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Logout Link+ Admin Write











그 뒤로 보쿠토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약속했던 월수금에 맞추어 학교의 정문 앞으로 나가보았지만 달이 뜰 때까지도 보쿠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몇 번이나 휴대전화의 액정에 빛을 밝혔지만 보쿠토의 연락처를 눌러볼 수는 없었다. 


그 일주일간의 침묵, 아카아시의 즐겁지 않은 휴가가 끝나고 다시 연구실로 복귀한 아카아시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그 계약서를 훔쳐간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여어, 아카아시~! 시험은 어땠어? 잘 나왔어? 성적 나온 것도 몇 개 있던데 확인했냐?”


갤러리에서의 일 이후로 묘하게 눈치를 보는 듯이 굴었던 나미카와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화색이 완연했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자신의 심증을 확신으로 굳혔다. 


“그런가요. 한 만큼 나왔겠죠.”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타인을 망가뜨리는 것이라면 그 얼마나 가엾은 인생인가. 아카아시는 자신의 그러한 초연했던 생각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가엾은 인생 따위가 아니라 단지 어둡고 깊은 악의였다.


“우리 엘리트는 진짜 남달라~!”


나미카와가 느물하게 웃으며 아카아시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아카아시는 나미카와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그 팔을 풀었다. 나미카와는 까칠한 후배라며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툭툭 친다. 그 전이었으면 어디 선배를 무시하는 거냐고 발끈하기부터 했을 텐데 그것마저 태도가 달랐다. 


그 사이에 연구실 사람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아카아시는 선배들에게 인사하며 자연스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아카아시의 뒤로 선배들이 대화 나누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나미카와, 밤이라도 샜냐. 뭐 했냐. 뭐 했기는.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나미카와의 우쭐대는 목소리. 


아카아시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마우스에 손을 올리며 생각했다. 그래, 자신이 보쿠토를 보고 경탄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렇게 질퍽한 진창으로 뛰어들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도 있는데 늪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사람을 보고서 어떻게 감탄하지 않을 수가 있나. 


아카아시는 아무 소식이 없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주 그 자리에서 나타난 계약서가 어떻게 된 일인지 이제야 알았다. 알고 나니 사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뭐에 대해서? 내가 보관하던 계약서를 도둑맞았고 그것 때문에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라고?’


그런 말을 하면 보쿠토가 무슨 이야기를 할까?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자신이 사과하고픈 이 마음이 정말로 자신의 실수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미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보쿠토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기 때문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애당초 나미카와를 그의 자취방에 들여 재워주었던 것도 보쿠토 때문이다. 가짜 약혼자 행세를 하고 있으니 그의 집안 어르신들에게 트집잡히지 않기 위해서였지, 그게 아니었다면 나미카와가 낯선 갤러리에서 술에 취해 뻗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나미카와가 결국 아카아시의 계약서를 훔쳐간 것도, 잘잘못을 따지자면 나미카와의 잘못 아닌가. 도둑맞은 사람과 훔쳐간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도둑맞은 사람의 잘못이 성립할 수가 있나. 


그런데 이 모든 이성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하고픈 마음이 드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삼켰다. 등 뒤에서는 선배들이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나미카와는 그에게 하고픈 말이 있는 듯했지만 당장 찾아온 으스댈 기회를 놓치는 것도 아까운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속으로 ‘평생 그러고 있어라.’하고 중얼거리며 논문 파일을 향해 마우스 포인터를 옮겼다. 


그의 마음이 달밤에 잘못 맺힌 이슬처럼 심란해도 논문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




그 뒤로 다시 일주일이 지났지만 보쿠토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계좌로 연락이 왔다. 아카아시는 입금된 그 액수만 보아도 보쿠토가 계약 그대로 정확히 계산해 넣어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걸 받고도 아무 말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카아시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보쿠토의 번호를 찾는 손길은 익숙했다. 자신이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해 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얇은 카디건 하나만 챙겨 연구실 건물의 비상계단에 기대어 선 아카아시는 뿌연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낀 겨울 하늘은 흐릿한 잿빛이었다. 날이 많이 춥지 않아서 눈이 아니라 비가 올 것 같았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쿠토가 전화를 받았다. 아카아시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보쿠토가 자신의 전화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단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여보세요.》

“…….”


막상 전화했지만, 말문이 턱 막혔다. 잘 지냈어요? 잘 지냈으면 보름 가까이 연락 한번 없을 리가 없다. 괜찮으세요? 뭐가 괜찮으냔 말인가? 그가 그토록 바라던 유산을 결국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이? 오랜만이네요. 그럼 오랜만이지 않겠나,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헤어진 지 오늘로 보름째인데. 


《아, 입금은 했어.》

“……네, 봤어요.”

《그동안 고마웠다.》


보쿠토의 말은 딱딱했다. 아카아시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는 모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들통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어요? 그 상황에서 아무 말 못 한 건 당신 아닙니까? 탓을 할 때야 하더라도 몇 날 며칠을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말이라도 하던가요.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수습은 잘 했습니까?”

《…….》


이따금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여기서 멈추는 게 모두에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하고야 말게 되는 말이 있다. 왜 그 한 마디를 참지 못하는지 줄곧 의아했던 아카아시였으나 이제 알 것 같았다. 


사람은 뜻대로 되지 않는 걸 보며 종종 그럴 바에야 다 부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뭐 대충.》

“그렇습니까. ……유산 문제는 유감이…….”

《그게 중요하냐?》


보쿠토의 목소리에서 날 선 못이 느껴졌다.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듯이, 보쿠토의 인내도 어딘가에서 끊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두 사람이 함께 구축해온 모든 게 부서지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 짧은 찰나에 깨달았는데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됐다. 말해 뭐하냐》


보쿠토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비난과 짜증의 기색이 어려있다. 아카아시는 입을 다물었다. 어떤 방향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보쿠토는 사람을 고용해서라도, 비겁한 짓은 싫다고 하던 그가 가족을 속여서라도 조모에게 ‘결혼할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유산이 걸린 것은 핑계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몇 번이나 했다. 


그가 애쓰고 노력했던 것들 전부가 가족 모두 앞에서 밝혀졌고 비난받았으니 말끔한 기분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가에게 화풀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지난 이주 간 서로 연락하지 않았으니, 보쿠토에게도 응어리진 마음이 있을 것이었다. 그걸 자제하고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까지 아카아시는 알고 있었다. 


“말씀 재밌게 하시네요.”

《……뭐?》

“비난을 하고 싶으면 똑바로 제 탓을 하시든가요. 어떻게 된 경위인지 모르겠으면 아느냐고 물어나 보시던가요. 의심이 가면 의심하고 있단 얘기라도 하던가요.”

《그렇게 얘기한다 이거야?》

“말해 무엇하냐 하셨죠? 그런데 보쿠토 씨는 아무 말도 안 하셨는데요.”

《……나만 말 안 했냐?》


잔뜩 쉰 것같은 쇳소리였다. 아카아시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보쿠토가 소리쳤다.


《너도 아무 말 안 했잖아!》

“제가.”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아카아시의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변명? 할 게 있으면 있는 사람이 먼저 말해야 되는 거 아닌가? 계약서 쓰자는 대로 다 썼더니 그것 때문에 일을 전부 망치고, 그래도 약속한 대금은 지불 했는데 뭐가 또 필요해?》

“제가 지금 더 필요하단 얘기가…….”

《아, 혹시 아키오 그 자식이 뭐 더 얹어주겠단 얘기라도 했어? 아니면 그 나미와카인지 카와인지를 치워주겠대? 그래서 우리 계약서 넘긴 거 아냐?》

“뭐라고요?”

《나하고 있을 땐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아 내가 너무 눈치 없이 한 번에 수긍했나? 몇 번 더 물어볼 걸 그랬지?》

“……그게 할 말입니까?”


차갑게 얼어붙은 것이 단숨에 박살이 나듯, 그들 사이에 있던 모든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간다. 깊이 없이 얄팍했기에 가루로 깨어진 것들은 순식간에 기화되어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아카아시의 말에 더 퍼붓기라도 할 듯이 숨을 들이켰던 보쿠토가 씹어뱉듯 무어라 중얼거리고는 더 할 말 없다고 전화를 뚝 끊었다. 아카아시는 전화가 끊긴 휴대전화를 세게 움켜쥐고 액정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처음부터 계약으로 만난 상대일 뿐이었다.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일은 끝났고 더 이상 만날 일은 없으니 말끔히 버리고 던져버리면 될 것이었다. 


보쿠토의 생각이 부당한 오해이고, 그러니 다시 전화를 해서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면 오해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카아시는 지친 눈으로 흐릿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해를 풀어서 무얼 하나? 일은 이미 벌어졌고, 자신과 보쿠토는 친구조차 못 되는 사이다. 해결한다 해도 돌아오는 건 깨진 것을 억지로 이어붙여 놓은, 다시 쓰지도 못할 도자기 같은 관계뿐이었다. 이런 것은 손에서 놓아버리는 편이 더 편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앞에 놓여있는 목표가 있다. 아카아시는 휴대전화의 액정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보쿠토의 번호를 지웠다. 이게 보쿠토 역시 바라는 바일 것이었다. 





----


여기까지 봐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허니문 아일랜드는 322p로 완결, 다가올 대운동회에서 회지로 만나뵙겠습니다^-^! 

(요기까지는 약 150p 분량입니다)


봐주신 분들 덕분에 완결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ㅠ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