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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시종일관 어린애처럼 굴었는데, 그런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게 주량이 상당했다. 대수롭지도 않은 얘기를 혼자 즐거운 것처럼 큰 소리로 말을 하면서 목이 따가울 만큼 도수가 센 술을 물처럼 들이켰다. 


바의 조명은 어두운 편이었던지라 남자의 얼굴은 윤곽을 구분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 그림자만으로도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걸 판별할 만했다. 하지만 그런 남자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도 예사롭지는 않았다. 


시끄러운 남자에 옆에 앉아있으니 놀랍도록 조용해 보이는 남자였는데, 시끄러운 쪽이 어둠 속에 홀로 태양인 양 눈에 띄고 어색했다면 이 쪽은 이 어둑한 조명이야말로 자신의 시간이라는 듯이 한 호흡에 한 번 꼬릿짓하는 물새처럼 부드럽게 어우러들었다. 


두 사람은 오늘 이 바에서 처음 만났다. 시끄러운 남자는 일하러 온 낯선 도시의 호텔방이 답답하다고 나온 차였고 조용한 쪽 남자는 오늘 회의에서 만나기로 한 상대가 약속을 깼다며 바람을 쐬러 나왔다고 했다. 바의 옆자리에 앉았다가 팔이 스친 것뿐인 인연이었다. 바텐더는 두 사람 앞에 새로운 술을 놓아주었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떠들어댔고 다른 한 쪽은 듣기만 하는데도 나름대로 대화가 이어졌다. 처음 만난 사이라는데도 한 쪽이 시끄러워지면 다른 한 쪽이 거침없이 핀잔을 주었다. 화제는 낯선 도시의 우중충한 날씨, 입맛에 맞는지 가늠할 수 없는 요리, 지나치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이 도시 사람들에 대한 부담스러움 같은 것들로 이어져갔다. 조용한 남자는 마지막 화제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끄러운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 때만큼은 바텐더마저 손님에 대한 예의를 잊고 그만 빤히 쳐다보고 말았더랬다. 


두 사람은 바가 문을 내릴 때까지 한 잔씩 마시다가 바에 손님이 사라질 즈음하여 자연스레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이라 거리의 가로등조차 숨을 죽이고 있는데 거친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히 소음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끄러운 남자가 조용한 남자를 휙 잡아끌었다. 남자의 손끝은 단단했다. 조용한 남자는 말 없이 시끄러운 남자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말 없이 눈을 마주친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둑했던 바 안보다 가로등과 달빛이 내리쬐는 바깥에서 서로의 얼굴은 더욱 분명하고 또렷하게 보였다. 


곧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격정적인 입맞춤을 시작했다. 이유로 들 수 있는 것들은 많았다. 오늘 그들은 남들이 한달간 먹고 죽을만큼 술을 마셨고, 달빛은 오묘한 은빛으로 출렁거리는 중이었다. 낯선 오토바이 한 대가 두 사람을 재촉하기도 했다. 마침내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조용한 남자는 자신의 등에 와닿는 건물의 벽이 내뿜는 냉기를 느끼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호텔방이 답답해서 나왔다고 했던가요.”

“응. 침대도 커.”


시끄러운 남자가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


호텔의 방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다시 격정적인 키스가 이어졌다. 남자와 남자는 서로 본래 한 몸인 것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호텔의 문에 두 사람의 구두 두 쌍이 나뒹굴었다. 중간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옷자락이 허물처럼 흩어졌다. 습기차고 무른 것이 쉼없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섬유와 섬유가 거칠게 마찰하는 소리 같은 것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두 사람이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건 이 객실의 손님이었고 그 위에 올라탄 것은 이 객실의 주인이었다. 바에서는 한 시도 쉴틈 없이 말을 늘어놓던 시끄러운 남자는 호텔에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다. 드디어 그의 입술이 떨어지며 쉰 듯한 쇳소리가 났다 .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

“한 번 시작하면 무슨 말을 해도 안 봐줄 건데.”


침대에 누운 남자가 턱을 살짝 들고 얕게 웃었다. 호텔의 무드등이 그의 뺨이 물든다. 시끄러운 남자는 그게 마치 달같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채였다.


“다른 사람 쥐고 흔드는 건 제 전공이라서요. 과연 그 쪽이 가능하실지?”

“하, 그래? 남의 말은 죽어도 안 듣는 게 내 전공인데.”


시끄러운 남자의 손이 조용한 남자의 복부 위에 안착했다. 손끝으로 내리누르는 그 손에 단단함이 느껴졌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달이 저물 때까지, 호텔방은 한 시도 조용할 새 없이 격정으로 치달았다.


*


아카아시는 퀭한 머리를 움켜쥐었다. 뒤늦게 올라온 숙취가 망치로 변해 자신의 머리를 꽝꽝 때리는 기분이었다. 


술냄새를 씻기 위해 샤워를 세 번쯤 하고 나왔더니 지난 밤 열락의 상대는 정신없이 자고 있다. 아카아시는 그 시간들을 떠올렸다가 흐뭇한 얼굴로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남의 룸키로 아침 조식까지 마친 아카아시는 로비에 열쇠를 맡겨두고서 그대로 콘서트홀의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은 반드시 협연할 피아니스트를 끌고 오겠다는 에이전시의 연락이 이미 와 있었던 것이다. 


‘조금 격렬했나?’


아카아시는 슬쩍 뻐근한 허리를 쓸어내렸다. 봐주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을 할 때는 귀여운 허세를 부릴 줄도 아네, 싶었는데 지난 밤의 시간이 그의 말을 완벽히 증명했다. 한둘 울린 솜씨가 아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서 정신없이 몸을 내맡긴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피로보다는 오랜만의 운동 끝에 느끼는 상쾌함이 더 클 정도다.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사무실로 향하는 아카아시의 걸음이 사뭇 경쾌했다. 이 기분대로라면 어제 미팅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제 곧 만날 피아니스트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카아시는 구둣소리에 박자를 맞추며 이번 협연에 대해 생각했다. 에이전시에서 피아니스트에 대해 도통 얘길 해주지 않았지만 후보군은 얼추 알만했다. 이쪽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정도의 실력자면서 지금 국내에 들어와 있는 사람, 에이전시에서 깜짝 선물처럼 그에게 비밀로 하겠다고 할 정도의 인물. 


‘타키자와 요시후미려나? 그 사람이라면 좋지.’


다만 그렇다면 의아하기는 하다. 말 한마디 없이 미팅에서 몸을 숨길 만한 위인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카아시가 사무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콘서트 홀의 관장이 웃는 낯으로 그를 환영했다. 약속한 회의 시간보다야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아카아시를 소파 앞에 앉힌 관장은 다과거리를 내어오며 이번 콘서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협주곡을 선보인 적 없는 피아니스트라 정말 기대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협주곡을 한 적이 없어?’


그렇다면 그가 처음 생각했던 카티자와 요시후미는 아니다. 아카아시는 턱을 매만지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에이전시 쪽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관장은 연신 약올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피아니스트의 이름은 정확히 말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콩쿨 입상한 신출내긴가?’


그렇다면, 그도 그럴 법하다. 이쪽은 나름대로 이름을 쌓아올린 지휘자였으니 갓 콩쿨을 떨쳐내고 올라온 병아리와 협연을 하란 말에 자존심 상할지도 모른다고 신경을 써준 것일지도 몰랐다.


‘별로 그런 거 신경 안 쓰는데…….’


아카아시는 커피의 홀더를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했다. 어차피 지휘지가 제대로 된 지휘자라고 이름을 떨치기까지는 한두해로 될 일이 아니었고 그 전까지 아카아시는 일을 가릴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협연하는 피아니스트가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결국 협연을 시키는 거면 배려라기엔.’


하여튼 에이전시도 일을 재밌게 한다고, 아카아시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약속시간으로부터 십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아카아시는 깨끗하게 비워버린 다과접시를 내려다보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관장은 마중을 가야겠다며 사무실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호들갑을 떨며 다시 돌아왔다. 그의 뒤로 두 사람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한 명은 그의 에이전시 쪽 사람으로 익히 아는 이였고, 낯선 다른 쪽이 예의 그 피아니스트인 것 같았다. 


“아하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보쿠토 씨, 빨리 미안하다고 해요. 우리 지휘자님 무섭단 말야.”

“어이쿠야. 10분인걸요. 아카아시 씨도 화 많이 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아카아시 본인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관장이 먼저 탬버린도 치고 트라이앵글도 쳤다. 캐스터네츠도 치겠네, 아카아시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곧 머리 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아카아시는 멀리서 거대한 심벌즈가 쩡하고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피부가 본디 흰 편인 듯했지만 분명히 다른 원인이 있어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피아니스트는 선명한 금빛 눈동자로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관장과 에이전트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역시 얼굴 보자마자 알줄 알았지. 하하, 아카아시 씨라면 보쿠토 씨와도 문제없이 협연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아! 보쿠토 씨가 문제라는 말은 아니고……. 워낙에 독주를 좋아하시다 보니까요.”


문제가 아니라고? 아카아시는 저 에이전트가 자기 입 위에서 바이올린 활줄을 켜도 감내해야한다고 생각했다. 피아니스트, ‘보쿠토’라는 이름, ‘독주를 좋아한다’라고 하면 딱 한 사람이 남는다.


소년 시절부터 권위있는 콩쿠르를 모두 휩쓸다시피하며 음악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승승장구한, 현대 음악계의 총아. 그 격정적이고 파워풀한 연주는 호평도 악평도 잔뜩 낳았지만 연주회장에서만큼은 박수를 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피아니스트. 그 제멋대로에 가까운 연주 성향 탓에 협주는 즐기지도 않거니와 한 역사조차 없는 피아니스트…….


‘보쿠토 코타로!’


그리고 그의 그 불타는 듯이 열렬했던 어제의 하룻밤 상대! 그가 어젯밤 바에서 일하러 온 곳이 답답해 도망치다시피 했다고 얘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미팅하기로 했던 피아니스트가 돌연 몸을 감춘 바람에 오늘로 약속이 밀린 것도 어제였다. 꿈이라고 믿고 싶은데 그의 이성이, 그리고 보쿠토의 마찬가지로 뜨악한 얼굴이 이게 현실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보쿠토 씨가 긴장한 건 처음 보는 것 같네요, 하하. 우리 지휘자님 그래도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에요~! 그쵸, 아카아시 씨.”


보쿠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젯밤 일이 아스라히 지나갔다. 바에서 뭐라고 떠들어댔더라? 일하기 싫다는 이야길 했었나? 그리고 바를 나가서, 입을 맞추고, 그대로 호텔로 가서……. 


보쿠토는 허옇게 뜬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건 아카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 쥐고 흔드는 게 전공이라더니!)

(남의 말은 죽어도 안 듣는 게 전공이라더니!)


콘서트홀의 사무실에 이루 말로 못할 어색한 공기가 꽉 들어차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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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스님이 원나잇후 어색하게 마주해버린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를 보고싶다 하셔서 써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