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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거절을 했으니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만두리라 여겼던 아카아시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아카아시가 단호하게 그만두겠다 했던 것이 도리어 보쿠토의 오기를 자극한 것인지, 보쿠토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불도저처럼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부 활동만이었는데 나중에는 쉬는 시간마다 교실에 쳐들어왔고 점심시간에는 그에게 억지로 자신 몫이었던 팩 음료를 쥐여주기까지 했다.


그 유난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반 친구들도 미심쩍다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데다가, 보쿠토의 체격이며 성량이 어디 또 보통 사람이던가? 온 동네에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존재를 견디지 못한 쪽은 아카아시였다.


아카아시가 퀭한 얼굴로 체육관에서 마지막 정리를 할 때 보쿠토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보쿠토 코타로가 웬 세터 지망 1학년을 두고서 장난을 치는 건 이제 모두에게 익숙한 일인지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짧은 시간 동안 세상에게 버림받는 기분을 맛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야!”

“…….”

“아카아시 케이지! 너 세터 하고 싶댔지?”

“네…….”


차라리 그냥 한다고 하는 게 나았을까? 그 말도 안 되는 좋은 남자친구 선생님이라는 걸? 아카아시가 조금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상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럼 연습할 상대 필요하겠네? 공 올려줄 스파이커? 내가 연습 도와줄게!”

“…….”


흔들리던 마음이 사르르 재가 되어 봄바람에 흩어졌다. 아카아시는 퀭한 눈을 들어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자신이 선심을 베푼다는 얼굴을 하고서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가 제 연습을 도와주시는 거라고요……?”

“응! 너도 주전 뛰려면 연습 많이 해야 하잖아?”


이대로 머리를 싸매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얄팍한 술수를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제가 토스하는 공이 바닥에 떨어지면 그걸 주워주신단 거죠?”

“아?”


그래, 그런 것일 리가 없지. 자기 스파이크 연습에 토스 올려줄 사람이 필요한 주제에 어딜 아카아시 그의 연습을 거들어주는 척…….


“부탁할 게 있으면 솔직하게 말을 하세요. 되지도 않는 수 쓰지 말고.”


본심이 들통났다고 생각하는지 보쿠토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간다. 그러다 이윽고 그가 빽 소리쳤다.


“난 항상 솔직했어!”

“아, 그래요? 방금 전에 그건 뭔데요. 제 연습 도와주시는 게 아니라 선배 연습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거잖습니까.”

“그거는 겸사 겸사인 거고…!”

“그런 부분을 솔직하게 말 안 한 거잖아요.”

“아씨, 네가 다 안 된다고 하니까 그렇지!”

“이젠 남 탓?”

“…으아아아아!”


머리를 쥐어뜯던 보쿠토가 속에서 치솟는 열을 이기지 못했는지 바닥을 구른다. 아카아시는 색깔 없는 눈으로 그런 보쿠토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보쿠토는 한참을 그렇게 구르기만 하다가 겨우 진정하고 나서야 바닥에 엎어진 채로 ‘미안’ 하고 사과했다. 울먹이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할 거지…….’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그가 수락할 때까지? 정말일까?


사실 자신이 처음 거절했을 때 보쿠토가 포기하지 않았을 순간부터 뒷목 당기는 서늘함이 느껴지기는 했었다.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알았어요. 하죠, 해요.”

“아?”

“그 망할 좋은 남자친구 선생인지 뭔지 한다고요.”


아카아시가 눌러 붙은 피로로 기진맥진하여 겨우 그렇게 대답했을 때, 처음에 보쿠토는 엎어져있던 채로 고개만 들고 아카아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눈을 꿈벅인다. 5초 쯤 지났을 때 보쿠토가 활짝 웃으며 마치 벼락이 치듯 벌떡 일어나더니 아카아시를 번쩍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어린 조카 비행기 태우듯 하는 동작에 아카아시는 땅에서 발이 떨어지는 경험을 10년 만에 해보았다.


“일단…일단 이런 건 전부 하지 마세요.”

“아?”


신이 난다고 체육관을 뛰어다니며 이리저리 과장된 몸짓을 잔뜩 취하고 있던 보쿠토가 몸을 굳히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카아시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보쿠토는 평생이 가도 그런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보쿠토의 손을 잡아 내렸다.


“남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들지 말란 말입니다….”

“아. 기뻐서 나도 모르게…….”

“그런 건 혼자 하세요, 혼자.”


아카아시의 면박에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던 보쿠토가 번쩍 눈을 떴다.


“진짜 해주는 거지!? 선생님!?”

“……진짜 할 테니까 이제 교실에 찾아오는 것도 그만두세요.”

“그, 그렇게 질색할 일이냐고…….”


뻔뻔하게 구는 정도가 남달리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그도 아카아시가 정색하는 것이 심란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멀거니 그런 보쿠토를 바라보다가 헛기침했다.


“어쨌든 돌아가죠.”

“수업 안 해!? 선생님 해준다고 했잖아!?”

“…….”


아카아시는 갈등과 고뇌가 담긴 얼굴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너무나도 집이 그리워 귀가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여기서 할 만한 얘기도 하나뿐이다. 하지만 귀갓길에는 상대분을 댁까지 데려다주란 말이라도 했다가 보쿠토가 어떻게 반응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설마 날 데려다주겠다고 하기야 하겠어?’


*


“안녕히 가세요…….”

“내일 봐, 아카아시!”


그간에 멸시에 가까울 만큼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봐왔고 내막을 알고 난 뒤에도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현관문 앞에 선 아카아시를 향해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보쿠토에게서는 그간의 갈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눈초리를 전혀 개의치 않았느냐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이 왜 자길 싫어하느냐고 울듯이 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정말 무서울 만큼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피곤함에 절어서 풀썩 자신의 방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 적응하는 것은 분명히 체력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중등부 시절과는 다른 배구부 연습량도 부담이 되기는 했으나, 지금 자신이 뻗어있는 이유의 팔 할은 단 한 사람 때문이었다.


사귀던 사람을 데려다준 적은 있냐는 말에 보쿠토는 너무나 당당하게 왜? 라고 대꾸해서 아카아시의 입을 다물렸다. 침묵 끝에 아카아시가 내놓은 ‘보통 헤어질 때 귀갓길 시간이 늦기 마련이고 위험하니까요’라는 대답에 보쿠토도 나름대로 논리적인 답변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늦게 헤어진 적이 없는데?


보쿠토가 몇 주도 버티지 못하고 차이는 이유를 단박에 깨친 기분이 된 아카아시는 잠시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자신의 말에 문제가 있다는 걸,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도통 알지 못한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눈치를 본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결과가 ‘아카아시 집까지 데려다줄게!’였다. 아카아시는 여기서 거절하는 대거리를 치를 체력도 남지 않아서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여주기만 했다.


이제 확실하게 알겠다. 2분 만에 애인을 갈아치운다는 건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줄을 서 있단 얘기였다. 저 사람은 저렇게 지극한 주위의 사랑을 받고 자라서 딱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의 배려만으로 가득 차 있는 인물인 것이다.


‘애당초 왜 좋은 남자친구가 되고 싶단 생각을 하는 거야? 사람을 사귀면 안 되는 사람인 거 아닌가?’


아카아시는 심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몹시 피곤했지만 이제 더는 2학년 선배가 1학년 교실까지 들락거리며 그에게 무언가를 해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실상 옆에서 보기엔 장난기 있는 괴롭힘 수준이었긴 해도—, 부 활동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 하나 갱생시키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못할 일도 아니다. 왜 자신이 그런 부담을 지게 되었는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아카아시는 교복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계속 생각하면서도 눈을 뜨지 못하고서, 피로에 몸을 푹 맡기고 이른 수마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