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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교환일기요.”


아카아시는 교복 셔츠의 단추를 채우며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두 사람 사이에 계속 이어지고 있는 ‘좋은 남자친구’ 교습은 대개 오후 부활동이 끝날 무렵 시작되었다. 보쿠토가 1학년 교실까지 그를 찾아오는 것을 아카아시가 무척이나 싫어했기 때문이다. 오후 부 활동이 끝나면 아카아시의 개인적인 토스 연습이—이라고 쓰고 보쿠토의 스파이크 연습이라고 읽어야 한다—시작되는데, 이 시간은 보쿠토와 아카아시 둘 뿐이라 남들 듣기에 부끄러운 교습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당이 떨어져 손이 흔들릴 지경이 될 때까지 가열차게 연습을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 아카아시가 불쑥 꺼낸 말에 보쿠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교환일기?”

“방금 생각났는데. 보통은 그런 것도 하던데요.”

“그 뭐냐……일기를 서로 바꿔보는 그런 거야? 일기…일기를? 너 일기 써? 진짜냐? 나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데.”


당연히 이쪽도 중학교에 올라오고 나서부터는 쓴 일이 없다. 보쿠토를 놀리려고 꺼낸 말일 뿐이다. 언젠가 보쿠토가 누군가와 사귈 때 교환일기 얘기를 꺼내는 날이 온다면 아주 즐거울 것이다. 자신이 그 정도의 즐거움은 누릴 자격이 있다. 아카아시는 모르는 척 헛기침하곤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노트 한 권에 번갈아 가면서 쓰는 거죠. 편지 교환 같은 느낌으로.”

“……얼굴 보고 말로 하면 안 되는 거야…?”

“말로 하는 건 사라지잖아요. 기록은 영원합니다.”

“뭐냐, 교환일기가 갑자기 경건해졌어…….”

“보통 남들이 못 보게 자물쇠 같은 게 달려 있는 걸로 하는가 보더라고요.”

“아니, 말로 해도 사라지지 않아! 남아 있어! 내 가슴 속에!”


보쿠토가 주먹을 불끈 쥐고 가열차게 말한다. 아카아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제가 엊그제 밥 먹으면서 뭐라고 했죠?”

“아?”

“것봐요, 그것도 벌써 기억이 안 나는데 뭐가 가슴 속에 남아있다는 건지…….”

“아, 아니! 밥 먹으면서 얘길 많이 했잖아! 힌트를 줘!”

“선배가 생각하는 거랑 다른 사람의 생각은 다릅니다.”

“나도 알아!”

“아뇨, 선배는 몰라요.”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사람도 있다는 걸 지금도 부정하고 계시잖아요. 아카아시가 콕 찝어 하는 말에 보쿠토는 반박하고 싶은지 입술만 달싹이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교복 차림이 아니었으면 바닥을 굴렀을 것이다.


“알았어…….”

“뭐가요.”

“교환일기! 알겠어!”

“뭐, 꼭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사귀면서 그런 걸 하는 경우도 있더라는 거니까요.”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을 맺고는 책가방을 챙겨 들었다. 보쿠토는 대단히 큰 결심을 한 것 같은 눈치였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놀리려고 한 말이라는 걸 알 텐데 보쿠토는 철썩같이 믿고 있다. 남들에게 사기당하기 딱 좋은 성격 아닌가, 아카아시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아카아시!”


보쿠토와의 ‘그 교습’은 항상 방과 후에 이루어져서, 오전 연습이 끝날 때 보쿠토가 그를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불현듯 엄습하는 불안함에 침을 삼켰다.


2학년 선배가 말을 걸어오니 아카아시의 동기들은 모두 아침 수업을 준비하러 먼저 들어가버렸고, 그건 다른 선배들 쪽도 마찬가지였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정리를 마치고 나자 남은 것이 보쿠토와 자신 뿐이다. 아카아시는 전력을 다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서 포기했다. 무엇이든지 간에 기어코 보쿠토는 자신에게 얘기하고야 말 것이므로.


“무슨…일이신데요?”

“이거!”


보쿠토가 설렘 가득한 얼굴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을 때 아카아시는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채도 높은 선명한 색깔의 패턴으로 이루어진 하드커버 노트, 옆에는 엄지손톱보다 작은 금속 자물쇠가 달려있다. 자물쇠의 열쇠 구멍은 하트 모양이었다.


“이…이게 설마.”

“아카아시가 사람 사귀는 건 나중에 해보라고 했으니까! 그 동안에 이거 연습 해보게!”

“근데 이걸 왜 제게.”

“교환이잖아, 교환. 혼자서 어떻게 연습하냐?”

“제가 왜…….”

“선생님이잖아?”


그딴 선생 억지로 밀어붙인 게 누군데! 하지만 아카아시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 보쿠토의 눈동자가 태양처럼 반짝반짝 빛나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반드시 이 ‘연습’에 응해주리라 믿는 듯했다.


‘사기에 당하기는 무슨!’


“내일 꼭 써와!”

“이걸 왜 지금 말해주는 거예요…….”


적어도 오늘 하루 정도는 즐겁게 지내고 싶었는데! 기분을 망치는 건 오후부터 해도 늦지 않은데! 아카아시의 억울함은 하나도 모르는 보쿠토가 와하하 웃으며 아카아시의 등을 팡팡 내리쳤다.


“아카아시가 안에 무슨 내용인지 궁금할까봐~! 다른 애들 몰래 봐야 한다?”


윙크를 저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실존 인물을 본 것이 처음인데도 감탄은 나오지 않았다. 보쿠토가 먼저 2학년 교실로 올라가고, 뒤에 남은 아카아시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남을 놀리려 했던 벌을 단단히 받는 기분이었다.


‘알고 하는 거 아냐?’


한 번 골탕 먹어 보라고? 거기까지 생각한 아카아시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보쿠토가 그럴 사람이 아닌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서였다.


*


보쿠토는 오늘 내내 교환일기의 내용에 대해 말하고 싶은 듯한 눈치였지만 아카아시가 단칼에 고개를 내저어 막았다. 어제 ‘교환일기이이~!?’라면서 질색한 사람이 누굽니까, 라고 따져묻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아카아시는 침묵을 택했다.


“아카아시, 왜 안 열어봐?”

“다른 사람 몰래 보라면서요…….”


오후 연습 내내 들뜬 기색 충만한 보쿠토를 보며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가 처져있는 것보다야 나았기에 다들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보쿠토가 왜 들떴는지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아카아시는 헬쓱한 얼굴로 토스를 올려야 했다. 가방 안에 있는 작은 노트를 생각하기만 해도 어깨에 철근을 매단 기분이 된다.


그 기분은 오후 부활동이 모두 끝나고,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개인적인 연습까지 끝나고 난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이었다.


“지금 애들 없잖아.”

“선배가 있잖아요.”

“에이, 열어봐도 되는데.”

“제가 선배를 인간으로 존중해드리는 몇 안되는 순간이니까 조금 더 즐기시는 게 어때요.”

“뭐!? 너 그럼 날 평소에 인간 취급 안 해줬던 거야!?”

“좀더 짐승에 가깝잖아요, 선배는.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에 한계가 있을 텐데, 이 사람은 그런 게 전혀 없는 눈치였다. 1학년인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럴 정도니까 벌써부터 3학년 주전들을 제치고 에이스 취급받는 거겠지. 아카아시는 간단하게 결론짓고는 부실을 나섰다.


“동물? 어떤 거!?”

“…….”


짐승이라고 했던 말은 어디로 갔을까.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말로는 보쿠토를 이긴 것 같았는데……. 기분은…….


“백…하얀색 고양이 같은?”

“엥, 고양이?”


보쿠토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거렸다. 호랑이 같은 듣기 좋은 말을 해줄까보냐, 아카아시는 속으로 다짐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보쿠토가 서둘러 따라왔다.


“알았어, 고양이! 고양이 할게! 고양이 할 테니까 우리 밥 먹고 가자. 배고파 죽겠다.”

“집에 가서 드세요.”

“나 집까지 가다가 쓰러져버릴거야.”

“…….”

“선배가 밥 살테니까 가자~!”

“됐습니다.”

“아카아시이이!”

“계산은 따로 하죠.”

“아? 밥 먹는 거야?”


고개를 끄덕였더니 보쿠토가 신이 나서는 두세걸음 앞서 달려나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는 뒤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미간을 모았다. 생각해보면 보쿠토는 원하는 걸 모두 손에 쥐었다. 배구부의 추가 연습도 결국 하게 됐고, 이 ‘좋은 남자친구’ 교습도 얻어냈고, 교환일기도 기어코 아카아시가 쓰게 하고, 저녁도…….


“짜증나…….”

“엥?아카아시? 나 뭔가 또 잘못했어?”


달려갔던 보쿠토가 금방 돌아와서는 아카아시의 표정을 살폈다. 아카아시는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보쿠토를 쳐다보다가 그의 뺨을 죽 잡아 늘렸다. 후배가 그런 짓을 하는데도 보쿠토는 아프다고 엄살만 피울 뿐 그 외의 말은 없었다.


“후, 개운해졌다. 밥 먹으러 가죠.”

“뭔데!? 뭐야!? 나만 이러고 너는 개운해지고!? 뭐였는데!?”

“집까지 걸어갈 기력도 없다셨으면서 에너지를 좀 아껴 쓰세요.”

“아카아시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