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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시는 고개를 젖히고 인공 눈물을 눈에 떨어뜨렸다. 계속 난방이 돌아가는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었더니 눈이 뻑뻑했다. 


‘두 개 남았나…….’


어깨를 주무른 아카아시는 휴대전화의 액정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한 시 20분이었고 도서관에 사람은 반절 정도 차 있었다. 시험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라 그런 것 같았다. 


‘피곤하다…….’


평소에도 체력 관리를 꾸준히 해오는 편이었는데 이번 시험은 유달리 고된 느낌이었다. 아카아시는 독서실의 칸막이에 머리를 기댔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보았지만 집중력이 돌아올 기미는 없었다. 아카아시는 가져온 외투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바람이라도 쐴 생각에서였다. 


도서관 복도로 나왔지만 공기가 텁텁한 것은 여전했다. 아카아시는 자판기에서 커피 두 개를 뽑아들고 도서관의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도서관의 수위가 그를 보고서 살짝 인사했다. 매일같이 보는지라 아는 척을 하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자신이 뽑은 커피 두 개 중에 하나를 수위에게 건네주고 바깥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이미 겨울이 서려 있었다. 날이 추워지며 한결 청명해진 밤하늘에는 도심 한가운데에서도 언뜻언뜻 별이 보였다. 천문에는 조예가 없는지라 별자리를 분간할 수는 없었으나 별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화단의 펜스에 살짝 걸치듯 기댄 아카아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


숨을 몰아쉬자 완연히 새하얀 입김이 사르르 흩어졌다. 입고 있는 카디건의 앞섬을 조금 더 추슬러 여민 아카아시는 캔커피를 열었다. 경쾌한 소리가 나며 안에서 따뜻한 김이 흘러나왔다. 양손으로 감싸 쥐어본다. 처음에는 조금 뜨거웠던 캔이지만 지금은 딱 알맞게 따뜻해져 있었다. 


“어~!? 커피 마셨어?”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커피만 마시고 들어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던 아카아시는 그만 마시던 커피를 뿜고 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온 탓이었다. 덕분에 아끼던 카디건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지만 그걸 챙길 여력은 없었다.


“컥, 쿨럭, 보쿠토 씨?”

“아카아시, 애처럼 흘리면서 먹냐?”

“지금 누구 때문인데…….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보쿠토는 품이 딱 맞는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앞섬이 제멋대로 펄럭이고 그건 목에 두른 캐시미어 머플러도 마찬가지였다. 양손에는 커피가 한 잔씩 들려있고 오른손 중지에 걸려서 달랑거리는 건 아마도 자동차 열쇠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 오늘도 도서관에 있을 거 같고 나는 술자리 지겨워서 도망치고? 일석이조!”


아카아시가 기대어 있는 화단에 들고 온 커피와 자동차 열쇠까지 내려놓은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를 빼앗아 옆에 있던 휴지통에 그대로 버리곤—아카아시가 잠깐이라고 만류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그의 손에 자신이 사온 커피를 쥐어 주었다.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는 몰라도 보쿠토가 사온 커피는 그가 들고 있던 캔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오늘 술자리 있으셨습니까? 운전하면 안 되는 거 아녜요?”


양손으로 커피를 감싸 쥔 아카아시는 괜히 귓가가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어, 모르는 척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고 핀잔 주듯 말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보고 서서 제 몫의 커피를 들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안 마셨어.”

“네?”

“여기까지 오려면 차 끌고 와야 하니까. 운전해야 한다고 하고 안 마셨지~! 내가 사고라도 나면 우리 아카아시 수당도 못 주고 고소당할지도 모르는데.”


마지막 말은 경쾌한 농담이었다. 보쿠토가 윙크까지 곁들였다. 아카아시는 살면서 저렇게 윙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아침에 세웠을 머리는 아무래도 지금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듯 내려와 있었는데 그마저도 공들여 세팅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밝은색 코트도 어두운 톤의 캐시미어 머플러도 그림처럼 어울려서, 보쿠토만이 여기에서 이질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오래된 도서관 건물, 낡아서 빛이 흐려진 오렌지빛 가로등. 그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아무렇지않게 윙크를 날리는, 커피를 가져온 남자가 한 명. 


“내일 모레면 다 끝난댔지?”

“네. 모레 10시에 마지막 시험 치면 이번 학기는 끝입니다. 그렇다고 방학은 아니지만 일주일은 쉴 수 있겠죠.”


쉬어도 쉬는 것은 아니겠으나. 


아카아시는 손가락을 굽혀 그 관절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번 주에 시험이 끝나면 곧장 다음주에 있을 보쿠토 조모와의 만남을 준비해야 했다. 옷도 새로 맞추어야 할테고 그 집안 사람들의 생태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한다.


‘만나는 걸 다음주 초로 잡길 잘했지.’


일단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장 큰 벽은 넘어서는 것이었다. 적어도 며칠은 몸도 마음도 쉴 수 있을 것이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계산을 마치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보쿠토를 올려다보았다. 


보쿠토는 입을 후후 불어가며 커피를 식히느라 바빴다. 저 체격으로 그러고 있으니 되레 제법 귀여워 보인다. 거기까지 생각한 아카아시는 빠르게 고개를 흔들곤 자신의 눈을 부볐다. 


“아카아시? 많이 피곤한 거 아냐? 공부할 거 많이 남았어?”

“……조금요.”


얼마나 피곤하면 헛것이 보이나. 아카아시는 속으로 혀를 차며 커피를 넘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보쿠토의 금빛 눈동자가 아래로 처졌다. 제법 걱정을 해주기는 하는 것 같았다. 


보쿠토가 입을 달싹거리다가 도로 닫았다. 보쿠토를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던 아카아시는 미간을 모았다.


“왜요?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

“아, 아니…….”


처음 만났을 때는 천생 뻣뻣하게 구는 도련님 같더니 묘하게 어린애 같달지, 추궁을 하면 눈치 보는 듯한 표정을 보인다. 아카아시는 손등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꾹 눌러 내렸다. 


“뭔데요?”

“말하면 아카아시 화낼 거 같은데…….”

“무슨 말인데요?”

“아니 그……. 뭐냐……. 성적 필요한 거면…….”


한 두과목 정도는 좋게 봐달란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렵지 않다는 얘기였다. 보쿠토는 어물어물 말을 꺼내놓다가 제풀에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면서 제가 버럭했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화를 내지도 않았다. 도리어 의아하다는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뭐, 뭔데. 왜 그렇게 쳐다봐.”

“그런 수단은 전혀 쓰지 않을 사람처럼 생겼잖습니까, 당신.”

“안 썼어! 당연히 안 썼지!”

“그런 것치고는 너무 곧장 생각해내길래요.”

“내 또래 사촌 못 봤냐? 어? 내가 누구랑 부대끼면서 자랐다고 생각하는 거야?”


보쿠토는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열렬히 부정했다. 그런 쪽으로 자신이 의심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억울한 누명 쓰고는 홧병 걸려서라도 못 살 사람이군…….’

“그, 그리고 아카아시가 공부 안 한 것도 아니고 뭐 없는 점수 더 달란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 피곤한 것뿐이고……. 원랜 공부 열심히 하고 잘하니까……. 잘 할 거였고…….”


시간을 살 기회가 있다면 사는 것도 나쁘지 않기도 하고, 보쿠토가 그렇게 말하며 말끝을 웅얼거렸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말에 여러가지 오류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가 말한 것은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결과를 사겠다는 것이라고, 그걸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래도 그런 얘긴 하지 마세요.”

“아 그러니까 말 안 하려고 했어! 그냥 잠깐 생각이 났을 뿐이지!”


그저 잘 봐 달라고 말하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잘 봐주는 것이 유의미한 결과를 갖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가 필요할까? 보쿠토는 그게 얼마인지 알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게 얼마든 지불할 수 있으므로. 


“……그리고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시험을 조금 미뤄주는 게 낫죠.”

“아!”


보쿠토가 눈을 번쩍 떴다. 완전히 깨달음을 얻은 표정인 게, 지금 당장 학과장에게 전화를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아카아시는 말이 그렇다는 것이며 그가 실행할 경우에는 어떤 응징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말을 조리 있게 얘기했다. 보쿠토가 터진 비누 방울 같은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저도 이제 슬슬 올라가 봐야겠어요. 보쿠토 씨도 들어가 보세요.”

“으응…….”


학과에 비리 저지르지 말란 말을 했다고 저렇게 시무룩할 인인가? 아카아시는 반쯤 마신 커피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도 안 한 사인데 보쿠토 씨 힘써서 이런 줄 알면 집안에서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왜? 있는 돈 있는 기회 쓸 수 있는 수단 쓰는 건데.”


보쿠토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집안에서는 이런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그 말을 들으며, 아카아시는 왠지 이쯤 되자 조금 재미있기까지 하여 슬쩍 미소를 안으로 말아 넣고 물었다.


“그럼 보쿠토씨는 왜 그 쓸 수 있는 수단 안 쓰셨는데요.”

“그.”


꿀 먹은 양 입을 다물고만 보쿠토를 보는 것이 생각보다 즐거웠다. 아카아시는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저도 쓰기 싫습니다.” 


그건 올바른 방법이 아니니까. 비겁하니까. 나쁜 짓이라서. 범죄니까. 그리고 보쿠토에게는, 그의 주위에는 저 모든 것이 ‘그래도 우리는 괜찮다’로 포장되어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쿠토는 줄곧 그 방법에서 눈을 돌려왔던 것이다. 아카아시는 머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보쿠토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가지지 못한 자가 고결한 것은 타락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깎아내리며 가진 자가 고결한 것은 진흙 속의 연꽃 보듯 칭송하는 것을 줄곧 혐오해왔는데, 어째서인지 오늘 그중에 절반을 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수한 유혹 속에서도 굽어지지 않은 것을 보는 경이가 짧게 그의 발을 적셨다.


“저 이제 올라가 볼게요.” 


아카아시가 뒤쪽의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쿠토가 뒤통수를 긁적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커피 고마웠습니다. 보쿠토 씨.”

“별것도 아닌데 뭐.”

“별 거예요.”


앞만 보고 숨차게 달려온 인생이었다. 모든 게 한 번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나자 발밑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바닥을 내려다보지도 않고 걸어가는데 아카아시만 그러지 못했다. 남들보다 고된 한 발짝 한 발짝이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다만 간혹 지쳤다. 하지만 그마저도, 피로를 느끼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타일러가며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아카아시는 조금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한 번 더 인사했다. 뒤돌아서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길, 등 뒤에서 보쿠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