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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갤러리 아닙니까?”

“막내 삼촌이 예술을 좋아해.”

“어쩐지…….”


아카아시는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오전부터 보쿠토에게 끌려다니며 맞춘 스타일이었다. 세미정장에 타이는 없이, 가볍지만 격식은 챙긴 차림새에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으나 설마하니 갤러리로 가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저 집안에서 집 한채 외의 유산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모친 생전에 표출하는 기질을 생각해보면 보통 사람은 아니었을 것을 알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클럽이 나았나?”

“아뇨. 그런 덴 가본 적도 없어서요. 차라리 갤러리가 낫죠.”

“…가본 적이 없어?”

“네. 보쿠토 씨는 자주 가보셨나 봐요.”

“아, 아니! 나는! 나는! 그 뭐냐! 친구! 아! 쿠로오 따라서!”

“갈 수도 있죠…….”


그렇게까지 변명할 일 아닌데요, 아카아시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오히려 그 덤덤함 때문에 보쿠토는 더 변명을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보쿠토의 열화와 같은 자기변호는 그 열렬하게 매달리는 모습에 아카아시가 질겁을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 코타로~! 왔냐!”


두 사람이 그렇게 입구에서 한참 투닥거릴 때 안쪽에서부터 누군가가 달려 나왔다. 아카아시는 남자를 보자마자 보쿠토가 말한 그 ‘막내 삼촌’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보쿠토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가진 듯한 황금색 눈동자,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편견에 딱 들어맞는 고상한 그늘이 진 눈매, 훤칠한 키에 마릇한 몸까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삼촌!”


이 파티에 참석한다고 얘기한 자리에서도 그가 있었다고 하니 바로 며칠 전에도 얼굴을 본 사이일 텐데도 나이 차이 얼마 나지 않는 조카를 몹시 반가워하는 얼굴에는 애정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었기에 갤러리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걸어가고 있었다. 둘을 보고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보쿠토의 막내 삼촌은 그들에게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고는 보쿠토와 아카아시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형이상학적인 현대 미술 작품들로 조화롭게 채워져, 은은한 불빛을 받으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샴페인이나 간단한 간식거리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오가며 그림에 대해 간단한 감평을 남기는 소리가 속살속살 들려왔다. 


“그래서 이쪽이……우리 코타로의, 드디어 마침내 피앙세이신가.”

“처음 뵙겠습니다.”


‘드디어 마침내’라는 수식어까지 줄줄이 붙다니 그간에 보쿠토가 어땠는지 알만도 했다. 아카아시가 슬쩍 쳐다보는 눈길에 보쿠토가 황급히 손을 내젓다가 헛기침했다. 


“커흐흠. 삼촌, 이쪽은 아카아시 케이지. 아카아시, 이쪽은 우리 막내 삼촌, 하루키 삼촌.”

“흐응……. 피앙세라면서 아직까지 ‘아카아시’라고 부르네? 응?”


보쿠토의 막내 삼촌, 하루키가 짓궂은 표정으로 놀리듯이 말했다. 보쿠토가 뜨끔한 표정을 짓지만 않았다면 그럴싸하게 완성되었을지도 모른다. 보쿠토의 표정을 보고 하루키가 의아한 얼굴을 하는 사이에 아카아시가 날렵하게 보쿠토의 손을 깍찌 껴 붙잡았다. 


“제가 많이 매달려서, 저만 자꾸 코타로라고 부르네요.”

“그, 그게 아니라.”

“오호…….”


하루키는 잔뜩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손가락을 꽉 힘주어 쥐었다. 겨우 사태 수습에 동참한 보쿠토가 크게 헛기침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화제를 돌렸다. 


“그, 그래서. 삼촌 마음에 들어? 우리 아카…케이지?”

“왜 우리 장손이 갑자기 내 눈치를 보는 척을 하실까?”

“보는 척이 아니라 나는 항상 신경 썼잖아!”

“무슨 소리람? 이 삼촌이 하는 말은 전부 귓등으로 듣고 흘렸잖냐.”

“아 삼촌!”


아카아시는 놀라움을 속으로 잘 갈무리 하며 둘의 만담같은 대화를 지켜보았다. 보쿠토가 은근히 애교와 응석이 많은 성미라는 걸 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이 하루키 앞에서는 그 어리광의 정도가 남달랐다. 막내 숙부와 첫 조카이니 나이 차이도 그다지 나지 않아 형처럼 생각하며 자란 내막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이 녀석아. 사람을 앞에 모셔두고 그런 걸 물어보면 못 쓴다.”

“아 맘에 들면 그냥 든다고 말하면 되잖아! 나쁜 말도 아닌데!”

“나쁜 말이든 좋은 말이든 사람 평가하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좋은 말도 못 해?”

“어허, 요 녀석이.”


아카아시는 무대 위의 희극이라도 보는 것처럼 담백한 얼굴로 두 사람의 대치를 쳐다보았다. 


‘좋은 말이 아니니까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기서 좋은 말이면 못할 게 뭐가 있냐고 계속 밀어붙이는 보쿠토의 담대함도 보통이 아니다. 오늘 저 막내 숙부에게서 자신의 애인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를 반드시 듣고 말 작정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뭐 하지만 그래, 굳이 말을 하자면.”


하루키가 지긋이 웃었다. 아카아시는 자기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는 느낌에 눈을 깜박였다. 하루키가 가볍게 아카아시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장손 잘 좀 부탁드립니다. 아카아시 씨. 이 녀석이 성격이 급해서 벌써 부모님 인사시키고 난리인데 아카아시 씨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그냥 뻥 차버리세요.”

“아 삼촌! 왜 그런 말을 해!”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아니 그리고 삼촌은 아카아시 뭘 봤다고 벌써 날 부탁한다고 하냐!?”

“요 녀석이 좋은 말 해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보쿠토가 아차 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를 한 번 흘끗 바라보았다가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뻥 차버리는 일은 없겠지만요.”

“아니 근데 삼촌이 누구한테 그런 말 한 적 없었잖아!”

“좋은 분 데려왔으면 좋은 말 하는 거지. 네 말대로 좋은 말도 못 할 거야 있겠냐?”

“아카아시 얼마나 봤다고!?”

“척 보면 알지 얌마.”


하루키가 보쿠토의 콧잔등을 한 번 튕기고는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좋은 시간 보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러면서 아카아시 그를 지긋이 한 번 바라보고는 더 방해하지 않겠다고 자리를 뜨는 것이다. 아카아시는 까닭 모를 묵직함을 느끼며 눈인사했다.


“허…….”

“안으로 들어가서 뭐라도 좀 마시죠.”

“허어…….”


보쿠토는 실로 신묘하다는 얼굴로 아카아시를 뜯어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짧은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보쿠토가 원하는 대화를 끝내기 전에는 다른 일을 하지 못할 거란 걸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왜요. 또 뭐가 그렇게 신기하십니까.”

“삼촌이 뭐 좋은 소리 하는 거 처음 봐. 만난 지 10분도 안 됐잖아? 네 어딜 보고 좋다고 한 거야?”

“지금 굉장히 실례인 말 마구잡이로 하고 있는 건 알죠?”

“신기하네…….”

“보쿠토 씨가 면전에서 좋은 말 하라고 몰아세우고 여긴 갤러리인데 어지간해선 좋은 말해주시죠.”

“우리 삼촌은 안 그래.”

“그러신가요. 제가 정말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어디가!?”

“…….”


이걸 한 대 때려, 말아? 아카아시는 기가 막힌단 얼굴로 보쿠토를 쳐다보았다. 보쿠토는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뜯어보기에 바쁘다. 아카아시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자신의 이마를 꾹 누를 때 보쿠토가 깨달았다는 얼굴로 자신의 손을 짝하고 마주쳤다.


“얼굴인가?”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들어가죠. 목 마릅니다.”

“무슨 말만 하면 헛소리래. 네에, 네에~!”


선생님 말씀은 제가 잘 들어야겠죠! 보쿠토가 소년처럼 혀를 에베베하고는 기꺼이 샴페인 두 잔을 집어 들고 그에게 왔다. 아카아시도 결국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이 고상한 파티는 대부분이 아카아시의 예상 안에서 굴러갔다. 중간쯤에 보쿠토의 사촌이 나타났고 보쿠토의 속을 득득 긁고 나갔으며 거기에 보쿠토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응했다. 그네들의 막내 숙부의 중재가 없었으면 또 무슨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카아시가 보쿠토와 함께 갤러리의 절반쯤 둘러보았을 때야, 아카아시는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어~! 아카아시?”


어색한 연기가 그를 보고 놀란 척하는 것뿐이라는 게 훤히 드러나는 얼굴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아카아시가 자신도 모르게 옆사람의 손을 꽉 쥐었다. 보쿠토가 흘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대꾸하지 못했다. 보쿠토가 슬쩍 고개를 기울여 그에게 속삭였다.


“너희 실험실 그 새끼가 왜 여기 있어?”

“그걸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나는 안 불렀다?”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사이에 나미카와가 웃는 낯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손에 있는 샴페인 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