹을 생각이었다니까?”


니노는 지금까지 진이 자신의 파스타 그릇에 포크만 대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이 니노의 말에 또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가 먹고 싶어하는 걸로 골라줄 필요도 없어. 먹고 싶은 거 먹어.”

“……내가 이렇게 고르게 덫을 놓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니노가 미약하게 툴툴거렸지만 진은 넘어가주지 않았다. 모른척하고서는 크림 파스타에 열중할 뿐이었다. 


“그리고 내일도 만나.”

“내일? 내일은 나 바쁘…….”

“거짓말 하지마. 오늘 그런 거 먹었다고 피하려고 하는 거 모를 줄 알아?”

“아니, 나 진짜 바쁜데, 내일은—.”

“그럼 시간을 내. 나를 위해서.”

“아—아. 정말, 내 왕자님이시라니까…….”


네, 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your highness. 


스스로가 니노에게 왕자가 아니길 바라면서도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기꺼이 그의 왕자가 되어버리는 제멋대로, 어쩔 수 없지 않나. 사랑할 수 밖에는. 


니노가 빙긋이 웃는다. 진은 그런 니노를 한 번 흘끗 보곤 다시 식사에 눈을 돌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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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진 | Believe in you

2017. 3. 31. 23:12

++애니메이션 12화까지 시청 후 작성한 글입니다~! 스포일러 있을 수 있어요! 











일과는 규칙적이었다. 눈을 뜨고 일어난다. 바라본다. 지켜본다. 이따금씩 양손을 맞잡고 바라본다. 가는 족적을 따른다. 지켜본다. 기록을 남긴다. 또 지켜본다…….


그것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었다기보다는 신을 대하는 것과 비슷했다는 것을, 니노는 스물다섯살이 되던 해 부친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라’라고 말한 순간 깨달았다. 갑자기 신과 대화를 나누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신의 음성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는 것도 그 때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몇 년이나 흘러 그의 신은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으며, 심지어 술에 잔뜩 취해 곯아떨어진 채였다. 니노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서 엎어진 채 자고 있는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기대어 있는 팔에는 금빛 머리칼이 흩어져있다. 니노는 손가락 끝으로 금발을 가닥가닥 흐트러뜨리다가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찰칵, 하고 사진을 찍는다.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는 사진이었다. 


*


“……머리 울려.”

“술을 그렇게 먹었으니까 그렇지!”


꿀색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소녀가 쨍하니 말하고는 자신보다 색소가 옅은 남자 앞에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내려놓는다. 매섭게 말해보려고 하는 눈치였지만 천성이 말미가 달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얇은 담요를 어깨에 두른 남자는 식탁 이마를 감싸쥐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니노는?”

“조금 전에 나갔어.”

“여전히 바쁘네…….”


일이 모두 끝나고 난 뒤부터는 보고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었나, 진은 양손에 머그를 손에 쥐며 숙취로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응?아, 니노 다시 온대.”

“다시 와?”

“응, 잠깐 뭐 살거 있다고 나갔거든, 사서 온대.”

“뭘 사러 갔지…….”


진은 김이 올라오는 허브티를 입으로 넘기며 중얼거렸지만 정말로 니노가 굳이 주말 아침부터 쇼핑 나간 품목을 궁금해 하는 건 아니었다. 돌아온다면 곧 알게 될 것이고 궁금할 것도 없다. 그러니 중요한 건 니노가 다시 온다는 사실뿐이었다. 


진이 찻잔에 입을 두 번 대기 전에 초인종이 울린다. 진은 고개를 들어 인터폰 쪽을 쳐다보았고 외투에 조그만 크로스백을 두른 롯타가 버튼을 눌렀다. 식탁에선 보이지 않는 현관쪽에서부터 자박자박 걸음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가로 청록색 머리카락이 스쳐지나가는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니노!”

“롯타, 나가?”

“응, 요 앞에 새로운 케이크 가게가 생겼다고 해서. 그럼 니노도 왔으니까 나 갔다 올게! 니노, 우리 오빠 잘 부탁해! 오빠도 오늘은 얌전히 있어야 돼, 담배 너무 많이 피지 말고!”


소녀가 재잘재잘 주의사항을 늘어놓고서는 조르르 나간다. 니노가 그런 소녀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서 달칵, 문이 닫히며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실내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숙취 많이 심해?”

“……너 때문이잖아.”

“네가 마신 거잖아?”

“네가 먹이니까 그렇지…….”


니노는 진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지갑은 식탁 위에 올려놓고서 자연스레 부엌의 싱크로 향했다. 마치 자기 집인양 익숙한 동작이었다. 포트에 물을 끓이며 상부장에서 머그컵을 하나 꺼낸다. 손에 들고 있던 크래프트지로 만든 종이봉투에서 작은 갈색 유리병이 나왔다. 뚜껑을 돌려 열고 병에 든 액체를 머그잔에 붓는다. 곧 물이 금방 끓었다. 니노는 끓는 물을 머그에 붓고는 티스푼으로 내용물을 휘저었다. 고요한 실내에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그 소리가 멎었을 때 니노는 진이 앉아있는 의자 뒤에 서 있었다. 진이 고개를 위로 들어 니노를 바라본다. 니노는 빙긋 웃으며 진의 손에 들린 잔을 빼내고 머그를 내려놓았다. 


“마셔.”

“……이게 뭔데……?”


무엇이냐고 물으면서도 진은 이미 머그를 입에 대고 있었다. 니노는 진의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내 앉으며 대답했다.


“숙취해소제. 조금 달게 나온 게 있다길래. 어젯밤엔 약국 문이 다 닫아서 살 수가 없었거든.”

“……이거 사러 갔었어? 네 건.”

“난 술 많이 안 마셨지요?”


많이 마신 건 너잖아, 니노가 식탁에 팔을 올려 턱을 괴면서 빙긋이 웃는다. 진은 ‘달다니, 어디가?’라며 투덜거리면서도 머그잔을 홀짝 홀짝 넘겼다. 


“오늘은……일 없어? 안 나가도 돼?”

“내 일은 지금 숙취에 시달리고 있어서 말이지. 바구니 안에 얌전히 둬야 해.”

“…….”


니노가 손끝으로 진의 이마를 툭툭 친다. 진은 한숨을 내쉬며 니노가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다음부턴 이런 거 좀 사둬야겠어…….”

“왜?”

“집에 없으니까 매번 네가 사러 갔다오잖아.”

“갔다 오면 되지.”


니노는 진이 마시던 허브티를 대신 넘기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별 문제 될 게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투였다. 진은 잔을 내려놓고 니노를 바라보았다. 니노는 거실 쪽 탁 트인 창 너머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노.”

“음.”


계속 이야기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들어주지 않을 거란 뜻이기도 했다. 진은 니노의 옆모습에서부터 시선을 내려 그의 허리께를 바라보았다. 니노가 자주 걸치는 짙은 색 자라목 스웨터 안에는, 그에겐 보여주지 않을 흉터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 이제.”


타인에게 헌신하는 삶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여러가지 색깔과 형태가 있다. 표현은 더욱 다를 것이다. 니노가 온전히 스스로만을 위하여, 누군가를 오롯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토록 헌신하는 것이었다면 진도 아무 말 하지 않았겠지만. 


“내가 진짜 왕자인 것도 아니고, 니노 너도…….”

“진짜 왕자가 아니라니?”


니노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며 반문한다.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혈통상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지위가 말야. 나는 그냥 진 오터스고 니노 너는…….”


진은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니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은 눈을 깜박거리며 니노를 바라보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전혀 모르던 것을 저절로 알게 되지는 않았다. 진은 머그잔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불투명한 액체 위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가 금방 흔들려 일그러졌다.  


아직도 니노의 진짜 이름을 모른다. 


“그래. 너는 그냥 진 오터스, 나는 그냥 니노지.”


니노는 진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한 사이에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망설임은 금방 흐트러졌다. 니노는 머그를 쥐고 있는 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니노라는 이름은 도와를 떠나며 지은 것이다. 오로지 눈 앞의 이 남자를 위해 만든 이름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이러는 게 아냐.”

“억지로 한다는 뜻이 아니야. 나는 그냥 네가 좀 더 너 스스로를 위해도 좋지 않겠냐는 거잖아. 후라와우에서도, 아니, 열차 사고가 있었을 때에도…….”


니노는 천천히 진의 손 위에서 자신의 손을 뗐다. 진의 표정 없는 푸른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러나는 표정이 옅은 눈동자 안에서 깊은 부채감이 느껴진다. 니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으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비 내리는 그 날 밤부터 줄곧 마음에 두고 있었나. 


하지만 그 날이야말로, 10년도 더 전의 그 날이야말로 자신이 이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겠노라 맹세한 날이었다. 


사고는 예고없이 무정했고 뒤집어진 열차에서 산 자가 나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진은 부모를 잃었다. 자신은 아버지를 잃었다. 가족을 잃은 건 두 사람 모두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신이 있었다.


“진.”

“……니노.”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걸까?”

“…….”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세계가 다 무너지고 부서졌다고 생각했는데 한 줄기 빛이 있었다. 그에겐 신이 있었다. 믿고 의지해서 버티고 살아갈 수 있었다. 신을 바라보고 위하고 또 바라보며 상처를 치유해 나갔다. 신이 다치지 않게 지키고 보듬으려 했던 건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진에게는 그런 신 같은 것이 없었다. 신을 가진 건 니노, 그뿐이었다. 


“사람이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고 기도하는 건 말야,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잖아? 하느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다닌다고 총 맞아 죽지는 않아.”

“아하하, 진. 과격해.”


니노가 낮게 웃는데 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노가 마시던 찻잔을 빼앗아 식탁에 내려놓고서는 그대로 진이 입고 있는 스웨터를 잡아올렸다. 얄팍한 근육이 들어찬 복부 바로 곁을 비껴간 흉터가 있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만큼 험한 흉터였다. 


“아, 진. 이거 좀 부끄럽거든…….”

“자기가 죽는 것도 아랑곳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위한다고 말할 수 있어?”

“그건 좀 얘기가 다르지. 일단 나는…….”

“너는?”

“나는, 음…….”


니노는 진의 팔을 천천히 잡아 내리고, 끌려올라간 스웨터도 정돈한 뒤에 다시 진을 식탁 의자에 앉혔다. 격하게 움직이느라 흘러내린 담요도 다시 어깨에 둘러준다. 니노는 말을 제대로 끝맺지 않은 채 진을 바라보았다.


일단 나는, 네가 없으면 살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런 얘기를 했다간 이 아닌 척 마음이 여린 친구는 또 어쩔 줄 모를 게 분명했다. 차분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날이 새도록 술을 마실 것이다. 다음날 뻔히 이렇게 숙취로 고생을 할 걸 알면서. 


“키가 크잖아? 너보다 많이 크다고?”

“……니노.”

“농담이 아니라. 그 땐 멍청이들이, 누가 휩쓸릴까 싶어 어영부영 하고 있었거든. 제대로 못 맞출 줄 알았어.”


그러니까 너는 걱정할 거 아무 것도 없어. 더는 제대로 된 대화가 되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진이 한숨을 내쉰다. 거기에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쥐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니노는 따뜻한 물을 더 타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말인데 좀 더 자.”

“담배 한 대만 피고. 라이터 어디 갔지…….”

“여기.”


니노가 부엌 끄트머리 선반에 놓여있던 라이터를 집어 가볍게 던졌다. 그 사이에 물이 금방 끓어오른다. 니노가 진의 머그에 물을 채워주는 사이에 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것까지 다 아는 거야, 정말…….”

“보인 걸 기억해뒀던 것 뿐이야.”

“네가 거기 둔 거겠지.”


내 물건을 찾아주는 건 항상 너잖아. 그 말을 끝으로 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향한다. 열린 창으로 잠깐 바깥의 바람이 불어왔다 창이 다시 닫히며 사그러들었다. 


니노는 유리창 너머 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와 진이 어깨에 두른 담요를 마구잡이로 흔들고 있었다. 조금만 더 거센 바람이 불면 그대로 무언가가 부서져버릴 것 같다. 그 안에 든 것이 그렇게 무른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니노는 진이 담배를 입에 물고 거실의 테라스 창 바깥으로 향할 때면 항상 그런 감상에 잠기곤 했다. 


“……어? 왜 벌써 들어와?”

“누구 씨가 일을 하시는 것 같아서.”

“어?”


다시 바람부는 소리가 웅웅 울렸다가 사그러든다. 창이 열렸다 닫힌 것이다. 진은 겨우 반도 태우지 못한 담배를 보란듯이 펼쳐보이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정리했다. 그 손끝에서 쌉쌀한 담배 향이 묻어났다.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어떻게 담배를 피겠어.”

“……그렇게까지 쳐다보지는 않았어.”

“쳐다봤어.”

“아니라니까.”

“잘 거야.”

“……알았어.”

“너도 자자.”

“어?”


니노가 무어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진이 니노의 옷깃을 붙잡고 끌었다. 침실까지는 금방이었다. 그 사이에 니노는 진이 피다 말고 꺼트린 담배를 쓰레기통에 넣어주기까지 했지만 진이 자신의 옷깃을 붙잡고 있는 손을 쳐내지는 못했다. 


“숙취를 떠나서 술은 너도 마셨잖아.”

“……알았어, 나도 가서…….”

“그냥 자고 가.”


진이 막무가내로 떼를 쓰듯 말하고는 침대 앞에 닿자마자 담요 채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이불을 제대로 덮을 생각조차 없는 것처럼 베개에만 머리를 파묻을 뿐이었다. 


“진,”

“빨리—.” 


눈을 감고서는 재촉하기만 한다. 침대 곁에 섰던 니노는 잔뜩 난처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네, 왕자님.”

“왕자 아니라니까…….”


외투를 벗고 침대에 반쯤 걸터 앉는다. 담요만 두르고 있는 진의 어깨에도 이불을 둘러준 니노는 천천히 몸을 뉘었다. 


“……잘 자, 니노.”


니노는 진의 등을 흘끗 바라보았다. 잘 자라는 인사 끝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어깨가 고른 박자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니노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팔을 괴고서는 이부자락을 한 번 더 추슬러 올렸다.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정돈한다. 니노는 이런 손으로 사진을 찍었다면 아마 피사체가 모조리 흔들려 엉망으로 찍혔을 것이라 자조하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 끝에 금빛 머리카락이 스치고 지나갔다.


“잘 자,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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