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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파티에…….”

“파티입니까? 무려?”

“아, 아니. 모임. 모임! 모임에.”


보쿠토가 황급히 단어를 수정했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걸 물릴 수는 없었다. 아카아시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미간에 손을 올렸다. 그런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았으나.


“그 모임에 우리 막내 삼촌이 오는데.”

“대가족이군요.”

“막내 삼촌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뛰쳐나갔다가 지금은 집만 한 채 받고 딴 건 물려받을 생각 없다고 한 사람이거든.”

“흠.” 


아카아시는 머리 속으로 보쿠토 집안의 가계도를 그려보았다. 집안 유산 대부분을 물려받기로 되어 있을 이 사람과 아마도 적당히 나눠 받을 사촌. 유산의 분배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음에도 이 복마전에서 발을 빼겠다고 선언한 막내 삼촌.

 

‘아직 삼촌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아직 미혼일 수도 있겠군.’

“거기다 막내잖아. 그래서 우리 할머니가 엄청 그런단 말이지.”

“유산은 아무것도 안 받기로 한 막내아들이란 말이군요.”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가만히 두기만 해도 절로 눈길이 가는 막내아들일 것이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랑도 좀 친하고.”

“그런데요?”

“지금까지 집에 아무도 인사 안 시킨 건 막내 삼촌 탓도 있거든.”

 

저 인사시키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아마 지금까지 보쿠토가 만나온 사람들 얘기일 것이다. 보쿠토가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아카아시는 놀란 내심을 갈무리하며 메밀 국수를 입에 집어 넣었다.

 

“삼촌이 내 애인들 다 싫다고 뭐라 했어. 삼촌이 그러니까 나도 좀 그렇고 할머니도 그렇고…….”

“그러니까 예선전 뒤로 본선이 그냥 본선이 아니라 준결승전부터 해야 한다는 거군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멀건 국수를 내려다보았다.

 

“그 삼촌 분을 파티 말고 다른 장소에서 따로 만나 뵙는 건 안 되는 겁니까?”

“삼촌은 편들어 주는 거 싫어해.”

“……지금 당신은 나갈지 안 나갈지도 모르는 그 사촌 파티에 나와주는 거 자체가 사촌 편들어 주는 거 아닙니까?”

“아, 그게 내가 나와버린다고 해서 삼촌이 오기로 한 거거든.”

 

보쿠토가 해맑게 웃는다. 아카아시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표정을 본 보쿠토가 그제야 헛기침했다.

 

“아니 그럼 거기서 삼촌도 있는데 내가 안 간다고는 못 하잖아!”

“허……. 그래서 그 삼촌이 절 마음에 들어 하셔야 된다 이거군요.”

“뭐 이젠 삼촌이 맘에 안 들어해도 어쩔 수 없지. 밀고 나갈 거야. 나갈 건데……. 그……. 출석하는 성의? 정도랄까?”

“얼굴만 비추면 됩니까?”

“응! 응응!”

 

보쿠토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겠습니다…….”

“진짜로 미안해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지친 표정 하지 마아…….”

 

아카아시는 보쿠토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고개를 들어본다. 보쿠토가 애원과 울상이 섞인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원한다는, 사촌한테 갈지도 모른다는 유산 말입니다.”

“응.”

“보쿠토 씨가 그 사촌에게서 사 오면 안 되는 겁니까?”

“걔가 날 얼마나 싫어하는데. 자기 손에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 자식은 죽어도 안 팔아.”

“방법이 전혀 없습니까?”

 

보쿠토는 지금까지 어린애처럼 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완연히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 되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방밥이야 있겠지. 만들면 되지.”

“그런데 안 하는 거군요.”

“그 자식도 할머니 손자니까.”

 

이번엔 아카아시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테이블 위에 침묵이 흐른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보쿠토가 남은 락교를 하나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유산을 누구한테 줄까 고민하는 게 아냐. 나한테 줄 거야. 그냥 당신 생전에 내 짝을 보고 싶어서 으름장 놓으시는 거지. 그러니까 난 할머니 소원 들어드리는 거라고, 유산은 부수적인 거고.”

“거짓말로 들어드리는 소원 아닙니까?”

 

보쿠토는 남은 락교를 하나 더 입에 넣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소원 이뤄드리고 싶다는 손자 마음이 중요한 거야.”

“뭐 그렇다고 하죠.”

 

다 먹었으면 일어나죠, 그렇게 말한 아카아시가 자신 몫의 쟁반을 집어 들려고 했지만 그보다 보쿠토가 더 빨랐다. 보쿠토는 자신의 쟁반을 왼손에, 아카아시의 쟁반을 오른손에 들고는 놀랍도록 균형감각 있는 걸음으로 퇴식구를 향해 걸어갔다. 쟁반 두 개를 나란히 집어넣은 보쿠토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잘 안다고?”

“어디서 찾아 보셨나보네요.”

“요즘엔 이런 거 동영상도 있더라? 학생 식당에서 밥 사는 법이랑 다 먹은 거 처리하는 법 이런 거.”

 

농담이었는데 정말로 찾아본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기가 막힌단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쿠토가 또 뭐가 문제냐며 달려든다. 그걸 겨우 진정시킨 아카아시는 학생 식당 1층에서 커피를 사들었다.

 

“저는 이제 다시 연구실 가봐야겠습니다.”

“주말에 나와주는 거지?”

“별 수 없죠. 준비는 맡기겠습니다.”

“나만 믿어!”

 

보쿠토가 함지막하게 웃는 얼굴이 되어 가슴을 두드렸다. 노을이 저물 때 골목에서 헤어지는 어린애처럼 손을 마구 흔들며 자신의 스포츠카를 향해 뛰어가는, 스물 중반이 훌쩍 넘은 남자…….

 

“하아…….”

 

말도 안 되는 아르바이트를 받아들인 게 잘못이었을까? 하지만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등을 돌렸다.

 

*

 

“어음, 아카아시?”

 

내일 있을 수업에 대비해 논문을 정리하던 아카아시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엔 나미카와가 조금 비딱한 자세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엊그제도 저 페이지더니.’

 

연구실은 모두 퇴근하고, 아카아시 그와 나미카와 뿐이었다. 대개는 아카아시가 정리를 하고 들어가는 편인데 웬일로 나미카와가 늦게까지 남아있다. 아카아시는 나미카와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을 붙이며 딴청을 피우느라 죽죽 긋고 있는 형광펜을 흘끗 바라보았다. 제법 오래 기다렸는지 메마른 형광펜에서는 아무 색도 나오지 않았다.

 

“아직 안 가셨네요? 무슨 일이십니까?”

“너 오늘 그……. 찾아온 사람 말야.”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을까? 연애 얘기 말고는 할 말이 없나? 심지어 한 번도 사이가 좋았던 적이라곤 없는 이 선배까지? 아카아시가 흐릿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미카와는 자신이 할 말에 집중하느라 그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지난 번에 그 사람 아냐?”

“지난 번이요?”

“왜 그……. 너 편의점에서…….”

“아, 선배 작은할아버지 장례식 가신 날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 아! 어, 그래. 그 날 말야.”

“아, 큰할아버지라고 하셨는데 제가 착각했네요. 그 날이죠?”

 

설마 요 며칠 사이에 또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아니겠죠? 아카아시가 걱정과 염려를 담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미카와의 표정이 소태 씹은 듯이 변했다가 겨우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도 순간적으로 헷갈…렸네…….”

 

그야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없으니까 그렇겠죠. 아카아시는 속으로 비꼬듯 대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데요, 왜요?

 

“아, 아니. 그냥 혹시나 하고~! 무슨 사이야?”

 

나미카와가 슬쩍 묻는다. 아카아시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 사람이 왜 이제 와서 호기심을 가지는지 알 것 같았다. 그 편의점에서 만났을 때는 보쿠토도 아카아시도 삼각김밥과 병에 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땐 나미카와의 눈에 보쿠토라는 존재가 눈에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휘황찬란한 스포츠카를 끌고 왔지.’

 

이 나라에서 주로 생산되는 차들과는 모양새부터 아주 다른 낮고 날렵한, 그리고 미려한 곡선을 그리는 차체는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척하니 알아볼 만큼 고가의 물건이었다. 또래로 보이는 나잇대의 남자가 그런 차를 끌고 나타났는데 연구실 후배와 아는 사이인 듯 보이니 호기심이 치솟은 것이다.

 

“애인입니다.”

“아, 애인이……뭐라고!? 애인!?”

아카아시는 나미카와가 왜 놀라는지도, 왜 관심을 가지는지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아니. 나는 놀라서……. 너 누구 만나는 사람도 없지 않았냐? 어디서 만났어?”

“쿠로오 선배가 소개해주셨습니다.”

“아.”


쿠로오의 이름까지 나오자 나미카와가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떨렸다. 그리곤 서둘러 먼저 들어가겠다는 인사를 남겨놓고서 후다닥 짐을 챙겨 연구실을 나선다. 아카아시는 나미카와가 몇 번 들춰보지도 않은 것 같은 논문 뭉치를 흘끗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쿠로오가 아직 학교에 있었을 때 나미카와는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았다. 아카아시를 향한 노골적인 이죽거림이 시작된 것도 쿠로오가 졸업하고 난 뒤였다. 평소 무서워하던 선배의 이름이 나오니 기가 죽어 달아난 꼴을, 아카아시는 되짚어보지도 않고서 다시 논문에 집중했다. 주말에도 보쿠토에게 끌려다녀야 하니 시간이 있을 때 좀 더 힘을 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