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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맨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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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시는 처음에는 눈만 깜박거렸다. 그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아무도 없는, 넉넉한 빈 공간과 닫힌 문뿐이었다. 하지만 아카아시의 동작을 따라서 상대방도 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카아시는 그 동작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자신의 속마음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저, 그러면 지금까지 계시던 요나카 부장님은…….”

“아아, 다른 부서로 발령 가셨습니다! 아, 아니다. 가셨어! 그렇게 말해도 되나?”


새로 발령받았다는, 그보다 한 살 연상의 부장은 활짝 웃으며 무어 기쁜 소식이라도 전하는 투로 말한다. 그 목소리는 더없이 친근하기까지 했다. 아카아시는 잠깐 눈앞이 아찔해 손을 내저으며 균형을 잡았다. 새로 온 부장이 놀라서 부축해주는 것까지도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오늘 그는 차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승진 소식은 보름 전부터 사내를 은은하게 떠돌았는데 평소 아카아시의 살인적인 업무량을 생각하자면 당연한 일이었던지라-물론 뒤에서 떠드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크게 소란이 되지도 않았다. 직급이 바뀐 명함을 받은 것이 오늘 오전이었다. 요나카 부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새 명함을 내밀었고 답지 않게 새 차장님 명함을 자신에게도 달라며 농담까지 던지고서 그의 첫 명함을 받아갔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왔는데 새 부장이 배달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것도 그가 익히 알던 얼굴이었다. 처음에 아카아시는 잠시 인식에 장애가 와서, 상무이사가 그를 따로 불러 하는 말을 제대로 해석하지도 못했다. 아카아시는 그 때 처음으로 자신의 무감한 얼굴에 대해 인식했다. 표정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어서 그나마 자신의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새로 발령받아 온 부장이 회장님의 손자, 심지어 장손이라는 말이었다. 아카아시는 그 대목에서 이미 한 번 발밑이 꺼지는 감각에 매몰되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새로 온 부장은 아카아시가 이미 알고 있는 얼굴, 그건 몇 년 전에 아카아시 밑에서 죽도록 굴렀던 부사수의 얼굴이었다. 


‘그 때 분명히 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그래…….’


아카아시는 눈 앞이 아득해져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 때도 업무량은 지금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었다는 말이다. 그런 그에게 덜컥 갓 입사한 푸릇푸릇한 후임이 주어졌다. 한 살 연상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존대로 일관했지만 일을 가르쳐주고 시키는 것까지 연상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사회 생활은 처음이라는 후임은 실상 걷는 것도 못 하는 수준이라 정말 곁에서 밥술을 떠먹여 주는 수준으로 가르치고, 혼을 내고, 가르치고, 혼을 내고, 그러다가 칭찬을 해주기도 하고…….


다 가르쳐 놓았더니 덜컥 해외 부서로 간다 했던가, 그러기에 서운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아련한 옛 추억처럼 떠올랐다. 너무 혼을 냈던가 하며 자기 반성도 며칠 했었다. 주위에서 무어라고 떠들었던 것을 모두 흘려들었는데, 되짚어보니 아마 그 후임의 출신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높으신 분의 아들래미라나 뭐라나, 그걸 그렇게 혹독하게 하시면 어떡해요, 그런 말들. 하지만 있을 때에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을 당사자가 떠난 마당에 되짚어볼 리가 만무했다.


그러다가 다시 업무량에 짓눌려 그 기억은 정말로 지난 추억이 되었다. 이후로 새로운 후임들이 들어와 같이 일을 하기도 했고 그가 다른 누군가에게 일을 배우기도 하며, 그렇게 바쁘게 지내다 젊은 나이에 차장이 되었다며 축하를 들은 그 날에.


그 날에…….


바로 오늘 이 순간에…….


“아카아시 대리, 아니지, 차장님, 많이 피곤해요? 피곤해? 쉴래?”


아카아시는 파리한 표정으로 보쿠토를 올려다보았다. 존대를 해야 할지 반말을 해야 할지 가늠도 하지 못하는 저 부장님은 정말로 지금 그가 걱정이 되어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래, 그의 후임이었던 시절에도 저런 성격이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사람이 그 나이나 체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천진한 구석이 있어서 금방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사람이었다. 


그 때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카아시는 아직 조금 창백한 얼굴이나마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부장의 손을 밀어냈다. 부장이 머쓱한 얼굴이 되어 자신의 뒷목을 쓸어내린다. 아카아시는 가볍게 헛기침해 주위를 환기했다.


저래서 마냥 어린애 같다고 생각을 할라치면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눈매를 번뜩였던 사람이었다. 아카아시는 그를 보며 이따금씩 맹수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아뇨, 죄송합니다. 조금 놀라서. 다른 사람들과 인사는 다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네!”

“말씀……편하게 하시지요.”


아카아시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상대가 머쓱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그, 그럼. 아카아시 말대로!”

“아니, 그…….”


반말을 하라는 소리가 직급 다 떼어버리란 말은 아니었는데 덜컥 저렇게 부르니 숨이 턱 막혔다. 가르쳐준 것에서 응용할 생각조차 않고 달려가는 면은 변한 게 없는 듯 했다. 그래도 옆에서 알려주면 곧잘……. 아카아시는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카아시 오늘 승진했다며! 우리 회식할까?”

“아뇨, 괜찮습니다. 혹시 부장님의 발령 축하 건이라면…….”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아카아시는 상대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말끔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휙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아, 혹시 편…….”


뒤에서 무언가 더 말하려는 목소리가 언뜻 들려왔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



그가 승진한 첫 날이기도 하고 새로운 부장이 오기도 해서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했던 아카아시는 우체통에 꽂혀있는 작은 엽서를 보곤 눈을 꿈벅였다. 그에게 엽서를 보낼만한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다. 우표에 찍힌 소인이 몹시 낯설었다. 


“아…….”


곧 돌아가니까

조금 있으면 다시 만나겠네요~!

술 한잔 해주세요!


네덜란드에서 보낸 엽서였고 보낸 사람은 보쿠토 코타로, 몇 년 전 그의 후임이자 지금 그의 새로운 부장인 바로 그였다. 글씨는 크고 둥글고 평소의 그에게서 엿보이던 어리광 비슷한 것이 엿보였다.


그의 후임이었다가 해외의 어딘가로 나갔다던 보쿠토는 그 뒤로도 몇 년간은 반년에 한 번씩 그에게 실없는 엽서를 보내 존재를 알려주었다. 바쁜 일에 치여 대부분 답장은 해주지 못했지만 보쿠토가 보내는 엽서는 꾸준했다. 그러다 그 엽서가 끊긴 것이 작년이었다. 


아카아시는 손에 쥔 엽서를 내려다보다 크게 쉼호흡하곤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이미 아파트 입구의 센서등은 꺼져서 새카맣게 어두운 천장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엽서를 쥔 손이 파르르 떨리고 빳빳했던 종이는 구김이 가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그 엽서를 다시 우편함에 쑤셔 박듯 집어넣고는 예정을 바꾸어 바깥으로 향했다. 


번화가 쪽의 술집에 홀로 자리를 잡고 제대로 된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술을 한 병 먼저 비워버렸을 때야, 아카아시는 아직도 자신에게 어딘가 순진한 면모가 남아있었다는 걸 인정하고야 말았다. 


이런 큰 기업에서 소위 말하는 높으신 분들의 사정으로 인선에 영향이 오는 것이야 이제는 당연한 일이다. 그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왔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가 못했던 것이다. 


“하…….”


아카아시가 탄식을 흘리는 사이에 안주를 내오는 점원이 빈 병을 보고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카아시는 점원에게 술을 한 병 더 주문하고는 증오스러운 표정으로 안주를 노려보았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감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심지어 자신의 부사수였던 남자가 그 특혜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더욱 부채질했다. 


자신도 이 나이에 차장을 단 것이 이례적일 만큼 빠른 속도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종종 오가며 혹시 위쪽과 혈연인 것은 아니냐고 숙덕거리는 것을 그가 들은 적이 있을 정도다. 


‘이제 그 소문은 싹 가라앉겠군. 좋은 일이 하나는 있어…….’


진짜배기가 나타나버렸으니, 이 나이에 차장 직급을 단 것은 이제 입방아 거리도 되지 못할 터였다. 아카아시는 점원이 새로 내어온 술도 금방 비웠다. 내일은 주말이지만 오늘 정리를 관두고 나온 일을 생각하면 출근해서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면 이미 과음이다. 하지만 평소처럼 절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쩐지 상무이사님 표정이 살갑더라니…….’


곧 다시 온다는 엽서에 자신을 반가워하는 보쿠토의 태도를 보면 보쿠토가 이미 자신에 대해 언급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술잔이 두 개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 아카아시는 자신의 차장 승진이 무척이나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너무 기가 막힌 타이밍이지 않은가? 보쿠토가 부장으로 발령받아 온 그날 차장 승진이라니. 어쩌면 그마저 보쿠토가 입을 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회장님의 장손이 눈여겨 보고 있다고 하니 위에서 끌어올려 주었다거나.


‘기분 더럽네…….’


승진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누군가가 말 한마디를 했기 때문에, 그건 상상 이상으로 기분이 나빴다. 얼마나 나쁘냐 하면 토하고 싶을 만큼.


아카아시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든 채 몸을 일으켰다. 숨에서 술냄새와 기름진 안주 냄새가 올라와 기분이 나빴다. 샤워하고 머리만 말리고 회사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항상 협탁 위에 둔 휴대전화를 찾아 손을 뻗는데, 협탁이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어 손이 쑥 내려갔다. 


“……!”


그대로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던 것을 이불을 붙잡고 겨우 버텼다. 아카아시는 이불 감촉도 아주 낯설다는 걸 깨달았다. 새하얗고 얇은 시트 안에 솜이불이 느껴진다. 이런 걸 본 적은 있었다. 호텔 같은 곳에서…….


“?”


아카아시는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더듬 쓸어내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창가로 드는 햇볕이 그의 상체를 선명히 비추는 중이다. 이때부터 저 햇빛은 모조리 남의 이야기인 듯이 피가 식기 시작했다. 이불을 들춰본다. 아카아시는 놀라서 허옇게 뜬 얼굴로 급하게 이불을 내렸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

“으음, 아카아시……. 깼어……? 더 자지, 피곤할……. 으음…….”


평범한 회사원 같지 않은 두터운 팔이 풀썩 그의 허리 위로 올라왔다. 아카아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팔을 내려다보았다. 아침인데도 굴곡이 선명한 팔이었다. 체온이 높은 팔은 열기를 품고 있다. 아카아시는 그 팔에서부터 천천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기분이었다. 


옆에는 그가 아닌 한 사람이 더 누워 있었다. 침구는 그의 몸을 겨우 반만 덮고 있었는데 위로는 등판이 아래로는 다리가 길쭉하니 뻗어 있다. 그리고 위도 아래도 이불을 제외한 천조각은 없었다. 아카아시는 이불 아래에도 그 외의 천은 없으리라 퍼뜩 생각했지만 차마 이불을 들춰볼 수는 없었다. 


다급하게 그 팔을 뿌리치고 나가서 주위를 훑어본다. 하지만 도무지 옷 같은 건 찾을 수가 없었다. 나뒹굴고 있는 속옷을 급하게 꿰어 입고 옷장을 모두 뒤져 새 셔츠 하나를 찾아냈다. 아카아시는 이게 어떤 경위로 있는 것인지  탐색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셔츠에 팔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바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으으음…….”


아카아시가 필사적으로 호텔 방을 샅샅이 뒤지는 사이에 침대에 누워있던 남자, 그의 예전 후임, 앞으로 그의 부장이 될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아카아시는 뻣뻣하게 굳어서 보쿠토의 기상을 바라보았다. 이불이 사르르 흘러내리고 그의 뒤로 오전의 태양이 빛을 흩뿌렸다. 막 방금 잠에서 깨어 부스스한 머리카락 조차 연출한 듯이 그림 같았다.


보쿠토가 눈을 부벼 뜨곤 그를 바라본다. 멀찍이 서 있는 아카아시를 인식한 보쿠토가 배시시 웃었다.


“아카아시, 잘 잤어? 일찍 일어났네……. 어젯밤에 피곤했지.”


아카아시는 졸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자율신경계는 도무지 그의 명령을 들어주지 않았고 호텔룸의 유리창을 투과한 햇빛은 찬란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