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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월 xx일 수요일 날씨 : 맑음

오늘은 집으로 가는 길에 교환일기장 삿다!

직원 누나의 추천 노트! 아카아시가 말한 대로

자물쇄도 있다.

무슨 말을 쓰지..

오늘 점심 때 먹은 메론 맛 소다 맛없는 거라서 아카아

시 줬다.

아카아시는 좋은 남자친구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 같다.

이너 스파이크 잘 넣고 싶다.

아빠가 타코야키 사 왔으면 좋겠다.


아카아시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차인다! 이 교환 일기장이라면 하루만에 차인다! 120퍼센트의 확률로 반드시 차인다! 어떻게 이런 걸 줘놓고 그렇게 기대되는 얼굴을 할 수 있지? 아카아시는 헤어지기 전까지 보았던 보쿠토를 떠올리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빨간색 잉크 펜을 먼저 집어들었다.


오늘은 집으로 가는 길에 교환일기장 삿다! → 샀다 입니다.

자물쇄도 있다. →자물쇠

오늘 점심 때 먹은 메론맛 소다 맛없는 거라서 아카아

시 줬다. →맛없는 거 또 주시면 죽습니다.

아카아시는 좋은 남자친구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것 같다. →저는 평균입니다..

이너 스파이크 잘 넣고 싶다. →어깨 유연성 증진

아빠가 타코야키 사왔으면 좋겠다. →연비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첨삭을 끝내고 이번엔 검은 펜을 든 아카아시는 다른 쪽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첨삭에서 할 말을 모두 하고 났더니 이제 여기 와선 할 얘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려보내면 보쿠토가 얼마나 울고 불고 난리를 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x월 xx일 수요일 날씨 : 맑음

좀더 상대를 생각한 내용을 적으세요

그렇다고 저에 대한 것은 말고요

공통된 화제에 대한 거라거나 아니면

오늘 있었던 일 중에서 얘기 해주고 싶었던 일 같은 거요.

이너스파이크 연습을 할거면 카메라 같은..

녹화할 게 있으면 좋겠네요.


몇 마디 쓴 것은 좋았는데 일기장의 공백이 의외로 상당해서 부담스러웠다. 아카아시는 머리를 싸매고 내려다보다가 결국 더는 적을 말이 없어 노트를 덮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건 죽어도 남에게 들킬 수 없기 때문에 노트에 잠금쇠를 채운다.


차라리 열쇠를 잃어버리도록 할까? 아카아시는 자신의 손바닥 위, 지나치게 작은 열쇠를 바라보며 잠깐 갈등했다가 그만두었다. 보쿠토의 힘이라면 이런 종잇장 같은 자물쇠야 뜯어버리고도 남는다. 아카아시가 아침부터 일기장의 내용을 궁금해할까 봐 굳이 미리 건네주는 사람이었으니 본인도 이 일기장 안에 무슨 내용일지 궁금해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한 손으로도 열 수 있겠지…….’


조금 아득해진 아카아시는 서둘러 일기장을 책가방에 챙겨 넣었다. 내일 학교에 깜빡하기라도 하면 보쿠토가 반드시 집까지 쳐들어올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


“아카아시, 그거는?”


아침 연습이 끝날 무렵 쿨다운 스트레칭을 하는데 보쿠토가 은근슬쩍 붙어왔다. 가까이 오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훅 몰아쳐 반사적으로 물러난 아카아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뭔데요.”

“아 왜. 그거.”


보쿠토가 손으로 필기하는 시늉을 한다. 어제 그에게 건네준 교환일기장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아카아시가 첫눈에 눈치채고도 모른척 했던.


“하교할 때 드릴게요.”

“엥? 왜? 지금 줘!”

“목소리 좀 낮춰요…….”


마음같아서는 입에 재갈이라도 물리고 싶은데 사람을 상대로 그럴 수야 없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인간의 도리에 탄식했다.


“선배라면 틀림없이 궁금하다고 학교에서 열어보실 것 같으니까요.”

“아, 안 그래.”

“그러실 겁니다.”


아카아시가 보쿠토 코 앞까지 얼굴을 가져다대고서 단호하게 말하는데 보쿠토가 뒤로 물러서지도 못한 채 뻗어있다. 그러길 한참이 지나서야 침을 꼴깍 삼킨 보쿠토가 목을 뒤로 뺐다.


“아, 아, 안 그래.”

“그럼 오후에 받아도 상관없겠네요.”

“!”


보쿠토의 얼굴에 ‘이게 아닌데!’라는 아찔함이 스쳐지나갔지만 아카아시는 못 본척하며 스트레칭을 마무리 지었다. 보쿠토는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답답한 얼굴로 그의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다른 선배가 그를 끌고 가서 스트레칭을 시작할 때까지. 괜히 후배를 괴롭힌다고 한 소리 들은 보쿠토는 잔뜩 불만이 어린 표정이었다. 체육복을 갈아입을 때도 뺨까지 부풀리고서 그를 쳐다본다. 아카아시는 단호한 동작으로 부실 사물함의 문을 닫았다.


“진짜 안 줘?”

“어차피 안 보실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좀…….”

“좀?”

“이렇게 몽실몽실해지지 않을까?”

“아뇨, 구겨집니다. 새카맣게.”

“…….”


보쿠토라면 열어본다. 틀림없이! 아카아시는 확신했다. 물론 대놓고 열어보진 않겠지만, 보쿠토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교실 구석에 숨어서 몰래 열어보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저 체격에 ‘몰래’라는 표현이 가당키나 할까? 하물며 그냥 걸어가기만 해도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저 사람이? 누군가 분명 보쿠토에게 너 뭐 하냐고 물어볼 것이고, 보쿠토는 또 제대로 둘러대지도 못해서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사실이 탄로나게 될 터였다.


배구부의 2학년과 1학년이 자물쇠 채운 교환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절대, 절대 들키고 싶지 않다…….’


다른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야 그의 알 바 아니었다. 부풀려 소문이 나도 보쿠토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테고 고작 1학년에 세터 지망일 뿐인 자신에 대해서라면 아는 사람도 전무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보쿠토를 지나쳐간 그 수많은 애인들……. 보쿠토의 무관심 속에 지쳐가야 했던 그네들이 이 소식을 알게 된다면.


‘칼이라도 맞는 거 아냐?’


농담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아무 말 없이, 아무 논란 없이 참고 견뎌주다 이별을 택한 건 보쿠토를 미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똑같이 공평한 보쿠토 코타로. 그의 관심사라곤 배구뿐. 배구공을 터뜨려도 보쿠토는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을 테니 어쩔 수가 없다고, 상처 받은 와중에도 마음을 달랠 수 있었을 터다.


사귀면서도 데이트는 언제나 언제나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끝내던, 배구 외엔 무신경하던 보쿠토가 갑자기 후배 한 사람과 교환 일기를…….


아카아시의 표정이 말없이 창백해진 가운데에 그가 자신의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수업 마치고. 오후 부활동 마치고! 마치고 나서요.”

“체.”


보쿠토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카아시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


“아, 맞아. 선배. 저 이제 2주 동안은 연습 못 해드려요.”

“에엑~!? 왜?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부활동이 끝나고 난 뒤의 개인 연습을 마무리 지으며 꺼낸 얘기에 보쿠토가 튕기듯 눈을 뜨고 다가왔다. 정말 깜짝 놀란 것 같은 그 모습에 아카아시는 조금 황망한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이제 시험기간이잖아요…….”

“아?”

“중간고사요…….”

“에…….”


사람이란 대단한 것이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보며 생각했다. 아마 처음 만났을 때의 보쿠토라면 여기서 틀림없이 ‘너 시험치기 전에 공부해야 해?’ 따위의 소리를 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그래도 말 하기 전에 한 번 혀를 깨물고 눈치를 보는 정도로는 변한 것이다.


“공부 해야 합니다.”

“…그, 그렇지.”

“선배도요. 낙제 있으면 여름에 합숙은 참가 못하지 않나요?”

“에…….”


이것도 알 것 같다. 아카아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입학했을 때부터 슈퍼 루키라고 떠받들어졌을 만큼 실력이 대단한 보쿠토 코타로를 고작 낙제 몇 개 있다고 합숙에서 제외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참가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뭐 안 해도 되는 거면 안 하셔도 되겠죠……. 저는 해야겠으니까 못 도와드려요.”

“아, 아니. 나도 공부 할 거야! 나도!”

“…….”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보쿠토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활활 불타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표정이 마치 그와 자신이 함께 공부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아카아시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교환일기는 여기요.”

“와! 드디어!”

“아니, 집에 가서! 집 가셔서 보세요.”


보쿠토가 당장에 열쇠부터 찾으려고 하는 걸 어렵게 말린 아카아시는 조금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에선 절대 열어보지 마시고요.”

“안 한다니까!”

“못 믿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나에 대한 신뢰를 다 까먹은 거야, 아카아시?”

“그걸 저한테 묻는 그런 점에서?”

“…….”


잠깐 찬물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던 보쿠토지만 금방 회복해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집에 가서 열어볼 교환일기가 어지간히도 기대되는 듯했다.


‘별 내용 안 적었는데…….’


실망했다고 집까지 쫓아오진 않겠지? 괜히 첫날 데려다준다는 걸 거절하지 못한 바람에 자택이 들통나버려서. 아카아시가 불안함을 감추며 교복을 갖춰입는 동안에도 보쿠토는 여전히 설렘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건 두 사람이 자주 저녁을 먹고 가는 요릿집으로 가는 골목 앞까지 이어졌다. 보쿠토는 식당과 아카아시의 집으로 가는 길 사이에서 방황하는 얼굴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결국 간절한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아시, 이거 식당에서 열어보면 안 돼…?”

“별 말 안 적었어요. 저녁 먹고 가실 거면 먹고 가고, 아니면…….”


그러니까 교환일기를 당장 열어보고 싶은데, 아카아시는 집에 가서 열어보라고 말해서 곧장 집으로 가고 싶고, 그와 동시에 배도 고프니 소고기 덮밥도 먹고 싶고, 하지만 그러면 그만큼 교환일기를 열어보는 시간이 미뤄진다는 것이다.


“제발! 아카아시! 제발!”

“…구석 자리에 앉으면요.”

“좋아! 가자! 오늘은 선배가 산다! 빨리 가자!”


아카아시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손을 낚아채더니 식당까지 내달렸다. 아카아시는 만약 또 한 번 교환일기를 쓰게 된다면 그 때는 그래도 한 줄 더 적어드려야겠다, 속으로 작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