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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맞춘 옷은요?》

“그건 우리 부모님 만날 때 입었잖아!”


보쿠토는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핸들을 움직였다. 그의 얼굴에는 활기찬 웃음이 걸려있었다. 해바라기를 사람으로 빚으면 그의 얼굴을 할 거라고, 그의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 얼굴이었다. 


“새로 맞춰야지!”

《하아…….》


아카아시의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눈에 훤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미간을 꾹 누르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거나. 


《오늘이요?》

“응! 고르고 가봉하고 다 만드는 데 시간 좀 걸리니까.”

《그러네요, 약속이 다음 주니까.》


지금 표정도 알만하다.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굴리고 있을 것이다. 시간을 가늠할 때 아카아시가 짓곤 하는 얼굴이었다.


《그럼 일단 옷부터 맞추죠.》

“밥은?”

《지금 당장은 식욕이 없어서요. 보쿠토 씨 지금 어디죠?》

“어, 너희 학교 가는 길? 여기 사거리. 3층짜리 카페 있는 거기.”

《아……. 거의 다 오셨네요. 저 옷만 챙겨입고 정문 쪽에 나올게요.》


보쿠토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아시가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려왔다. 



*




‘입맛 없다더니.’


보쿠토는 핸들에 기대어 머쓱한 표정으로 옆자리에 앉은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아시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서 혼곤히 잠에 빠진 채였다. 옷을 맞추고 잠깐 차를 몰다가 신호가 걸린 틈을 타서 식사는 뭘로 하겠느냐고 물으려 했더니 고 사이 잠들어 버렸다. 


어쩐지 깨울 수가 없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가 없어서 아카아시의 학교 근처까지는 어떻게 도착했다. 오는 길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주위로 클랙슨 소리가 지나가기도 하고 과속방지턱에 걸려 덜컹하기도 했는데 아카아시는 눈을 꼭 감고서 세상 모르고서 잠에 빠졌다. 


‘어제가 시험이었으니까 피곤했을까? 어제 안 쉬었나? 하루 쉬어서는 안 되나?’


괜히 죄책감이 느껴졌다. 지난번에 맞춘 옷 입으면 안 되냐 하던 통화가 아른아른 귓가에 맺혔다. 피곤해서 못 나온다고 하면 됐을걸, 하고 속으로 투덜거려보지만 아카아시가 깨어있다 하더라도 보쿠토의 마음속 말을 읽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다. 그대로 들켰을지도.’


가끔 ‘당신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인다’는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는데 심장 철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쿠토는 입술을 한 번 삐죽했다. 하지만 봐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의 표정은 금방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돈은 어디에 필요한 거지?’


그가 아카아시에게 건네는 금액이, 보쿠토 본인에겐 아주 큰 돈이 아니지만 세간의 기준으론 상당한 액수였다. 당장 한 푼이 급하다기에는 아카아시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풀 하나 없이 제법 말끔한 차림새였고, 그렇다고 그에게서 받은 돈을 어딘가에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날 때마다 옷차림은 단정했지만 그 외의 것들은 변하는 게 없었다. 들고 있는 가방이나 신고 있는 스니커즈, 지갑 같은 것들이. 


딱히 유흥을 즐긴다고도 할 수 없다. 학교 공부가 얼마나 고된지 살이 죽죽 내리는 게 보일 지경인 데다가 그가 공부 외에 달리 쓰는 시간이 없다는 건 보쿠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 얘기를 좀 잘 해볼걸…….’


아카아시를 처음 만났을 때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심술을 부리고 대거리를 하느라, 지금 생각해보니 아카아시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전무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가 준 돈 어디에 쓸 거야?’라고 물어보는 것도 좀 그렇다. 아카아시가 가시 세운 고슴도치처럼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볼 것이 보지 않아도 훤했다. 


“……어디죠, 여기…….”


그 때 아카아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오후의 볕도 눈이 부신지 눈꺼풀을 가느다랗게 뜨고서 주위를 둘러본다. 보쿠토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곧게 세우고 대답했다.


“여기 그! 어디지! 그!”

“……학교 정문이네요. 몇 시입니까?”

“아! 그러니까 지금이!”

“오후 다섯 시네요…….”

“……으응…….”

“깨우지 그러셨어요.”


조금 비뚤게 기대어 잤는지, 아카아시가 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민망해하는 것도 같았다. 보쿠토는 왼쪽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차가 밀려서 방금 왔어.”

“샵에서 학교까지 두시간이나 걸렸다고요?”

“어, 으, 으응. 공사 해서 둘러왔어.”


아카아시는 조금 맑아진 정신으로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양손으로 핸들을 꽉 쥐고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생 거짓말은 못 하고 살 사람이란 말이지…….’

“……조금 시간이 이르긴 하지만 저녁 먹으러 갈까요?”

“입맛 없다지 않았어? 괜찮아?”


그리고 이 기막힌 순간에 보쿠토의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카아시의 눈길이 그의 복부 쪽으로 향한다. 보쿠토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 이거는! 소화가!”

“없던 입맛도 돌아오는 소리네요. 보쿠토 씨 먹고 싶은 걸로 먹으러 가죠.”


보쿠토가 양손을 허우적거리며 변명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아카아시의 웃는 얼굴 앞에서 무너졌다. 목까지 빨갛게 변한 보쿠토가 고개를 푹 숙이고 ‘가츠동이 먹고싶어…….’라고 중얼거렸다. 아카아시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



약속의 날, 아카아시는 자취하는 원룸 빌라의 1층에서 보쿠토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날이 완연히 추워져서인지 뺨을 스치는 공기가 매섭게 느껴졌다. 아카아시는 코트의 깃을 여몄다. 


오늘은 선물 같은 건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보쿠토가 신신당부하는 소리를 들었기에 아카아시도 맨손이었다. 아카아시는 하얗게 말라붙기 시작한 화단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대학가 근처에선 듣기 어려운 무게감 있는 엔진 소리도 그에겐 이제 낯이 익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앞에 멈춰선 차의 보조석 문이 열렸다. 보쿠토가 보조석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면 연락한댔잖아. 날씨도 추운데.”

“방금 나왔어요. 올 때 됐다 싶어서.”

“너 지금 하는 거 사실 보쿠토 코타로 말은 죽어도 안 듣기 석사 학위인 거 아니야?”


아카아시는 불시에 웃음이 터져서 꾹 눌러 참고는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보쿠토는 투덜거리느라 바빴다.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제대로 벨트를 매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 다시 페달을 밟았다. 


“드디어 아키오 그 자식한테서 내 유산 뺏어 오는구나!”


보쿠토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껏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아카아시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창에 턱을 괴고 옆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 사촌에게서는 별다른 일 없었습니까?”

“응. 얌전해~!”

“흠…….”

“왜?”

“좀 그래서요. 오늘 할머님 뵈면 모든 일이 끝나는데 얌전히 있었다는 게.”


보쿠토 씨가 원하는 거라면 얼마를 준다 해도 절대 팔지 않을 사람이라면서요? 아카아시가 염려를 담아 하는 말에도 보쿠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느라 바빴다. 


“뭐 지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그도 그렇습니다만…….”


이번 안건은 순전히 조모의 마음에 달린 일인데, 보쿠토의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는 손쉽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은 아닐 듯했다. 그녀의 조건이라는 것도 보쿠토가 결혼할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었으니 아키오가 아카아시 자신을 어떻게 한다 해도 보쿠토가 다른 사람을 또 데려오면 그만이었다. 


아카아시는 마음 한 켠에 걸리는 것을 밀어두고 긴장을 풀기 위해 손가락을 주물렀다. 보쿠토가 그것을 흘끗 바라보았다.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쳐다보았지만 보쿠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내젓기만 했다. 


주말이라 해도 저녁 무렵엔 도시에 차가 많았다. 중간중간 정체 구간을 지나고, 완연히 해가 저물어갈 무렵 두 사람은 보쿠토의 본가 저택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