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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에 한 번씩 애인을 갈아치우면 아무리 해도 좋은 소문은 나기 어렵건만 왜 그렇게 잠잠했던 건지 알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창가에 앉아 턱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시간이 2학년 교실의 체육수업인 것인지 아래쪽 운동장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올라오는 중이다.


그 시끄러운 소리의 주인공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바로 그 사람, 보쿠토 코타로였다. 아카아시는 동물원의 백호라도 보는 듯이 신묘하단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동급생들 사이를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보쿠토의 모습은 어딘가 어린애가 정신없이 뛰노는 듯한 천진함이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도저히 나쁜 생각이 들려야 들 수가 없기는 할 것이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칼로리가 불타는 것 같네.’


좋아해서 고백했고 상대도 응해주었지만 그게 제대로 흘러가지 못했을 때, 보쿠토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됐을까? 보쿠토는 처음부터 너를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래도 괜찮다고 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원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악질인데…?’


정말로 좋은 사람, 그저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을 뿐인.


때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다. 아래쪽에서 마냥 신나게 뛰어놀던 보쿠토가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가 아카아시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크게 흔든다. 아카아시는 결국 인상을 세게 찌푸린 채 고개를 휙 돌리고 커튼을 치고 말았다.


*


“…….”

“…얘기를, 허억, 좀 해봐!”


체육수업을 마치자마자 뛰어 올라온 것인지 보쿠토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고 호흡도 가빴다. 책상을 내리친 손등 위로 힘줄이 불거져 있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도 형형히 빛나는 중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뭘 얘기해보란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일단은 보쿠토를 끌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한동안 잦아들었던 보쿠토의 방문에 반 친구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들려왔지만 모른 척했다.


“갑자기 오셔서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아까 수업 시작하기 전에! 막 이렇게 찌푸리고 나 쳐다보더니 커튼 홱 친 거 뭐였냐고!”

“아……?”


그 일에 관해서라면 당연히 수업하는 사이 새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에,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말을 한 것을 듣고도 되짚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렸다. 아카아시는 눈만 깜박이다가 수업이 시작하기 직전에 운동장에 있던 보쿠토를 내려다보았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아, 그거….”

“‘아아, 그거’가 아니라고!”

“그냥 갑자기 좀 선배의 예전 애인들에 감정 이입이 돼서.”

“…….”


씩씩거리며 몰아세우던 보쿠토가 단숨에 굳었다. 그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고장 난 고철 인형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요 며칠 아카아시로부터 강도 높은 비난을 받고서 쌓인 죄책감에 종이 울린 듯했다. 허둥지둥하던 손이 결국 내려가고 어깨가 축 처진다. 쩌렁거려야 할 목소리는 꿀이라도 먹은 듯이 조용했다.


“그, 그랬구나.”

“그나저나 그 얘기 하려고 2학년 교실까지 오신 겁니까?”

“…왜 그랬는지 궁금해서…….”


정말로, 없는 조카를 놀려서 울리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재미있다.


아카아시는 이번에야말로 보쿠토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까닭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쪽에서 조금만 흔들면, 저쪽에서는 마치 파도라도 몰아친 것처럼 군다. 커튼을 쳐버리고 싫은 표정을 조금 비췄다고 그 까닭을 캐물으러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 바로 그 짝이었다. 저런 걸 어떻게 밀쳐낼 수 있겠는가?


“나 잘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거든…….”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확신했단…?”

“…….”


평소 같았으면 금방 발끈해서 뭐라고 소리쳤을 보쿠토인데 오늘은 어깨를 늘어뜨린채 말이 없다. 아카아시는 왠지 입을 가리고 웃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땀 닦으세요.”


아카아시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어쩌다 한 번씩 들고 다니는 것인데 오늘 때마침 가지고 있었다. 조금 처진 얼굴의 보쿠토가 멍한 얼굴로 땀을 닦다가 손수건이 다 젖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어, 아, 이거 빨아 줄게!”

“네, 부탁드릴게요.”


저런 사람이 있기는 있구나, 아카아시는 허둥지둥거리다가 돌아가는 보쿠토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대책 없이 솔직하고 자기 마음을 밝히는 데에 거리낌이 없고. 그 상대가 한 학년 후배라고 해도, 수업 끝나자마자 달려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물어봤다면 좋았을 텐데.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그의 연인들이 이별을 말하는 그 순간에도 왜 싫어진 것이냐고, 보쿠토는 왜 묻지 않았던 걸까.



*


“…아카아시는 항상…손수건 같은 거 들고 다녀?”


보쿠토가 어색하게 말을 붙여온 건 다음 날이었다. 손수건을 돌려주며 쭈뼛쭈뼛 묻는다. 아카아시는 다림질까지 깔끔하게 된 손수건을 보며 속으로 놀란 마음을 갈무리했다. 보쿠토가 이렇게 신경 썼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 집의 누군가가 해준 모양이었다.


“가끔요.”

“그래? 들고 다니는 게 좋을까?”

“뭐, 없는 것보다야 낫겠죠? 화장실에서 손 씻고 나올 때도 편하고.”

“에? 없으면 불편해?”

“……손을 안 씻으시는 건 아니겠죠…….”

“아냐! 씻어! 씻어! 아니 나는 그냥 털어서……. 탈탈 털어서 끝내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야!”

“…….”

“진짜 씻어……. 정말이야…….”


보쿠토가 정말로 울 것 같은 얼굴인지라 아카아시는 헛기침으로 수긍해주었다.


“어쨌든 이번처럼 옆에서 사람이 필요할 때 빌려줄 수도 있고요. 티슈나 그런 것도 좋겠죠.”

“좋아!”


보쿠토가 주먹을 불끈 쥔다. 아카아시의 말대로 손수건이든 티슈든 들고 다닐 마음을 먹은 듯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로 그가 자신의 말을 잘 듣는다는 표현 외에는 다른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나 이렇게 오랫동안 애인 없어 본 거 처음이야…….”

“그간의 상태를 누군가와 사귀는 중이었다고 표현한다면 지나치게 양심이 없는 게 아닐까요?”

“…….”

“애인이 있다 없다는 문장을 빼면 지금도 평소와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아닌가요? 아카아시가 공을 쥐며 덤덤하게 묻는 말에 보쿠토는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않다가 발작하듯이 머리를 쥐어뜯고 바닥에 발을 굴렀다. 깜짝 놀란 아카아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보쿠토를 쳐다만 보길 십여초 가량 지났을 때야 보쿠토가 탈력한 표정으로 양손을 축 늘어뜨렸다. 잠깐 입술을 달싹이던 아카아시가 말했다.


“지금 저한테 성질부린 겁니까?”

“아니야……. 과거의 나를 때리고 싶은데 할 수가 없는 내 마음을 어쩌질 못했어…….”

“흥.”

“내가 진짜 잘못했다는 걸 잘 알겠다…….”

“사실 뭐 사시던 대로 살아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긴 합니다.”

“아…?”


보쿠토와 아카아시 두 사람이 하던 추가연습은 보쿠토가 손수건을 건네주기 전에 이미 마무리가 되어서, 아카아시는 공을 마저 정리하며 보쿠토를 흘끗 쳐다보았다. 보쿠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선배 좋아해 주는 사람 많잖아요. 선배가 누굴 좋아하게 될 때까지도, 아무도 선배를 미워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가 좋은 사람이, 좋은 남자친구가 될 준비를 굳이 하지 않아도 어쩌면 그런 그를 끝까지 참고 견뎌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싶은 생각이었다. 그때까지 보쿠토를 스쳐 지나갈 많은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상처받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보쿠토를 미워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카아시는 여기서 보쿠토가 ‘그런가!?’ 라며 환한 표정과 반가운 목소리로 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좋은 남자친구 선생님’ 노릇도 이 순간으로 마지막일 거라고. 하지만 그가 ‘이 핑계를 진작 생각해냈더라면 좋았을걸’하고 작게 후회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본 것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남들이 나를 미워하고 좋아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무, 물론 좋아해 주면 좋지만.”

“…….”

“어쨌든 내가 잘못했다는 거잖아.”

“사실 뭐 딱히 잘못은 아니죠. 관심 없는 남한테 좀 무신경했다는 게…….”

“무신경하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관심 없는 남이 아니었잖아! 내 애인이었다고!”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어깨를 붙잡고 외쳤다. 아카아시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걸 보고서야 보쿠토도 손을 놓는다. 보쿠토는 조금 좌절한 얼굴이 되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쨌든 내가 뭔가 최선을 다해주지 못했다는 건 알겠으니까……. 너 자꾸 선생님 안 해주려고 이리저리 빼는 거 다 알아!”

“……흠.”


눈치채셨을 줄은 미처 몰랐네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가 또 왁왁 소리쳤다. 두 사람이 체육관을 완전히 나선 건 그로부터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완전히 기력을 탕진한 보쿠토가 터덜터덜 걸으며 아카아시를 잡아끌었다.


“이대론 집 가는 길 도중에 쓰러지겠어. 저녁 먹고 가자. 이 선배가 산다.”


이것도 퇴짜놓진 않겠지, 돌아보는 보쿠토의 눈동자가 형형했다. 아카아시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보쿠토가 급한 걸음으로 그를 잡아끌었다. 자주 가는 정식집인지 점원이 반가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안내한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메뉴를 묻지도 않고 소고기 덮밥 제일 큰 것으로 두 개 주문했다. 젓가락을 쥐려는 보쿠토의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정말로 심하게 허기진 것 같았다.


락교를 부지런히 집어먹는 보쿠토를 멀뚱히 쳐다보던 아카아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요…….”

“응?”

“애인분하고 점심을 단둘이 먹거나 같이 안 먹거나 둘 중에 하납니다.”

“엥?”

“보통은 단둘이 먹던데 어떻게 자기 친구들하고 같이 먹으라고 끌고 왔는지 선배도 참…….”

“아, 아니 뭐 그럼 애인 생겼다고 애인이랑만 먹고 친구들은 버려!?”

“버리란 뜻이 아니라…. 애인이라는 건 선배의 모든 친분 관계 중에서 제일 특별하게 생각해주는 상대라는 거잖습니까. 그 정도 배려는 해주라는 거예요. 남자친구의 친구들이라고 모르는 사람들하고 밥 먹는 게 얼마나 고역인데.”

“그런가……. 나는 친구의 친구랑 먹는 것도 좋은데.”


모든 문제의 원인을 안 것 같다.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선배, 영화나 드라마 보면 눈물 콧물 난리나는 사람이죠.”

“뭐? 아, 아냐! 무슨 소리야!”

“영화에서 사람이나 개가 죽으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밤에 잠도 못 자고.”

“아, 아, 아니라니까!”


귀까지 새빨개져서 전력으로 부정하는 얼굴만 봐도 알겠다. 아카아시는 물끄러미 보쿠토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금방 공감하고, 표현하는 사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마도 다른 사람도 자신 같으리라고, 의심 없이 믿고 있을. 믿는다는 자각조차 없이…….


그런 사람이 왜 그렇게 돌아서는 연인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을까, 아마도 자기 생각과 감정이 틀림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상대에게 무관심했듯이 상대의 감정도 그러했으리라 재단하고, 떠나갈 때에도 그들이 조금도 상처받지 않았으리라 믿고. 그저 멀어짐을 선언했을 뿐이라고.


“선배가 상관없는 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요.”

“엑.”

“선배가 괜찮다고 남들도 다 괜찮은 것도 아니고요.”


전부 다 다른 사람들이라고요, 아카아시가 핀잔조로 하는 말에 보쿠토는 진지하게 듣는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곧 소고기 덮밥이 나왔으므로 아카아시도 보쿠토도 방금 전까지 대화 나누던 화제는 잊고 식사에 몰두했다. 진한 색으로 잘 익은 불고기 위에 광택이 도는 노른자가 자르르 빛나고 붉은 생강의 조각이 꽃처럼 장식되어있다. 밥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기가 가득 쌓인 덮밥은, 보쿠토가 굳이 메뉴를 점찍어 주문할 만큼 무척이나 맛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