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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시는 보쿠토와 조용히 시선을 마주했다. 보쿠토는 조모에게 매달려 장난치느라 바쁜 와중에도 아카아시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크게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확실히, 뭔가 방법이 없긴 하지만…….’


그가 나타난다 해서 어쩐단 말인가? 자신을 보고 숨 한번 쉬기도 전에 결혼식 얘기를 하는 조모의 마음을 어떻게 바꿀 수 있나? 하지만 아카아시는 무언가 계속해서 꺼림칙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은 자기 것을 지킬 때만큼이나 타인의 것을 파멸시키려 들 때 그 열의에 불을 지피는 법이다. 아카아시는 그것을 뼈도 채 굳기 전에 배웠다. 그리고 보쿠토가 원하는 것은, 그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천금을 주어도 팔지 않을 거라고 하는 그 아키오가 이 상황을 흘러가게 내버려 둘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정말 내버려 둘 거였다면 이렇게 제 양친까지 불러들여 판을 키우지도 않았을 테다. 그런데 정말, 자신과 보쿠토의 이 계약 결혼을 무슨 수로 무산시킬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방비할 도리가 없다는 불안감이 스물스물 아카아시의 내면을 파고들어 왔다. 


아키오까지 도착했다는 소리를 들은 조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막내아들 하루키가 곁에서 부축을 거들어주었다. 그렇게 네 사람이 거실로 나섰을 때, 바깥의 분위기는 보쿠토와 아카아시가 안방으로 들어오기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보쿠토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고용인들은 숨을 죽이고서 부엌쪽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어른들은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무슨 일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이 어색한 분위기의 주범은 당연하게도 아키오였다. 아키오만이 과장스러울 만큼 안타깝고 침중한 기색이다. 그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폴더?’


종이로 만든, 서류를 보관하는 폴더였다. 


“아키오! 무슨 일이더냐.”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기색에 조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키오는 조금 화가 난 것도 같았다. 조모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아키오가 뚜벅뚜벅 보폭이 큰 걸음으로 보쿠토에게 다가왔다. 순간 아카아시의 심장이 불안함으로 크게 뛰었다. 그리고 그것이 명확한 사고로 뻗어나가기도 전에 아키오가 보쿠토의 가슴팍에 그 폴더를 집어던졌다.


“코타로! 네가 아무리 할머님 유산을 탐을 내도 그렇지!” 


철썩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폴더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 안에 든 서류가 우수수 흩날린다. 그 위에 적힌 글자가 빠르게 읽혔을 때, 아카아시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계약서…!’


보쿠토와 자신의 일을 서류로 정리해둔,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작성했던 바로 그 계약서였다. 



*



“이게 다 무슨…….”


제일 먼저 그 서류를 집어든 사람은 아키오의 부친이었다. 경악이라기보다는 기가 막힌단 목소리로 그 서류를 읽어나가는 것을 보쿠토의 부친이 낚아챘다.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온다. 보쿠토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키오가 열에 뻗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약혼자를 사람을 고용해 대행시킨단 생각을 할 수가 있어! 그것도 할머님 유산이 달린 문제에서!”

“…….”


보쿠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문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키오를 노려봤을 뿐이었다. 


“코타로. 이게 무슨 일이냐.”

“아버지. 설명을…….”

“아키오의 말이 사실이냐? 이 계약서가 사실이야?”

“아키오가 그걸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실이란 말이구나.”


아카아시는 침묵을 선택했다.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보쿠토를 변호한다고? 어떻게? ‘문제’는 자기 스스로 답을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선 아카아시 자신이 바로 그 문제였다. 


“큰아버지도 속이고 막내 삼촌도 속이고 이젠 할머님도 속이려고 했어? 내 친구더라 돈 주고 샀냐고 곧장 물어보던 건 네가 그래서였구나!”


아키오의 목소리에서 주체하지 못한 화가 흘러나왔다. 아카아시는 등 뒤로 돌린 주먹을 세게 쥔 채 바닥에 흩어져있는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보쿠토가 작성해 한 부씩 나눠가진 저것이 어떻게 아키오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키오가 다시 언성을 높이려는데 조모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 손이 향한 곳은 보쿠토의 부친에게로였다. 부친은 숨이 막힌단 얼굴로 조모의 손에 계약서 뭉치를 넘겼다. 조모가 미간을 모으고 눈매를 가늘게 만든 채 계약서를 훑어보았다. 그걸로 용서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지 아키오가 다급히 나섰다. 


“할머님! 어떻…….”

“조용히 하거라, 아키오. ……코타로. 진정 이게 네 생각이었느냐?”

“…….”

“대답을 해!”


머리가 눈처럼 새하얗게 물든, 작은 체구의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박력이었다. 조모를 부축하고 있던 하루키가 작은 목소리로 ‘어머니.’하고 불렀다. 하지만 막내아들의 만류로도 조모의 화는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할머니, 나는…….”

“이 못난 놈! 내가 짝을 찾아오랬더니 그걸 돈을 주고 사? 그 돈이 누구 돈이냐! 네가 번 것이 한 푼이라도 들어 있는 돈이야!? 내가! 내가 벌고! 네 어미 아비가 손가락 한 번 못 펴면서 잠 못자면서 번 돈 아니냐!”

“…….”


아키오를 향해서는 살기넘치는 눈빛을 할 수 있었던 보쿠토였으나 조모를 보고서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윽고 조모의 눈길은 보쿠토 곁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카아시에게로 향했다.


“너도!”

“…….”

“이 철없는 것이 돈을 줄테니 하자 한다고 이런 일을 덜컥 맡았단 말이냐? 생각이 있는 게야 없는 게야! 어찌 돈에 긍지와 명예를 다 갖다 팔아!”


아카아시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조모의 호통아래에서 그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이……. 꼴도 보기 싫다!”


노모가 버럭 소리치고는 저택을 나섰다. 하루키가 다급히 따라붙어 부축한다. 그런 노모의 뒤로 그녀의 아들들이 서둘러 다가갔다. 그건 보쿠토도 마찬가지였지만 매섭게 가로막는 아키오의 걸음에 막혀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보쿠토의 모친이 조용히 아카아시에게 눈짓했다. 이만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아카아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한 뒤 소리 없이 보쿠토의 본가를 나섰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바라보았지만 두 사람은 대화할 수 없었다. 보쿠토의 부친이 곧장 보쿠토를 데리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



고급 주택가 안쪽까지 들어오는 차라고는 전부 자가용뿐이었던지라 아카아시가 대로변까지 나가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도착했을 때, 아카아시는 자취방에 기대어 앉아 탄식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보쿠토 조모의 외침이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어찌 돈에 긍지와 명예를 다 갖다 파느냐고? 하지만 돈이 없는 긍지와 명예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힘없는 긍지는 그에게 가족을 찾아주지도 않았고 힘없는 명예가 그의 앞날을 보장해주지도 않았다. 오로지 돈이 바로 그 힘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대꾸할 수 없었다. 그녀가 보쿠토의 친애하는 조모여서도 아니었고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서도 아니라,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이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금전이 급했어도, 아무리 막대한 보수가 주어진다고 해도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됐는데. 돈을 벌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편히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가만히 침대에 기대어 침잠해가던 아카아시는 눈을 감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과 좋은 결말이 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자각이 각성제와 환각제가 오락가락하듯 그의 신경을 괴롭혔다. 계약서 같은 걸 쓸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수습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아카아시는 문득 눈을 떴다. 


아키오가 가져온 그 계약서, 적당히 꾸며낸 가짜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들을 곁눈질로 봤을 때 그 서류는 모두 진짜였다. 자신에게 한 부, 보쿠토에게 한 부뿐인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아키오의 손에……. 


아카아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계약서는 보쿠토에게 한 부, 아카아시 자신에게 한 부 있다. 세상에 단 두 부뿐인 것. 그러니까 그건 자신의 것 아니면 보쿠토의 것이라는 말이었다. 


‘서명이 왼쪽에 있는 건 누가 가져간 계약서였지?’


아카아시는 다급한 동작으로 자취방 책상의 책꽂이를 뒤졌다. 책이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지고 수업에 사용한 유인물과 프린트가 흩어지며 날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카아시는 그 계약서를 보관했던 폴더를 찾아냈다. 


“하…….”


양손으로 펼친 폴더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