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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가 보이는 아카아시와 인간 행세를 하고 있는 보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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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울부짖었다. 그 앞에는 나무로 만든 발이 너머에 앉아있는 어린 소년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소년은 말이 없다.  발 너머에서 비져 나온 소년의 긴 옷자락이 노인의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어떻게도, 어떻게도 아니되겠소?

—사람의 명은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뿐인 손자요, 내 어찌 포기하겠소!

—……하지만 태양이 뜰 것입니다.


발 너머로 소년의 작은 손이 노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작은 손이었던지라 얹은 것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주름진 눈이 일그러진 채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린 소년은 한 번 더 말했다.


—태양이 뜰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기다리세요. 아이답지 않은 나직한 목소리에는 온기가 있었다.



*



아카아시는 아주 오랜만에 쾌적하게 일어났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도심의 눅눅한 공기는 산속의 공기에 비하자면 쾌적하다곤 조금도 할 수 없었지만, 아카아시는 심리적인 쾌적함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머리맡에 도토리나 밤톨이 있지도 않았고 옷 천지에 꽃잎이 흩뿌려있지도 않다. 방문 밖에 동물의 시체가 있지도 않고 그의 앞에 엎드려서 말 한마디 들어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허튼 꿈을 꾸지도 않고 푹 자고 일어났는데 이보다 더 쾌적할 수 있을까! 


아카아시는 그대로 기지개를 한 번 켜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서는 식기가 달그락거리며 고소한 요리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카아시의 걸음소리를 들었는지 부엌 쪽에서 앞치마 차림의 남자가 한 손에는 국자를 든 채 나타났다.


“케이지, 일어났니?”


계단의 손잡이를 쥐고서 잠깐 멈추어 섰던 아카아시는 낯설지만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꾸벅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삼촌.”

“그래, 그래. 잘 잤다. 우리 케이지도 잘 잤어?”

“네. 숙모는요……?”

“출근하셨다. 오늘 회사에 큰 손님이 오셔서 준비할 게 많나다봐. 우리는 아침 먹자, 케이지.”


그의 숙부가 아카아시를 이끌고 원목을 통으로 잘라 만든 식탁 앞에 앉혔다. 린넨으로 만든 테이블 매트 위에는 청색으로 무늬를 그려 넣은 식기가 정갈하게 자리 잡았다. 


“넓은 집이 휑하다 했는데 케이지가 와서 너무 좋네.”


숙부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아카아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카아시는 이 사람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거의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의 조부가 그를 데리고 키우는 내내 산을 찾아와서 자신이 아카아시를 키우겠다고 했던 남자였다. 그의 조부가 미성년자 노동력 착취 중이었지만 친인척 중에서 아카아시를 데리고 나와 키우겠다고 말했던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케이지, 오늘 학교 가지? 떨리겠네.”

“조금요.”


아카아시는 숙부가 차려준 요리에 입을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일 긴장했던 것은 이 집에 오던 날이었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얼마나 요란한 괴물들이 살고 있을지 눈앞이 까마득했다. 그럼에도 오겠다고 생각했던 건 차라리 사람에게서 거리를 두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도시는 오히려 그가 지냈던 산보다 훨씬 더 조용하고 쾌적하다. 자잘한 요괴들은 물에 씻겨나간 듯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고요했다. 있다 해도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느낌이었고 섣부르게 요란을 피우는 녀석들도 없다.


‘평생 도시에서 살고 싶다…….’

“삼촌이 학교까지 태워주마.”

“괜찮습니다.”

“삼촌이 안 괜찮아서 그래. 꼭 한 번쯤 태워주고 싶었단다, 응?”


숙부의 간절한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아카아시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가 지내던 곳에 있던 요괴들이 그의 표정을 보았으면 저 아카아시도 약한 게 있다며 낄낄 그를 놀렸을 터였다. 감정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데 있어서 더딘 면이 없잖아 있는 아카아시에게, 대놓고 드러내 표현하는 이들은 언제나 적응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아카아시의 목이 살짝 붉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이지?”


아카아시가 승낙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의 숙부가 활짝 웃으며 기뻐한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인생에 저런 사람은 숙부 한 사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고작 한나절 만에 철회하게 될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


‘정말 아무것도 아무도 없네.’


아카아시는 책상에 앉아서 펜을 손에 쥐어보며 생각했다. 처음 보는 교사는 열심히 문장의 의미와 뜻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 설명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과 같은 이들도 몇 명 있다. 옆의 또래와 속닥거리고 있는 이들도 있다. 


아카아시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펜을 손 안에서 굴리며 창밖으로 교정을 내려다보았다. 드넓은 운동장에는 체육 수업을 진행 중인 학생들도 눈에 보였다. 공을 가지고 놀고 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달리 특별한 것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조용해…….’


말을 걸어오는 것들도 없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불쑥 그의 눈앞에 나타나 절을 하거나 혹은 죽이려고 달려드는 일도 없다. 깊은 바다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처럼 조용하고 안락했다. 태어나서 기억이 존재한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인 것 같았다. 


숙부와 숙모를 따라 산을 나오는 길에도 그런 그에게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들이 있었다. 도시로 가면 이보다 더할 거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래도 굳이 억지를 부려 숙부와 숙모의 손을 잡고 산을 나선 건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울며 매달리는 사람들을, 그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들,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죽어버리겠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여긴 정말 천국인가?’


그랬는데 그가 감수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은 전무했고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이 그를 맞이해주었다. 숙부와 숙모의 집으로 들어와 주위를 몇 바퀴 둘러보았지만 그 사이에도 그의 눈에 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격스러울 정도의 평안이었다. 이와 같기만 하다면 여기에서 평생 살고 싶을 정도다.


학교는 처음 와보았지만 생각보다는 즐거웠다. 그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은 똑같았지만 산에서와는 다르게 그 눈빛은 금방 사그러들었고, 그를 앞에 두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없고 우는 사람도 없었다. 또래 소년소녀들은 어색하지만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를 해주었고 교과서가 없는 그에게 책을 펼쳐 주기도 했다. 점심은 뒤에 앉은 친구가 함께 먹어주었는데 아침에 숙부가 싸주었던 그의 호화로운 도시락을 보면서 눈을 빛내기에 반찬을 함께 먹었더랬다. 


인생에 처음 맞이하는 평화를 두고서 아카아시는 마침내 말로만 들었던 ‘부활동’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보았다. 그의 지난 인생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던 건 앉아서 말하고 쓰고 읽는 것이었으니 부활동은 움직이는 것으로 해보고 싶었다. 주위에 빛나는 것들이 워낙 요란했던 터라 햇볕 아래에서 하는 것은 제외하고, 활은 한 때 죽어라 쏘았던 전력이 있어서 궁도 같은 것도 빼고, 이리 저리 추슬러보니 배구부 하나 남는다. 


“아, 배구부! 우리학교 배구부 진짜 세대. 작년에 진짜 대단한 선배도 들어왔다고 하더라.”


점심을 같이 먹었던 뒷자리의 반 친구가 그의 고민을 눈치 채고는 살갑게 말을 붙여주었다. 세거나 약하거나 하는 것은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니 금방 마음이 섰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바로 몇 시간 뒤에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할 줄 아는 궁도나 할 것을 그랬다고. 


*


배구부의 입부를 원하는 신입생 수는 상당히 많았다. 강호라더니 정말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야 그 모두를 아주 처음 보았지만 그들 가운데엔 서로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 듯했고 선후배간에 벌써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 


아마도 3학년 선배인 것 같은 사람이 신입생들을 데리고 준비운동을 지도해주었다. 익숙하게 몸을 푸는 아카아시를 보며 선배는 운동했던 적이 있냐고 묻기도 했다. 아카아시는 활을 쏴 본 적이 있다고만 짧게 대답했다. 


그 때까지는 아카아시의 몸도 마음도 살짝 들뜬 상태였다. 체육관에 와 보니 배구는 생각보다 재미있어 보이는데다가, 도쿄 한 복판은 모든 문명이 집결되어 있었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말 놀라울 만큼 인외의 것들이 눈에 띄지 않아 조용하다. 숙부와 숙모는 그를 애틋이 여겨주고 학교의 부활동까지도 즐거울 것 같으니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인 아카아시가 조금은 들뜨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같이 몸을 풀던 다른 신입생의 스트레칭을 도와주던 아카아시의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요한 순간이 바로 그 때 끝났다. 


“흐아아, 러닝 끝났습니다~!”

“2학년들! 왜 또 이렇게 늦었어. 보쿠토 너지!”

“우와아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축구부 자식들이~!”


체육관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달리기를 끝내고 왔는지 열기에 찬 인간들이 안으로 들이닥쳐 금방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들 가운데에 가장 목소리가 큰 소년이 3학년 선배의 꾸중에도 기 하나 죽는 것 없이 웃으며 따박따박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 악! 아카아시! 아, 아파! 아카아시!”

“어, 아, 미안…….”


아카아시 아래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소년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부원들의 시선이 쏠린다. 아카아시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사과하고는 얼른 물러났다. 


“아카아시? 괜찮아? 나, 난 괜찮으니까……. 내가 살짝 놀라서 소리쳤나봐, 미안해…….”

“아,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라…….”


스트레칭을 받던 소년이 우물쭈물 사과했지만 아카아시는 그것에 대답하지 못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거대한 힘의 덩어리가 이쪽을 향해 샛노란 눈을 뜨고 있는 게 느껴진다. 아카아시는 지금까지 저것을 눈치채지 못한 자신을 목졸라버리고 싶었다. 


“신입생들?”

“그래, 인마! 부주장인 보쿠토 네 녀석이 훈련시켜줘야 하는데 러닝에 또 정신이 팔려서, 응?”

“그게 아니라 축구부 놈들이 우리 뛰는데 공을 차잖아요!”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카아시는 이제 파리하게 뜬 얼굴로 주춤주춤 뒷걸음 질쳤다. 


‘어쩐지 조용하다 했어. 어쩐지 아무것도 없다고……!’


인간이 많다는 건 먹이가 많다는 뜻이다. 가장 인구가 밀집된 도쿄, 달리 말하자면 가장 먹을 게 많은 이 곳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엔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했는데 생에 처음 느껴보는 고요함에 취해서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도피했던 것이다.


깊은 바다에 몸을 파묻은 것처럼 고요했던 감각은 이제 심해의 수압으로 변해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숨을 들이마시고 최대한 다가오는 목소리에서 눈을 피한 채 뒷걸음질 쳤다. 


“응?”


쩌렁쩌렁 자신의 선배와 대화하며 오던 것이 고개를 갸웃한다. 아카아시는 침을 한 번 삼켰다. 부활동은 오늘로 끝이었다. 당장 그만둘 것이다. 아카아시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뒷걸음질이 조금 늦었고 그 기세 넘치는 것이 순식간에 다가와 아카아시를 붙잡았다.


“너, 신입생?”

“…….”


아카아시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샛노란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재밌는 것을 보는 듯이 익살맞은 표정에 역동적인 눈썹이 감정을 고스란히 표출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세운 머리카락은 은빛에 잿빛까지 섞여 몹시 눈에 띄었지만 어디로 보아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저 눈동자가.


금빛 눈동자가 순간 크게 뜨이더니 반짝 빛났다. 아카아시는 숨을 들이켰다. 저 눈을 하고서 어떻게 인간인 척 하고 있을 수 있지? 어째서 아무도 모르지? 아카아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것과 이렇게 가까이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너, 눈치 챘구나?”


인간이 아닌 주제에 마치 재밌는 걸 본 인간 아이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짓궂게 웃고 있다. 아카아시는 납빛이 된 얼굴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요거 확 잡아먹어버릴까?”


그리고 그 말에 당황한 아카아시가 그만 반사적으로 자신을 붙잡고 있던 그것을 그대로 엎어치기 해버리고 말았다.


콰아앙! 


커다란 근육 덩어리가 체육관 바닥에 그대로 내리꽂히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금빛 눈이 꿈벅이며 위를 올려다본다.


체육관이 지옥 같은 침묵에 잠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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