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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님만 뵙는 것 아니었습니까?”


지난번에는 차가 두 대뿐이었던 보쿠토의 본가 차고에는 이미 네 대나 주차가 되어있었다. 차고에서도 들리는 실내의 소음을 보면 안에 한두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다. 조금 당황한 아카아시의 질문에 보쿠토도 놀라서 휴대전화부터 꺼냈다. 누군가에게 급히 메세지를 보내는가 싶더니 곧 답신이 왔다.


“뜨헉.”

“뭔데요. 뭡니까.”

“아 이 개자식이 진짜…….”


상소리를 하는 것은 진짜 그런 감정이 들었기 때문인 것이 반, 나머지 반은 아카아시의 눈치를 보기 위함이었다. 아카아시가 미간을 모았다. 보쿠토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깨물었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막내 삼촌이랑 작은 아버지네도 와 있나 봐.”

“……네?”


아카아시는 이번만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일의 전말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방해할 생각인가 보네요.”

“어어……. 도대체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막내 삼촌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사촌도 와 있습니까?”

“그 자식은 정작 안 왔긴 한데.”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눈치를 살폈다. 싫으니 좋으니 티격태격 한다 해도 보쿠토 입장에서는 그들 모두 평생을 봐온,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여기서 가장 힘들게 된 건 아카아시다. 아카아시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깊은 한숨을 내쉰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쩌겠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사람이 많으니 부끄러워 인사드리지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아 진짜 왜 이렇게 된 거야…….”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함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보쿠토의 모습을 보는 건 그 이상의 즐거움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아카아시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자신 때문에 눈치 보는 사람을 보고서 즐거워하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보통 악질이 아니다. 


“가죠, 보쿠토 씨.”

“이거 끝나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진짜 제일 맛있는 거!”


아카아시가 보조석에서 내리기 직전,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한쪽 손을 잡아채고 말했다. 그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아카아시는 순간적으로 보쿠토가 평생의 맹세 같은 것이라도 하는 거라고 착각할 뻔한 정도였다. 


“고작 먹을 걸로?”

“아, 아아니! 더! 말만 해!”


상기된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는 도통 미움을 살 여지라고는 존재하지 않아서, 아카아시는 어쩐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알 것 같다고. 



*



“어서들 오렴.”


현관에서부터 두 사람을 맞이해준 건 보쿠토의 양친이었다. 한 번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두 사람은 유난할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로 아카아시를 반겼다. 


“아키오는 아직이래?”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꿰어신던 보쿠토가 부친의 질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 자식 오는 줄도 몰랐는데.”

“코타로.”


둘의 대화는 작은 목소리로 이루어졌기에 거실에 있던 그의 숙부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들어가서 먼저 숙부님께 인사드리렴. 유키 씨, 요리는 다 준비 됐어요?”


보쿠토의 모친이 안쪽을 향해 고갯짓하며 가정부에게 질문했다. 앞치마를 걸치고 있던 가정부가 식지 않게 하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정장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여 보쿠토 곁에서 걸음을 맞추었다. 보쿠토가 한쪽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얼굴을 보자니 어쩐지 맥아리 없이 긴장이 풀리는 것이었다. 


“작은 아버지!”

“오, 코타로. 언제 봐도 훤칠하구만. 더 큰 거 아니냐?”

“에이, 고등학교 때부터 이 키였는데요.”

“우리 아키오도 운동을 좀 시킬 걸 그랬어, 으응.”


몸은 마른 편이었으나 초승달 모양으로 접어 휘어뜨린 눈매 하며 인상만은 유한 중년 남자였다. 자주 웃는 탓인지 눈가에는 잔주름이 보기 좋게 자리잡혀 있다. 보쿠토가 대거리를 해대는 그 아키오의 부친이라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으나 처음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아카아시는 남자의 눈빛 아래에 진득이 가라앉아있는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래, 이쪽이 오늘의 주인공이신가?”

“처음 뵙겠습니다.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아카아시라……. 그 아카아시인가?”


아카아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 혼자 남은 성씨가 무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남자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보쿠토의 등을 두드렸다. 


“이거이거, 우리 코타로가 집안엔 아무도 들이질 않더니만 가장 좋은 걸 아껴두고 있었나?”

“아 작은아버지도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그보다 할머니는요? 막내 삼촌도 와 있다더니 안 보이는데.”

“둘 다 안방에 있다.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고 들어가 계셔. 가서 인사드리거라.”

“할머니—!”


보쿠토는 조모의 소재를 듣자마자, 숙부에게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할머니’라고 큰소리로 외치며 아카아시를 잡아끌고서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아카아시가 겨우 그의 숙부에게 눈인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보쿠토는 노크도 하지 않고 안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할~머니!”

“요 녀석아. 할미 귀청 떨어지겠어.”


좌식으로 꾸려진 실내는 무척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화사함보다는 우아함이 엿보이는 내부 장식 속에 보쿠토의 조모는 그 나잇대라고는 연상할 수 없을 만큼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었는데 아주 새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나이도 가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자리한 세월의 흐름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아카아시가 ‘안방에 이렇게 대책 없이 들어와도 되나’라고 고민하고 있을 때 보쿠토가 대뜸 방을 가로질러 달려가 그의 조모에게 안겨들었다. 그가 전력을 다해 몸을 부대끼면 가냘픈 노모의 몸으로 버틸 수 없는 것을, 그녀가 흔들리지도 않고 보쿠토를 감싸는 것을 보며 아카아시는 조손 사이의 능숙한 애정의 갈래를 알아보았다. 


조모 곁에 줄곧 앉아있던 보쿠토의 막내 숙부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한숨을 내쉬며 아카아시를 향해 손짓했다.


“이제 곧 결혼도 할 녀석이 어리광은……. 네 남자친구 보기 부끄럽지도 않으냐?”

“아카아시는 괜찮아! 그치, 아카아시!”

“…….”


바닥에 반쯤 눕다시피 하며 제 조모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는, 서른이 멀지 않은 이 남자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중인 자신의 애인 설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카아시는 이번만은 능숙하게 대꾸하지 못하고서 애매한 표정으로 겨우 미소만 그리고 말았다. 막내 숙부 하루키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쪽이 우리 손주와 만난다는 아이더냐?”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합니다.”


아카아시는 드러누운 보쿠토 곁으로 다가가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대답했다. 한참 더 조모 곁에서 어리광을 피우던 보쿠토가 조모의 꿀밤을 맞고는 아카아시 곁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그래, K대에서 공부 중이라?”

“예. 내년 가을에 졸업할 예정입니다.”

“식은 그럼 그 이후가 낫겠구나.”


그 말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흘러나와서 아카아시도 보쿠토도 방비하지 못한 찰나에 두 사람을 세게 때리고 지나갔다. 유달리 어리광이 심하게 묻어나는 얼굴로 히죽히죽 웃으며 대꾸하려던 보쿠토도 제꺽 얼어붙었다. 그건 아카아시도 마찬가지였다. 신상명세에 대해서 그 어떤 질문을 들어도 유려하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만난 지 몇 초 만에 결혼식 날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카아시가 입을 달싹거리는 것을 보고 조모가 미간을 모은 채 보쿠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까지 청혼도 제대로 하지 않았느냐는 비난이었다.


“코타로?”

“아, 아니 할머니! 만나자마자 결혼식 얘길 하면 어떡해!”

“결혼할 사람 데려온다지 않았니?”

“그렇긴 했는데…….”

“네가 좋다는 사람이면 나도 좋다.”


조모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투로 응했다. 억울한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뜬 건 보쿠토였다. 그의 시선이 홱 하고 돌아가서 자신의 막내 숙부를 바라본다. 하루키가 휘파람을 불며 눈을 피했다. 


그것만으로도 정황이 눈에 들어온 것인지 조모가 혀를 찼다. 


“네 막내 삼촌이 뭐라 했느냐?”

“내가 만나는 애마다 죄다 싫댔단 말야!”

“하루키가 싫다 한마디 했다고 손 놨으면 너도 할 말 없다, 코타로.”

“엣.”


보쿠토가 머쓱하니 눈을 굴렸다. 막내 숙부 하루키가 헛기침하며 아카아시를 향해 사과의 말을 했다.


“미안하네, 아카아시 군. 우리 코타로가 생각도 악의도 없으니 부디 양해해주었으면 해.”


한 번 들었던 적 있는 얘기였기 때문에 아카아시는 여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 때였다. 


—어머, 아키오 왔니. 

—할머니는 안에 계신다. 코타로가 인사 드리고 있어. 


바깥에서 살짝 소란이 일었다. 보쿠토의 사촌이 뒤늦게 도착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