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Logout Link+ Admin Write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

“답답해 죽겠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보쿠토가 의자의 등받이를 뒤로 눕히며 버둥거렸다. 곁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는 매니저의 표정이 황망하게 일그러졌다. 보쿠토가 보고 있는 건 그의 대본이었다. 


“얘 사랑한다는 얘길 영화 끝날 때까지 안 해. 왜 안하냐? 으아아아!”

“작가한테 가서 따지실래요?”

“으아, 속 터져!”


보쿠토가 버둥거리는 소리에 다른 스태프들이 웃으며 지나간다. 매니저는 무덤덤한 얼굴로 보쿠토의 얼굴에 쿨링 스프레이를 분사했다.


“으푸우웁!”

“그러게요, 보쿠토 씨는 천년이 가도 이해 못 하시겠죠……. 말 못하는 사람의 맘 같은 건. 진짜 어떻게 이런 역을 하셨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나도 이해는 해. 이해는 하는데 답답하다는 거지! 얘가 지금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만 했어봐, 여자주인공이랑도 잘 되고 이렇게 퍼주기만 하다가 끝나지도 않았을 거 아냐!”

“하하, 그러게요…….”

“너 나한테 아주 무관심해. 알지?”

“네.”


매니저는 그렇게 대답하곤 보쿠토의 얼굴 위에 자외선 차단제를 덧발라주었다. 


“팔 토시 하실래요? 아니면 위에 셔츠 하나 더 입을래요?”

“…….”

“빨리요. 피부 더 타면 안 된다고요.”

“난 안 타잖아.”

“벌겋게 익을 뿐이죠.”


며칠 전에 숲길에서의 추격 장면을 촬영하느라 보쿠토는 팔다리가 긁히기도 많이 긁힌데다가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 며칠은 고생을 했다. 검게 그을리지는 않지만 화상을 입는 것이다. 


보쿠토는 투덜거리길 관두고 얌전히 긴팔 셔츠를 앞으로 꿰어 입었다.


“선풍기 갖다 줘.”

“덥다고 찬바람 너무 쐬지 말래요.”

“뭐? 왜? 누가!”

“감기 걸리신다고요.”


어쨌든 냉풍기 바람 오고 있잖아요, 별로 덥지도 않구만, 보쿠토의 매니저는 그렇게 말을 남겨놓고 자리를 뜬다. 보쿠토가 간절히 부르며 팔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팔을 몇 번 더 휘저은 보쿠토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을 인지하고는 입술을 비죽거리고 가슴팍 위에 턱 소리 나게 팔을 내려놓았다. 멍하니 위를 보다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자 저기는 또 촬영 준비에 한창이었다. 


스태프들, 배우들, 그들을 훑어보던 보쿠토는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 옆에 있는 조수와 이야길 나누고 있는 촬영 감독이었다. 


그가 가만히 서 있는 자세는 길고 곧았다. 보쿠토 자신도 큰 편인데 저 촬영 감독 역시 결코 작은 키는 아니었다. 몇 센티미터 정도나 차이가 날까. 그런데도 몸은 그보다 훨씬 더 가늘었다. 아마 그의 매니저가 이 얘길 들었으면 어떻게 보쿠토 씨의 몸과 비교해서 가늘지 않을 사람이 있기나 하겠느냐며 핀잔을 던졌겠지만, 보쿠토는 마냥 촬영 감독의 옆모습을 감상하기만 했다. 


카메라가 많이 무겁다더니 얄팍한 몸에도 마른 근육이 제법 붙어있는 편이다. 턱선은 매끄럽고 얼굴엔 살이 별로 없었다.


‘얼굴이 작아서 뭘 한 입만 먹어도 뺨이 다람쥐가 되나봐.’


눈매는 가늘고 길었다. 안의 눈동자는 청록색이었다. 보쿠토는 저런 색을 본 적이 있었다. 햇빛조차 투과하지 못하는 깊은 바다가 저런 색깔이었던 것 같다. 머리는 먹을 바른 듯이 새카만 빛이어서 더욱 단정한 듯 혹은 차가운 듯한 인상이 되었다. 


‘잘못 치면 부러지겠네.’


보쿠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보통 감독들은 며칠쯤 날밤을 지새우며 촬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인상었는데-아니면 날밤을 지새우며 촬영을 강행할 것 같은 인상-, 저쪽은 그랬다간 카메라보다 사람부터 넘어가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님이 그렇게 밥 때 챙기나…….’


식사란 밥 때에 먹는 것이 아니라 촬영이 끝나고 난 뒤에 먹는 거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 촬영장은 열두시 땡 하면 점심 먹고 여섯시 땡 하면 저녁 먹는 식이었다. 보쿠토는 자신의 추론이 그럴듯하여 고개를 끄덕이고는 찬바람이 가까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때의 보쿠토는 아직까지 저 촬영 감독을 잘 몰랐던 것이다. 식사를 제 때 하지 않으면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눈매가 북풍 설원마냥 험악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


“저, 아카아시 씨…….”

“응?”


조리개를 조정하던 촬영감독의 조수가 아련한 목소리로 촬영 감독을 불렀다. 옆에서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확인하던 중이었던 아카아시가 고개를 들고 자신보다도 키가 큰 조수를 바라보았다. 


“왜?”

“저쪽에서 누가 자꾸 쳐다보는데요…….”

“누구……아.”

“용건이 있는 건가 싶어서요.”


아카아시는 조수 오나가가 가리키는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가 그 시선의 정체를 알아차리곤 다시 카메라 쪽으로 눈을 돌렸다.


“신경 쓰지 마. 조리개는?”

“끝났습니다.”

“메모리는?”

“충분한데……. 저어…….”

“원래 사람을 아무 생각 없이 저런 식으로 쳐다보는 사람이야.”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간간히 구름이 흘러가긴 했지만 쨍하니 볕이 맑은 날이었다. 습기는 차오르고 있었지만 아직 마구 불쾌할 정도는 아니다. 아카아시가 손을 내밀었고 오나가는 당연하다는 듯이 익숙하게 주머니를 뒤져 냉각 시트를 꺼냈다.


“붙일래?”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가서 저 사람한테 주고 와.”

“…….”

“그럼 안 쳐다보겠지.”


포장을 꺼내 능숙한 손길로 목덜미에 냉각 시트를 붙인 촬영 감독이 하나 남은 시트를 오나가에게 내밀었다. 


오나가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부터 계속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 그리고 아카아시가 간단하게 ‘저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 배우는 이 극장가의 흥행 보증 수표라고 불리는 바로 그 보쿠토 코타로였다. 어려서 아역부터 시작해 경력으로 따져도 이 자리에서는 가장 선배인 셈이었고 필모그래피까지 굉장해서 스크린 아니면 보기도 어려운 사람인데다가, 같은 업계에서 일하기에 더욱 쉽사리 말 붙일 수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안 가고 뭐해.”

“하, 하지만…….”

“빨리 갔다 와서 조명 맞춰보고 조리개 다시 조정해야 해.”

“아, 알겠습니다!”


일을 해야 한다고 몰아세우자 조수도 얼른 달려간다. 아카아시는 뷰파인더를 내려다보며 조수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상기된 얼굴의 오나가가 돌아왔다. 주춤거렸으면서도 굉장한 배우와 말을 해보았다고 들뜬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일 해야지.”

“아, 저…….”

“응?”

“보쿠토 씨가 엄청 좋아하시던데 혹시 원래 알던 사이이신……?”

“아니. 원래 그런 사람이야. 이 한여름에 냉각 시트를 가져다주는데 그러면 좋아하겠지.”


아카아시는 서늘하게 대꾸하고는 편집 모니터에 비친 모습을 흘끗 쳐다보았다. 회색 화면 위로 스태프 하나를 붙잡고 뒷목에 시트를 붙이느라 요란법석을 떨고 있는 보쿠토가 눈에 보였다. 


아카아시는 모니터에 비친 화면으로도 눈이 마주치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빨리 촬영을 끝내야 퇴근도 빠르다. 집중해서 일을 하기에도 바빴다. 아카아시의 손짓에 조명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조명 감독이 일할 시간이라고 외치는 소리에 스태프들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나, 요시히데를……좋아하는 걸까?”


소녀같은 여자, 아이리가 등을 보인 채 중얼거린다. 저 끝에 겨우 보이는 흐릿한 그림자가 바로 그 요시히데였다. 아이리 뒤에 선 아키히토는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다. 처음에는 손을 뻗었다가 결국 아이리를 잡지 못한 채 떨어뜨리고 만다. 힘껏 찌푸린 눈썹 아래에 애써 웃음을 지으려 하지만 허물어질 뿐이다. 하지만 그 얼굴도 아이리가 아키히토 그를 뒤돌아 볼 때에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변해 있었다.


아키히토가 물었다.


“좋아하는 것 같아?”


아이리는 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남자를 향해 빛내는 눈이었다. 아키히토는 잠깐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또 웃는다. 요시히데가 부럽네, 농담같은 말에 아이리가 부끄러워하며 뺨을 붉힌다. 해가 저문다……. 


그리고 다시 아이리가 이제는 없는 요시히데를 바라보기 위해 등을 돌렸을 때, 아키히토의 한쪽 눈에서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노을에 물들어 붉은 보석 같은 눈물이었다.


해가 지는 침묵 끝에 슬레이트가 딱 하며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그제야 스태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아카아시도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영화 감독까지 살짝 들뜬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정도 되는 연륜이기에 이런 화면을 보고도 들뜬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리라.


방금 전까지 아키히토 역을 하고 있던 보쿠토는 카메라가 꺼졌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발까지 구르며 눈물을 그치려고 했지만 역으로 더 후두둑 떨어지기만 한다. 매니저가 얼른 물티슈를 뽑아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보쿠토 씨!”

“화, 화면은? 잘 나왔어?”

“예. 잘 나왔대요.”

“아~! 이거 눈물이 안 그쳐! 으아아!”


애써 웃음을 터뜨리는데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스태프들도 그 모습에 웃고 말았다. 방금 함께 씬을 촬영한 배우들에게 한 마디씩 칭찬을 한 감독이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보쿠토에게 다가갔다. 


“화면 정말 괜찮게 나왔어.”

“아, 정말요? 그럼 됐는데, 으아아! 이거 진짜! 눈물 왜 안 멈춰, 정말!”

“하하, 거기서 눈물이 나와줄 줄 몰랐는데.”

“저도요! 울 생각 없었거든요! 아 근데 속이 터지잖아요~! 망할, 말 좀 하지…….”

 

극 속의 인물이 사랑을 뱉어내지 못하는 걸로 한참이나 열을 토하던 보쿠토는 겨우 눈물을 닦아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서 언제 또 이렇게 될지 모르니 촬영장에 자신의 물병을 따로 챙겨 둬야겠다며 너스레까지 떨고 나서, 보쿠토는 슬쩍 눈을 돌려 촬영 감독을 바라보았다. 


아카아시는 현장 편집 기사와 함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우들 쪽은 쳐다볼 생각도 관심도 없는 것 같다. 보쿠토는 괜히 입술을 한 번 삐죽거렸다. 


오늘 마지막 촬영 분이 멋드러지게 찍히면서 얼추 마무리 분위기가 되어가는 와중에, 현장 편집이 거의 다 된 것인지 감독이 배우들을 불렀다. 


“잘 나왔어. 좋아, 좋아.”

“오…….”

“OST는 다 작업 끝났어요?”

“아직 작업 중이야. 이런 느낌 정도로만 생각해.”

“보쿠토 씨 어떻게 거기서 눈물이 나왔어요? 진짜 대단해…….”


촬영분을 확인하는 사이에 다른 스태프들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비가 올 것 같다며 이제부터 세트장에서 촬영이라는 소리, 일일촬영표 다시 써야 한다며 조감독이 우는 소리, 기자재와 짐을 챙겨 넣느라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것이 쩡쩡 울려퍼졌다. 


“정리 다 되면 딱 저녁 때군. 식사들 하고 가겠나?”

“좋죠~!” 


스태프들도 즐거워하며 반기는 사이에 얼추 짐정리가 다 끝났을 때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먼저 일어섰다. 


“오늘 고생들 하셨습니다. 식사 맛있게들 하시고, 저희는 가볼게요.”

“일촬표 나오는 대로 바로 연락하지.”

“예. 그럼 다들 쉬세요.”


다른 스태프들은 당연한 것 같았고 누군가가 제대로 붙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명 감독이 서글서글한 얼굴로 웃으며 인사했고 뒤에 선 촬영 감독이 고개를 까딱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뭐라 말이라도 해보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보쿠토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어 출구 쪽만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가, 갔네요?”

“아아, 일 끝났으니까.”

“식사는요? 다 같이 밥 먹기로 했잖아요!?”


보쿠토가 숫제 억울한 목소리로 소리치는데 타케유키 감독이 지긋한 얼굴로 씩 웃었다.


“누구 씨가 밥 먹을 때마다 괴롭히니 도망간 거겠지.”

“으, 으윽. 아닌데…….”

“하하, 농담이야. 내일부터 세트장 촬영이라 그 쪽 확인한다고 먼저 간 거니까 신경 쓰지 말게.”

“아…….”


타케유키 감독이 보쿠토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는 현장에서 철수하자고 말을 돌린다. 보쿠토는 괜히 영문을 알 수 없이 아쉬워서 뺨만 긁적였다. 



------





버터스님 리퀘스트인 영화배우 보쿠토x카메라맨 아카아시입니다uㅅu!

버터스님과 함께 이야기 나누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