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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irthday to you, to me










“사랑을 위해서…….”


보쿠토는 자신 앞에 엉켜 널브러진 실과 두꺼운 대바늘을 내려다보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당신은 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보쿠토를 보고서 만년 어린애 같은 녀석이라고 평가하곤 했지만, 그것도 코트 위에서는 평이 달라졌다. 그리고 코트 위가 아니더라도 보쿠토에게는 나름대로 타인에겐 드러나지 않는 진지한 면이 있었다. 


가령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나?’같은 화두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점에서.


보쿠토는 이따금 자신이 마음을 둔 소년을 보면서 자신이 그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가늠해보곤 했다. 마음은 진심이었고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에는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무릎이나 어깨를, 혹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기꺼이. 


보쿠토는 자신의 생각을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아카아시를 대신할 만한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겨우 고등학생의 풋풋하기 짝이 없는 감상이라고 비웃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누구에게도 말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심지어 아카아시 본인에게조차—아무도 그의 생각에 대해 입을 대지 않았다.


보쿠토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냈던 건 정말 순전히 우연이었다. 


“헤, 신기하네…….”

“그래? 의외로 간단한데.”

“이거 해서 겨울에 두르고 다니는 거야?”

“아니, 남자친구 선물!”


교실 한쪽에 반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에 앉아있는 건 뜨개질을 하고 있는 소녀였다. 소녀의 손끝에는 한 뼘 가량 편물이 늘어져 있다. 소녀가 직접 뜬 것이다. 


“이만큼 뜨는 데 얼마나 걸려?”


보쿠토가 천진하게 묻는 말에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삼 일쯤 걸렸나?”

“힉……. 그럼 목도리 완성하려면 한참 더 해야 되네?”

“그렇겠지?”

“그냥 사는 게 낫지 않아?”


그 말을 한 순간 그 자리의 모두가 보쿠토를 휙 돌아보았다. 보쿠토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만드는 박력이 있는 눈빛이었다. 뜨개질을 하는 소녀만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이건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그런가…….”

“좋아하면 이런 저런 거 다 해주고 싶기도 하고. 보쿠토 군은 좋아하는 사람 없어?”

“있는데.”


보쿠토는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덤덤하게 수긍했다. 소녀가 조금 짓궂게 웃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보쿠토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좋아하는 상대에 아카아시를 대입했더니 자신이 좀 무신경하게 말한 걸까 하는 반성도 들었다. 


“보쿠토 군은 좋아하는 앨 위해서 이런 거 해주는 건 시간낭비 같아?”

“물론 아니지!”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조금 발끈해서 외쳐버렸던 것이다. 


“난 그 애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곧장 싸늘해지는 교실, 그리고 바로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지 않는 건 그의 맞은편에 있던 뜨개질 하는 소녀뿐이었다. 소녀는 처음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윽고 가늘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뜨개질은 못 해주겠어?”

“못해주는 게 아니라 한 번도 안 해봐서 그렇지……. 아 왜 웃어!”


보쿠토가 옆의 친구를 퍽 하고 때렸다. 맞은 친구가 안색이 변해서는 웃지 않았다고 손을 내젓는데 뜨개질 하던 소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의 편물을 들어보였다.


“보쿠토 군도 한 번 해 볼래? 목도리?”


그리고 보쿠토는 그대로 함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평상시였다면 이렇게까지 쉽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보쿠토에게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상대에게 마음을 고백해 본 적도 없다는 것, 남들에겐 처음으로 말한 그 애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친구들이 웃었다는 것, 특유의 호승심이 그 순간에도 제 역할을 다 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카아시 생일!’


한 달 뒤가 바로 그의 생일이었다. 


보쿠토로서는 그 순간 기세 좋게 ‘뜨개질을 하겠다.’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음이 담긴 편물이라는 것이 그 때는 어찌나 반짝이며 그를 유혹했는지 모른다. 동시에 이런 걸 받고서 감동할 아카아시를 생각했더니 그만 홀랑 넘어가 버린 것이다. 보쿠토는 그대로 반 친구의 손에 이끌려 대바늘과 실을 고르고, 코를 만드는 법과 뜨는 법을 배워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씻고 책상에 앉자마자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버리면서 어떻게 만드는 것이었는지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었다. 인터넷으로 무언가 찾아보려고 했지만 떠오르는 단어도 ‘뜨개질’이 전부, 무슨 뜨기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만 난다. 보쿠토는 좌절을 삼키는 얼굴로 실 뭉치와 대나무 바늘을 내려다보았다. 


‘아카아시가 기뻐하긴 할까.’


한 뼘도 뜨지 못했는데 옆선은 들쭉날쭉하고 무늬를 넣는 것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다. 이쯤 되니 한 달 안에 이걸 완성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보쿠토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 후배를 생각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손은 아래로 내려왔고 그의 표정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 후배의 첫인상은 새침하네, 였다. 목소리도 덩치도 큰 또래의 소년들 사이에서 갓 중학교를 졸업하고 와 말수도 적고 얄팍한 몸, 얌전히 서 있는 소년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새침한 후배가 그의 연습을 마지막까지 함께해주는 단 한 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다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의 후배는 필요 이상으로 달콤한 말을 해주는 일도 없고, 그보다는 오히려 매서울 때가 더 많으며 상대가 선배라고 져주는 일도 없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양보하지 않고 이기려고 하는데 어찌나 손속이 매서운지 모를 일이다. 학생 식당에서 만나기라도 하면 그가 자신이 아껴놓은 마지막 새우튀김을 홀라당 먹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동기들은 하나같이 둘을 보고 사이가 좋다고 했지만 보쿠토는 투덜거리기만 했었다.


그런 날이 이어지다가, 앞이 몽롱하고 정신이 들지 않는 것 같은 날이 있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다가 교실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 했을 때야 친구들이 열난다며 양호실로 그를 보냈다. 정신없이 잠에 빠져 누워 있다가 눈을 떴는데 가장 먼저 보인 건 청록색 눈동자였다. 후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그의 이마와 뺨에 손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다 이불을 덮어주고는 ‘조금 더 주무세요.’ 하고서 눈을 덮어주는데. 


보쿠토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다 지고 있는 늦은 오후였다. 푹 자고 일어났더니 몽롱하던 것도 어느새 사라지고 상쾌한 기분이 되었다. 배는 많이 고픈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돌아보는데 노을 속에 후배가 서 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평소에는 까맣기만 하던 머리카락에 노을의 붉은 광택이 부드럽게 돌아 전혀 모르던 보석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청록색 눈동자에도 그 따뜻하고 붉은 색이 물들어 있었다. 일어난 그를 보고 다가와서는 이마에 손을 한 번 대어보곤 열이 내렸내요, 그런 말을 하는데. 집에 돌아가자며 그를 바라보는데, 그 순간 보쿠토는 어쩐지 다시 열이 오르는 기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좋았다. 죽어라 연습하고서도 분해서 숨을 몰아쉬고 있으면 그러다 감기 걸린다며 대뜸 낚아채어 샤워실로 끌고 가는 후배의 그 손도 좋았고 무엇에도 욕심 내는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이기려고 악무는 입술도 보기 좋았다. 가끔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고 느끼는지 주먹을 꼭 쥐고 그를 노려볼 때도, 그 눈매마저 좋았다.


그토록 어른스러운데 귀엽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것도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하고 볼 때도 있었다. 가끔 운동화를 접어신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괜히 웃음과 장난기가 동해 뒤를 따라다니며 “아카아시, 신발 똑바로 신어야지~!” 하고는 귀찮아하는 그를 골려주곤 했다. 


해가 지나 새로 1학년이 들어왔을 때에는 심통도 났다. 자신에게도 후배가 생겼다며 항상 담담하던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반짝거리고 그의 앞에서도 딱딱하던 말투까지 후배에겐 물러지는데 마음이 틀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자신이 그를 보듯이 그가 다른 후배를 보게 될까봐 마음 상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이게 어떤 마음인지도 그 때 알았다.


아카아시, 좋아해! 


이런 말은 그에게 몇 번이나 했고 그 때마다 후배는 흘려듣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보쿠토는 굳이 그걸 붙들고 있지 않았다. 욕심낼 필요가 없었던 것도 같다. 사람은 만족한 것에 대해서 달리 무언가를 추구하지는 않지 않던가. 


그런데 덥석 실과 바늘을 사서 양손에 쥐어틀고 끙끙 앓게 된 것은  새삼 이제 곧 겨울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그와는 멀어지게 된다. 지금처럼 점심때마다 쉬는 시간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더는 없다. 


지금까지야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의 후배가 아직도 그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고 있는 것이라면 똑바로 말을 전해야 했다.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으아아아…….”


한 뼘도 뜨지 못한 편물을 들어본다. 


보쿠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있지, 손가락에서 쥐날 거 같은데 원래 그래?”

“…….”


소녀가 애잔한 눈길로 보쿠토의 편물을 바라보았다. 옆선과 코가 들쭉날쭉한 그것은 빈말로라도 그럴듯하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는데 그걸 손에 쥐고 있는 보쿠토가 한없이 진지했다. 체격이 강건한지라 보쿠토의 손에 있는 바늘과 앞에 놓인 털실이 장난감 모형 같기만 하다.


“음……. 쥐가 났었나……. 나도 처음 해볼 때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소녀가 어색한 말투로 애써 보쿠토를 위해주는 동안, 보쿠토는 털실과 바늘을 쥐고 악전고투하는 중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어제 했던  것보다는 검지 손톱만큼은 늘었다. 두 단은 더 뜬 것 같았다. 


“많이 했네.”

“그치! 어제 밤새 했어.”

“……밤새?”

“응, 자꾸 뭔가 모르겠지만 이상해가지구 풀었다가 다시 뜨느라…….”

“그렇구나…….”


소녀는 어쩐지 그 두 줄만 색이 진한 것 같은 편물을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보쿠토가 침울한 표정이 되어 소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좀만 더 힘내면 될 거야!”

“정말 될까…….”

“이런 건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보쿠토는 신의 음성을 듣는 사제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소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괜한 짓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만 이제 와서 그에게 ‘너는 진짜로 사서 주는 게 더 낫겠다’라는 말로 물릴 수는 없었다.


“그보다 보쿠토 군, 부활동 가 봐야하는 거 아냐?”

“아! 맞다! 아카아시!”


보쿠토는 몇 코를 더 뜨다가 소녀의 말을 듣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굴러 가려고 하는 털실에 바늘을 챙겨 가방 안에 쑤셔 넣고는 소녀를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을 벌컥 열자 복도는 벌써 학생들이 하교하고 돌아가 한산했다. 보쿠토는 서둘러 복도를 질주하다 로비 한 가운데에서 아카아시를 발견하곤 멈춰 섰다.


“보쿠토 선배.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의 후배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단정한 얼굴도 오늘은 조금 찌푸린 채다. 보쿠토는 아니라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아니! 아무 일 없었는데?”

“연락도 안 받으셔서 무슨 일 있나 했어요.”


연락? 보쿠토는 놀라서 품을 뒤졌다. 휴대전화는 무음으로 되어 있었다. 아카아시에게서 전화가 한 통, 메세지가 두 통 와 있다. 보쿠토는 허둥지둥 사과의 말을 읊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언제나 아카아시의 교실로 달려가 그와 함께 부활동에 가곤 했는데 갑자기 나타나지 않아서 걱정한 모양이었다.


“별 일 없는 거면 됐어요. 가요. 늦겠네요.”

“어, 으, 으응!”


보쿠토는 진땀을 쓸어 넘기며 아카아시와 나란히 걸음을 맞추었다. 그의 후배는 그와 보폭을 맞추어 걸어가며 오늘 있을 연습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장 봄고도 문제긴 하지만 내년도 걱정이네요. 감독님도 염려하시는 것 같고요. 내년 부주장도 생각해봐야겠어요. 아, 감독님께서 봄고 엔트리에 일 학년을 더 넣을까 하시던데 저는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습니다. 선배네 대학 입학처에서 오신 분과 하신 얘기는 잘 됐습니까?


“아?”


아카아시가 하는 말을 끄덕끄덕하며 듣기만 하던 보쿠토는 마지막 문장에서 아카아시가 자신을 쳐다보았을 때에 맹한 표정으로 반문하고 말았다. 아카아시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 얘기 안 들으신 겁니까?”

“아, 아니! 아니 다 들었지. 들었는데……. 입학처 사람?”

“오늘 점심 때 대학 입학처에서 보쿠토 선배 보러 왔다고 했었잖아요.”

“아, 그랬지…….”


그런 일이 있었지, 뜨개질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다. 보쿠토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Y대에서 왔는데 자기네 대학 들어오라 그러더라고.”

“그래서요?”


기실 입학처에서 고등학교 3학년인 학생에게 찾아왔으면 할 얘기란 뻔했다. 보쿠토는 머리카락 끝을 잡아당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해보겠다고 했지. 바로 정하긴 좀 그래서.”

“조건은 들어보셨어요?”

“조건?”

“학비는 어떻게 해주는지, 필요한 실적은 있는지, 추가지원은 달리 뭐가 있는지 그런 거요.”

“아……. 뭐라 뭐라 말하긴 하던데 그게 다 그런 거였나?”

“선배.”

“아, 아니. 막 이상한 얘길 하길래~! 나는 잘 모르겠고 그래서.”


보쿠토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연락이 온 Y대는 그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대학이었고 진학 의사도 있었는데, 금전적 지원 같은 문제는 그에게는 불필요한 부분이었던지라 건성으로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버릇 잘못 들면 나중에 정말 잘 들어둬야 되는 문제에서도 대충 넘어가게 된다고 제가 말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했어요……. 아! 뭔가 팸플릿 같은 거 줬어! 그거 있어!”

“어디 봐요.”


보쿠토는 허둥지둥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급히 집어넣었던 털실을 발견하고는 턱 하고 다시 가방 문을 닫았다. 옆에서 후배가 바라보고 있는 걸 알지만 차마 다시 열 수는 없었다.


“까……깜빡했나보다, 교실에 있나봐…….”

“시간 날 때 한 번 확인해보세요. 부모님께도 여쭤보시고요.”

“으응, 알았어…….”


괜히 잘못한 것 같기도 하고 한 소리 들은 느낌이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으려니 아카아시가 잠깐 침묵했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응?”

“진학 어떻게 할지 결정하시면 말씀 해주세요.”


선배가 보나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시곤 깜빡했다고 할 게 뻔해서 미리 말하는 거예요, 아카아시가 그렇게 말하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약속하고 확답을 받아내겠다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보쿠토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곤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다, 당연하지! 엄마 아빠한텐 말 안 해도 아카아시한테는 할 거라고!”

“아니, 부모님께는 말씀 드리라니까요…….”


보쿠토가 버럭 외치는 소리에 아카아시는 핀잔을 던지면서도 그렇게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등 뒤에서 와락 목부터 끌어안아 기대자 똑바로 걸어가라며 투덜대기는 했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장래 희망이 뭐야?”

“건물주요.”

“…….”


시무룩한 얼굴로 서포터를 고르며 물었던 보쿠토는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아카아시를 돌아보았다. 옆에서 서포터 고르는 것을 지켜봐주고 있던 아카아시가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주말의 번화가는 그 이름 그대로 사람들로 가득 차 북적거리고 있다. 오래 사용해 늘어진 보쿠토의 서포터를 구매하려 함께 나왔던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바꿔보고 싶다고 말했던 서포터를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세계 평화를 추구할 나이는 지났잖아요. 갑자기 왜요? 집에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니, 며칠 전에 그……. Y대 그거 있잖아. 그거 부모님이랑 얘기 했거든.”

“그런데요?”

“나도 좋고 조건도 좋고 부모님도 다 좋다는데…….”


보쿠토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답지 않은 모습에도 아카아시는 흔들림 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근데 부모님이 좋다고 하시면서도 바로 결정하지 말고 자꾸만 생각을 해보라는 거야. 장래를 결정할 중요한 일이라고……. 근데 좋다며? 뭘 더 생각하라는 거야?”

“…….”

“장학급도 다 준대! 생활 지원 어쩌고 뭐도 해준다고 하고 다른 조건 필요 없이 와주기만 하래잖아. 좋은 거 아냐? 나도 좋은데 엄마 아빤 자꾸 뭘 더 장래 어쩌고 미래 어쩌고 생각해보라고만 하고. 그래서 내 꿈이 뭔지 생각해봤는데!”

“네.”

“난 꿈을 생각해 본 적이 없더라고…….”


침몰당하는 게 이런 기분인가,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서포터를 양손에 든 채 그렇게 생각했다. 보쿠토는 분하기까지 한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덤덤하게 말했다.


“선밴 앞만 보고 돌진하는 타입이니까요. 그렇다고 미래에 대해 아무 생각도 안 해봤을 거라곤 생각 못했지만.”

“생각을 안 한건 아냐!”

“무슨 생각을 하셨는데요?”


보나마나 아침부터 밤까지 배구연습하고 며칠에 한번 꼴로 상대팀을 깨부수는 삶이겠지, 아카아시는 단조롭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시간이 지나도 보쿠토가 말이 없자 고개를 갸웃했다. 보쿠토는 왠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

“아침에도 아이스크림 먹을 수 있게 되겠지 라고?”

“…….”

“아, 아앗, 농담! 농담이고! 아카아시 진정해! 농담이었어! 농담이고! 그냥 막연히 당장 하고 싶은 건 배구니까 배구 하는 것만 생각했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는 그 ‘앞으로’가 와 봐야 아는 거 아니냐고.”


보쿠토는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똑같은 서포터를 집었다 놓았다 하기를 반복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걸 생각해보느라 많이 심란했던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어쨌든 지금 하고 싶은 게 배구라면 그냥 그걸로 하시면 되겠네요. 국내에 있는 대학 중에서는 큰 일이 없는 한 Y대 거기가 제일 낫기도 하고…….”

“그치만!”

“?”


보쿠토가 뭔가 마음이 걸리는 얼굴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아시가 고개를 갸웃할 때 양손을 꼭 움켜쥔 보쿠토가 외치듯 말했다.


“그치만 나중에는 뭐 먹고 살아!?”

“……그런 고차원적인 걸 고민하셨을 줄은…….”

“아카아시는 걱정도 안 돼!?”

“걱정이 돼서 꿈이 건물주인 건데요.”

“아.”


보쿠토가 힘주어 쥐고 있는 손가락을 하나 하나 풀어서 서포터 두개를 양손에 쥐고 보쿠토에게 선택을 강요한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고른 것 하나를 챙겨들고, 자신이 사용할 쿨링 스프레이도 고른 다음 계산을 마쳤다. 그 때까지 보쿠토는 맹한 얼굴로 아카아시를 따라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늦가을의 서리 같은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옷깃을 추스른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옷 단추도 채워주곤 그를 이끌고 자주 가는 경양식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햄버그 스테이크와 리조토 따위를 넉넉하게 시키고 난 뒤에야 아카아시는 입을 열었다. 


“운동선수로 돈을 벌면 그 돈으로 노후까지 지내는 거죠. 중간에 코치나 감독 일도 할 거고. 교사가 될 수도 있다니까 교직 이수도 해놓으시면 좋고……. 보쿠토 선배면 뭐 광고를 찍거나 하실 수도 있고요. “

“광고?”

“…….”


이건 왜인지 곧이곧대로 말해주고 싶지 않다. 아카아시는 살짝 입을 다물고 물을 따랐다. 보쿠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걸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부모님도 그런 걸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은 아닐 거고요.”

“그럼 뭘 걱정하신 거야?”

“보쿠토 선배가 진짜 원하는 일을 하셨으면 하는 거죠. 기왕이면 좋고 편한 길로요.”

“그럼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 이거다 싶으면 그걸로 결정해도 되는 거야?”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가만 바라보았다. 어지간히도 진지하게 고민을 한 것인지 심각한 표정이었다. 전에 없이 애를 쓴 듯이 얼굴에도 언뜻 피로가 엿보인다. 아카아시는 뺨을 매만졌다.


“그래도 뭐든 실행하기 전에 주위에 한 번 얘기는 하시고요. 지금처럼.”

“말하면 돼?”

“딱히 되고 안 되고 그런 게 아니라……. 아, 누가 보증 서달라고 하면 그건 진짜 말하셔야 돼요.”

“아무도 나한테 보증 서달라곤 안해, 아카아시…….”

“어쨌든요.”

“그래서 얘기하면 그걸로 딱 결정을 해도 되는 거야? 빠르게, 바로, 상관없어?”


아카아시는 여기서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보쿠토의 회로는 견고하고 직선적이어서 한 번 명령어가 잘못 입력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잘 해야 했다. 


“신중하실 수 있는 데까지는 신중하게 선택하고 고르고 하시고요. 충분히 신중했다 싶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괜찮은 거지?”

“신중하게 생각하실 수 있는 곳까지는 고려하시고요. 생각하시고요. 그 다음에요.”


뭔가 실수를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보쿠토의 눈동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마음을 다잡고 ‘저한테라도 꼭 뭔가 얘기는 하세요.’라는 말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뚜둑!


“아악!”


보쿠토는 꿱 비명을 질렀다. 그의 손 안에서 두꺼운 대나무바늘이 반으로 부러진 채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꾸만 코가 엉키는 기분에 힘을 준다는 게 잘못 한 것인지 바늘이 그대로 두 동강이 났다. 보쿠토는 기가 막힌단 얼굴로 편물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다 한숨과 함께 조심조심 부러진 바늘을 빼냈다. 그리곤 익숙하게, 책상 옆의 바구니에서 새 바늘을 꺼냈다. 대바늘을 부러뜨린 것도 벌써 세 번째였다.

바늘을 다시 코에 끼워 넣은 보쿠토는 빠진 것이 없나 확인해보곤 한숨과 함께 손을 놓았다. 시간은 째깍째깍 달려가는데 편물은 겨우 두 뼘째였다.


‘장갑을 한다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실과 바늘로 원통형 구조를 뜬다는 건 보쿠토에겐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지금 이만큼 해낸 것도 그에게는 감격스럽기 그지없다. 보쿠토는 익숙하지 않은 대바늘을 쥐고 고군분투하느라 저린 손을 주무르며 잠시 편물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 보쿠토는 의자를 밀어 책꽂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장 근처에 꽂혀있는 노트가 한 권 있다. 보쿠토는 손을 한 번 털어 옷깃에 슥슥 닦고는 노트를 꺼냈다.


노트는 그의 평소 필체와는 다르게 단정하고 정갈하게 쓰여진 것이었는데 온통 보쿠토 코타로 그에 대해 적혀있었다. 보쿠토가 지난 그의 생일날 아카아시에게서 받은 것이다. 보쿠토는 풀어지려는 입매를 꼭 다잡고 노트를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겨보았다. 몇 번이나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다른 식으로 새로웠다. 


—A에 몰두하면 B를 잊는 경우가 종종 있음. 머리를 비울 것!

—컨디션에 따라 기량의 격차가 큰 편. 팀원의 상성이 중요

—현재로서는 Y대, B대, C대 추천

—일지 나만 써…….


중간 구석 즈음해서 작게 적혀있는 낙서는 작성한 아카아시 본인도 눈치 채지 못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이걸 줄 생각은 아니었다고 말했기도 했다. 이런 낙서는 제법 여기저기에 적혀 있었다. 


—오늘 경기 서브 대단

—평소에 도대체 어떤 식으로 체력 쌓는 거지? 이해가…….

—이너스파이크 성공. 뭐 다 가졌냐 사람이…….


보쿠토는 마지막으로 읽은 낙서에 손끝을 가져다댔다. 다 가졌다니,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게 하나 있어서 지금 이렇게 대바늘을 손에 쥐고 악전고투하며 뜨개질을 한 단 한 단 쌓아 올리고 있는데. 제일 손에 들어 와주지 않는 사람의 낙서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노트를 들어 올려 본다. 실내 조명의 빛에 닿은 노트는 살짝 오래된 감이 있다. 보쿠토는 거기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가 금방 얼굴이 달아올라서는 팔만 격렬하게 흔들다 침대로 몸을 던졌다. 


갑자기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하게 된 건 ‘장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의 일 같은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눈앞에 당장 닥친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코트도 상대팀도 아카아시도 배구공도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랬는데 불현듯 깨달았던 것이다. 지금 이 고민은 그만의 것이다. 내년이 되면 아카아시는 여전히 고등학교에 남아있는데 자신만 떠나게 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그 이후에 다시 일 년이 지나면?


그 때는 아카아시도 고등학교를 떠날 것이고 지금의 그가 하고 있는 고민도 하게 될 것이었다. 앞선 일 년은 어쩔 수 없다. 그가 먼저 떠나는 것이니까, 참아야 할 사람도 보쿠토 자신이다. 하지만 그 다음 해는 아카아시의 선택이었다. 아카아시의 미래였다. 


‘건물주…….’


아카아시의 꿈이 건물주 같은 거였을 줄이야! 보쿠토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건물? 빌딩 같은 걸 말하나? 아니면 빌라? 건물을 사주면 되나?  어디에 있는 걸로? 몇 층이나 돼야 하지? 얼마쯤 하지? 얼마나 벌면?’


부동산 쪽으로는 접근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막막하기만 하다. 보쿠토는 한참을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일어나 앉아 머리를 싸맸다. 사실 지금 건물 가격을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미래에 건물이 있어도 받아줄 사람이 곁에 없으면 아무 짝에 쓸모없는 일이다. 


보쿠토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다 뽑혀 나온 머리카락을 툭툭 털어내곤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대바늘과 털실을 손에 쥐었다. 하물며 고작 목도리 하나에도 순서가 있어서 바닥부터 차곡차곡 한 단 한 단 떠올려 가야하지 않던가? 그의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이 목도리를 떠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먼저다. 


보쿠토는 크게 심호흡을 하곤 조심조심 바늘을 움직여나갔다. 





“선배 요즘 밤에 안 주무시고 뭐 하시는 거 있습니까?”


여기서 대뜸 ‘어떻게 알았어!?’라고 외칠 뻔했다. 보쿠토는 퀭한 눈으로 돌아보았다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아카아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아침연습이라곤 해도 평소엔 항상 쌩쌩했던 사람이 답지 않게 피로한 듯 굴고 있으니 걱정이 된 것 같았다. 


“아,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내가 네 생일선물을 마련한다고 이렇게 힘내고 있다고 생일 한참 전부터 말할 수야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한참 전도 아니지만! 사실은 코앞이지만! 그래서 밤잠 줄여가며 뜨고 있지만!’


하다보면 조금은 능숙해질 법도 했는데, 다른 건 다 그렇게 금방 금방 익숙해지곤 하더니 뜨개질만큼은 조금도 익숙해질 기미가 없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새 바늘을 갈아치우고 있었고 벌써 다섯 번째 같은 대바늘만 사가는 그를, 털실 가게 주인도 이제 슬슬 미심쩍은 얼굴이 되어 쳐다보고 있었다. 보쿠토는 다음 여분 바늘은 같은 반 친구에게 부탁해두었다. 그가 뜨개질을 시작하게 만든 주범인 그 소녀는 이미 벌써 목도리를 다 완성하고 그를 도와주기만 하고 있기도 했다. 


‘오늘도……. 헉, 맞아! 오늘도!’


퍼뜩 정신을 차린 보쿠토는 피곤에 절어 미적미적 짐을 챙기던 손길에 속도를 붙였다. 아침 부활동이 끝나면 반 친구가 편물 뜨기를 도와준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옆에서 아카아시가 쳐다보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급했다. 아카아시의 생일이 코앞이었던 것이다. 


우당탕 뛰어서 부실을 나가 교실로 올라가자 조금 일찍 등교한 같은 반 소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보쿠토는 숨을 몰아쉬며 급히 사과의 말을 토해냈다.


“미, 미안! 아침 연습 끝나고 바로 왔는데!”

“나도 숙제하고 있었어. 보쿠토 군, 많이 떴어?”

“어제 좀 열심히 하긴 했는데…….”


보쿠토는 금방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되어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들고 소녀 앞에 앉았다. 보쿠토의 말대로 그의 손에 들린 편물은 제법 길이감이 생긴 차였다. 목에 한 번은 두를 만했다. 


“어제 또 바늘이 부러져가지고……. 원래 이렇게 자주 부러져? 소모품이야?”

“……그, 그럴지도……. 일단은 나무로 만들어진 거니까…….”


소녀는 자신은 한 번도 대바늘을 부러뜨려본 적이 없다는 말도, 쇠로 된 대바늘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도 꾹 참았다. 그 사이에 보쿠토는 진중한 얼굴로 그녀 앞에 편물을 펼쳐보였다. 


“아, 뭔가 궁금한 게 있댔지. 어떤 거야?”

“여기 처음 부분 있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보쿠토의 표정은 심각했다. 소녀는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되어 보쿠토가 가리키는 부분을 쳐다보았다. 보쿠토가 처음 대바늘을 쥐고 떠올렸던 목도리의 초반 쪽이었다. 코도 고르지 않고 옆선도 울퉁불퉁하다. 실의 색깔이나 광택도 들쭉날쭉한 건 몇 번이나 거듭 풀었다 다시 떴다 하길 반복해서였다.


“처, 처음 부분은……. 보통은 다 그래. 막 특별히 이상한 건 아니야.”

“어떻게 고칠 수는 없을까?”


보쿠토가 간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소녀는 입을 꼭 다물고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 떠버리고 난 뒤에? 편물을 고치고 싶다고?


“실을 다 풀어서 처음부터 새로 뜨는 수밖에는…….”

“시, 시간 없는데.”

“그런데 막 심하게 이상하진 않은데?”


사실 심하게 이상한 편이기는 했지만 소녀는 보쿠토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곱게 말해주었다. 보쿠토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정말이야, 심하게 이상한 건 아니고……. 아! 다 뜨고 나서 술을 달거나 하면 좀 괜찮을 것 같아.”

“술?”

“그러니까 털실을 여러가닥으로 모아서 만든 장식 같은 거……. 커튼이나 카펫 가장자리에 이렇게 있는 거 있잖아.”

“아! 그렇구나, 그거도 할 수 있어?”

“그건 간단하니까 다 뜨고 나면 도와줄게.”

“응…….”


보쿠토가 진중한 표정으로 다시 대바늘을 양손에 쥔다. 건장한 체격의, 소년이라기보다는 이미 청년에 가까운 보쿠토에게 대바늘과 털실은 깜찍한 장식품처럼 보였다. 소녀는 보쿠토가 뜨기 편하도록 말려있는 털실을 풀어주다가 보쿠토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아카아시가 좋아할까…….”

“…….”


소녀가 허옇게 뜬 얼굴로 ‘아카아시? 너희 부주장 그 아카아시 말하는 거야? 네가 매일 찾아가는 그 아카아시? 그래서 우리 반 애들 전부가 이름을 알고 있는 그 후배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른 채, 보쿠토는 아침 수업종이 칠 때까지 뜨개질에 열중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한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야…….”

“도 닦냐?”


보쿠토가 오후 연습이 끝난 체육관 바닥에 드러누워 중얼거리는 말에 곁을 지나가던 코노하가 툭 말을 던졌다. 보쿠토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허허롭게 웃음 짓기만 했다. 


그것도 잠시, 벌떡 일어나더니 팔을 휘저으며 스파이크 연습을 하자는 보쿠토의 외침이 체육관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동기들은 물론이고 후배들까지 안색이 변해서 누가 쫓아내기라도 하는 것 마냥 짐을 챙기는 동작이 빨라진다. 그 가운데에 여유가 있는 건 딱 한 사람, 아카아시 케이지였다. 


코노하는 동정을 담아 한 살 어린 후배를 바라보았다.


“너도 참 어련하다. 저걸 다 해주고.”

“어차피……. 얼마 안 남았잖아요.”


아카아시의 말에는 묘한 쓸쓸함이 아무도 모르게 숨겨져 있었지만 3년 내내 태양 같은 보쿠토의 곁에서 지내느라 남달리 눈치가 비상해진 코노하의 눈을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코노하는 마냥 어른스러워 보이는 후배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보다 키가 큰 후배였던지라 팔을 조금 뻗어야 했지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저 녀석이 딱 저 짝이겠네.”


언제나 큰 목소리로 요란하게 체육관을 종횡무진 하던 한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면 그 허전함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이 후배는 그 요란한 녀석과 내내 붙어 지냈던 차였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긴 하네요.”

“응?”

“이제 부일지 제가 안 쓸 거니까요.”


내내 부일지를 쓰게 했던 것에 아무래도 한이 맺힌 듯 후배의 목소리가 정교하게 갈려있다. 코노하는 컷흠 하고 헛기침하며 어색하게 웃다가 후다닥 체육관에서 도망쳤다. 


“아카아시~! 토스 올려줘!”

“…….”

“왜, 왜? 왜 그렇게 봐? 뭐 묻었어?”


오후 연습이 끝났다고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빠지고 난 뒤, 코노하까지 도망치듯 모습을 감추기가 무섭게 보쿠토가 토스를 졸라댔다. 아카아시는 괜히 뚱한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일지를 일 년쯤 더 써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하다니.’


죽어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가능하다면 무덤까지 가지고 가고 싶다. 보쿠토가 있어주기만 한다면 까짓 일지쯤이야 몇 년이고 더 쓰겠다는 생각을 했단 걸 보쿠토가 알게 되는 순간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카아시……? 많이 피곤해……? 오늘 쉴까?”

“피곤하신 건 선배 쪽이겠죠.”

“엑. 아, 아닌데.”

“눈 밑에 그늘이 이만큼 내려왔는데요.”


쏘아붙이는 말에 보쿠토가 깜짝 놀라서는 체육관 출입문이 있는 쪽 벽에 달려있는 거울을 향해 달려갔다. 아카아시는 팔을 뒤로 돌리고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밤잠을 설치기라도 하는 걸까.’


짐작이 가는 것이 딱 하나 있기는 하다. 요 근래에 보쿠토가 갑자기 장래 문제로 고민을 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누자면 아마도 둘러갈 여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쯤으로 나눌 수 있을 텐데, 보쿠토는 전자 쪽이었다. 그러니 사실은 그가 무얼 어떻게 어떤 선택을 해도 상관없겠지만 기왕이면 어딘가에서 실패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여 쓴맛을 보기 보다는 달고 온전한 길로 가기를 바라는 것이 마음 준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심리였다. 그래서 신중히 선택하라 말을 했던 것인데.


‘설마 밤새 그렇게 신중하게 고민하시는 건 아니겠지?’


하나에 몰두하면 정신없이 빠져드는 사람인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오후 부활동이 끝나고 하는 이 추가연습을 3년 내내 한 번도 빼먹지 않은 사람이었다. 얼굴만 봐서는 있는 요령 없는 요령 다 부리게 생겼으면서 사실은 결벽할 만큼 끈질기게 성실하다.


‘차라리 그냥 이거다 하고 느낌이 오는 걸로 찍으라고 할 걸 그랬나?’


맹수의 특권인지 묘하게 감만은 좋은 사람이라 아주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을 텐데,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감추었다. 보쿠토가 이대로 못생겨지면 어떡하냐며 울며 뛰어왔기 때문이었다. 





“다……다 떴다!”


보쿠토가 마지막 코를 덧씌우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고, 그 소리에 자습하라 이야기했던 교사도 반 친구들도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보쿠토의 손 위에서 빛나는 편물을 바라보았다. 


살짝 푸른 빛이 도는 회색 털실로 짜낸 단순한 무늬의 목도리였다. 딱 한 번을 겨우 여유 있게 감을 수 있을 듯 짧은 것 같았지만 반 친구들 중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되레 모두 감격한 얼굴이 되어 울먹거릴 뿐이었다. 보쿠토가 저 목도리 하나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이 교실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때마침 학교 수업이 마치는 종이 울리고, 친구들이 모두 보쿠토의 등을 한 번씩 토닥거리고서는 교실을 나선다. 보쿠토는 곧장 자신의 뜨개질을 도와준 소녀 앞에 앉아서 완성한 목도리를 내밀었다.


“수, 술 다는 것 좀 가르쳐줘!”


잠시 육아의 감동에 대해 곱씹고 있던 소녀는 보쿠토가 내민 목도리와 얼마 남지 않은 실을 내려다보며 고심했다. 실이 많지 않아서 목도리의 양쪽 끝에 모두 술을 달기에는 무리인 것 같았다.


“보쿠토 군, 이렇게 끝을 모아서 도톰한 술을 하나씩 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 그러면 첫 부분 마감이 맘에 들지 않는 것도 감출 수 있을 것 같아.”


소녀의 제안에 곰곰이 생각해보던 보쿠토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보쿠토에게 술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양끝에 큼직한 술을 하나씩 달고 나자 정말로 목도리가 완성되었다. 보쿠토가 또 감격했다.


“날짜에 맞추다니……. 기적인가봐…….”

“보쿠토 군이 애썼으니까 그렇지. 아카……그 애도 좋아할 거야.”

“정말 좋아할까!? 건물도 받아줄까!?”

“…….”


소녀는 보쿠토의 문장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됐는지, 그 건물이라는 것은 갑자기 어떻게 튀어나온 것인지 지적하기보다는 애매한 얼굴로 웃으며 응원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저 별처럼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보쿠토의 귀에 들리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 때 교실 뒷문 쪽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은 듣기 드문 소리라 남아있던 몇 되지 않는 학생들이 모두 뒤를 돌아본다. 뒷문에 서 있는 사람은 보쿠토의 배구부 후배, 그리고 이 반의 모두가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아카아시 케이지였다. 


평소에는 인상적일 만큼 단정한 차림새인데 오늘만은 단추도 하나 풀려있고 타이도 느슨했다.


“아, 아, 아카아시! 아카아시! 잠깐만! 잠시만!”


온몸으로 책상 위를 덮은 보쿠토는 교복 상의로 목도리를 감추고는 서둘러 책가방을 챙겼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거동이었는데 희끗한 얼굴의 후배는 특별히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관심을 가지는 기색도 없이 멀뚱히 서서 그를 기다릴 뿐이었다. 


목도리를 가방 깊숙이 집어넣은 보쿠토는 소녀를 향해 입술을 벙긋거려 들리지 않는 감사 인사를 전한 뒤 후배와 함께 발걸음을 맞췄다.


“오, 오늘은 아카아시가 왔네.”

“항상 선배가 먼저 와 주셨으니까요. 이런 날도 있어야죠.”

“그, 그래?”


계단을 2층이나 더 내려가고 나서야 겨우 평정을 되찾은 보쿠토는 옆에서 걸음을 맞추는 아카아시를 슬쩍 훑어보았다.


“아카아시, 목에 단추 풀어졌어.”

“아……. 오늘 좀 이리저리 치였더니. 뭐 선배만큼은 아니지만요.”

“나?”

“선배 생일 때 선밴 하늘을 걸어 다녔잖아요.”

“아.”


보쿠토는 순간 헬쓱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생일날, 정말 기쁘게도 요란하게 축하를 받았지만 당혹스러운 것도 분명히 있었다. 3년간 친분을 쌓아 격의 없어진 친구들이 그를 들어 올린 채 복도를 질주했던 것이다. 걸음마를 떼고 난 이후로 다른 누군가에게 안긴 채 들려본 기억이 전무했던 보쿠토로서는 비행기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체감한 날이기도 했다. 


“어차피 체육복 갈아입을 거라 대충 먼지만 털었어요. 그러는 선배는 뭐……. 언제나와 마찬가지시네요.”


보쿠토를 위아래로 훑어본 아카아시가 살짝 포기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보쿠토는 소매를 걷어 올리는 것의 편리함을 설파하다가 로비를 스치고 지나가는 찬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12월의 공기가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춥죠? 체육관 빨리 가요.”

“벼, 별로 춥진 않거든!”


발끈해서 소리쳤지만 별로 먹히지는 않는다는 걸 보쿠토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아카아시가 어린애 달래기라도 하듯이 ‘네, 네~’하고 만다. 보쿠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카아신 내가 선밴 거 알긴 해? 모르지?”

“……저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걸요.”


후배의 목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체육관에 도착하고 난 뒤였다. 두 사람이 평소보다 조금 늦었는지 먼저 도착한 부원들이 인사하는 소리에 보쿠토는 그만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그 날 오후 연습에서 보쿠토는 날개가 돋은 듯했다. 며칠째 잠이 부족했는지 눈 밑의 낯선 그늘은 여전했지만 표정만은 환했고 말 그대로 날아다니다시피 하여, 고작 스파이크 연습만으로도 공이 터질 것 같았다. 거기에 어울려주던 아카아시가 아주 오랜만에 기진맥진했다.


“헉, 아카아시……. 괜찮아?”

“…….”


숨을 몰아쉬던 아카아시가 체육관 바닥에 드러누워 버린다. 둘 밖에 남지 않은 체육관이었던지라 체면 차리지 않는 그의 얼굴을 보고서 보쿠토는 배시시 웃더니 마실 것과 타월을 챙겨들고 다시 아카아시의 곁으로 돌아왔다.


“아카아시 이렇게 뻗어있는 거 되게 오랜만이다, 그치.”

“그야 1학년 때나 이랬으니까 그렇죠.”


고작해야 1년 전 일인데 오랜만인 것 같고 그렇다며 보쿠토는 수건으로 아카아시의 땀을 닦아주었다. 애써 다 닦았다고 생각했을 때 아카아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앞에서 누워있다고 눈치주신 겁니까?”

“아, 아니거든!”

“아니면 숨을 못 쉬게 만들어서 저를 없애시려고…….”

“뭐!? 아카아시 없으면 나도 죽을 거야!”


농담으로 한 이야기에 터무니없는 대꾸가, 그것도 진심으로 가득 찬 문장이 되돌아왔을 때 뻔뻔하게 앉아있는 기술 따위는 익히지 못한 아카아시였다. 아카아시는 놀라서 눈을 꿈벅거렸다. 보쿠토는 그런 아카아시를 눈치 채지도 못하고 열렬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진짜야! 그러니까 진짜 아카아시 죽으면 안 돼!”


평소였다면 “사람은 누구나 늙으면 죽습니다.”하고 덤덤하게 말했을 텐데 왠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렵게 입을 열고는 알았다고 답하는 게 고작이었다. 


보쿠토의 ‘아카아시 죽으면 안 돼’타령은 아카아시가 샤워를 마치고 교복으로 다시 갈아입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보쿠토가 말을 멈춘 건 아카아시가 오늘 부활동이 있기 전 보쿠토의 교실로 그를 데리러 갔던 것부터 후회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일지까지 다 쓰고 나서 필기구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보쿠토는 조용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오후 부활동 내내 날아다닌 모습을 조금도 연상할 수 없는 기복이었다. 


설마하니 오늘 죽는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때문에 저러나 싶어서 아카아시가 무어라 말이라도 해보려는 찰나에 보쿠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아카아시는 눈만 크게 뜨고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가방 안에 양손을 집어넣고 있는 보쿠토의 표정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 아, 아카아시!”

“네, 네……. 말씀……하세요.”

“생일! 축하한다!”


그리고 그의 얼굴 가득히, 따뜻하고 포근한 것이 차올랐다. 처음에 느낀 건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이었고 곧바로 어떤 익숙한 향기가 따라붙었다. 익숙할 수밖에 없는 그것, 그건 보쿠토가 사용하는 비누 냄새였다. 


“아……?”


아카아시는 자신의 얼굴에 들이밀어졌던 편물을 펼쳐보았다. 색은 무척이나 세련되었지만 만듦새를 보아서는 절대 판매할 수 없는 형상이었다. 코의 크기도 들쑥날쑥했고 옆면도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기 바쁘다. 이런 건 어디서 돈을 주고 사려고 해도 찾아보기 어려울 거였다. 

멍하니 목도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카아시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보쿠토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꿋꿋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다시 목도리를 내려다보았다. 라벨이나 상표도 없는, 어설픈 솜씨로 사람이 직접 뜬 것 같은 목도리. 심지어 포장도 무엇도 없고 새빨개진 얼굴로 여길 보고 있는 보쿠토. 


“……설마 이거 보쿠토 선배가 직접 만든 겁니까?”

“아카아시 별로 안 기뻐하는 거 같애…….”

“아니, 정말이에요? 선배가요?”

“응…….”


보쿠토는 이제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었다.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닫았다. 그 사이 보쿠토가 자신의 양손을 맞잡고 웅얼거렸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는 줄 아예 몰라서……. 좀 잘 못 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거든……. 시간 맞추려고 힘냈어…….”

“……설마 밤에 잠을 못 잤던 것도.”

“으, 으응……. 며칠 밤 좀 샜나?”


보쿠토가 뺨을 긁적거린다. 아카아시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닫고는 다시 목도리를 내려다보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 모습에 보쿠토의 얼굴도 점점 시무룩해져갔다. 


“……아카아시가 좋아하면 나도 좋아한다고 할랬는데.”

“……뭐라고요?”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목도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아카아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보쿠토는 바닥을 보고 있느라 아카아시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울먹거리는 듯이 혹은 투덜거리는 듯이 소리를 웅얼거렸다.


“그래도 열심히 한 거니까 집에 보관이라도 해 주면 안 될……아, 아카아시?”


애달픈 목소리로 말하다 고개를 들었던 보쿠토는 자신의 코앞에 와있는 후배의 얼굴에 흠칫했다. 금방 뺨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되었지만 어째서인지 물러설 수가 없다. 후배는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선배가 밤에 잠 못 주무시는 것 같아서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아? 그랬어?”

“그랬는데 제 생일 선물을 만드시느라 그랬다고요?”

“그게 어쩌다보니…….”

“다음부턴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알겠습니까.”

“그치만 시간 맞추고 싶었고…….”


보쿠토가 무어라 변명을 하는데 아카아시가 찌릿 하고 노려보았다. 보쿠토가 흡 하고 입을 다문다. 그 사이에 아카아시는 묘하게 만족스러운 것도 같고 기쁜 것도 같은, 어쩐지 알기 어려운 표정으로 목도리를 바라보다가 그걸 목에 둘렀다. 한 번 두르기에 딱 넉넉한 길이였다. 아카아시가 도톰한 술의 끝자락을 만지작거린다. 그걸 홀린 듯 보고 있던 보쿠토가 문득 말했다.


“……맘에 들어?”

“네. 아주요. 정말 좋네요.”

“진짜?”

“네. 정말로. 무척 기쁩니다. 고마워요, 보쿠토 선배.”

“정말로?”

“네.”


보쿠토가 재차 묻는 말에도 아카아시는 거듭 대답해주었다. 그러기를 대여섯번쯤 더 했을 때, 아카아시는 조금 웃는 것 같은 얼굴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선배. 저는 정말 기뻐하고 있으니까요.”

“어?”

“이제 선배 차례죠. 할 말 하세요. 지금.”

“어어.”


보쿠토는 눈을 깜빡거리며 아카아시를 쳐다보았다. 아카아시는 목에 목도리를 두르고 있을 뿐 언뜻 보자면 평상시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보쿠토는 그를 감돌고 있는 기류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살짝 들뜬 공기, 조금은 옅어진 눈동자까지 모두 아카아시의 기쁨을 표출하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기뻐하는 것이다. 그가 어설프게 짜낸 목도리를 받고서.


그리고 나는 아카아시가 기뻐해주면, 말을 하려고.


“어……. 그러니까, 아카아시…….”

“네.”

“난 아카아시가…….”


하물며 작은 목도리 하나도 완성하기 위해서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보쿠토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가는 문장을 제어하지 못했다.


“아카아시를…….”

“네.”

“아카아시 나랑 결혼하자!”

“……네?”

“그게 건물 상속세가.”

“……네?”

“내, 내가 알아봤는데 배우자끼리가 상속세가 제일……. 내가 건물을……. 어떻게 가져오면……. 그럼 아카아시 장래희망……. 나랑, 내 옆에서…….”


보쿠토는 말을 횡설수설했고 아카아시는 그 모든 빛의 파편을 보고 있기만 했다. 마침내 그것이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그의 눈을 멀게 할 때까지. 


“전 싫은데요.”


보쿠토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카아시는 그 표정을 충분히 감상한 다음 목도리에 턱과 입을 파묻었다. 


“전 선배하고 사랑해서 결혼할 겁니다.”

“……진짜?”

“네.”

“오늘 내 생일 아니라 아카아시 생일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선물 받는 거 같아…….”


그 말이 자신에게는 선물인데, 보쿠토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아카아시는 그의 금빛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한껏 몽롱하게 풀어진 얼굴이 되었다가 또 금방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펑 하고 소리가 날 것 같다. 그리곤 보쿠토가 냉큼 그에게 다가와 아카아시의 양손을 잡아챘다.


“아카아시도 신중하게 생각한 거야?”


‘도’라는 것은, 보쿠토는 이미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란 이야기였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을 망설여서가 아니라 차분히 말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그건 이미 늦은 일이었다. 입술과 입술이 금방 맞닿더니 이윽고 더운 소리를 내며 떨어지지 않는다. 보쿠토가 물러선 건 아카아시의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뒤였다.


아카아시는 숨이 차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붉어진 얼굴을 겨우 다스리며 충분히 보쿠토와 거리를 벌렸다.


“전 항상 신중하게 생각해요.”

“그럼 우리 이제 사실혼? 그런 거야?”

“이 때 쓰는 말 아닙니다. 그리고 그건.”


무엇이든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 건 자신이면서 직접 뜬 엉성한 편물로 부딪혀오는 고백 아닌 엉뚱한 고백에 홀라당 넘어가는 것도 자신이었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꾹 삼켰지만 목도리를 풀지는 않았다. 


“그건 내년 보쿠토 선배 생일 선물로 드릴 거니까요.”

“……아?”

“착하게 기다리고 계셔야 됩니다. 아셨죠.”


밟아온 나날보다 남은 날이 훨씬 긴 이 때에 아직은 섣부른 선택을 하면서도 아카아시는 몸을 기울였다. 보쿠토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입을 맞춘다. 맹수가 영역을 표시하는 것처럼 수줍음이라고는 모르는 격렬한 입맞춤이 끝나면 갓 피어난 꽃잎처럼 얼굴을 붉히고 선 보쿠토가 있다. 


아카아시는 지금 당장 보쿠토의 생일이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도 티내지 않고서 다만 보쿠토가 다시 맞부딪혀 오는 입술에만 의식을 기울였다. 몇 번이고 거듭된 입맞춤이 끝나고, 겨우 호흡보다는 입맞춤이 오간다고 해야 할 짧은 거리 속에서 보쿠토가 작게 속삭였다.


“그거 만든다고 대바늘 열 개쯤 부러뜨린 거 있지…….”

“진심으로 여러 가지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나 배구 좋아하고 잘해서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아슬아슬하게 세 손가락엔 못 들지만요.”

“아카아시 진짜 이러기야!?”


보쿠토가 왈칵 그의 입술을 깨물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웃음을 꾹 눌러 참고는 보쿠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눌렀다 뗐다.


“저한텐 첫 손가락이니까 된 것 아닌가요.”


보쿠토가 금방 감동했다며 달려들어서, 아카아시는 헝클어지려는 목도리를 추스르기 위해 애써야했다. 보쿠토가 그런 아카아시의 마음도 모르고 연거푸 입맞춤을 했다. 


다가올 가을을 기다리는 겨울해가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