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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시의 학교 정문에 차를 댄 보쿠토는 핸들을 양손으로 쥐고 고심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며 노을이 그의 얼굴에 굴곡을 그렸지만 보쿠토는 그게 눈부신 줄도 모른 채 심각한 고뇌 중이었다. 학생들이 오고가며 화려한 스포츠카를 흘끗거리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 자식들이 내가 어디 가는지 정보 팔고 있는 거 아냐?’


그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 이유는 하나, 요즘 들어 부쩍 가는 레스토랑마다 그의 예전 애인들을 꼭 한 번씩 만나기 때문이다. 그냥 만나는 거라면 그도 크게 개의치 않았을 텐데 그럴 때마다 자신의 고용인이 자신을…….


’무슨 천하의 방탕한 쓰레기 보듯이 보잖아…….’


자신이 방탕하지 않았단 것은 아니다.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막지 않기는 했었다. 그래도 한 번에 두 사람을 만나는 짓은 정말 하지 않았는데, 예전 인연을 연이어 몇 명이나 보니 고용인의 눈빛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보쿠토는 오늘도 어딜 가든 누군가와 또 만날 거라 확신했고 그 탓에 지금 아카아시에게 그의 학교 앞에 도착했다는 연락도 하지 못한 채였다.


’아, 미치겠네! 진짜! 얘네는 왜 갑자기 이렇게 튀어나오는 거야!’


이유는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처음에 아카아시를 두고 결혼 운운해버린 것 때문일 테다. 지금까지 누굴 만나도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한 적이 없던 그였다. 


그 때 보쿠토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보쿠토는 ‘아카아시 케이지’라고 뜨는 이름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세요…….”

《보쿠토 씨. 도착하셨어요?》

“어, 방금. 지금 학교 앞에 와 있어.”

《아…….》


뭔가 탄식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아카아시 본인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보쿠토는 전화를 끊고 보조석 쪽 창문을 내려 몸을 기울였다. 아카아시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쪽 팔에 걸치고 있는 건 실험실에 입었던 흰 가운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


아카아시가 차창 쪽으로 몸을 기울이곤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음, 보쿠토 씨. 미리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늦었네요.”

“뭔데. 무슨 일 있어?”

“실험이 좀 급한데 잘못돼서……. 당장 수습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오늘 저녁은 못 먹을 것 같습니다.”


실험실에서부터 곧장 뛰어온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가슴팍도 계속 오르락내리락하고 있고 머리카락도 조금 흐트러졌다. 보쿠토는 눈동자를 도르르 왼쪽으로 한 바퀴 굴렸다.


“너는 밥은 먹었고?”

“아뇨. 지금 나온 김에 편의점 들러서 간단하게 해결하고 다시…….”

“그럼 나도 그거 먹지 뭐.”

“네?”

“옆에서 얌전히 입 다물고 밥만 먹고 가겠다고.”


보쿠토는 간단하게 말하곤 운전석에서 내려섰다. 자동차 열쇠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아카아시 곁으로 다가가자 아카아시가 이해하기 어렵단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아닙니다.”


해가 다 저물어가는 저녁이었기에 교정은 한산한 편이었다. 보쿠토는 손그늘을 만들어 지는 해의 찌르는 듯한 빛을 피했다.


“학교 안에도 편의점이 있나?”

“대학 안 다니셨습니까?”

“다녔거든……. 편의점 안 가본 것뿐이야!”

“…….”


아카아시가 여러 가지 의미로 불신의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바라본다. 보쿠토는 입술을 삐죽이며 턱을 세웠다. 사람이 대학교 내의 편의점 쯤 안 들러봤을 수도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온 것도 오랜만이네.”

“와본 적이 있습니까?”

“쿠로오도 여기 나왔으니까. 축제 때 가끔 왔어. 아, 그러고 보니 조금 있으면 가을 축제 할 때 아냐?”

“그런 것 같네요.”

“‘같네요’? 너희 학교 축제잖아.”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보쿠토의 얼굴에 아카아시는 한심하단 표정을 숨기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전 그런 데에 관심 없어서요.”

“아니 뭐에 관심 있는데, 그럼?”

“돈 버는 데요.”

“…….”

“그래서 이런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잖습니까.”


아카아시의 눈빛이 그를 향한다. 보쿠토는 입을 닫았다.


’잠~깐 살갑다고 방심했다! 방심했어!’


진흙으로 숨을 쉬는 기분이 다시금 든다. 보쿠토는 툴툴거리며 조용히 아카아시를 따라 교내에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카아시가 먼저 편의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하며 문에 설치된 작은 종이 경쾌한 소리를 내고 점원이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반가운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했다. 


“드시고 싶은 걸로 고르세요.”

“우와, 진짜 이거밖에 안 해? 가격?”

“네.”


보쿠토는 편의점에 들어오자마자 눈까지 휘둥그레져서는 주위를 둘러보기 바쁘다. 대단히 신이 난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이것저것 집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자잘하고 터무니없는 과자들이었다. 그것으로 끼니가 될 리가 없다. 아카아시는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허기지면 따로 챙겨먹을 테니 그가 염려할 영역은 아니었다. 


“와! 아카아시가 고른 건 뭐야?”

“오니기리요.”

“맛있어?”

“밥이잖아요.”


보쿠토가 품에 한아름 안고 있는 과자를 겨냥한 말이었는데 보쿠토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선 아카아시가 고른 걸 하나 더 집었다. 편의점의 다른 손님들이 흘끗거리기 시작한다. 편의점에서 백화점에 처음 온 어린애처럼 구는 장신의 성인 남성을 보면 누구나 저렇게 쳐다보기는 할 테지, 아카아시는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하며 커피도 두 개 골랐다. 


“다 고르셨으면 계산 하죠.”

“응!”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손짓을 따라 편의점 계산대 위에 과자를 우르르 쏟아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저 환한 얼굴이 부담스러워서 슬쩍 시선을 피한 채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응? 아카아시가 사?”

“예. 오늘은 제가 약속을 깼으니까요.”

“흐응~!”


보쿠토가 눈동자를 크게 뜬 채 한쪽 입술을 틀어 올렸다. 재밌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한 번 흔들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계산을 마쳤다. 


봉투 하나에는 보쿠토가 고른 것을 전부 쓸어 담고 자신의 것은 양손에 쥔 아카아시는 편의점의 야외 파라솔 아래에 자리 잡고 앉았다. 어느새 해가 다 저물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거……. 어떻게 여는 거야?”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자신을 천하의 머저리 보듯 보는 걸 알았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주먹밥의 비닐 포장을 벗기는 방식은 신묘했고 그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살짝 힘을 주었지만 주먹밥의 김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리 주세요.”

“사람이 모를 수도 있지…….”

“아무 말 안 했습니다.”

“눈으로 말했잖아.”

“저 지금 주먹밥 보면서 포장 뜯고 있어요.”

“닥치면 될 거 아냐.”

“닥치라고는 안 했는데요.”


아카아시는 덤덤하게 말하며 보쿠토에게 포장을 다 벗긴 주먹밥을 내밀었다. 보쿠토는 입술을 한 번 삐죽거리곤 그 주먹밥을 손에 쥐었다.


“이거 먹고 가서 또 일해?”

“네.”

“언제까지?”

“글쎄요, 마감은 일단 내일이니까요.”

“뭔데. 그럼 내일도 못 봐?”

“아뇨. 마감하고 나올 거예요. 저 밥 먹게 좀 조용히 계시면 안 됩니까?”

“……아깐 닥치지 말라며.”


아카아시의 눈빛이 엄정했다. 보쿠토는 ’에베베’하는 표정을 한 번 짓곤 주먹밥을 크게 베어 먹었다. 아카아시는 야금야금 먹는다 싶더니 반쯤 해치운 차였다. 아카아시가 입에 주먹밥을 문 채로 페트병에 든 커피를 열려고 하는 걸 보고서 보쿠토가 남은 주먹밥을 자기 입에 털어 넣고는 커피를 대신 따주었다. 


아카아시가 조금 놀란 듯이 그를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였다.


“여! 아카아시? 여기 있었네?”


조금 과장된 목소리가 아카아시를 부르며 다가왔다. 보쿠토는 입 안에 가득 든 주먹밥을 우물거리며 편의점 의자에 등을 기대고서 상대를 돌아보았다. 작달막한 키에 학교 점퍼를 걸치고 있는 남자였다. 흘끗 아카아시를 보자 살짝 표정이 굳은 아카아시가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나미카와 선배.”

“실험은 끝났어~?”

“이제 들어가서 계속 해야죠.”

“이야, 미안하다 야. 내 실험인데, 그치? 내가 그 큰할아버지 장례식 가야 돼가지고. 미안해요~! 갔다 와서 한 턱 쏠게!”

“……예.”

“하룻밤만 새면 뭐 우리 아카아시는 거뜬하지~? 그치? 근데 이분은 누구냐? 새 스폰서야? 우리 교수님은 뻥 차고?”

“……그런 거 아닙니다.”

“아차차! 비밀이지? 어쨌든 실험! 잘 부탁하고! 난 간다~!”


남자는 보쿠토가 펼쳐놓은 과자도 능청스레 집어 입에 밀어 넣고는 자리를 떴다. 주절거리던 사람도 떠나고 아카아시는 말이 없어 편의점의 야외석은 고요했다. 


보쿠토는 입에 있던 주먹밥을 다 씹어 삼키고는 말했다.


“지금 저 새끼는 뭔데?”

“저희 실험실 선배입니다. 새끼가 뭐예요, 새끼가.”

“너도 은근슬쩍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저 새끼 실험을 왜 네가 해?”

“선배라고 말했잖아요. 바쁘셔서 도와주는 거예요.”

“저거 큰할아버지 장례식 어떻게 봐도 거짓말 아냐?”

“장례식이라고 하는데 거짓말이냐고 어떻게 물어봅니까.”


아카아시는 덤덤했다. 입맛이 가셨는지 반쯤 남은 주먹밥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고서 커피만 들이킨다. 보쿠토는 구매한 것들 중에서 신 맛이 나는 젤리를 뜯어 입에 넣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나미카와 선배’가 했던 얘기를 되짚었다.


“스폰서는 무슨 얘기?”

“저 선배가 오해가 좀 있으셔서.”

“오해인 건 확실해?”


보쿠토의 시선이 날카롭게 벼리어 아카아시를 향했다. 아카아시는 빈 페트병의 뚜껑을 돌려 닫으며 끄덕였다.


“……네.”

“흐응……. 근데 내가 스폰서라는 건 오해는 아니지 않아?”

“고용주를 보통 스폰서라고 합니까? 인생 재밌게 사시는군요.”

“야, 너는 나한텐 이렇게 매섭게 잘하면서 저 개새끼한텐 왜 한 마디도 못하냐?”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겁니다. 말은 말을 알아듣는 상대한테 하는 거니까요. 다 드셨으면 일어나죠. 전 실험하러 가야되니까.”


아카아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혀 기다려줄 기색이 아니었던지라 보쿠토도 펼쳐놓았던 과자를 다시 봉투에 쓸어 담으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카아시는 빈 페트병은 재활용함에, 먹다 남은 주먹밥은 일반쓰레기통에 버린 뒤 남은 커피 하나만 한 손에 챙겨들었다. 


“그거 나 주는 거 아니었어?”

“제 생명수인데요.”

“쳇…….”


툴툴거려도 아카아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보쿠토는 됐다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카아시는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가 오늘 약속 못 지켜 미안하단 말을 남겨놓고 등을 돌렸다. 


보쿠토는 과자가 잔뜩 든 편의점 봉투를 휘휘 돌리며 아카아시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흠, 나미…카와랬지. 나미카와 선배.”


보쿠토는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 위로 숫자패드가 떠오르자 익숙한 단축번호를 누르며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반대쪽 손에서는 여전히 편의점 봉투가 쥐불놀이마냥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어, 알아봐 줄게 있어서. K대에……. 아, 얘 전공이 뭔지 안 들었네. 무슨 실험하는 과인데.”


보쿠토가 교정을 가로질러 자신의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걸어가며 단말기 너머의 상대에게 방금 전 들었던 이름을 읊어주곤 전화를 끊었다.


“그나저나 얜 이거 먹고 사나? 이러니 말랐지.”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며, 보쿠토는 보조석에 던져 넣은 편의점 봉투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래도 과일향이 나던 신 맛의 젤리는 나쁘지 않았다. 


“커피가 뭐였는지 생각이 안 나네…….”


아카아시가 어떻게 페트병을 손에 쥐고 있었는지, 그가 마신 게 목젖을 타고 어떻게 내려갔는지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페트병의 상표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음에 물어보지 뭐, 보쿠토는 간단히 생각을 정리하곤 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