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Logout Link+ Admin Write





지정한 날마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해야한다는 약속은 착실하게 이행되었다. 아카아시는 약속한 날은 항상 시간을 비웠고 특별히 바쁘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름대로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보쿠토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아카아시를 흘끗 쳐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릇하다는 인상은 있었는데 요 며칠 사이에 그가 왜 말랐는지도 알게 되었다. 


“살아는 있냐?”

“아마도요.”

“어떻게 직장인보다 더 바쁘냐?”

“대학생은 퇴근 시간이 없으니까요.”

“아니, 저기……. 나도 대학은 나왔거든…….”


내 대학 때랑은 다른 거 같아서 한 얘기라고 어물거렸지만 옆자리에 몸을 깊이 파묻은 아카아시는 그의 생각에 크게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보쿠토는 벨트 매라는 말만 하고는 조용히 핸들을 돌렸다. 


“돈은 뭐에 필요해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냐?”


아르바이트란 보쿠토의 연인인 척 행세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아카아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쿠토를 돌아보았다. 


“돈이 필요 없는 사람도 있습니까? 아, 돈이 너무 많으셔서 모른다거나…….”

“아 그 얘기가 아니고! 너 무슨 장학금도 받는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아셨는데요? 알바생도 백그라운드 체크합니까?”

“……. “


이렇게까지 한 마디도 지지 않을 일인가, 보쿠토는 괜히 심통맞은 얼굴이 되어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아카아시가 ‘진짜 체크 했어요?’하고 연거푸 물어본 통에 결국 입을 열어 대답했다.


“집에서 누구 만나는지 확인했나봐. 웬일로 사람 잘 골랐다고 덕분에 칭찬 들었어.”

“그 전엔 어떤 사람들 만나고 다녔길래…….”


아카아시가 눈까지 가늘게 뜨고서 그를 돌아보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말문이 막힌 보쿠토는 결국 내가 죽어도 입 여나 봐라 하는 얼굴로 입술만 꽉 깨물고 핸들을 잡았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데리고 향한 곳은 분위기가 제법 괜찮은 레스토랑이었다. 웨이터는 보쿠토의 얼굴을 알아보는 눈치다. 아카아시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웨이터가 채워준 물잔부터 손에 쥐었다.


“양식 좋아하시나봐요.”

“딱히 뭘 더 좋아하는 것 같진 않은데.”

“다섯 번인가 봤는데 다 양식만 먹었잖아요.”

“다른 거 먹고 싶으면 말로 하지 그래.”

“다음 번엔 밥으로 가죠.”

“진짜 말하네…….”


보쿠토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카아시는 미간을 모으고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말 하라면서요.”

“아 누가 뭐래. 요리나 주문해.”

“오늘의 코스로요.”

“…….”


주문을 고르는 데에 기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간결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보쿠토는 괜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표정으로 메뉴판을 펼쳤다. 하지만 평소 즐겨 먹던 메뉴도 오늘은 괜히 끌리지 않아서 결국 주문은 오늘의 요리 2인분이었다.


“뭡니까.”

“뭐가.”

“아무것도 아니면 말고요.”

“아니, 야, 너…….”

“말씀하세요.”


아카아시가 어느새 비운 물잔에 다시 물을 채우며 말했다. 들어는 주겠다는 투였다. 보쿠토는 손에 쥐고 있던 포크가 그만 휘어지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서 다시 펼쳐 내려놓느라 할 말을 깜빡하고 말았다.


“아니……. 아니다. 밥이나 먹자.”


할 말 없으면 말고요, 아카아시는 또 그렇게 대꾸하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하얀색 종이로 만든 것 같은 네모난 포였다. 가장자리를 가볍게 비틀어 뜯더니 안에 든 것을 입에 털어넣는다. 다 비운 포를 반으로 접어 테이블 구석에 내려놓고 물을 마시는 것까지 익숙한 동작이었다.


“너 약값 필요하냐?”

“…….”


아카아시가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보쿠토는 서둘러 양손을 내저었다.


“아니 내 말은 어디 아프거나 그러냐고. Drug, 그런 말이 아니라.”

“비타민B입니다. 영양제요. 신진대사를 돕고 암을 예방하죠.”

“아, 어. 그래…….”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이 아카아시에게 가면 다시 시위에 얹혀 되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보쿠토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렇게 박한 대우를 받아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뭐지 얜? 아니, 내가 문젠가?’

“……그쪽도 영양제 드셔야 할 나이 아닌가요, 이제?”

“이제? 이제까진 아니거든! 너랑 한 살 차이 나거든!”

“그러니까 드실 때 아닌가 해서요. 피로에는 밀크시슬도 좋습니다. 칼슘도 좀 드세요.”

“뼈는 튼튼하거든.”

“아, 예민하신 거 같길래.”


이 때는 정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 했는데 때마침 요리가 나와버리는 바람에, 보쿠토는 결국 다시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



“너 그 뭐냐…….”

“?”


디저트까지 말끔하게 끝을 낸 아카아시가 스푼을 내려놓으며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보쿠토가 조금 떨리는 눈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말할 수 있냐…….”

“제가 어떻게 말하는데요?”

“듣는 사람이 진흙으로 숨쉬는 기분이 들게.”


남들보다 풍족하게 누리며 자랐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남들보다 배로 여유있는 삶이었다는 것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아시와 있는 매분 매초가 그를 새삼스레 일깨워주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호화롭고 안락한 꽃밭을 거닐며 살았는지!


“연애는 곤란하다면서요?”

“어.”

“그래서 그런 건데, 왜요. 불편하세요? 살갑게 할까요.”


일이니까요, 고용주 말씀대로 하죠. 아카아시가 냅킨 끝자락으로 입매를 닦으며 대꾸했다. 


보쿠토는 그 말에 입술 끝을 악물었다. 아카아시의 말인즉슨 모든 게 그의 자업자득이란 뜻이었다. 평범한 경우였다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코웃음 치고 흘려들었을 얘기인데, ‘살갑게 할까요.’라는 한 마디에 흔들리고 말았다. 


‘입만 한 번 벙긋하면 저 클레이모어같은 성미를 죽일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에 더 자존심이 상한 보쿠토가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릴 때였다.


“코타로 군?”


보쿠토와 아카아시가 동시에 한 곳을 바라보았다. 테이블에 다가온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을 뗄 수 없이 호화로운 차림새인데 표정만은 천진난만하기까지 했다.


“어……리카.”

“요즘 바쁘다더니, 살 빠진 것 좀 봐. 이 쪽은 누구? 처음 뵙네요.”


천진난만한 소녀 같은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이 보쿠토의 옆에 서더니 그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누군가 언뜻 보고서는 여자친구가 아니라 아내 아니냐고 할 법한 동작이었다. 아카아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 없이 남은 음료만 말끔히 해치웠다. 그 표정에 보쿠토가 한 번 표정을 구겨뜨렸다 펴고는 여자의 팔을 풀었다.


“내가 결혼할 사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내가 결혼할 사람이라고. 만나서 반가웠다, 리카.”

“코, 코타로 군? 코타로 군! 잠시, 그게 무슨, 무슨 말이야! 그냥 애인이지? 잠깐 만나는 거지?”

“아니. 결혼할 거라니까. 케이지, 가자.”


여자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크게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다음에 또 보자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뜬다. 아카아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쳐다보았다. 


“대단하네요.”

“뭐, 뭐가.”

“잠깐 만나는 사이 정도는 용인해줄 의사가 있으셨나 본데요. 결혼만 그쪽하고 해주면.”

“누가 걔랑 결혼한대!? 난 너랑 해! 너랑! 일단은!”

“몇 명 더 있습니까?”


웨이터가 계산을 끝낸 카드를 다시 가져다주었을 때 아카아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레스토랑 밖으로 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승강기에 오르며 보쿠토가 미간을 모은 채 반문했다.


“뭐가 몇 명이야?”

“‘애인정도라면 괜찮다’라고 말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는 겁니다. 혹은 ‘인정 못해’ 뭐 그런 말을 할 사람도요. 저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싶네요.”

“야! 고용주 명령이다. 너 말, 그, 뭐냐, 그……그! 그래! 순하게 해! 순하게!”

“아, 그 제안은 취소입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아니겠네요.”

“뭐?! 야! 뭐가! 왜! 뭐가 문제야!”

“그래서 몇 명이나 더 있냐니까요.”


까닥하다간 뺨도 맞겠는데요. 아카아시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보쿠토는 정말로 목끝까지 반박할 말이 치솟아 올랐는데 그 모든게 왕창 엉켜버리는 기분에, 승강기가 지하까지 내려가는 내내 입만 버끔거리고 있어야 했다. 


“문 열어주세요.”


아카아시는 옆에서 보쿠토가 머리 뚜껑을 열 두번은 여닫고 있어도 개의치 않고서, 보쿠토의 자동차 보조석에서 차문을 가볍게 노크하며 그를 독촉했다. 자신에게 달려들 보쿠토의 전 애인들이 몇 명이나 되느냐보다 지금 당장 그가 안착할 자동차의 시트가 더 중요하다는 투였다. 


보쿠토는 하얗게 재가 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는 자동차 열쇠의 전자버튼을 눌렀다. 삐빅하는 전자음과 함께 잠금이 풀리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보쿠토는 레스토랑에서부터 아카아시의 학교로 다시 돌아가는 길 내내 아카아시에게 반박할 말을 쥐어짜냈지만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전혀 모르는 듯이 ‘밥 맛있었습니다.’라는 산뜻한 한 마디만 남기고서 차에서 내려섰다. 보쿠토가 붙잡을 새도 없이 바람처럼 날렵했다. 


“쿠로오 개자식…….”


연소되지 못한 단어들이 그의 가슴안에 갑갑히 쌓여가고, 보쿠토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이 인연을 주선한 당사자를 향해 분노를 불태웠다. 하지만 쿠로오가 그의 뇌리에서 다섯번쯤 불타 재가 되어도 학교로 향하는 아카아시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