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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야?》


아카아시는 전화를 받자마자 용건부터 묻는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지야 알고 있었지만.


“학교입니다. 그리고 일 외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을텐데요.”

《일이니까. 아, 보인다.》


그리곤 대뜸 전화가 끊어졌다. 아카아시는 ‘보쿠토 씨’라고 이름이 떠 있는 액정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서 함께 걷던 친구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대답도 하기 전에 멀리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 아카아시~!”


학교 정문 입구에 유선형의 새카만 스포츠카 한 대가 주차되어 있다. 거기에 기댄 남자가 휴대전화를 뒷주머니에 넣으며 아카아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카아시는 누구냐고 묻는 친구들의 말에 못 들은 척하며 한숨을 꾹 눌러 참았다. 


먼저 자리를 비켜주는 친구들이 연신 이쪽을 흘끗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아카아시는 그 쪽으론 더 이상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 애인 데리러 오는 게 뭐 꼭 일이 있어야 할 수 있나?”


보쿠토는 당연한 일을 한다는 투였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쪽 댁에 가서 제가 애인인 척 해드리면 되는 일 아닙니까.”

“어제 제대로 얘길 못했는데, 이래봬도 귀한 장손이거든. 지켜보는 눈이 많다고.”


보쿠토가 엄지와 검지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즉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으니 갑자기 데려가서는 결혼할 사람이라 말하는 건 통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였다.


“……평상시에도 지속적인 애인 행세에 대해서는 말씀 안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어제 제대로 얘길 못했다고 말했잖아. 방금.”

“하…….”


아카아시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내쉰다. 보쿠토가 그 모습을 보고서 이마 사이에 힘을 주었다. 


“뭔데.”

“저 바쁩니다.”

“밥만 먹어. 밥도 안 먹고 공부하진 않을 거 아냐.”

“…….”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라서, 아카아시는 허리에 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고민했다. 그리고 한참의 고민 끝에 아카아시는 손등으로 이마를 한 번 꾹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제 탓이니 특별히 추가금은 받지 않겠습니다. 저녁 먹으러 가죠.”

“…….”


보쿠토의 눈썹과 입술 끝이 동시에 꿈틀했지만 아카아시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보조석 문을 열었다. 그대로 앉으려고 했던 아카아시는 보조석을 차지하고 있는 꽃다발을 보았을 때야 보쿠토를 돌아보았다.


“이건 뭡니까?”

“뭐긴 뭐야. 너 주려고 가져왔지.”

“엊그제 만나고 처음으로 다시 보는데 꽃다발을 가져오셨다고요?”

“아 사귀는 사이엔 꽃도 주고 그런 거 아냐? 그냥 좀 조용히 받아주면 안 되냐?”

“…….”


보쿠토가 한숨인지 짜증인지 아니면 투정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팩 소리쳤다. 언성이 높아져 지나가던 사람이 돌아보기까지 했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곤 꽃다발을 챙겨들고 보조석에 앉았다. 보쿠토는 대꾸도 하지 않는 아카아시를 보고서 기가 막힌단 얼굴로 운전석에 앉았다.


“뭐 먹을 건데?”

“저한테 묻습니까?”


보쿠토가 유려하게 운전대 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러 와, 꽃도 줬지, 너도 조금은 일 하라고. 먹고 싶은 것 정도는 고를 수 있잖아.”

“빨리 먹을 수 있는 거요.”

“……오냐, 알았다.”


툭 튀어나온 아카아시의 대답에 입술을 한 번 악물었던 보쿠토가 씩 웃으며 차도 위에 자신의 자동차를 올렸다. 스포츠카는 미끄러지듯 차도를 가르며 나아갔고 아카아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꺽 메뉴를 말하지 않은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


“원래 예악 안 하면 못 들어오는 데지만 말이지. 먹고 싶은 거 맘껏 골라.”


보쿠토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의기양양하게 말했고 이번엔 아카아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서버가 그의 얇은 카디건과 전공서적들, 그리고 꽃다발까지 보관해주겠다며 가져갔다. 아카아시는 불이 붙어 일렁거리는 티라이트를 노려보았다. 


레스토랑의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에서 부드럽게 깨어진 빛이 흩어지며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아뮤즈 부쉬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리한 백합 조개에 와사비를 사용한 소스가 곁들여져 나왔다. 직원이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해주고 자리를 뜨자마자 보쿠토가 낼름 한 입에 털어넣었다. 


아카아시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빨리 먹을 수 있는 거라고 말 했잖습니까.”

“여기 요리 금방 금방 나와. 그보다 빨리 골라야 빨리 나오지 않겠냐?”


씩 올라간 보쿠토의 입꼬리가 전적으로 고의라는 걸 만천하에 밝히고 있다. 그가 턱짓으로 메뉴판을 가리켰다. 아카아시는 한숨을 푹 내쉬곤 자신 앞에 놓인 아주 작은 그릇을 바라보았다. 직원이 뭐라고 했더라, 아카아시가 고민하는 찰나에 보쿠토가 턱을 괴고서 말했다.


“백합. 맛있다니까, 여기. 얼른 먹어~!”

“재밌나보군요.”

“뚱한 얼굴 마주보고 있는 게 뭐가 재밌다고.”


아카아시는 밉살맞은 소리나 하는 고용주를 한 번 흘끗 보고서는 요리를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조금도 비리지 않은 바다 향이 감도는가 싶더니 곧 조개의 맛이 입안에 퍼졌다. 조개를 모두 넘겼을 땐 와사비의 상쾌한 매운맛이 입맛을 다시게 했다. 정말로 맛이 있었기 때문에 아카아시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리고 마주보고 있던 보쿠토가 턱을 괴고 있던 팔을 비끗했다.


“우, 우왓!”

“뭡니까. 불장난 합니까?”


아카아시가 미간을 모으고선 흐트러진 티라이트를 바로잡았다. 보쿠토가 부끄러운지 헛기침을 한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젓다가 적당히 요리를 골랐다. 


그와 동시에 아주 여유롭고 맛 좋은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


“집 어디랬지?”

“학교요.”

“엥?”


놀랄 만큼 느긋한 저녁식사가 끝나고, 자연히 아카아시를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했던 보쿠토는 양손에 핸들을 쥔 채 옆을 돌아보았다. 아카아시는 품에 차곡차곡 전공 서적을 쌓은 채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다.


“연구실 들어가 봐야 합니다. 학교로 가주세요.”

“해 다 졌는데?”

“해 뜰 때까지 해야 하는 수가 있으니까 빨리 좀 가주시죠.”

“쳇, 잘 먹어 놓고 말은…….”


보쿠토가 스틱에 손을 올리며 투덜거렸다. 아카아시는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쥔 채 빠르게 답장하기 시작했다. 보쿠토는 운전하면서 옆을 흘끗거리긴 했지만 특별히 무언가를 묻지는 않았다. 


아카아시는 저녁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져 늦는 것에 대해 연구실 선배들에게 메세지를 보내며 팔에 걸쳐 안다시피 한 꽃다발을 한 번 더 추슬렀다. 무릎에는 전공책을 삼단으로 쌓고 그 위에 꽃다발을 올린 채 메세지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향기가 있는 꽃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데 이 꽃다발에선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여기저기 다 연락을 마친 아카아시는 뻣뻣한 목을 한 번 주무르며 차창에 기댔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 위에는 자동차의 빛들이 별처럼 점멸하고 있었다.


“다음부터.”

“응?”

“또 이런 식으로 레스토랑 고르면 추가금 청구할 겁니다.”

“……뭐? 야! 내가 밥도 샀는데!”

“밥은 원래 사기로 돼있었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아니 그럼 네가 처음부터 똑바로 먹고 싶은 걸 정했으면 됐잖아!”

“제가 빨리 먹을 수 있는 거라고 말할 때는 요리 나오는 시간 포함 20분, 왕복시간 포함 40분 만에 먹을 수 있는 메뉴입니다.”

“아니, 얘가 사람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네?”

“그리고 일주일 스케쥴은 일주일 전에 말씀해 주시고요. 오늘처럼 갑자기 찾아오지 말고.”

“우리 만난 게 이틀 전인데 시간을 거슬러 스케쥴 잡아야 됩니까, 아카아시 님?”

“이번 주는 어쩔 수 없으니 다음 주 스케쥴부터 잡죠.”

“…….”


보쿠토는 핸들을 꽉 쥐고서 전방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누가 봤으면 신호등의 빨간불이 그의 대단한 원수라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말에 대답한 건 그의 차가 아카아시의 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을 때였다.


“저녁은 일주일에 세 번 같이 먹어. 월, 수, 금. 시간은 너 편할 때에 맞추고 토요일은 데이트다.”

“……데이트…….”


아카아시가 숨기지 않고 ‘우웩’하는 얼굴이었기에 보쿠토가 또 발끈했다.


“아 계약이 그거잖아!”

“그랬죠. 데이트는 어떤 데이트인가요.”

“……영화보고 저녁 먹고 헤어져.”

“네, 그렇게 하죠.”

“아? 정말?”


두 사람이 대화를 한 모든 시간 가운데에 아카아시가 순순히 대답한 건 처음이었기에 보쿠토가 눈까지 크게 뜨고서 그를 돌아보았다. 아카아시는 뭘 그렇게까지 반문 하냐는 뚱한 표정으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네. 문제될 거 없잖아요. 월수금 저녁, 토요일은 영화 추가.”

“그, 그래.”

“가보겠습니다, 그럼.”


아카아시는 그렇게 말하곤 안전벨트를 풀었다. 품에 전공책과 꽃다발을 추스르고 일어선다. 보쿠토는 핸들에 기댄 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차에서 내려 문을 닫기 위해 창문을 손에 쥐었던 아카아시가 문득 할 말이 떠올랐다는 듯이 살짝 안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응? 왜?”

“오늘 저녁 맛있었습니다.”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아카아시는 차 문을 닫고 등을 돌렸다. 해가 뜰 때까지 실험실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농담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