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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끼 용카아시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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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잠에서 깨어난 용신 앞에, 호랑이가 웃으며 토끼를 내밀었다. 


“방금 천계에 올라와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더라고. 아카아시, 제자로 좀 받아주는 게 어때?” 


호랑이가 내미는 토끼는, 용신이 본 이들 중에서 가장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



천계에는 언제나 미풍이 불고 보드레한 꽃잎이 휘날리며 누구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바람이 나뭇잎 간지럽히는 소리와 연못에서 잉어가 튀어오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세 사람이 침묵을 지키고 서 있었다. 멀찍이서 잉어가 기운차게 꼬리짓 하여 물 튀는 소리가 한 번 울린 뒤, 아카아시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 앞에 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익히 아는 얼굴 뒤에 서 있는 처음 보는 얼굴을. 


턱선이 뚜렷하고 눈매가 형형했다. 금빛 눈동자가 이따금씩 번뜩였는데 그러면 왠지 공기마저 숨을 죽이는 것 같고 잿빛이 섞여든 은빛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다.


‘흰 토끼였나?’


아카아시는 속으로 한 생각을 조용히 밀어 넣었다.


“방금 천계에 올라왔다니요? 아, 그 소동이…….”

“어쩐지 아카아시, 평소보다 조금 빨리 깼다 했더니 역시 시끄러워서 일어났구나?”


아카아시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남자의 뒤에 선 사람을 흘끗 바라보았다. 입술을 꾹 닫은 채 딴청을 피우듯 서 있는 저 남자는 확실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천계에서 처음 보는 얼굴을 보는 것조차 처음이다. 


말을 붙인 남자는 아카아시가 답지 않게 내심 당황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들유들하게 말을 이었다. 


“놀랍지, 토끼가 정말로 신이 돼서 올라왔다니까.”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이상하게 아무것도 모르더라고. 아카아시가 좀 가르쳐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예? 가르쳐 주다니오, 뭘 어떻게…….”


아카아시가 말을 늘이고 남자가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는 찰나였다. 아카아시의 곤혹스러운 기색을 눈치 챈 것인지 묘신(卯神)이 입술 쭉 내밀었다. 그리고는.


“됐어. 필요 없어.”


그들의 대화 양상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만 있던 그가 불쑥 말을 내던지고는 몸을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척척 걸어가다가 그 모습이 멀어지기까지는 순식간이다. 


아카아시가 조금 당황해 눈만 깜박거리고 있으려니 남자가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뭡니까? 이게.”

“짐승부터 시작해서 말야. 어떻게 저떻게 도력을 쌓다가 정말로 신이 돼버렸거든, 저 녀석.”

“그건……. 정말 굉장하네요.”

“그런데 천계 놈들이, 뭐. 그런 거지. 하계 출신이라 짐승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니 가까이 오지 말라느니…….”

“예? 이미 신이 된 것 아닙니까? 그게 무슨 헛소립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이 자식들이 몇 천 년쯤 자기네들끼리 놀았다고 말야.”


아카아시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쿠로오는 그 얼굴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은 저런 얼굴을 해줄 거라 믿었기에 온 것이기도 했다. 


“하여간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런 거지. 제어도 안 되고. 아니, 뭘 제어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아카아시 네가 좀 어떻게 해봐.”

“저라고 뭘……. 쿠로오 씨가 해보시죠.”

“나랑은 상성이 별로 안 좋더라고.”


범과 토끼라고 생각하면 얼추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가차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용하고는 좋겠습니까?”

“에이, 그래도 나보단 낫겠지. 보쿠토 녀석 진짜 저대로 둘 거야? 진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


아카아시가 지긋한 얼굴로 그를 노려본다. 쿠로오가 빙긋빙긋 웃음을 지었다. 한참의 침묵이 지나고 아카아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이, 뭐라고요……? 보쿠토?”

“응! 보쿠토 코타로! 부탁 좀 할게!”


내버려두면 기껏 쌓아올린 도력이 줄줄 새어 말라죽어버릴지도 모른다며 쿠로오가 한껏 부추겼다. 아카아시는 그런 쿠로오를 노려보다가 맥이 풀린 한숨과 함께 가볍게 몸을 띄웠다. 아래에서 쿠로오가 기운차게 팔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



아카아시가 간신히 묘신(卯神)을 찾아낸 건 이 근방을 샅샅이 뒤지고 난 후였다. 천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더니 걸음엔 거침이 없다. 아카아시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그의 앞에 내려섰다.


“우, 우왓! 뭐, 뭐야! 아…….”

“보쿠토 씨?”


묘신, 보쿠토는 화들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아카아시의 얼굴을 알아보곤 이내 표정을 싹 굳혔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의 표정은 아랑곳 않고 그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다시 아래에서 위까지 훑어보았다. 


‘이런 걸 무시할 생각이 들 수나 있는 건가?’


쿠로오가 말하기를 저대로 내버려두면 기껏 쌓아올린 도력이 몽땅 새어나가 말라죽을지도 모른다더니, 과연 그런 말을 할 법 하기는 했다. 제어하지 못하는 힘이 그를 둘러싸고 넘실거리는데 그 흘러넘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하지만 말라 죽을 거라는 말만은 틀렸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찼다. 저 정도쯤은 맘껏 흘러넘치게 내버려둔다 해도 염려할 필요 없을 것이다. 그의 저 방대한 그릇이 힘을 증명하고 있었다. 


“갈 거야, 비켜!”

“곤란하군요.”

“뭐, 뭐가.”

“어디로 갈 겁니까?”

“에……엥?”

“갈 곳은 있습니까?”


이제 갓 천계에 올라온 신에게 달리 갈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카아시는 다 알고도 팔짱을 끼고서 물었다. 그 질문에 보쿠토가 당황해서 입만 열었다 닫았다 한다. 배짱은 부릴 수 있어도, 거짓을 섞어서라도 말다툼에 응수할 기교는 없는 성미인 게 분명했다. 


“……뭔가 어떻게든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쿠로오 씨를 따라온 것 아닙니까?”

“하, 한가해서 산책! 산책 따라온 거였어!”


귀는 빨개져서는 턱을 세우고 말하는 얼굴이, 도무지 장난으로라도 속아 넘어가 줄 수가 없다. 그런 아카아시의 표정을 알아보았는지 보쿠토는 결국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낱 미물이 깨달음을 얻고 도력을 쌓아서 신이 되었다. 지금까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렇네. 반짝 하고 신이 된다고 의복이 곧장 어떻게 되는 건 아니로군.’


아카아시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비단에서는 윤이 흘러 부드러운 햇빛을 받고 반짝거렸다. 팔에 두르고 있는 끈은 그의 기운을 따라 유연하게 너울거렸고 발등을 덮고 있는 천도 그 끝 한올 한올 새하얀 색이었다. 그에 비하면 저 쪽은…….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한쪽 손을 휘저었다. 


촤아악


허공에서 곧장 물벼락이 쏟아져 그의 앞에 선 묘신을 쫄딱 젖게 만든 것도 한 순간이었다. 바닥을 보고 있던 보쿠토가 잠시간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얼어 붙어 있다가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젖은 은빛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려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이……게, 무, 무슨……?”


아카아시는 다른 쪽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는 보쿠토 모르게 야트막이 침을 삼켰다.


“그……. 크흠. 생각만 한다는 게.”

“새, 생각? 무슨 생각? 나한테서 그렇게 냄새 나!?”

“무슨 헛소립니까? 일단 의복이 그렇게 되었으니 먼저 갈아 입으셔야겠군요.”

“뭐, 뭐어? 야! 야!”


아카아시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몸을 돌렸다. 뒤에서 보쿠토가 빽 외치는 소리에 울창한 숲에서 새들이 요란히 날아올랐다. 몇 걸음 걸어가던 아카아시는 따라올 생각은 없이 서 있는 보쿠토를 돌아보았다. 보쿠토는 기가 막힌단 표정으로 젖은 머리만 쓸어넘기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 따라오고 뭐하십니까?”

“야! 미안하다고 먼저 해야 될 거 아냐!”

“옷을 따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누가 옷을 달래!?”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말에는 조금도 응하지 않고서 자기 할 말만 뱉고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지간히도 속이 탔는지 보쿠토가 빽빽 소리치며 따라붙었다. 


“가진 힘이라면 그 정도 물은 한 순간에 날려 보낼 수 있습니다. 못 하십니까?”

“아? 정말?”


기운차게 씩씩거리기에 말이라도 돌려볼까 하고 꺼낸 말이었는데 보쿠토가 눈까지 동그랗게 뜨고서 반문했다. 아카아시는 순간 말문이 막혀 걸음을 멈춰 세우곤 입술을 다물었다. 어딘가 흉흉하다고까지 생각했던 금빛 눈동자가 전에 없이 천진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하면 돼?”

“……여러 가지 방법이 있죠. 가장 간단한 건 옷의 습기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생각하고 힘을 방…….”


거기까지 설명하던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듣던 보쿠토가 그의 설명대로 해보기 위해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며 애써보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저 하늘 위로 올라가버린 것이었다. 보쿠토의 비명소리가 아득히 멀어진다. 옷의 습기만 옮길 만큼 세세히 조정하지 못하고서 자기 자신까지 옮겨버린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의 몸이 가뿐히 떠오른다. 아카아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보쿠토를 찾아냈다. 다시 손짓을 해 그의 주위를 둘러싼 힘을 안정시키자 보쿠토가 한참 더 허우적거린 뒤에 천천히 몸을 세웠다. 바람에 격하게 휩쓸린 보쿠토의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다. 아카아시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옷의 습기만 움직여야죠.”

“스, 습기만? 가능한 거야?”

“당신이라면, 물론.”


높은 곳의 바람은 조금 거세어서 아카아시의 옷과 머리카락을 나부끼게 만들었다. 아카아시는 옷깃이 아무렇게나 물결치도록 내버려둔 채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가 입고 있던 낡고 헤진 옷은 이 소동 사이에 가뿐히 말라있었다. 


격렬한 의미로나마,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서 들은 그대로 해내고 만 것이다. 


“알려드리겠습니다.”

“뭐……뭐를?”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가 아는 것이라면 전부.”


금빛 눈동자가 마치 무생물처럼 광채를 띄고 그를 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말없이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 뒤에 보쿠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했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발갛게 물들어서는 쭈뼛거리는 표정이었다. 


“그럼 우선 제 처소로 돌아갈까요.”

“……으, 으응.”


부끄러워하는 얼굴은 그 키나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마치 어린 소년 같았다. 아카아시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털어내고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줄곧 고요했던 처소가 시끄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