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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시가 거실에 이불을 깔아주는 동안 보쿠토는 주위를 맴돌며 어쩔 줄을 몰랐다. 아카아시가 정신 사나우니 가만있으라고 매섭게 쏘아붙였고 보쿠토는 몸을 움츠리며 소파에 착석했다. 


“……아. 소파에 누워서 주무실래요? 맨바닥보단 그게 낫겠습니까?”

“아, 아무거나 좋아!”

“그 대답이 제일 싫습니다.”

“바, 바닥……. 바닥으로 부탁드립니다…….”


아카아시는 베개를 툭 던져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보쿠토가 여간 눈치를 보는 얼굴이 아닌 줄을 알면서도 표정을 펴지는 못했다. 


보쿠토는 이불 위에 쭈뼛거리며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아카아시를 흘끗거리고 있었다. 아카아시, 화났어? 그렇게 묻는 것만 같다. 아카아시는 몸을 휙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저 눈만 마주해도 어떤 표정인지 모두 알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10년 전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보고 있자니 그 10년의 세월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10년 전 그가 알던 모습 그대로의 보쿠토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자신과 보쿠토는 그저 조금 많이 친했던 선후배사이일 뿐이었고 그러니까 당연히 서로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가고 나서부터는 연락이 뜸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도록 서로 연락이 닿지 않다가 다시 만난 셈이었다. 필요할 때만 찾아오느냐고 괘씸하다 생각할 수는 있지만 반가워 하기에도 충분하리라. 


그러니까 해야할 일은 ‘10년만에 만나서 처음 하는 말이 재워달라는 얘깁니까?’라며 핀잔을 주고는 웃으며 술이라도 한 잔 하는것일 터였다. 둘은 그렇게나 친했으므로.


‘화를 낼 일이 아닌데…….’


아카아시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하염없이 안을 들여다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10년만의 연락이었다. 둘 중에 누구도 연락하지 않은 채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10년동안 서로 한 마디도 주고 받지 않은 것을 둘 중 한 사람의 탓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문제였다. 잘못으로 따지자면 두 사람 모두의 문제일 것이고 그래도 끝끝내 먼지 한톨까지 저울에 올려 잘못을 가리자면 아카아시의 잘못일 터였다. 


—보쿠토는 배구부였던 모두에게 청접장을 돌렸으므로. 


쨍그랑!


“아, 아카아시? 괜찮아?!”


아카아시는 바닥에 흥건히 쏟아지는 과일 주스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로 된 병은 이미 산산히 깨어진 뒤였다. 그 사이 달려온 보쿠토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아카아시는 손을 휘저어 보쿠토를 내쫓았다. 


“정리해야 하니까 건드리지 말고 주무세요.”

“어디 안 다쳤어? 베인 거 아니야?”

“아니에요.”


아카아시는 고개를 내저었다. 다음부터는 종이팩으로 된 주스를 사마셔야 할 것 같았다. 아이가 들다가 깨뜨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아카아시가 그렇게 생각하며 엎어진 주스를 치울 생각에 한숨을 내쉬는데 작은 기척이 울렸다.


“아버지, 이걸로…….”


마른 걸레를 내밀고 있는 작은 아이였다. 보쿠토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카아시는 웃음을 섞은 한숨을 내쉬고는 걸레는 받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들었다. 


“시끄러워서 깼니?”

“아니요…….”


아이가 작고 여린 목소리로 고개를 젓는다. 아카아시는 깨진 병과 주스와 보쿠토를 내버려두고서 아이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아이가 급하게 나온 것인지 작은 침대의 침구가 흐트러져 있었다. 아카아시는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서는 다시 이불을 덮어주었다. 


“다시 자야지.”

“…….”


아이가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바라본다. 아카아시는 어두운 방에서도 확연한 그 눈동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새카만 테를 두른 금빛 눈동자가 깜빡, 깜빡 불안해하는 듯이 그를 보고 있다.


“아빠 아는 사람인데…….  급한 일이 생겨서 며칠만 있다 간다고 하니까, 조금만 참을 수 있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꾹 감았다. 아카아시는 이불을 덮어준 아이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도닥거렸다. 키우는 내내 한 번도 속을 상하게 한 적이 없는 아이였다. 말을 잘 듣는 아이를 보며 기뻐하고 안도하는 자신의 속내를 아마도 아이는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카아시는 아이가 꾹 감고 있는 눈꺼풀을 내려다보았다. 그 뺨을 살살 쓸어본다. 아이는 조심스레 그 손에 뺨을 기대어왔다. 


“오늘은 아빠랑 같이 잘까?”

“!”


자라는 말에 감았던 눈이 무색하게 반짝 뜨인다. 아카아시는 다시 아이를 안아올렸다. 아이가 조용히 물었다. 정말 그래도 돼요? 아카아시는 그 등을 쓸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되고 말고.



*



아이를 재우고 살짝 빠져나온 아카아시는 바닥에 흩어진 주스와 깨진 유리 조각 정리까지 마무리했다. 그 사이에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귀찮다는 듯이 휘젓는 손길에 거실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등을 보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쓰레기와 걸레를 모두 치우고 티슈를 뽑아 손끝에 감으며 벽에 기대어 섰다. 토라진 듯이 앉아있는 보쿠토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어쩌면 이다지도 달라진 것이 없는지 모를 일이다. 지난 10년, 그가 없었던 10년이 모두 없었던 시간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피로 물들고 있는 티슈를 내려다보았다. 


없었던 시간이기는. 그러면 그동안 그가 혼자서 무엇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들, 아이 하나만 붙들고 있어야 했던 것들까지 전부 아무 의미 없었던 것이 되고 만다. 


아카아시가 티슈에 힘을 주었을 때였다. 


“아, 아카아시!”


펄럭펄럭, 이부자락이 요란하게 펄럭거리고 보쿠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카아시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느라 이불을 밟고 한 번 미끄러질뻔했던 보쿠토가 겨우 몸을 세우고는 아카아시의 손을 붙잡았다.


“피, 피 나잖아!”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잠깐 당황했던 아카아시는 거실의 발코니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삼켰다. 저렇게 비친 것을 알아차렸던 걸까.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아까 유리병 치우다가 찔린 거야? 야, 약, 아니다, 붕대…….”

“애 깨겠어요.”

“……!”


그래도, 하지만, 이런 단어들이 얼굴 위에 떠다닌다. 아카아시는 거리감을 잊고 바싹 다가온 보쿠토를 밀어냈다. 


“주무세요. 저도 이만 들어가서 잘테니.”

“하, 하지만……. 손…….”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쓰지 마시고 주무세요.”


눈앞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건 마음이 쓰이나 보지요.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지막 자제심을 발휘하여 입밖으로 내는 것만은 눌러 참을 수 있었다. 보쿠토는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로 침실 앞까지 주춤거리며 따라오려고 했지만 아카아시는 다치지 않은 손을 들어 보쿠토를 가볍게 밀어냈다.


지난 10년간, 이 정도 상처는 우스울 만큼 마음에서 피를 쏟았다. 몇 번이나 그랬다. TV화면에서 보쿠토와 그의 아내를 볼 때마다, 바람결에 그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꿈 속에서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을 다시 마주할 때마다. 


그 모든 상처의 순간들 중에 보쿠토가 그를 염려하고 걱정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연락조차 닿지 않았고 보쿠토가 그의 상태를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아니, 알아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을 사랑해서라고는 말할 수 없으므로. 하여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그 10년동안의 부재에 대해 화를 냈던 적은 없었다. 그와 자신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다. 절친했었던, 과거의, 고등학교 학창시절의 선후배 사이. 이것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시간은 흘렀고 상처는 낫기도 하고 흉이 지기도 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에게는 다른 빛이 생겼고 이제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자신의 눈 앞에서 살아 숨쉬는 보쿠토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핀잔을 주기도 하고 또…….


또, 화를 내기도 하고…….


모두 다 지난 일이었다. 이제 다 정리되고 끝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만 화가 날까. 아카아시는 조용히 침실 문을 닫으며 그 문에 등을 기대었다.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 10년의 세월 같은 것은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마냥 그렇게 변함 없는 보쿠토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까닭을 모르고 억울한 마음이 치솟아 올랐다. 


그래서 고작 유리에 얕게 찔린 상처만으로도 걱정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보면, 정말로……. 


“아버지……?”

“아. 아직도 안 잤어?”


아카아시는 손 끝의 상처에서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침대로 다가갔다. 아이는 언제 잠에서 깬 것인지 졸음기라고는 없는 목소리였다. 아카아시는 침대에 누워 아이를 끌어당겼다. 아이가 그의 팔을 베고 품으로 파고든다. 아카아시는 가뿐하게 이불을 둘러주었다.


“갑자기 손님이 와서 많이 놀랐구나.”

“아, 아니에요…….”

“이제 아침까지 푹 자자. 내일 학교 가야지.”

“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눈을 꼭 감는다. 자야지, 하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애쓰는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그 등을 쓸었다. 문 밖에서 자꾸만 기척이 느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착각이리라. 


곧 아이의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는다. 아카아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