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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씀하셔도 너무한 건 선배죠.”

“…왜!?”


보쿠토가 눈을 번쩍 뜨고 소리쳤다. 아카아시는 윽 하는 얼굴이 되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신이 위협적이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챈 보쿠토가 기죽은 표정으로 헛기침했지만 아카아시는 다시 가까워지지 않았다.


“보통 좋아해서 사귀자고 한 사람이 일주일 만에 헤어지자고 하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 그냥 싫어질 수도 있지.”

“저도 선배를 그냥 싫어할 수도 있죠.”

“아니 그거랑은 얘기가 다르지! 너, 너는 나랑 말 한마디 안 해봤으면서.”


후배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에 보쿠토가 또 크게 움찔했다. 후배는 그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귀는 건 실례 아닌가요.”

“걔, 걔네가 괜찮다고 했는데.”


심지어 지칭이 복수형……. 아카아시는 흐릿한 눈동자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는 것은 둘이니 그렇게 쳐도 맞는 표현이겠지만, 둘만이 아니었을 거라는 묘한 확신이 선다.


“선배를 좋아하니까요.”

“아…?”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인데 뭐든 괜찮다고 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나참.”

“그치만 사귀자고 하는데 거절하면 걔네가 상처….”

“일주일 뒤에 헤어지자고 말하게 하는 게 더 상처 아닐까요?”


보쿠토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카아시를 쳐다보았으므로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의 강이 흐른다. 아카아시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쪽에서 자기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다고 해서 산뜻한 기분일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이제 내가 안 좋아졌으니까 헤어지자고 한 걸 텐데 그럼 기분이 나쁠 이유도…….”


이렇게 단순할 수가 있나! 아카아시는 기가 막힌단 얼굴로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누굴 좋아해 본 적 없어요, 선배는?”

“배구는 좋아하는데.”

“아니 사람요…….”

“엄마 아빠?”

“장난치는 겁니까?”

“아, 아닌데.”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서늘해지고 보쿠토가 쪼그라든 듯이 대답했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심호흡도 두 번쯤 더 하고 입을 열었다.


“좋아해서 열심히 해볼 생각으로 사귀자고 했는데 전혀 상대해주지 않으니까 너무 마음이 많이 상해서, 헤어지자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아……?”

“그랬더니 2분 만에 새 애인을…. 또 일주일 만에 사귀었다가 헤어지고…? 남의 눈에서 눈물나게 하면 자기 눈에선 피눈물 나는 법이란 말도 못 들어 봤습니까?”

“하, 하지만 나는……. 그 애들이 하고 싶다는 대로…….”

“그분들은 선배가 먼저 자기와 뭔가 하고 싶단 마음이 들었으면 했던 거라고, 지금까지 설명했지 않습니까…. 이해가 안 되시면 그냥 관두세요.”

“자, 잠깐만!”


후배가 야멸차게 말하고 돌아서려는 것을 보쿠토가 서둘러 잡아 세웠다.


“그, 그러니까 내가 뭔가 그 잘못했다는 거지! 걔들한테!”

“뭔지는 모르나 봐요.”

“좋은 남자친구가 못 돼줬다는 거잖아!”

“…….”


그 한마디로 압축할 거리인가 싶으면서도 저 말이 나름대로는 정곡인지라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열의에 찬 보쿠토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네가 좀 알려줘!”

“……뭐라고요?”

“좋은 남자친구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쿠토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가득 차서, 별보다 눈부시고 태양처럼 빛나는 눈빛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눈가를 가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싫습니다.”

“…아?”

“선배가 저보다 한 살 많으시잖아요. 제가 알려드릴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반 친구한테 여쭤보시든가….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는 보쿠토가 더 이상 잡아챌 틈도 없이, 아카아시가 쌩하니 자리를 떠났다.


*


솔직하게는, 아카아시는 이것으로 부활동이 완전히 끝장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아마도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부터 배구부의 눈부신 신성으로 이름 높았던 바로 그 보쿠토 코타로, 이제 겨우 2학년이 되었는데도 내년의 주장으로 내정되어 있다는 말이 1학년인 아카아시의 귀에도 들려올 정도인 상대였다. 그런 선배 면전에다 대고 할 말 못 할 말을 모두 했으니 다음 날 더 이상 체육관에 올 필요 없다는 말을 듣는다 해도 놀랍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의외로 아침은 아무 일 없이 시작되었다. 부원들은 모두 반갑게 인사해주었고 워밍 업도 스트레칭도 매끄럽게 이어졌다. 보쿠토와는, 의외로 그도 바쁜 탓에 눈 마주치지 않고 아침 연습을 끝마칠 수 있었다.


보쿠토 선배도 단념했나 보지. 아카아시는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지었다. 애당초 매달릴 건수조차 아니었지 않은가? 후배에게 좋은 남자친구란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게? 하지만 그게 틀려도 단단히 틀린 생각이었다는 것을, 아카아시는 오늘 하루가 채 가기도 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오후 연습도 아침 연습과 다를 바 없이 이어졌다. 모두 몸을 풀고, 제각기 연습을 시작하고, 그러다가 공이 튀어 오르고……. 그걸 주우러 가는 것은 분명 1학년들의 몫일 것이었다. 다들 슬그머니 눈치를 보고 있는 걸 못 견뎌 아카아시가 밖으로 향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튀어나간 사람이 있다.


“내가 갔다 올게!”


아카아시를 거의 끌어다가 체육관 안으로 밀치다시피 하고서는 바람 소리가 나게 뛰어가는 사람은 보쿠토였다. ‘내가 갔다 올게!’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너무 커서 체육관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아카아시가 잠깐 놀라서 눈만 깜박이는 사이에 얼마 지나지 않아 보쿠토가 돌아왔다.


그리고서는 오후 훈련이 끝날 때까지, 아카아시가 공을 주우러 나가려는 낌새만 보이면 보쿠토가 쩌렁쩌렁 자기가 간다고 외치고서는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그걸 아카아시 자신이 하겠다고 같이 속도를 겨룰 수도 없어 어영부영하면 보쿠토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왔다.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보쿠토가 그러고 있으니 자기 공은 제각기 자기들이 주우러 가기 시작하며 연습을 마무리 지었을 때 또다시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잡아 세웠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체육관은 적막했다. 무언가의 낌새를 감지한 아카아시가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아카아시의 저지 자락을 쥔 보쿠토의 손아귀는 단단해서 처음 그랬던 것처럼 쳐낼 수도 없었다. 아카아시가 옷을 버리고 갈까, 라는 생각까지 했을 때 보쿠토가 입을 열었다.


“이제 선생님 해줘!”

“뭐라고요?”

“오늘 내가 너 공 주울 거 다 해줬잖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거였습니까….”

“그러니까 해줘!”

“싫다고 말했잖습니까.”


애당초 제가 후배인데 그런 걸 알려드린다는 게 말도 안 되고요, 저도 잘 모르고요……. 하지만 아카아시가 아무리 싫다고 말해도 보쿠토는 막무가내였다. 해달라고 한참이나 버둥거리더니 돌연 앵도라진 듯이 아카아시의 옷깃을 뿌리치고서 배구공이 담겨있는 카트로 향한다. 뭘 하는 건지 기가 막혀 쳐다보고 있던 아카아시는 곧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보쿠토가 배구공을 마구잡이로 내던지는 것이었다. 열린 체육관 문 틈 사이로 공들이 굴러갔다.


“그럼 내가 주워준 거 너 다시 주워와!”


억지를 부려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아카아시는 선뜻 행동으로 옮겼다. 이 정도로 뿌리칠 수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카아시가 그대로 공을 주우러 향하는 것을 본 보쿠토의 눈이 거세게 흔들린다. 그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닌 듯했다.


“아, 아니! 잠깐만! 아카아시! 잠깐만!”


보쿠토가 방금 전에 다시 주워 오라고 외쳤으면서 우당탕 뛰어와서는 체육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주우러 가겠습니다, 비키세요, 아카아시가 그렇게 말했지만 보쿠토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게 아니고……. 이러라는 게 아니잖아!”

“……이러라고 하신 거잖아요.”

“아니야아…….”


보쿠토는 진땀을 흘리는 표정이었다. 말로 설득 하고 싶은데 떠오르는 문장이 없어 자신의 뇌 신경과 악전고투하고 있다는 것이 얼굴만 봐도 술술 읽힐 지경이었으나 아카아시는 개의치 않았다.


“굴러간 공은 주워와야죠. 비켜주세요.”

“자, 잠깐만…….”


체육관 문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기세인지라 결국 아카아시가 무례함을 무릅쓰고 직접 밀치려고 했다. 물론 전혀 통하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쏘아볼 때쯤 해서야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체육관 바닥에 앉혀놓고는 체육관 문을 열었다. 그대로 달려나가서 굴러간 공을 모두 주워오기까지는 눈 깜짝할 새였다.


품에 한 아름 공을 주워들고 와서는 다시 카트에 밀어넣고, 공을 줍기 위해 뛰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까닭으로 땀을 이마에 매단 보쿠토가 아카아시 앞에서 서성였다.


“아니, 나는 이러면 네가 부탁 들어줄 줄 알고…….”

“제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거절할 텐데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너…….”

“무슨 말을 이렇게 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 알아보시…….”

“그! 러! 니! 까! 네가 필요하단 거야!”

“네?”

“나한테 아무도 그런 말 안 해준다고!”


드디어 쓸만한 논리를 찾아낸 보쿠토가 환히 빛나는 얼굴로 아카아시의 두손을 움켜쥐었다. 아카아시가 윽한 얼굴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는 아직 체육관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였다.


“아무도 아무 말 안 해준단 말야~! 너밖에 없어! 그런 질색하는 얼굴 하고 쳐다보는 사람!”

“…….”


이렇게나 심한 말을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아카아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자신의 논리에 도취 되어 열정적인 눈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본다. 곧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쿠토의 믿음이 손에 잡힐 듯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빈틈이 되어, 아카아시는 자신의 손을 쥐고 있던 보쿠토를 곧장 끌어당겼다. 보쿠토가 균형을 잃고 휘청하는 사이에 그를 체육관 바닥에 눕히고 손을 뿌리친 아카아시는 재빠르게 옷깃을 추스르고 체육관 문을 열어젖혔다. 보쿠토가 넋빠진 얼굴로 아카아시를 올려다본다.


“그래도 싫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카아시가 돌아서서 나감과 동시에 체육관 문이 닫히고, 해가 다 저문 오후의 체육관이 보쿠토 한 사람과 함께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