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 발신자 불명
하이큐/보쿠아카
2017. 9. 15. 07:23
버터스님의 그림을 보고 써보았습니다~!
길을 걸어가던 보쿠토가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싸리눈이 휘날리는 풍경 사이로 요즘은 찾기도 어려울 공중전화 부스가 주홍빛 가로등 아래에서 고요히 서 있었다. 고전적인 붉은 색 철제 골격이 회색 눈발 사이에서도 선명히 눈에 박혔다. 보쿠토가 갑자기 멈춰선 바람에 그의 뒤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그의 등에 부딪혔다. 보쿠토는 건성으로 사과하면서도 그 공중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참이나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 있다가 손이 다 얼어붙고 나서야 보쿠토는 공중전화 부스로 향했다.
쓰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문을 열자 매캐한 먼지냄새가 났다. 바람이 몰아치는 바깥보다야 나았지만 차갑기로는 매한가지다. 수화기를 들었던 보쿠토는 멍하니 공중전화의 숫자 버튼만 바라보다가 다급히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찾았다. 가진 동전을 전부 한데 모아 공중전화 옆에 쌓아둔 보쿠토는 그 중에 몇 개를 공중전화에 집어넣고 또 한참 바라만 보았다.
연락할 전화번호를 잊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잊었다고 해도 찾아낼 수단 역시 많다. 그와 자신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것든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은 채 놓여있었다. 보쿠토는 천천히 전화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울리고 보쿠토는 전화부스의 유리벽에 몸을 기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연결음은 얼마 울리지 않고 끊어지며 사람의 목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여보세요.
대답은 할 수 없다. 할 수 있었다면 이젠 찾기도 어려운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보쿠토는 다만 눈을 내리감았다. 상대는 전화를 건 사람이 말이 없는데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잠깐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언뜻 들렸을 뿐이다. 그 때 상대가 말했다.
—……보쿠토 선배.
나직한 목소리는 질문도 의문도 추측도 아니었다. 단정한 확신, 그 속에서 보쿠토는 확신과는 조금 다른 기대도 읽어냈지만 그것이 자신의 기대인지 아니면 수화기 너머 그의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서둘러 전화를 끊는 것만이 보쿠토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2년 전이었다면 어떻게 알았느냐고 이 마음을 부풀려 한껏 놀란 목소리를 내어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떨리는 손에 힘을 줄 도리밖에 없다. 보쿠토는 흔들리는 눈으로 공중전화를 바라보다 입술을 깨문 채 세게 눈을 감고 말았다.
어디에서 전화해도, 어떤 번호로 어떤 기기로 연락해도 아카아시는 언제나 그가 전화한 것을 알아채곤 했다. 줄곧 그랬다. 그것이 헤어지고 이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표정 어떤 얼굴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 사람은 그의 곁에 없었다.
*
보쿠토가 헤어지자는 말을 했을 때, 그가 아카아시보다 자신의 배구를 더 우선시했느냐고 한다면 보쿠토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정말로 아카아시가 소중했고 그래서 헤어지자고, 그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카아시의 소중한 모든 것들은 모두 그의 팔 안 울타리에 있었고 보쿠토가 추구하는 건 그 너머, 더 먼 곳에 있었다. 아카아시와 함께 있고 싶기 때문에 아카아시에게 함께 가자고 말하는 건 너무 가혹하고 잔인한 짓이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아카아시였으니 어쩌면 기꺼이 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얄팍한 기대감을 가진 스스로를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애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걸 내버려두고 여기로 오라고, 그 애의 인생을 전부 망가뜨릴지도 모르는 선택을 오로지 자신을 위해 하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자신이 해외로 나가려고 했던 마음을 꺾고 아카아시 곁에 남는다면, 그것 또한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하고 싶었던 일을 그만둔 채 텅 빈 껍데기만 남은 자신을 아카아시 곁에 두고 싶지도, 둘 수도 없었다.
그 때는 헤어지는 것이 서로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아카아시를 위해 최선이었다. 보쿠토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가장 눈부신 시절의 2년을 오로지 자신 곁에 묶인 채 소모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생각했던 것이다, 2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고. 2년이나 지나면, 우리는 괜찮아질 거라고. 찬란했던 추억은 추억이어서 찬란할 뿐이므로 새 사람을 만나면, 그 새 사람의 빛에 눈이 부셔 과거는 빛바랠 것이라고. 그래서 나아질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우리는 떨어져서 살 수 있을 거라고. 함께 했던 것은 단지 과거의 얄팍한 인연이었던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로를 모른척하며 없는 척하며 함께한 적 없었던 척하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이 별 위에 남은 것은 나 혼자뿐인 척하며 살 수 있을 거라고, 보쿠토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
귀국하고 나서 열린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가할 마음을 먹은 건, 코노하의 말을 빌리자면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놀란 일이었다. 다만 그렇게 놀란 건 코노하뿐이고 다른 동기나 선후배들은 화려한 성공을 거둔 그를 반가워하기만 했다.
“너 진짜 왜 왔어?”
“왜 왔냐니……. 나한테도 메일이 왔으니까 왔지. 너 말을 왜 서운하게 하냐?”
일부러 토라진 듯이 입술을 삐죽여보는데 고등학생이었던 때처럼 선뜻 통하지는 않았다. 코노하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동창회 모임이 열리고 있는 식당의 구석자리로 끌고 들어갔다.
“한 번도 온 적 없었잖아.”
“지금까진 일정이 안 맞았고 지난 2년 동안엔 해외에 나가 있었으니까 그렇지! 나도 오고 싶었어!”
보쿠토도 덩달아 소리를 죽인 채 작게 외쳤다. 그 때 때를 맞춘 것처럼 멀찍이서 누군가가 후배를 찾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아카아신 아직 안 왔어?”
“오늘 무슨 미팅 있다고 끝나는 대로 온다더라.”
보쿠토도 코노하도 말을 잃은 채 묵묵히 앞의 테이블만 바라본다. 코노하는 마른얼굴을 쓸어내리곤 휴대전화를 꺼내들었지만, 마음처럼 그 후배에게 곧장 연락을 하지는 못했다. 말없이 휴대전화 액정만 껐다 켰다 할 뿐이다.
“……오늘 아카아시도 와?”
코노하가 가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보쿠토는 굴하지 않고 꿋꿋한 얼굴로 코노하를 바라보았다. 결국 코노하가 졌다는 듯이 탄식을 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좀 늦게 온다고 하더라.”
“그렇구나…….”
“이제 와서 뭐 어쩌게.”
“뭘 어쩌긴 어째, 2년이나 지났고…….”
보쿠토는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뭘 어쩌자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말대로 함께 했다가 헤어지기로 한지 2년이나 지났다. 단지 2년이나 지났으니까, 이제 이 별에는 혼자 남은 것이 아니라 다시 둘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여긴 것뿐이다.
“꼭 평생 얼굴 안 보고 살 것처럼 굴 필요는 없잖아.”
“……맞는 말도 네가 하니 왜 때려주고 싶을까.”
“아 진짜, 코노하! 코노하는 나만 싫어하지?”
보쿠토의 언성이 기어코 높아져서 옆에서들 웃음을 터뜨렸다. 고등학교 때 모습 그대로 다시 보아 반갑다는 것이다. 코노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기만 했다.
하지만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본 것은 그로부터도 몇 시간이나 지나서 그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겨울의 찬 공기를 이겨내기엔 조금 얇다 싶은 코트를 걸치고, 몇 년이나 얼굴을 보지 못한 동창들을 위해 한 턱 내주기도 한 보쿠토는 지갑을 챙기고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먼저 가게를 나섰다. 문을 열자 찬바람이 곧장 뺨을 할퀴고 지나간다. 살짝 몸을 움츠렸다가 펴고 한 걸음 내딛는 그 때 누군가가 그를 스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보쿠토가 몸을 돌렸을 때엔 이미 가게 문이 닫힌 뒤였다. 이름을 말하려고 하는 목소리도 혀끝부터 얼어붙어 음절 하나 나오지 않았다. 술을 한 잔씩 걸친 다른 손님들이 몇 명이나 그를 지나쳐 갈 때까지, 보쿠토는 그렇게 한참이나 우두커니 가게 문 앞에 서있기만 했다.
아카아시였다. 눈 한번 마주치지 못했어도, 스쳐지나간 옷깃 한 자락뿐이었어도, 닫힌 문틈 새로 보이지도 않았을 머리카락 끄트머리뿐이었어도 보쿠토는 알았다.
아카아시였다.
아카아시는 아닐 거라고, 얼굴도 못 봤지 않느냐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뺨에 닿는 이 차갑고 흰 결정체가 다른 무엇도 될 수 없이 눈인 것처럼 방금 그를 지나쳐간 사람도 아카아시였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아카아시.
*
아카아시는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의 으슥한 곳에 기대어 있는 사람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술은 많이 마시지 않았기에 그의 눈가에 눌어붙어 있는 것은 주말에도 일을 했던 탓에 남아 있는 작은 피곤이 전부였다.
“…….”
“……아카아시, 오랜만이네.”
남자가 가로등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킨다.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은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2년 동안 한 번도 듣지 않았는데 익숙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목소리였다. 이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는 금빛 눈동자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
“그럭저럭요.”
남자의 어깨 위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지나다가다 아카아시 보이길래.”
이젠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인줄 모를 만큼 능숙하다. 아카아시는 그런 생각을 단조롭게 하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서 있는 자리에만 눈도 습기도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오늘 동창회 갔었어?”
“네. 보쿠토 선배는 못 봤는데요…….”
“내가 좀 일찍 나왔나봐.”
아하하, 보쿠토가 그렇게 웃는다. 낮은 웃음소리는 눈송이들이 집어삼켜 아카아시에게 들려온 건 웃음소리의 껍데기뿐이었다. 아카아시는 눈만 깜박이다가 저주에서 처음으로 깨어나는 것처럼 겨우 고개를 기울였다. 그제야 자신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카아시 집 가는 길이야?”
“네.”
“나도 이쪽인데 같이 가자!”
웃는 얼굴만은 매한가지로 쾌활하다. 아카아시는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늦은 시간이라 거리에는 차도 인적도 휑했다. 세상에 단 둘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요.”
2년 만에 만나는 것인데도 그간의 세월은 없는 것 같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이대로 고기를 먹으러 가자거나 아니면 주먹밥이 맛있는 데를 알았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보쿠토는 의외로 조용했다. 그 침묵을 견디기 어려운 건 아카아시 쪽이 되었다.
“선배가 동창회 오신 건 처음 보네요.”
“그러게, 그렇네. 아카아신 계속 나왔어?”
“네, 코노하 선배가 끌고 가셔서…….”
“코노하 자식! 나보고는 왜 왔냐고 뭐라 하더니. 애들이 다 아카아시만 예뻐해~!”
“그런가요.”
아카아시가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른데요, 이런 말을 해도 보쿠토는 논리가 없는 주제에서는 고집을 부리는 솜씨가 대단히 탁월한지라 이길 수가 없을 것이다. 아카아시는 덤덤하게 생각하며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보쿠토가 다음 문장을 말했을 때, 아카아시는 차라리 방금 전 동창회에서 술을 왕창 더 퍼마시고 올 것을 그랬다고 후회했다. 그래서 뻗어 다른 사람 손에 이끌려 오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
“아카아시, 나 두어 달은 더 일본에 있을 거 같거든. 종종 연락……할게!”
이 사람은 어쩜 이렇게, 참 아무렇지가 않을까.
술은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운 것만 같았다. 아카아시는 뻣뻣하게 굳어서 앞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보쿠토의 등을 바라보았다. 보쿠토가 몇 걸음 가다 말고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 웃는 얼굴이었다.
도저히,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 아카아시는 편할 대로 하라며 간단히 말했고 두 사람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바로 앞 사거리에서 헤어졌다. 아카아시가 빌라의 입구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을 땐 근처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멀리서 언뜻 누군가가 서 있는 듯이 보이기는 했지만 단지 그뿐, 아카아시는 미련 없이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
보쿠토의 논리는 간단했다. 우린 친했으니까, 친구로 지내자. 아카아시가 ‘선후배 사이인 거겠죠.’라고 정정했지만 보쿠토는 친구나 다름없다고 고집을 부렸고 아카아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라기보다는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보쿠토는 정말로 마음대로 했다.
“그러게 그걸 왜 보자고 해선……. 속은 괜찮아요?”
아카아시는 혀를 차며 보쿠토의 등을 쓸어주었다. 보쿠토는 안색이 헬쓱했다. 영화관 근처의 카페에서 탁상에 엎어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방금 전 본 영화에서 잔인한 장면이 연이어 나온 게 문제였다. 고작 15세 관람불가 정도니 괜찮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가 정신적으로 곤죽이 되어 나왔다.
“으으……. 무서워, 징그러, 무서워어어…….”
“그러니까 다음부턴 그런 거 보지 마요.”
“괜찮을 줄 알았지…….”
아카아시는 작게 혀를 차곤 주문한 음료를 받아왔다. 예전엔 그래도 영화를 잘못 골라 와도, 자신이 말을 하면 고쳐 듣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없다. 이 영화는 아닌 것 같다고 두세 번쯤 말했지만 요지부동이더니 저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쟁반에 담긴 음료를 내려다보았다. 하나는 얼음이 들어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는 김이 따뜻하게 올라오는 아메리카노다. 차가운 게 보쿠토의 것이었다.
‘커피도 잘 안 먹더니.’
단 걸 좋아해서 이런 건 입에도 안 대던 사람이었는데 2년이 길긴 긴 시간인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 앞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다시 그의 상태를 살폈다. 잠깐 사이에 별달리 나아질 것도 없건만.
“오늘은 이것만 마시고 집에 들어가서 쉬어요.”
“괘, 괜찮은…….”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보쿠토가 한사코 도리질했지만 아카아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커피를 양손에 쥐었다. 창밖으로는 몸을 두껍게 감싼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오간다. 유리창에는 물방울이 맺혀 또르르 흘러내렸다. 유리 근처에만 있어도 겨울의 냉기가 손을 시리게 만들었다.
이 사람이 왜 이럴까,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헤어졌고 그 이별로부터 2년간 얼굴 한 번을 보지 못했었다. 돌연 돌아와서는 다시 친구처럼 지내자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나 하나 따져 보자면 아주 이상한 이야기도 아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 전부라고 할 만큼을 서로에게 쏟아 부었고 그대로 깊어졌다가 헤어졌다. 가진 연을 모조리 끊기에는 둘 사이에 이어진 것이 너무 많았고, 이젠 사랑은 아니게 되었지만 우정까지 끊을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말은 그에게도 나름 그럴듯하게 들렸다. 거기에는 이젠 자신이 괜찮다는 자만 역시 덧붙여져 있었다.
“다시 출국하는 건 언제예요?”
“으, 으응? 3월인가…….”
인상은 잔뜩 찌푸린 채 커피를 들이키던 보쿠토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카아시는 냅킨을 내어주며 그런 보쿠토를 빤히 쳐다보았다. 좋은, 친구 사이. 2개월 시한부짜리. 그렇게 생각하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보쿠토는 얼음만 남은 컵을 내버려두고서 자신의 양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겨울날에 찬 음료를 마시고 추워하는 게 분명하다 싶어서 아카아시는 그의 손에 자신이 마시던 따뜻한 커피를 들려주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휴대전화에는 코노하로부터 메세지가 잔뜩 와 있었다. 아카아시는 단정한 동작으로 답장을 보냈다.
—그냥 친구처럼 지내자고 하셔서
—그러자고 했어요.
보쿠토와 자신의 연애는 모두에게 비밀이었다. 알고 있었던 건 코노하 아키노리 한 사람 뿐이었는데 코노하는 두 사람이 마침내 연애를 시작했다는 이야길 듣고서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내리눌러둔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카아시는 매번 걱정하지 말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거듭했었다. 마침내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났을 때 코노하는 그것 보라며 한 마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누구야?”
“코노하 선배요.”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질문에 답해주며 연이어 온 메세지를 상대했다. 반절은 보쿠토를 향한 욕이었고 반절은 아카아시 그를 향한 욕이었다. 아카아시는 고래고래 열을 내는 코노하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짓고 말았다.
—2년이나 지났잖아요.
—저도 괜찮아요.
어려서부터 실상 제대로 된 또래 대접을 받은 적은 드물었는데 고등학교 선배들만은 그를 어린애 보는 양 한다. 의지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중요한 순간에서는 갓난아이가 물가로 다가가는 걸 보는 듯이 어쩔 줄을 모르며 보듬어주려고 했다.
“다 드셨으면 들어가요.”
“어? 내, 내가 마셔도 돼? 아카아시 거 아냐?”
“추워하시길래 드시라고 드린 거지만요. 안 드실 거면 저 주시고.”
“아, 아냐. 내가 마실래!”
무슨 생각을 했는지 보쿠토가 활짝 웃으며 양손으로 종이컵을 붙잡는다. 아카아시는 그게 눈이 부셔서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런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저 웃음을 보기만 하는 것으로 모든 게 다 이루어진 것같은 착각으로 살아가던 날들도 있었다.
“아카아시, 내일 뭐해?”
“출근요.”
“그……. 추, 출근 끝나곤 뭐해?”
“글쎄요. 쉬어야죠.”
“나랑 쉴래!?”
“…….”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건 쉬는 게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었는데 왠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말 대신에 마음대로 하라는 대답만 흘러나왔다. 보쿠토가 양손에 종이컵을 쥐고서는 활짝 웃는 얼굴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
“공중전화…….”
아카아시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던 길, 보쿠토는 우두커니 서서 길가에 덩그러니 서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바라보았다. 안이 비치는 유리벽은 낡아서 조금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공중전화 부스로 홀린 듯이 다가간 보쿠토는 주머니를 다 털어 동전을 찾아냈다. 동전을 집어넣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전화번호를 누른다. 그 모든 건 이미 약속이 되어있는 동작처럼 매끄러웠다. 보쿠토가 정신을 차린 건 신호연결음이 들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 어, 어떡하지?’
별다른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달리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걸어버린 것이었는데 연결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보쿠토 선배.
입술을 달싹여본다. 이건 공중전화인데 어떻게 나인줄 알았느냐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숨소리밖에 새어나오지 않았다. 상대방은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보쿠토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 공중전화 위에 수화기를 올려놓았지만 아직 놓지 못한 손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이러다가 부수겠네, 보쿠토는 쥐어짜낸 농담조로 중얼거리며 손을 놓았다.
이젠 이럴 필요가 없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해서 말 한마디 듣고는 아닌 척 끊고, 이럴 필요가 없었다. 아카아시와 자신은 이제 다시 친구 사이가 되기로 했고 만나기도 한다. 귀국하고 난 뒤로 얼마나 자주 보았는지 모른다. 전화야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전화를 할 수가 없다. 아카아시가 알고 있을 번호로는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매번 이렇게 모르는 번호로 걸어서 그가 자신을 알아채는 그 순간을 듣는 것이 보쿠토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왜 그러는 것인지도, 보쿠토는 알고 있었다.
단순한 선후배사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자신이 그 어떤 번호로, 전혀 알수 없는 곳에서 전화를 해도 아카아시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다. 자신을 알아챈다. 그것이 마냥 운명 같았다. 아카아시와 자신은 이어지기로 약속되어 있다는 증명 같았다.
헤어진 지금에 와서도 그 증명은 유효하여, 그 어떤 번호여도 아카아시는 자신을 알아채고야 만다. 두 사람은 여전히 운명이었다.
*
실내는 고요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철 지난 배구 경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소리를 많이 죽여 오히려 그 소음이 더욱 실내를 고요하게 만들어주었다. 텔레비전 반대편에는 두 사람이 소파에 편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문득 보쿠토의 고개가 툭 기울어 아카아시의 어깨에 닿았다.
“휘유, 방금 스파이크 굉장하네.”
“보쿠토 선배는 못하는 거네요.”
“나도 이제 할 수 있거든!?”
“그렇습니까.”
아카아시에게 몇 마디 핀잔을 들은 보쿠토는 재미없다며 돌연 텔레비전 화면을 껐다. 미간을 찌푸리게 되는 건 아카아시였다. 볼 게 아무것도 없다며 이걸 보자고 해서 봤는데 이제 와서 끄냐며 타박하자 보쿠토가 발끈한 얼굴로 발을 구르다가 아카아시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잠시 둘 중 아무도 이상한 걸 알아채지 못했다.
먼저 눈치 챈 건 보쿠토가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도록 해두고선 벌떡 일어나버린 아카아시였다.
“밥이나 먹으러 가죠.”
“아야야야……. 밥 먹으러? 집에서 해먹으면 안 돼?”
“보쿠토 선배가 하실 거면요.”
전 안합니다, 아카아시가 매섭게 하는 말에 보쿠토는 정자세로 앉으며 외출하자고 말을 돌렸다. 아카아시는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곧장 코트를 챙겨들고 신발을 챙겨 신었다. 보쿠토가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아카아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2년 전 두 사람이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서는 지배인이 여전히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익숙하게 요리를 주문하고, 자연스레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았던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에 자신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으로부터 반뼘 떨어진 곳에 아카아시의 손이 있었다. 이럴 때면 항상 맞잡았던 손이다. 지금도 잠깐 신경을 놓으면 곧장 손이 제멋대로 뻗어나가 아카아시의 손을 감쌀 것 같았다.
보쿠토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거둬들였다. 아카아시는 특별한 의문을 가지지 않고서 휴대전화를 손에 쥐었다. 집을 나설 때부터 알림이 울리는가 싶었는데 아카아시가 그에 답장을 하고 있었다. 보쿠토는 살짝 샐쭉한 얼굴로 물잔을 입에 댔다.
“……누군데?”
“코노하 선배요.”
“……되게 친하네. 둘이 원래 그렇게 친했어?”
자신의 말이 이상하다는 건 스스로도 알았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다. 타닥타닥하며 메세지를 입력하던 아카아시가 스르르 고개를 들었다. 저의를 묻는 눈동자였다. 보쿠토는 입을 한 번 삐죽이곤 고개를 돌렸다.
“너 사람 앞에 놔두고 폰만 쳐다보냐.”
“잠깐 메세지 답장한 거잖아요.”
“그게 그렇게 급해? 중요한 거야?”
“중요하죠. 코노하 선배가 절 걱정하시는 건데요.”
“나랑 있는데 왜 너를 걱정해?”
“……선배랑 있으니까요.”
잠깐 한 호흡을 쉬었던 걸 빼면 놀랄 만큼 평이한 문장이었다. 그래서 보쿠토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카아시는 무심하게 메세지를 몇 개 더 적어놓고는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그러니까 코노하 선배가 걱정하시는 거잖아요. 답장도 못하면 더 걱정하실 것 같아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보쿠토 선배.”
사과는 정갈했고 군더더기 없었으며 그래서 더욱 진심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보쿠토는 입술만 달싹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일어나지 않기 위해 테이블 가장자리를 붙잡았던 손가락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이제 좋은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코노하 선배는 잔걱정이 많으시니까 그런 말을 해도 계속 이러시네요.”
아카아시의 말은 그의 귓가를 스쳐지나가기만 했다. 때를 맞춘 것처럼 요리가 나오지 않았다면 아카아시의 문장을 끝으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리를 모두 먹어치우고 레스토랑을 나설 때, 보쿠토와 아카아시는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학창시절에도 언제나 함께 붙어있는 만큼 다툼도 잦았고 같은 횟수만큼 화해도 했던 그들이었다. 그런 면은 변하지 않았다, 보쿠토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두어걸음 앞서 걸어가는 아카아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카아시가 그를 뒤돌아보았다.
“보쿠토 선배?”
“아, 아냐, 아무것도…….”
후식을 먹으러 가자는 말에 아카아시는 어린애의 투정을 들어주는 것처럼 눈동자를 한 번 굴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쿠토는 자신이 오늘 밤에도 어딘가에 있을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 헤매게 될 거란 걸 알아차렸다.
*
송별회는 성대하게 벌어졌다. 보쿠토는 가게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는 이야기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가게 안을 종횡무진 했고 동기들은 고교시절과 달라진 면이 없는 친구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아카아시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보쿠토도 잠깐 움찔했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는 못했다.
술잔과 안주가 상 위로 올라오고 사람과 사람 사이로 술병이 오갔다. 내일을 챙겨야 하는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뜨고, 내일이 있으면서도 당장에 몰두한 사람들만 남아 흥을 피웠다. 주인공인지라 먼저 빠지지도 못하고 자리를 지키게 된 보쿠토는 술자리 게임에서 세 번 내리 지고 연이어 술잔을 들이켜야 했다. 기진맥진하여 겨우 구석으로 도망친 보쿠토는 팔을 뻗어 생수를 찾았다. 누군가가 자연스레 그의 잔에 생수를 채워준다.
“흐아, 아카아시 고마……코노하.”
당연히 아카아시라고 생각해서 무심결에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거기엔 아카아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었다.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히끅, 딸꾹질을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 가면 언제 다시 와?”
코노하의 목소리는 뚜렷했다. 보쿠토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카아시가 선후배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글쎄.”
“아카아시하고 친구 놀이는 왜 한거야?”
“친구 놀이 아닌데.”
“보쿠토.”
“……진짜 아니야.”
보쿠토는 목이 바싹바싹 말라와 물을 들이켰다. 맞은편에 코노하가 흔들림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힘들고 아카아시도 힘들기만 하잖아.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어?”
“나는, 글쎄……. 그리고 아카아시는 괜찮으니까.”
“……넌 바보냐? 아니, 그래. 바보지. 바보였지.”
코노하의 목소리는 주위를 의식해 작았지만 그를 향한 맹렬한 비난만은 숨김없이 날카롭게 드러나 있었다. 보쿠토는 그게 조금 억울했다. 아카아시는 자신에게 심술궂게 굴 수 있을 만큼 괜찮아졌는데, 괜찮지 않은 건 자신인데, 그래도 참고 있는 건데…….
“아카아시 말이다.”
“어어.”
자신이 그렇게나 못미더울까? 못미더울만 하기는 하지만, 보쿠토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한 번 삐죽였다. 그래도 나름 어른이 된 모습을 보여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무서워하느라 잘 못 보던 영화도 볼 수 있게 되고, 단 것만 찾느라 마시지 않던 커피도 마시게 되면 나를 달리 봐주지 않을까, 어쩌면 다시……그렇게. 아무것도 소용이 있지는 않았지만.
코노하가 가차 없이 말을 이었다.
“아카아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그걸 꼬박꼬박 다 받고는 항상 그래. 보쿠토 선배? 항상 그런다고.”
“……아?”
“한 번도 너였던 적이 없었는데도 그랬어. 2년 내내 그랬다고. 어쩌면 너일지도 모른다고. 네가 전화를 했는데,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을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꼬박 꼬박 그런단 말이다. 대뜸 보쿠토 선배, 그렇게 전화를 받는다고. 이 어디가 멀쩡한 건데.”
“…….”
“너도 괜찮은 게 아니잖아.”
2년 동안 귀국할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잠깐의 휴가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단 한 번도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추궁당하는 보쿠토의 표정에는 여유가 없었다.
보쿠토가 주위를 둘러본다. 어느샌가 아카아시는 보이지 않았다. 급히 일어서느라 물잔과 술 같은 게 엎어졌지만 보쿠토는 황급히 사과의 말만 하고서 아카아시가 마지막으로 앉아있던 자리로 향했다. 동기와 선배들이 바깥을 가리킨다. 자신에게 술을 먹이려고 혈안이 된 친구들 사이에서 도망쳐 가게 밖으로 나온 보쿠토는 입구의 울타리 쪽에 설치된 주홍빛 조명 앞에 서 있는 아카아시를 발견했다.
아카아시는 얇은 코트를 어깨에 걸친 채 아무 말 없이, 고요하게 그 자리에 서있기만 했다. 겨울의 공기가 얼어붙어 그의 앞에서 낙하했고 별빛이 그 위로 장식을 흩뿌리다가도 숨을 죽인다. 남은 건 은은한 달빛과 울타리에 설치된 작은 전구에서 새어나오는 따뜻한 색의 빛뿐이었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부르려는 순간에 벨소리가 울려퍼진다. 보쿠토가 화들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몸을 숨길 때 아카아시가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벨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액정을 내려다보던 아카아시가 전화를 받았다.
“……보쿠토 선배?”
보쿠토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카아시는 휴대전화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가, 금방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휴대전화를 귀에서 뗐다. 단말기 안에서는 단조로운 목소리가 기계적으로 광고 문구를 읊조리고 있었다. 늦은 밤의 고요한 공기가 그것을 선명하게 전해주었다.
몸을 돌린 아카아시와 보쿠토가 눈이 마주친 것도 바로 그 때였다. 보쿠토가 입만 버끔거리고, 아카아시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다. 보쿠토 선배가 왜 여기 있냐고 묻고 싶은 듯했으나 아카아시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렇게 주춤거리던 아카아시가 곧장 몸을 돌려 보쿠토 앞에서 도망치려고 했을 때야 보쿠토가 정신을 차리고 따라붙었다.
“아, 아카아시!”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붙잡아 세운 건 두, 세블럭쯤 더 가고 난 뒤였다. 희미한 빛을 발하는 가로등 하나만 어두운 골목을 밝히고 있다. 구름이 스며들어 달빛마저 흐릿해졌다.
“이, 이거 놔요. 보쿠토 선배.”
“아니, 내가 억지로 뭘 하는 건! 아닌데! 아카아시가 갑자기 도망가서!”
“…….”
어쩐지 아카아시의 얼굴이 조금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도 같았다. 보쿠토는 뒤쫓아와놓고서야 정작 할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보쿠토는 잠시 숨을 고르며 헛기침했다.
“그, 아까…….”
“아까 뭐요.”
아카아시도 정도 이상으로 공격적이었다. 보쿠토는 고슴도치 솜털에 찔린 사람처럼 아카아시를 바라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니 아까 아카아시한테 전화……. 왔을 때……. 전화 받는 거 봤는데…….”
“봤는데요.”
“아니, 그 내 이름……부르길래 왜 그런……아카아시? 아, 아카아시? 울어? 왜, 왜 울어? 아니, 나는 뭐라 하는 게 아니라-악! 아, 아카아시! 아파! 아파!”
뭐라 말을 해보려고 했던 것뿐인데 그대로 정강이를 채이고 어깨와 등을 매섭게 맞고 있다. 보쿠토는 따가운 등에 눈물이 핑 고이면서도 필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어떻게든 아카아시를 저지하고 싶었지만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아카아시가 울고 있었다. 그와 사랑하는 동안에도, 헤어지던 그 날에도 울지 않았던 아카아시가.
“됐습니다. 다 끝났어요. 이제 돌아가요.”
눈물이 흐르게 내버려둔 채 보쿠토를 향해 팔을 휘두르던 아카아시가 돌연 멈추더니 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걸치고 있었던 터라 바닥으로 떨어진 코트도 주워서 털고 팔에 걸치더니 등을 돌린다. 황망해진 건 남은 보쿠토였다.
“아, 아카아시!”
손을 붙잡는다. 그 반동에 다시 코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돌아보는 아카아시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다. 그것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파서 보쿠토는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입을 연 건 아카아시였다.
“죄송했습니다. 취해서, 제가. 이만 돌아가죠.”
취했다기엔 지나치게 명료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얼어붙어있는 보쿠토 대신에, 또다시 흘러내린 아카아시의 눈물이 두 사람을 붙잡았다.
“아……카아시.”
아카아시가 고개를 돌리고 다른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렇다고 그가 눈물 흘린 것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보쿠토는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울지……울지 마.”
그 말이 도리어 아카아시를 자극했다는 걸, 보쿠토는 말을 하자마자 알아차렸다. 아카아시가 그를 휙 노려본다. 눈가에서 남은 눈물이 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그걸 이제 와서, 보쿠토 선배가 말씀하시네요.”
술에 취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선명한 목소리가 잔물결치듯 떨리는 건 눈물 때문이었다. 보쿠토는 눈만 꿈벅거렸다.
우리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면 너는, 헤어지자는 말에도 울지 않았으니까. 헤어지자는 이야기에 눈물 한 방울 비추지 않는 그를 보면서 보쿠토는 아주 조금 서운해 했지만 그보다는 안심이 더 컸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괜찮을 거라고……. 나는 아니겠지만 너는, 너는 괜찮을 거라고.
“나는……. 나는 네가 괜찮은 줄 알았어.”
“…….”
“난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카아시는 괜찮은 줄 알았어. 그런데 나는 아니어서, 나는…….”
보쿠토는 입을 다물었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화를 했다고는.
언제 어느 순간 어떤 번호로 전화를 해도 자신을 알아봐주는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자신을 알아주는 아카아시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기 때문에 자신이 다른 그 어떤 말도 할 수는 없었다. 아카아시가 나직하게 말하는 ‘보쿠토 선배’라는 그 한 마디뿐이었다.
“괜찮을 줄 알았다고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제가?”
눈물에 젖은 얼굴이 그를 노려본다. 보쿠토가 입을 벌렸지만 나오는 말은 없었다. 아카아시가 말했다.
“오는 전화마다 붙잡고서 보쿠토 선배라고 불렀습니다. 당신이 전화하는 거라고 믿고 싶어서. 전화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만나던 그 때처럼……. 당신이 다시 떠난다는 걸 축하하고 있는 오늘에도!”
결국 아카아시는 자신의 손으로 눈을 가렸다. 말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을 토해냈다. 코노하가 그렇게 걱정하던 것을 두고 괜찮노라 말해왔던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되었다. 처음부터 친구 같은 얘기에 응해선 안 됐던 것이었다. 손바닥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하지만 선배.”
이 마음 그 어디에도 우정과 닮은 구석이 없는데, 그저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하는 시간에 단 둘인 것이 좋아서 친구라고, 친구라고, 좋은 친구라고…….
“친한 친구도 선후배도 저는 못하겠습니다. 저는 아직…….”
자신을 배려해주느라 그의 앞에서는 보쿠토의 이름도 꺼내지 않는 코노하에게 ‘보쿠토 선배’라는 말조차 뱉을 수 없었다. 처음 보는 번호의 낯선 전화가 오는 날에나 겨우 말해볼 수 있었다. 그 때 그 시절처럼. 서로 좋아해서 그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던 그 날들처럼, 보쿠토 선배라고.
“그럼……. 다시 시작할래. 다시, 다시 시작하자. 아카아시, 다시 하게 해줘.”
“……네?”
아카아시가 손을 내렸다. 눈앞에는 보쿠토가 서 있었다. 언젠가 코트 위에서 올려다보았던 그 때의 모습인 것 같기도 했고 헤어지던 그 날, 바로 오늘처럼 찬바람이 불던 그 날의 모습 같기도 했다.
“아카아시, 그 전화는 전부 나였어…….”
보쿠토의 금빛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게 운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운명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마음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보쿠토는 잠든 아카아시를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눈매가 붉다. 밤새 많이 울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하는 출국은 돌아오기 위해 하는 출국이다. 이적을 모두 마쳐, 그쪽에서의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카아시는 또 화를 냈다. 지금 돌아올 거였으면서 고작 2년 기다려달라는 말을 못해서 헤어지자고 했느냐고. 그에 대해서는 보쿠토도 화를 낼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카아시의 2년이었다. 어떤 식으로도, 조금도 낭비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보쿠토는 품 안의 아카아시가 잠에서 깬 것을 알아채곤 조금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카아시가 품으로 파고들었다. 보쿠토는 잠깐 침묵했다가 속삭이듯 물었다.
“2년 전에도, 아카아시……. 내가 언제 어떻게 전화해도 항상 나인 줄 알았던 거.”
“……선배인줄 알았던 게 아니에요.”
잠긴 목소리가 나직하게 감춰두었던 진실을 풀어낸다.
“그냥 모든 게 선배였으면 했어요. 모르는 번호 하나도.”
운명인줄 알았지만 사실은 운명이 아니었다.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그 소중한 사람이 품 안에 있어서 보쿠토는 팔을 풀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못했네.”
“뭘 못해요. 전화 했잖아요. 바보같이 전화를 해놓고도 아무 말을 못한 거겠죠.”
신랄하게 비꼬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에 담긴 감정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
“가서도 전화할게. 전화해서 말할게. 얘기할게. 금방 올게.”
“…….”
아카아시가 잠깐 침묵한다. 보쿠토는 천천히 그 등을 쓸며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이제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길 차례였다.
아침 해가 떠오르며 지난 밤 새도록 내렸던 눈을 모두 녹여내고 있었다.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눈 위로 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그의 손 틈 사이로 새어나온 햇볕이 아카아시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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