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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간의 소동이 아주 아무 도움 안 되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공을 주우러 가는 선배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 지난 몇 주간 보쿠토가 있는 유난 없는 유난을 떨며 공 주우러 다닌 덕분이었다.


‘하지만 차라리 공을 주우러 나다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묘하게, 보쿠토가 네 말을 잘 듣네…….


지나가는 2학년 선배가 한 말에 아카아시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이 차이 같은 걸 생각하면 ‘너하곤 얘기를 잘 하네’ 정도로 표현될 수도 있었을 텐데 콕 집어서 ‘말을 잘 듣네’라고 한 것에서 등골을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 같은 게 느껴졌다.


그렇다, 보쿠토는 정말로 자기 선에서는 좋은 학생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이것이 도리어 아카아시를 더욱 괴롭게 했다. 자신이라고 한들 좋은 애인이 뭔지 제대로 알겠는가? 적당히 아무렇게나 지어낸 말을 해주면 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진지하니 이쪽도 제대로 해주어야 할 것 같고, 하지만 자신도 아는 건 없는데…….


“일단…사람을 사귀지 마세요.”

“아?”


이 말도 안 되는 수업 아닌 수업을 시작한 이후로 부 활동이 끝나고 나면 항상 함께 귀가하게 되었다. 다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대?’라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아카아시는 그냥 벽에 콱 머리를 박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보쿠토는 해맑게 웃으며 ‘그치!’라고 대꾸했다. 그치는 뭐가 그치야, 아카아시는 옆에서 속으로 중얼거리기만 했을 뿐이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앉아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브라우니와 에이드 두 개를 주문했다. 보쿠토가 브라우니를 크게 한 술 떠올리는 사이에 툭 하고 던지듯 말한 아카아시는 에이드의 얼음을 휘저으며 창밖을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사람을 사귀지 말라고. 애인을 만들지 마시라고요.”

“왜?”


물음표를 없애버리고 싶다…. 아카아시의 생각을 눈치챈 것인지 브라우니에 코를 박다시피 하고 있던 보쿠토가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았다. 아카아시는 타는 속을 달래기 위해 음료를 쭉 들이키고 말했다.


“애인 사이라는 그런 게 원래 좋아하는 사람하고 사귀는 거잖아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인데 상대가 하잔다고 ‘어 그래’ 하는 게 더 실례예요.”

“그런가…. 하지만 거절하면 상처받잖아.”

“그렇다고 선배가 사귀면서 좋아하려고 노력하시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뭐? 아니야! 노력해!”

“무슨 노력이요.”

“그…….”


아카아시가 들어나 보겠단 태도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거리가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뭐냐, 연습 마치고 하교도 같이 하고…….”

“그거 그쪽에서 기다려 준 거잖아요? 배구부 부활 늦게 끝나는데. 그건 그쪽에서 노력한 건데요.”

“어, 그리고 뭐지…. 점심도 다 같이 먹고…….”

“아, 선배 친구들 있는 자리에 아는 사람 없는 그쪽만 불러다 불편하게 점심 먹게 했다고요?”

“……그, 영화도…! 보고…!”

“그건 당연한 거고요……. 그거 말고 선배의 노력 말입니다. 선배의. 노. 력.”

“…….”


보쿠토가 우는 얼굴이 되어 테이블 위로 엎어진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반쯤 먹다 만 브라우니를 옆으로 밀어둔 채 에이드를 쭉 빨아올렸다. 열감이 가시는 상쾌한 기분이었다.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는 보쿠토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렇게 나쁜 놈이야?”

“그렇죠, 아무래도.”

“아니 너는 한 마디도 좋은 말을 안 해주냐…….”

“좋은 말 안 해주는 사람이니까 관두라고 천 번은 말했지 싶은데…….”

“야! 너, 너가! 그랬잖아! 어어, 남의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하며는 뭐라더라…….”


몸을 벌떡 일으킨 보쿠토가 삿대질을 하다가 또 시무룩해져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카아시는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이 동시에 수십번 일어나는 것처럼 다채로운 표정은 확실히 눈을 떼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그를 좋아했던 그 많은 사람들은 정말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를 좋아한 것도, 미워하지 못한 것도, 헤어진 것도.


“상대방을 좋아하게 되면 그런 노력이 하고 싶어지지 않겠어요? 선배의 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 사람들이 뭐 자원봉사활동 한답시고 선배랑 사귀자고 했던 것도 아닐 거 아녜요.”

“자원 봉사…….”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닐 거라고요. 좋아하니까요, 애쓴 거겠죠. 선배도 그러니까 자기 나쁜 사람 되기 싫다고 남 상처주는 짓은 관두세요.”

“뭐? 그런 거…….”


그런 거 아니야, 라고 단언하듯 외치려 했던 보쿠토의 목소리가 쑥 죽었다. 아카아시는 에이드의 남은 부분을 쭉 들이켰다. 얼음이 녹고 탄산이 빠져서 밍밍한 맛이 났다.


“고백하는데 싫다고 말해서 나쁜 사람 되기 싫었던 거 아닙니까?”


사귀다 보면 어차피 그쪽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할테니까…….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는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보쿠토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계산을 마치고, 아카아시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길에도 계속되었다. 마침내 그가 말문을 튼 것은 아카아시가 현관 열쇠를 찾을 때였다.


“근데 그런 건 진짜 아니었어…….”

“…….”

“내가 그 사람을 잘 모르는데 그 사람이 날 좋아한다고 해도, 잘 모를 테니까……. 그냥 같이 있으면서 알아가다 보면 좋은 친구가 되고 그러다가 진짜로 서로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오는 길 내내 말이 없었던 것은 아카아시의 말을 계속 생각하느라 그런 듯했다. 아카아시는 잠깐 침묵한 채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양손을 꽉 쥐고서, 하지만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눈썹도 어깨도 축 처진 형상이었다.


“하지만 선배……. “

“…….”

“‘그냥 같이 있으면서’라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친구도 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쾌활하고 밝은 성격에 부에서는 2학년인데도 벌써부터 에이스이고 하늘이 뒤집히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이목구비는 뚜렷하고 체격도 좋다. 조건으로만 보자면 빠지는 것 하나 없는 그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모두가 좋아했을 것이다. 자신마저도 그런 장면을 보지 않았더라면—2분 만에 애인이 바뀌는 장면—그를 결코 싫어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런 그의 인간관계는 그가 몸소 지닌 것, 그리고 그가 이따금 보이는 활달한 다정함으로 충분했겠지만.


“…안녕히 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보쿠토는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꾸벅 인사를 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카아시 네의 현관 문이 닫힐 때까지, 보쿠토는 대문 앞에서 알 수 없는 얼굴로 계속 서 있기만 했다.


*


‘망할, 되는 일이 없어!’


아카아시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씹었다. 푹 꺼진 눈의 소년이 그를 보고 있다. 지난 밤 어설프게 밤잠을 설친 흔적이었다.


‘천년 만년 빽빽거릴 것 같은 사람이 왜 갑자기 조용해지고 난리야…….’


보쿠토가 그렇게 생각을 곱씹는 얼굴로 축 처져서 돌아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아카아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난날의 자신을 조금 반성했다. 처음에는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날을 세워 말했다면, 그 다음에는 절대 꺾이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거칠게 말한 것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 사람에게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야 그럴 것이 ‘아, 좀 심했나’싶은 말을 해도 보쿠토는 그저 떼를 쓰듯 소리를 높이거나 토라졌다는 듯이 뺨을 부풀렸다가도 몇 초 가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건성 건성 말하고 마는 건데.’


이렇게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사람 귀찮게 하기로는 도가 튼 인물이지 않았던가? 이 정도도 예상하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았던 게 틀림없다. 아카아시가 그렇게 한숨을 푹 내쉬고 등교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케이지? 밖에서 누가 기다리는데.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니냐?”


등교 시간보다 늦게 출근 준비를 하던 부친이 말을 건넨다. 책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아카아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밖에서 누가 기다린다니,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지나가는 애가 같은 학교 교복이라서 부친이 무언가 착각했을지도, 거기까지 생각했던 아카아시는 부친의 말에도 서두르지 않다가 현관 문을 열었을 때 그만 제꺽 굳고 말았다. 담장 너머에서도 보이는 삐죽한 잿빛 머리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다. 급하게 학교 갔다 오겠단 인사를 하고서 쾅 소리나게 현관문을 닫은 아카아시는 정원을 뛰듯이 가로질러 대문을 벌컥 열었다. 담장에 기대어 서 있던 보쿠토가 활짝 웃으며 아카아시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 가자~!”

“네? 어, 어딜요?”

“응? 학교……. 다른 데 가고 싶어?”

“…선배는 왜 여기 있는데요?”

“어……지나가다가?”

“거짓말을 할 때는 상대를 속이려는 노력이라도 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치만 아침에 데리러 왔다고 하면 좀 너 질색할 것 같은데.”

“정말 굉장히 부담스럽거든요. 진짜로요.”

“거봐아아!”

“그러니까 왜 데리러 오신 거냐고요.”

“아니, 그 뭐냐. 나 스스로 생각해 본 건데? 좋은 남자친구? 데려다주는 게 있으니까 그럼 데리러 오는 게 있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쾌활하게 웃는 얼굴 어디에도 어제의 침울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이 사람?’


어디 한 번 밤 새 잠 설쳐 보라고? 하지만 어제와 달리 활짝 웃는 얼굴 그 어디에도 그런 계책을 꾸며낼 재간은 보이지 않았으므로 아카아시도 사실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생각하신 건 대단하신데 저한테 실천하진 마시고요…. 생각만 하시다가 다음번에 애인이 생기면 그때 하세요, 그때…….”

“…아카아시 너 어디서 막 말싸움 하면 절대 안 지지?”

“아 또 왜요.”

“난 밤에 자다가도 ‘아 그때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라면서 후회하는데 넌 안 그런 애 같아서…….”


기세 좋게 떠들던 보쿠토가 금방 입을 다물었다. 도끼눈을 뜨고 보쿠토를 바라보던 아카아시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보쿠토가 또 금방 활짝 웃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아카아시의, 처음으로 시끄러운 등굣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