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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우연이다!”

“우연은 개뿔…….”


보쿠토가 이죽거리며 중얼거리는 소리는 다행이 아카아시의 귀에밖에 들리지 않았다. 


“선배 오시는 줄 몰랐네요.”

“나도 야~! 이런 데서 너를 보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깔보는 듯한 표정이지만 평소보다 훨씬 더 애쓴 기색이 역력했다. 아카아시는 옆의 보쿠토를 흘끗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만사 관심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줄곧 ‘정말 하나도 이해를 못하겠다’고 떠들던 현대 미술 작품을 갑자기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으니까. 


“옆에는 그 애인?”

“예. 그렇게 됐네요. 혼자 오셨습니까?”


나미카와는 이쯤에서 적당히 보쿠토와 인사를 나누리라 생각했는지, 아카아시의 야멸찬 화제 전환에 잠시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나는 뭐 친구 얼굴 보고 그러려고.”

“친구?”


보쿠토가 그 소리에 슬쩍 끼어들었다. 그 어조가 명백히 ‘네가 이런 데에 친구가 있어?’ 였기 때문에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옷깃을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만류해야 했다. 보쿠토는 다시 흥미를 잃고 그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 나미카와의 ‘친구’가 등장했을 때엔 보쿠토도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사람이자 보쿠토의 바로 그 사촌.


“아키오?”


보쿠토 아키오였다. 


“어~! 코타로. 왔어? 언제 왔냐. 왔으면 인사부터 해주지!”

“그쪽 둘이 언제부터 친구였지?”


사촌이 살갑게 인사하며 다가왔지만 보쿠토가 노골적으로 웩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보쿠토의 사촌, 아키오가 내쳐진 자신의 손을 보며 살짝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금방 웃는 표정으로 바꾸었다. 


“학업 성취가 뛰어난 인재를 놓칠 수는 없지 않겠어? 너는 경영엔 별로 참가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

“아, 돈 주고 샀어?”


아키오가 관대한 척 말하는 것을 단칼에 끊은 보쿠토가 이제야 이해했다는 명쾌한 얼굴로 두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상쾌한 모욕에 아키오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가 겨우 폈다. 


“우정에 돈을 운운하는 건 서운하지. 그보다 숙부님은 만나 뵈었어?”

“어, 삼촌은 들어올 때 봤어.”

“우리 장래의 형수님 보곤 뭐라셔?”

“맘에 든대. 뭐 나만 곤란해졌지. 내가 개짓거리 하면 뻥 차버리라고 우리 아카아시한테 자꾸 농담을 해서 말야.”


보쿠토의 손이 아카아시의 허리를 단단히 휘어감았다. 두 사람이 만나고 가장 가까이 접촉한 순간이었다.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려다 자연스레 내쉬고는 보쿠토의 가슴팍에 몸을 가까이 했다. 


“아하하, 이제 진짜 곤란해진 건 나네. 네가 정말 이대로 짠 하고 결혼해 버리면 내 유산도 전부 너한테 갈 거 아냐.”

“전부는 아니지. 고작 섬 하나 가지고 뭐 그렇게 엄살이야?”


보쿠토가 한쪽 눈썹만 치켜 올리며 핀잔 던지듯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키오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보쿠토의 그 말만 기다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키오가 웃음소리를 섞어 보쿠토의 어깨를 툭 쳤다. 


“너야말로 고작 섬 하나 때문에? 응? 평생 가는 사람 안 막고 오는 사람 안 막더니 갑자기 아무나 데려와서 여기저기 소개 시키고 난리잖냐~!”


‘아하하’하는 경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문장이었지만 그 말에 같이 웃은 사람은 나미카와 정도였다. 보쿠토는 멀뚱한 얼굴로 아키오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지나가는 웨이터에게서 샴페인이 찬 것으로 잔을 바꿨다. 그 때까지도 아키오와 나미카와는 즐거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고 있었다.


“아키오. 좋은 자리 아니냐? 오랜만에 삼촌도 오셨고.”

“그렇지?”

“너도 친구인지 하인인지 데리고 있고.”


보쿠토가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잔에 든 샴페인이 넘치기 직전에 정교할 만큼 섬세하게 멈춘 보쿠토가 그 잔을 아키오에게 불쑥 내밀었다. 아키오가 당황해서 잔을 받자마자 안에 든 샴페인이 아키오의 손에 쏟아졌다.


“그러니까 적당히 해라. 좋은 자리 망치지 않게.”


아키오가 옷에 묻은 샴페인에 호들갑을 떨 때 보쿠토가 그대로 아카아시를 데리고 두 사람 앞에서 벗어났다. 뒤쪽에 가벼운 소란이 일었지만 아카아시만 한 번 뒤를 흘끗 돌아보았을 뿐, 보쿠토는 보폭이 큰 걸음걸이로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앞을 향해서만 걸어갔다. 


*


“……조심하세요.”

“하, 진짜—!! …응?”


갤러리 바깥에 마련된 테라스에서 격렬하게 부채질하며 샴페인 두 잔을 연거푸 비운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작은 목소리에 그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는 열이 오른 보쿠토의 얼굴을 보며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입에 담고 만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를?” 

“저 사람이요. 이름이 아키오인가.”

“걔를 조심하라고?”


보쿠토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육식과 맹수가 조그만 설치류를 조심하란 충고를 들을 때에나 저런 표정이 나올 것이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이 좋지 않습니다.”

“걔가 썩은 생선 같은 눈빛인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쥐도 궁지에 물리면 무는 법이잖습니까.”


그 말을 들은 보쿠토가 처음엔 얼빠진 표정을 짓다가 나중에는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아카아시는 즐거운 얘기를 한 게 아니라며 보쿠토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보쿠토는 들은 척도 않고 신명나게 웃다가 겨우 허리를 폈다.


“너 진짜 내 애인 하기에 정말 완벽한 애네.”

“갑자기 뭡니까…….”

“그래서 결국 그 자식이 쥐새끼란 거 아냐?”


자기가 말하고 또 웃겼는지 배를 잡고 웃는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유가 그렇단 법입니다.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유산이 문제가 아니라 보쿠토 씨를 싫어하는 모양인데.”

“저 자식이 날 싫어한 건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일걸.”


아카아시는 말을 해놓고도 아차 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보쿠토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성격 나쁘단 소리 한 번 했을 땐 세상 무너진 듯이 굴더니.’


그러면서 누가 자길 싫어한다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익숙한가보네요.”

“정확히 말하면 누가 날 싫어하는 거엔 익숙하지.”

“……그렇습니까?”

“응. 근데 난 잘못한 게 없으니까? 뭐 맘대로 하라고 내버려두고 있지만.”


보쿠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카아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지간히 제멋대로인가 싶었더니 묘하게 마음이 여린 구석도 있고, 푹하고 찌르면 찌르는 대로 난리가 나는 사람인가 싶었더니 또 의외로 몹시 단단하다. 


“근데 그거야말로 내가 할 말 아닌가? 네가 더 조심해야겠는데?”


보쿠토는 다 비운 샴페인잔 두개를 서로 총총 맞부딪히는 장난을 치며 말했다. 아카아시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요?”

“아키오는 날 공격할 필요가 없어. 뭐 내가 싫기야 하겠지만. 너만 없어지면 되니까 네 선배 자식을 섭외한 거 같은데?”

“그걸 그쪽이 그렇게 담담하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잠자코 보쿠토의 말을 듣던 아카아시가 험악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보쿠토에게 바짝 다가가 그의 타이를 손에 얽어 쥐었다.


“곧 있으면 대학원도 졸업인데 이 아르바이트 때문에 망치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아, 아니 왜 나를!? 왜 나한테 뭐라고 해!?”

“알아서 지켜주세요. 알겠습니까.”

“그거야 나도 당연히 하는 건데……. 아니 내 말은……. 내가 그렇다고 너희 연구실에 죽치고 앉아서 저 새끼가 허튼짓 하나 안 하나 살펴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


보쿠토가 언성을 높였지만 그게 듣기 싫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쿠토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발을 굴렀다. 


“넌 내가 진짜 그러면 질색할거면서!”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러기만 해봐요. 아카아시가 도끼눈을 뜨고 보쿠토를 노려보았다. 보쿠토의 눈동자에 분함이 한가득 들어찼다.


“나처럼 괄시받는 고용주도 어디 없을 거다. 아까 전엔 보니까 너네 선배가 아키오 손도 닦아주고 옷도 닦아주고 하던데.”

“저도 그쯤은 해드리잖아요.”

“남들 볼 때만 해주잖아!”


보쿠토가 버럭 외치다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아카아시는 그 표정을 보고 설마 다른 사람이 야외 테라스에 들어왔나 싶어 휙 돌렸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보쿠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사람 놀라게 그런 표정을……. 보쿠토 씨?”

“아, 아무것도 아냐.”

“술 너무 마신 거 아닙니까?”

“아냐! 아니라고. 샴페인이 무슨 술이야.”

“술 취한 사람 맞는 거 같은데.”


아카아시가 눈살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보쿠토가 양손을 푸드덕거렸다. 본인이 아니라고 저렇게 열심히 주장하는데 달리 어쩔 방도야 없다. 아카아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기만 했다. 


그리고 정말로 술 취한 사람은, 이 야외 테라스가 아닌 실내에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