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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비행기는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까지 가는…….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짐들은 위쪽 보관함에 넣어 주시고 아울러 보관함을 여실 때에는 먼저 넣은 다른 짐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유의…….

—Cabin crew door side standby.

—Number two clear.


이륙하기 직전의 비행기 내부는 가장 소란스럽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등을 돌리자마자 성의 없는 표정으로 입가에 남은 과자 부스러기를 손끝으로 털어내곤 뒷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앞으로 약 열 두 시간은 열어볼 생각이 없을 물건이었다. 


동기En : 오늘 리유니온 못 온다며

동기En : 무슨 일 있어?

동기En : 아직 파리야? 지난주에 입국 했다지 않았나


그대로 답장 없이 휴대전화 전원을 끌까 했던 보쿠토는 잠깐 멈칫하고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얘가 누구였더라? ‘En’이라고 붙여놓은 걸 보면 영국에서 공부할 때 만난 녀석인 것 같은데, 까지는 생각이 나고 그 이상으론 가물가물했다. 그래도 번호를 저장해 놓은 걸 보면 의미가 있는 상대일 거였다.


나 오늘 출국


짧게 답장을 보내고 다시 휴대전화를 끌려는데 하는데 금방 메세지가 날아왔다. 


동기En :  어디로? 또 나가? 할아버님이 보내심?


이제는 귀찮음이 조금 더 커져서, 메세지를 확인하고도 답신 없이 바로 전원을 내리려 했던 보쿠토는 조부가 보냈냐는 문장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 부분은 괜히 찔려서 답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건 아니고, 독일 간다


이번엔 정말로 메세지를 보내자마자 바로 휴대전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로고가 뜨며 까맣게 물들어간다. 그걸 적당히 옆에 놓아둘 때 기내 안내 방송이 시작되었다. 여태껏 모든 방송을 귓등으로 듣던 보쿠토가 눈을 반짝 뜨고 허리를 폈다.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xx 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비행기는 프랑크푸르트까지 가는 xx 항공 789편입니다. 프랑크푸르트까지 여러분을 모실 기장은 타키자와 요시후미이며 저는 객실 승무원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프랑크푸르트까지의 비행 시간은 11시간 30분으로 예정하고 있으며…….


나직하고 단정한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감미롭기까지 하다. 보쿠토는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는 뱃사공마냥 기내 방송을 음미했다. 그리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흘러나왔다. 


—……기기는 탐승 시부터 도착 후 내리실 때까지 계속해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지금 확인하시고 전원을 꺼 주시기 바랍니다. 여행 도중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저희 승무원을 불러주십시오. 프랑크 푸르트까지 저희 xx 항공과 함께 편안한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이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보쿠토가 한 달에 700만엔을 흩뿌리며 기어코 비행기에 오르는 것은 아카아시의 바로 저 말을 듣기 위해서나 다름없었다.


방송이 끝나고 바깥을 향해 목을 쭉 빼고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면 벨을 누르거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곧 그의 담당 승무원—바로 아카아시 케이지가!—이 모습을 나타냈다. 


“손님, 곧 이륙이 시작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방금 전까지 스피커를 통해 부드럽게 울리던 목소리가 바로 눈앞에 있다. 보쿠토는 눈을 반짝이며 아카아시를 올려다보았다.


“점심은 언제 나와?”

“직선 비행을 시작할 35000피트 상공 궤도에 올라선 후에 나올 예정입니다. 외울 때도 되신 것 같습니다, 손님.”

“알지만 아카아시 목소리로 듣고 싶어서 그러지!”

“아, 네…….”

“있지, 아카아시~!”


이런 목소리로 부르면 청록색 눈동자가 윽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겨우 다시 돌아온다. 보쿠토는 장난기어린 웃음을 꾹 눌러 참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로 엉덩이 한 번만 만지게 해 주면 안 돼?”


그 뒤로는 아카아시가 가차 없이 움직였다. 그를 내려다보는 그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성큼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의 허리춤으로 팔을 뻗는다. 그 적극적인 공세에 되레 보쿠토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데 아카아시의 양 손이 좌석 벨트에 가 있었다.


달칵 소리 나게 버클을 맞춰 끼우고는 그대로 끈을 쭉 잡아당겨버린다. 보쿠토가 컥 소리를 낼 때에야 손을 놓은 아카아시가 산뜻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곧 이륙할 테니 안전을 위해 좌석 벨트를 매주셔야죠, 손님.”

“아, 아카아시! 너어!”

“이륙 할 때까지 의자도 바로해주시고요.”


보쿠토가 앉아있던 의자를 매끄럽고 격렬하게 바로세운 승무원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보쿠토는 그렇지 못했다.


“아카아시! 너 진짜 자꾸 그렇게 굴 거야!?”

“손님, 필요한 게 있으시면 또 불러주세요.”

“너 비행기랑 너랑 묶어서 사버린다!”

“저희 회장님은 거지에게 비행기를 기증하는 일은 있어도 귀사에 팔지는 않으실 거라 사료됩니다. 그리고 다른 손님들이 시끄럽다고 하시니까요, 쉿?”


아카아시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고 떼를 쓰려고 했던 보쿠토였지만, 아카아시의 검지가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누를 때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마냥 지고 있을 수만은 없다. 불만스런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노려보던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손을 입술로 깨물었다.


“보쿠-손님!”


아카아시가 억눌린 목소리로 작게 외치는 소리에 손가락을 놔준 보쿠토가 히쭉 웃으며 뒤돌아선 아카아시의 엉덩이에 기어코 손을 올렸다. 아카아시가 그의 손을 매섭게 쳐낸다. 


하지만 보쿠토의 표정도 금방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선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입술을 눌렀던 입술을 자신의 입술에 가볍게 갖다 대고는 사라지듯 커튼 너머로 몸을 숨겼다. 



*



아카아시는 A1석 옆에 서서 한숨을 꾹 눌러 삼켰다. 깨어 있을 때는 일곱 살 난 어린애마냥 요란하던 남자였는데 잠에 빠진 모습은 순한 양 같다. 아카아시는 몸을 기울여 남자의 좌석 옆으로 늘어선 세 개의 창문을 하나 하나 닫았다. 달칵하는 소리가 나도 남자는 깨지 않았다. 


덮을 이불을 펼쳐 어깨부터 발끝까지 덮어준 아카아시는 어둡고 아늑해진 시트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곤 몸을 바로 세웠다. 하지만 벗어나지는 못했다. 어느새 일어난 남자가 아카아시의 손목을 낚아챈 것이었다.


“……아카아시?”

“주무십시오, 손님.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으니까요.”


잠깐 잠이 들었을 남자의 목소리는 그 사이에도 잠겨 나직했다. 아카아시는 비행기가 이륙하고 난 뒤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시 남자를 뉘어주었다. 


“안 잘거야……. 아카아시, 일하러 가야 돼……?”

“아뇨, 여기 있을 겁니다.”

“응…….”


눈을 쓸어주자 다시금 잠이 든다. 손목을 잡아챘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아카아시는 그 손도 이불 안으로 넣어주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남자를 지켜보고 있다가 조용히 커튼을 치며 물러났다.


‘주무셔?’


바깥으로 나오자 동료 승무원이 자는 시늉을 해보이며 그에게 물었다. 아카아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좌석과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


“이 참에 올라가서 잠깐 쉬어요, 아카아시 씨.”


아카아시는 고개를 저었다. 언뜻 보자면 손님에게 시달리는 것 같지만, 막상 저 남자에게 붙들려있는 동안 아카아시는 다른 일을 하지 않게 된다. 


‘그걸 의도하고 하는 행동은 아니겠지만.’


동료 승무원과 승객들에게 나눠줄 간식 카트를 준비하며, 아카아시는 그의 손님이 있는 좌석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근처를 오가는 사람조차 없어 가려둔 커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요번에는 일찍 주무시네요.”


본래는 손님이 언제 자는지 깨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까지 떠들 리가 없지만 저 손님은 특별하고 또 유별나다. 이렇게 집약적인 일등석 탑승객, 승무원 중 한 사람만 해바라기 마냥 바라면서 다른 승무원들에겐 놀랄 만큼 무심하고 산뜻한 태도에 번듯한 외모와 체격 그리고 암암리에 알려진 집안까지 더해지면 모두가 한 번씩은 오며가며 떠들게 되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남자가 올라탔던 다른 비행을 떠올리고는 묵묵히 정리를 돕기만 했다. 이륙 시간이 제각각이었지만 워낙 자주 비행기를 탄 터라 얼추 가늠은 되었다. 


‘피곤한가?’


낮 열두시에 출발하는 비행기인데 벌써 곯아떨어질 만큼 피곤한 걸까, 아카아시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커튼이 차르르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카아시 맞은편에서 카트에 물품을 챙겨 넣던 승무원이 먼저 웃으며 아카아시의 뒤쪽으로 턱짓했다. A1석의 커튼이 열려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손짓도 보였다. 아카아시가 한숨을 내쉬며, 그 한숨 안으로 웃음을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승객 여러분, 이 항공기는 잠시 뒤 난기류를 통과할 예정입니다. 착석하셔서 좌석 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좌석 벨트 사인이 꺼질 때까지…….


안내 방송을 마친 아카아시는 비행기가 흔들릴 조짐을 느끼며 A1석 쪽을 바라보았다. 좌석의 남자는 자다 깨다 하기를 반복했는데 지금은 잠을 자는 중인 것 같았다. 승무원들이 지정된 자리에 자리 잡고 앉는 동안 아카아시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A1석을 향해 다가갔다.


“손님. 손님.”


그가 덮어주었던 이불을 걷어낸 아카아시는 몇 번 남자를 깨우는 시늉만 하고서는 남자의 허리 뒤로 손을 돌려 좌석벨트를 찾아냈다. 금방 답답하다고 풀어놓은 것이었다. 아주 꽉 죄지 않을 정도로 길이를 조정하고 다시 좌석벨트를 채우는 사이에도 남자는 깨지 않았다. 


다만 잠결이겠으나 그의 팔이 아카아시의 어깨를 스쳐 목을 끌어안았다.


“…….”

“으응, 아카아시…….”


자다 일어난 어린애마냥 손이 뜨끈해 스치는 목에 열기가 옮겨붙는 느낌이었다. 아카아시는 그 팔을 부드럽게 풀어 남자의 자리에 곱게 정리해주고는 다시 이불을 덮어주었다. 


난기류는 그의 마음에 든 것인가, 아카아시는 팔을 등 뒤로 뻗어 커튼을 끝까지 쳐두고서는 살짝 몸을 숙였다. 


어둑한 기내 안, 비상등의 조명만이 불빛의 전부인 순간 가장자리가 뭉그러진 그림자가 살짝 겹쳤다 떨어졌다. 



*



“그럼 사무장님, 아카아시~! 이따 또 만나!”

“안녕히 가십시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사무장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그리며 쾌활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야 귀국할 때에도 같은 비행기를 이용하게 될 테니 또 만날 것이겠지만 저 말을 마치 이웃집 친구와 인사하는 양 말하는 남자의 천진한 목소리가 제법 애교 있었던 탓이었다.


“저만큼 솔직한 사람도 드물어~!”


사무장이 은근한 내심을 담아 옆에 서 있는 승무원을 바라보았다. 열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저 남자를 전담했던 아카아시가 선배 후배 가릴 것 없이 머리채를 잡아버릴지도 모른다는 표정이 되었을 때야 사무장이 헛기침을 했다. 


“손님과 연애는 금지였지 않습니까?”

“뭐 몰래 하는 거지…….”

“사무장이 할 말입니까, 그게…….”


아카아시의 핀잔에 사무장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기내로 돌아간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내젓고 사무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비행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짐과 승객들을 모두 내리고, 비행기를 한 번 모두 둘러본 뒤 승무원들도 비행기에서 내려선다. 입국심사를 통과하고 숙소로 향하는 길에 올랐을 때야 아카아시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열었다. 읽지 않은 메세지가 서너 개쯤 되고, 아카아시는 그 중에 제일 위에 올라와 있는 메세지를 눌렀다. 메세지 수신 시간은 30분 전이었다. 


B.K : 아카아시 요기 하야트 603호!


아카아시는 하얏트 호텔의 위치와 자신의 숙소 위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다 한숨을 내쉬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론가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와 함께 형체가 점점 떠오르다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멀잖아요 거기

B.K : 여기가 좋다나봐……

잠이나 좀 주무시고 계세요

무리한 거 아니에요?

B.K : 그렇게 무리한 건 아닌데

B.K : 티났어?

기내에서 내내 잠만 자는데 티나죠

B.K : 이번에 아카아시네 회사가 완전 뒤통수쳤단 말야

B.K : 그거 수습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러니까 항공사 바꾸랬잖아요 

B.K : 또또

B.K : 아카아시두 괜히 좋으면서

B.K : 괜히 그런말 한다~!



힘들었으면 얌전히 집에서 쉴 일이지 굳이 자신의 비행 일정에 맞춰 비행기에 탈거라고 고집을 부리나, 아카아시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연인이 사랑스레 미워서 휴대전화만 노려보다가 액정의 빛을 꺼뜨렸다. 


곧 폭풍 같은 메세지 알람이 오기 시작하고 동료 승무원이 불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볼 때에야 아카아시는 한숨과 함께 다시 휴대전화를 손에 쥐었다. 


한시도 내버려둘 수가 없기로는 하늘 위나 지상이나 한결같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