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Logout Link+ Admin Write





계약서에 서명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카아시를 따라 나서려고 했던 쿠로오는 자신의 뒷목을 낚아채는 보쿠토의 손길에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아카아시는 눈치 챘다는 듯이 굳이 따라올 필요 없다는 표정으로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카페를 나섰다.


“아 왜.”

“너는 소개를 해준다는 게 저런 애냐?”

“비밀 확실히 엄수, 어른들에게 프리패스, 네 녀석보다 돈이 더 필요한 사람이 어디 흔한 줄 알아!?”

“어른들에게 프리패스? 저게 프리패스야?”


앞에서 개소리 하고 있으면 연령성별을 불문하고 눈빛으로 두드려 팰 것 같은 저 기세를 못 봤느냐 외치는 보쿠토에게, 쿠로오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 끝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어디 유서 깊은 가문 독자라던데. 지금은 혼자 남긴 했지만. 너희 집에 데려가기만 해도 그 아카아시냐며 바로 통과 확신한다.”

“근데 왜 그런 집안 애가 돈이 필요해.”

“방금 혼자 남았단 말 못 들었냐?”

“엑…….”


보쿠토는 뇌에서 생각이 엉킨 표정으로 쿠로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쿠로오는 손을 내젓고 설명하기를 관두었다.


“어쨌든 그 얘길 당사자에겐 하지 말고. 일은 확실하니까. 아 그리고 그렇게 맘에 안 들면 계약을 하지 말지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나보고 뭐라고 해?”

“야! 아까 그 상황에서 어떻게 안 한다고 할 수가 있냐!”


보쿠토는 양손으로 자신의 팔을 격렬히 쓰다듬으며 부르르 떨었다. 그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입금 계좌와 은행까지 알려주는데 거기서 ‘아 됐고요~!’이런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평소엔 잘만 하면서.”

“너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보쿠토는 투덜거리고 있긴 했지만 정말로 질색이진 않은 듯했다. 쿠로오는 턱을 괴고서 얼음이 반쯤 녹은 커피를 휘휘 저었다. 아카아시가 있던 자리에 놓인 커피는 한 모금도 줄지 않은 채였다. 


“근데 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돼?”

“우리 할머니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보쿠토는 머리를 긁적였다. 조모의 건강검진 결과라면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할머니 마지막 소원인데 뭐……. 어쩌겠냐.”

“그 마지막 소원 말씀하는 방식이 살벌도 하다. 너희 집안 사람들은 다 그러냐.”


보쿠토가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 쿠로오는 한탄을 삼키곤 고개를 흔들었다. 아끼는 손주의 결혼식을 보고 싶다는 말을, 결혼하지 않으면 상속을 젖혀버린다는 말로 할 수 있는 집안이라니.


“근데 나보다 돈이 중요한 애라는 건 무슨 말이야. 내가 바로 돈인데?”


커피나 쭉 들이켜고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다 들어갈 생각이었던 쿠로오는 순간 커피에 사레가 들려 격렬하게 기침했다. 보쿠토는 당연한 말을 하는 듯이 담백한 얼굴이었다. 쿠로오는 헬쓱한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크헉, 흡, 흐억……. 그러니까 걔도 좋아하는 애 따로 있어.”

“아, 그래? 근데 나랑 일해도 된대?”

“멀리 있나보더라.”

“뭐 나는 그거까진 책임 안 지고 내 일에도 껄쩍대는 거 용납 못하니까 알아서 하라 그래라.”

“네가 말해. 걔랑 계약은 네가 했잖아.”


쿠로오는 양손을 들어보였다. 소개시켜줬으니 자신은 그걸로 손 떼겠다는 뜻이었다. 보쿠토가 한쪽 눈만 찌푸린 채 쿠로오를 노려보았다.


“나중에 네 후배 울렸다고 나한테 뭐라 하지 마라.”

“글쎄, 누가 울지…….”


쿠로오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듣지 못한 보쿠토는 커피의 얼음을 흔들어 마시느라 여념이 없기만 했다. 쿠로오는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고 빙긋이 웃었다. 


*


“걔가 다 자기 좋다는 애들만 봐서 그래. 네가 이해해라.”

“네? 뭐가요?”


첫 대면에서 아무래도 지나치게 솔직한 모습을 보인 보쿠토 탓에 아카아시의 기분이 상했으리라 생각해서 굳이 저녁을 먹자고 불러냈는데, 아카아시는 도리어 쿠로오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쿠로오가 무어라 응대하려 한 순간 때를 맞추어 요리가 나왔다. 쿠로오가 다음 말을 할 수 있었던 건 접시 위의 요리가 반쯤 비었을 때였다. 


“아……. 그 사람이요.”


아카아시가 물잔을 들어 입을 축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쿠로오가 말을 해서 그제야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그 전까지는 정말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눈치다.


“고용주의 소양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고용주?”

“돈을 제때 잘 주면 됩니다. 좀 바보여도.”

“……입금 됐냐?”


아카아시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즉 개소리로 치부한 건 전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단 말이지…….’


여러 가지 의미로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맺어준 게 자신이지만 정말 어디서 이렇게 엮였나 싶을 정도로. 쿠로오는 식사를 마무리 지으며 아카아시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폈다. 


“아, 그리고…….”

“네?”

“보쿠토 녀석한테 슬쩍 말해놨거든. 연애로 얽힐 걱정은 하지 말라는 얘길 하다보니까…….”


쿠로오의 그 다음 말은 사과였기 때문에 아카아시가 그보다 빨리 말을 잘랐다.


“잘됐네요. 서로 불필요한 걱정에 에너지 쓸 필요 없고.”


말미는 서늘해도 근본은 배려인 것을 알고 있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웃음에 이쪽을 노려보는 시선을 마주하곤 숨을 쏙 들이켰다. 


“그런데 너 진짜 유학, 가려고?”


앞뒤에 생략된 말은 아마 ‘이렇게 돈을 구해서’ 정도일 것이었다. 디저트에 스푼을 올리던 아카아시는 눈을 깜박였다.


“그건 이미 결정됐습니다. 가기로. 돈을 구한 건 유학자금이 아니라 투자자금이 필요해서고요.”

“……투자자금?”

“빨리 돈을 벌어야 하니까요. 좋은 투자처가 보이면 투자해야죠.”

“……그래, 뭐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유학은 언제?”

“내년이요. 내년 9월. 출국은 8월쯤이겠지만요.”


지금이 가을이니 딱 일 년 조금 안 되게 남은 셈이었다. 그 전까지 보쿠토와의 일은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다. 쿠로오는 아카아시를 따라 느긋하게 디저트를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준비하면서 정리하면 되겠네.”

“네.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머쓱하다, 야.”


쿠로오가 정말 조금 부끄럽기까지 해서 손을 내젓는데도 아카아시는 굽힘없이 당당한 눈빛이었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좋은 고용주니까요.’라는 말이 깃들어있다. 즉 바보지만 돈은 잘 주니 됐다는 뜻이다. 


“그 뭐냐……. 너무 혼내지 말고.”

“어떻게 제가, 고용주께 감히 그러겠습니까?”


아카아시가 능청스러울 만큼 매끄럽게 말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욱 불안해진 쿠로오였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두 사람이 해나가야 할 여정이었다. 하지만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 길, 결국 쿠로오는 한 마디 더 덧대고 말았다.


“그 뭐랄까, 꾸중보다는 칭찬이 더 먹히는 그런 놈이니까…….”

“저한테 애 맡기십니까?”

“지금 굉장히 그런 심정이 됐어.”


저 가차 없는 후배가 손에 쥔 건 돈밖에 없는 바보를 보고서 뭐라고 할지 눈에 선하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선배를 보는 아카아시의 눈빛이 형용하기 어려운 색을 띄고 있었다.


“뭐, 고양이 키우듯 하면 되는 건가요.”

“개과긴 한데…….”

“잘 알겠습니다.”

“알겠어!?”

“요는 애완동물이라는 거죠.”


아니……. 그게……. 


뭔가 지적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없었다. 마음 속 깊은 내면에서 후배의 말에 동감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애써 입술만 달싹이던 쿠로오는 이번엔 이 후배를 위하여 어깨를 붙잡았다.


“그, 뭐냐, 어, 동물이긴 한데 개로 치면 늑대고 고양이로 치면…….”

“호부견자 없단 말씀입니까? 뭐 그 보쿠토 가문 장손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어 응 근데 그게…….”


쿠로오는 울상을 애써 다잡았다. 자신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보쿠토는 같은 항렬 내에서도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건 그가 보쿠토 가문의 첫째라서 그 핏줄을 이어받은 덕이라기 보단 저 혼자 어디 별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듯이 강맹한 성정을 발하는 것이었다. 


짐승이라 한다면 그 중에서도 최상위 포식자, 흉폭한 맹수인 그는…….


‘인간계 룰을 안 따른단 점에서 더 그런 거거든…….’


쿠로오의 심려 넘치는 눈빛을 받은 아카아시는 얇은 트렌치코트를 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겠습니다.”


그 말이 흡사 ‘개에게 물리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로 들렸다. 


쿠로오는 아끼던 인형을 사촌에게 빼앗기는 심정을 십분 느끼며 그런 아카아시를 배웅했다. 어느 쪽을 아끼는 장난감으로 여겼는지는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