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Logout Link+ Admin Write

안/예/은의 미스/터미스터/리를 듣고 썼습니다~! 

배구선수 보쿠토x첩보요원 아카아시




---



“흐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보쿠토는 푹 젖은 셔츠를 쭉 당겨 짜며 툴툴거렸다. 잠깐 집 앞의 편의점에 갔다 올 생각이었는데 손에 비닐봉투를 달랑거리며 편의점 문을 나서자마자 빗방울이 투툭 떨어지다가, 갑자기 쏟아 붓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온 몸이 쫄딱 젖어버린 뒤였다. 


괜히 부지런을 떨었다고 후회를 해도 이미 늦었다. 곧장 마시려고 했던 맥주는 조금 더 기다려야 겠다. 보쿠토는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투를 시무룩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이 꼴로는 샤워가 먼저였다. 


“어!”


머리도 한 번 털고 안으로 터덜터덜 들어가는데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있었다. 보쿠토는 눈을 크게 뜨고는 반가운 표정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남자는 그도 한 번 본 일이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에 옆집으로 이사 온 바로 그 사람이다. 


“앗! 잠깐만요!”


꼿꼿한 자세로 서 있던 검은 머리 남자가 보쿠토를 보더니 엘리베이터 안, 버튼이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곧장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어어, 어……감사……어?”


보쿠토가 당황하며 달려왔을 땐 이미 눈앞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깨끗이 닫힌 뒤였다. 보쿠토가 문을 쾅쾅 두드렸지만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가기만 한다. 위쪽 액정의 숫자가 무정하게도 바뀌어갔다. ‘1’이었던 것이 곧장 2, 3, 4……. 마침내 14까지 올라가고 나서야 멈춘다.


얼빠진 얼굴로 닫힌 문을 쳐다보기만 하던 보쿠토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댔다. 하지만 아무리 요란하게 눌러도 엘리베이터 위의 숫자는 ‘14’에서 도통 내려올 줄을 몰랐다. 영원히 거기에 있을 작정인 것 같았다. 이쯤 되니 기가 막히기까지 한다. 보쿠토는 열을 내고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갑작스러운 폭우에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요란한 빗소리만이 그를 조롱할 뿐이었다. 


“뭔데 이거?”


편의점에 갔다 오는 것뿐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폭우가 쏟아져 그를 쫄딱 젖게 만들더니 이웃집 남자는 그를 보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고 그렇게 올라간 엘리베이터는 내려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우주의 무엇인가가 그를 놀리려고 날을 잡고 찾아온 게 아니면 이럴 수 없지 않나? 차마 계단을 걸어 올라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멍하니 엘리베이터만 쳐다보는데 경비원이 우산을 쓰고 달려왔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 같으니 수리기사를 불러야겠다는 것이었다. 


보쿠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여전히 ‘14’에 고정되어 있는 엘리베이터를 흘끗 본 뒤에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


쿵! 


시즌이 끝나고 한동안은 자유의 몸인지라, 보쿠토는 방탕한 자세로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맥주 캔을 홀짝이고 있었다. TV에서는 개봉한지 십년은 더 된 액션 영화를 해주고 있었다. 그 때 들린 것이다, 정체불명의 울림소리가. 


보쿠토는 조용히 맥주 캔을 내려놓고 TV의 볼륨을 낮췄다. 세계를 구원할 사명을 가진 스파이는 소리 없이 입만 빵긋대기 시작한다. 보쿠토는 소파에서 일어나 소파와 벽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며칠 전에 이미 소파를 조금 당겨놓았기에 무리 없이 몸이 들어갔다. 보쿠토는 숨을 죽이고 벽에 귀를 갖다 댔다. 


‘뭐야, 뭐지?’


이 옆집에는 그의 눈앞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을 닫아버린 바로 그 남자가 살고 있었다. 문 앞에서 엘리베이터가 닫혔던 그 날 있었던 유일하게 좋은 일이라곤 어떤 잡지 회사에서 응모권에 당첨됐다며 파자마를 선물해주겠다는 연락이 온 게 전부였다.


그 뒤로 보쿠토는 옆집 남자를 생각하며 만나기만 해봐라, 하고서 이를 갈고 있었는데 생각만큼 쉽게 상대를 만날 수는 없었다. 남들 출퇴근 시간에도 코빼기 하나 비추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두문불출하는 건가, 했지만 보쿠토는 몇 번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옆집 문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검은 정장의 끄트머리를. 인기척에 돌아보는 눈매는 길고 매끄러웠고 안의 청록색 눈동자는 얄팍했다. 옆집 남자는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아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의 코끝을 스치던 묘한 냄새. 시트러스가 섞인 비냄새 아래에 묵직이 가라앉아서 정체를 감추고 있는 화약 냄새. 


보쿠토가 그 냄새를 알아채고 몸을 휙 돌렸을 때 옆집은 이미 문이 닫히고 난 뒤였다. 이쯤 되니 대단히 수상쩍다는 생각이 든다. 보쿠토가 쫄딱 젖은 채로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던 그 날에도 그 남자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비 한 방울 묻지 않은, 깨끗하게 날이 서 있는 양복을. 


밤이나 낮이나 규칙성 없는 소음이 종종 들려왔고 그 때마다 보쿠토는 숨을 죽이고 다음 소리를 기다렸지만 연이어 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몇 번 쿵쾅거리기라도 하면 그 핑계를 대고서 옆집에 쳐들어가보기라도 할 텐데 그럴 수도 없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보쿠토가 계속 숨을 죽인 채 벽에 귀를 바싹 대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매번 이렇다. 보쿠토가 실망에 휩싸여 벽에서 귀를 떼려고 할 때였다.


‘어엇!’


달칵하고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건 정확히 말해 벽을 통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집 현관문 근처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옆집 남자가 문을 열고 외출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보쿠토는 현관으로 튀어나갔다. 하지만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현관문에 달려있는 렌즈에 눈을 대기만 했다.


한밤중인데도 복도는 센서 등이 켜져 환했다. 옆집 문이 열렸다 닫히는 것 같았다. 옆집 남자는 이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각이 잡힌 정장을 걸치고 있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남자가 보쿠토의 집 앞을 지나갈 때였다. 


“!”


남자가 보쿠토의 현관문을 흘끗 보고는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대고서는, 웃는 듯 아닌 듯 미묘한 표정만 남겨놓고 미끄러지듯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마치 렌즈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보쿠토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


“야, 옆집이 말야…….”


세 명은 이미 죽었고, 살아있는 것도 세 명 뿐이었지만 그 중에 제정신을 챙기고 있는 건 둘 뿐이었다. 한 명은 술을 더 마시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기어코 탄산음료를 엎었다. 코노하가 막말을 섞어 욕을 하고서 그를 밀쳐두고는 엎어진 걸 치우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 보쿠토, 뭐라고 했냐?”

“코노하, 옆집이 말야……. 내, 내 이야기는 아니고.”


더 마시겠다고 떼를 쓰던 동기의 뒷목을 쳐서 밀어놓은 코노하는 빈 잔에 생수를 채워 왔다. 


보쿠토가 선수 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로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이렇게 거나하게 모임을 갖는 건 시즌이 끝나고 난 뒤가 되었다. 대개는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모여서 내일을 맡겨놓은 것처럼 죽자고 먹어대는 모임이었다. 도무지 갱신되는 법이 없는, 보쿠토의 고루한 취향에 맞춘 오래된 액션 영화를 보는 것은 덤이다. 


코노하는 보쿠토 앞에 잔을 놓아주고는 엎어져 죽어 있는 친구를 밀어내고 앉았다. 보쿠토는 심각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내 얘기는 아니고 내 친구 얘긴데 옆집이…….”


코노하는 여기서 ‘네가 우리 말고 친구가 있냐?’라고 한 마디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옆집이?”

“옆집이 그 뭐냐……. 얼마 전에 옆집에 사람이 이사 왔는데. 옆집 남자가 첩보 요원 같아. 어떡하냐, 그럼?”

“에…….”


코노하의 눈가가 떨떠름하게 변했다. 이 나이 먹고 터무니없는 소리하는 걸 들으면 대개들 짓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보쿠토는 그런 코노하의 얼굴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서 진중한 얼굴이었다.


“막……. 하여튼 막 무슨 요원인 거 같은데! 무슨 비밀 임무 중인 것도 같고! 어떡, 어떡하지?”

“뭘 어떡해……. 알아서 먹고 살게 냅둬.”

“야! 막 무슨 위험한 임무면 어떡하냐고!”

“생명 수당 받겠지…….”

“아 진짜 코노하! 그 쪽 말고 나 말야! 내가 어떡하냐고!”

“친구 얘기라며.”

“아.”


보쿠토가 서둘러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건 그의 학창시절 버릇과 달라진 게 없었다. 코노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생수를 들이켰다. 보쿠토가 참선하는 표정이 되어 진지하게 말을 고쳤다.


“사실 지금 우리 옆집이…….”

“날고 기는 요원님이 뭐가 아쉬워서 너희 집 옆집에 오냐.”


보쿠토의 눈이 동그랗게 변해서는 꿈벅거린다. 듣고 보니 그렇다는 얼굴이다. 코노하는 혀를 끌끌 찼다. 


“왜 무슨 첩보 요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유를 들어나 보자.”

“아니 그게……. 왜 얼마 전에 비 엄청 쏟아졌던 날 있잖아, 갑자기.”

“아아.”

“편의점 가서 맥주랑 우마이봉 사들고 왔는데 비를 쫄딱 맞았거든. 그래서 막 아파트 입구에서 물 짜고 난리를 쳐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더니 옆집 남자가 있는 거 아냐.”

“아하.”

“옆집 사람이 엘레베이터를 타고 있었는데……. 내가 잠깐만요! 하면서 뛰어갔거든.”

“으응.”

“그런데 그대로 문을 닫아버리는 거야! 내 눈앞에서!”

“…….”

“진짜 내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가지고, 내가 뛰어오는 걸 빤히 보면서 닫아버리더라니까?”

“……그래서 첩보 요원이라고?”

“아, 아니. 그건 아니고. 하여튼 너무 기막히잖아. 내가 그래서 만나기만 하면 한 소리 할 거라고 딱 별렀단 말이지.”


보쿠토는 그렇게 말하며 또 속이 답답한지 코노하가 가져온 생수를 쭉 들이켰다. 코노하는 딱히 감정도 애정도 영혼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맞장구를 쳐주기만 했지만 보쿠토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근데 진짜 코빼기도 모습을 비추질 않아요! 말이 되냐 이게? 사람들 왔다 갔다 하는 시간엔 절대 안 나와. 한밤중에나 슬쩍 나오는 거 같고…….”

“일이 밤에 하는 건가보지.”

“근데 맨날 정장만 입고!”

“회사 내규가 그런갑지.”

“화약 냄새가 났다고!” 

“향수 냄새를 네가 잘못 맡은 거 아냐?”

“…….”


보쿠토가 뭐라고 항변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천천히 다물었다. 어깨가 축 늘어진다. 주장하는 모든 문장을 후려친 코노하는 마지막 삼진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곤 보쿠토가 말하는 옆집이 있다는 벽을 톡톡 두드렸다. 보쿠토가 깜짝 놀라서 코노하의 손을 낚아챘다. 코노하가 손가락 다 부러지겠다고 한참이나 엄살을 부리고 나서야 보쿠토는 그 손을 놓아주었다. 


“옆집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데.”

“키는 나보다 쬐끔 작나? 180은 넘은 거 같고……. 머리는 까만색이고 눈썹도 까맣고……. 눈매는 이렇게 가늘고 청록색 눈동자인데…….”

“아니 한 번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다면서 왜 이렇게 잘 알아.”

“뭘 잘 알아. 그리고 보긴 봤다고 했잖아.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 봤다니까.”

“보통……. 아니다, 아냐. 여튼 그래서 이 옆집에 요원님이 사신다고? 경호나 해달라고 해라. 너 요새 무슨 스토커 하나 붙었다며.”

“요즘은 안 보이는데다가 무슨 경호를 해 달라고 하냐. 인사도 한 번 안 해봤는데.”


보쿠토는 상기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코노하는 보쿠토의 그 고전적인 영화 취향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보쿠토는 지금 이 상황이 영화의 도입부쯤 되는 걸로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 인사를 하러 가면 되겠네.”

“……엥?”

“옆집 사람이라며.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댔지? 인사나 한 번 해. 우리 또래 남자야?”

“어, 아마도…….”

“이웃도 됐는데 맥주 한잔 합시다~! 하면 되지.”


삭막한 현대 사회에서 이런 게 통할 리야 없겠지만, 전국의 전광판과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고 있는 보쿠토 코타로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본토에 발 디디고 사는 사람이라면 어디에서건 한 번은 보쿠토의 얼굴을 봤을 것이다. 대단히 뛰어난 배구선수이자 그 수려한 피지컬과 마스크를 십분 활용에 광고를 몇 개나 찍어댔는데 그의 얼굴과 신분을 모르는 쪽이 더 이상하다.


“그, 그러면 되려나?”


그나저나 그 스파이인지 첩보 요원인지 하는 이웃 남자가 도대체 얼마나 어떻게 생겼길래 이 자식이 이 난리람, 코노하는 들뜬 것이 분명한 보쿠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술에 취해 뻗은 친구들을 수습하려면 이런 것에까지 기력을 낭비할 수 없었다. 


보쿠토는 벌써 옆집 사람과 한잔 마주치는 생각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


“안녕하세요, 옆집인데요~! ……는 너무 어색한가?”


보쿠토는 거울 앞에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자기 자신을 노려보았다. 현관에는 맥주 두 캔과 성심을 다해 고른 우마이봉 세트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나서려다가 긴장이 돼서 그만 다시 화장실로 뛰어 들어온 보쿠토였다. 대사 몇 가지를 이리저리 조합해보던 보쿠토는 일단 부딪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늘은 밤이 됐는데도 옆집 남자가 나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쉬는 날인 것 같았다. 몇 차례 쿵, 쿵 하는 정체 모를 소음이 났기에 확신하는 바였다. 보쿠토는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한 맥주캔과 안주용 과자를 챙겨들고는 집을 나섰다. 문을 열자 복도의 센서등에 불이 들어왔다. 


‘어?’


옆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평소와 달리 옆집 문이 반 뼘 정도 열려 있었다. 보쿠토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은 조용히 자신의 현관문을 닫았다. 


‘왜 문을 열어뒀지? 더워서 그런가?’


에어컨이 고장난걸까? 보쿠토는 고개를 갸웃하며 옆집 문 앞에 섰다.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건 자신이 긴장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왜인지 노크를 하기도, 초인종을 누르기도 망설여진 보쿠토는 슬쩍 현관문을 당겨 조금만 더 열어보았다. 


내부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삭막한 풍경이었다. 누군가가 이사를 온 집이라기보다는 이사를 올 집인 것 같다. 사람이 없는 것처럼 컴컴했고 현관에는 신발 하나도 나와있는 게 없었다. 현관에서부터 이어진 바닥의 묘한 먼지 자국은 구둣자국인 것 같았다.


“어, 저기요……?”


여기만 뭔가 지독하게 조용하지 않아? 보쿠토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보쿠토가 목소리를 내보았지만 응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보쿠토가 안으로 들어온 순간 현관의 센서등이 팟 하고 빛을 발했고 그 때 보쿠토는 어둠에 가리워져 있던 모든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거실의 소파를 사이에 두고 다섯인지 여섯인지 혹은 열인지,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모두 새카만 정장에 구두를 신고 있다. 실내 바닥의 구둣발 자국은 모두 저 사람들이 낸 것 같았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그들은 모두 서로를 향해 양팔을 뻗고 있었다. 손에는 무엇인가를 쥔 채.


“어……. 옆집, 저기 옆집에서 왔는데.”


그 다섯인지 여섯인지 열인지 그 이상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한 순간에 보쿠토를 돌아본다. 총구의 끝이 차르르 그를 향할 때 보쿠토는 눈을 한 번 꿈벅였고 그들 사이에서 옆집 남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옆집 남자는 여전히 새카만 정장에 흰 셔츠, 그리고 꼭 자기 눈같은 푸른색 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도 총이.


보쿠토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그가 들고 있던 맥주가 타앙,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그 순간 모든 일이 시작되어버렸다.


*


그 뒤부터는 모든 게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가 ‘보쿠토 씨!’라고 소리쳤는데 아마도 옆집 남자가 그를 부른 것 같았다.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소파에 있던 쿠션 하나가 허공으로 떠올라 터지며 흰 솜을 뿜어낸다. 그와 동시에 탕탕탕 하는 총성이 정신없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쨍그랑 하고 유리창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고 천장이 갑자기 닿을 듯이 가까워지는 것도 같았다. 소파와 쿠션, 종이컵 더미가 마치 만국기 마술처럼 허공을 요란하게 오갔고 그 사이 사이를 총알이 마음껏 누볐다. 


귀가 먹먹하게 울리는 소리, 몸이 어딘가 요란히 부딪히는 것 같은 감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꼭 감고 있던 보쿠토는 이윽고 주위가 죽을만큼 조용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웅웅 울리는 듯이 먹먹하기만 한 귀에 다른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 때였다. 


‘심장 소리……?’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하고 보쿠토가 겨우 눈을 꿈벅거릴 때 그 심장소리도 멀어졌다. 보쿠토는 자신이 누군가의 가슴팍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는 걸 그 때야 알아보았다.


“다친 덴 없으십니까?”

“아…….”


실내는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여기저기에 도대체 언제 들어선 것인지 모를 간이 전구가 빛을 밝히고 있는데 온 벽에 다 총구멍이 나 있고 바닥엔 터진 패브릭과 솜이 천지로 돌아다녔다. 있는 유리란 유리는 전부 다 깨져서 찬란할 만큼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그 사이에 붉은 자국들을 보고서 정신이 번쩍 든 보쿠토가 입을 딱 벌렸지만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옆집 남자는 팔뚝을 걷고 있었다. 옆에는 또 처음 보는 사람이 붙어서 그의 팔에 거즈를 붙여주고 있다. 옆집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치료해주는 사람은 가차 없었다. 그의 처치가 끝나자 다른 사람에게로 향한다. 그 뒤로 모르는 사람이 서너 명 더 들어와 실내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보쿠토는 입을 버끔거리며 그 모든 걸 쳐다보기만 했다.


“보쿠토 씨. 다친 덴 없습니까?”

“어, 어, 없는데……. 나는,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듣고 본 건 뭐였지? 자신이 이 집에 들어왔을 땐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실내에 남아있는, 정장을 걸친 사람들은 몇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남은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이며 이건 무슨 일이고 내 맥주와 우마이봉은…….


“아…….”


때마침 실내를 청소하던 사람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던, 형상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인 캔을 집어 들었다. 안에서부터 황금빛 투명한 액체가 자르르 흘러나온다. 보쿠토가 들고 왔던 맥주캔이었다. 같이 있던 다른 것들은 문자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이게……. 당신은…….”

“유감스럽지만.”


옆집 남자는 담백한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팔뚝의 상처에서 흘렀던 피가 뚝 하고 바닥에 떨어져서 보쿠토가 퍼드득 놀랐다. 


“덕분에 작전 본부가 엉망이 됐으니 신세지겠습니다.”

“자, 작전 본부?”

“그리고 봐선 안 되는 걸 보셨기 때문에 한동안은 24시간 풀타임 감시가 있겠습니다. 불편하셔도 참아주세요.”

“아, 아니, 저기요! 저기!”


자기 할 말만 뱉은 남자가 옆을 지나가는 다른 사람에게서 서류가방 하나를 받아들더니 척척 걸어간다. 정말 당장 자신의 집으로 가버릴 기세였던지라 보쿠토는 허둥지둥 남자를 따라나섰다.


“아니, 이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아니 그보다 우리 집에 간다고!? 왜!? 왜!”

“말씀드렸다시피 덕분에 여기가 엉망이 됐으니까요.”

“아, 아니 그게 왜 나 때문인데! 니네들이 총질을 해서! 아씨, 진짜 주, 죽는 줄 알았네!”

“보쿠토 씨가 들어오는 바람에 총격전이 됐잖습니까. 서로 견제만 하고 끝낼 수 있었는데도 말이죠. 오지 말라고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

“누, 눈치를 줘!? 언제!? 아니 저기 우리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남들이 봤으면 영락없이 야근하고서 자택으로 돌아온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누르곤 안으로 들어간다. 보쿠토가 혼비백산했지만 옆집 남자는 거침이 없었다. 


“생일로 현관 비밀번호는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것 아닙니까. 웬만하면 바꾸세요.”

“생일!? 내 생일도 알아!? 다, 당신 누군데! 누구야!”


옆에서 보쿠토가 꽥꽥거려도 남자는 시종일관 흔들림 없는 표정이었다. 따라 들어온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더니 서류에는 무언가를 기입하고 서명까지 해서 넘겼다. 그것을 서너 번쯤 반복하고서 마침내 단 둘이 남았을 때야 옆집 남자가 보쿠토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안 해! 잘 부탁 안 해! 안 한다고!”

“그럼 저는 피곤해서 먼저 자겠습니다.”


하지만 보쿠토가 어떻게든 해보기 위해 말을 찾아 헤매는 사이에, 아카아시라고 이름을 밝힌 옆집 남자는 그대로 보쿠토의 침실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한 점 망설임도 없는 것이 처음부터 침실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 내 침대거든!”

“보쿠토 씨도 여기서 주무시던가요.”


보쿠토가 요란하게 따라 들어갔을 때 아카아시는 이미 양복을 벗고 파자마 차림이었다.


“그거 그 파자마 내가 이번에 이벤트 당첨됐던 건데! 아직 개시도 안 한 건데!”

“저희가 당첨시켜드린 겁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그대로 침대에 들어가더니 베개 하나는 자신이 베고 하나는 끌어안고서 눈을 감는다. 보쿠토는 몇 번 더 이 말도 안 되는 폭거에 대해 소리치다가 그만 남자가 정말 자는 듯 보이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결국 침대만 몇 번이나 뱅뱅 돌다가 침대로 기어들어온 보쿠토는 머리에 아무 것도 베지 못한 채 눈만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이었다. 옆자리에 옆집 남자가 누워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는 것 같은데 옆집 남자는 남의 집에서 잘도 잔다. 보쿠토는 마음속으로 네 번쯤 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를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옆집도 조용해지고 이 침실마저 보쿠토의 쌕쌕하는 숨소리만 남았을 때, 보쿠토의 옆집 남자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묘한 웃음기가 있다. 


—옥상에서부터 내려오던 잔챙이 둘도 치웠어. 케이지, 거기서 잘 거야?


남자는 귓속에서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고서 자신이 안고 있던 베개를 보쿠토의 머리 아래에 넣어주었다. 


—그 사람 스토커는 잘 훈계해서 내보냈어.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라더라.

“누가?”

—쿠로가. 

“다행이군.”

—그쪽을 본부로 쓸 거면 짐 보낼게. 내일쯤 갈거야.

“응, 부탁해. 켄마.”

—통신 종료.


남자, 아카아시는 귓속의 목소리가 ‘통신 종료’를 말하자 이어피스를 빼냈다. 구름이 걷히고 침실에 달빛이 들이찼다. 아카아시는 이불을 걷어차는 이웃 남자를 보며 고개를 내젓고는 그가 걷어찬 이불을 덮고서 잠에 빠져들었다.


***


“켄마. 왜 닫았어?”


아카아시는 몸을 세우며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바라보았다. 금방 2가 되었다가 곧 3, 4, 5, 그렇게 차례대로 숫자가 커졌다. 


승강기 안에는 아카아시뿐이었지만 아카아시의 혼잣말에 대한 대꾸는 그의 귓속에서 울려 퍼졌다.


—호기심 넘치는 사람이야. 너무 친해지면 곤란해.

“그렇긴 한데…….”

—아무리 네가 그 사람 팬이라도.

“그래서 한 말은 아냐.”


아카아시는 엘리베이터의 벽에 몸을 기대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열림 버튼을 눌렀는데 엘리베이터의 문은 그가 닫힘 버튼을 누른 것 마냥 단호하게 닫혔고, 아카아시가 마지막으로 본 건 황망한 보쿠토의 눈동자였다. 누군가가 강제로 닫았다면 지금 상황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다. 


—무보수 호위까지 해주는 건 팬이라서, 아니야? ……그 사람 편지함에 있던 건?

“수거했어.”


아카아시는 등 뒤로 돌린 채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앞으로 돌려 살펴보았다. 보쿠토에게 붙었다는 악질 스토커가 매번 보내는 것이었다. 무게감과 냄새를 살펴봤을 때 죽은 쥐 같은 걸 넣어둔 것 같다. 


“추적해줘.”

—……알았어.

“그건 그렇고 이번 임무 세팅은?”

—끝났어. 조심해. 눈치 챈 녀석들이 있는 것 같으니까.


아카아시는 귓가로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간단한 대답을 하거나 했고 엘리베이터가 14층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타는 사람은 없었다. 


“그보다 기분 상한 것 같으니 무슨 이벤트라도 당첨시켜 줘야겠어.”


눈앞에서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보이는 그 어처구니없고 황망한 표정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아카아시가 꾹 참고 하는 말에 귓속의 이어피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린애야? ……알았어. 파자마 하나 보낼게.


음성 너머에서도 귀찮아하는 표정이 눈에 역력하다. 아카아시는 작게 웃음을 삼켰다. 때를 맞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눈치는 벌써 챈 것 같네. 엘리베이터 봉쇄.”

—……라져.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14층에서 내려가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