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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연애 혹은 결혼 보쿠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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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필요해.”


쿠로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저런 심각한 얼굴로도 얼마든지 터무니없는 사고를 친다는 걸 쿠로오는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사람.”

“후쿠오카 쪽에 작은 섬 기억나?”

“기억 나겠냐…….”

“아 있어, 우리 할머니 거.”

“그래 그렇겠지. 근데.”

“할머니가…….”


보쿠토는 말을 하면서도 실시간으로 좌절이 점점 깊어지는 얼굴이었다. 쿠로오는 무성의한 표정 그대로 음료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고 쭉 들이켰다. 


“할머니가 그 섬을 내 사촌한테 물려주겠대!”

“다른 섬 달라고 해.”

“그 섬은 특별하단 말야! 꼭 내가 가져야 한다고!”

“아-아아, ‘그 섬’……. 근데 무슨 사람이 필요해.”

“결혼할 사람 데려오면 축하 선물로 나한테 주겠대, 할머니가. 그 섬을.”

“…….”


쿠로오는 다시 한 번 빨대를 쭉 빨았다. 앞에 앉은 보쿠토는 쿠로오가 해결책을 손에 쥐고 있다는 양 간절한 얼굴이었다. 쿠로오는 커피를 내려놓고 지끈거리는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네 결혼 문제는 해결했지 않냐?”


해결을 했고 말고, 그 때의 난리를 생각하면 당연히 해결이 되었어야만 한다.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험악해지려는 표정을 다스리며 심호흡했다. 보쿠토는 그런 쿠로오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했지, 했는데.”

“그런데?”

“그래서 어머니 아버진 이제 손 놨는데 할머니 말론 내가 말한 바로 그 사람 데려오라고.”


보쿠토가 헤헷, 하고 웃었기 때문에 쿠로오는 자신의 손에 칼이 들려있지 않다는 사실에 잠시 속으로 감사 기도를 올렸다.


“넌 기억 안 나겠지만 그 도쿄 일보 회장 딸이 참 예뻤거든.”

“아 그랬어?”

“그리고 손도 매웠거든…….”

“아, 그랬지.”


보쿠토가 머쓱하게 웃더니 ‘그 때 고마웠다!’ 한 마디로 넘어가려 한다. 쿠로오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에 든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러지 않으면 그 도쿄 일보 회장의 영애와 같은 짓을 할 것 같아서였다. 


“이 개자식아, 사람이 대신 선보러 나가서 커피 뒤집어쓰고 뺨까지 맞아주고 와서는 다리 부러진 네놈 수발까지 다 들어줬더니 이제 와서 그게 아무짝에 소용이 없다고!”


하지만 결국 소리치고 말았다. 벌떡 일어나서 외치는 소리에 카페 안이 삽시간에 침묵에 잠겨들었다. 모두가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다. 보쿠토마저 깜짝 놀랐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쿠로오는 차마 더는 소리치지 못하고, 그 와중에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거듭 사죄의 뜻으로 고개를 꾸벅 꾸벅 숙여 보인 다음 다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쿠, 쿠로오……. 화났어?”

“너는 조용히 있어라, 지금 생각하고 있으니까.”

“넵.”


쿠로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침착하게 생각하려 애썼다. 


보쿠토의 연애결혼에 대한 열망은 단지 열망만이 아니었는데, 보통 그와 비슷한 이들이 어떠한지 비추어봤을 때 대단히 유별난 경우였다. 연애야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자유롭게들 하지만 대개는 그 이후에 격이 맞는 집안끼리 혼사를 맺기 마련이고 심지어는 아직도 매파를 보내는 고루한 전통을 고집하는 가문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보쿠토는 그 모든 것에 대하여 격렬히 거부했다. 본인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고 유년기부터 으름장을 놓았는데 집안 어른들이야 당연히 아직 철없는 도련님의 지나가는 말로 생각해 귀애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 으름장이 스물다섯 넘어서까지 지속됐을 때는 슬슬 애간장이 타기 시작하여, 거대 언론사 회장의 영애와 게눈 감추듯 맞선을 놓아주었던 것이다.


물론 보쿠토는 얌전히 그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어떻게든 수를 쥐어짜 그 선에는 쿠로오를 대신 보내고 자신은 자택 3층 그의 방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소동을 벌였다. 그걸 단순한 소동만으로 끝내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의사 표현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 같다며 정말로 뛰어내린 것이다.


그 사건은 보쿠토의 다리만 부러진 정도로 마무리되었지만 부모 입장에서야 대경실색하여 더는 강요할 수 없게 되었고, 보쿠토는 다리 하나면 싸게 먹혔다며 행복에 겨운 병실 생활을 보냈다. 거기서 기쁘지 않았던 건 보쿠토의 부모님과 그 언론사 회장의 영애에게 뺨맞고 커피 맞고 돌아온 쿠로오뿐이었다. 


그것으로 쿠로오는 보쿠토의 결혼 문제가 더 이상 수면 위로 올라올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줄곧 그랬었다…….


“아 그러게 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을 해, 이 멍청아! 처음부터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결혼한다고 했어야지!”

“그게 딱히 거짓말은 아닌…….”

“뭐가 아닌데? 아홉 살 때 만난 그 작은 꼬마 숙녀? 얼굴 못 본지 이제 20년 돼간다 야? 찾긴 했냐? 찾아보긴 했어?”

“아 쿠로오! 자꾸 삐딱하게 굴래!?”

“삐딱하게 구는 건 너야! 탈선한 기차는 너라고!”

“하여튼 그래서 빨리 아무나 데려가야 된단 말야아아!”

“너는 살인이 불법이라서 산 줄 알아라.”


쿠로오의 목소리가 정말로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보쿠토는 입술을 삐죽이며 턱을 괴었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치만 진짜 급한데…….”

“……너 좋다는 애들 많잖아. 아무나 데리고 가서 여자 친구 역할 좀 해달라고 하면 되지.”

“비밀 엄수가 핵심이라고. 그리고 진짜 결혼하는 거라고 착각하면 어떡하냐?”


보쿠토 본인의 것은 물론이고 그 가문의 재력을 생각하면, 가짜 결혼 계약 같은 걸 하자고 했다가 상대방이 미친 척 눈 딱 감고 진짜 결혼으로 밀어붙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막연한 불안만은 아니었다. 


쿠로오는 그런 보쿠토를 빤히 쳐다보다 혀를 찼다. 


“보수는 제대로 쳐줄 거냐?”

“응? 쿠로오 너는 안 되는데. 우리 부모님도 너 다 아니까 너랑 결혼하는 척 해봤, 앗, 악, 아야! 아파! 아파아파아파!”


보쿠토는 쿠로오에게 거나하게 등짝을 엊어 맞고는 눈물이 핑 고인 얼굴로 쭈그러들었다. 쿠로오는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고 손으로 부채질했다. 


“이 개자식이 진짜 미친……소리 작작 하고. 사람 구해다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보수는 비싸게 쳐줘라.”

“어? 진짜?”


눈물까지 맺혀있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쿠로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이쪽은 아카아시 케이지. 우리 과 후배였어! 아카아시, 이 개자……. 이 고용주는 보쿠토 코타로. 보쿠토, 인사 해.”

“…….”

“…….”


보쿠토는 뚱한 얼굴로 자신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옆에서 쿠로오는 산뜻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웃으며 두 사람을 소개해주고는 디저트를 고르러 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뭐야?’


쿠로오가 데려온 사람은 보쿠토 그의 예상과는 한참이나 다른 사람이었다. 막연히 어른에게 선보이기에 쓸 만한, 살갑고 애교 있는 인상의 사람을 소개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애교는 무슨 한 블록 밖에서도 냉풍이 불겠는데.’


얄팍한 턱선에 서늘한 눈매 하며, 생기기야 모자람 없기는 했으나 가만히 있기만 해도 찬바람이 쌩쌩 분다. 심지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마저도 무관심하기 짝이 없었다. 보쿠토는 자신을 저렇게 카페의 장식물 쳐다보듯 보는 사람을 살면서 오늘 처음 봤다.


“응? 뭐야? 인사 했어? 왜 낯가리고 그러냐, 보쿠토.”

“아니, 쿠로오. 야. 너…….”

“확실해. 이 형아 말 믿어라.”

“…….”


아카아시라는 이름의 남자가 볼 수 없는 각도에서 쿠로오가 보쿠토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둘 사이에 잠깐의 기류가 흐르고 마침내 보쿠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내가 아카아시한테 기본적인 것만 얘기 했으니까 지금부…….”

“야.”


쿠로오가 웃는 낯으로 ‘지금부턴 커피라도 한 잔 하면서 자세한 걸 얘기해보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부르는 게 빨랐다.


“내가 지금 사정이 사정이라 당장 사람이 급해서 어쩔 수 없는데.”

“보, 보쿠토?”

“너 진짜로 결혼해서 우리집 들어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알겠냐? 나랑 진짜로 연애하고~ 그런 거 생각도 하지 말고.”


당황한 쿠로오가 퍽 하고 보쿠토의 등을 내리쳤지만 그의 냉랭한 표정을 풀지는 못했다. 쿠로오는 급히 대상을 바꾸어 아카아시를 향해 ‘이 녀석이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닌데 너를 처음 봐서 낯을 가리나보다’하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아카아시의 말이 더 빨랐다.


“저도 사정이 급하지만 않았으면 이딴 알바는 안 합니다.”

“이, 이딴 알바? 야!”

“계약서 확인부터 하시죠.”


뭔가 서류철 같은 걸 들고 왔기에 공부만 한 샌님인가, 라고 무심결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서류가 그 서류가 아닌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쿠로오가 기껏 주문해온 디저트와 커피를 테이블 구석으로 밀어버리곤 서류철 안에 든 종이를 꺼내 올려놓았다. 탕 하는 소리가 나고 덩치 큰 남자 두 사람이 스스로도 모르게 움찔했다.


“일당은 xxxxx엔 이상입니다. 업무 외적인 연락은 일절 받지 않습니다. 스케쥴은 일주일 전에 미리 조정해주시고, 관계에 필요한 설정이 있다면 제시해주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허용하는 스킨쉽은 다른 사람이 앞에 있을 때 한정하여 손잡기 혹은 팔짱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추가금과 필요성 여부에 따라서 고려해보겠습니다. 계약 도중에 필요한 물품은 그쪽을 통해 일체 협력 받는다는 조건이며 모든 물품은 반납하지 않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